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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 생테티엔 대성당 (Saint-Étienne de Bourges)

성지순례/서유럽(프랑스)

by baesungsoo 2014. 1. 2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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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 생테티엔 대성당 

 

1992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이다. 1195년 건립을 시작하여 1324년 5월 13일에 완공되었으며, 최초의 그리스도교 순교자인 성 스데반(Saint Stephen, ? ~ 35년)에게 헌정되었다. 폭15m, 길이118m의 본당 회중석을 갖춘 오랑식(五廊式) 성당으로 독특한 고딕양식 건물이다. 부르주 대성당(Bourges Catheral)이 위치하고 있는 부르주(Bourges)지역은 고대 로마 도시인 아바리쿰(Avaricum)이 있던 곳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 곳에서는 3세기에 이미 갈리아 최초의 그리스도교 숭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1세기 고즐랭 대주교(Archbishop Gozlin)에 의해 그 자리에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의 성당이 들어선다. 이 때 지어진 성당이 협소하다고 판단되어 12세기부터 대대적인 증축에 들어가게 되는데 새로운 대성당은 고딕(Gothic)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 새로운 성당이 부르주 대성당이다. 1214년 내진(內陣,choir:제단과 성가대석이 있는 부분)이 완성되었으며 1230~1250년 즈음해서 예배자를 위한 장소인 신랑(身廊, nave:본당 회중석) 등의 주요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작업은 1324년까지 천천히 이루어졌다. 완성된 대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파손, 공사 문제 등으로 크고 작은 보수가 19세기까지 계속 되면서 건물 일부에 고딕양식 이외에 다른 양식들이 섞여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 기울어져 가는 북쪽 탑은 1506년에 무너져 내렸는데 1542년에 보수된 새 탑은 르네상스(Renaissance)양식을 띠었다. 19세기 초에 있었던 대규모 보수 공사도 탑과 장식 조각의 수와 모양에 변화를 가져왔다.

 

부르주 생테티엔 대성당           (출처- http://blog.naver.com/cdw5358/90174114344)

 

성당 후진     (출처- http://blog.naver.com/cdw5358/90174114344)

 

성당내부 조각상        (출처- http://blog.naver.com/cdw5358/90174114344)

 

성자들의 묘가 안치되어있는 지하예배실.   (출처- http://blog.naver.com/cdw5358/90174114344)

 

지하 예배실도 빛이 잘들어오는 구조로 특이하게 지어졌다. 그곳에는 현재 14세기 프랑스의 문화 예술 후원자였던 ‘장 드 베리 공작(Jean de Berry, 1340-1416)의 묘’를 비롯한 몇 기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지하 장 드 베리 공작의 묘         (출처- http://blog.naver.com/cdw5358/90174114344)

 

생테티엔 대성당  야경      (출처- http://cafe.daum.net/drivingtour

 

 

생테티엔 대성당  야경 

 

생테티엔 대성당

 

 이 성당은 12~13세기에 건립된 고딕 예술의 최대 걸작품의 하나이며 건축의 비례 균형미와 디자인의 단일성으로 격찬을 받았다.  건축미와는 별도로 팀파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등이 특히 뛰어나 중세 프랑스의 그리스도교 교세를 증명해 주는 유적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파사드의 문에 새겨진 조각의 주제는 가운데 문이 ‘최후의 심판’, 그 왼쪽 문이 ‘성모 승천’, 오른쪽 문이 ‘돌팔매질을 당하는 성스테파누스’이다.

 

부르주 생테티엔 대성당                (출처- http://blog.naver.com/cdw5358/90174114344)

 

생테티엔 대성당

 

생테티엔 대성당

 

신랑은 양쪽으로 측랑을 각각 2개씩 거느리고 있고, 그 길이는 118m에 이른다. 벽은 고딕 특유의 구성으로서 여러 겹의 원주, 커다란 아케이드, 트리포리움, 높은 창 등으로 이루어졌다

 

생테티엔 대성당

 

앰뷸러토리에 있는 13세기의 스테인드 글라스의 주제는 ‘최후의 심판’이다. 구원받은 자는 천사에 이끌려 천국으로 들어가고 벌을 받은 자는 악마에 의해 지옥으로 쫓겨 간다는 것을 가르친다

 

 

부르주의 생테티엔 대성당

 

부르주는 갈리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신도단이 생긴 곳이다. 이 곳의 대성당은 고대 로마의 도시 아바리쿰의 성벽 위에 세워졌다. 비슷한 시기에 지은 샤르트르 대성당이 사람들한테 인기가 높은 것과는 달리, 부르주의 생테티엔 대성당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불운이 이어졌다. 어딘가가 끊임없이 파손되어 보수와 재건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부르주의 대성당은 여러 가지 양식의 박람회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이 거대한 대성당 안을 둘러보면 마음 속에 깊은 경외감이 들며, 신성한 것을 앞에 두고 인간 존재의 허무함이 실감난다.”  부르주의 생테티엔 대성당을 본 스탕달은 이런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잠시 이 곳에서 그리스도가 된 기분이었으며, 불가사의한 체험을 했다고 말했다. 동시대 작가인 발자크도 부르주의 대성당이 파리 전체보다도 더욱 값어치가 있다며, 더욱 극단적인 찬사를 늘어놓았다. 1195년에 짓기 시작한 부르주의 대성당은 언제나 샤르트르 대성당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스탕달이나 발자크처럼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또한 이 건축물은 르망 대성당과 쿠탕스 대성당에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고딕 건축 - 고대 로마의 도시 아바리쿰에는 3세기에 이미 갈리아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도단이 있었다. 그 아바리쿰의 성벽 위에 대성당의 내진(內陣) 부분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11세기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을 전면적으로 개축한 대표적인 고딕 건축이다. 그러나 이 건축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따랐다. 남쪽 탑은 14세기 초에 파손되기 시작해 당시 부르주의 대주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기초 공사가 날림이었던지 금이 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탑이 기울어져 신랑의 궁륭까지도 위태롭게 되었다. 1313년에 수리비를 염출하려고 기부금을 받아서 파사드 남쪽에 거대한 버팀벽을 만들어 붕괴를 막았다. 이 때 창을 새로 만들 필요가 생겼다. 공사 담당자는 창의 트레이서리 제작용으로 지하 예배실 바닥에 컴퍼스로 재서 실물 크기의 거푸집을 새겼다. 이것으로 각 부분의 치수를 맞춰서 트레이서리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 때 새긴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다른 고딕 성당에서도 똑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그처럼 세밀한 선을 그으려면 평소에 쓰던 양피지 등은 습기로 인해 선이 번지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었을 것이다. 1324년 5월 13일에 준공식을 치름으로써 익랑(翼廊)이 없는 장중한 오랑식 대성당이 완공되었다.  남쪽 탑과 달리 북쪽 탑은 대책이 늦어, 1506년에 무너졌다. 그 바람에 신랑의 궁륭 일부와 파사드 문도 무너져 내렸다. 그것을 복구하고 재건하는데 30년이 걸렸는데, 이 때는 르네상스 건축 양식과 장식을 도입했다. 그러나 1562년에는 위그노(칼뱅파 프로테스탄트교도)에 의해 내진과 파사드의 돋을새김이 파괴되었다. 19세기 초에는 대규모 보수 공사가 단행되었다. 이 때 지붕 주위를 보강하면서 그 보강 부분을 장식하느라 작은 탑을 줄줄이 세워 놓았다. 버팀벽도 강화했고, 그 위에도 역시 작은 탑을 덧붙여 놓았다. 이것은 장식이 너무 지나쳐 원래의 명료하고 산뜻한 겉모습을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 건물을 밖에서 바라본다면 후대에 추가한 여러 가지 수식을 없앤 모습을 상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원래 중세의 건물은 딱딱한 선의 버팀벽과 플라잉 버트레스가 익랑 돌출부에서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모양이 인상적이었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 지하 예배실, 파사드의 조각상은 오늘날 부르주 대성당의 귀중한 재산이다.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쌍안경을 휴대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치밀하게 만든 13세기 스테인드 글라스를 구석구석 감상할 수 있다. 지하 예배실로 내려가는 입구는 북쪽 문 곁에 있다. 이 지하 예배실은 지면이 움푹 꺼진 곳에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대성당과는 달리 12개의 창에서 빛이 충분히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 천장은 대성당이 서 있는 지면의 높낮이 차이를 메우는 역할을 한다. 지하 예배실에는 몇 기의 묘가 있는데, 특히 두드러진 것은 장 드 베리 공작의 묘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학문과 예술의 보호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파사드에는 5개의 문이 있다. 북쪽 끝 문의 아치 밑에는 성(聖)기욤의 조각상이 있다. 그 오른쪽 문의 주인공은 성모 마리아이다. 이 2개의 문은 북쪽 탑이 쓰러졌을 때 큰 피해를 입었다. 가운데 문의 팀파눔에는 ‘최후의 심판’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놓았다. 가운데 문 오른쪽은 성스테파누스(생테티엔)의 문으로, 그의 생애를 나타내는 돌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다. 부르주의 대성당은 성스테파누스를 모신 성당이라 해서 생테티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가장 오른쪽은 부르주의 주교였던 성위르생의 문이다. 문과 문을 구분짓는 기둥의 장식 조각 가운데에는 19세기에 보수할 때 제작된 것도 있는데, 대부분은 19세기 양식으로 이 성당에 어울리는 작품은 아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부르주의 대성당이 특정한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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