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투르판 고창고성, 교하고성, 화염산

타종교신전/중국,한국,투르판 등

by baesungsoo 2006. 1. 4. 15:47

본문

고창고성

 

투르판 시가지의 동쪽 약 40Km 지점에 있는 성지(城地) 유적이다. 이곳은 신강성 내에서 가장 큰 고성으로서, 후한이 멸망한 후 번성했던 투르판의 중심지였다. 고창국(高昌國)의 수도였다. 고창 고성은 기원후 91년 후한 때 구축됐다. 투루판 동쪽으로 40㎞ 떨어진 화염산 기슭에 위치한 가오창 고성은 크기만 컸지(총면적 200m²) 지금은 별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기원후 327년, 5호16국 시절 설립된 가오창은 442년부터 640년까지 베이리앙 정권이 이곳에 수립되어 왕국을 이룩했으나 640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

 

고창고성

 

고창고성

 

대불사터. 불공을 드렸던 사각의 방형탑과 강의실인 복발탑이 있다

 

특히 이곳에는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불전을 구하는 도중, 이곳에서 국왕 국문태(麴文泰)에게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2개월쯤 머물면서 1개월에 걸쳐 설법을 행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고창국사 안을 들어가면 이곳이 강당임을 알려주는 두 가지 정도의 근거가 남아있는데, 하나는 벽의 네 귀퉁이에 두른 울림판이다. 공명현상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머릿속으로 그곳에 서서 울림판 덕에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설법을 하는 현장법사의 모습을 그려보니, 그런대로 이해가 될 법도 했다. 다음에 벽면에 일렬로 나란히 뚫려있는 촛대 놓는 구멍이 있다. 당시에 오직 귀족과 왕족들만이 현장법사의 강론을  들을 수 있었고, 민중들은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민중들은 일렬로 늘어선 전달꾼들에 의해 설법 내용을 전달해서 듣는 방식으로 강론을 들을 수 있었다, 강당 바로 옆으로 사원터가 있다 

 

지금은 상당히 복원이 이루어진 곳도 있다. 과거에 제사같은 의식이 이루어졌던 곳이 아닐까 한다. 

 

고창국사, 고창고성 절터, 현장법사가 630년 2월 수행하던곳이다

(출처- http://www.e-worldphoto.com/china) 

 

정상부가 떨어져 나간 복발탑. 현장이 설법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복발탑은 천정에 원형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현장법사가 400명을 모아두고 설법하던 강의실로 유명하다. 이 좁은 공간에 어찌 400명이 들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강의실은 흙을 말려 만든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천정은 원형으로, 바닥은 사각형의 모양으로 만들어 소리의 울림을 조절했다고 한다. 627년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현장법사는 이 곳을 지날 때 국왕의 부탁으로 두 달간 머물면서 설법을 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렀을 때 고창국은 이미 멸망하고 없었다.

출처-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97082

        오마이뉴스 주수영 기자, 2007.3  투르판 여행기

 

고창국사 복발탑 입구

 

복발탑 내부 바닥

 

복발탑의 바닥은 사각으로 만들어 소리의 울림을 조절했다고 한다.

 

복발탑의 둥근 천정으로 보이는 투루판의 하늘 

 

고창국사 방형탑

 

불공을 드렸던 사각의 방형탑

 

사원의 정면에 있는 사각의 방형탑은 작은 감실이 뚫려 있는데 불상들은 대부분 없어지고, 벽화는 흔적만이 있었다. 탑 주변을 돌면서 불공을 드렸을 것이다.

 

방형탑

 

방형탑

 

교하 고성(交河故城)

 

투루판시 북서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는 교하고성은 기원전 2-14세기 사이에 존재하던 교하라는 나라의 수도였던 곳이다. 대지를 파서 축조한 독특한 성으로 버들잎형 낭떠러지 섬에 세워져 있으며 두 갈래의 작은 강이 교차하면서 감돌고 있다. 두 하천사이로 치솟은 30m 높이의 벼랑 위에 가로 300m, 길이 1650m의 고성터가 있다. 성 내에는 남북을 관통한 큰 길이 있으며 큰 길 양측의 밀집된 건축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도로변의 문을 봉해 버렸다. 이 건축물들의 특징은 송대 이전 성시(城市) 중의 곡방제도와 똑같다. 큰 길 북쪽에는 불교사원이 하나 있고, 원 내에는 불탑이 있다.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5세기 중엽까지 교하고성은 차사전(車師前) 왕정의 소재지였다. 7세기 중엽 당 왕조가 교하성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였으나 13세기에 폐기해 버렸다


 

교하고성

 

교하고성 불교사원 대불사 유적

 

대불사는 남북으로 80m, 동서로 40m, 높이 5m의 사각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북쪽에는 3층으로 된 높이 7m의 탑이 세워져 있다. 흙벽돌을 쌓아 만든 사각의 탑은 전형적인 인도식이다. 감실에는 아직까지 불상의 흔적이 있었다. 그 주변을 빙빙 돌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교하고성의 중심에 있는 대불사. 대불사의 사각탑은 사각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불사 중심에 있는 사각의 방형탑. 감실의 형태가 전형적인 인도식이다

 

대불사 감실에는 아직까지 불상의 흔적이 남아있다. 

 

교하고성 대불사 불상 흔적

 

화염산

 

투르판 분지 중부에 걸쳐 있는 동서 100Km, 남북 10Km, 평균 해발 500m의 산지로, 가장 높은 곳은 勝金口付根으로 851m에 달한다. 지반의 습곡운동에 의해 습곡이 진 붉은 산은 여름철이 되면 지표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때문에 타오르는 것처럼 보여 화염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특히 이 화염산은 손오공의 활약으로 유명한 [서유기]에도 등장한다. 현장법사(삼장법사)와 그 일행은 활활 타오르는 화염산을 지나기 위해 그 불을 끌 수 있는 파초선(芭蕉扇)이란 부채가 필요했다. 그 때문에 파초선의 주인인 철옹(鐵翁)공주와 싸운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화염산은 여름 최고기온이 48℃나 되고 지표면 온도는 70℃를 넘어가기 때문에 계란을 모래에 묻어놓아도 삶아질만큼 중국에서는 제일 무더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화염산 입구

 

화염산 입구 벽화

 

고창고성에서 바라본 화염산 

 

화염산

 

화염산

 

산 표면에는 풍화침식 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 세로로 쭈글쭈글, 크고 작은 무늬가 있다. 태양열에 의해 달구어진 지표면의 아지랑이라도 어른거리면 마치 산 전체가 불에 싸여 이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화염산이라 이름 붙여졌다. 열기에 이글거릴 때 화염산의 온도는 평균 60℃를 넘기 때문에 아직 아무도 이 산을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약 40년 전 이곳 투루판의 기온이 48.5℃에 달해 중국에서 가장 높은 기온으로 기록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화염산 지면의 온도는 무려 82.3℃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게 화염산의 온도가 높은 것은 산의 모양이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마치 태양열을 모으기 위한 열판처럼 태양을 향해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화염산은 최고봉의 높이가 850m에 불과하지만 해수면보다 낮은 투루판 분지에서는 대단히 높게 보인다.

(글 출처- 오마이뉴스 조수영 기자)

 

화염산, 손오공이 마왕과 싸우는 장면

 

화염산, 손오공 문양

 

천불동 입구에 있는 손오공상

 

화염산은 소설 <서유기>에도 등장하는데 불타는 화염산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삼장법사 일행은 그 불을 끌 수 있는 파초선을 얻기 위해 철선 공주와 한판승부를 벌인다. 결국 파초선을 빌려 49번의 부채질을 함으로서 불씨를 끄고 비가 내리게 해 무사히 화염산을 건넌다. 소설의 주인공이 된 삼장법사는 실제로 7세기경 이곳을 지나 인도로 갔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