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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텐(Aten)

남성신,신화/이집트

by baesungsoo 2014. 1. 2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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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으로 섬겼던 아텐

 

아문의 참 모습은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 것이라 하며, “숨겨진 모습, 신비스러운 형태”로서,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우주 전체에 걸쳐 편재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아문의 聖獸는 숫양과 염소이다. 제일 중요한 성소는 테베의 근방인 카르낙(Karnac)과 룩소르(Luxor)에 있다. 아문과 그를 섬기는 테베의 성직자들은 아케나톤의 통치하에서 일시적으로 일신교 신앙을 강요당하였으나 아케나톤이 죽은 후 다시 아문 신앙이 부활하였다. 기원전 663년 앗시리아인들이 테베를 약탈한 이후 아문은 단순히 일부 지역에서만 중요하게 여겨지는 신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서쪽의 사막 지방에 있는 시와(Siwa)의 오아시스에 그 신탁소가 있었으며, 그곳은 후대에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왔을 만큼 유명한 곳이었다. “원반” 혹은 “태양 원반”. 태양의 신. 원래는 태양신의 현현 정도였으나 나중에 태양신 아툼과 레에게서 분리되어 독립된 신이 되었다. 아텐은 날개 달린 태양 원반으로 묘사되거나 끝부분이 손 모양으로 되어 있는 빛살을 내뻗는 태양 원반으로 묘사된다. 또, 이러한 태양 원반은 성사(聖蛇) 우라에우스를 마주하고 있는데, 그 손들 중 일부는 앙크(ankh:“생명”)를 쥐고 있다. 아텐의 주요 신전은 테베, 헬리오폴리스, 아케타텐(Akhetaten)에 있다. 오직 아텐 신만을 섬기며, 유일신 숭배를 확립하려고 하였던 파라오 아케나텐의 시대에 이르러 아텐 신 숭배는 그 최고조를 맞았다. 아케나텐의 유일신 숭배는 아문-레를 섬기는 사제들의 권력에 반기를 든 것이었으며, 아문-레의 사제들은 아케나텐 통치 시에 그 영향력을 거의 잃게 되었다. 아케나텐 왕은 아텐 신앙의 중심지로서 새로이 아케타텐市(현재의 텔 엘-아마르나 Tel el-Amarna)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아케타텐 왕이 죽은 후 이집트인들은 다시 다신교로 회귀했다. 아케타텐시는 버려졌고, 아문-레의 사제들은 권력과 사회적인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리고 아텐 신은 다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신으로 격하되었다.    (글, 사진 출처-  블로그 > 나의 세상 사는 이야기 )

 


아케나텐의 머리위를 비추는 아텐신

 


아텐신에 대한 새로운 평가

 

역사상 최초의 유일신교(monotheism)로서의 아텐교(Atenism)와 종교 개혁자로서의 아케나텐에 관한 논쟁은 1901-7 년의 이집트 텔 엘-아마르나(Tell el-Amarna) 발굴을 통하여 한 무덤 벽에 기록된 아텐 찬양시와 아텐 숭배를 묘사하는 조각과 그림들이 발견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Davies 1903-8). 아텐 찬양시는 태양판을 상징하는 아텐을 유일한 존재로 부각시켰고, 당시 고대 이집트의 다신론적인 환경에서 아텐을 유일신으로 선포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고대 근동학계에 소개되면서 종교사 연구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따라서 문헌에 나타난 이집트 자체의 역사기록은 아케나텐을 종교적 이단자로 평가하여 그의 족보마저도 왕명단에서 생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20세기 이집트학계의 역사가들이나 종교학자들에 의해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일신교적인 종교개혁자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Breasted 1909; 1933; Eliade 1978). 하지만 1965년 이래로 진행된 카르낙의 아케나텐 신전 발굴을 통해 출토된 수 많은 돌판 기록들과 조각들은 아케나텐과 그 시대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조명해 주었고, 아텐교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아케나텐 연구의 권위자인 영국의 알드레드는 기존의 연구서 (Aldred 1968) 외에 새로운 저술 (Aldred 1988)을 시도하였고, 테베의 아텐 신전 발굴을 직접 지휘했던 토론토 대학의 레드포드(D.B.Redford)도 아케나텐과 아텐교의 전통적인 평가를 상당 부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Redford 1984: 232-235)

출처 블로그 > archena11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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