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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존 맥킨타이어 목사 (John Macintyre)

성지순례/선교사

by baesungsoo 2026. 2. 1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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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킨타이어 목사((John Macintyre, 1837.7.18.~1905.9.1.)

 

맥킨타이어는 1837년 7월 18일 스코틀랜드  렌프루셔의 페이즐리에서 염직업자인 윌리엄 매킨타이어와 엘리자베스 글렌(Elizabeth Glen)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는 1857글라스고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857년 에든버러에 있는 연합장로교회신학교에 입학한 후 졸업하였다1865 6 1일에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글라스고의 배이리스톤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872년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의 북중국선교사로 1872 1 1일에 산동성의 개항장인 지푸에 도착하였으며, 산동성의 내륙인 웨이히엔( 濰坊)을 개척하는 등 내륙지방에서 순회전도 사역을 담당하였다. 1876년 교단 해외선교부의 결정에 따라 1876년 초까지는 만주의 개항장인 뉴치왕(牛莊)으로 건너가 이미 1872년 말에 와서 만주선교를 하고 있던 존 로스(John Ross)와 함께 사역하기 시작했다. 사역 초기에는 뉴치왕, 해쳉, 다핑샨, 묵덴 등지에서 순회전도를 하거나 채플을 설치하여 대중에게 기독교를 전하였다. 한편 존 로스 목사는 1872 8 23일, 중국 지푸에 도착했다. 로스는 그해에 그의 아내가 첫 아기를 낳다가 사망하여 갓난아기의 양육을 위해 여동생 캐더린을 고향에서 데려왔다. 1876년에 로스의 여동생 캐서린 로스(Catherine Sutherland Ross)와 뉴치왕에서 결혼하였다중국 주재 선교사들이 펴내던 학술지 The China Review 1878년부터 1879년까지 6회에 걸쳐 禮記로부터의 메모(Jottings from the Book of Rites 禮記)”를 연재하였다. 뉴치왕의 만주선교부에 한국인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1873년 제1차 전도여행길에 오른 맥킨타이어와 로스는 한만국경 압록강 상류 임강(臨江) 유역 이양자(裡陽子) 마을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여러 모로 한국 입국 계획을 세우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겁먹고 응하는 사람이 없어서 국법이 엄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그들은 단념하지 않고 다음해(1874) 봄에 중국인 서기를 데리고 제2차 전도여행길에 올라 고려문에 이르렀다. 한국인들이 서양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을 눈치챈 이들은 중국인 서기를 시켜 한국인을 자기 숙소로 데려오게 했다. 중국인 서기는 며칠 거리를 헤맨 끝에 한국 청년 이응찬을 만나 맥킨타이어와 로스의 어학선생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이응찬은 친구들의 눈이 무서워 귓속말로 응락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그는 친구들이 여관에서 코를 골며 깊이 잠든 사이에 서편을 향해 떠난다는 짧은 글을 남겨놓고 여관을 빠져나와 맥킨타이어가 묵고 있던 여관을 찾아갔으며, 그 이튿날 그들을 따라 우장으로 갔다이응찬은 맥킨타이어의 어학선생이 된 뒤 1876년에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과 함께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한국인 구도자들을 위하여 주로 저녁 시간에 성경공부반을 조직하여 가르쳤는데 그 숫자는 대략 1880년에 연인원 30명을 상회했다. 서상륜의 친구들, 의주의 네 청년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가 만주로 건너간 지 여러 해가 지났으나 소식이 끊어져서 가족과 친척들은 모두 깊은 근심에 잠겨 있었다서상륜은 친구들의 행방을 찾을 겸 늘 마음에 그리던 바깥 세상의 새 문화를 접하기 위해, 청운의 뜻을 품고 동네어른의 기대와 환송을 받으며 한약 행상의 봇짐을 등에 지고 광막한 만주 벌판을 향해 떠났다. 여러 날 후에 그는 영구(營口)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서상륜은 친구들이 나라에서 금지하는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을 보고 겁에 질렸다그는 오지 말아야 할 곳을 왔다는 듯이 꽁무니를 빼면서 하루라도 빨리 그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그날로 심한 열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다. 병세가 날로 악화되어 나중에는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이때 친구들의 주선으로 영국 선교사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는데, 맥킨타이어 목사가 날마다 병원에 찾아와 지극한 정성으로 서상륜을 간호했다. 밤이고 낮이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돌보고 위로해 주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 서상륜은 병이 나으면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했으며, 의사의 정성어린 치료끝에 그의 병은 완쾌되었다. 그는 약속대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1879년 봄 어느날,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한국어 성경 번역

이때 누가 먼저 한글 성경번역을 제창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맥킨타이어는 세례 받은 한국인 초신자들과 함께 한글 성경번역과 출판사업을 밀고 나갔다기독교에 몸 바치기로 결심한 서상륜은 네 친구들과 같이 성경을 번역하는 일, 특히 성경 출판을 위해 목활자(木活字)를 파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는 목활자를 파는 각인(刻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인쇄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의 재정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1881년 인쇄기를 상해에서 구입하여 봉천에다 설치하였고, 한국인 번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무활자는 일본에 보내어 4만여 자의 연활자(鉛活字)로 바꾸어 그해 우장을 거쳐 봉천으로 이송되었으며, 중국인 인쇄공과 한국인 식자공 김청송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최초의 한글 성경이 출판되었다“1879년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보고에 따르면 누가복음은 1878년까지 로스 목사와 이응찬, 김진기, 백홍준 등의 공역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해에 로스 목사는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게 되어, 맥킨타이어 목사가 그 업무를 맡아 한국인 번역자들과 같이 다시 구구절절 재수정을 하였다. 맥킨타이어 목사는 한글성서번역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한글성서번역은 성경반에서 진행되었는데, 먼저 한국인 번역자들이 나와 함께 한문성경을 읽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나는 다시 헬라어 원문과 대조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헬라어 원문에 가깝게 하였다.’... 1879년 영국으로부터 돌아온 로스 목사는 맥킨타이어 목사가 수정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일일이 재검토하여 최종 원고를 작성했다.” 존 로스 역 한국어성경[Ross Version]의 원본은 중국어성경을 비롯하여 헬라어성경과 두 가지의 영어성경[King James Version, English Revised]의 네 가지였으며, 엄밀히 말해 이 성경은 두 선교사와 여섯 명의 한국인 초신자들의 공동번역이지만, 성경 반포의 공헌으로 말한다면 서상륜 역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1880년대부터는 항구도시 뉴치왕을 관장함과 동시에 동북쪽으로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해쳉(海城)에 정주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주변에 스테이션들을 개척하였다. 또한 동쪽의 봉황성에 이르는 압록강 북쪽의 지역들에서도 순회전도를 실시하였다. 그의 사역에는 대체로 전도부인 양성 및 일반교육을 목표로 하는 여학교와 같은 교육사업이 병행되었다1880년에 기독교 서적 및 과학서적을 편지와 함께 의주의 백홍준에게 인편으로 보내다가 한국인 관리에게 발각됨으로 백홍준이 투옥되었으나 수개월 후 석방되어 뉴치왕에서 재회하였다1882년 누가복음의 뒤를 이어 요안내(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7년에 이르러 <예수셩교젼서>라는 이름의 신약전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맥킨타이어는 1879년에 <한국언어론(Notes on the Corean Language)>을 썼고, 1880년에는 <한국의 역사, 상태, 관습(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이란 책을 런던에서 간행했다1885 3월 중순부터 약 한 달간 묵덴의 의료선교사 두걸드 크리스티와 함께 해쳉에서 봉황성까지 다니며 의료 및 전도순회 사역을 하였는데, 자신의 주장으로 봉황성에 거주하는 구씨라는 한국인 신자의 집에서 가족과 이웃들을 위하여 진료하고 복음 사역을 펼쳤다The Chinese Recorder and Missionary Journal “인간성에 대한 맹자의 사상(Mencius on Human Nature)” 2회 연재하였다. 1904년 전반기의 4-5개월 동안에는 그와 그의 가족이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초청을 받아 북경의 남서쪽에 위치한 파오팅푸( 保定) 선교부에서 다양한 기독교 사역을 펼쳤다. 1905 6 4일에 주 사역지였던 해쳉에서 중국인 신자들과 함께 마지막 교회를 설립했는데, 지역의 최고위 관리들로부터 복음전파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족자 한쌍을 선물로 받았다. 1905년에 건강을 잃어 뉴치왕의 병원에서 치료받은 후 권고에 따라 하북성의 페이타이호(北載河)로 요양 갔다가 열차여행의 피로를 견디지 못한 채 9 1일에 별세하였다. 유해는 열차로 이송되어 뉴치왕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해쳉의 교회 안에 그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교회는 그해 10월 시내에 채플을 신축하고 매킨타이어기념채플(Macintyre Memorial Street Chapel)로 명명하였다. 부인 캐서린 로스는 그 후에도 해쳉과 랴오양(遼陽) 등지에서 사역하다가 1926년에 해쳉에서 별세하였다. 자녀로는 윌리엄 로스, 캐서린 서더랜드, 엘리자베스 글렌, 휴 로스, 마리온 이사벨, 그리고 릴리안 스미스가 있으며 모두 만주에서 출생하였다. 엘리자베스와 릴리안은 부모가 소속되었던 스코틀랜드연합자유교회의 만주선교사로 활동했다. 휴는 의사가 되어 영국에서 일했다. 역시 의사가 된 마리온은 아일랜드장로교회가 파송한 의료선교사로서 만주에서 활동했다. 

왼쪽 상단 존 로스 선교사, 오른쪽 매킨 타이어 선교사, 왼쪽 하단 서상륜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출처- 개역개정의 오역된 부분)

예수셩교젼셔,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J.Ross), 매켄타이어(J.Macintyre) 공역

 

1887년 만주 봉천(奉天)에서 출판된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이다. 번역 주관자가 로스(J.Ross)였기 때문에 일명 '로스역성경'(Ross Version)이라 한다. 이 번역작업에 참여한 한국인 개종자들은 초기 기독교 신앙공동체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 성서는 중국어 음역표기에서 벗어나 서구식에 가깝게 정리되어 용어사적인 공로가 크다. 절 표시가 되어 있으나, 대두법 표기는 없어졌으며, 신의 명칭은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짙은 평안도 사투리가 많은 특징이 있다. 이 신약전서는 국내에서 신약전서가 발간되는 1900년까지 한국교회에서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출처- 대한성서공회)

(출처- 대한성서공회)

예수성교전서, 1887년 만주에서 출판된 최초의 한글판 신약전서(복제본)

마태복음, 1892년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 매킨타이어 공역

 

1892년 예수성교본 발행의 마지막 단편이며, 이후 선교사들의 성서위원회에서 성경번역이 본격화되었다. 순한글본으로 신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였으며 띄어쓰기는 하지 않았고, 각 절 표시가 되어있다.

요한복음, 1882년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 매킨타이어 공역

 

1872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J. Ross)가 만주 관문인 영구(영구)에 도착해서 만주 선교를 시작하였고 1년 후에는 매제가 되는 매킨타이어(J. McIntyre) 선교사가 합류했다. 로스 목사는 1874, 1876년 두 차례 봉황성 아래 고려문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 그곳에서 장사하던 한국인을 처음 만났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고 만나는 의주 출신 상인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는 한 편, 이응찬을 비롯하여 최성균 · 김진기 · 이성하 등을 영구로 불러 들여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한문 성경이 국내에 전파되었다. 의주에 살던 백홍준이 성경을 읽고 3년 동안 탐구한 후 개종을 결심하고 1879 3월 압록강을 건너 영구로 갔다.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한 로스 대신 그를 맞은) 매킨타이어 목사는 처음 보는 사람이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자 "함께 지내보고 진짜 교인이면 주겠다." 하였다. 백홍준은 3개월 동안 영구에 머물면서 의주 출신 성경 번역자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였고 마침내 그 해 6월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3년 동안 성경을 번역하던 이응찬도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한국인 최초 개신교 세례이다. 1881년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로스 목사는 봉천(지금 심양)으로 옮겨 동관교회를 설립하는 한 편, 교회 구내에 성경 번역소 및 인쇄소를 차리고 한글로 된 문서를 찍어냈다.  1881년 세례 문답과 전도용 문서인 <예수성교문답> <예수성교요령>을 인쇄하였고 이듬해엔 최초 한글 성경인 <예수성교 누가복음서> <예수성교 요한복음>을 인쇄하였다. 그 후 계속 쪽복음을 인쇄하였고 1887년 이르러 신약 전체를 번역하여 <예수성교전서>란 이름으로 출판했다. 이렇게 인쇄된 한글 성경은 백홍준 · 서상륜 등 매서인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전달되었고, 거기서 남쪽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처럼 한글 성경이 인쇄되어 나오자 성경을 읽고 복음을 받아들인 개종자들이 사방에서 나와 이들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조직되었다. 국내에서는 의주에 교회가 처음 설립되었고, 거기서 구성을 거쳐 선천, 평양으로 복음이 퍼져 나갔으며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를 통해 황해도 소래(松川)와 서울에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만주 땅에 압록강을 따라 형성되었던 한인촌에서도 그런 신앙공동체가 조직되었다. 그 중에도 로스 목사를 도와 성경 교정과 인쇄 일을 맡아 보았던 김청송의 전도로 1898년 설립된 집안현 이양자(裡楊子)교회가 유명하였다. 임오군란(1882) 때 피난 온 한국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이양자 산골짜기에 교회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압록강 연변 20여 개 한인촌 마을마다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만주에서 세례교인이 생겨났고, 말로 번역된 성경을 읽은 개종자들이 생겨나 선교사들이 들어와 세례를 베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를 두고 언더우드는 "우리는 씨를 뿌리러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결실을 얻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전파한 결과 '성경 중심적' 교회의 역사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

누가복음, 1882년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 매킨타이어 공역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로 한국개신교 최초의 성서이다. 1878년 서상륜에 의해 처음 번역된 이래 몇번의 수정을 거쳐 1882년 발간되었다. 장과 절 표시가 없고 띄어쓰기가 생략되어 있으며, '예수' 앞에서 띄어쓰기를 하는 대두법(擡頭法)을 사용하였다. 신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51페이지 분량의 작은 성서이나 한국기독교사에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된 것보다 훨씬 오래갈 기념비로 평가된다. 만주에서 출판된 한국 개신교 최초의 한글 성서이다.

제자행적(사도행전), 1883년 한문 성서를 대본으로 번역한 초기 한글성서,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 

매킨타이어 공역

 

1882년 발행된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이어 세번째로 발행된 한글성서이다. 이 제자행적은 누가복음을 수정하여 사도행전과 함께 묶은 합본성서이다. '예수' 앞에서 띄어쓰는 대두법을 사용하였고 신()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절 표시가 없으며 지명이나 인명을 원문 그대로 표기하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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