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7.8.~1851.8.9.)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는 독일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이다. 독일 루터교 목사인 귀츨라프는 1866년에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 34년, 1884년에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년, 1885년 입국한 미국 선교사인 언더우드, 아펜젤러 보다 53년이나 앞서 1832년 조선을 선교하기 위해 방문한 인물이다.
(1) 칼 귀츨라프는 1803년 7월 8일 프러시아 포메라니아(Pomerania)의 피리츠(Prytz)라는 작은 마을의 마구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국적은 독일이지만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다. 네 살 때 어머니가 죽고 계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14살에 스테틴시에 있는 허리띠 제조공장의 공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개혁파 목사의 아들 하이덴라이히(Heidenreich)를 만나 목사가 되려는 희망을 함께 나누었다. 1820년 17살이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사건이 있었다. 프러시아 왕 프리데릭 빌헬름 3세가 스테틴 시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귀츨라프와 하이덴라이히는 공동 작성한 장문의 시를 광장 중앙 환영 행사장에서 왕에게 전해 드린 것이다. 이 행동은 굉장한 결례이지만, 그 시를 읽은 왕은 그들의 경건함과 애국심에 감격하여 두 청년을 불러 칭찬하고 친히 각의를 열어 청년들의 소청을 들어주도록 결의했다. 귀츨라프는 과학을 공부하여 해외 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 1821년 베를린에 있는 야니케 선교학교의 왕립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 루터교 학교에서 넘치는 학구열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렬로 6개 국어를 습득했다고 한다. 1826년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은 후, 정식 선교사로 파송 받아 말래카를 거쳐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로 도착한 해는 1927년 1월 6일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이다. 그는 조선에 자신의 대한 자신의 방문이 효과 있는 선교의 결실, “이 외딴 나라에 좋은 씨가 뿌려졌고, 머지않아 영광스럽게 싹이 돋아날 것이고,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기대했다. 1829년 네덜란드선교회와 인연을 끊고 중국인이 많은 태국 방콕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시암(Siam)어로 성서를 번역하였다. 아내 메리 뉴엘(Mary Newell, 1794~1831)이 2월 16일에 쌍둥이 여아의 출산 과정에서 사망하고, 쌍둥이 딸들도 곧 숨졌다. 1831년 천진(天津)을 거쳐 마카오에 도착하여 선교사 모리슨을 만나 절친한 동역자가 되었고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선장이며 기독교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린제이(H. H. Lindsay)와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같은 해 6월 제1차 전도여행(1831.6.3.~12.13.)을 떠나 만주로부터 금주(錦洲)에 이르는 장거리 전도를 하였다. 1832년 2월 26일, 린제이와 함께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인 로오드 암허스트(Lord Amherst) 호에 의사겸 통역관으로 동승하였다(제2차 전도여행, 1832.2.26.~9.5.). 이 배의 파송 목적은 상업적인 데 있었으나 그는 모리슨이 준 한문 성경을 다량으로 싣고 떠나 그의 목적이 개척선교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배는 마카오를 출발하여 산동 해안을 탐방한 후 한국으로 방향을 돌렸다. 같은 해 7월 17일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 근해 백령군도의 한 섬에 정박하여 지방장관을 통하여 통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조정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25일 충청도 서해안 홍주(洪州) 고대도(古代島, 현재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관할 하에 있는 섬)에 정박했다. 홍주목사 이민회(李敏會)와 수군우후 김영수(金瑩綬)를 통하여 순조(純祖)에게 서양 물품과 함께 성서 2권, 교리서 수십종이 포함된 헌상품과 함께 영국과의 통상을 요구하는 주문(奏文)을 올렸다. 회답을 기다리는 한달 가량 지방 주민들과 접촉하면서 그는 주민들에게 성경과 전도문서와 의약품을 나누어주고 감자 종자를 주며, 그 심는 법과 저장법을 알려주었다. 그는 또한 이민회의 서생 양이(김양선은 이를 양씨로 본다)의 도움을 얻어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또한 달레(C. 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배에 「야소기독지교(耶蘇基督之敎)」라는 한문으로 쓴 큰 깃발을 달고 있어 이를 보고 천주교인들이 관원의 눈을 피해 배 위에 올라갔으나 기대했던 프랑스나 포르투갈의 신부가 아닌 프로테스탄트 목사가 맞이하자 실망하여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2) 귀츨라프는 한글로 주기도문 번역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주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귀츨라프는 가는 곳마다 조선인들이 읽을 수 있는 한문으로 된 성경이나 한문 전도 서적을 나누어 주었으며, 순조 대왕에게는 로버트 모리슨과 밀른 선교사가 번역한 한문성경인 신천성서(神天聖書)를 진상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이 한자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조선만의 문자인 한글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배워서 최초로 서양에 체계적이고 학술적으로 한글을 소개하여 세계에 알렸다. 그의 영문 소논문 ‘한글에 대한 소견’은 영어권은 물론 독일어로 일부 번역되어 독일어권에 소개되어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곤궁한 조선인들을 위해 서양감자를 심고 재배하는 법을 실제로 조선인들의 눈앞에서 보여 주었고, 글로 써 남겨 주었다(1832년 7월 30일). 또한 야생 포도로 음료를 만드는 법을 전수했다(1832년 7월 31일). 귀츨라프는 충청도 기착지인 고대도 도착(1832년 7월 25일) 이후 줄곧 환자들을 위해 약을 처방했다. 한 예로 60명의 노인 감기환자를 위한 충분한 약도 처방(1832년 8월 2일)했는데 이 기록은 조선에서 서양 선교사가 최초의 서양 의술을 베푼 기록이다. 귀츨라프 선교사 일행은 1832년 7월 17일 장산(장산곶)에 도착한 후 22일 녹도(록도) 근처 불모도(불모도)를 거쳐 25일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소재한 고대도에 정박했다. 그들은 홍주 목사 이민회 등의 관리들을 만나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조선 국왕에게 정식으로 통상을 청원하는 서한과 한문 성경을 비롯한 26종의 책자와 망원경을 비롯한 많은 선물을 순조 임금에게 진상하도록 전달했다. 조정의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고대도에 20일을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과 전도문서와 서적 및 약품을 나눠주고, 감자를 심어주고, 감자와 포도주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가르쳐 주고, 한글 자모를 받아 적은 다음 후에 이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약 20일간 기다리면서 선교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조정에서 내려온 통역관 오계순(吳繼淳)은 조선으로부터 중국의 변방으로 중국의 허락 없이 통상할 수 없다는 정부의 의견과 헌상품을 되돌려 받고 떠났다. 그의 방한기간이 극히 짧았기 때문에 뚜렷한 성과는 볼 수 없었으나 한반도를 방문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최초의 한글 성서번역자라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1월에 모리슨이 편집자로 있는 ‘중국의 보고’(The Chinese Repository)라는 잡지에 소논문 형태로 “한글에 대한 소견”(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을 발표하였다. 1834년 모리슨이 죽은 뒤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1835년 영국 무역 감독관겸 수석통역관이 되었다. 일본 선교에 뜻을 두어 1837년 모리슨호를 타고 일본에 갔다가 포격을 받아 되돌아오고 말았다. 1837년 일본어로 요한복음ㆍ요한서신을 번역하여 싱가포르에서 간행하였다. 1843년 홍콩 관청에서 근무하였다. 1844년 중국인 선교사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다. 1851년 8월 9일 48세로 홍콩에서 사망하였고, 홍콩공원묘지의 개신교 구역에 안장되었다.
(3) 귀츨라프는 이후 제주도 일대를 둘러본 후, 조선, 중국, 만주, 일본을 잇는 선교기지로 알맞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선교기지인 제주도를 통해 조선을 비롯한 동북아 여러 나라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첫 번째 시작”을 언급하면서 동북아 선교를 위한 기본적인 전략을 처음으로 구상했다. 특히 고대도는 개신교를 전해야 한다는 확신으로 선교여행을 떠난 독일인 칼 귀츨라프가 뱃길을 따라 외연도-녹도-불모도-고대도 순으로 항해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귀츨라프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고대도를 기점으로 근처 도서와 내륙까지 선교활동을 벌인 곳으로 한국 선교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섬이다. 독일인 최초 선교사이기도 한 칼 귀츨라프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자신이 믿는 개신교를 전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목숨을 아끼지 않은 신념의 선교여행을 떠난 사람이다. 이러한 귀츨라프의 선교 역사적, 문화적 업적을 볼 때 궁극적으로 한국 개신교 선교원년의 역사 기록을 기존의 1884년/1885년 설에서 1832년으로 앞당겨야 할 것이란 지적이다.
(3) 칼 귀츨라프 선교를 기념하기 위해 2년 여의 준비 끝에 금년 3월 1일 은광교회에서 창립된 ‘칼 귀츨라프학회’(회장:오현기 교수, www.귀츨라프.com)는 독일 경건주의 배경 아래 귀츨라프가 한국과 해외에서 행한 선교사역에 대한 심도 있는 선교 역사적 연구를 진행하는데 취지를 두고 있다. 문화의 중계자이기도 한 귀츨라프는 서양 문화를 한국에 소개하는 세계화의 선구자인 동시에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세계에 알리는 한류의 전도사였다. 그는 토마스 선교사와 그 뒤를 이은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한국을 이해하는데 큰 길잡이가 되었다. 그동안 아쉽게도 귀츨라프에 대한 명성은 그의 탁월한 업적과 사역에 비해 가려져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학회는 귀츨라프의 선교 정신과 선교 신학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뿐 아니라, 기독교를 넘어 그가 관심을 기울였던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분야를 포괄• 통섭함에 있어서 귀츨라프의 기독교적 탐구정신을 본받고자 힘쓰고 있다. 이를 위해 외국 저명 교수들과 외국 저명 학술단체들과 함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이미 형성하여 공동연구를 진행키로 했으며, 이들이 편집자로 참여하며 ‘신학과 세계관’이라는 학회지를 발간했다.
(4) 고대도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관
고대도는 귀츨라프가 그 땅을 밟은 지 182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예장 합신총회(총회장:이주형 목사)에서는 2001년 86회 총회에서 고대도교회(담임:박원열 목사)를 귀츨라프 기념교회로 선포하고, 한국 최초 선교 기념교회(고대도) 건립 추진위를 발족, 전국의 교회들이 약 4억을 헌금하여 기념 예배당을 건립하고 2005년 헌당예배를 드렸다. 현재 기념교회 2층에는 귀츨라프 기념실이 마련되어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칼 귀츨라프 한국 선교 182주년 기념의 날’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는 백석대 조승규 교수가 ‘고대도 환경조형 프로젝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만들기’를 발표해 고대도의 기독교적 관광자원이 지닌 잠재력을 부각시켜 관광 활성화 방안을 모색했다. 조 교수는 세부 제안으로 세라믹과 유리를 재료로 한 ‘귀츨라프 등대’를 비롯해 둘레길 조성, 감자 포도 파종 체험장, 독일마을 조성, 귀츨라프 기념비 및 기념관 건립, 안항 추정지의 테마 공원화 등을 발표했다. 칼 귀츨라프학회 회장인 오현기 교수는 학술심포지엄 주제발표에서 “귀츨라프는 정치, 사회, 생활문화를 관찰하고 또 직접 조선인들과 교류하고 친선관계를 맺음으로써 귀츨라프 이전의 조선에 대해 기록한 다른 것보다 객관적이며, 친화적인 인간상을 가진 조선과 조선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면서 “고대도를 선교거점으로 한 그가 바랬던 것은 복음을 통한 조선과 조선인의 변화와 발전이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언급했다. 귀츨라프는 한국에 짧은 기간밖에 머무르지 못했고 또 당시에는 눈에 보이는 열매를 맺지 못했을지라도 최초의 한국 선교사답게 한국 선교의 길을 닦아놓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성과의 유무를 떠나서 귀츨라프는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고대도 역시 한국 최초의 선교지로 큰 의의가 있다. (출처 : 아이굿뉴스(http://www.igoodnews.net)
<카를 귀츨라프의 주요 저서>
Karl Friedrich A. Gützlaff, 『China Opened; or, A Display of the Topography, History ... etc. of the Chinese Empire, revised by A. Reed』(Volume One, 1838) Karl Friedrich A. Gützlaf, 『Notices on Chinese Grammar: Part I. Orthography and Etymology』(under pseudonym "Philo-Sinensis", 1842) Karl Friedrich A. Gützlaff,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and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the Loo-Choo Islands』(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귀출라프 선교사 석판화 1840년경 (소장 : OHK)
본 판화는 귀츨라프가 네덜란드선교회에서 선교사로 임직할때의 초상화로 추정되며 벱헨(목사가운에 착용한 넥타이) 전형적인 개혁파 목사의 것 이다. (출처- 귀츨라프 초상화 (석판화) – 칼 귀츨라프 학회)

귀츨라프가 수학한 베를린 선교학교 (Missionsschule in Berlin)
(출처- 귀츨라프가 수학한 베를린 선교학교 (Missionsschule in Berlin) – 칼 귀츨라프 학회)

베를린 보헤미야 베들레헴교회
보헤미야 왕국로 부터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종교적 자유를 찾기위해 온 종교적 난민이 주축이 된 교회이다. 이 교회의 예배당은 1735년에 베를린 미테에 완공되었다. 이 교회는 2차 세계대전에 완파되었는데 2012년에 스페인의 설치 미술가인 후안 갈라이사발이 과거 보헤미야 교회가 있던 자리에 철근으로 《도시의 기억 베를린》이란 작품명으로 공공조형물로 제작하여 설치하였다.(높이 31 M) 후안 가라이사발은 그의 작품 《도시의 기억 베를린》을 약 5m 크기로 축소 제작한 작품을 2016년 7월25일 대한민국 충청남도 보령시 소재 고대도에 직접 제작하여 세웠다([Memoria Urbana Berlin in Godaedo] ). 한국의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 칼 귀츨라프가 1832년 고대도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는 <제3회 칼 귀츨라프의 날(2016년7월25-26일)>에 《대구동일교회》가 설립 60주년 기념으로 《도시의 기억 베를린》제작 비용 전액을 부담했다. 《대구동일교회》는 베를린 보헤미아교회가 귀츨라프를 배출한 베를린선교학교를 설립했던 교회이기도 하지만, 선교와 관용 그리고 교파간의 상생을 상징하는 교회임으로, 이 교회가 21세기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크다고 생각하여, 가라이사발 작품의 한국 유치를 적극 추진했다. 베를린선교학교는 요하네스 예니케 목사 (Johannes Jaenicke)가 1800년 설립한 독일 최초의 선교학교이다. (출처- 베를린 보헤미야 베들레헴교회 – 칼 귀츨라프 학회)

귀츨라프의 편지 Prediger Wermelskirch에게(1850.10.16)
(출처- 귀츨라프의 편지 Prediger Wermelskirch에게(1850.10.16) – 칼 귀츨라프 학회)

귀츨라프 조선 항해기를 담은 최초의 단행본 (소장 : OHK)
The Journal of Two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 1832; the First in a Chinese Junk and the Second in the British Ship Lord Amherst, 1. ed., New York: John P. Haven, 183
(출처- 귀츨라프의 동아시아항해기 (1833년, 영문 1판) – 칼 귀츨라프 학회)

카를 귀츨라프(왼쪽)와 최근 발간된 책 '귀츨라프 선교사의 조선 방문'.
(출처 : 자유일보(https://www.jayupress.com)

귀츨라프가 익힌 한글 - 고대도 교회 앞 마당에 벽화가 있다. [출처]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칼 귀츨라프|작성자 제이콥

중국 푸젠 성 어부 복장을 한 귀츨라프(석판화, 1840년경) (소장 : OHK)
이 석판화는 홍콩에서 활동하던 화가 시너리(G. Chinnery)의 원화에 따른 것인데, 세실리에 브란트(Cäcilie Brand)에 의해 독일 라이프치히 August Kniesel 출판사에서 1840년경 인쇄됐다.
(출처- 중국 푸젠성 어부 복장을 한 귀츨라프 (석판화, 1840년경) – 칼 귀츨라프 학회)


귀츨라프가 1850년 독일을 선교보고차 방문했을 당시 독일 라이프치히 페트릭 교회에서
설교하는 모습을 담은 목판화 (소장 : OHK)
(출처-귀츨라프 (1850년, 목판화) – 칼 귀츨라프 학회)

귀츨라프의 필명중 하나인 선덕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요한복음, 『約翰福音之傳』, Singapore : 新嘉坡堅夏書院藏板, 총 60장. (Wylie no. 62; Walravens no. 185) (영인본소장 : OHK)

외국의 문학을 위한 잡지( Magazin fuer Literatur des Auslsndes, 1834년)
(출처- 외국의 문학을 위한 잡지( Magazin fuer Literatur des Auslsndes, 1834년) – 칼 귀츨라프 학회)

귀츨라프의 전인구확 『全人矩矱』 , 1836년

귀츨라프의 전인구확 『全人矩矱』 , 1836년
<충남 보령 고대도>

칼 귀츨라프 선교사와 현재의 보령 고대도 관광안내도
(출처- 【박신배 박사】 고대도를 하나님이 사랑하는 갓애도로 변화시킨 칼 귀츨라프 < 신학 < 성경 < 큐레이션기사 - 본헤럴드)

충남 대천항에서 약 50분 거리에 있는 고대도 (출처- 이 땅에 처음으로 기독교 씨앗이 뿌려진 섬마을)
고대도(古代島)는 충청남도 보령시의 삽시도에서 북쪽으로 4.5㎞ 떨어진 섬엔 조금 특이한 이름이 붙었다. 예로부터 마을이 형성돼 집터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하여 고대도라 불린다는데, 대체 언제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아주 오래 전엔 ‘고?’ 이라고도 불렸다는 사실 정도밖에. 면적이 0.82㎢에 불과한 이 섬에 약 200명의 섬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산다. 대천항과 오천항에서 각각 18㎞ 떨어져 있고, 태안반도 남쪽의 안면도 영목항과는 6.5㎞ 거리다. 고대도에 발을 내디디면 이 섬의 명물 중 하나인 방파제가 제일 먼저 반갑게 맞이한다. 방파제 옆에는 국립공원 안내 표지판이 서 있다. 이 일대가 청정해역을 자랑하는 국립공원이라는 얘기다. 방파제를 나와 오른쪽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빨간 등대가 서 있다. 등대를 지나 조금 더 가면 바위 단면이 날카로운 간단여가, 그 너머 북서쪽 끝에는 옛날 오천수영의 수군들이 가끔 드나들며 목을 지키던 조구여가 자리잡고 있다. 이즈음 알록달록 색칠돼 낯선 여행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물이 하나 있으니, 바로 청룡초등학교 고대분교다. 현재 이 학교 학생은 단 한 명. 이웃한 장고도에 18명의 학생이 있는 것과 견주면 잠시나마 쓸쓸함을 떨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쓸쓸함도 잠시뿐. 눈앞엔 섬을 통틀어 가장 멋진 가옥이 떡하니 나타난다. 분교 건물과 맞대어 지어진 이 건물은 십자가만 아니라면 도무지 무슨 건물인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다.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건물은 섬에 지어진 교회치고는 상당히 세련된 모양새다. 바로 고대도교회.

기암괴석과 금사홍송으로 둘러싸인 고대도 해안 절경. 이재언 제공
(출처- 이 땅에 처음으로 기독교 씨앗이 뿌려진 섬마을)

섬 곳곳엔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다. 섬을 한바퀴 둘러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재언 제공
(출처- 이 땅에 처음으로 기독교 씨앗이 뿌려진 섬마을)

고대도 등대십자가 앞 동판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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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 십자가를 재 점등하며
고대도 십자가는 1989년 고대도 교회 하옥희 권사의 임직 기념으로 당시 담임이었던 임종관 목사의 제안으로 현 위치에 설치되었다. 제작비는 하 권사에 의해 드려진 헌금(임승하 집사의 후원금 50만원)과 임 목사가 조달한 후원금으로 충당되었다. 고대도 십자가의 의의와 가치는 고대도가 1832년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독일인 칼 귀츨라프 (Karl Gützlaff, 1803-1851)가 한국에 와서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한 개신교 최초 복음 전래지로서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고대도 등대가 세워지기 이전에 등대의 역할을 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 있다. 실제로 ‘안면도 모래배가 십자가의 불빛을 보고 뱃길을 찾았고, 동네 사람들도 먼 바다의 고달픈 항해를 마친 후에 십자가의 불빛을 보고 위안을 받으며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도 십자가는 그간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십자가에 불도 꺼진 채 방치되었고, 부식되고 훼손된 채 철거될 위기에 놓여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대구 동일교회(www.dongil.org)가 고대도 십자가의 상징성과 역사적 의의를 다시 새기고자 온 성도의 뜻을 담아 고대도 십자가의 기능보강비용(개∙보수 및 유지비)전액을 부담하였다. 이를 통해 기존의 십자가를 더 큰 십자가(가로2.56m, 세로 4.36m)로 새롭게 대체하였고 첨탑의 높이도 더 보강하여 높였다(높이 14.36m). 하나님의 진리 등대인 십자가가 한국과 세계를 향하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길이 빛나기를 한마음으로 기도 드린다. 2015. 5. 28 대구 동일교회 오현기 담임목사 외 성도 일동
(출처- 고대도 등대십자가 해설 – 칼 귀츨라프 학회)

(출처- 평강스토리 - [한국성지답사_K1803] 고대도_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지)

고대도교회의 모습. 이 땅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소개한 카를 귀츨라프를 기리는 교회다. 이재언 제공
(출처- 평강스토리 - [한국성지답사_K1803] 고대도_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지 )
고대도라는 작은 섬은 유독 기독교와 인연이 아주 깊은 섬이다. 1832년 ‘로드 애머스트’라는 이름의 커다란 서양배가 갑자기 우리나라 서해안에 나타나 문호를 개방하고 통상을 요구한 적이 있었는데, 고대도는 바로 이 배가 한동안 머물던 섬이다. 당시 이 배엔 중국어 통역관 및 의사 노릇을 하는 29살의 독일인 카를 귀츨라프란 인물이 타고 있었다. 그해 7월25일 고대도에 도착한 귀츨라프는 홍주 목사 이민희를 만나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조선 왕(순조)에게 정식으로 통상을 요구하는 청원서와 한문 성경, 26종의 책자와 망원경 등을 진상하면서 조선 조정으로부터 통상 허가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조선 조정의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는 고대도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과 약품을 나눠주는 한편, 먹을거리가 변변치 못해 고생하는 섬사람들을 위해 감자를 심고 재배하는 법을 손수 보여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포도주와 포도즙 제작법도 전수했다고 한다. 또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해 주민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했다. 특히 귀츨라프는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조선에 독자적인 한글이 있다는 사실에 감탄해 한글을 기꺼이 배웠고, 이를 토대로 서양에 최초로 한글을 소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조선 조정으로부터 통상 허가를 받지 못한 채 8월12일 섬을 떠났으나, 귀츨라프는 훗날 동아시아 항해기를 책으로 남겨 미국과 유럽에 조선이란 나라를 널리 알렸다. 그가 남긴 ‘한글에 대한 소견’이라는 소책자는 독일은 물론 영어로 번역돼 여러 나라에 소개됐다.
고대도교회는 조선에 배를 타고 들어온 최초의 선교사인 귀츨라프를 기리는 교회다. 건물 1층은 작은 예배당이고, 2층엔 귀츨라프에 대한 자료들이 정성껏 보관돼 있다. 섬에 교회가 세워진 건 1982년. 그러니까 귀츨라프 선교사가 돌아간 지 약 15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2001년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교회’로 공식지정됐고, 2012년엔 보령시와 보령시 기독교연합회 주관으로 귀츨라프 180주년 세미나도 열렸다. 7월25일은 ‘귀츨라프의 날’로 지정돼 있다. 그가 이 섬에 처음 도착한 날을 기념해 만든 것이다. 귀츨라프 선교사를 기리는 교회 건물을 지나면 공터와 밭, 집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자동차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흔한 식당 하나 보이지 않는다. 비록 기독교와 인연이 깊은 섬이라고는 해도, 오랜 역사를 지닌 섬이다 보니 옛 전통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해안도로에서 나와 산으로 가는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당산 하나가 눈에 띈다. 당산 표지판 뒤로 기와를 얹은 담장을 두른 공간 제단에는 검은색 대리석에 ‘각시당’이라 쓰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고대도에는 뒷산, 당산, 산끝재, 봉화재 등 여러 개의 산이 있다. 이 중 봉화재는 섬 중앙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이다. 산이라고 해봤자 높이가 89.5m에 불과하지만, 예부터 조난이 발생하거나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땐 봉화를 올렸을 만큼 중요한 장소다. 윗말의 서쪽엔 44m의 낮은 당산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정월 3일 당제가 열린다. 마을사람들이 모여 풍어를 비는 행사다. 예부터 농토가 부족해 주민 대부분이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에 종사했는데, 워낙 사고가 잦다보니 이곳 당산에서 풍어와 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그나마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섬을 떠나면서 한동안 당산제는 중단됐다가, 1992년부터 다시 지낸다고 한다.

(출처- 고대도교회 - 디지털보령문화대전)

고대도교회 (출처- [보령/고대도] - 조선 최조의 선교사가 머물렀던 작은 섬 '고대도'/ 칼 귀츨라프 선교사,고대도교회, 고대도여행 : 네이버 블로그)

고대도교회 내에 마련된 칼 귀출라프 선교사 기념관에 다양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출처 : 한국기독타임즈(http://www.koreact.co.kr)

고대도 귀츨라프 기념공원 (출처-카를 귀츨라프 - 디지털보령문화대전)
고대도 남쪽 해안가에 있는 카를 귀츨라프를 기념 공원. 2016년 스페인의 아티스트 후안 가라이사발에 의해 세워진 구조물인 ‘MEMORIA URBANA Berlin -도시의 기억, 베를린’ 이 있다.

고대도 귀츨라프 기념공원
(출처- 평강스토리 - [한국성지답사_K1803] 고대도_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지 )

칼 귀츨라프 기념공원 추모비, 충남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2023년 03월 25일
(출처-카를 귀츨라프 - 디지털보령문화대전)

카를 귀츨라프 선교 기념비 (출처-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칼 귀츨라프|작성자 제이콥 )
카를 귀츨라프 기념공원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 자연석 비신에 동판으로 카를 귀츨라프 얼굴을 넣었다.

(출처- 칼 귀츨라프 선교 기념비 해설 – 칼 귀츨라프 학회)

1832년 논란의 기록 ‘Gan-keang’, 보령 고대도 ‘안항’ 확실
국민일보 2020.8.1 기사 입니다 귀츨라프가 도착하여 선교한 곳이 고대도 안항이라는 점을 확증하는 오현기 박사의 논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출처- 1832년 논란의 기록 ‘Gan-keang’, 보령 고대도 ‘안항’ 확실 – 칼 귀츨라프 학회)

원산도 칼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
귀츨라프연구회는 충남 보령시 원산도에 선교원년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김옥선 이사장 / 귀츨라프연구회)
“오늘 187주년에 선교원년의 기념비를 제막하게 됐습니다. 감개무량합니다.” 기념비 뒷면에는 귀츨라프가 일기에 남긴 기도문이 새겨졌습니다. 당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조선 백성을 안타까워했던 귀츨라프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귀츨라프 선교사의 행적에 대해서는 원산도와 고대도를 두고 주장이 엇갈립니다. 귀츨라프연구회는 린제이항해보고서를 근거로 귀츨라프의 정박지가 원산도임을 주장하면서도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선교 자체와 그가 전한 복음이라고 밝혔습니다. (최대성 대표 / 귀츨라프연구회) “고대도라고 하는 측면이나 원산도라는 측면은 사실 중요한 부분이 아니고 그 선교 자체가 중요한데…이분의 그러한 남겨진 흔적을 우리가 좀 더 발굴하고 객관화해서 더 알리고자 합니다.” (출처 : GOODTV(https://news.goodtv.co.kr)

고대도 귀츨라프 기념 선교센터, 2023년 03월 25일
(출처- 평강스토리 - [한국성지답사_K1803] 고대도_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지)

고대도 선교센터는 구츨라프 선교사 관련 전시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섬주민들의 예배 공간으로 각종 회의와 공연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출처- ‘GOD+愛+島 고대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섬)

고대도선교센터에는 칼 귀츨라프 일행이 타고 왔던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 모형, 편지, 한글번역 주기도문, 다양한 사진 등이 전시돼 있으며 예배와 학술회 등을 가질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었다. 현재 30여 명의 교인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선교센터에는 기독인 방문객이 늘어나고 있다.
(출처- ‘GOD+愛+島 고대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섬)

고대도 칼 귀츨라프 마을 개관식… 해양문화체험관
충남 보령시는 2024년 4월 30일 고대도에서 칼 귀츨라프 마을(오천면 고대도2길 41) 개관식을 갖고 본격적인 고대도 해양문화체험관 운영에 돌입했다. 이번에 개관한 해양문화체험관은 지난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 국비 지원 사업에 선정돼 국비 16억 원, 지방비 16억 원을 들여 조성됐다. 시설은 연면적 725㎡에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으며, 1층에는 선교의 섬 고대도의 어제와 오늘, 해양 관광 체험, 특산물을 엿볼 수 있는 기획전시실과 다양한 해양문화 공연을 할 수 있는 소규모 공연장이 있다. 아울러 2층에는 1832년 고대도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했던 칼 귀츨라프의 선교 테마 기획전시실과 뮤지컬 형식으로 제작된 영상을 관람할 수 있는 영상전시실을 조성했다. 또한 맞은편에는 어촌뉴딜 300 사업으로 조성한 칼 귀츨라프 존에 주민 공동 이용 시설과 게스트하우스가 있어 관광객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해양 문화를 공유하고, 화합할 수 있는 오픈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김동일 시장은 "고대도 칼 귀츨라프 마을은 현재 조성 중인 선교사의 길(2.9km)과 함께 전국의 기독교인들이 꼭 한번은 방문할 수 있는 성지순례의 명소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출처 : 충청일보(https://www.ccdailynews.com)

귀츨라프가 타고 왔던 로드 애머스트 범선도 7월 완공을 앞두고 있다.
(출처 : 아이굿뉴스(http://www.igoodnews.net)

귀츨라프의 한국선교를 기념해 대구동일교회가 고대도에 설치한 조형물 ‘도시의 기억’.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칼 귀츨라프의 한국선교 184주년을 기념하는 자리가 ‘칼 귀츨라프, 베를린 그리고 고대도’라는 주제로 귀츨라프의 복음전래지이며 성경 전래지인 고대도 일대에서 마련됐다. 칼귀츨라프선교기념회(대표:오현기 목사)와 고대도마을회, 대구동일교회가 공동개최한 제3회 칼 귀츨라프의 날 행사가 2016년 7월 25일부터 26일까지 고대도교회(박원열 목사)에서 개최됐다. 이번 행사에는 국내외 신학자와 예장합신 안만길 총회장, 김동일 보령시장, 정종섭 국회의원 등 250여 명이 참석해 한국 땅을 찾아온 최초의 선교사로서 귀츨라프의 삶을 기렸다. 1832년 귀츨라프의 고대도 선교를 기념하는 조형물 제막식으로 시작한 이번 행사는 칼귀츨라프학회의 학술 심포지엄, 기념음악회, 고대도 일대 탐방, 주기도문 사경회 등의 일정으로 진행됐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귀츨라프를 배출한 베를린 보헤미아 베들레헴 교회(1737년) 모습
<도시의 기억>은 1737년에 완공된 베를린 보헤미아 베들레헴교회 예배당을 본떠 제작한 작품으로, 베들레헴교회는 칼 귀츨라프를 배출한 베를린선교학교와 고쓰너선교회를 설립한 유서 깊은 교회이다. 작품은 귀츨라프를 태우고 온 영국 상선 암허스트호가 정박해있던 고대도 앞바다가 보이는 해변에 설치됐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대구 동일교회 칼 귀츨라프 선교사 선교역사 기념관
(출처- 25~26일 고대도서 '2016년 제3회 칼 귀츨라프의 날' 행사 열린다)

대구 동일교회 칼 귀츨라프 선교사 선교역사 기념관
(출처- 25~26일 고대도서 '2016년 제3회 칼 귀츨라프의 날' 행사 열린다)

대구 동일교회 칼 귀츨라프 선교사 선교역사 기념관
(출처- 25~26일 고대도서 '2016년 제3회 칼 귀츨라프의 날' 행사 열린다)

홍콩공원묘지의 개신교 구역 귀츨라프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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