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로스(John Ross, 羅約翰, 1842~1915)
(출처- 한국 기독교사 이야기 : 존 로스, 첫 한글 성서 번역:"하느님/하나님"으로, 노종해 목사)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에서 중국 만주 선교사로 파송(1872. 2. 27.) 받았으며, 목사안수 받고(1872. 3. 20.) 스테워드(M.A. Steward) 양과 결혼하고(3.25) 선교지로 출발하여 만주 영구에 도착하였다. 아내 스테워드는 1873년 첫 아들 "드럼몬드("Drummond)를 해산(1873. 2.)하고 긴 여행과 혹한에 별세(3. 31.)하였다. 존 로스는 넷째 여동생 캐더린(Catherine)을 만주로 불러 아들을 돌보게 하고 중국어 습득과 순회 선교에 몰두하였다. 여동생은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1838-1904) 선교사와 결혼(1876년)하여, 존 로스와는 매형 관계로 한글 성서번역과 한국인 세례, 매서인(권서인, 전도인)을 한국 내로 파송하여, 복음전파 활동에 긴밀한 협력자가 되었다. 두 존(John) 선교사는 한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 기독교 신앙 공동체 형성과 교회 설립, 부흥의 토대를 놓았고, 이미 공식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전국 곳곳에 복음의 씨앗이 자라 신앙공동체와 교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들은 로스의 전도인들의 안내로 서북지역을 여행하며 세례요청에 놀라고 문답 심사하여 세례를 베풀고 다녔다. 특히 첫 성서번역에서 순 한글로 엘로힘/데오스를 "하느님/하나님"으로 번역하여, 한국 사회와 문화, 역사에 길이 빛나는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만주의 한인촌교회와 국내전도(1876)
(출처- 한국 기독교사 이야기 : 존 로스, 첫 한글 성서 번역:"하느님/하나님"으로, 노종해 목사)

선교사 죤 로스목사와 가족(1880년대)/고려문 방문로-출처:김정현(J.H. Grayson),"한국의 첫 선교사", 계명대,1982. pp324)
로스 선교사-만주 한인촌 교회 형성과 한인 전도인 국내활동
한국 국내에서 기독교선교 활동이 시작된 때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내한으로(1885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미 10년 전인 1874년부터 한국과 중국의 접경지대인 압록강 변에서 한인전도가 이루어졌고 백 명이 넘는 한국인이 세례교인도 있었다. 만주(滿洲)의 한인촌(韓人村)에는 한인교회(韓人敎會)와 전도인(傳道人)도 있었다. 또한 서북지역인 의주(義州), 강계(江界), 선천(宣川), 평양(平壤)과 송천(松川)지역 상인들이 만주를 드나들면서 기독교인이 된 후 국내 전도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만주에 최초 한인교회와 전도인을 형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한 분은 로스목사(羅約翰, John Ross)로 스코트랜드 장로교회로 부터 중국선교사로 1872년2월27일에 파송 받고, 3월20일에 목사안수 받았다. 3월25일에는 스터와드(M.A. Steward) 양과 결혼하고, 8월23일 중국 지푸에 도착하였다. 로스목사는 지푸에서 한국인을 만났고, 토마스목사의 순교와 천주교인들의 박해 받는 소식을 듣고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였다. 로스목사는 그의 선교지를 만주지역으로 삼고, 영구(營口)를 중심으로 우장(牛庄), 봉황성(鳳凰城), 요양(遼陽), 봉천(奉天) 지역을 순회전도 하였다.
존 로스 목사 선교정책- 한국문화를 바탕으로, 한국인 전도자들에 의해
존 로스목사의 선교정책(宣敎政策)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 나라의 가치관이나 신앙을 버릴 필요가 없고, 그 보다는 그 문화를 바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설립하도록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는 비 기독교 지역에 있는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의 활동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自國) 기독교인들의 생활(生活)과 전도(傳道活動)를 통해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스목사는 우선 한국인 한국어 선생을 만나길 원했고,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기를 원하였다. 또한 한국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한국의 문화(文化), 종교(宗敎), 풍습(風習)과 역사(歷史) 등을 알아야 한다고 믿고 한국인에 대한 접촉뿐 아니라 한국연구에도 힘썼다.

고려문(Corea Gate, 柵門)
로스목사는 한국인들이 모여 살고 있고 많이 드나드는 고려문(高麗門)이 있음을 알고 선교여행 하였다. “고려문(高麗門, 柵門)은 한국과 중국을 잇는 관문으로 압록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의주(義州)에서 약 48km으로 이 문을 통해서만 중국에 드나들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또한 이곳에는 세관(稅關)이 위치하고 있으며,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고려촌(高麗村)이 형성되어 있었다. 만주 봉황성(鳳凰城)에 있는 고려문(Corea Gate, 柵門)에는 1년에 4차례 장이 서고 있었다. 이 장이 서는 때는 한국 본토에서 많은 한인들이 몰려오므로 로스목사는 이때를 기회로 삼아 고려문을 방문한 것이다. 로스목사는 1873년 말부터 우장(牛莊)을 출발하여 봉천(奉天)을 거쳐 첫 고려문을 방문하고 “한인촌”(韓人村)을 발견하였으며, 고려문 방문기”(Visit to the Corean Gate)를 썼다. 1876년 4월 말부터 5월 초, 한 달 동안 제2차 고려문을 방문하여 애하(靉河)와 압록강 합류점(合流點) 접경지대까지 이르렀으며, 조선인들이 농사짓는 것을 보았고, 한 권으로 된 전도지와 성경을 출판토록 계획하였다. 즉 로스목사는 조선어 선생과 신약성서를 조선어로 번역하도록 도울 사람을 찾고 있었고 한국 땅인 의주(義州) 지역을 바라보며 복음이 전도되길 기도하였다.
이응찬을 한국어 선생으로 만나, “한인촌교회”설립 전도인 활동
바로 이때 한약장수인 이응찬(李應贊)을 만났다. 이응찬은 압록강을 건널 때 모든 물건을 잃어버렸다. 이로 인하여 이응찬은 로스목사의 한국어 선생이 되었다. 이응찬은 1876년 한국개신교로써는 첫 세례를 받았고 곧 이어서 의주 사람 백홍준, 이성하, 최성균, 김진기 등이 세례를 받았다. 이들도 곧 한국국내 전도인이 되었으며, 로스목사는 선교기지인 봉천(奉天)에서 한글성서 번역에 착수하였고, “최초의 한인교회“(最初 韓人敎會)를 세웠다.(현, 심양의 동관교회)

심양의 동관교회(1876, 로스목사 시무)

현, 심양의 동관교회(증축 1988년)
로스목사는 이응찬을 만난 경위를 감동에 차서 기록하였다. “중인계급(中人階級)에 속하는 사람 하나가 고려문(高麗門으)로 가기 위하여 배에 물건을 실고 거센 압록강을 건너다가 그만 갑자기 강한 서남풍(西南風)을 만나 서 배는 전복되었고, 물건은 물속으로 잠겨버렸다..., 물건 임자는 알거지가 되었다..., 비참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 한국어 선생을 구하는 나의 서기(書記)를 만나게 되었고, 곧 나의 선생(先生)이 될 것을 약속(約束)하였다....인구가 불과 1천5백만 명 밖에 되지 않고 비록 여자라 할지라도 며칠이면 해독할 수 있는 훌륭한 문자(文字)를 가지고 있는 한국(韓國)과 같은 나라는 성서(聖書)와 전도문서(傳道文書)의 보급(普及)이 가장 쉬운 나라이므로 한글성서의 역간(譯刊)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는 표음문자(表音文字)인 데다가 매우 단순하고 아름다워서 누구나 쉽게 또는 빨리 배울 수 있다.“(J. Ross:"The Christian Dawn in Korea",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N.S. Vol3, Nov.4, 1890. pp241-248. 김정현 p213-219) 한국인들이 외국인들과 성서번역에 참여한다는 소식은 퍼져나갔고, 구경꾼과 방문객들이 빈번하게 되었다. 아예 선교사집에서 매월 1주간씩 성경공부반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1880년에는 30여 명이 성경공부 반에 참여하여 교육받았고, 국내 문서 전도인으로 활동하였다.

죤 로스역;누가복음(문광서원,1882)/예수셩교젼서(문광서원 1887)
로스 목사는 1881년 7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의 지원으로 “문광서원”을 설립하였고, 그해 10월 한국 최초의 기독교문서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을 출간했으며, 이듬해 첫 한글성경 “예수셩교 누가복음전셔”와 “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를 발간했다. 이를 시작으로 사도행전(1883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1884년), 에베소서(1885년)에 이어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 “예수셩교젼서”(1887년)도 발행했다. 1882년 11월에는 75명에게 서례를 주었으며, 1884년에는 한국인이 백여 명이나 세례 받았고, 세례 대기자도 6백여 명일 정도로 활기찬 교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로스목사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한 전도보다는 한국인 스스로가 전도할 수 있도록 양육하였다. 또한 한국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소개하여 한국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끌게 하였으며, 한국 문화전통의 바탕 위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고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한국 기독교의 첫 선교사로 기록되어야 하며. 그 공로를 기억하여야 한다. 몇 가지를 지적하며 글을 마친다. 첫째는 존 로스의 선교 정책은 토착문화를 토대로 토착인에 의한 전도였다. 자립, 자전, 자치의 삼자 정책이며, 네비우스 보다 더 깊고 포괄적인 로스의 토착 선교정책이었다. 존 로스의 선교 정책은 사도 바울의 선교를 따랐다. 즉 사람이 많이 다니는 도시에 전도소를 개설하고, 순회전도하는 바울의 전도 방식을 실천하였다. 만주 선교 방법론(Mission Methods in Manchuria) 등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만주선교 방법론"으로 번역 출판 되었다.(순교자의 소리, 2019년)

John Ross: Mission Methods in Manchuria(1903)

로스 저서, "만주선교 방법론" 번역 출판(2019)과 "누가복음"(1882년 판)-(출판: 순교자의 소리, 2019, 2022)
당시 한국 내 정치, 사회 상황에서 외국 선교사 입국이 금지되던 상황에서 만주의 한인들을 만나고 성서를 한글로 번역 출발하여 전도인을 세워 국내로 보급하며, 곳곳에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둘째 성서번역을 위해 한글을 먼저 배우고, 한국역사와 문화, 한국인들의 습관과 풍습을 조사 연구하여 저서를 출판했다. "한국어 기초"(Corea Primer, 1877년), "한국역사, 한국인의 습관과 언어, 지형" (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 with Description of Manners, Customs, Language, and Geography(1879){ 등 이러한 저서들과 "예수셩교문답", "예수셩교요령"(1881년) 등 문서를 발행하여 세계선교사들과 한국 선교사들에 교본이 되어, 한국 기독교의 기초를 놓았다.

한국어 교사 백홍준, 성서 번역인!
셋째 토착 한인 전도인 양성과 파송이다. 만주에서 성서번역 조력자들을 세례를 주었고, 이들이 자발적으로 전도인으로 한인촌 교회를 이루었다. 또한 국내에서 활동하여 서북지역과 서울지역 등에 자생적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백홍준 전도인이 개척 설립한 "의주교회"(설립 1866년, 사진:1907년)

서상륜/서경조가 설립한 황해도 소래교회(송천, 1883년 5월 16일)
이들 자생적 신앙공동체들은 그대로 교회를 설립하고 전국으로 확산하게 되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등 한국 공식 선교사들은 이들에 세례를 주고 복음전도와 교회 설립, 부흥하는 열매를 거두었다. 존 로스의 "예수셩교문답"(1881년)에 첫 문답 보면, 유일하신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하느님"으로 표기하였다. 문: 천지 만물이 어떻게 있느뇨? 답: 하느님이 지어낸 것이라. 스크랜튼 부인은 서울에서 일부 수정하여, "성경문답"(1892년)을 출판하였고, 로제타 홀(Dr. Rosetta S. Hall) 선교사는 감리교회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에서 사용하며 전도하였다. 넷째 무엇보다도 하늘에 계신 최고의 하늘님을, 한국인의 정서에 맞도록 "엘로힘(히, Elohim. 창3:8)", "데오스(헬,Theos. 창막10:18)", "God"을 "하느님"으로 1881년부터 최초로 표기하였다. 지식인들의 한문식 "상제"(上帝), "천주"(天主)를 민중이 애용하는 언어로 하느님/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로스 역본 누가복음(1882년)-"하나님"으로 표기!-"우리 하느님의 은혜"

로스역 누가복음 2장, "하느님"으로 표기(순교자의 소리에서 현대식으로 출판 함, 2022년)
로스의 첫 한글번역 "예수셩교 누가복음"(1882년 3월)에는 "하느님"과 "하나님"을 병기하며 표기하였다. 로스 역본 "누가복음"은 순교자의 소리에서 1882년 판본 글대로를 현대식으로 출판하였다.(순교자의 소리, 2022년 출판) 박형신(남서울대 교수)은 서울의 철자법에 따라 "요한복음"(1883년 10월)에서는 신명(神名)을 "하느님" 대신에 "하나님"으로 개정하였다고 했다.(존 로스 한글 성경 번역 140주년 기념 자료집(p79) 첫 한글 성서 "예수셩교젼서"(1887년)에는 "하나님"으로 통일하였다. 당시 철자법 표준화에는 아래 아자 표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옥성득 교수(UCLA)는 "하느님과 하나님" 표기는 동일한 한글 표기라 지적하였다. 하늘에 계신 하늘님이란 뜻이다. 한글 언어 학자들도 "하느님/하나님" 표기를 혼용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옥성득, 한글 성서 번역 14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움 자료집, 대한 성서공회, 2022년. pp18f) 천주교와 기독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하며, 천주교의 "상제"(上帝), "천주"(天主)와 기독교의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합의 통일하여 공동성서 번역을 이루었다.(1977년 부활절) 다섯째 존 로스본 한글 성서라 하지만 실제로는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등의 한국인들의 번역이란 점이다. 존 로스 역 성서란 번역의 책임자란 점이다. 실제적인 한글 성서번역 인들은 한국인들이었다. 의주 상인 이응찬은 1883년 9월에 콜레라로 별세하여 의주인 백홍준이 성서번역을 이었다.

존 로스 역본 한글 성서 출판

출판 보급 된 로스 역본 성서 배포 상황!(출처: 박형신, 한글 성서 번역 14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움 자료집, 대한 성서공회, 2022년,. p66)
그러므로 이들은 의주 등 서북 출신으로 첫 성서 번역이 서북방언을 사용하였다. 존 로스도 서북방언임을 인지하고 서울 말씨로 개정을 시도하여 "예수셩교젼서"를 출판하였지만 여전히 평안도 방언이 남아 있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성서번역 위원회를 조직하여 로스역 성서를 개정하려 하였고, 상임위원회로 확장 편성하고, 로스본 성서를 폐기하였으며, 새로운 한글 성서번역을 이루게 하였다. 결국 로스본 성서는 새로운 번역 성서가 출판(1906년) 되기까지, 만주와 국내에서 사용되어 복음 전파에 활용되어 한국 기독교의 폭발적 부흥(1903, 1907년)의 계기를 이루게 되었다. 존 매킨타이어 (John MacIntyre별세 1904년 9월 17일, 영구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존로스선교사(1842-1915)는 1910년 7월 사직 발표하고, 38년 간 선교사 활동을 마무리하였으며, 1915년 별세(8.6.)하여 에딘버러 뉴윙턴 묘지에 안장되었다.(8.11. Newington Cemetary Edinburgh) 존 매킨타이어는 별세하여 만주에 묻혔고, 존 로스는 1910년에 38년 선교사를 사직하고, 고향에서 별세하여 에딘버러 뉴윙턴 묘지에 안장되었다.(8.11. Newington Cemetary Edinburgh)

(출처- 한국 기독교사 이야기 : 존 로스, 첫 한글 성서 번역:"하느님/하나님"으로, 노종해 목사)

한국인 관습 삽화-John Ross: History of Corea
(출처- 한국 기독교사 이야기 : 존 로스, 첫 한글 성서 번역:"하느님/하나님"으로, 노종해 목사)

존 로스 가족(1901년): 앞쪽 좌로부터- Mrs. Ross, Isabel, Margaret, 뒷쪽- Findlay, Dr. Ross, John Herbert
(출처- 한국 기독교사 이야기 : 존 로스, 첫 한글 성서 번역:"하느님/하나님"으로, 노종해 목사)

*Rev. John Ross. D.D. 묘지( Newington Cemetary Edinburgh)

예수셩교젼셔,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J.Ross), 매켄타이어(J.Macintyre) 공역
1887년 만주 봉천(奉天)에서 출판된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이다. 번역 주관자가 로스(J.Ross)였기 때문에 일명 '로스역성경'(Ross Version)이라 한다. 이 번역작업에 참여한 한국인 개종자들은 초기 기독교 신앙공동체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 성서는 중국어 음역표기에서 벗어나 서구식에 가깝게 정리되어 용어사적인 공로가 크다. 절 표시가 되어 있으나, 대두법 표기는 없어졌으며, 신의 명칭은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짙은 평안도 사투리가 많은 특징이 있다. 이 신약전서는 국내에서 신약전서가 발간되는 1900년까지 한국교회에서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출처- 대한성서공회)

(출처- 대한성서공회)

예수성교전서, 1887년 만주에서 출판된 최초의 한글판 신약전서(복제본)

마태복음, 1892년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 매킨타이어 공역
1892년 예수성교본 발행의 마지막 단편이며, 이후 선교사들의 성서위원회에서 성경번역이 본격화되었다. 순한글본으로 신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였으며 띄어쓰기는 하지 않았고, 각 절 표시가 되어있다.

요한복음, 1882년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 매킨타이어 공역
1872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J. Ross)가 만주 관문인 영구(영구)에 도착해서 만주 선교를 시작하였고 1년 후에는 매제가 되는 매킨타이어(J. McIntyre) 선교사가 합류했다. 로스 목사는 1874년, 1876년 두 차례 봉황성 아래 고려문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 그곳에서 장사하던 한국인을 처음 만났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고 만나는 의주 출신 상인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는 한 편, 이응찬을 비롯하여 최성균 · 김진기 · 이성하 등을 영구로 불러 들여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한문 성경이 국내에 전파되었다. 의주에 살던 백홍준이 성경을 읽고 3년 동안 탐구한 후 개종을 결심하고 1879년 3월 압록강을 건너 영구로 갔다.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한 로스 대신 그를 맞은) 매킨타이어 목사는 처음 보는 사람이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자 "함께 지내보고 진짜 교인이면 주겠다." 하였다. 백홍준은 3개월 동안 영구에 머물면서 의주 출신 성경 번역자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였고 마침내 그 해 6월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3년 동안 성경을 번역하던 이응찬도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한국인 최초 개신교 세례이다. 1881년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로스 목사는 봉천(지금 심양)으로 옮겨 동관교회를 설립하는 한 편, 교회 구내에 성경 번역소 및 인쇄소를 차리고 한글로 된 문서를 찍어냈다. 즉 1881년 세례 문답과 전도용 문서인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을 인쇄하였고 이듬해엔 최초 한글 성경인 <예수성교 누가복음서>와 <예수성교 요한복음>을 인쇄하였다. 그 후 계속 쪽복음을 인쇄하였고 1887년 이르러 신약 전체를 번역하여 <예수성교전서>란 이름으로 출판했다. 이렇게 인쇄된 한글 성경은 백홍준 · 서상륜 등 매서인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전달되었고, 거기서 남쪽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처럼 한글 성경이 인쇄되어 나오자 성경을 읽고 복음을 받아들인 개종자들이 사방에서 나와 이들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조직되었다. 국내에서는 의주에 교회가 처음 설립되었고, 거기서 구성을 거쳐 선천, 평양으로 복음이 퍼져 나갔으며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를 통해 황해도 소래(松川)와 서울에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만주 땅에 압록강을 따라 형성되었던 한인촌에서도 그런 신앙공동체가 조직되었다. 그 중에도 로스 목사를 도와 성경 교정과 인쇄 일을 맡아 보았던 김청송의 전도로 1898년 설립된 집안현 이양자(裡楊子)교회가 유명하였다. 임오군란(1882년) 때 피난 온 한국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이양자 산골짜기에 교회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압록강 연변 20여 개 한인촌 마을마다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만주에서 세례교인이 생겨났고, 말로 번역된 성경을 읽은 개종자들이 생겨나 선교사들이 들어와 세례를 베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를 두고 언더우드는 "우리는 씨를 뿌리러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결실을 얻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전파한 결과 '성경 중심적' 교회의 역사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

로스 저서, "만주선교 방법론" 번역 출판(2019)과 "누가복음"(1882년 판)-(출판: 순교자의 소리, 2019, 2022)

누가복음, 1882년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 매킨타이어 공역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로 한국개신교 최초의 성서이다. 1878년 서상륜에 의해 처음 번역된 이래 몇번의 수정을 거쳐 1882년 발간되었다. 장과 절 표시가 없고 띄어쓰기가 생략되어 있으며, '예수' 앞에서 띄어쓰기를 하는 대두법(擡頭法)을 사용하였다. 신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51페이지 분량의 작은 성서이나 한국기독교사에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된 것보다 훨씬 오래갈 기념비”로 평가된다. 만주에서 출판된 한국 개신교 최초의 한글 성서이다.

제자행적(사도행전), 1883년 한문 성서를 대본으로 번역한 초기 한글성서,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 매킨타이어 공역
1882년 발행된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이어 세번째로 발행된 한글성서이다. 이 제자행적은 《누가복음》을 수정하여 《사도행전》과 함께 묶은 합본성서이다. '예수' 앞에서 띄어쓰는 대두법을 사용하였고 신(神)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장·절 표시가 없으며 지명이나 인명을 원문 그대로 표기하려고 노력하였다.

출처: 옥성득(한글 성서 번역 14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움 자료집, 대한 성서공회, 2022년, p22.)

존 로스 <한국의 역사(1879년)>
로스 선교사의 한국 역사 서적으로 3-6세기 한국 역사 지도를 싣고 있다.

존 로스, <한영문전입문(1877년)> (출처- Ross, John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존 로스 <한국의 역사(1879년)> (출처- Ross, John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존 로스 선교사와 그가 쓴 한국사 책의 오늘날 버전.(출처- 한국 사회 발전 크게 기여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선교사들 : 목회/신학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존 로스 선교사의 <조선어 첫걸음>. (출처- 한국 사회 발전 크게 기여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선교사들 : 목회/신학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존 로스 선교사의 <조선어 첫걸음>.

존 로스, 한국 선교관련 글 (미국 선교잡지) (출처- Ross, John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존 로스 유고작 <중국인 언어의 기원 1916년> (출처- Ross, John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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