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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신전 (이집트 아비도스)

타종교신전/이집트신전

by baesungsoo 2006. 2. 13.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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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도스의 람세스 2세신전

 

신전 부조

 

신전 부조, 지혜의 신 토트

 

람세스2세와 호루스신

 

람세스2세, 이집트 남부

 

람세스2세, 이집트 남부

 

람세스 2세

 

람세스 2세 미이라

 

람세스2세, 대영박물관

 

람세스2세, 카이로박물관

 

람세스2세, 룩소 카르낙신전

 

 

람세스 2세


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집트왕으로써 정복자이며 모세가 유태인들을 이끌고 홍해를 가르고 갈때 괴롭혔던 인물이다. 라메세스(Ramesses) 2세라고도 한다. 아버지 세티 1세 이후의 팔레스타인 정복을 계속하였으며, 치세 5년경에는 카데시에서 히타이트왕 무와타리시와 크게 싸웠으나 결전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후 16년이라는 긴 세월을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으로 시달리다가 BC 1258년 두 나라 사이에 화약이 성립되어 이집트는 시리아를 포기하고 말았다.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9~1213(1212) 신왕국 19왕조 3번째 왕이다. 람세스 2세는 자기 아버지 곁에서 부관과 지명후계자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왕이 되기 위한 고도의 훈련을 쌓게 했으며, 그가 왕의 특권 과 명예를 누리도록 했다. 람세스 2세는 청년기가 시작되자 아버지가 하렘에서 간택해준 두 명의 왕후를 받아 들였다. 그들이 바로 이시노프레와 왕의 사랑을 받았던 우아한 네파르타리로서, 그녀들이 낳은 자녀들은 정통 후계자가 되었다. 테베의 귀족 출신으로 보이는 "위대한 왕비. 두 땅의 여주인" 네파르타리- 메렌무트는 람세스 2세 옆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람세스 2세는 우아한 네파르타리의 모습을 묘사하게 하는데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의 섬세한 모습은 그가 세운 온갖 기념물에 새겨져 있다. 네파르타리는 50대에 죽었는데, 람세스 2세는 그녀에게 왕비의 무덤 중에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주었다. 그는 히타이트족의 공주 두 명과도 정략적인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는 네 명의 딸들과도 결혼했다. 그 중 하나는 이시노프레의 딸로서, 벤 타나트라는 아시아풍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많은 자녀(대장에 기재된 50명이하의 아들과 50 정도의 딸)를 작위를 받은 부유한 관리로 임명했다. 많은수의 왕자는 람세스 2세의 추정 상속자가 되었으나 , 그들은 대개가 람세스 2세가 세상을 뜨기 전에 먼저 죽었다. 열세 번째 아들 메렌프타가 람세스 2세가 죽고 왕위를 계승했고, 람세스 2세의 아 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아들은 "왕자 고고학자" 라고 불리는 이시노프레가 낳은 케 무아세이다. 케무아세는 멤피스에 거주하면서 프타 신의 대사제로서 람세스 2세의 특별한 경 애와 보살핌을 받았다. 제20왕조의 왕들은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왕은 대표적인 오리엔트적 전제군주로, 자신의 조상(彫像)을 각지에 남기어 자신을 과시하였다. 적어도 아들 52명을 포함 100명이 넘는 자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5호고분은 이 왕의 가족묘로 추정되고 있다

제19왕조의 제3대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가 통치하던 시대는 이집트의 최절정기로 일명 ‘제국 시대’라고 불린다.람세스 2세 시대의 이집트 및 오리엔트 지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갖고 있던 이집트와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히타이트가 양분하고 있었다. 1906년에 베르린 대학과 콘스탄티노플의 오토만 박물관 공동 발굴팀은 터키의 보가즈코이(Bogazk?y)에서 히타이트의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발굴에서 바빌로니아 설형문자로 적힌 판을 발굴되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빈클러 판(tablet Winckler)이다. 이 판은 기원전 1270년,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핫투시리 3세(Hattushili Ⅲ)가 맺은 평화협정이 기록되어 있다. 같은 협정이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도 새겨져 있다. 육로로 2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두 장소에서 3천 년 이상이나 경과된 동일한 문서가 발견된 것은 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일이다. 이 협정이 맺어지게 된 원인은 물론 카데시 전투 때문이다. 카데시 전투로부터 15년이 경과한 후 두 나라는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음이 틀림없다.놀랍게도 이 협정의 조문은 현대 국가 간에 체결되는 조약과 완전히 같은 체계였다. 협정의 이름은 ‘위대한 왕, 이집트 국왕이며 용자인 람세스와 히타이트 국의 위대한 왕 핫투시리 사이에, 좋은 평화와 위대한 왕자에 적합한 우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조약’으로 되어 있다. 본문의 일절은 다음과 같다. “만약에 히타이트에 외적이 들어오고 위대한 왕, 히타이트 왕 핫투시리가 람세스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적에 대해서, 나를 도우라’라고 말씀한다면, 위대한 왕, 이집트의 국왕 람세스는 그 보병대와 전차대를 파견하여 적을 살육하고 히타이트를 위하여 복수할 것이다” 물론 동일한 문구로 이집트가 공격당했을 때 힛타이트 군이 원조한다는 조항이 기재되어 있다. 이어서 두 나라의 왕권 보호, 도망자의 추방과 망명자에 대한 사면이 적혀 있다. 불가침 조약도 체결되었다. “히타이트의 위대한 지배자는 결코 이집트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는 결코 히타이트의 땅을 침범하여 약탈하지 않는다” 이 조약을 보증하기 위해 양국 간에 체결된 조약은 은으로 된 탁자에 기록하며 1,000명의 하티 신과 여신, 1,000명의 이집트의 신과 여신이 증인으로 기록되었다. 만약에 누구든지 조약을 어기는 자는 저주받아 그 나라와 신하들이 멸망하며 조약을 지키는 자는 축복을 받으라고 적혀 있다. 이후 양국은 자신들의 조약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협정의 방법으로 히타이트의 공주가 이집트로 출가하여 람세스 2세와 결혼했다. 또한 이집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와 히타이트의 왕비인 푸두케파도 소식을 교환했고 서로 교환 방문도 했다. 람세스 2세는 제위에 오른 지 몇 년이 안되어 카데시 전투라는 거대한 전투를 벌였지만 그 후에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로 국가를 운영했다. 그가 왕위에 있었던 기간이 무려 67년이나 되었지만 국내외로 아무런 문제점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안정된 통치 기간을 이용하여 대규모 건물들을 건설했으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아부심멜 신전이다. 1959년에 이집트에서 아스완댐을 건설하자 아부심멜 신전이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 유네스코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지역의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 사회에 동참을 요청하였고 50여 국가들이 참여하는 구난 작업이 펼쳐졌다. 계획은 단순하여 아스완댐이 건설되더라도 수몰되지 않도록 위쪽으로 65미터를 옮기는 것이었다. 람세스 2세의 좌상과 강 양쪽에 위치한 2개의 사원을 고지대로 옮기기 위해 석조물을 1천 개 이상으로 절단한 후 이를 운반하여 원형대로 복원하는 대역사(大役事)였다. 유적을 이전시킬 대상 지역도 원래 유적이 있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비슷한 모습으로 조성하였다. 이 사업은 인류 문화재를 국제 사회가 공동으로 지킨 좋은 예로서, 현재도 유네스코에서는 세계적으로 보호해야 할 문화 유산을 지정하여 관리 및 후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람세스 2세가 67년이라는 장기 집권을 하고 무려 110명이나 되는 자손을 낳았는데 그 중에서 4명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도 화제 거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친 결혼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파라오는 인간이자 신이기 때문이다. 신이 평민과는 결혼할 수 없었으므로 파라오와 가장 가까운 근친과 결혼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에 대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기록상 람세스 2세는 역사상 가장 먼저 전투의 승패에 대해 거짓말을 한 장본인이 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 중에서 람세스 2세를 비난하는 사람이 비교적 많은 것은 그가 전쟁의 승패를 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역사를 왜곡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집트가 세계의 중심이며 또 신이 사는 세계로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역사에 대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부 국가나 위정자들은 역사적인 사실을 조작하는 데 서슴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조작하지는 않는 것을 자부심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집트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조작하거나 가필을 하지 않고 모두 지웠다. 그들은 수많은 신전에 새겨진 이름이나 그림의 경우 얼굴을 지우거나 이름을 삭제했는데, 현재 이집트의 유적에서 이런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게다가 람세스 2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건축물을 새로 지으면서 자신의 선조가 건설한 건축물의 재료를 다반사로 빼냈다. 그것은 자신의 건축물을 보다 쉽게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영국인 고고학자 퀴벨은 데이르 엘 바하리에 있는 아누비스의 지성소에서 빼내 온 기초 벽돌 층을 발견하여 하셉수트가 재료를 도둑맞은 지 3,000년 후에 제자리에 도로 갖다 놓기도 했다. 고고학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하는 것은 람세스 2세가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건축물에서 선조의 이름을 지우고 마치 자신이 건설한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는 점이다. 소위 역사를 가필하여 조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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