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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카타리나 수도원(Saint Catherine's Monastery)

성지순례/이집트

by baesungsoo 2013. 1. 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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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시나이 산(Mount Sinai, 히: הר סיני - Har Sinai)   (글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시나이 반도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역삼각형의 반도로 동서의 최대 너비는 210km, 남북의 최장 길이는 385km이다. 서쪽으로 수에즈만 및 수에즈 운하와 동쪽으로 아카바만 및 네게브 사막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 및 가자 지구와 인접해 있고 북쪽은 지중해, 남쪽은 홍해와 접해있다. 시나이 반도는 1967년 ‘6일 전쟁’때 이스라엘군에게 점령당했다가 1979년의 평화조약 규정에 따라 1982년 이집트에 반환되었다. 시나이 반도는 아프리카 북부지역과 아시아 남부지역을 가로지르는 광대한 건조지대에 속하며 토지의 높낮이가 완만한 북부의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겨울에 비교적 많은 125㎜의 강우량을 보이고, 여름은 건조하고 몹시 덥다. 남부 산악지대는 겨울에 비가 조금 내리며 얼음으로 덮이기도 한다. 여름엔 타는 듯한 뜨거운 햇살이지만 밤이 되면 서늘해진다. 시나이 반도에서 농업은 지중해 연안과 오아시스 주변을 제외하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시나이 반도의 산악지대와 메마른 내륙에서 유일하게 살아갈 수 있는 베두인들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낙타나 양, 염소를 치며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 남부 고산지역에 있는 대표적인 산으로는 카타리나 성녀의 시신이 발견된 가장 높은 카타리나 산(2,642m)이 있고 모세가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시나이 산(2,285m)이 있다.

 

시내산    

 

시내산   

 

 시내산 

 

시내산  일출  

 

1-나일강 삼각주, 2-나일강, 3-시나이 광야(시나이산), 4-사해, 5-갈릴래아 호수, 6-큰바다(지중해), 7-홍해 

  

출애급 여정         (글, 지도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시나이 반도가 인류 역사 안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것은 기원전 1260-1220년 사이에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하면서 구원 역사의 핵심 장소로 시나이 산이 선택된다. 파라오의 딸에게서 자라난 모세는 어느 날 이집트인이 한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죽이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이 탄로 난 것을 알고는 미디안의 광야로 피신해 갔다. 모세는 광야에서 치포라와 결혼하고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집안에서 양 떼를 치는 목자생활을 하게 된다(출애 2,18; 3,1; 4,18; 18,1). 모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히브리어로 황량한 지역, 사막, 광야를 의미)으로 갔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불꽃 가운데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신비로이 나타나신 야훼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집트의 손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갈 것을 명하셨다(출애 3,1-12).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아뢰어 “있는 나”라는 이름을 계시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탄생하게 된다(출애 3,13-15 참조). 모세는 야훼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건너 주님께서 약속한 가나안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이곳 시나이 산으로 와 머문다. 그리고 우리가 구약(舊約)이라고 부르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언약을 이곳 시나이 산에서 맺게 된다. 하늘 가장자리에 닿을 것만 같은 시나이 산의 최고봉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게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고 선언(탈출 19,5-6 참조; 레위 26,12; 에제 36,28; 로마 9,26; 2코린 6,16; 히브 8,10)하신 곳이 바로 시나이 산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와서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 주자 온 백성이 한목소리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메마르고 황량한 시나이 광야는 거룩하고 신성한 장소가 되었다. 역사가 아만토스(K.Amantos)는 고대 세계에서 “시나이반도처럼 아무런 보잘 것 없는 곳이 이처럼 거룩하고 전설적인 곳이 된 곳이 없었다.”고 언급한 바로 그 장소가 된다.

 

모세와 시내산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서서 반역할 때 항상 예언자들을 보내어 ‘광야’로 돌아오라고 하는 그 광야의 중심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상기시켜 주는 시나이 산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호세 2,16 참조)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적인 체험은 바로 출애굽 사건(탈출 20,2; 신명 5,6; 26,8; 여호 24장; 다니 9,15)이며 모세 오경의 중심 사상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의 핵심 신학이 흘러나오는 원천이 되는 곳이 바로 시나이 산의 계약에 있다. 시나이 체류 이야기는 출애굽기 19장 1절부터 레위기 전체와 민수기 10장 10절까지 연결되는 모세 오경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이기도 하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탈출 20,1-17)을 받고 다시 부름을 받아 시나이 산에서 사십 주야를 머무르며(24,12-18) 성소와 예배에 관한 계약의 법(20,22―23,19)을 받았다. 인류 역사상 모세만큼 위대한 사람도 없다. 모세는 야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탄생하도록 이끈 하느님의 중개자였다. 모세의 위대함은 야훼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듯이 ‘많은 예언자들은 꿈과 환시 속에서 야훼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겠지만 야훼 하느님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모세 단 한명 뿐이었다’(민수 12,6-8참조). 그러한 모세도 40년 동안의 광야 여정을 마치고 약속의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예리코가 내려다보이는 느보산에서 생을 마감한다. 외형적으로는 므리밧 카데스 샘에서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쳐서 물이 솟아나게 한 사건(민수 20,11-12; 신명 32,51 참조)에 있지만 약속의 땅은 모세를 포함한 출애굽 세대에게 허락된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보고 사귀시던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신명 34,10 참조). 신약성경은 예수를 모세와 대조시키면서 예수는 새로운 법을 가르치는 제2의 모세로 묘사하고 있다. 모세는 광야에서 구리뱀을 들어 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렸지만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들어 올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이며(요한 3,14-15), 모세는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백성에게 주었지만 예수는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주었다(요한 6,22-59). 모세는 계약을 맺으며 짐승의 피를 뿌렸지만 예수는 단 한번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완전한 제사를 바쳤고(히브 9,19-28),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요한 1,17).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은 예수님이야말로 율법과 예언서에서 예언한 인물이며 수난을 통해서 그 예언을 완성할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시내산= 호렙산          (글,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하느님의 산’의 위치에 대한 학자들 간의 몇 가지 주장들은 있지만 전통적으로 아랍어로 ‘에벨무사’라고 부르는 시나이 산을 모세의 산으로 여기고 있다. 이것은 초기 전승들에 기인하는데 3세기경부터 이집트에서 온 은수자들이 불타는 떨기나무 주위에 정착하면서 수도생활을 하였고, 4세기경에 이곳을 순례하면서 순례기를 남긴 에제리아 수녀의 기록 그리고 헬레나 성녀가 세운 성당과 그 후 유스티누스 황제의 성당 등이 그것이다. 지리적인 요인으로는 델타지역에서 탈출해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반도 남단에 있는 구리와 터키옥 광산에 이르는 옛 이집트 도로를 따라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카데스에서 이곳까지는 가는데 거의 열하루가 걸린다(신명 1,2). 이스라엘 전승에서는 모세가 계약을 맺은 장소를 ‘하느님의 산’(출애 24,13; 3,1참조)이라고 하며, 북쪽의 전승(E-엘로힘계·D-신명기계)에서는 호렙, 남쪽의 전승(J-야훼계·P-제관계)에서는 시나이 산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시나이 산과 호렙 산은 서로 다른 산이 아니라 동일한 산이라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통설이다. 기원전 9세기의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두 죽인 일 때문에 이제벨이 죽이려고 하자 브엘세바를 떠나 ‘사십일’(오랜 세월이라는 뜻)을 밤낮으로 광야를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당도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주님의 계시를 받았다(1열왕 19,1-18 참조). 1열왕 19,8 :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시나이’라는 이름은 사계절을 다스리는 신인 메소포타미아의 ‘달 신’(Sin)에서 유래되었다. 이 산은 일찍부터 성스러운 산으로 ‘야훼의 산’이라고 불렸고, 아랍사람들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이라고 하여 ‘에벨무사’(Jebel Musa)라고 부른다. 화강암과 바위투성이의 첫눈에 위험스럽고 접근하기 어려운 산맥으로 이루어진 불모의 이 산은 마치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산을 뒤흔들며 주님이 불 속에서 내려오실 것만 같다.”(탈출 19,16.18 참조) 구약성경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는 시나이 산이 세 번 언급된다(무으민 23,20; 뚜르 52,1; 틴 95,2). 메카에서 계시되어 유일신론과 메시지 그리고 부활을 다루고 있는 제23장 ‘무으민’ 20절에서는 모세가 창조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은 축복받은 산에서 축복 받은 나무 올리브가 자라나는 것을 이야기 한다. 무으민 23,20 : 시나이 산에서 나무를 자라게 하여 이것으로 올리브 기름과 식용 양념을 생산케 하였노라. 메카에서 계시된 이슬람의 기본 원리인 유일신과 메시지 및 부활과 보상을 다루고 있는 제 92장 ‘뚜르’에서는 뚜르 52,1 : 뚜르 산으로 맹세하사 (여기서 ‘뚜르’는 일반적인 산 또는 시나이 산으로 알려져 있는 산이다.) 그리고 메카에서 계시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푼 은혜와 부활에 대한 믿음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제 95장 “틴”에서 시나이 산을 두고 맹세함으로써 모세를 위대한 예언자로 믿고 있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에서도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카나리나 수도원에서 시나이 산으로 오르는 낙타 길

 

1.베두인 마을  2.성 카타리나 수도원 3.낙타 종점 4.시나이 산 정상.  

낙타에서 내려 200m 정도 올라가면 매점이 나오고 여기서부터는 계단길이다. 정상은 약 600m 거리이다.

 

1.성 카타리나 수도원  2.아론과 엘리야 예언자가 머무른 곳(샘) 3.계단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매점 4.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매점

5.시나이 산 정상(삼위일체 경당) 수도원에서 시나이 산 정상까지 돌계단 길은 약 2.6km이다. (수도원-엘리야 샘 : 1.6km, 엘리야 샘-정상 : 1km)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 뒤쪽으로 나 있는 계단 길 방향      (아래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1.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해발 2285m의 시나이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일반 순례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꼬불꼬불한 낙타길(정상까지 약 4.4km)이 있는데 이 길은 산 정상 근처까지 낙타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길로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손전등을 밝히고 굽이굽이 올라가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십계명을 받은 곳이라고 해서 모세의 산이라고 부르는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낙타에서 내려 750여 돌계단을 더 올라가야 한다. 한라산(1950m)보다 훨씬 높은 시나이 산의 높이에 처음부터 기세가 꺾일 수도 있지만 카타리나 수도원이 해발 1500m의 위치에 있음을 상기한다면 충분히 걸어 올라갈 수 있는 높이이기도 하다. 평소 운동을 한 사람들에겐 2시간 반 정도면 걸어 올라갈 수 있다.

2. 다른 길은 카타리나 수도원 뒤편에서 3700여개의 돌계단이 놓여 있는 직선거리의 길(약 2.6km)이다. 수도원에서 아론과 엘리야 예언자가 머물렀다는 샘까지는 약 1.6km이고 이곳에서 1km를 더 올라가면 정상에 이른다. 땀 흘리며 이 계단길을 만들었을 초세기의 수도자들은 천국으로 안내하는 계단이라고 믿었을듯하다. 실지로 카타리나 수도원의 아빠스였던 ‘성 요한 클리마코’는 수도생활과 성화를 위해 필요한 가르침으로 600년 경에“천국의 계단”(Ladder of Paradise)을 남겼다. 천국의 계단은 예수의 30년 숨은 생활에 맞추어 30개의 층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도생활로 불림을 받은 이들을 천국의 문까지 인도하는 계단이 될 것이다. 마지막 30장은 정화·조명·일치를 다루는데 수덕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소 무욕에 있으며 수도생활의 최고 단계는 외적인 평화를 누리는데 있다. 가파르고 좁은 이 계단길은 주님의 자비를 구하며 오르는 길(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이기도 하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능선의 정상에 ‘고백의 문’이 있다. 초세기 순례자들은 이곳에 이르면 시편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무릎을 꿇고 죄를 고백하였다고 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다른 문이 하나 더 있는데 은수자 스테파노 성인은 이곳에서 순례자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고 한다.

 

낙타타는곳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시내산 오르는 계단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시내산 오르는 계단

 

시내산 오르는 계단에서 내려다본 카타리나수도원

 

고백의 문

 

계단길을 오르면서 2개의 문이 있는데, 첫 번째 문을 "고백의 문"이라고 한다. 초세기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죄를 고백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산인 시나이 산에 올랐다고 한다.

 

고백의 문

 

엘리야의 샘 근처에 있는 두 번째 문

 

엘리야의 샘            (아래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상에 조금 못 미쳐 작은 평지에 사이프러스 나무와 샘, 작은 경당이 있는 곳이 나온다. 이곳은 전승에 의하면 모세는 이곳에 아론과 원로들을 남겨놓고 홀로 산 정상으로 올랐다고 한다. 탈출 24,1-2 :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원로 일흔 명을 데리고 주님에게 올라와, 멀찍이 서서 경배하여라. 너 모세만 주님에게 가까이 오고 다른 이들은 가까이 와서는 안 된다. 백성은 아예 산으로 올라와서는 안 된다.” 또한 엘리야 예언자가 피신했던 곳이라 엘리야의 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이 엘리야가 피신했던 동굴, 하느님을 만났던 동굴이라고 한다.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나는 모습은 산전수전 다 겪고 난 후의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1열왕 19,11-13 :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의 샘

 

엘리야의 샘

 

엘리야의 샘

 

엘리야의 샘

 

엘리야의 샘 조금 위쪽에 있는 경당

 

엘리야의 샘 조금 위쪽에 있는 경당

 

엘리야의 샘 조금 위쪽에 있는 경당

 

엘리야의 샘 

 

낙타들이 오르는 길.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보통 2-3시간 정도면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시나이 산 정상 바로 아래쪽에 있는 베두인 매점

 

삼위일체 경당,  모세가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는 시나이 산의 정상. 지금은 삼위일체 경당이 들어서 있다.

 

 

엘리야의 샘에서 다시 750여 계단을 더 올라가면 모세가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최고봉이다. 이곳은 카타리나 수도원으로부터 716m 높이 그리고 엘리야의 샘에서 157m 높이이다. 이곳에는 모세를 기념하여 4세기경에 기념성당이 들어섰고, 유스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유스티아누스 성당은 산 정상에 길이 21m, 폭 11.50m로 상당히 큰 규모로 지어졌다. 14세기에는 회교사원도 산 정상에 지어졌었다. 삼위일체에게 봉헌된 현재의 작은 경당은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지은 성당 터의 폐허위에 1933년에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상주하는 수도자는 없고 다만 정교회 수도자들이 기도를 위해 찾아오는 특별한 날에만 개방한다. 383년 시나이 산을 순례한 에제리아 수녀는 시나이 산을 방문한 느낌을 이렇게 남기고 있다. “한가지 기묘한 것은 ― 이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생각됩니다만, 하느님의 영광이 내려왔던 중앙 봉우리가 그렇게 높다 해도 산 밑에서는 그것을 느낄 수 없고 절정에 올라가 봐야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곳을 구경하고 내려와서는 올라가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다르다고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오전 10시에 하느님의 성산 시나이의 절정에 도착했습니다. 이 산이 구름에 덮혔던 그날 주님의 영광이 내려와 법을 주었던 곳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지금은 여기에 넓은 장소가 없기 때문에 작은 성당이 하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매우 아름다운 성당이었습니다.” 성녀 카타리나의 시신이 발견된 성 카타리나 산 위에는 성녀 카타리나에게 봉헌한 경당이 서 있다. 시나이 산 정상에서 멀리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삼위일체 경당            (아래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삼위일체 경당

 

삼위일체 경당 

 

삼위일체 경당

 

삼위일체 경당

 

삼위일체 경당

 

삼위일체 경당

 

시내산 정상 모세기념교회, 삼위일체 경당                 (출처- http://blog.naver.com/ruby221 

 

삼위일체 경당

 

삼위일체 경당

 

삼위일체 경당 

 

삼위일체 경당

 

 삼위일체 경당 

 

시내산 일출

 

시내산에 오른 순례자들              (아래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시내산에 오른 순례자들

 

하산하는 순례자들

 

돌 계단 길을 알리는 이정표.

 

이정표에서 조금 내려가면 아론과 원로들이 머물렀던 곳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가 동굴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곳이 나온다.

 

엘리야의 샘 

 

낙타를 타고 하산하는 순례자들

 

시내산 성캐더린 호텔 

 

시내산 성캐더린 호텔  

 


시내산 아래 백성들이 진 쳤던곳

 

<성 캐서린- 성 카타리나 수도원(Saint Catherine's Monastery)>

 

성 캐서린- 성 카타리나 수도원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시나이 광야에서 수도생활은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교 은수자들은 3세기 중반부터 시나이 광야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은수자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안토니오(251-356)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완덕의 삶을 열망하게 했고, 사막을 찾아 나선 은수자들은 시나이 산 자락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3세기 중반 로마 황제 ‘데치오’(Decio, 249–251 재위)의 박해시기에 하느님께서 현현하신 시나이 산의 정상과 발치에 첫 은수자들이 도착하여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은수자들은 동굴이나 돌로 지은 암자 그리고 오두막과 같은 곳에서 침묵 중에 기도와 일을 하며 살았다. 이와 같이 시나이 산 주변, ‘불타는 떨기나무’(탈출 3,1-6)가 있는 장소와 파란 계곡에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작은 규모의 수도 공동체들이 형성되었다.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거룩한 ‘불타는 떨기나무’ 자리에는 작은 성당을 지어 동정 성모께 봉헌하였다. 330년경에 전하는 기록에는 시나이 은수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비잔틴 제국의 황후인 헬레나 성녀는 불타는 가시덤불이 있는 장소에 동정 성모께 봉헌한 작은 성당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4세기 내내 계속된 사라센인들의 침입으로 시나이 산의 은수자들은 학살과 순교의 고통을 당했는데 특히 305년과 400년에 많은 은수자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몇몇의 초기의 은수자들은 시나이 산 위에서 살해당한 은수자들의 전기를 기록하고 있다. 정교회에서는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든 율리우스력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데 해마다 1월 14일에 시나이 산에서 순교한 40명의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순교자들이 있지만 ‘40’이라는 순자는 성경의 숫자인 ‘40’을 상징하고 있다. 그레고리우스 13세 교황(1572~85 재위)은 1582년 율리우스력을 고쳐 시행을 선포하는데 정교회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그레고리우스 달력을 사용하는 서방 교회보다 13일이 늦다. 시나이 수도승 생활의 전성기는 5세기였다. 시나이 반도 남단의 은수자들의 수는 증가하였고 많은 은수자들의 명성은 동서로 퍼져 나갔다. 4세기에 이곳을 순례했던 에제리아는 불타는 떨기나무 기념성당 근처에 있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수많은 은수자들이 살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은수자들은 주일이 되면 기념 성당에 모여 성찬례를 거행하였다. 1884년에 발견된 에제리아(또는 에테리아, 에게리아 등) 수녀의 여행기(Intinerarium Egeriae)에는 시나이 산의 은수자들을 방문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에제리아의 순례기는 1884년 이태리 아레조에서 발견 되었는데 381년 부활절부터 384년 부활절까지 콘스탄티노풀에서 예루살렘까지 그리고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이집트로 이어진 순례 여행을 하였으며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여러 곳을 순례한 것으로 보인다. 에제리아 수녀가 시나이 산과 파란을 순례한 것은 383년 12월 16일부터 20일까지로 에제리아 순례기의 처음 1,1-5,11까지 언급되고 있다. 에제리아는 시나이 산 정상에서 작은 성당을 발견하였다. 다른 하나는 호렙산(시나이 산) 위에 있었고, 세 번째는 ‘불타는 가시덤불’이 있었던 장소에 있었는데 근처에는 풍부한 물이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고 전한다. 에제리아의 기록을 통해 시나이 광야에서의 수도원 발전상을 볼 수 있다. 5세기 중반에 은수자 수의 증가는 ‘파란의 주교’라고 언급되는 고위 성직자에 의해서 보살펴지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임무는 시나이의 주교에게 넘겨졌다.

(이하 글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성 캐서린- 성 카타리나 수도원

 

성 캐서린 수도원은 모세가 신을 벗었다는 시내산 기슭의 희랍 정교회에 속하는 수도원이다. 4세기 초, 이 지역을 지배했던 로마의 황제는 사병출신이었던 막시미누스(재위 235~238) 황제였다. 그는 트라키아의 농민 출신이었는데 독일의 라인지방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거대한 체구를 지녔던 그는 세베루스 알렉산더 황제가 암살되자 군인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황제 재위 중 특히 기독교 박해를 심하게 했는데 귀족출신의 캐서린은 용모와 학식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그녀가 기독교에 입문하여 황제의 우상숭배를 비판하자 문제가 발생했다. 그녀를 아끼던 황제는 몇 사람의 학자들을 보내 그녀를 회유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 학자들까지 기독교도가 되고 말았다. 몹시 노한 황제는 결국 캐서린을 잡아들여 모진 고문 끝에 죽이고 말았는데 그녀의 시신이 천사들에 의하여 이곳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 후 막시미누스 황제는 도나우강과 라인강 유역을 정벌하였으나 원로원을 무시하다가 폐위되었고, 결국 부하들에 의하여 자식들까지 함께 몰살당하는 비운의 황제가 되고 말았다. 그 막시미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사람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황제의 지배지역 여러 곳에 교회를 많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수도원도 그들 교회 중의 하나로 세워진 곳이다. 세월이 흐른 후에 순교한 캐서린의 이름을 따 성 캐서린 수도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이 수도원은  6세기 중엽 동로마 제국의 유수티니아누스(Justinianus)황제의 명에 의해 건립된 후 지금까지 1,400년 이상 한 번도 파괴되거나 정복당한 일없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시내산 자락을 지켜오고 있다. 과거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수도원의 문을 잠그고 밧줄로 연결된 광주리를 타고 오르내렸다고한다. 오늘날은 한 사람 정도 지나갈 만한 좁은 통로를 통해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1,400여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도사들이 하루에 두 번씩, 4시간 동안 장엄한 예배를 드려온 곳이다. 교회의 전면 벽은 예수와 모세, 엘리야 그리고 예언자들과 제자들을 나타낸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모자이크 작품가운데 하나는 세계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성 캐서린- 성 카타리나 수도원

 

성 캐서린- 성 카타리나 수도원

 

성 캐서린- 성 카타리나 수도원

 

성 캐서린- 성 카타리나 수도원

 

성 캐서린- 성 카타리나 수도원

 

성 캐서린- 성 카타리나 수도원

수도원의 요새화된 담은 단단한 화강암을 장방형으로 잘라 다듬어 지었다. 요새는 동·서쪽이 75m, 남쪽은 80m이며 북쪽은 88m인 불규칙한 직사각형의 모양이고 높이는 남쪽 8m에서 북쪽은 25m로 지면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화강암 요새 벽의 두께는 탑이나 지하실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2-3m의 폭을 하고 있다. 남쪽 벽은 고대 십자가 상징물로 벽면을 장식하였고, 돌에 새긴 다른 것들은 북쪽 시나이 산을 향하여 있는데 아주 잘 보존되어 있다. 수도원 밖은 굉장히 단순하지만 수도원 안은 무척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다. 수도원의 본당(Catholicon)에는 9개의 경당을 포함하고 있다: 불타는 가시덤불 경당, 성 야고보 경당, 시나이와 인근에서 살해된 거룩한 교부들의 경당, 성 마리나(St. Marina)경당, 성 콘스탄티누스와 성녀 헬레나 경당, 성 안티파스 경당, 성 고스마와 다미아노 경당, 기둥 수행자인 성 시메온과 성 안나 경당이 있고 경내에는 다른 12개 경당이 더 있다.

 

수도원 정원

 

수도원 정원

 

수도원 아래쪽에 있는 순례자 숙소

 

 성 캐서린(카타린) 수도원           (이하 출처- http://blog.naver.com/ruby221 

 

 

 성 캐서린(카타린) 수도원

 

 성 캐서린(카타린) 수도원

 

 성 캐서린(카타린) 수도원

 

성 캐서린(카타린) 수도원 

 

수도원 남쪽 성벽과 출입문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수도원에는 원래 출입문이 없었고 마치 오늘날 엘리베이터처럼 끈으로 바구니를 끌어 올리는 장치가 있었다.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 장치가 운용되었고 순례객들과 수도원에 필요한 음식물들을 들어 올렸었다. 외부의 침입이 많았던 외딴 수도원에서 혹시도 모를 외부 침입자로부터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던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 도서관과 관련하여 유명한 독일의 티센도르프도 1844년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두 명의 수도자가 끌어 올리는 이 장치를 통하여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오늘날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수도원 밖에서 이 장치를 볼 수 있으며, 오늘날은 그 아래쪽으로 출입문이 나 있다. 북쪽 벽은 가장 많이 훼손 되었는데 수세기를 거치면서 여러 번 복구 되었고,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서도 1798-1801년에 복구 되었다. 수도원 출입문 위쪽에는 그리스어와 아랍어로 쓰인 현판이 놓여 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 시나이 산의 거룩한 수도원은 신심 깊은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가 기초를 놓고 건축하였다. 그의 통치 30년, 아담 이후 6021년 그리고 그리스도 이후 527년에 황제와 황후 테오도라를 영원히 기념한다.” 그리고 다른 헌정은 건축가 스테파노(Stefano)를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출입문

 

처음에는 아래쪽에 나 있는 출입문은 없었고, 그 위쪽에 있는 작은 집처럼 생긴 곳이 출입문(?)이었다. 인근 베두인들의 잦은 약탈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성곽 위쪽에서 신원을 확인 한 후 줄을 내려 사람과 필요한 식량을 끌어 올리는 구조였다.

 

출입문(?)

 

출입문(?)

 

출입문(?)

 

출입문(?)

 

수도원 뒤쪽을 돌아가 보면 벽에 새긴 다양한 십자가들을 볼 수 있다.

 

다양한 십자가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다양한 십자가, 성곽이 지어지던 비잔틴 시대의 다양한 십자가들을 볼 수 있다.

 

다양한 십자가

 

다양한 십자가, 두 마리의 어린양이 십자가를 경배하고 있는 십자가

 

다양한 십자가

 

다양한 십자가

 

등십자가

 

불타는 가시덤불 경당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좁고 낮은 출입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는 ‘불타는 떨기나무’ 관목이 있다. 가장 중요한 곳 중의 하나인 ‘불타는 가시덤불 경당’은 본당의 성소 뒤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을 순례했던 에제리아 수녀는 하느님께서 나타나신 거룩한 장소인 ‘불타는 떨기나무 기념 성당’ 앞쪽에 있는 정원에서 이 관목을 보았다고 전하고 있다. 불타는 떨기나무. 모세가 하느님을 만날 때 불 가운데 타지 않고 있었던 나무이다. 학명은 'Rubus sanguineus Friv'이며 장미과이며 영어로는 'Burning bush' 또는 '다. 지중해 연안에서 4-9월에 개화하며 성경에서는 탈출기 3,2-4; 신명기 33,16(덤불에 사시는 분의 은총으로 복을 받아라) 에서 언급된다. 임종을 앞둔 모세가 열두 지파를 축복하면서이다. 떨기나무는 키가 1.5m 정도로 자라는 장미과의 상록 관목으로 습기가 많은 곳에서 덤불을 이룬다. 우리나라의 산딸기와 흡사하며 가시가 있고 잎은 작은 타원형이며 꽃 색깔은 흰색을 띤 분홍색이다. 열매는 처음에는 붉은색이지만 차츰 검은 자색으로 익는다. 꽃과 열매는 4월에서 9월까지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불타는 떨기나무 관목

 

 성 캐서린(카타린) 수도원 가시 떨기나무

 

성 캐서린(카타린) 수도원 가시 떨기나무


수도원의 경내에는 모세가 보았다는 것과 같은 종류의 떨기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시나이 반도 남부에서만 자라는 독특한 종류로서 여러 차례 다른 곳에 이식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불타는 떨기나무 관목

 

불타는 떨기나무 관목

 

불타는 떨기나무 관목

 

불타는 떨기나무 관목

 

불타는 떨기나무 경당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불타는 떨기나무 경당

 

 

이곳에 들어갈 때는 누구나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한다.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건축가는 불타는 떨기나무 전승을 살려 아름다운 바실리카(대성전)를 지으면서 이곳을 3×5m의 작은 경당을 만들어 대성전의 감실(tabernacle)로 만들었다.

 

불타는 떨기나무 경당

 

불타는 떨기나무 경당

 

‘불타는 떨기나무 경당’은 거룩한 동정녀의 ‘주님 탄생 예고’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초세기 신자들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불타 없어지지 않고 불타는 모습 속에서 동정의 상징을 보았던 것이다. 불타는 떨기나무가 불에 타면서도 그 형태를 유지한 것처럼 성모 마리아 역시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였지만 그 처녀성은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불타는 가시덤불의 동정녀’ 이콘에서는 불타는 덤불 안쪽에 아기 예수를 앉고 있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표현하고 있고 그 왼쪽에는 신발을 벗고 경배하고 있는 모세를 그리고 있다.

 

 모세의 우물,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우물 

 

출입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그 바로 오른쪽에는 우물이 하나 남아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 르우엘(또는 이트로, 탈출기에서는 이곳에서만 ‘르우엘’이라고 언급하고 있고 ‘이트로’가 더 자주 언급된다)의 일곱 딸들을 이 우물가에서 만났고, 그들의 양 떼에게 물을 먹게 해 주었다.

 

모세의 우물 옆에는 모세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다.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모세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

 

모세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

 

모세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

 

모세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

 

모세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

 

모세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  

 

수도자들의 독방과 다른 구조물들은 요새화된 성벽의 안쪽 면을 따라 지어져 있다. 울퉁불퉁하고 경사진 바닥은 단단한 아치와 통모양의 둥근 천장 구조물로 평탄하게 되었고 그 위에는 수도자들의 숙소와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한옥처럼 되어 있는 부분은 외부 손님들이 왔을 때 머무르는 방이다.

 

양철지붕처럼 되어 있는 곳이 수도원 성당(바실리카)이며 오른쪽에는 성당 종탑과 이슬람 첨탑이 함께 있다.

 

수도원 도서관, 복도처럼 길게 나 있는 방이 있는 곳이 수도원 도서관

 

수도원 도서관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수도원 도서관

 

<수도원 성당- 바실리카>

 

성당 출입문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현관 입구에서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6세기에 레바논 향백나무로 만든 아름답게 새겨진 출입문을 볼 수 있다. 현관 입구는 11세기 십자군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성당 출입문

 

성당 출입문 부조

 

성당 출입문 부조

 

성당

 

성당

 

성당

 

수도원 본당(Catholicon)

 

 

당시 육중한 화강암 덩어리를 사용하여 지었는데 넓은 홀이 딸린 3개의 측랑으로 이루어진 바실리카였다. 길이 40m, 폭 19.20m로 뒤쪽 제단 후진에 불타는 가시덤불 경당, 성야고보에게 봉헌한 경당과 시나이의 거룩한 교부들에게 봉헌한 경당들을 포함하고 있다. 본당의 회중석(naos)은 길이가 25m, 폭 12m이다. 회중석은 이음매가 없는 통으로 된 녹색으로 칠해진 화강암 6개 기둥이 있는 두 개의 줄로 3개의 회중석으로 나누어져 있다. 에프램 부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12 기둥은 1년의 매 월을 상징하였다. 각 기둥에는 해당하는 달에 기념하는 성인들의 축일에 상응하는 성인들의 성상으로 덮여 있었다. 기둥의 작은 구멍에는 성인들의 성유물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수도자들은 몸을 숙여 차례대로 각 기둥에 입 맞춘다. 각 기둥의 기둥머리는 십자가, 어린양, 식물과 과일 등의 주제로 각기 다르게 장식하고 있다.

 

바실리카(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위쪽에 있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성당내부

 

 

그리스도의 변모’ 모자이크

 

 

바실리카 안의 제대 후진(apse)에는 6세기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변모’ 모자이크가 있다. 예수님의 양 옆으로는 시나이 산의 두 중심인물인 모세가 예수님의 왼쪽에 그리고 오른쪽에는 엘리야 예언자를 배치하였고 그 아래쪽으로는 무아경에 빠진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 서로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 둥근 반원 아래쪽 가운데 중심에는 다윗 왕을 배치하고 그 양쪽으로는 16명의 예언자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위쪽 라인에는 12 사도들이 그려져 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린 그림 안에는 그리스어로 각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2사도에는 배반자 유다가 빠지고 그 자리에는 바오로와 타대오 그리고 마티아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변모’ 모자이크

 

‘하느님의 영광에 빛’(2코린 4,6; 히브 1,3)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변모 모자이크는 예수님의 뒤쪽 배경을 아몬드(편도나무) 모양으로 배치하였다. 예수님이나 성모님의 주위를 아몬드 모양으로 처리하는 성화 기법은 아몬드 꽃이 겨울이 끝나기도 전인 이른 봄에 피어나듯이 마치 죽어 있는 듯한 나무에서 피어나는 아몬드 꽃은 부활을 상징하는 꽃이며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고 말 것이라는 약속의 표징으로서 사용되었다(예레 1,11 참조). 아몬드는 안쪽은 조금 더 짙은 검은색 원형 아몬드에서 밖으로 향하면서 엷은 색으로 처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초자연적인 빛이 발산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였다.

 

 

 

성녀 카타리나의 성유골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바실리카 안 제단 이콘(iconostasis) 뒤쪽에는 성녀 카타리나의 성유골이 담긴 하얀 대리석 관이 하나 놓여 있다. 성녀의 성유물은 이른 시기 이래도 대리석 궤에 보관되어 왔다. 이 유골함은 1231년의 순례기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 후 1688년 러시아 왕족이 은궤를 보내왔는데 은궤에는 러시아 황제가 보낸 선물이라고 키릴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유물은 오래된 대리석 궤에 계속 모셔져 왔다

 

종탑

 

 

오늘날의 종탑은 1871년에 지어졌다. 9개의 종은 러시아 황제가 보낸 선물이며 주일과 축일에 울려진다. 반면 나무로 만들어진 세만트론(semantron)은 저녁기도와 아침 기도 때 울려진다. 프레스코발디는 수도원 경내에 일례가 없는 회교 사원이 1381년경에 수도원에서 봉사하는 베두인 무슬림들을 위하여 건설된 것을 언급한다. 이슬람 사원의 첨탑(minaret)은 대성당(basilica)의 그리스도교 종탑과 나란히 서 있다. 전승에 따르면 이슬람교도들의 손에서 살아남은 수도자들은 수도원 경내에 작은 이슬람교 사원을 세워서 그들을 회유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수도원의 안전을 보장해준 마호메트에게 감사하기 위해 첨탑을 지었다고도 하는데 어쩌면 이슬람으로 개종한 수도원을 돕고 있는 베두인들을 위한 작은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수도원 안에 이슬람 사원이 지어졌지만 이 사원은 메카를 향하여 지어지지도 않았고 사용된 적도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성당 종탑과 이슬람 첨탑이 수도원 안에 함께 있는곳은 이곳 카타리나 수도원이 유일한 곳이다. 

 

그리스도교 성당 종탑과 이슬람 첨탑

 

그리스도교 성당 종탑과 이슬람 첨탑

 

시나이 산에 오르면서 만나게 되는 베두인들은 카타리나 수도원을 위해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들이다. 불타는 떨기나무 성당에 대성당과 요새를 짓게 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루마니아와 이집트 지역에서 200 가정을 뽑아 수도자들을 보호하고 수도원을 돕도록 하였다. 비록 이슬람의 출현으로 모두 그리스도교를 포기했지만 그들은 수도원을 떠나지 않고 그들의 자리에서 그들의 역할을 오늘날까지 충실히 해 오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신자들이지만 거룩한 산의 예언자 모세를 숭배하고 있고 조르지오 성인과 카타리나 성녀를 공경하고 있다. 이들은 4개의 씨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씨족은 수도원에서 인가된 각자의 족장이 있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의 수도원 보호문서

 

 

 

7세기에 접어들어 시나이의 수도원들은 아랍 정복자들에 의하여 중대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한때 수천 명의 은수자들이 살았던 시나이 반도에는 30여명으로 줄어들었고 희망의 불빛이 꺼져버린 시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유스티아누스 요새와 성당, 성유물과 값진 이콘들 그리고 필사본들은 이러한 고난의 시기를 견디어 냈다.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고 시나이 반도의 수도원들을 휩쓸고 간 격변의 시기에 시나이 수도원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수도원장은 마호메트(Muhammad)에게 시나이에 살고 있는 은수자들과 그리스도인 그리고 유대인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 하였다. 이 요구는 기꺼이 받아들여졌고 마호메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시나이의 수도원들을 보호할 것을 지시하였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도서관에는 마호메트(Muhammad)가 시나이 반도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하고 있을 때 마호메트로부터 받은 두 손바닥으로 날인한 문서 위에 그의 조카 아부 탈립(Abu Talib)이 622년에 서명한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이 문서 덕분에 수도원은 무슬림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었다. 이 문서는 20세기의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요인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의 신빙성을 주장한 반면 다른 이들, 특별히 다수의 아랍인들은 900년 이후의 것으로 보았다. 여하튼 역사가 아만토스(K.Amantos)가 제안하는 것처럼 시나이 수도원은 마호메트와 그의 후계자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집트의 이슬람 통치자들이 수많은 법령으로 그리스도교 수도원을 보호하도록 확증해 주었던 것은 마호메트 자신이 시나이의 보호를 지시했다는 사실로부터 가능한 일이었다. 오스만 터키 제국의 술탄 셀림 1세(Sultan Selim I)가 1517년에 이집트와 시나이를 정복했을 때도 이 마호메트의 문서는 효력을 발휘 하였다. 터키의 술탄들 특별히 셀림 1세(Selim I)와 슐레이만 대제(Suleiman the Magnificent)는 종종 관대한 법령들을 공포하여 수도원에게 관례에 따른 의무들을 관면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 마호메트의 손도장이 찍힌 문서의 사본은 수도원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성녀 카타리나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성녀 카타리나(St.Catherine)는 310년경에 활동한 알렉산드리아의 동정 순교자이며 축일은 11월 25일이다. 상류 가문에서 태어나 학식 있는 카타리나는 철학과 수사학 · 시 · 음악 · 자연과학 · 수학 · 천문학과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학문 그리고 고귀한 성격은 그녀가 천상 신부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그녀는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게 된다. 4세기 초에 막시미누스(Maximinus, 308-313 재위)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카타리나는 우상을 숭배하는 황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다. 황제는 카타리나를 설득하기 위하여 50명의 학자들을 보내 그녀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앙을 반박하였지만 오히려 이방인 철학자들은 황제의 많은 지인들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황제는 이러한 노력들이 헛수고임을 깨닫고 카타리나에게 고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황제는 대못을 박은 바퀴를 만들어 카타리나를 고문하였지만 카타리나는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고 오히려 구경꾼들이 바퀴에서 튕겨 나온 못에 의하여 죽었다고 한다. 온갖 고문으로도 카타리나의 신앙을 바꾸지는 못하자 마침내 참수하고 만다. 카타리나의 목에서는 하얀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카타리나의 시신은 천사들에 의하여 시나이 산의 최고봉으로 옮겨졌다. 5세기가 지난 9세기 초에 시나이 산에서 수행하던 어느 수도자가 환시에 빛에 싸인 채 천사에 의해 성녀의 시신이 시나이 산 정상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수도자는 다음 날 산 정상에서 성녀의 시신을 발견하였고 시신은 수도원에 안치되게 된다. 시나이는 성녀 카타리나의 명성과 공경이 전파되면서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시메온 메타프라스테스(Symeon Metaphrastes)는 10세기에 성녀의 삶을 일반 신자들에게 알리는 대단한 공헌을 하였는데 “위대한 순교자의 순교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를 거둔 성녀 카타리나”라는 성인전을 기록하였다. 시메온은 중세 그리스어로 성인들의 삶을 담은 성인전을 10권으로 저술하였다. 시메온이 성녀의 성유물 일부를 프랑스로 옮겨 가면서 이 후 성녀의 시신이 발견된 산은 ‘카타리나 산’이라고 명명 되었고, 불타는 떨기나무 수도원 또는 거룩한 변모 수도원이라고 불리던 수도원은 9세기경부터 ‘성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10세기경부터 동방 교회 뿐만 아니라 서방교회에서도 가장 높이 공경 받는 성인 중의 한명이 되었다. 값진 선물들이 수도원으로 보내져 왔고 많은 토지들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의해 기증되었다. 안젤리코(Fra Angelico), 코렛찌오(Correggio), 루벤(Rubens), 티씨안(Titian)과 무릴로(Murillo)와 같은 거장들에 의해서 성녀 카타리나는 그녀의 생애에서부터 순교에 이르기까지 캔버스 세계에서 불멸하게 되었다. 성녀의 공경과 초상화는 마찬가지로 동방으로 전파되었다. 성화에서 성녀는 왕실의 복장을 하고 화관을 쓰고 지혜와 순교를 암시하는 깃펜, 지구의, 책들 그리고 대못이 박힌 수레와 같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녀 카타리나의 일생과 순교의 장면을 함께 그린 17세기의 이콘 

 

성녀의 수많은 이콘들 중에서 종종 이콘의 가장자리에 작게 성녀의 생애에서부터 순교까지 가장자리를 장식한 이콘들이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수도원에 잘 보관되어 있다.

 

 

수도원 도서관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은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도서관에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서관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 희랍어로 쓰여 있지만 히브리어, 아랍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이집트어 등 4500편의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비잔틴시대의 이콘들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번역 필사본을 갤러리에서 만나 볼 수 있다. 5세기경에 시리아어로 번역된 루카복음서 사본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번역 사본이다.

 

성 캐서린 수도원 도서관

 

 

 

 

 성 캐서린 수도원 도서관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수도원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경이로운 발견은 4세기경에 쓰인 희랍어 성경인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이다. 전 세계에서 바티칸 사본 다음으로 중요한 필사본인 4세기경 희랍어로 쓰인 시나이 사본의 대부분은 유감스럽게도 현재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독일 성서학자 티센도르프(K.van Tischendorf)는 1844년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불태우려고(수도원 쪽에서는 꾸며낸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내 놓은 낡은 바구니 안에 129장의 양피지를 발견하였다. 유심히 살펴본 성서학자인 티센도르프는 이것이 희랍어로 쓰인 70인역 본 사본임을 알아차리고 이것을 자기가 보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자 수도자는 양피지의 가치를 즉각 알아차리고는 양피지 중 43장만을 주었다. 이것은 330-360년 사이에 희랍어로 쓰인 성경 필사본으로 오늘날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나이 사본은 바티칸사본(Codex Vaticanus)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이며 동시대에 쓰인 바티칸 사본과 함께 가장 귀중한 사본으로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70인역과 신약성경은 거의 모두 이 두 사본에서 번역된 것이다. 대략적으로 70인역(희랍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의 절반정도가 남아 있고, 신약성경은 전부와 바르나바 서간(Epistle of Barnabas)과 헤르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 일부가 발견 되었다. 카타리나 수도원에는 필사본을 공식적으로 빌려 간다고 1844년에 티센도르프가 직접 작성하고 서명한 문서가 남아 있다. 수도원으로부터 필사본을 선물 받은 것인지 아니면 대여해 간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는 것이다. 티센도르프가 처음 받은 43장의 필사본 내용은 역대기 상권, 예레미야서, 느헤미야서 그리고 에스터르기 일부로 티센도르프는 그것을 독일로 가져와 라이프찌히 대학(Leipzig University) 도서관에 기증하였고, 1846년 티센도르프는 그 내용을 ‘코덱스 프리데리코 아우구스타누스’(Codex Friderico Augustanus)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같은 묶음 중에서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남아 있는 사본은 이사야서 전권과 마카베오기 1권과 4권이다. 나머지 필사본을 찾기 위해 1853년 카타리나 수도원을 다시 찾았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1859년에 티센도르프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2세의 도움으로 필사본을 찾기 위해 3번째로 카타리나 수도원을 방문 하였다. 이 때 이미 알고 있는 나머지 86장의 필사본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347장의 완전한 양피지 필사본을 발견하게 된다. 수도원은 러시아 황제에게 이 시나이 사본을 대여 해 주기로 결정하고 티센도르프를 통해서 보내게 된다. 구소련 연방은 1933년에 이 시나이 사본을 대영박물관에 10만 파운드를 받고 팔았다. 시나이 사본은 현재 347장(199-구약, 148-신약)은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에, 12장과 14 조각은 시나이 산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 43장은 독일의 라이프찌히 대학 도서관에 그리고 3장의 조각들은 세인트 피터스버그(St. Petersburg)에 있는 러시아 국립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다. 2005년 6월 영국과 유럽, 이집트, 러시아와 미국의 전문가 팀이 4개의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필사본을 디지털 작업화 하기 위하여 구성 되었고 4년에 걸친 공동 작업 끝에 800 페이지로 합쳐지게 되었다. 시나이 사본은 다음 웹 사이트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이제는 온라인을 통해서 전 세계 학자들과 일반 독자들은 누구나 학문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http://www.codexsinaiticus.org     1975년에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수도원 복원 작업 도중 우연히 성 조르지오 경당 아래에서 수많은 양피지 조각들이 들어 있는 방을 발견했다. 이 조각들 중에는 시나이 사본의 12장과 11장의 모세오경 그리고 헤르마스의 목자 1장 있었다. 그리고 2009년 9월에는 박사 학위를 준비하기 위해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머무르고 있던 니콜라스 사리스(Nikolas Sarris)가 이전에 발견되지 않은 여호수아 1장 10절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 조각을 발견되기도 했다. 카타리나 수도원에 보관된 사본들은 1945년에 세운 수도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미국 의회 도서관과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지원으로 모두 마이크로 필름화 하였다.

 

시나이 사본 중 루카복음 11,2절 

 

이콘 갤러리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동방교회에서는 8-9세기에 일어난 ‘성화상 논쟁’으로 수많은 이콘들이 철저하게 파괴 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카타리나 수도원은 모진 풍랑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이고 정치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다. 제국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시나이반도는 지리적인 특성상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 아닌 외진 장소였으며 더욱이 7세기 이후 비교적 타 종교에 관대했었던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의 정치적인 외풍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성화상 논쟁을 피한 초기 이콘들은 모두 36개로 잘 보관 될 수 있었다. 이콘 갤러리는 작은 규모이지만 수도원에 있는 2000여점의 이콘들 중에서 엄선된 것들이다. 이 이콘들은 비잔틴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15세기 동안을 아우르는 더없이 귀중한 문화적 유산을 담보하고 있는 것으로 그중에서 유일하고 중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을 갤러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불타는 가시덤불 경당을 바라보고 왼쪽 2층에 작게 마련된 갤러리는 비록 입장료를 지불(수도자 무료) 하더라도 잠시 시간을 내어 둘러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갤러리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비잔틴시대의 이콘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번역 사본인 5세기경에 시리아어로 쓰인 필사본과 전례 용품들도 볼 수 있다.

 

이콘 갤러리  

 

전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Pantocrator)와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

 

 

천사들과 성인 성녀들의 이콘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색감으로 표현한 것으로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수도자들이 기도 하면서 그들의 깊은 영성적인 심연을 기록한 하느님의 말씀이다. 

 

Christ Pantocrator(0.85 x 0.45m). 6세기 이콘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그리스어로 만물을 지배하는 군주라는 의미의 이 판토크라토르(Pantocrator) 이콘은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대인 6세기 중엽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작되어 성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판토크라토르 이콘은 초세기 비잔틴 이콘의 양식에서 시간 속에 변하지 않는 영원성을 표현하기 위해 영원한 소년이나 착한 목자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이스라엘 셈족의 족장들이나 원로들처럼 긴 곱슬머리에 턱수염을 기른 근엄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의상이었던 키톤(Chiton)이라 부르는 붉은 자주색 상의를 입고, 겉에는 푸른색 히마티온(himation)을 두르고 있는데 붉은 색과 푸른색은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겪게 될 피의 수난과 천상적인 신성의 원리를 상징하며 이것은 그리스도 속에 체현된 신성과 인성의 결합 즉 삼위일체를 암시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형상이 나타나는 후광을 배경으로 오른손으로는 하늘과 땅의 결합을 상징하는 강복의 자세를 취하고 왼손에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한 복음서를 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두 손가락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나머지 세 손가락은 삼위일체를 상징한다. 눈은 크기와 모양이 같지 않고 입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비대칭적인 모습이다. 다소 짧은 수염은 안쪽으로 휘어져 있고 머리는 왼쪽 어깨 위로 쳐져 있다. 우주의 지배를 상징하는 이 판토크라토르 형상은 이콘 파괴 논쟁이 종료된 9세기 이후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내부의 정점이자 하늘과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성당 돔에 모자이크로 표상되거나 프레스코화로 그려진다.

 

6세기의 성 베드로 사도 이콘. 위쪽 중앙에는 예수님, 왼쪽은 사도 요한과 오른쪽은 성모님

 

12-13세기의 이콘. 십계명을 받는 모세

 

6세기의 청동 십자가.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는 탈출기 장면을 기술하고 있다.

 

시나이 수도원 대주교의 모관과 지팡이와 십자가

 

불타는 떨기나무와 신발을 벗는 모세. 카타리나 수도원 순례자 숙소 식당에 걸려 있는 성화

 

십계명을 받는 모세

 

천국의 계단   

 

전승에 의하면 이곳에 600년경에“천국의 계단”(Ladder of Paradise)을 쓴 수도원의 아빠스였던 ‘성 요한 클리마코’가 묻혔다고 한다. 천국의 계단은 수도생활로 불림을 받은 이들을 천국의 문까지 인도하는 계단인데, 수도생활의 성화를 위해 필요한 가르침으로 예수의 숨은 30년 생활에 맞추어 30개의 층계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30장은 정화·조명·일치를 다루는데 수덕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소 무욕에 있으며 수도생활의 최고 단계는 외적인 평화를 누리는데 있다고 한다.

 

묘지와 납골당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정원 안에는 성 트리폰(St. Tryphon)의 경당이 딸린 작은 묘지가 있고 납골당이 있다. 흙이 넉넉하지 않은 곳이기에 항구적인 묘지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은 수도원에 살았던 수도자들이 마지막으로 거쳐 가는 마지막 통로이기도 하다. 세상에 남겨진 육신은 마른 모래와 함께 묻힌다. 2-3년이 지나면 무덤을 발굴하여 머리와 정강이뼈, 갈비뼈, 척추뼈 등은 서로 분리한다. 그런 후 무덤 옆에 있는 납골당에 한데 모은다. 이곳에는 수도원이 만들어질 때부터 이렇게 모아진 수도자들의 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수북하게 쌓여진 수도자들의 뼈는 보는 이로 하여금 삶과 죽음, 세상적인 것들의 무상함을 묵상하게 한다. 뜨겁게 갈망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헛된 것들임을 말없이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이다. 수도자들은 언젠가는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제는 그의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다(집회 38,22).

 

납골당

 

지하 묘지


묘지는 지하에 있다. 수도사 한 명이 지켜 서 있는 크지 않은 방에는 수많은 유골들이 부위 별로 나누어 보관되어 있다. 이 유골들은 이곳에서 수도하다가 죽은 수도사들의 유골이라고 한다.

 

납골당

 

지하 공동묘지 관리 수도사

 

은수자 스테파노의 시신 

 

납골당 중앙에 있는 벽장에는 시나이 산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순례자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던 은수자 스테파노의 시신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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