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암 아서 노블(Noble, William Arthur,1866.9.13.~1945.1.6.)
노블(W. A. Noble, 1886-1945, 노보을)선교사는 미국 펜실베니아 스프링데일에서 출생. 와이오밍신학교와 드루신학교를 졸업(1892년)하고 1892년 와이오밍 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후 결혼하여 3개월 후인 10월 17일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하였는데, 여기에는 1년전 한국에 와 활동하던 홀과의 우정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한국 교회의 전 지역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지역을 감독하며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 지역의 선교지를 개척 하며 제일 많은 대지를 사서 기증하였다. 그는 3년동안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894년 홀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평양선교회 문을 열었다. 15년동안 평양을 중심으로 북지방 교회를 돌보다가 서울로 이주하여 1933년 은퇴하기까지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남북감리회 합동시에는 미감리회의 전권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뛰어난 행정실력을 갖춘 목회자였다. 관리자로 2년, 지방감리사로 40년을 일했으며 여러지방을 동시에 관할한 적이 많았다. 1908년부터 3년간 평양 및 서울지방 감리사로 일할 당시 한국감리회의 70%가 그의 관할 밑에 있었다. 전 선교구역을 순회하였으며 한국지방회의 90%를 관장할 때도 있었다. 한국에서 42년간 일하는 동안 그는 한국감리회가 독자적인 성장을 이룩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가 들어올 당시 50명 가량의 교인이 은퇴할 당시엔 2만명으로 늘어났다. 노보을은 협성신학교, 연희 전문학교 설립 등에도 큰 기여를 한다. 아내 매티도 어린이 여성 교육 사역에 헌신하여 강경, 진남포, 봉산, 신계 등에 여학교를 세웠고, 병원 설립에도 적극 참여 하였다. 노블 선교사 부부는 40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고 1933년 3월 은퇴하고 1934년 11월 42년의 한국 선교를 마치고 귀국한다. 그는 귀국 후에도 사위 H.D. 아펜젤러 교장을 통해 자신이 사역했던 배재학당에 현미경 10대를 기증하는 등 그의 한국 선교는 계속되었다. 그의 글은 코리아피파지토리 코리아 리뷰에 게재되었다. 아더 노블의 책 <이화: 한국의 이야기>은 1906년 미국에서 발행된다. 1892년부터 1944년까지 50여 년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한 저자는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사건, 독립협회 활동 등 사건들과 얽히면서 변혁의 세월을 살아가는 조선인의 모습을 이화, 김승요, 김동식 세 명의 등장인물로 표현한다. 당시의 시대상과 종교, 불교의 열반(NIRVANA)이나 한일 합방, 조선의 고위 관리 승지 등을 소개하며 조선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 <이화, 조선의 이야기>에는 먼저 왕정 기록, 새로운 권위의 약속, 통역사, 대동강, 행정 장관(MAGISTRATE), 외국인, 신부 찾기, 서양에서 온 종교, 대동강의 이야기, 유산, 전쟁의 희생, 민비의 비난, 협정, 공황(공포, 패닉), 새 신앙, 본향, 탐색, 체포령, 궁정 침략, 도성의 폭풍, 계속된 탐색, 사망 전까지, 위로, 위험한 앞날, 그의 나라 등을 다룬다. 아더 노블 선교사는 매티 노블과 혼인하여 자녀로 아펜젤러 선교사의 장남과 결혼한 루스 노블이 있고, 헤럴드 조이스 노블이 둘째 아이로 2차 대전 중 미국 해병대의 일본어 장교가 되었으며 나중 한국에서 미국 외교관이 되었다. 그 외에 알덴 노블과 쌍둥이 글렌 노블이 있다. 하지만 초기에 선교할 때에 노블 선교사는 두 아들을 조선에 묻는 사건을 겪는다. “우리 아기 메이가 3주전, 이질에 걸렸다. 이 사랑스럽고 잘 참는 꼬마 환자는 몹시 쇠약해졌다. 난 밤마다 아이 곁을 지켰다. ...조선과 조선인은 우리에게 지독하리만큼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 8월 18일 목요일 밤 9시경 천사들이 왔다.” 노블 부부는 평양으로 가기 위해 제물포에서 증기선을 탔고 대동강에 들어가서 나룻배를 두 시간이나 탔다. “아기는 서울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아팠고, 여행길에 악화되었다. 한동안 조금씩 회복되었으나 최근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비쩍 말라 뼈 골격이 낱낱이 드러날 정도였다. 아기가 곧 회복되길 애타게 바라고 기다린다. 병명은 만성설사이다.”(부인 매티 노블의 일기). 둘째 아들 시릴도 이렇게 아팠다. 이질로 11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다. 2년 후 1898년 아들 메이도 세상을 떠난다. 이렇게 어린 두 아들을 평양에 묻었다. 두 아이를 데려가신 이가 하나님이신데, 하지만 그 하나님께서 매티 노블을 극적으로 살리신다. 1912년 안식년을 지내기 위해 3월 19일 평양을 떠난다. 시베리아와 유럽 기차를 타고 횡단하여 여행하며 런던에 도착했는데 수요일에 가는 미국행 타이타닉 호를 탈 예정이었다. 그런데 일행 중에 한 사람이 중국에서 분실한 트렁크을 찾아야하기에 그 소식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하여 함께 머물게 된 매티는 타이타닉에 승선하지 못한다. 그래서 토요일 출발하는 모레타니아 호를 타기로 했다. 하여 현대과학을 자랑하던 타이타닉은 항해 중에 빙산에 충돌하여 침몰하고 말았다. 승객 2206명 가운데 1503명이 희생당한 대형 사고였다. 미국에서는 노블 선교사 부부가 둘 다 죽었다고 실망이 컸다. 하지만 아직 조선의 선교를 남기신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지 않았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벤자민 슈몰크 목사) 매티 노블 선교사의 일기, <매티 노블의 조선 회상>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선교라고 말한다. 1933년 3월 은퇴한 후에도 1년동안 더 서울에 머물면서 계속 일을 돕다가 귀국하여 1945년 1월 6일 캘리포니아 스톡튼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부인도 한국 선교에 큰 공을 세웠는데, 특히 여성교육에 빛을 남겼다. 1896년부터 평양의 집에 여자 아이들을 모아 가리치기 시작한 것이 북한 지역의 최초 여성교욱기관이 되었는데 이것은 후에 초등과정인 정진, 중등과정인 정의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주일학교운동에도 큰 공을 남겼는데, 1900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에 사범반을 설치하고 주일학교교사를 양성하였으며, 1903년 선교공의회 안에 주일학교 위원회가 조직될 때 위원으로 참여하여 한국 주일학교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또한 문서사업에도 귀중한 흔적을 남겼는데 여성을 위한 ( 어머니에 대한 강도, 1916, 예수교서외), (자모권면 ,1921,예수교서회)등과 한국교회 최초의 전기라 할수 있는 <<승리의 생활,1927,예수교서회>>를 편찬해 내기도 했다. 노블 부부는 태극기 실물 두 점을 소장했었는데, 노블이 소장한 태극기는 1890년경 고종이 당시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미국인 윌리엄 아서 노블 목사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태극기는 노블의 손녀가 한국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힘에 따라 환수되게 되었다. 노블 태극기는 현재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유물번호 증 8946 : 세로 18.7cm, 가로 23.9cm 유물번호 증 8947 : 세로 11.8cm, 가로 17.8cm [출처] 조선을 알리고 사랑한 노블 선교사|작성자 cnayou3)

윌리암 아서 노블(Noble, William Arthur,1886~1956) 매티 윌콕스 노블(Mattie Wilcox Noble,1872∼1956)과 가족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노블 선교사 가족

노블 선교사 가족

노블 선교사 가족사진

노블 가족 사진첩

노블 선교사와 코리아리포트지 전문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부인 매티 윌콕스 노블 선교사 <노블일지>
“오늘은 한국의 위대한 날이다. 한국인들의 기쁨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 오후 2시, 중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항거하는 시위를 벌였고, 거리로 나가 양손을 위로 올리고 모자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1919년 3월 1일)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한국에서 살다간 미국인 여선교사 매티 윌콕스 노블(1872∼1956) 여사가 이 땅에서 보고 들은 것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글을 묶은 ‘노블일지 1892∼1934’(이마고)가 출간됐다. 감리교 선교사인 노블 여사는 스무 살에 남편 윌리엄 아서 노블과 함께 한국에 들어와 서울과 평양에서 42년간 살다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대한 그의 첫인상은 이랬다. “제물포에 도착하니 긴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닷가로 우리를 마중 나왔다. 한 한국인이 100㎏이 넘게 나가는 우리의 엄청나게 무거운 트렁크를 등에 지고 날랐다. 그들은 모든 것을 등에 져 나른다.”(1892년 10월 21일) ‘노블일지’에는 선교 활동에 관한 내용이 많지만 한국의 풍습과 사회상, 한국 근대사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생생한 목격담이 담겨 있다. “일본군의 한국 주둔이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벌써 여러 달 동안 매일매일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거처를 잃는 가족들이 생겨나고 있고, 일본인들은 한국인들 앞에서 계속해서 거드럭거린다.”(1906년 4월 30일) 3·1 만세운동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행위들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도시 전역에 기쁨의 외침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나는 긴 행렬 하나가 궁궐 담장의 모서리를 지나는 광경을 우리집 창문을 통해 볼 수 있었다.”(1919년 3월 1일) “어제 저녁 일요일, 서울 서부의 몇몇 동네와 종로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서울 시가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국의 독립을 외치는 데모가 있었다. 많은 사람이 경찰과 헌병들에 의해 베임을 당했고, 몇몇은 죽임을 당했다.”(1919년 3월 24일) “요즘은 밤에 한국인이 거리를 걷기만 해도 경찰에게 매를 맞는다. (중략) 어젯밤 거리를 걷던 사람들 가운데 만세를 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 명이 살해됐으며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1919년 3월 30일) 일지에는 예배당에 신자들을 모으고 총살한 뒤 불태운 ‘제암리 학살사건’(1919년 4월 15일), 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시작으로 이듬해 1월까지 이어진 만세시위, 덕수궁 화재사건(1904년 4월 15일), 일본의 경복궁 습격사건(1894년 7월 23일)에 대한 소회 등도 실려 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3451688)

아모권면, 1906년 간행된 기독교 계몽도서. 노블(W.A. Noble) 부인 저술. 대한예수교서회 발행

노블 선교사의 쌍둥이 아들들 (출처- [내한선교사] Noble, William Arthur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통화중인 노블 선교사 (출처- [내한선교사] Noble, William Arthur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모터 싸이클을 탄 노블(좌석)과 게이블 선교사(운전) (출처- [내한선교사] Noble, William Arthur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1909년 평양 감리교 선교사들과 노블 부부, 가운데줄 좌측 2,3 번째 (출처- [내한선교사] Noble, William Arthur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평양지역 한국 선교사들과 함께, 첫째줄 우측에서 2번째 노블 선교사 (출처- [내한선교사] Noble, William Arthur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평양 노블 선교사 (출처- [내한선교사] Noble, William Arthur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동아일보 1932년 6월 14일자 3면에 게재한 '노블 선교사 선교 40주년 기념식' 사진이다

노블 선교사 선교 40주년 기념식

노블 선교사 선교 40주년 기념식(1932년)

매티 윌콕스 노블(Mattie Wilcox Noble,1872∼1956) <조선회상>
부인 매티는 미국의 어머니로 선발되기도 하였고,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1910)>을 출판하여 한국 선교 역사를 남기도 하였다. 노블과 매티의 딸 루스와 아펜젤러의 아들 닷지가 첫 선교사 자녀가 결혼하는 역사도 만들었다. 노블의 둘째와 넷째는 한 살도 못 되서 평양에서 목숨을 잃는 고난도 당지만 불행에 굴하지 않고 복음 선교사로서 한국의 선교의 큰 족적을 남기게 되어서 오늘의 한국 교회성장에 크게 기여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선교사는 그 나라의 문화 선구자로서 빛을 전하는 자들이었다.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 배재학당- 아펜젤러, 노블 기념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

윌리암 아서 노블과 매티 윌칵스(1892년)

아펜젤러 아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 노블 선교사의 딸 루스 노블
H. D.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亞扁薛羅2世, 1889~1953)는 1889년 11월 6일 서울 서대문구 정동 2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프랭클린-마샬(Franklin and Marshal)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11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다. 1915년 드루(Drew)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7년 뉴욕대학에서 M. A. 학위를 받았다. 1917년 9월 4일 선친의 뜻을 계승하여 감리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인천지방에서 3년간 활동하였다. 1920년 배재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20년간 봉직하였다. 그는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신앙과 애국심을 끊임없이 교육시켰다. 1919년 11월 6일 ‘미국감리회한국연회’ 서기로 피선되어 1924년 9월 17일까지 다섯 차례나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찬송가 개정작업에 동참하여 <신정 찬송가》를 1931년 발행하는데 공헌하였다. 1952년 11월 배재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던 중 백혈구 부족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미국 뉴욕감리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53년 12월 1일 64세로 별세하였다.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1954년 10월 18일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장(社會葬)으로 거행되었다. 이화·배재 연합성가대의 주악과 찬송(570장)과 신흥우 박사의 조사 등으로 정동교회에서 장례예배가 진행되었으며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H. D.아펜젤러 부인 루스 노블 아펜젤러(Appenzeller, Ruth Noble)선교사
루스 노블 아펜젤러(Appenzeller, Ruth Noble)는 1892년 10월 17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재학당과 평양지방 감리사로 1934년까지 봉직한 노블(Noble, William Arthur. 魯普乙, 1866-1945)선교사의 딸로 1894년 6월 14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평양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중학교와 교육대학을 졸업하였다. 1917년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亞扁薛羅)의 아들 H. D. 아펜젤러와 미국에서 결혼하였다. 그리고 1917년 9월 4일 남편과 함께 내한하였다.(자료 : 윤춘병,한국감리교회 외국인선교사) 처음에는 인천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서울에서 남편을 내조하며 감리교 선교사로 봉직했다. 1941년 강제 출국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0년 세계봉사회 한국지부 대표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 다시 내한하여 1952년 남편의 병 치료차 귀국하였다. H. D. 아펜젤러와의 사이에 3남매(Appenzeller, Alice R., Mary E.)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 사후에 다시 내한하여 1962년까지 정동에 있는 감리교선교사 게스트 하우스(Guest House) 책임자(Hostess)로 봉직하였다. 정년 후에는 나이트(Cecil Knight)와 재혼하여 미국 그렌다르(Glendale)에서 살다가 1986년 11월 25일 별세하였다.(자료 : Donald N. Clark)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1987년 1월 19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헨리 다지 아펜젤러

루스 에밀리 노블

아펜젤러 노블 가족

헨리 다지 아펜젤러 부부
< 선교사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 (군산시 내초도동)> 노블 선교사 전시물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

아펜젤러, 노블 기념관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 (군산시 내초동) (출처- http://blog.daum.net/psp727/7714498)

아펜젤러, 노블 가족
| 선교사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0) | 2026.02.20 |
|---|---|
| 선교사 존 프랭클린 가우처 (John Franklin Goucher) (0) | 2026.02.20 |
| 선교사 존 맥킨타이어 목사 (John Macintyre) (0) | 2026.02.19 |
| 선교사 존 로스(J. Ross) (0) | 2026.02.19 |
| 선교사 새뮤얼 오스틴 마펫(Samual Austin Moffett, 마포삼열) (0) | 2026.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