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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신앙, 삼족오(고대 동북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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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모양 토기, 원삼국시대, 3세기, 해남 군곡리 조개더미, 국립중앙박물관

 

오리모양 토기, 원삼국시대, 1-2세기, 경주 사라리 무덤, 국립중앙박물관

 

오리모양 토기

 

민간신앙(조령신앙)

 

민간신앙이라는 어휘는 아직 학문상으로 명확하게 규정된 학술어가 아니다. 따라서그 개념은 막연하고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종교민족학 또는 종교민속학이 진전됨에 따라서 개념내용이나 영역, 대상에서 하나의 통설이 형성되어가고 있다. 즉, 자연종교적이면서 성립종교(成立宗敎:established religions)와 유합적(合的)이라는 것이다. 자연종교적이라 함은 특정한 창교자가 없고, 계시적(啓示的)이 아니며, 신앙의 체계화가 이룩되지 않았고, 조직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아득한 옛적부터 믿어 온 민족으로서의 계승적 신앙이라는 것이다. 이 신앙에는 만들어진 것도 있으나, 성립종교의 신앙을 받아들여서 유합한 것도 있다. 그 유합과정에서 재래의 민간 신앙이 파괴되어 해체되는 경우가 있다. 유럽 사회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전래에 의해서 그 신앙은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한국에서는 성립종교의 전도보급 또는 형성이 있었으나 민간신앙은 남아서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왔다. 이런 계승면에서 민간신앙은 그 민족의 독특한 신앙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민간신앙이 지지되는 범위는 한 민족 한 국가 내의 한 마을에 한정되어 작은 지역사회 안에서 생활하는 작은 규모의 생활공동체에 국한되고만다. 그 생활공동체에서도 불교 ·유교 ·도교 ·그리스도교 등과 같은 성립종교나 천도교 ·증산교 ·대종교 등의 여러 민족종교에 귀의하고 있는 층과 지역사회 공동체의 일상생활 영역 밖에 있는 층이 제외된다. 그러나 민간신앙층의 영역은 공동체의 일상생활층에서 생활하는 소위 서민층에 그 기층(基層)을 두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 민간신앙은 그것이 지역적인 범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지방적인 색채가짙다. 이와 같이 성립종교와는 달리 개인신앙보다 한층 더 공동체적이고 서민적인 민간신앙은 이성판단이 아닌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경험의 반복에 따른 판단에 그 신앙구조의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숭배로 구성되어 있다. ① 자연숭배, ② 정령숭배, ③ 주력(呪力)숭배, ④ 신당(神堂)숭배, ⑤ 외래종교와의접촉에서 생기는 여러 숭배 등이다. 자연숭배는 인간의 생득적(生得的)인 신앙심이 민간사회에 가라앉아서 마을생활의 밑바닥에 퇴적되어 있다. 그 중에서 뚜렷한 것은 산 ·바위와 나무 ·물이다. 이런 것들의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자연숭배(원시신앙)는 사회진전에 따라 일어난 생활의 분화에 적응하면서 종교영역에 정착하여 왔으며, 또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산이 수렵사회에서는 수렵숭배의 대상이 되거나, 물이 어로사회에서 어획물 취득을 보장하고 해상운항의 안전을 다스리는 수호의 대상이 되는 따위이다. 이 자연숭배에서 발생한 신앙 속에 이미 정령에 대한 신앙이 잠복하여 있다. 즉, 산에 산령, 물에 수령, 나무에 수목령, 바위에 암석령, 사람에게 인간령이 있다고 믿으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밑바닥에 그것을 성립시키는 제각기의 정령(anima)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정령숭배에서 농경민은 씨앗에 농업생산을 충실하게 하는 산령(産靈)의 실재를 인정하며, 그 산령은 생식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또 한편, 정령숭배에서 조령(祖靈)숭배가 파생되어 인간 속에영혼의 실재가 신앙된다. 그 영혼은 육체가 사멸하여도 남아 있으며, 후손의 탄생은 영혼의 이입(移入)이라고 믿음으로써 조령신앙이 성립되었다. 한편 공동체에서 가족의 주체성이 확립됨에 따라서 일가를 창시한 선조를 특별히 숭배하는 선조령(혹은 선조신)이 탄생했다. 동시에 동족단(同族團)이 결성됨에 따라서 시족신(始族神)이 만들어지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민족이나 국가의 시조신(始祖神)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정령숭배는 민간사회층에서 많은 신당의 건립을 동반하였고 감터[聖地]를 마련하게 하였다. 신당의 건립과 감터의 정위(定位)는 원시신앙의 윤리-종교화(倫理-宗敎化)의 추세에 따라서 마침내 민간신앙의 테두리 바깥에 두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슬람의 메카(Mecca)와 거기에 건립된 모스크(寺院), 가톨릭의 바티칸에 세워진 베드로 성당,고대 잉카신전이나 마야신전 등은 모두 민간신앙의 테두리 바깥에 밀려난 것이나, 그기층에는 민간신앙이 깔려 있다. 끝으로 민간신앙은 그 자체의 윤리종교화와 외래종교(外來宗敎)의 접촉과정에서 그것들의 교리(敎理)나 교의(敎義)를 흡수하여 민간신앙화한다. 반대로 보면 그런 종교들이 부분적으로 민간신앙화하였다고도 간주된다. 중국의 도교(道敎)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신신앙(庚申信仰)이 민간에 정착하면 그 본래의 뜻과는 달리, 재앙을 쫓는 신앙이나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주언신앙(呪言信仰)으로 옮겨진다. 기도가 주원(呪願)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성립종교가 민간신앙화한 영역도 매우 넓다. 민간신앙의 구조는 앞에서 보았듯이 여러 요소를 포갠 중첩적인 것이다. 즉, 맨 밑바닥에 생득적으로 발생한 자연신앙이 있고, 거기에서 정령숭배가 일어나고, 이 숭배에서 신령이나 조령의 신앙이 진전되고, 이와 함께 신당 ·감터란 신앙이 동반했다. 이 2차적인 민간신앙이 다시 성립종교와의 접촉에서 세속적인 혼합신앙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민간신앙은 민간사회층에서 중첩적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민간신앙을 한국인의 종교생활체제란 측면에서 보면 성립종교의 밑에 정위되면서도 그 종교들의 기층부(基層部)에 자리하고 있다. 다시 이 구조를 분석하여 보면, 그 체제의 핵심권에 본래의 민간신앙이 자리하고, 그 외곽권에 혼합된 민간신앙이 위치하며, 그 주변권에 성립종교들이 병립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민간신앙은 세 개의 권에 둘러싸여 있다고 할 것이다. 이 겹침 때문에 민간신앙은 종교생활 전체의 표면에 잘 나타나지 않고 그 밑에 잠복하고 만다. 그러나 한편 한국의 종교에서는 표층권(表層圈)에 있는 성립종교의 신앙 속에 민간신앙이 잠복하고 있기도 한다. 민간신앙의 본래의 특색은 주술의례(呪術儀禮)에 있다. 주술은 한국에서의 푸닥거리에 해당된다. 이를 보면 성립종교의 순수한 교리 ·교의의 주창과는 달리 가정(假定)된 초자연적인 힘 내지는 영적 존재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통제하고 이용하려는 종교적인 행동이다. 이 행동에 의해서 바라는 바를 실현하고자 하며,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초자연적으로 예지(豫知)하는 전조(前兆)신앙이 동반된다. 이것이 무꾸리이다. 그러므로 그 특색은 한마디로 푸닥거리와 무꾸리의 행동에 있으며, 사고적(思考的)으로는 흉(凶)에 대한 공포나 불안을 없애고, 일상적 상태로 회복하려는 바람에 있다. 이 점에서 그 신앙의 또 하나의 특색은 타산적이고 이익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솟대

 

한국 전통문화에 남은 숭조(崇鳥) 또는 조령(鳥靈) 신앙의 흔적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솟대다. 긴 장대 위에 새가 앉은 모양의 솟대는 아득한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문화유산이다. 삼한(三韓)에서 신을 모시던 성스러운 장소인 ‘소도’(蘇塗)에 세운 기둥인 ‘솟을나무’(立木)를 ‘솟대’라고 했고, 그것이 그대로 신라에 이어졌다고 한다. ‘소도’ 자체가 ‘솟대’로 음운변화를 겪었을 가능성도 있다. 솟대의 기원은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한반도뿐만 아니라 몽골 시베리아 만주 일본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분포한다. 북아시아 샤머니즘(무속신앙) 문화와 관계가 있고, 특히 ‘조이(鳥夷)= 부이(鳧姨)’로도 표기된 동이족과 직접적 관계를 가진 것으로 추정하는 데 별 이견이 없다. 솟대의 장대는 대개 나무지만 돌기둥으로 된 것, 봉수대처럼 돌을 쌓아 올리거나 짚단을 새끼줄로 감아서 만든 것도 있다. 나무 장대는 곧은 장대보다 비틀린 나무를 많이 사용하고, 아예 새끼줄을 비스듬히 감은 것도 있다. 천신 또는 태양신 숭배에서 비롯한 새 숭배가 농경문화와 접목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짚이나 새끼줄이 모두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연기물(緣起物)이다. 또 비스듬히 감긴 새끼줄이나 비틀려 올라간 듯한 장대는 용틀임을 연상시킨다. 비와 바람을 부르는 용의 조화를 상정해 가뭄과 홍수, 태풍을 피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알맞은 비와 조용한 바람, 즉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비는 마음은 솟대 꼭대기에 얹힌 새 조각이 대부분 오리나 기러기를 형상한 듯한 데서도 읽을 수 있다. 오리와 물, 기러기와 계절풍의 관계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솟대와 농경 제의의 이런 접목은 시기적으로 나중에 이뤄졌다. 솟대의 원래적 기능은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접점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신의 뜻을 포착하고, 거꾸로 인간의 희구를 신에게 전하는 일종의 안테나다. 다만 이 안테나는 완벽한 무선 안테나가 아니어서 신탁(神託)은 신의 사자인 새가 안테나에 앉을 때 비로소 포착된다. 또한 인간의 기도도 솟대 위에 앉은 새가 우선 받은 후 하늘 높이 신에게 날아 올라가 전한다. 솟대 위의 새 조각은 신과 인간의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신령한 존재이다 

 

삼족오

 

 

 

 

 

 

 

 

해뚫음무늬 금동장식품

 

삼족오유물로 고구려의 진파리 7호고분에서 나온 ‘해뚫음무늬 금동장식품(日光透彫金銅裝飾品)’을 들 수 있습니다왕의 장식품으로 중앙의 구슬을 박은 두겹의 태양 동그라미 속에 황금빛 ‘세발까마귀’가 불타오르듯 절묘하게 자리 잡고 있다. 북한에서 국보로 보존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삼족오

 

고구려 벽화

 

 

고구려 벽화에 삼족오가 태양속에 그려져 있고 태양을 상징하는 금오(金烏)와 달의 상징 금와(金蛙)는 제철기술을 가진 집단으로 금오(金烏)는 고온으로 제조하는 제철을 금와(金蛙)는 저온의 제련의 특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고구려 벽화 각저층

 

고구려 삼족오

 

각저총, 쌍영총, 강서대표, 덕흥리 고분 등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는 삼족오의 모습이 뚜렷이 남아 있다. 진파리 1호 고분에서 나온 금관 장식의 한 복판에도 삼족오가 뚜렷하다. 북방 계통인 고구려의 삼족오 신앙은 북아시아계 공통의 숭조 신앙이 세분?卉ㅁ냠?과정을 거친 결과일 것으로 보인다. 삼족오는 BC 2세기 무렵에 축조된 허난(湖南)성 창시(長沙) 마왕퇴 1호 고분의 비단 그림에 일찌감치 등장한다. 이 그림은 중국 신화에 끊임없이 등장한 삼족오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담았다. ‘태양 속에 세발 달린 까마귀가 있다’는 기록이 ‘초사’(楚辭)나 ‘산해경’(山海經)에도 나와 있다.

 

일본의 조령신앙

 

일본은 물과 숲이 풍부하여 벼농사를 비롯한 농업과 어업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이에 따라 태양이나 비, 바람 등 자연의 에너지가 가장 중요시되어 왔다. 고대 씨족(氏族)인 선조나 마을을 개척자를 신(神)으로 받드는 습관도 있었다. 자연숭배, 조령신앙(祖靈信仰) 등의 신앙형태는 점차 특징 있는 의례와 신앙형태를 만들어 갔으며 이러한 신들의 활동에 대한 감사, 기원, 외경(畏敬)이라고 하는 고래의 진기신앙(神祇信仰)은 일본민족 고유의 신앙인 신도(神道)라는 종교의 중핵으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습속(習俗), 인생의례, 연중행사(年中行事) 등은 하나의 (民俗神道)로서 발전해 갔다.

 

 

일본 까마귀 신

 

일본 신당

 

오사까 카라쓰노미아 신사

 

일본 삼족오

 

신화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아닌 현실의 까마귀도 일본에서는 제법 대접을 받고 산다. 일본에는 까마귀가 참 많다.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 어느 곳에서나 쉽게 까마귀를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턴지 까마귀를 흉조로 여겨 왔지만 일본에서는 불길한 새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잠재의식 속의 조령(鳥靈)신앙을 지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에서 자연신앙(애니미즘)이나 무속신앙(샤머니즘)이 불교와 유교, 천주교와 개신교에 의해 크게 밀려난 것과 달리 자연ㆍ 무속 신앙을 이은 신도의 강한 전통이 유지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삼족오

 

중국, 태양에 사는 까마귀

 

 

1972년 중국 호북성 장사시 마왕퇴 고분에서 출토된 전한시대의 비단[帛]에 그린 그림. 상단부의 용은 인면신용 여왜라고도 한다. 달에는 섬여 곧 두꺼비가 있고 오른 쪽 태양에는 준오 곧 까마귀의 그림이 보이는데, 준오의 다리가 둘이다. 까치 그림의 균형상 다리 하나가 훼손되었거나 지워진 느낌이다. -중국 호남성 박물관 소장 그림

 

중국 춘추말기 삼족오

 

 

 

 

중국 삼족오 조형물

 

삼족오 ( 태양숭배사상과 토테미즘(태양에 대한), 샤머니즘의 산물)


다리가 세개인 까마귀를 지칭하며 금오(金烏) ·준오(烏)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검은색과 3이라는 숫자는 양(陽)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해져 왔다. 또한 날아다니는 조류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 세가지를 만족시키는 것이 바로 삼족오로, 극양(極陽) 즉 해를 나타낸다. 중국고대신화에 천제의 10명의 아들이 태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자 세상이 가물어 못살게 되자 활의 명수인 "예"라는 사람이 산에 올라가 활로 태양9개를 쏘아 맞히고 떨어뜨렸는데 그 안에 있던 새가 세발달린 까마귀였다고 한다. 삼족오는 고대 동북아시아의 태양숭배사상과 토테미즘(태양에 대한), 그리고 샤머니즘의 산물이다. 다리가 세개 달린 까마귀의 모습으로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태양신의 사자이자 신수라 생각했다. 중국의 고서인 《초사(楚辭)》와《산해경(山海經)》에는 태양속에 까마귀가 살며 천계와 인계를 건너다닌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단군세기” 나 “단기고사” 에도 삼족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갑인 7년(BC 1987), 세 발 달린 까마귀가 궁전의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의 넓이가 석 자나 되었다. -甲寅七年 三足烏飛入苑中 其翼廣三尺』 고구려의 벽화에 종종 등장한다. 삼족오는 이미 기원전 4000년경의 앙샤오(仰韶)문화 유적지 토기에서부터 대량으로 발견되고 있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삼족오는 옛 고구려 지역을 비롯한 산동 지방과 요녕 지방 일대 고분벽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이로 추측건데 세발까마귀는 태양의 신수로 봉황, 주작, 가루다, 가릉빈가, 불새, 피닉스로 나열되는 범세계적인 태양의 새와 동일하게 보고 있다. 불교의 사상을 살펴봐도 가루다의 먹이는 용이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가루다는 봉황의 인도식 이름이다. 고대 동북아시아의 삼족오는 크게 세 가지 경로의 변형이 일어난다. 첫째, 실제의 새 모양을 간직한 채로 변형되는 것으로 각종 고분의 삼족오와 우리 나라 민속에서 보이는 삼두매(一足三頭鷹), {조선왕조실록}과 {악학궤범}에 보이는 삼두삼족주작(三頭三足朱雀) 등이 그것이다. 둘째, 삼족오가 지닌 '3수 분화의 세계관'과 '삼신사상'이 구체적인 새 모양을 넘어서서 삼태극(三太極)으로 추상화되는 변형이 일어난다. 삼족오에서 삼태극으로 추상화되는 중간단계의 모습이 보물 635호인 '신라 미추왕릉 지구 계림로 14호분 출포 장식보검'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런 추상화는 이미 주(周)나라 시대에 확립되었다. 셋째, 전국시대이후 특히 한나라 시기에는 음양오행론이 확립되면서 삼족오는 남방(南方) 화(火)를 상징하는 주작(朱雀)으로 변형된다. 중국에서 발견되는 주작들은 모두 다리가 2개로 변화하여 '3수분화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음양오행론 안에 수용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 {조선왕조실록}이나 {악학궤범}에 보이는 주작은 분명하게 '머리가 셋이고 다리도 셋'인 삼두삼족(三頭三足)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주작이 고대 삼족오의 변형임을 웅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삼족오만은 고구려 고유의 상징물"이라는 표현이나, "선조들의 것을 일본에게 빼앗긴 꼴"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 우리의 문화전통에 대해서 무지해서 오랜 역사와 사상적 배경을 지닌 삼족오를 활용하지 못한데 있다. 일본축구협회가 1930년대부터 삼족오를 엠블렘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전통을 나름대로 현대화한 본받을 만한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삼족오는 동북아시아 공동의 유산이고, 일본은 그것을 현대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우리는 그렇지 못할 뿐이다. 무당(무속인)들의 집 앞에 솟아있는 솟대에도 종종 삼족오 조각이 쓰여있다. 고대로 갈수록 솟대 위의 조각에는 삼족오를 조각하는 일이 많았는데 현대로 올수록 간결화되어 그저 새를 닮은 형상물이나 새의 조각을 조각하는 일이 많아졌다. 일본에는 아직 삼족오를 모시는 사당이 몇군데 남아있고 고서에 까마귀를 신성한 동물로 숭배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삼족오= 태양조(太陽鳥)= 양조(陽鳥)= 현조(玄鳥)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활용하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중국 요녕성 심양시는 동북 3성의 중심지이자, 고대로부터 북방문화의 중심지였다. 요녕대학 안에는 5m나 되는 태양조(太陽鳥) 조각이 상징물로 세워져있고, 심양시의 상징물도 태양조다. 시청광장에는 30m는 족히 되는 태양조가 한 가운데 세워져있다. 심양 북역(北驛) 광장에도 50m도 넘어 보이는 현대적으로 디자인된 태양조가 비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내 곳곳에 현대적으로 디자인된 삼족오 벽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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