
순교자 백홍준 장로 ( 白 鴻 俊 , 1848 ~ 1893 )
백홍준은 1848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진취적인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에 중국땅 우장에서 영국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인 로스(Ross)와 멕킨타이어(Mcintyre)목사를 만남으로 3년 동안 그들에게 과학을 배우고 대신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가르치던 중 그들을 통하여 성령의 뜨거운 감화를 받아 그와 함께 한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와 신앙을 고백하고 한국 개신교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로스 목사 지도하에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2년 후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쪽복음서가 문광서원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서'라는 표제를 달고 신약전서가 출간되었으니 최초의 성서인 로쓰번역본이다. 1882년 간행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가지고 서간도 한인촌을 찾아가 전도하여 로쓰목사와 앱스터목사를 통해 75명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 그리하여 1883년에는 로쓰목사로부터 전도인이란 공식직함을 수여받았다.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성직수여였다. 백홍준은 성경을 풀어 노끈을 꼬아 폐지더미를 묶어서 국경을 넘어 고향 의주에 돌아와 노끈을 다시 풀어 다시 제책을 해서 의주, 강계, 위원, 구성, 삭주 등을 다니며 반 년이 가기 전 10명의 신자를 얻어 그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는 일명 의주교회로서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라는 소래교회보다 1년 앞서 만들어졌다. 1887년 백홍준조사는 언더우드가 그의 사랑방에서 새문안교회를 세울 때 서상륜과 함께 한국교회 최초장로로 안수(서상륜, 백홍준) 받았다. 언더우드가 의주에 왔을 때 그에게 세례받기를 원하는 자가 1백 명에 달하는 것을 보고 언더우드는 인도자 백홍준장로를 보며 "당신은 한국교구를 위해 하늘에서 파송 받은 천사요"하고 감격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요리문답에 33명이 합격하였고 국법으로 금교함으로 배를 빌려 타고 압록강 건너 만주 땅 안주에서 1889년 4월 27일 세례를 베풀었다. 이 사건은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고 불리고 있다. 백장로는 한석진, 김이련, 양전백, 김진근 등을 잘 교육하여 목사로 키워 한국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로 배출했다. 백장로는 만주 봉천을 왕래하며 로쓰목사와 연락을 취했고 1890년에 로쓰목사가 의주로 나와서 그의 집에 유하면서 한 달 이상 백장로의 인도로 의주와 강계지방을 순회전도하였다. 백장로를 길잡이로 하여 여러 서양인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면서 관리들은 그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다. 그러던 차에 1892년 평안감사 민병석은 백장로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죄목은 금교를 전한다는 것이었다. 백장로는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칼을 쓰고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몸이 쇠약해져 1893년 옥중에서 45세에 순교하였다. 백홍준장로는 이로써 한국기독교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출처-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

한국어 교사 백홍준, 성서 번역인! (출처- 예수제자선교회)

백홍준 장로

백홍준 서상륜 최명오

존 로스 목사(좌)와 최초의 한글 번역 성경 (출처 : 미주뉴스앤조이(https://www.newsnjoy.us)

죤 로스역;누가복음(문광서원,1882)/예수셩교젼서(문광서원 1887) (출처- 예수제자선교회)

예수셩교젼셔,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J.Ross), 매켄타이어(J.Macintyre) 공역
1887년 만주 봉천(奉天)에서 출판된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이다. 번역 주관자가 로스(J.Ross)였기 때문에 일명 '로스역성경'(Ross Version)이라 한다. 이 번역작업에 참여한 한국인 개종자들은 초기 기독교 신앙공동체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 성서는 중국어 음역표기에서 벗어나 서구식에 가깝게 정리되어 용어사적인 공로가 크다. 절 표시가 되어 있으나, 대두법 표기는 없어졌으며, 신의 명칭은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짙은 평안도 사투리가 많은 특징이 있다. 이 신약전서는 국내에서 신약전서가 발간되는 1900년까지 한국교회에서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예수성교전서, 1887년 만주에서 출판된 최초의 한글판 신약전서(복제본)


*출처: 옥성득(한글 성서 번역 14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움 자료집, 대한 성서공회, 2022년, p22.)
(출처- 예수제자선교회)

로스 저서, "만주선교 방법론" 번역 출판(2019)과 "누가복음"(1882년 판)-(출판: 순교자의 소리, 2019, 2022)
(출처- 예수제자선교회)


로스의 첫 한글번역 "예수셩교 누가복음"(1882년 3월)에는 "하느님"과 "하나님"을 병기하며 표기하였다. 로스 역본 "누가복음"은 순교자의 소리에서 1882년 판본 글대로를 현대식으로 출판하였다.(순교자의 소리, 2022년 출판) 박형신(남서울대 교수)은 서울의 철자법에 따라 "요한복음"(1883년 10월)에서는 신명(神名)을 "하느님" 대신에 "하나님"으로 개정하였다고 했다.(존 로스 한글 성경 번역 140주년 기념 자료집(p79) 첫 한글 성서 "예수셩교젼서"(1887년)에는 "하나님"으로 통일하였다. 당시 철자법 표준화에는 아래 아자 표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옥성득 교수(UCLA)는 "하느님과 하나님" 표기는 동일한 한글 표기라 지적하였다. 하늘에 계신 하늘님이란 뜻이다. 한글 언어 학자들도 "하느님/하나님" 표기를 혼용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옥성득, 한글 성서 번역 14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움 자료집, 대한 성서공회, 2022년. pp18f) 천주교와 기독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하며, 천주교의 "상제"(上帝), "천주"(天主)와 기독교의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합의 통일하여 공동성서 번역을 이루었다.(1977년 부활절) 다섯째 존 로스본 한글 성서라 하지만 실제로는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등의 한국인들의 번역이란 점이다. 존 로스 역 성서란 번역의 책임자란 점이다. 실제적인 한글 성서번역 인들은 한국인들이었다. 의주 상인 이응찬은 1883년 9월에 콜레라로 별세하여 의주인 백홍준이 성서번역을 이었다.

요한복음, 1882년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 매킨타이어 공역
1872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J. Ross)가 만주 관문인 영구(영구)에 도착해서 만주 선교를 시작하였고 1년 후에는 매제가 되는 매킨타이어(J. McIntyre) 선교사가 합류했다. 로스 목사는 1874년, 1876년 두 차례 봉황성 아래 고려문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 그곳에서 장사하던 한국인을 처음 만났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고 만나는 의주 출신 상인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는 한 편, 이응찬을 비롯하여 최성균 · 김진기 · 이성하 등을 영구로 불러 들여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한문 성경이 국내에 전파되었다. 의주에 살던 백홍준이 성경을 읽고 3년 동안 탐구한 후 개종을 결심하고 1879년 3월 압록강을 건너 영구로 갔다.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한 로스 대신 그를 맞은) 매킨타이어 목사는 처음 보는 사람이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자 "함께 지내보고 진짜 교인이면 주겠다." 하였다. 백홍준은 3개월 동안 영구에 머물면서 의주 출신 성경 번역자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였고 마침내 그 해 6월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3년 동안 성경을 번역하던 이응찬도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한국인 최초 개신교 세례이다. 1881년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로스 목사는 봉천(지금 심양)으로 옮겨 동관교회를 설립하는 한 편, 교회 구내에 성경 번역소 및 인쇄소를 차리고 한글로 된 문서를 찍어냈다. 즉 1881년 세례 문답과 전도용 문서인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을 인쇄하였고 이듬해엔 최초 한글 성경인 <예수성교 누가복음서>와 <예수성교 요한복음>을 인쇄하였다. 그 후 계속 쪽복음을 인쇄하였고 1887년 이르러 신약 전체를 번역하여 <예수성교전서>란 이름으로 출판했다. 이렇게 인쇄된 한글 성경은 백홍준 · 서상륜 등 매서인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전달되었고, 거기서 남쪽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처럼 한글 성경이 인쇄되어 나오자 성경을 읽고 복음을 받아들인 개종자들이 사방에서 나와 이들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조직되었다. 국내에서는 의주에 교회가 처음 설립되었고, 거기서 구성을 거쳐 선천, 평양으로 복음이 퍼져 나갔으며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를 통해 황해도 소래(松川)와 서울에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만주 땅에 압록강을 따라 형성되었던 한인촌에서도 그런 신앙공동체가 조직되었다. 그 중에도 로스 목사를 도와 성경 교정과 인쇄 일을 맡아 보았던 김청송의 전도로 1898년 설립된 집안현 이양자(裡楊子)교회가 유명하였다. 임오군란(1882년) 때 피난 온 한국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이양자 산골짜기에 교회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압록강 연변 20여 개 한인촌 마을마다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만주에서 세례교인이 생겨났고, 말로 번역된 성경을 읽은 개종자들이 생겨나 선교사들이 들어와 세례를 베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를 두고 언더우드는 "우리는 씨를 뿌리러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결실을 얻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전파한 결과 '성경 중심적' 교회의 역사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

누가복음, 1882년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 매킨타이어 공역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로 한국개신교 최초의 성서이다. 1878년 서상륜에 의해 처음 번역된 이래 몇번의 수정을 거쳐 1882년 발간되었다. 장과 절 표시가 없고 띄어쓰기가 생략되어 있으며, '예수' 앞에서 띄어쓰기를 하는 대두법(擡頭法)을 사용하였다. 신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51페이지 분량의 작은 성서이나 한국기독교사에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된 것보다 훨씬 오래갈 기념비”로 평가된다. 만주에서 출판된 한국 개신교 최초의 한글 성서이다.

제자행적(사도행전), 1883년 한문 성서를 대본으로 번역한 초기 한글성서,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 매킨타이어 공역
1882년 발행된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이어 세번째로 발행된 한글성서이다. 이 제자행적은 《누가복음》을 수정하여 《사도행전》과 함께 묶은 합본성서이다. '예수' 앞에서 띄어쓰는 대두법을 사용하였고 신(神)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장·절 표시가 없으며 지명이나 인명을 원문 그대로 표기하려고 노력하였다.

*백홍준 전도인이 개척 설립한 "의주교회"(설립 1866년, 사진:1907년)
(출처- 예수제자선교회)

*서상륜/서경조가 설립한 황해도 소래교회(송천, 1883년 5월 16일)
(출처- 예수제자선교회)
<새문안교회> 1887.10.2. 서상륜, 백홍준 장로 안수

현 새문안교회 (출처- 새문안교회 - 나무위키)
새문안교회는 1887년 9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와 함께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하며 한국에 개신교 복음을 처음 전한 인물 중 하나였다. 언더우드는 입국 2년 후인 1887년 9월 27일, 한국인 세례교인 14명과 함께 교회의 조직을 갖추고 2인을 장로(서상륜, 백홍준)로 세워 당회를 구성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로서 새문안교회를 창립하였다. 당회의 조직은 장로교회 전통의 대의제적 구조를 도입한 것으로, 이는 한국 사회에서 근대 민주주의적 제도가 실질적으로 적용된 초기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후 새문안교회는 신앙 규율을 엄격히 관리하며 교인 생활을 지도했으며, 1910년 당회록에는 첩을 들이거나 무속행위를 한 신도들을 제명한 기록도 남아 있다. 설립 초기부터 여성의 역할에도 주목하였다. 언더우드는 1888년 여성 신도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창덕’, ‘석은’, ‘영은’ 등의 이름을 부여하며 교회 내 지도력으로 양성하였다. 여성 조사와 권서를 통해 적극적인 전도 활동을 독려하였으며, 여성 성경 공부 모임도 활발히 운영되었다. 이 과정에서 언더우드의 아내인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의 헌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 외에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교대학[경신학교/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주도하고, 한글 연구와 성경 번역에도 참여하는 등 한국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191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초대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1916년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새문안교회 앞에는 1927년 장로교단 통합기념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세운 ‘박사원두우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는 언더우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자 장로교회의 통합 전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로서도 의미가 있다.

새문안교회 내부 (출처- 새문안교회)

새문안교회 내부 (출처- 새문안교회)


서상륜(徐相崙)
서상륜은 의주 출신으로 1878년 중국영구(營口)에 장사차 나갔다가 열병에 걸려 죽을뻔 하였으나, 맥킨타이어(J.Mclntyre)목사의 도움으로 살아나 예수를 믿게 되었다. 1882년 로스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로스와 함께 한글성서 번역에 참여하여 1882년 최초의 쪽 복음서인 누가복음을 번역, 출판하여 국내에 반입, 서울과 황해도 소래 일대에서 국내에 외국인 선교사가 입국하기전 자립적 전도사업과 권서활동을 한 한국최초의 전도자이자 권서인이었다.

로스(John Ross, 1842-1915)
스코트랜드 연합장로교 선교사로 중국 만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서상륜 백홍준 등과 최초로 한글성서를 번역 출판한 그는 새문안교회 창립일에 참석하는 등 새문안교회와 한국 기독교선교에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교회연혁) (출처- 새문안교회)
| 1885. | 4. | 5 | 언더우드 목사 입국, 한국선교 시작 | |
| 7. | 2 | 서울 정동에서 주일예배 시작 | ||
| 1886. | 5. | 11 | 고아원 개설, 영신학교(경신학원, 연세대 전신)로 발전 | |
| 1887. | 9. | 27 | 언더우드 목사, 서상륜 등 한국인 14인과 함께 새문안교회 창립(위치: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 자택) | |
| 10. | 2 | 한국인 2인 장로 안수 (서상륜, 백홍준) | ||
| 1888. | 10. | 최초로 여성교인 4인에게 세례 집례 | ||
| 1889. | 언더우드 목사 한영사전, 한영문법 출판 | |||
| 1891. | 9. | 주일학교 시작, 당시 교인 100명, 학생 43명 | ||
| 1893. | 곤당골에 교회 개척(현 승동교회) 남대문전도소 개설 | |||
| 1894. | 연못골에 교회 개척(현 연동교회) | |||
| 1895. | 한국인 교인헌금(1천5백91냥)으로 경희궁 맞은 편에 4칸 한옥 구입, 새 예배당 건축 |
< 존 로스(John Ross, 중국 이름: 나요한(羅約翰), 1842년 ~ 1915년)>

존 로스 목사 (1842년- 1915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는 스코틀랜드 서북쪽의 작은 항구인 라리키(Rarichie)에서 1842년 8월 9일 당시 인정받던 전문직 양복업자인 휴·로스와 캐더린 서더런스의 8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인 로스는 스스로 가문에 믿음의 뿌리를 전승해야 한다면서 많은 직종의 직업이 있었지만 목사의 길을 가기고 마음먹고는 그 길로 에딘버러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글래스고 대학교와 에든버러의 신학교에서 수학을 한 뒤, 누가 동아시아의 그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을 가진다. 이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의 총무인 맥길 박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4년째 되는 해인 1872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해외선교부의 중국 선교사로 당시 만주라고 불리던 중국의 동북부로 파송되었다. 1872년 2월 27일 스코틀랜드 장로회 인버네스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스튜어트(Strapp McFadyen, ~1930)와 결혼을 한 후였다. 로스 신혼부부는 잉커우시에 처음 발을 딛은 후, 그해 8월 23일에 상해에 도착한다. 처음에는 영구에서 사역을 하다가 선양으로 사역지를 옮겨 1889년 동관문 교회를 설립하였다. 의화단의 난 이후에 새로 지어진 교회는 문화혁명 때에도 파괴되지 않고 지금도 개신교 교회당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로스는 한국에서 온 무역상인들을 만나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로 결정하였다. 로스 목사는 한국인 이응찬, 김진기, 서상륜, 백홍준 등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였는데, 1882년에 완성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중국에 있던 영국 성서공회를 통해 각 3,000부를 출판하여 만주 및 한국에 배포하였다. 신약성서 전권은 1887년 완역된 후 인쇄되어 한국으로 들여보내졌다. 1892년 그는 한국에서 온 제임스 게일을 만났다. 1910년 스코틀랜드로 귀향한 후에도 스코틀랜드-중국 협회를 돕는 일을 계속 하였다.
존 로스는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신약성서를 번역하여 1887년 《예수성교전서》를 간행하였다. 일반적으로 로스역 성경이라 함은 1882년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 1883년 《예수셩교셩셔 누가복음 데자행젹》과 《예수셩교셩셔 요한복음》, 1884년 《예수셩교셩셔 마태복음》과 《예수셩교셩셔 말코복음》, 1885년 《예수셩교셩셔 요한복음 어비쇼셔신》, 1887년 《예수셩교젼셔》 총 8권의 한글성경을 일컫는다. 존 로스는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선교사들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해야 하며, 한글로 쓰인 성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존 로스가 태어나고 자란 스코틀랜드의 시골 마을에서는 영어가 아닌 게일어를 썼기 때문에 로스는 학교에 입학해서야 정식으로 영어를 배웠다. 따라서 그에게는 영어를 배우는 일이 외국어를 배우는 일과 같게 느껴졌다. 이처럼 어린 시절에 외국어를 습득하는 경험을 한 로스에게 한국어나 중국어와 같은 생소한 언어를 공부하는 일은 남들보다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로스는 한글이 어떤 가치와 잠재력을 갖고 있는지 잘 알았다. 그는 한국의 알파벳은 30분만에 충분히 습득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단순하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또한 로스는 그와 함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 속해 있던 윌리엄슨 목사가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는 소식과, 토마스 목사가 선교를 하는 중에 대동강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한국 선교 열의에 감동하여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다.
로스는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선 산둥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떠났다. 그 후 1874년 10월에 한국과의 접촉을 위해 처음으로 고려문에 가게 된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시기로, 조선과 청나라가 교류할 수 있는 통로는 고려문이 유일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고려문 여행을 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이 첫 번째 고려문 여행에서 로스는 조선 상인들과 접촉할 수는 있었지만 상인들은 돈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 로스의 설교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로스가 크게 실망하여 있던중에 그에게 흥미가 생긴 상인 한 명이 찾아왔다. 로스는 그 상인에게 한문 성경과 소책자 한 권을 주고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갔다. 로스가 두 번째 고려문 여행을 떠난 것은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한국의 문호개방이 실행된 후인 1876년 4월 초에서 5월 초이다. 1875년, 로스는 고려문에 가서 의주 청년들을 만나 그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본격적으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로스가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은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한국어 습득과 한국어 문법책을 만드는 시기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로서 로스는 성경을 한글로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먼저 한글을 공부한후 한국어 문법책을 만들었다. 2기는 본격적으로 한문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로스는 1879년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 전까지 약 2년의 기간 동안, 1852년에 번역된 한문문리성경을 대본으로 하여 마태복음에서 로마서까지 번역했다. 3기는 로스가 안식년 휴가를 떠난 동안 우장의 매킨타이어의 주도 하에 번역이 이루어진 시기로, 약 2년의 기간이다. 4기에는 신약성서가 완역되어 《예수셩교젼셔》가 완성되었다.
(번역방법)
(한글학습서편찬)
이응찬의 도움으로 한국어를 배운 로스가 1877년에 한국어 학습서인 《Corean Primer》(한국어 첫걸음)을 펴냈다. 로스는 1876년 4월경에 고려문으로 여행을 했는데 이때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신약성서 번역을 도와줄 이를 물색했다. 이때 만난 한국어 선생 이응찬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운후 1877년에 이응찬과 함께 한국어 학습 교재(Corean Primer)을 만들었다. 이 책은 한글을 배우고자 하는 외국인에게, 특히 선교사들에게 한국말과 글을 소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간행되었는데, 한글 밑에 로마자로 발음기호를 표기하였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를 최초로 도입하였는데 이는 영어의 띄어쓰기가 자연스레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책에서 그는 “한글은 소리글자로 이루어져 자모만 배우면 누구나 읽고 배울 수 있는 글자”라며 한글의 우수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로스의 한국어 선생인 이응찬이 평안도 의주 출신이기 때문에 평안도 사투리로 쓰여져 있다는 것이다.
(출처- 존 로스 (선교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추가)
중국 선교사였던 존 로스 목사는 의주 청년들의 도움으로 1882년 한글성경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성교 요한복음젼서’을 완성했다. 이후 1887년 8권의 신약선경 번역이 완료되어 한국으로 전달되었는데, 이 성경이 최초의 한국어 성경이다. 존 로스 목사는 1900년 은퇴하여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돌어와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 대한 책을 저술했으며, 1915년 사망해 에딘버러에 묻혔다.
(출처 : 미주뉴스앤조이(https://www.newsnjoy.us)

존 로스 목사(좌)와 최초의 한글 번역 성경 (출처 : 미주뉴스앤조이(https://www.newsnjoy.us)

죤 로스역;누가복음(문광서원,1882)/예수셩교젼서(문광서원 1887) (출처- 예수제자선교회)

*출처: 옥성득(한글 성서 번역 14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움 자료집, 대한 성서공회, 2022년, p22.)
(출처- 예수제자선교회)

로스 저서, "만주선교 방법론" 번역 출판(2019)과 "누가복음"(1882년 판)-(출판: 순교자의 소리, 2019, 2022)
(출처- 예수제자선교회)

*선교사 죤 로스목사와 가족(1880년대)/고려문 방문로-출처:김정현(J.H. Grayson),"한국의 첫 선교사", 계명대,1982. pp324) (출처- 예수제자선교회)

*고려문(Corea Gate, 柵門) (출처- 예수제자선교회)

*심양의 동관교회(1876, 로스목사 시무) (출처- 예수제자선교회)

현, 심양의 동관교회(증축 1988년) (출처- 예수제자선교회)

에딘버러 뉴톤교회 전경(사진:교회 홈페이지 갈무리)
최초의 한글 번역 성경을 출판한 존 로스 목사(1842-1915)를 파송한 교회가 한국 목회자에 의해 다시 문을 열게 됐다. 일반인에게 매각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 출신의 선교사의 노력으로 이뤄진 결과이다. 존 로스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했지만 일반인에게 매각되기도 했던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뉴톤교회가 2025. 4월 2일 오후 7시 재헌당식을 갖었다. 뉴톤교회는 1882년 중국 심양에서 최초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한글로 번역한 존 로스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로 알려져 있다. 뉴톤교회는 출석교인이 없어 건물이 일반인에게 매각되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예장통합 출신의 박준수 목사(Dr. David Junsoo Park)가 매입해 재헌당을 할 수 있게 됐다. (출처 : 미주뉴스앤조이(https://www.newsnjoy.us)

<존 맥킨타이어 목사((John Macintyre, 1837-1905)>

왼쪽 상단 존 로스 선교사, 가운데 상단 매킨타이어 선교사, 왼쪽 하단 서상륜, 가운데 하단 예수성교전서, 오른쪽 소래교회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맥킨타이어는 1837년 7월 18일 스코틀랜드, 록 로먼드(Lock Romand) 지방 러스(Luss) 태생이다. 그는 에딘버러 연합장로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865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871년에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한편 존 로스 목사는 1872년 8월 23일, 중국 지푸에 도착했다. 로스는 그해에 그의 아내가 첫 아기를 낳다가 사망하여 갓난아기의 양육을 위해 여동생 캐더린을 고향에서 데려왔다. 이때까지 미혼 총각이었던 맥킨타이어는 로스의 누이동생 캐더린과 결혼했다. 1873년 제1차 전도여행길에 오른 맥킨타이어와 로스는 한만국경 압록강 상류 임강(臨江) 유역 이양자(裡陽子) 마을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여러 모로 한국 입국 계획을 세우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겁먹고 응하는 사람이 없어서 국법이 엄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념하지 않고 다음해(1874년) 봄에 중국인 서기를 데리고 제2차 전도여행길에 올라 고려문에 이르렀다. 한국인들이 서양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을 눈치챈 이들은 중국인 서기를 시켜 한국인을 자기 숙소로 데려오게 했다. 중국인 서기는 며칠 거리를 헤맨 끝에 한국 청년 이응찬을 만나 맥킨타이어와 로스의 어학선생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이응찬은 친구들의 눈이 무서워 귓속말로 응락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는 친구들이 여관에서 코를 골며 깊이 잠든 사이에 서편을 향해 떠난다는 짧은 글을 남겨놓고 여관을 빠져나와 맥킨타이어가 묵고 있던 여관을 찾아갔으며, 그 이튿날 그들을 따라 우장으로 갔다.
이응찬은 맥킨타이어의 어학선생이 된 뒤 1876년에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과 함께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서상륜의 친구들, 의주의 네 청년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가 만주로 건너간 지 여러 해가 지났으나 소식이 끊어져서 가족과 친척들은 모두 깊은 근심에 잠겨 있었다. 서상륜은 친구들의 행방을 찾을 겸 늘 마음에 그리던 바깥 세상의 새 문화를 접하기 위해, 청운의 뜻을 품고 동네어른의 기대와 환송을 받으며 한약 행상의 봇짐을 등에 지고 광막한 만주 벌판을 향해 떠났다. 여러 날 후에 그는 영구(營口)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서상륜은 친구들이 나라에서 금지하는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을 보고 겁에 질렸다. 그는 오지 말아야 할 곳을 왔다는 듯이 꽁무니를 빼면서 하루라도 빨리 그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그날로 심한 열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다. 병세가 날로 악화되어 나중에는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때 친구들의 주선으로 영국 선교사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는데, 맥킨타이어 목사가 날마다 병원에 찾아와 지극한 정성으로 서상륜을 간호했다. 밤이고 낮이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돌보고 위로해 주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 서상륜은 병이 나으면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했으며, 의사의 정성어린 치료끝에 그의 병은 완쾌되었다. 그는 약속대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1879년 봄 어느날,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한국어 성경 번역
이때 누가 먼저 한글 성경번역을 제창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맥킨타이어는 세례 받은 한국인 초신자들과 함께 한글 성경번역과 출판사업을 밀고 나갔다. 기독교에 몸 바치기로 결심한 서상륜은 네 친구들과 같이 성경을 번역하는 일, 특히 성경 출판을 위해 목활자(木活字)를 파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는 목활자를 파는 각인(刻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인쇄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의 재정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1881년 인쇄기를 상해에서 구입하여 봉천에다 설치하였고, 한국인 번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무활자는 일본에 보내어 4만여 자의 연활자(鉛活字)로 바꾸어 그해 우장을 거쳐 봉천으로 이송되었으며, 중국인 인쇄공과 한국인 식자공 김청송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최초의 한글 성경이 출판되었다. “1879년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보고에 따르면 누가복음은 1878년까지 로스 목사와 이응찬, 김진기, 백홍준 등의 공역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해에 로스 목사는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게 되어, 맥킨타이어 목사가 그 업무를 맡아 한국인 번역자들과 같이 다시 구구절절 재수정을 하였다. 맥킨타이어 목사는 한글성서번역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한글성서번역은 성경반에서 진행되었는데, 먼저 한국인 번역자들이 나와 함께 한문성경을 읽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나는 다시 헬라어 원문과 대조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헬라어 원문에 가깝게 하였다.’... 1879년 영국으로부터 돌아온 로스 목사는 맥킨타이어 목사가 수정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일일이 재검토하여 최종 원고를 작성했다.” 존 로스 역 한국어성경[Ross Version]의 원본은 중국어성경을 비롯하여 헬라어성경과 두 가지의 영어성경[King James Version, English Revised]의 네 가지였으며, 엄밀히 말해 이 성경은 두 선교사와 여섯 명의 한국인 초신자들의 공동번역이지만, 성경 반포의 공헌으로 말한다면 서상륜 역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1882년 누가복음의 뒤를 이어 요안내(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7년에 이르러 <예수셩교젼서>라는 이름의 신약전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맥킨타이어는 1879년에 <한국언어론(Notes on the Corean Language)>을 썼고, 1880년에는 <한국의 역사, 상태, 관습(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이란 책을 런던에서 간행했다. 맥킨타이어 목사는 1905년 지푸에서 별세했다.
(출처- 맥킨타이어 목사((John Macintyre, 1837-1905) < 선교사열전 < 선교 < 기사본문 - 크리스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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