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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최봉석(최권능) 목사

성지순례/순교자

by baesungsoo 2026. 1. 2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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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봉 석 ( 崔 鳳 奭 , 1869.1.7. ~ 1944,4.15. 순교, 최권능 목사)

 

최봉석은 1869년 1월 7일 평양에서 부친 최준서(崔俊瑞)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평양의 강동현 미곡창장으로 재직했다. 최봉석은 16세까지 구학문을 익히다가 1885년 평양감영의 통인으로 발탁이 되어 공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공직수행 중 국고손실로 귀양을 가있는 사이에 아내의 산후조리의원이었던 상주교회 배유계(白留溪)영수를 찾았을 때에 전도를 받았다. 잠시 평양 본가로 돌아왔다가 감리교 노불(W. A. Noble)선교사가 건네준 쪽복음서를 받았다. 쪽복음서를 탐독하던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벼락에 맞아죽는 꿈을 꾼 후 최봉석은 성령의 역사로 중생의 체험하게 되었다. 이후 최봉석은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며, 평양 시내에서 최봉석의 전도를 듣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아내와 처가에서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를 만류하였지만 결국 두 아들을 하나씩 맡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이혼의 아픔에도 굴하지 않고 더욱 예수에 미쳐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었다. 1904년에는 삭주교회 집사가 되었으며, 이듬해는 삭주교회 영수가 되었다. <삭주교회> 삭주교회의 설립자 백유계(白留溪)는 유지였고, 한의사였다. 병 고치러 오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시작한 것이 결국, 1896년 교회를 세우기까지 발전했다. 백유계를 전도한 이는 그의 고종사촌 동생인 양전백이었다. 양전백은 1895년 마펫 선교사로부터 24세 때 세례를 받은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초신자였다. 그가 고종사촌 형에게 전도해서 삭주읍교회가 서게 된 것이었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 1896년에 분명히 이 사실이 기록되었다. 백유계는 양전백에게 전도를 받은 후에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서적을 잔뜩 사서 지고 갔다고 했다. 그래서 이웃들에게 전파했는데 남녀 다수의 신도가 생겼다. 다음 해 1897년 기와집 일곱 칸을 사고 초가 여섯 칸을 더 사서 교회를 세웠다. 1902년 최봉석이 세례를 받을 무렵에는 의주가 가장 복음이 많이 들어온 곳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예수를 믿은 백홍준, 이응찬 등도 의주 청년이었다. 그리고 백홍준은 한국 최초의 전도사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최초 설립자인 서상륜도 의주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7인 목사 중 양전백 목사도 의주 사람이었다. 마펫 선교사가 양전백에게, 양전백이 백유계에게, 백유계가 삭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최봉석에게 복음을 전했다. (삭주교회 글 출처- [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최봉석  목사 ② | 한국장로신문 )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경로였다. 이때 최봉석은 양전백(梁甸伯)의 추천으로 성경 매서인(賣書人)이 되어 김상준과 함께 벽동 강계 후장 초산 창성 구성 등 평북 산악지역은 물론이고 압록강 건너 만주 통화현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전도하여 4년간 30여 교회를 세웠다. 1907년 최봉석의 나이 38세에 벽동교회 조사(1907년- 1914년 최봉석 목사 시무)가 되었다. 최조사의 목회는 그 성격만큼이나 고집스러웠다. 교인들의 담뱃대를 모아 꺾어버리고, 첩 있는 사람은 원입을 못하게 했고 성수주일 못하면 세례를 불허하고 한 달 결석이면 책벌, 우상제물 금지, 불신영혼 엄금 등 엄격하였다. 평양신학교를 7년 다닌 이후 졸업하였다. 1913년 만주 파송 전도목사로 14년간 만주에서 고독, 굶주림, 모진 배척과 싸우며 전도에 전념해 28개 교회를 개척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14년 만에 평양에 돌아왔을 때 최목사가 외치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소리는 평양의 새벽을 깨웠다. 이로 인해 최목사는 불신자들은 물론 신자들로부터도 미친 사람이라고 조롱당하거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최목사의 언행은 언제나 반듯했고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1938년 신사참배결의에 반대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세 가지 죄목 ‘1) 항일사상 선동 국체물란, 2) 일본천황 무시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자, 3) 선교사를 통한 미국비밀공작원’으로 몰려 두 차례에 걸쳐 1939년 5월 15일부터 70세에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40일 금식을 마치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자신을 병원으로 옮겨가는 인력거꾼에까지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쳤다. 그러나 이미 최봉석목사의 눈동자는 풀어져 있었고 병원에서 5일간 버티다가 1944년 4월 15일 오후 1시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오라하신다"며 찬송 289장(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 후)을 가족들과 함께 부르고 75세에 순교하였다.  (출처-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

(추가)

1. 그에게 따라다니는 몇몇 유명한 일화들이 있다. 하루는 그가 장터에서 전도를 하다가 방탕한 시절의 옛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최권능을 보고 놀려댔다. 자리에 앉히고는 술을 권하고, 마시지 않으니까 입을 벌려서 억지로라도 마시게 하려고 했다. 그래도 마시지 않자 한 친구가 그의 얼굴에다 술잔을 부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들은 이제 큰 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아는 한 최봉석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 친구 오늘 장례 치르는 날이겠구먼!”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최권능은 자기 옷을 털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태연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친구가 하도 신기해서 “괜찮으냐, 어떻게 그렇게 참고 넘어가느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최권능은 “이전의 최봉석이는 다 죽었어.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전도하는 최권능이야”라고 했다는 것이다.
2. 또 하루는 평양의 백동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있었다. 그때 한 일본군 연대장이 시장터를 지나가고 있었다. 최권능은 그 일본군 연대장을 향해서 큰 소리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며 전도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찼든지 연대장의 말이 깜짝 놀라는 바람에 말에 탔던 연대장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연대장은 최권능을 일본군 주재소로 끌고 가 온갖 매질을 하며 심문했다.
그런데 최권능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위축당하지 않고 일본 군인이 내리칠 때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고 외쳤다. 세게 때리면 때릴수록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소리도 그에 따라 커졌다. 그러자 일본 군인은 최권능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조롱하듯이 “당신은 건들기만 하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냐” 하고 물었다. 이에 최권능은 “내 속에는 예수님 밖에 들어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건들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일본 군인들은 그를 그대로 풀어주었다.
3. 또 한번은 최권능이 평안도 구성에서 전도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들어가 전도한 뒤 그 옆집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이 전도한 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곧 김씨의 아들이 찾아와 그를 향해서 아버지를 죽인 자라고 욕하면서 잡아가 자기 집에 가두었다. 이때 그는 오히려 그 아들에게 “네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내가 기도해서 아버지를 살려 줄 터이니 예수를 믿겠느냐?”고 묻자, 그 아들은 “믿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최 목사는 곧 죽은 그 김씨를 붙잡고 땀을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결과 그 가족과 이웃들이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4. 최권능은 오직 예수의 사람이었다. 예수의 영으로 충만했던 그의 삶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기생집에도 들어가서 전도하고, 남의 부엌에서도 전도하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목사와 장로들에게도 전도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신자다”라고 하면 그는 “당신이 신자면 왜 내게 전도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무섭게 책망할 정도로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원초적이고 순수한 신앙으로 전도에 헌신했던” 한국교회사 속의 위대한 ‘전도대장’이었고, 예수 복음의 맛을 깊이 알았던 진짜 예수꾼이었다. 일신(一身)의 안일과 명예보다 주님의 명예가 더욱 소중함을 깨달았던 예수의 충복(忠僕)이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그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일제에 잡혀가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변치 않았다. 오히려 고문의 강도가 혹독하면 할수록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예수천당”의 외침소리도 더욱 커졌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로 가득 차 있어서 예수 밖에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예수가 내 입에서 튀어 나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병보석으로 풀려난 자신을 병원으로 옮겨가는 인력거꾼에까지도 “예수천당”을 외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옥에서 나온 지 나흘만인 1944년 4월 15일에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부디 승리하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는 예수 의식에 철저한 삶을 담아냈던 것이다.

(출처- 최봉석(崔鳳奭, 1869-1944) 목사 / 최권능목사 - 불낙지교회 / 불신자(不信者), 낙심한 자(落心者), 지체자(머뭇거리는 자)(遲滯者)를 주님 앞으로)

 최봉석(권능)목사

 

<벽동읍교회> 1907- 1914년 최봉석 목사 시무

 

평안북도 벽동군 벽동면 이동에 소재한 벽동읍교회는 삼산노회 소속이다. 현재는 자강도 우시군 우시읍에 소재하고 있다. 1903년 4월, 김서면 김태윤 안태흠 등 3인의 교인에 의해 창설됐으며 김병관의 대지 헌납으로 성전을 건축했다. 1915년 이가은 장로가 장립하면서 당회가 조직돼, 김태형 권익섭 김병관 황기준 정응린 등의 장로가 시무했다. 또한 교역자로는 김민철 김석황 한득룡 김영하 최봉석 등의 목회자가 시무했으며, 산하 기관으로 신명학교를 운영했다. 총신학장을 역임한 박형룡목사가 이 교회의 출신이다.
( 남북한선교통일위원회 제공) 한국기독공보)

 

<최권능 목사 순교기념비>

최봉석 목사 순교기념비 (양지 총회신학교 내 소래교회 마당)

방치되었다 다시 세운 순교기념비

 

최봉석 목사 순교기념비 (양지 총회신학교 내 소래교회 마당)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에 가면 총신대 양지 캠퍼스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소래교회가 복원되어 있고 그 소래교회 마당에는 최 권능 목사님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최 권능 목사의 본명은 최 봉석이며 1869년 1월 7일 평양에서 출생하여 7살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6살 때 평양감사 비서와 감찰의 직으로 근무하는 중 횡령으로 몰려 평북 삭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울분 속에서 술에 취해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1896년에 삭주에 교회가 설립되어 예수를 믿게 된 백유계라는 한의사를 통하여 전도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던 34살 때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불에 맞아 죽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때부터 불같은 열심이 일어나고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전도는 간단하고 단순했습니다. ‘예수 천당’이라고 소리를 지른 다음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미 삭주교회(1905년)에 영수가 되어 전도와 목회사역을 열심히 하여 크게 교회가 부흥하였습니다. 압록강 주변으로 여러 교회를 세웠으며 1907년에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하면서도 밤에는 기도하고 낮에는 평양거리를 다니면서 전도하는 일에 노력했습니다. 신학교 시험 치르는 날이면 공부를 하지 않아 백지를 내는 일이 허다하였습니다. 그는 농담가운데, “시험에는 성령님도 쩔쩔 매는구먼!”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4년이면 졸업해야하는데, 7년이 지나도 졸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그는 학교를 찾아왔습니다. “교수님들에게 아뢸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교수님들 먼저 저와 함께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같이 부족한 죄인을 불러서 예수 믿게 하시고 또 신학교에 와서 공부하게 하시고 또 목사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공부만 잘해야 목사가 됩니까? 하나님의 종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해야 하는데 저는 기도하고 전도 하느라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들이 나에게 졸업장을 주어 나도 목사 될 수 있도록 길을 열러 주옵소서. 주실 줄 믿고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를 했기 때문에 교수들은 모두 덩달아 아멘 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최전도사는 마펫 교장에게 졸업장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교장은 “안 됩니다. 1년을 더 공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최전도사는 “교장님과 교수님들이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합니까? 조금 전에 저의 기도에 모두 아멘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어기면 어떻게 합니까?” 교장과 교수들은 할 수 없이 졸업장을 주기로 했습니다. 전무후무한 낙제의 기록을 세운 최 봉석 신학생이 이렇게 해서 졸업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낙제한 신학생이 졸업한 스토리는 평양신학교 역사에 미담으로 길이 남아있습니다. 낙제생이었던 최전도사가 졸업이후에 더욱 열정적으로 만주 등을 돌며 죽음의 고비 등 숱한 고난과 싸우며 복음 전도하여 28개 교회를 세웠습니다. 한 번은 먹을 것이 없어 소똥에 들어 있는 콩알을 꺼내어 먹으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소똥에서 익은 콩이 나왔습니다. 이제는 힘이 났으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에 데려다 주시옵소서.” 12년 동안 만주 압록강 전도활동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온 최 목사는 평양복음화를 위해 새벽부터 ‘예수천당’으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평양시내의 모든 상가들은 최목사의 새벽을 깨우는 ‘예수천당’소리를 들으면서 가게문을 열고 결국 그 사람들이 모두 평양의 대 부흥의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최 봉석 목사의 ‘예수 천당’소리가 멈추는 날 한국의 예루살렘인 평양이 망한다.”고 말하며 최목사를 격려하며 돌보아주었다고 합니다. 최 목사는 일본의 신사 참배를 앞장서서 반대하다가 1939년 평양 경찰서에 끌려가서 극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예수 천당, 예수 천당’ 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주 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신 지 4일 후였습니다. 주 기철 목사님은 4월 21일 최 권능 목사님은 4월 25일 순교하셨습니다. 평양의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치던 두 개의 큰 별이 4일 간격으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최 목사의 생애는 '예수 천당'이 전부였습니다. '예수 천당'의 외침은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하늘의 빛이었고 시대적 아픔 속에 신사참배에 굴복한 수많은 교역자와 신자들의 가슴에 꽂는 양심의 비수였습니다. 그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지식을 애써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성능이 좋은 자칭 ‘예수 탄’을 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해서 무식한 바보가 되었지만 그분만큼 예수를 많이 드러낸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70여 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출처- 평양을 깨운 `예수천당` 최봉석 목사 - 기독신앙인물 - ☆ 만나와 메추라기☆ )

< 윌리암 아서 노블(1866-1945) 선교사

윌리암 아서 노블 선교사(노보을, 1866~1945)

윌리암 아서 노블 선교사(노보을, 1866~1945)는 42년간 한국에서 사역하며 아펜젤러 사후 북 감리회를 이끌었다.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특히 행정 실력을 갖춘 지역 감리사로서 활동하며, 서울, 평양, 경기도 등 여러 지방을 관할하며 한국 감리회 성장을 견인하였다. ​ 그는 186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스프링데일에서 태어나서 1889년 와이오밍 신학교와 1892년 드류 신학교를 졸업하고, 와이오밍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10월 갓 결혼한 부인 메티와 함께 북 감리회 선교사로 입국하였다. 한국 선교 동기는 그의 친구인 제임스 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도착 후 배재학당에서 3년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서대문 밖에 애오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894년 친구 제임스 홀이 평양에서 순교하자 후임으로 평양 선교회로 발령받아 평양과 북쪽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평양 남산현 교회를 건축하고, 강서군, 삼학군, 진남포 지역을 순회 전도하며 교회와 학교를 개척하였는데, 이때 진남포 삼숭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 평양에서는 노블 선교사가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형제를 권면하여 은혜를 입은 자가 많아 칭송하는 자가 많았고,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02년부터 서울 및 경기 지역 감리사로 발령받아 활동하였다. 당시 이 지역을 맡았던 아펜젤러의 순교로 인해 노블 선교사가 그 역할을 이어받은 것이다. 감리사는 지역 교회를 순회하며 한편으로는 교회를 감독하고 또 한편으로는 성도의 교육 및 설교를 하는 일이었다.  이때 오산 감리교회(1905년)를 설립하였고, 광천 감리교회도 설립하였다. 1908년부터 3년 간은 서울 및 평양 등 핵심 지역을 모두 관할하여 감리회 소속 전국 교회의 70%를 관할하는 감리사로 활동하였다. 그래서 그는 1909년 거주하던 평양에서 서울로 이동하였다. 이후 그는 수원 지방 감리사를 세 번(1917~22, 1928, 1932~1934) 역임하면서 수원, 오산 등 경기도 남부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다. 특히 1930년 남북 감리회가 통합한 후 그는 감리회의 대표 감리사로 활동하였다. 문서 선교도 활발히 참여하여 코리아 레포지털과 코리아 리뷰에 많은 논문을 기고하였으며, 소설 <이브, 한국의 이야기>를 저술하였다. 1902년 아펜젤러의 순직으로 공석이 된 성서 번역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일본군의 박해를 받기도 했는데, 스코필드 박사와 함께 3.1 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는 1933년 42년간의 선교활동을 마감하고 일선에서 은퇴한 후 1년간 서울에 머물다가 1934년 11월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송별예배를 참석한 후 귀국하였다. 그 후 미국에 머물다가 1945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 스톡튼에서 별세하였다. 부인 메티 노블 선교사(1872~1934)도 한국 여성 선교에 큰 공을 남겼다. 20살에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와서 42년간 헌신하였다. 내한 초기에는 배재학당에서 서양 음악을 가르쳤고, 이후 1896년 평양에서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여자아이 몇 명을 모아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북한 최초 여성 초등 교육기관인 정진학교이다. 이 학교는 1899년 중등과정인 정의 여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녀는 주일학교 운동에도 기여하였다. 1900년 평양 남산현 교회에 시범반을 설치하고, 교사를 양성하였다. 주일학교는 1903년 선교 공의회 내 <주일학교 위원회>가 설립되고 유년 주일학교가 시작되어 1911년부터 크게 활성화되었다. 다수의 책을 편찬하였는데, <어머니에 대한 강도, 1916>, <자모권면, 1921>, <승리의 생활, 1927> 등이 있다. <승리의 생활>은 한국 최초 교회 전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녀의 일기가 <메티 노블, 조선 회상> 혹은 <매티 노블, 1892~1934> 제목으로 책이 편찬되었다. 이 책에는 1892~1934년 사이의 한국의 풍습, 사회상, 선교 이야기, 목격담이 실려 있다. 삼일오 해방 운동, 일본인의 거만한 행동,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이 소개되어 역사의 자료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노블 부부의 에피소드가 있다. 1912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타이타닉호를 탈 뻔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른 배를 탄 것이다. 당초 런던에서 미국으로 이동하기 위해 수요일 타이타닉호를 타는 것으로 예약되었으나, 일행 중 한 명이 분실된 가방을 찾기 위해 토요일로 배편을 연기한 것이다. 하나님은 노블 부부를 사용하시기 위해 타이타닉호의 희생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다른 배를 타게 하신 것이다. 당시 미국의 지인들은 타이타닉호의 사고로 인해 노블 가족이 모두 희생된 것으로 알고 슬픔에 차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다. 영아의 어린 두 아들이 이질 병으로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다. 자녀를 잃은 슬픔은 그녀의 일기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들 두 자녀는 평양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힘든 고난을 겪은 노블 부부의 선교는 2대로 연결되었다. 슬하에 딸 둘과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서울에서 태어난 맏딸 루스 노블 (1894~1986)은 1918년 헨리 도지 아펜젤러(1대 아펜젤러 선교사의 장남)와 결혼하고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녀도 부모의 선교 활동을 이어받아 한국에서 40여 년 동안 여성 선교에 힘썼다. 마지막에 정동 게스트하우스 관장으로 일한 후 1986년 11월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군산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에는 <아펜젤러 전시관> 외 별도로 <노블 전시관>을 마련하여 노블 선교사의 유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끝  (출처-https://brunch.co.kr/@37142dd4d64f415/6 

노블 선교사와 그의 아내 메티 노블의 “노블일지 1892-1934: 미 여선교사가 목격한 한국 근대사 42년간의 기록”, 강선미, 이양준역, 이마고 출판사,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윌리암 아서 노블(Noble, William Arthur,1886~1956) 매티 윌콕스 노블(Mattie Wilcox Noble,1872∼1956)과 가족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윌리암 아서 노블(1866-1945) 선교사도 연달은 선교사의 소천(홀, 아펜젤러,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으로 인해 감리교 선교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선교사로 들어와서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한 선교사로서 사역을 감당하였다. 노블은 배재학당에서 3년간 물리학, 수학을 가르쳤고 배재대학의 교양학부장으로 사역하였고, 그 후 15년간 평양 선교부에서 섬겼다. 평양과 영변, 의주 등을 방문하며 북방 선교의 길을 열었고, 1900년에는 구약성서 번역에 참석하였다. 또 그는 평양 기술학교인 격물학당을 완공하고 한국에 전화 시스템을 도입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부인 매티는 미국의 어머니로 선발되기도 하였고,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1910)>을 출판하여 한국 선교 역사를 남기도 하였다. 노블과 매티의 딸 루스와 아펜젤러의 아들 닷지가 첫 선교사 자녀가 결혼하는 역사도 만들었다. 노블의 둘째와 넷째는 한 살도 못 되서 평양에서 목숨을 잃는 고난도 당지만 불행에 굴하지 않고 복음 선교사로서 한국의 선교의 큰 족적을 남기게 되어서 오늘의 한국 교회성장에 크게 기여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선교사는 그 나라의 문화 선구자로서 빛을 전하는 자들이었다.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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