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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 토페테 신전(카르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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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 카르타고 도시 케르쿠안 고고유적

 


토페테 신전

 

페니키아이의 신 바알함몬과 카르타고의 수호신 타니트를 모시던 성역이다.

이곳에서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아이들의 묘지(작은 묘비들)

 


카르타고의 수호신 타니트의 모자이크

 

아포트로파이온에 있는 바닥 모자이크 . 흰 대리석으로 표현한 것은 카르타고의 수호신 타니트 이다. 페니키아인의 종교적 유물이나 상업상의 산물에서 이러한 도형을 볼수있다

 

카르타고


티레의 고대 페니키아인(人)이 북아프리카의 튀니스만(灣) 북 연안에 건설한 도시 및 도시 국가이다. 로마인은 카르타고의 주민을 포에니(페니키아人)라 불렀으며, 창건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설(說)이 있지만 대개 BC 720년경으로 추측된다. BC 3세기 전반까지 서(西)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무역으로 번영하였는데 특히 상업귀족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으로서 페니키아어(語)로는 콰르트하다쉬트(새로운 도시)이며, 그리스인은 칼케돈이라 불렀다. 카르타고는 땅이 비옥하고 지중해 통상의 요충지로 해상무역을 통해 발전하였다. 특히 에스파냐와 아프리카를 잇는 통상로상에 있었으므로 BC 600년경에는 서지중해의 무역권을 완전히 잡고 코르시카섬 ·사르데냐 ·에스파냐 등지에도 진출하였으며, BC 6세기 중반기에는 전(全)시칠리아를 장악했다. 그들에게는 인신공희(人身供犧)라는 잔혹한 종교적 풍습이 있어 신전의 앞마당에는 여신(女神) 타니트와 남신(男神) 바알함몬에게 산 희생물로서 바쳐진 것으로 추측되는 어린이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여신 타니트는 카르타고의 주신(主神)으로 이집트의 여신인 이시스의 모습과 닮은 데가 많았다. 국가형태는 1년 임기인 2명의 행정장관, 종신의원으로 구성된 원로원, 백인회(百人會:실제인원은 104명), 시민총회로서의 민회, 임기 무제한의 특별직, 장군 등을 가진 도시국가로서 실질적인 정치체제는 전형적인 과두제였다. 한편 용병제도를 채용한 점은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서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서방을 향하여 판도를 넓혀 갔으며,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약 3세기에 걸쳐 그리스인과 충돌을 되풀이하였다. BC 6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人)과 결탁하여 그리스인과 충돌하였고 BC 540년경에는 코르시카섬에서 퍼카이아인과 싸웠으며 BC 480년에는 시칠리아 히메라의 싸움에서 시라쿠사의 겔론에게 패하였다. 국력의 재건을 도모한 카르타고는 BC 5세기 후반에서 BC 4세기 중엽에 걸쳐 특히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와의 싸움을 벌였다. BC 4세기 중엽 시라쿠사의 티모레온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하였고, BC 310년에는 아가토클레스에게 아프리카 본토가 침공되어 카르타고가 포위되었으나 격퇴하고 아가토클레스 사후에 마침내 시칠리아의 패권을 재차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에피루스 왕 피로스의 개입으로 결국 시칠리아에 대한 완전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한편 로마인과의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조약을 맺어 서로 충돌이 없었으나, 피로스전쟁 후 양자의 대립이 격화하여 BC 264-BC 146년 사이에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이 일어났다. 제1차(BC 264-BC 241)는 시칠리아에 있는 영토와 제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시칠리아를 주전장(主戰場)으로 하여 싸웠으나 패하고 시칠리아를 빼앗겼다. 제2차(BC 218-BC 201)는 에스파냐에서 멀리 이탈리아로 진격, 한니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자마전투에서 로마의 대(大)스키피오에게 패배하여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제3차(BC 149-BC 146)에서는 로마의 장군 소(小)스키피오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고 카르타고도 멸망하였다. 그 후 카르타고의 영역은 전부 로마의 속주(屬州) 아프리카로 전락하였으나, 카르타고의 도시 자체는 카이사르에 의해서 재건되어 로마제정시대에는 크게 번영하였다. 특히 수사학(修辭學)·법률학 등 학문연구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으며, 3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지로서 주교도시(主敎都市)가 되었다. 그러나 439년에 반달인(人)에게 점령당하고, 698년에는 아라비아인에게 파괴되어 완전히 쇠퇴하였다. 현재는 고대 카르타고인의 묘지와 카르타고 항구의 유적 및 원형극장과 공중욕탕 등 로마 식민지시대의 유적이 있을 뿐이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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