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우처 (J. F. Goucher, 1845.6.7.~1922)
미국 미감리회 목사. 교육가. 아시아 선교후원자.
【1845년】1845년 6월 7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웨인즈보로에서 감리교 신도이자 의사였던 존 가우처(1814-1892)와 엘리노어(1814-1862) 사이에서 출생하였다.어린 시절부터 성인 초반까지 그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프랭크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아버지(John)와 구별하려 불렸다. 그는 9살의 엘리야, 7살의 엘라, 4살의 데이비드와 함께 가정 환경이 화목한 곳에서 구김없이 자랐다. 후에 가우처는 ‘부모님이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한 가장 “뛰어나며 건설적인 삶을 제공한 축복” 중 하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부모님은 그에게 사랑스럽고 편안하며 안전한 가정 환경을 제공했고, 학문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기도 했다. 가우처와 타운센드 가문을 통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신앙의 경외심 뿐만 아니라 그 본보기로서 그에게 영향을 끼쳤다. 가우처 가문을 거슬러 가면 그의 가문은 청교도에 정통한 가문이다. 17세기부터, 가우처 가문의 후손들은 프랑스 북부 해안의 브리타니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위그노, 즉 프랑스 개신교 개혁 교회의 일원으로, 프랑스의 칼뱅주의자들이었으며, 가톨릭 지배층과 동포들로부터 종교적 박해와 종종 죽음의 위협을 받았던 가문이었다. 1647년경, 로버트 가우처(Robert Goucher)와 그의 가족은 프랑스를 떠나 웨일스(Wales)에 정착했다. 그의 세 아들인 토마스(Thomas Goucher), 로버트(Robert Goucher), 헨리(Henry Goucher)는 반가톨릭주의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의 군대에 입대했으며, 크롬웰은 영국 왕 찰스 1세의 처형 명령서에 서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가우처 형제는 크롬웰의 의회가 지원하는 군대에 합류해 가톨릭 아일랜드의 남은 왕당파와 싸웠고, 각자 군 복무의 대가로 몰수된 왕실 토지 100에이커를 받았다. 1750년경, 토마스는 아일랜드에 정착했고, 로버트와 헨리(Henry Goucher)는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헨리가 바로 가우처의 증조할아버지이다. 그의 어머니 가문은 17세기 중반 대서양을 건너 뉴저지주의 에그 하버 주변에 정착했다. 그의 증조부 다니엘 타운센드는 목재 사업에 종사했고,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존 프랭클린 가우처가 미국혁명후손회(Sons of the American Revolution)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독립 전쟁이 끝난 후 다니엘은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 근처의 피터스 타운십으로 이주해 350에이커의 땅을 구입했고, 그곳은 후에 타운센드 가문의 여러 세대를 정착시킨 인물이다. 이렇듯 그는 이러한 가문에 여러 영향을 받았는 청교도 신앙 뿐만 아니라 미국 독립 운동의 정신 자유, 평등, 사랑, 정의가 깃든 가문이라는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가문의 영향력인지 그의 생애에 있어 미국 제2차 대각성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아 감리교 사회성화를 체계화시킨 사회적 복음(Social Gospel)에 큰 영향을 받아 인간과 사회 변화를 위한 신앙과 전인격적인 교육의 통합을 강조하기도 했다.
【1868년】피츠버그 고등학교를 거쳐 칼라일의 감리교 계통 디킨슨대학에 입학, 1868년 6월 졸업하였다.
존가우처가 감리교에 입교하게 된 배경은 의사였던 그의 아버지의 병원을 피츠버그로 옮기면서였다. 가우처는 어린시절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고 병원을 찾은 환자들이 다니던 피츠버그의 크라이스트 감리교 교회에 입교했다. 그곳에서 그는 예배와 주일학교를 통해 영적인 양식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소중한 인연이 될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가우처는 그 교회의 목사인 리틀턴 F. 모건 목사의 총애를 받았고, 모건 목사는 가우처가 목회에 관심을 가지도록 격려했으며, 10년 후 가우처가 목회자가 되었을 때 감리교 교회의 볼티모어 연회에 가입할 것을 추천하게 된다. 또한 피츠버그에서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데 1861년 2월에 아브라함 링컨을 만난 일이다. 그는 이후 자주 이 일을 회상했는데 대통령 당선자였던 링컨은 첫 번째 취임식을 위해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워싱턴 D.C.까지 13일간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고 여러 철도 회사가 소유한 기차를 타고,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뉴욕의 여러 마을과 도시를 거쳐 메릴랜드와 볼티모어를 지나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링컨은 공화당 후보로 몇 달 전 네 명이 경쟁하는 대선에서 승리했으며, 주권과 노예제에 대한 오랜 갈등으로 나라는 남북전쟁의 직전에 있었다. 링컨은 피츠버그에 하룻밤 머물렀으며 이를 계기로 링컨과 가우처는 수많은 인파를 뚫고 링컨과 독대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과 마주한 가우처는 “그의 깊고 놀라울 정도로 따뜻한 눈을 올려다보았다”고 기억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손을 내밀어 “당신과 악수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가우처는 링컨 대통령이 “가장 부드러운 미소로 몸을 숙여 제 손을 두 손으로 잡았고, 팔꿈치까지 제 손과 팔을 감쌌습니다.” 링컨은 가우처가 장차 세계적인 무대에서의 역할을 예언하는 듯한 축복을 전했고 한다. “하나님이 그대를 축복하시길,” 곧이어 가우처에게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순종하며, 나라를 섬기면 세상이 자네를 기억하고 존경할 거야.” 그후 가우처는 링컨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데 4년 후 대학 신입생이었을 때,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로 가서 암살된 대통령이 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링컨은 기차로 일리노이로 이송되어 묻힐 예정이었고 그의 마지막을 배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때문이었는지 그는 흑인과 여성 등 당시에 소외받고 차별받았던 이들을 위한 교육에 힘을 쏟으며 볼티모어 지역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
【1869년】대학 졸업 후 피츠버그 크라이스트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고 1869년 3월 미감리회 볼티모어연회에 허입하고 순회전도사로 사역하였다.
【1871년】1871년 3월 볼티모어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가우처는 디킨스 대학(Dickinson College)에 입학하는데 대학 생활 마지막 2년 동안 새로 설립한 성서학부에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추가적인 신학 공부 없이 학사 학위를 받고 목회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 감리교 소속 대학에서 모든 학생은 매일 두 번 채플에 참석해야 했으며,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저녁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다. 주일에는 학생들이 부모나 보호자가 지정한 교회의 공식예배에 두 번 참석해야 했다. 아마도 자신의 어린 시절 개종 때문에, 그는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 복음화에 대한 주제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린이가 개종하면, 이는 두 배의 은혜가 있는 일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좋은 기회를 주는 것이며 다른이에게 영향을 끼치는 삶으로 변화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는 12세에서 20세 사이의 젊은이들의 신앙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믿었으며, 이 시기의 마음은 “그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 밀랍과 같고, 그 지속력은 청동과 같다”고 표현했다. 따라서 대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가우처는 칼라일 시내로 나가 “임시막사(The barracks)”라고 불리는 빈곤한 지역에서 선교 주일학교 협회를 조직하는 일을 돕기도했다. 이렇게 철저히 신학부에서도 영성, 지성, 목회를 모두 교육 받고 경험할 수 있던 가우처는 1869년 3월 3일 제85회 볼티모어 연회에서 전도사로 임명된다. 젊은 목회자였지만 그는 그의 가문, 젊은 날의 여정, 대학 교육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독교적 가치를 심어주고, 이를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후 가우처의 목회 활동은 교회의 영적 지도뿐만 아니라, 교육과 도덕적 지도력을 강조하게 되는데 볼티모어에서 9곳의 교회와 14곳의 주일학교를 섬기는 동안 이러한 신앙을 실천하게 된다.
【1872년】1872년 디킨슨대학에서 문학석사(A.M.) 학위를 받았다.
존가우처는 볼티모어 연회 파송이후 순회 목회와 가정을 방문하는 심방 형태의 목회를 함께 병행했다. 또한 이 시기에 웨슬리처럼 시간을 쪼개면서 목회를 했는데 미국의 애즈베리처럼 말을 타면서 볼티모어 지역에 순회한 거리만 3,925Km이고 심방은 557회, 설교는 88회, 새로운 교인은 109명이었다고 한다. 이후 1871년 3월 87차 볼티모어 연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를 받게 되고 1873년 3월 연회 정회원(elder)가 된다. 이후 가우처 목사는 선교 후원을 하게 되는데 디킨스 대학에서 동기인 루디실(Abram W. Rudishill)이 인도 선교사로 있으면서 감리교 출판사를 세우는 등 선교활동에 본격적인 관심을 표하는 것도 이 시기였다. 또한 연회와 목회, 선교 현장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가우처는 1874년부터 해외여선교사회에서 임원으로 일하며 해외 선교와 차별 받은 여성, 흑인의 교육과 선교에 관심을 갖는다. 특별히 1879년 미국 감리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백주년 기념 흑인 성서교육을 조직하여 사역을 하였는데 이때 신앙의 의무로서 교육을 결합하여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교육을 강조한다. 당시 여성은 가정, 사회에서 교육 받을 기회가 없음을 알았으며 수준높은 교육을 받아 인재로 성장하기를 바랬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운 학교가 볼티모어 여자대학교이다. 이러한 교육 기관이 생겨나게 된 것은 볼티모어 연회의 후원 때문이다. 하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여성 교육을 위한 부지(1,300㎡)를 기증하면서 진행된다. 이 땅은 가우처가 볼티모어의 헌팅턴에서 사역할 때 교육용 부지로 점지했던 곳인데 목회 형편이 될 때마다 교육에 대한 비전을 품고 구매를 했던 곳으로서 그의 사업 수완과 추진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가우처는 지역 유지였던 아내의 후원으로 선교지 뿐만 아니라 학교를 세우는 것에 관심을 쏟았다. 특히 볼티모어 여자대학을 세우면서 대학의 건물 가운데 가우처 홀을 기증했는데 이는 가우처의 죽은 딸 엘레노어(Eleanor)를 기념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후 가우처는 목회적 소명 때문에 볼티모어 여자대학의 총장직 제안을 거절했으나 총장직을 맡게되는 관계로 18년 동안 사례를 받지 않고 성실하게 총장직을 수행해갔다. 오히려 1922년, 가우처 대학의 관계자에 따르면 그가 소천하기 전까지 거의 백만달러에 가까운 헌금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가우처는 당시의 사회 성화인 사회적 복음운동(Social Gospel Movement)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사회적 불의를 해결하고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큰 틀에서 목회를 통해 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사회적 책임과 연결시키고 신앙이 사회 곳곳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보면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구원이 아닌 사회적 정의를 실현 할 수있다는 실천적인 측면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근본에는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성숙을 이끌어내는 과정이라고 여겼고 이러한 도덕적 성숙의 기준은 신앙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복음운동에 영향을 받은 가우처의 사상은 신앙이 도덕적 기준의 근본이 되며, 그 도덕적 기준을 근거로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 원동력이 교육이 되는 것이었다.
【1873년】1873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일본선교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였는데, 중국 개척 선교사로 25년 사역을 마치고 1873년부터 일본 개척 선교사가 된 디킨슨대학 20년 선배 매클레이를 지원하는 형태로 시작.
【1875년】1875년 헌팅턴에비뉴교회를 담임하였다.
【1877년】1877년 12월 볼티모어의 의사이자 대부호였던 존 피셔(John Fisher)의 딸 메리 세실리아(1850-1902)와 결혼하였는데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부인의 지원을 받아 21년 목회하는 동안 15개 교회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878년】1878년 길모어교회를 담임하였다.
【1880년】1880년 흑인들을 위한 센터네리성서학원(후의 모건대학)을 설립하였다.1880년 미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WFMS)를 통해 중국 텐진에 일찍 죽은 처제를 기념하는 ‘이사벨라병원’을 설립하였고 중국 화서(華西)선교부 설립과 푸저우(福州)지역 교회 건축, 충칭과 청두 지역 매일학교 설립을 지원하였다.
【1881년】1881년 스트로브릿지교회를 담임하였다. 1881년 일본에서 귀국한 매클레이로부터 기독교 종합대학을 설립할 계획을 듣고 1만 8천 달러를 기부하여 도쿄 중심가에 에이와(英和)학원 부지와 건물을 마련하였다. 이 학교는 후에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으로 발전하였다.
【1882년】1882년부터 미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를 통해 인도 봄베이와 럭나우 지역에 120개 학교를 설립, 지원하였으며 라오스와 필리핀, 말레이시아 선교를 후원하였고 아프리카와 중남미, 유럽의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지역 선교도 후원했다. 가우처 부부가 평생 교회 건축과 교육 및 국내외 선교사업에 후원한 금액은 25만 달러가 넘었다. 1982년부터 1912년까지 미감리회 4년 총회 대표로 계속 참석하였고 남북 감리회 통합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면서 해외선교, 특히 아시아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후원하였다.
【1883년】1883년부터 1891년까지 미국 감리교회 조직연회(1784년)가 개최되었던 볼티모어제일교회(후의 러블리레인교회)를 담임하였다. 중국 푸저우 영화학원(英華學院) 신학부를 설립 후원하였다. 1883년 9월 12일 조선 국왕의 특사로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DC로 가던 견미사절단(보빙사, 민영익) 일행을 기차 안에서 만나 수행단장인 민영익과 대화한 결과 한국선교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11월 6일 뉴욕의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 한국선교에 착수할 것을 제안하며 선교비 2천 달러를 기부하였다.

최초의 서양 사절단인 보빙사 일행.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연합뉴스 자료 사진]
한국 개신교 선교사(宣敎史)에서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와 가우처(John F. Goucher)목사의 만남이 언급되고 있다. 가우처는 동북아시아의 교육선교와 연관이 많았는데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青山学院大学) 대학교의 전신인 3개의 학교 중 매클레이(R. S. Maclay)가 세웠던 감리교 선교 신학교(Methodist Mission Seminary, 1879)의 기부하여 설립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가우처와 매클레이는 중국과 일본 선교를 통해 문호가 개방되지 않았던 한국에 선교를 오래전부터 인식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가우처는 보빙사와 만났던 의미를 “하나님의 섭리”, “선교의 기회”로 보고 있어 그 의미를 선교신앙적인 의미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만남이 우연이라고 소개되어 그 만남이 이루어진 배경이 극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보빙사와 개신교 전래 관계를 다루는 기존 연구를 토대로 2가지를 다시 고찰하고자한다. 우선은 미국 선교부가 보빙사를 만났던 과정이 우연이 아니었고 사전에 이들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한국선교에 대한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살펴보고 다음으로는 이들이 개신교 전래에 끼쳤던 두 갈래의 영향을 살펴보겠다. 기존 연구와 달리 보빙사의 미국 파견과 일정을 주관하였던 푸트 공사는 사전에 ‘우리의 몫은 보빙사절의 보고와 감명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미국의 캘리포니아 상인들에게 미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줄 것을 공지했었다. 푸트공사의 사전에 공지한 내용은 ‘보빙사의 미국 시찰이 향후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 강화에 큰 역할을 할 것’과 ‘한국사절들에게 미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 한미무역에서 캘리포니아 무역의 몫을 높일 것’을 권고했다. 즉, 보빙사절단 파견 전에 푸트는 사전에 보빙사에 대한 이동경로와 정보를 미리 건네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보는 선교부의 일본 주재 선교사를 보빙사 파견에 대하여 자국이었던 미국 선교 본부에 서신을 보냈다. 미국의 신문매체였던 ‘뉴욕타임즈(The Newyork Times)’, ‘뉴욕헤럴드(New York Herald)’, ‘보스톤포스트(Boston Post)’를 비롯하여 각 지역의 언론사가 보빙사의 미국 방문을 특필하였으며 방문경로까지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보빙사의 방문과 경로가 미국 내 일반인들에게 많이 노출되었던 것이다. 보빙사의 미국방문으로 미국의 언론지를 통해서 보도 되었던 기사는 개신교 선교본부와 그와 연관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사에서 서술되었던 내용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보빙사의 파견으로 민영익과 미국의 가우처(John F. Goucher)박사를 만나는 과정이 우연으로 되어 있지만, 미국 선교부는 보빙사가 미국에 답사 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특히, 가우처가 있는 볼티모어의 신문에서는 일본도착과 샌프란시스코 행 도착날짜, 구성원들의 이름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보빙사를 만나 선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던 배경은 다음의 서신 내용들과 무관하지 않다. 보빙사가 미국에 가는 동안 잠시 일본에 체류할 때, 루미스 선교사를 만났으며, 루미스는 미국의 길맨(E. W. Gilman)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하였다. “어제 저는 미국으로 가는(한국에서 일본을 거쳐 미국을 가는)한국의 부총리 민영익을 (일본에서)만났습니다. 그에게 미국 문명의 기독교적 측면을 보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 생각에 한국의 미래는 현재 외국에 나와 있는 자들의 영향력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고 봅니다. 그들은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과 같으며, 수백만 명의 운명이 그들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사절단 대표는 왕비의 오빠라고 들었습니다. 그가 일정 기간 미국에 체류한다면 십중팔구 많은 미국 문명을 한국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루미스의 편지는 미국의 길맨 총무에게 보내졌고 민영익을 비롯한 보빙사가 기독교에 호감을 갖도록 부탁하였다. 그 이유는 민영익에게 기독교와 근대 문명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게 하여,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가우처 문서 가 아직 발굴되지 않아 보다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가우처의 조선의 선교에 대한 구상과 계획이 보빙사 만남 이전부터 있었다. 최근 그에 대한 연구가 지속된 가운데 보빙사와 가우처의 만남에 대한 재고가 이루어지고 있다. 보빙사가 가우처의 집이었던 알토데일(Alto Dale) 저택에 방문했다는 것이다. 가우처는 당시 해외 내·외빈을 접견하고 초청했던 장소로 자신의 집인 알토데일을 이용했는데 보빙사 역시 집으로 초청하였다고 한다. 아펜젤러(H.G. Appenzeller)는 선교보고서에서 “가우처는 보빙사절단이 워싱톤으로 가는 길에 민영익과 친해졌고 자신의 집에 초청했다”고 했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 연구에서도 보빙사와 가우처의 만남은 기차 안에서 만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 가우처가 보빙사를 처음 만났던 장소가 기차 안이었고 그 이후에 자신의 볼티모어 집에 보빙사를 초빙하였다는 점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보빙사의 경로를 살펴보자. 그들이 여행을 보고한 기록에 의하면 미국 내 경로가 다음과 같다. 인천을 출발하여 1883년 7월 일본 도쿄(東京)에 도착한 이들은 1개월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미국행을 준비했다. 그리고 8월 15일 태평양횡단 여객선 아라빅(Arabic)호에 승선하여 20여일 정도 지난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입항하여 팰리스호텔(Palace Hotel)에서 숙박을 했다. 이곳에 머물면서 프레시디오(Presidio)육군기지 등 상공회의소, 유니언 칠공소 등을 방문하였다. 9월 7일, 대륙횡단 철도를 카기 위해 새크라멘토(Sacramento)역으로 가서 센트럴 유니온 퍼시픽(the Central and Union Pacific Railroads) 철도를 타고 워싱턴으로 이동했다. 예상 시간은 1주일이며 이들의 주요 정착지는 “새크라멘토(출발역)-솔트레이크 시(Salt Lake City)-오그덴(Ogden)-오마하-시카고-클리블랜드(Cleveland)-피츠버그(Pittsburg)-워싱턴”이였다. 1883년 9월 13일자 뉴욕타임지를 살펴보면 이 기차는 북서쪽 철도를 이용하여 시카고에 9월 12일 오후 2시 30분에 도착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어서 9월 15일에 워싱턴에 도착해서 앨링톤호텔(Arlington Hotel)에 투숙했다. 펜실베니아에 9월 17일 오후 5시 30분 도착하고 9월 18일에 뉴욕에 도착하여 피프스 에비뉴 호텔(Fifth Avenue Hotel)에서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아서(Chester Alan Arthur)대통령과 프레링휘센(Frederick T. Frelinghuysen) 국무장관과 만남을 가져 신임장 제정식을 가졌다. 이후 미 동부지역을 다녀오는데 보스턴 도착 9월 22일(1883년 9월 23일자 뉴욕 타임지) 보스턴에서 산업시설 및 군사시설을 시찰하고 9월 26일은 카지노 및 극장관람 다시 워싱턴으로 9월 29일에 도착한다. 이후 워싱턴에 체류하면서 10월 16일 오던 길을 따라 귀국한다. 이상의 미국 내 보빙사의 경로를 간단히 살펴보았으며, 이를 살펴볼 때에 보빙사와 가우처 목사가 만난 시기는 시카고에서 워싱턴으로 이동하는 1883년 9월 13-15일 사이에 가우처 목사를 만났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펜젤러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들은 이후에 볼티모어(Baltimore)에 있는 가우처의 저택(Alto Dale)에 초청을 받았는데 그 날짜는 일정, 거리와 시기상 9월 29일 이후인 워싱턴 체류기간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워싱턴에서 20일 가량 머물면서 카지노, 극장, 백화점 등을 활발히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에 가우처 저택에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1884년】1884년 1월 일본의 매클레이에게 편지를 보내 서울을 방문하여 선교 가능성을 타진해 볼 것을 부탁하였다.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 서울을 방문, 미국공사관을 통해 선교사업 의향서를 제출하여 7월 2일 외부협판 김옥균을 통해 “미국인들이 들어와 학교와 병원사업을 해도 좋다”는 국왕의 허락을 받았고 그 결과 미국 북장로회와 미감리회 개척 선교사들의 내한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가우처는 ‘아시아 선교개척 후원자’란 칭호를 얻었다. 보빙사절단의 미국 인식은 당시 개화를 이끌었던 김옥균과 조선 정부의 개화정책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미국에서 보빙사절단을 만났던 가우처는 한국 선교의 시작을 위해 1883년 11월 6일에 5000달러를 후원하면서 오랫동안 동북아 선교를 담당했던 미국 북감리교 소속의 재일(在日)선교사 매클레이(R. S. Maclay)에게 한국 선교를 요청했다. 이후 매클레이는 한국에 선교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내한하였는데 이때 선교가 가능하다고 알려주었던 인물이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은 기독교에 대한 태도와 인식 변화 이후 일본에서 매클레이와 친분을 쌓았던 터라 고종이 ‘선교회가 교육과 병원 사업을 허가’하기 위해 도와주었다. 매클레이는 당시를 회상하며 김옥균이 이렇게 자신에게 친절하게 안내했던 이유를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내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1884년, 우리가 왕에게 올린 청원은 성공적이었다...... 지금 돌아보건대, 아마도 그(김옥균)는, 정적들이 악질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충고 받고 그들의 냉혹한 적대행위에 의해 궁지에 몰리게 되고 자신의 암살이 절박하다는 의식을 갖게 됨에 따라, 서울에 있는 외국인들의 점증하는 영향력과 도덕적인 지지가 정치가이자 개혁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강화시키고, 위협적인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 줄 것이고, 한국의 공무에 대한 확고부동한 통제력과 아울러 장기집권을 개화당에게 갖다 줄 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희망을 키웠던 것이다.” 김옥균이 기독교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나서 선교사들은 그에 대하여 “기독교 선교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로 그려나갔다. 하지만 그 입지는 민씨 세력을 비롯한 친청세력으로 인해 조선 정부 내에서 점차 갈등이 심화되어갔다. 결국 그 갈등이 점차 극에 치달아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게 된다. 가우처는 선교비만 후원한 것이 아니라 일곱 번에 걸쳐 아시아 선교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매클레이 선교사는 가우처 박사의 부탁과 미국 선교위원회의 정책에 따라 조선을 방문하게 된다. 그는 부인과 함께 1884년 6월 8일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나가사키를 거쳐 6월 23일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다음 날인 6월 24일 일본 영사관에서 마련해준 가마를 타고 한양에 입성한다. 개신교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한양에 입성한 것이다. 한양에서는 미국 공사 푸트의 영접을 받으며 며칠을 머문다. 6월 30일 일본에서 교류한 바 있는 김옥균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선교 청원서(제안서, 의향서 등으로 지칭하기도 함)를 놓고 나온다. 조선에서 의료와 교육 사업을 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일본어로 쓴 선교 청원서는 두 개의 경로로 고종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김옥균이 7월 2일 입궐하여 고종에게 선교 청원서의 내용을 설명하고 긍정적 답변을 들었다. 매클레이 선교사는 다음 날(7월 3일) 그 소식을 듣고 고종이 윤허한 것으로 보았다. 다른 경로는 미국 공사관을 통해 선교 청원서가 고종에게 전달된 것이다. 매클레이 선교사가 미국 공사관에 머물며 공사관을 통해 고종에게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윤치호 일기> 1884년 7월 4일 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새벽에 예궐하여 미국 상인(상선)의 내해 운항(內海運航)을 허가할 것, 미국인에게 병원 및 학교의 설립을 허가할 것, 전신 설치를 허가할 것 등을 아뢰었다(奏許).” 미국 공사관원이었던 윤치호의 일기에서 두 가지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하나는 매클레이 선교사가 중점을 둔 사안인 병원과 학교의 설립 외에 미국 상인의 내해 운항과 전신 설치 건이 포함된 것이다. 이것은 미국 공사관에서 추가 의제로 포함했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의 잇권과 관련된 건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7월 2일 이미 고종이 윤허한 것으로 김옥균으로부터 들었는데 7월 4일에 ‘허가할 것’을 고종에게 아뢴 것이다. 아직 허가가 안 되었거나 허가 소식을 알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매클레이 선교사가 고종을 직접 알현했는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일부 글에서는 알현했다고 적고 있지만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윤치호 일기에도 알현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어쨌든 2주 정도 머물면서 고종에게 선교 청원서를 전달하고 긍정적 답변을 받았다는 점에서 매클레이 선교사와 가우치 박사의 소망은 실현되었다. 고종의 윤허 소식을 들은 매클레이 선교사는 당시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왕의 호의적인 반응이 너무 신속하고도 완벽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주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김옥균에게 나를 위해서 이룩해 준 그의 훌륭한 업무 수행에 충심으로 감사드린 후에, 복잡한 거리로 나와 거닐면서 자신에게 ‘나는 허락을 얻었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리고 매클레이 선교사는 가우처 박사가 부탁한 감리교 선교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푸트 공사에게 요청해 공사관 터 부근의 땅을 구입했다. 이곳은 1884년 9월 입국한 미국 장로교 의료선교사 호러스 N. 알렌의 집터가 된다.

구한말 한식 이화학당(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연합뉴스)
그런데 고종이 미국인에게 병원 및 학교 설립을 윤허한 것이 매클레이 선교사가 청원한 것을 윤허하는 수동적 대응이 아니라는 해석이 있다. 고종의 부국강병 종합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미국 선박의 한반도 항해(교통망, 무역, 경제 등)와 미국인들에게 병원(사회복지)과 학교(교육사업) 설립 그리고 전산(정보 통신) 설치 등의 프로젝트가 고종이 근대화를 이루려는 계획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당시 홍영식 일행이 1883년도 연말에 귀국하여 복명기를 제출했고, 민영익 일행도 세계 일주를 마치고 1884년 5월 말 귀국한 시기였다. 특히 홍영식의 복명문답기에는 미국의 교육, 의료, 교통, 전기 등 선진문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고종에게 보고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고종은 푸트 공사의 부임에 대하여 ‘춤을 출 듯이 기뻐했다’고 할 정도로 미국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컸다. 이런 분위기에서 고종이 근대화에 대한 종합프로그램을 그리고 있었다는 해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보빙사 이후의 근대화 프로그램들이 이를 반영한다.
가우처 박사와 매클레이 선교사로 이어지는 조선 선교 노력은 조선에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다. 가우처는 1907년 처음 조선을 방문한 이후 1910년(2차), 1913년(3차), 1915년(4차), 1919년(5차), 1920년(6차) 등 총 6차례 한국을 방문한다. 그 과정에 배재학당, 연합기독교대학(연희전문학교), 이화학당의 부지와 건축 후원을 했다. 교회 건립과 선교활동의 지원에도 많은 헌신을 했다. 가우처 박사를 기념하여 2015년 9월 서울 중앙교회는 ‘가우처 기념예배당’ 헌정식을 거행하고 가우처 흉상을 봉안하였다.

한국에 장로교와 감리교를 전파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고종 윤허 일년 후인 1885년 4월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선교 차 조선에 공식 입국하여 기독교 선교시대를 열게 된다. 비록 초기에 예배와 포교는 할 수 없었지만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근대 병원과 대학이 설립되면서 조선은 역사의 빛을 경험하게 된다. 1884~1945년 동안 한국에 파견된 외국 선교사는 총 1,529명이다. 그중에 여성 선교사가 1,114명으로 72.9%를 차지한다. (출처: 내한 선교사 13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기독교 대한감리회는 매클레이 선교사의 방문 해를 기점으로 2024년 한국 선교 140주년 행사를 했다. 기독교 전체로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선교 입국을 기점으로 올해(2025년) 한국 선교 140주년 행사를 가졌다.
【1885년】1885년 디킨슨대학에서 목회학 박사(D.D.) 학위를 받았다. 1885년 볼티모어여자대학(1910년 이후 가우처대학)을 설립하였다. (1890년부터 1908년까지 학장을 역임하였다)
【1899년】1899년 디킨슨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L.L.D.) 학위를 받았다.
【1901년】가우처 목사가 발탁해 면접하고 후원해 한국에 파송받은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는 1901년 필라델피아를 방문해 한 모임에서 한국선교의 아버지는 볼티모어출신의 가우처 목사라고 말했다.
【1907년】1907년 1차로 한국을 방문하다. 인도와 중국ㆍ일본을 거쳐 1907년 6월 16일 한국을 방문, 1주간 머물면서 서울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감리회 한국선교연회에 참석하였고 갓 일어난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실상을 목격하고 돌아갔다.
【1910년】1910년 중국의 화서협합대학(華西協合大學, 후의 사천의과대학) 설립을 후원하였다. 1910년 2차로 한국을 방문하다. 1910년 10월 27일에 내한, 11월 1-2일 서울에서 한국선교 25주년 기념대회를 주재하고 “에든버러대회의 인상”이란 주제로 강연하였다.
【1913년】1913년 3차로 한국을 방문하다. 중국과 일본을 거쳐 1913년 10월 15일 부산에 도착, 서울에서 데라우치 총독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한 후 개성과 평양 선교현장을 방문하였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세계선교대회 계속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시베리아 열차편으로 11월 1일 출국했다.
【1915년】1915년 4차로 한국을 방문하다. 중국과 필리핀ㆍ일본을 거쳐 1915년 4월 17-21일 한국을 방문, 건축비를 후원한 서울 배재학당 동관 정초식에 참석하였고 교육담당 선교사 및 총독부 교육정책 담당자와 회동하여 기독교 사립학교 정책에 대해 협의하였다.
【1919년】1919년 5차로 한국을 방문하다. 일본을 거쳐 1919년 11월 6-11일 서울과 평양을 방문, 3ㆍ1독립운동 열기가 남아 있는 한국의 정치ㆍ사회 상황을 목격하였고, 서울 배재학당과 신촌 연합기독교대학(연희전문학교) 건축현장을 둘러본 후 이화학당의 대학(이화여자전문학교) 부지와 건축 후원을 약속했다.
【1920년】1920년 6차로 한국을 방문하다. 75세의 나이로 1920년 9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한 후 세계대회에 참석했던 미국 주일학교 대표 50여 명과 함께 10월 19일 내한, 10월 20일부터 서울 정동교회에 개최된 미감리회 한국연회에 참석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와 이화학당 대학교 부지를 둘러본 후 배재학당 아펜젤러 흉상 제막식에 참석하고 운동장 확장공사비 후원을 약속하였다.
【1922년】귀국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922년 7월 메릴랜드 볼티모어 파이크스빌 자책에서 별세하였고 유해는 볼티모어 드루이드릿지(Druid Ridge)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 기념사업】
한국에서는 1922년 9월 미감리회 한국연회에서 추도식을 거행하면서 ‘가우처기념예배당’ 건축을 결의하였고, 1926년 종로 향정동 중앙교회가 벽돌예배당을 지으면서 그 명칭을 썼다.
2010년 6월 배재대학교에서 ‘배재학당 창립 126주년 기념 가우처 국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 중국과 일본ㆍ한국에서 가우처의 교육서교 활동을 조명하였고 2015년 9월 중앙교회가 ‘가우처기념예배당’ 헌정식을 거행하면서 가우처 흉상을 봉안하였다. 충남 서천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은 부속건물로 ‘가우처홀’을 건축하고 볼티모어 러블리레인교회 역사자료실에 보관되었던 가우처 유물 일부를 기증받아 전시했다.
(출처- 가우처 [J. F. Goucher, 1845~1922] 미국미감리회 목사. 교육가. 아시아 선교후원자.)

가우처 박사의 집 알토데일 (출처: 구한말 미국 사절단 보빙사(報聘使) 제2부 운명의 개척자. KBS 역사실험 2012.03.17. 방송 편)

가우처 목사의 무덤 비석. (출처- 가우처, 언더우드, 아펜젤러… 기막힌 섭리로 한국 온 첫 선교사들 : 선교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볼티모어 묘지에 묻혀 있는 가우처의 무덤, 그보다 20년이나 먼저 죽은 아내 메리 피셔 가우처(Mary Fisher Goucher)와 함께 말없이 묻혀 있었다.

러블리 레인(가우처) 교회 (출처- 가우처, 언더우드, 아펜젤러… 기막힌 섭리로 한국 온 첫 선교사들 : 선교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가우처(J. F. Goucher, 1845-1922)가 목회했던 볼티모어의 러블리 레인 교회(Lovely Rain Church)는 볼티모어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미국 연합감리회(UMC)의 첫 번째 교회였다. 1772년 시작한 이 교회는 1784년 12월에 미국 감리회의 첫 번째 연회가 열린 곳으로, ‘미국 감리교의 어머니 교회’라 불리고 있었다. 육중한 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교회는 후일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에서 펼쳐질 놀라운 선교의 역사를 예고하는 듯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우처 박사가 목회했던 볼티모어의 러블리 레인 감리교회 건물 ⓒ위키미디어

가우처 목사가 조선 선교를 시작하며 건축(1884년)하여 오늘에 이른 러브리레인 교회. (사진제공 양국주)
(출처 : 뉴스앤조이(https://www.newsnjoy.or.kr)
<중앙감리교회>

2015년9월 가우처기념예배당

중앙교회 교회연혁 (출처- 중앙감리교회 | 행사 앨범)
1890. 아펠젤러(H.G.appenzeller) 선교사에 의해 창립
1902. 아펜젤러 선교사가 목포 앞바다에서 순직할 때까지 비약적으로 성장함
민족독립운동, 개화운동, 교육과 청년운동에 앞장섬
1. 대동서시(도서 무료 열람실 겸 서점)
2. 종로 여자소학교(이화학당의 분교)
3. 종로교회 유치원(1901년 어린이 교육)
4. 중앙보육학원(유치원 교사 양성기관 – 현 중앙대학교가 됨)
5. 황성기독청년회(1903년 창립, 1915년까지 교회 소속됨)
6. 3.1운동과 학생운동의 본거지(박희도 전도사와 김창준 목사)
7. 대한체육회 창설
1919. 민족대표 33인 중 담임목사 김창준 목사와 박희도 목사가 참여함
1926. 가우처기념예배당으로 건축 및 명명
1930. 교회 이름을 종로교회에서 중앙교회로 개칭
1975. 현 위치로 교회를 이전
1981 ~ 1983 교회건축 (하나로빌딩: 지상 12층, 지하 3층)
1990.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 행사
1. 필리핀, 태국에 선교사 파송(정성수, 오세관 선교사)
2. 사팡팔라이교회(필리핀) 파송
3. 하나로 국민운동중앙회 창립
1991. 필리핀 레이떼 지역 가낭가 교회 건축봉헌(김양환 목사 은퇴기념)
1994. 필리핀 바사정착촌 선한목자교회 건축봉헌(유인희 장로 은퇴기념)
1995. 필리핀 비나투보화산지대 마와갓부족 초등학교 교실, 도서관, 교무실 건축
1999. 100주년 기념 건축봉헌(하나로중앙교회 최 헌 목사)
꿈이있는교회(하정완 목사) 개척 창립
2000. 학교법인 관악학원인수경영(현 서울관광고등학교)
중국 북경(김건상 선교사 파송), 중국 단동(주재훈 선교사 파송)
2006. ○○국 ○○○ 선교사 파송 제27대 담임목사로 정의선 목사 취임
서울연회에서 정영관 목사 은퇴
2009. 사회교육관 리노베이션 봉헌
2010. 창립 120주년 기념 행사
1. 예배당 리노베이션 봉헌
2. 하나로 한중교회(유 석 목사) 개척 창립
3. 북녘 어린이 우유 전달 출항식(컨테이너 선적)
2011. 중앙교회 추모관 구입
2012. 제5회 대한민국 환경.사회봉사대상 수상(월드그린 환경연합 중앙회 주관)
2013. 예진교회(최 운 목사) 개척 창립 애찬실, 주방, 찬양대실(12층) 리모델링 봉헌
수양관 구입(대명콘도 회원권 3개)
2015년9월 가우처기념예배당 헌정예배, 창립 125주년 기념 행사
1. 가우처 흉상 제막식
2. 창립 125주년 기념 도서 『한국선교의 개척자(가우처,매클레이,아펜젤러)』 출판
북한교회 재건 현판식
2017. 제 28대 담임목사 이형노 목사 취임(현)
서울연회에서 정의선 목사 은퇴

가우처 목사 흉상
중앙감리교회는 11일 창립기념일을 맞아 가우처 목사의 흉상 제막식과 ‘한국 선교의 개척자-가우처, 매클레이, 아펜젤러’ 출간 기념회를 개최했다. 개별 교회사를 써봐야 담임목사의 공적 자랑이 되기 쉬워 교회와 직간접으로 인연이 있는 선교사들을 조명한 책을 출간했다는 설명이다. 현재 교회 한편에 있는 가우처 목사 흉상에는 사연이 있다. 19대 방훈 담임목사의 아들인 방은호 장로가 옛 예배당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다 미국에서 제작해 기증한 것이다. 특히 가우처 목사가 활동한 미국 볼티모어 러블리 레인 교회에서 전달식을 가진 뒤 한국에서 다시 행사를 가져 그 의미를 더했다. 정 목사는 “가우처 흉상은 잊혀지고 있는 초기 선교사들의 열정과 헌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가우처 목사의 삶은 분열이 아닌 연합과 소외된 이웃을 위한 배려를 상징한다”고 했다.
< 선교사 아펜젤러순직 기념관(서천 동백정)>

아펜젤러순직 기념관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동백정교회 옆에 세워진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기념관은 당시 파선된 배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새로 지은 동백정교회와 구 교회도 아직 남아있다. 충남 서천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은 부속건물로 ‘가우처홀’을 건축하고 볼티모어 러블리레인교회 역사자료실에 보관되었던 가우처 유물 일부를 기증받아 전시했다. 미국 감리교회의 시작이자 한국선교의 출발지 러블리 레인 교회와 가우치 박사, 동양 은둔의 나라에 대한 가우치 박사의 관심과 지원이 한국선교의 시발점이다. 시카고에서 워싱턴으로 가던 열차 안에서 가우처대학의 학장이었던 가우처(John F. Goucher) 박사가 민영익 일행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한 옷차림의 한국사절단에 호기심과 관심이 생긴 가우처 박사는 이들에게 말을 걸게 되었고, 동양의 은둔국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그 후 본격적인 실행계획을 추진해 아펜젤러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존 프랭클린 가우처 박사

존 프랭클린 가우처 박사

존 프랭클린 가우처 박사 부인 부채

존 프랭클린 가우처 박사 서신

러블리 레인 교회

볼티모어 연회 기념 배지, 러블리 레인 교회 기념 접시

존 프랭클린 가우처 박사

존 프랭클린 가우처 박사

존 프랭클린 가우처 박사 바이올린

존 프랭클린 가우처 박사

존 프랭클린 가우처 박사

존 프랭클린 가우처 박사

존 프랭클린 가우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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