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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성지순례/선교사

by baesungsoo 2026. 2. 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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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맥리화, 1824.2.7. ~ 1907.8.18.)

 

18839월 미국 볼티모어의 가우처 목사가 워싱턴행 열차 안에서 만난 보빙사절단 단장 민영익과 대화한 후 마음의 감동이 있어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면서 개척 선교비를 냈고, 가우처 목사로부터 그 소식을 들은 일본의 매클레이 선교사는 18846월 서울을 방문하여 김옥균을 통해 선교사가 들어와 학교와 병원 사업을 해도 좋다는 고종황제의 선교 윤허를 얻어냈으며, 마침내 18854월 미감리회의 개척 선교사 스크랜턴과 아펜젤러 가족들이 서울 정동에 들어와 병원과 학교, 그리고 교회를 설립함으로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요약하면, 가우처는 한국 선교의 동기와 물질을 제공했고 매클레이는 굳게 닫혔던 선교의 문을 열었으며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은 그 열린 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와(앞서 들어온 귀츨라프나 토마스처럼 몰래들어오지 않았다) 한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로써 매클레이는 한국선교 개척과정에서 길을 여는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에게 한국 개신교 선교 개척자(a pioneer of the Korean Protestantism)’란 칭호가 붙여지는 이유다. 그런데 매클레이는 한국에서만 개척 선교사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서울을 방문하기 전 이미 중국에서 25, 일본에서 10, 감리교 개척선교사로 사역한 경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아시아 감리교 선교 개척자(a pioneer of the East Asian Methodism)로 불렸다. 그가 이처럼 19세기 땅 끝’(1:8)으로 인식되었던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쉽지 않은 개척 선교사역에 헌신하였고 그로 인해 훗날 개척자의 명예를 얻게 된 동기는 스물 세 살 청년목회 시절 모교 학장으로부터 받은 편지의 끝말, “누가 길을 여는 영광을 얻을 것인가?”(Who shall have the honor of leading the way)라는 질문 때문이었다.

맥클레이는 1824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콩코드의 독실한 감리교 집안에서 출생하여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칼라일에 있는 감리교계통 디킨슨대학을 1845년 졸업한 후 볼티모어연회 게티스버그 구역에 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목회를 시작하였다. 게티스버그에서 1년 만에 새 신자 1백 명을 얻으며 목회에 자신감을 얻어갈 즈음 1847년 모교인 디킨슨대학 에모리 학장으로부터 중국에 개척 선교사로 나가지 않겠느냐?”는 편지를 받았다. 아편전쟁(1840)에서 패한 중국이 서구 열강국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이 앞을 다투어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는데 미국 감리회는 아직도 선교사를 파송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해외선교에 관심이 깊었던 미들타운 웨슬리언대학의 올린 학장과 디킨슨대학 에모리 학장이 앞장서서 중국 선교를 주창하였고 그런 배경에서 매클레이는 모교 학장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에모리 학장의 편지를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인 매클레이는 즉시 해외선교부에 중국선교 지원의사를 밝혔고 그렇게 해서 콜린스와 화이트, 히칵 등과 함께 중국 개척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84710월 뉴욕에서 제인스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을 출발, 115일 항해 끝에 18482월 홍콩에 도착하여 중국 선교를 시작하였다. 미감리회 중국 선교는 개항장인 푸저우(福州)를 거점으로 해서 추진되었다. 매클레이는 비롯한 개척 선교사들은 성 밖에 선교사 사택과 남녀 학교, 그리고 진신당(眞神堂)과 천안당(天安堂) 등 집회소를 마련하고 전도사역에 나섰지만 개종자(세례자)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푸저우가 개항장이긴 했지만 아편전쟁 직후 지배자처럼 들어온 서양인과 서양종교에 대한 반감과 저항의식이 강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푸저우 사람들은 선교사들에게 노골적으로 아편 무역만 중단해라. 그러면 당신들의 종교를 믿어보겠다고 하였다. 더욱이 푸저우의 개척 선교사들은 3년 만에 질병과 죽음으로 선교지를 떠났고 매클레이만 남았다. 매클레이도 푸저우에서 얻은 첫째 아이를 1년 만에 잃는 슬픔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매클레이의 좌절과 실망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신도 선교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여러 번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를 붙잡아 준 것은 본국 교회의 변함없는 지지와 격려였다. 매클레이는 복음전도에 임하면서 동시에 뒤에 올 후배 선교사들을 위해 푸저우 방언으로 성경과 교리서를 번역, 출판하였고 푸저우방언사전을 편찬하였다개척 선교사의 기다림과 인내, 선교사를 파송한 본국 교회의 신뢰와 격려, 그것이 합하여 중국 선교는 결실을 얻기 시작했다. 즉 미감리회가 중국선교를 시작한 지 10년 만인 1857714, 천안당에서 첫 번째 중국인 개종자 치엔안(陳安)이 매클레이에게 세례를 받았다. 중국인 최초 감리교도가 나온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중국인 세례와 교회 개척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1857년에 16, 1858년에 47명이 세례를 받았고 교회도 6곳으로 늘어났다. 이후 선교 지역도 급속도로 확장되어 1867년에는 서부로 푸젠(福建)과 장시(江西), 쓰촨(泗川), 남부로 난징(南京)과 양저우(楊州), 북부로 베이징(北京)과 텐진(天津)까지 선교사들이 들어가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877년 중국연회가 조직됨으로 선교 개척 30년 만에 중국 감리교회는 (미국교회에서) 독립된 교회로 세워질 수 있었다. 이처럼 중국선교 개척자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매클레이는 1872, 2차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에 돌아갔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에 감리교 선교사를 파송하자호소하였다. 이런 매클레이의 호소에 대하여 해외선교부에서는 그러면 당신이 가시오하는 식으로 187211, 매클레이를 일본 선교 개척자로 임명하였다. 중국에서 개척선교 25년 경력의 매클레이는 중국 언어와 문화, 음식과 풍토에 익숙하여 중국선교 관리자로서 후반기 안정적인 선교사역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갖추고 있었는데 다시 낯선일본에 가서 선교 개척자로서 고된 사역을 감당할 처지가 된 것이다. 매클레이는 이번에도 하나님 소명으로 알고 일본 선교에 임하였다. 그는 소퍼와 데이비슨, 해리스 등 후배 선교사들로 개척 선교사진을 구성한 후 이들보다 먼저 18736월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해서 일본 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중국 푸저우에서 했던 것처럼 요코하마에 남녀 학교와 천안당, 신학교를 설립하고 일본인을 대상으로 복음전도 사역에 나섰는데 중국의 경우와 달리 일본 선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선 일본선교 개척 1년 만인 1874년에 메이지유신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일본인 농학자 츠다센(津田仙)이 소퍼에게 세례를 받아 일본 최초 감리교인이 되었고 1877년에는 요코하마와 도쿄, 나가사키, 하코다테 등지에 일본인 목회자 9명을 파송할 정도로 교회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매클레이는 초교파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일본어 성경번역 작업에도 참여하였고 미감리회 교리서와 신학교 교재들을 번역, 출판하였다일본 감리교회는 선교 개척 7년만인 1881년에 이르러 남녀 선교사 20명과 일본인 목회자 51명이 6개 지방의 83개 교회에 입교인 478, 학습인 160, 세례아동 63, 701명 교인을 돌보게 되었고 감리교 계통 13개 학교에 학생 407, 15개 주일학교에 422명 학생을 기록하였다. 이런 선교 결과를 안고 매클레이는 1881-82년 안식년 휴가를 떠났다. 휴가 중 매클레이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였다. 캘리포니아 퍼시픽대학 여성교수 새라 바와 결혼한 것과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설립자금을 모금하는 일이었다. 매클레이는 중국 푸저우에서 사역할 때부터 초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는 전 과정을 같은 갬퍼스에서 가르칠 수 있는 종합적인 기독교 교육기관설립을 구상하였는데 일본 도쿄 시내에 그런 학교를 설립할 계획안을 가지고 미국 교회들을 방문하여 후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런 그의 구상에 적극 호응하고 나선 이가 볼티모어여자대학(현 가우처대학) 설립자 가우처 박사였다. 매클레이의 디킨슨대학 23년 후배이자 매클레이와 같은 볼티모어연회 소속이었던 가우처는 매클레이의 신학교와 새로 설립할 대학 설립 기금으로 15천 달러를 후원하였다. 18826월 일본에 귀환한 매클레이는 도쿄 중심부 아오야마에 32천여 평 부지를 확보하고 1883년 신학교와 대학교, 남녀 중학교 건물을 지음으로 오늘까지 일본 사학명문(私學名門)으로 알려진 아오야마학원시대를 열었다. 그 사이 일본 감리교회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선교 개척 10주년이 되는 1883년에 이르러 전국 28개 교회에 1천 명이 넘는 신도수를 기록하였다. 지역적으로도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해서 남부 나가사키, 북부 홋카이도에 이르렀다. 이런 부흥과 발전을 기반으로 하여 1884년 일본연회가 설립되었으니 중국 감리교회가 선교 30년 만에 독립 연회를 조직한 것에 비교하면 일본 선교는 3배 속도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84년 일본 감리교회는 연회를 조직하면서 연회원들은 일본선교 개척자 매클레이에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신중하게 판단하고 공정하게 처리함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신 것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한다는 찬사를 보냈다. 이런 찬사를 받을 때 그의 나이 60세였다. 이처럼 일본 개척선교 10년의 결과로써18849월 일본연회가 조직될 때 그 주역인 매클레이는 연회 석상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중국, 일본에 이어 한국도 오랜 쇄국 정책을 풀고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과 1883년 보빙사절단 파견으로 서구국가(특히 미국)와 교류를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워싱턴행 기차 안에서 가우처 박사와 보빙사절단장 민영익과의 만남, 가우처 박사의 결단과 호소, 그리고 매클레이의 방한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매클레이가 한국인을 처음 본 것은 1847년 중국 선교를 막 시작한 푸저우항에서였다. 중국 근해에서 난파되었다가 중국인들에게 구조되어 푸저우에 머물다가 귀환선을 타고 떠나는 한국인 상인들을 보면서 매클레이는 속으로 언젠가 조선 백성에게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큰 명예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매클레이는 18841, 볼티모어의 가우처로부터 귀하께서 한 번 시간을 내서 한국에 들어가 그곳 사정을 살펴보고 선교회를 설치할 부지를 확보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이교도 지역에 들어가는 첫 번째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될 것이며 그 일은 일본 선교회로서도 영광스런 일이 될 것이며 이미 여러 방면에서 개척의 사역을 감당해 오신 귀하에게 또 다른 영예가 될 것입니다는 편지를 받았다. 매클레이는 가우처의 편지를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를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일본 교인들의 도움으로 한국 정부(국왕)에게 제출할 선교의향서를 작성한 후 619일 부인과 함께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620일 부산, 623일 인천을 거쳐 624일 서울에 도착했다. 매클레이 부부는 서울에 두 주일 머물렀는데 처음 한 주간은 허송세월하였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구한 통역인이 보수파와 연결된 인물이어서 매클레이와 정부 관계자 접촉을 방해했던 탓이다. 다행히 매클레이는 630일 미국공사 푸트의 주선으로 당시 외부협판으로 외교업무를 관장하던 김옥균을 만날 수 있었다. 구면인 김옥균은 매클레이에게 적극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사흘후 73일 저녁, 미국공사관에서 만난 김옥균은 매클레이에게 어제 밤 전하께서 당신 편지를 세밀하게 검토하시고 당신이 제안한 학교와 병원 설립을 가납하셨다고 통보하였다. 국왕의 선교윤허소식을 듣고 감격한 매클레이는 그날 저녁 서울 밤거리를 걸으면서 속으로 국왕의 마음도 주님의 손에 잡혀 있으니 마치 강물과 같도다. 이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그 물줄기를 인도하시리로다는 말을 반복하였다. 그렇게 해서 아편전쟁과 페리호사건을 거치면서 문호를 개방하고 선교사를 받아들였던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은 국왕의 허락을 받은 상태에서 개척 선교사들의 내한이 이루어졌다. 매클레이를 통해 한국에 선교의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 감리교회는 곧바로 병원을 할 스크랜턴, 학교를 할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대부인을 개척 선교사로 선발하였다. 이들 개척 선교사들은 18852월 일본에 도착하여 매클레이의 지휘와 지도를 받아가며 한 달 동안 준비를 한 후 순차적으로 내한하여 서울 정동에 정착, (중국과 일본에 비하여) 한결 수월하게 선교사역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그 사이 매클레이는 한국 선교를 계속 지원하였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선교 개척의 공을 세운 매클레이는 이후 4년 동안 일본에서 더 활동하다가 1888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산페르난도에 친형 찰스 매클레이가 설립한 매클레이신학교 학장이 되어 1901년 은퇴할 때까지 목회자 양성사역에 임하였다. 매클레이신학교는 1900년 로스앤젤리스의 서든캘리포니아대학 신학부를 거쳐 1957년 클레어몬트신학교로 발전하였다. 매클레이는 신학교 학장직에서 물러난 후 로스앤젤리스에서 조용한 말년을 보내다가 1907818일 향년 83세로 별세하여 3년 전에 별세한 부인의 묘소가 있는 로스앤젤리스 로즈데일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중국과 일본, 한국의 개척 선교사로 사역했다는 짧은 언급과 함께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14:13)는 성구가 새겨져 있다. 탄생도, 죽음도, 그 사이의 삶과 사역도 주 안에서이루어진 선교 개척자 매클레이의 일생이었다. 이덕주(감신대 교수 | 한국교회사)  (출처- 가우처(John F. Goucher)와 맥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아펜젤러외 | 워싱턴 하늘비전교회 Heavenly Vision Community Church)

 

맥클레이선교 13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써 맥클레이 기념 우표
(출처 : KMC뉴스(http://www.kmcnews.kr)

고종 황제, 김옥균, 맥클레이 선교사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조선에서 기독교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의 공식 허가를 받는 일을 주도한 맥클레이 선교사(좌)와 김옥균(우)

(출처- [아펜젤러 행전] 조선 선교의 ‘양아버지’ 맥클레이 선교사 : 기획 : 선교신문)

감리교 선교 140주년의 주역들   (출처 : 웨슬리안타임즈(http://www.kmcdaily.com)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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