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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레네 (Cyrene)

타종교신전/그리스신전, 리비아, 체코 등

by baesungsoo 2013. 12. 2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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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 of Cyrene, Libya               (출처- http://www.temehu.com/Cities_sites/cyrene-cyrenaica.htm)

 

1. Entrance Gates to the Agora 8. Hadrian's Milestone 15. Triumphal Arch (Antonine) 22. Center of Roman City
2. Corner Tower of the Acropolis 9. Sacred Way 16. Theater 2 23. Byzantine Wall
3. Sanctury of Isis & Serapis 10. New Fountain 17.   Temple of Demeter 24. Tower on City Walls
4. Roman House 11. Pasage to the Fountain 18. Market Theater 25. Temple of Zeus
5. Acropolis 12. Unidentified Building 18a. South Gate 26. Hippodrome
6. Sanctury of Apollo 13. Dionysus Mosaic House 19. Cathedral 27. Hilltop Temple
7. North Gate 14. Greek Baths 20. Arab Tower ; 21. Church

28. Hospitum

 

리비아의 자발아크다르주에 있는 고고유적이다. 키레네는 그리스 티라의 식민지로서 헬레니즘 세계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BC 600년 무렵 인구 20만 명을 넘어섰고 그리스에 곡물을 공급하는 곡창지대였다. BC 96년 로마제국의 키레나이카 속주가 된 뒤에도 로마의 중심도시로 역할하였다. 도시는 두 언덕 사이에 동서로 뻗어 있는데, 도시 남서쪽은 지난날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아크로폴리스의 신전 구역과 아폴론 신전으로서 BC 7∼BC 4세기에 건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트라야누스 공공목욕탕은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년) 때 지은 것이며 공공광장·원형경기장은 2세기에 로마식으로 재건한 것이다. 도시 중심부에 있는 그리스 광장에서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와 그의 딸 페르세포네를 위한 원형 건축물과 주거터가 발견되었고, 도시 북서쪽에는 제우스를 모신 도리아식 신전을 발굴하였다. 또 규모가 크고 매장법과 형태가 다양한 공동묘지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1982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Ruins of Cyrene (Shahhat), Libya.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Cyrene8.jpg)

 

키레네의 기원은 테라섬에서 건너온 그리스 이민자들의 식민지로써 전설과 역사의 구전으로써 전래되었고 이는 거의 기원전 631년 시기의 일이다. B.C. 7세기 중반쯤, 조그마한 에게 섬에 7년에 걸친 장기간의 가뭄과 인구 과잉으로 인하여 기근이 계속되자, 강제 이주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철저한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사회 지도층에서는, 델피 (그리스의 옛 도읍)에 거주하는 “아폴로”라는 유명한 현인과 상담 결과, 리비아에 식민지를 건설하라는 조언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첫 번째 이주대가 구성되었으며, 나중에 이름을 바투스로 바꾸고, 키레네의 첫 번째 왕이 된,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철학자)에게 전권을 맡기게 되었다. 이 백명 가량의 젊은이들이 바투스를 따라, 크레타섬 (지중해의 섬, 그리스 영토)까지 항해를 하여, 이곳에서 리비아로 안내할 선원을 구하여 아프리카 해안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들은, 비옥한 키레네 고원의 동쪽 변두리에 위치한, 봄바만의 플라테라는 작은 섬에 첫 정착을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바투스는 말더듬이를 치료하기 위해 델피에 거주하는 현인과 상담하였을 때, 현자가 예언하기를 “바투스야! 너는 리비아에서 양들에게 좋은 목장을 찾으라고 아폴로 신이 너를 보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 바투스가 리비아에 도착했을 때, 한 번은 으르렁대며 포효하는 사자를 만나 깜짝 놀랐으나, 전혀 해를 입지 않아 그 예언이 입증되었다. 플라테 섬은 키레네 보다 적었고, 육지에 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첫 정착은 성공적이지 않았다. 2년 후에 이민자들은 현자를 다시 만나, “리비아에 살아보니 먹을 것이 없다”고 항의하자, 현자는 답하기를 “너희들이 양들에게 좋은 목장을 제공해주는 리비아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면, 나는 너희들을 크게 찬양하리라”고 빈정거리며 대답하였다. 정착자들은 다시 진정한 리비아 땅을 찾아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아프리카로 돌아와, 그들의 정착지를 불모의 플라테에서 봄바와 데르나 (지금의 와디 칼리즈)라는 더 좋은 곳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들은 6년 이상을 살았는데, 그 후에 그들은 서쪽 고원 지대에, 더 좋은 땅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서부 고원 지대로 이주 시, 친절한 리비아인 들은, 그들이 영원히 정착할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스인들이 리비아에서 가장 좋은 지역인, 이라사 (아마 데르나, 혹은 아인 마라 지역)을 바라보게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리비아사람을 피하여, 밤에만 행군을 하여 그들은 결국, 키레네에 도착하게 된다. 리비아인 안내자는 “그리스인들이여, 이곳은 하늘에 구멍이 뚫려 여러분들이 잘 지낼 수 있을 것이요” 라고 말하였다. 물론 이 말은, 키레네 지역은 비가 많이 온다는 것을 견주어서 한 말이었다. 리비아는 인구는 적고 땅은 넓었으므로, 그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거친 날씨를 피하여 더 높은 고원 지대에 흩어져 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본토와 같지 않은 리비아 경치에 매료되었으며, 또한, 테라 지역에서 겪었던 가뭄에서도 해방되었다. 그곳에는 경작에 적합한 흙과 광활한 초원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리비아인들이 우호적이었으며, 가족 없이 이곳에 온 이방인인,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딸을 결혼 시켰다.

 

Cyrene (Greek, 3rd/4th century B.C.); looking toward the lower city and Fountain of Apollo
Cyrene, settled by Greeks in the 7th century B.C., became one of the largest and most prosperous cities of the ancient world and is designated a World Heritage Site.   (출처- http://www.normpowersphotography.com/Travel/Libya#!/i-xgCQDW4/A)

 

서쪽 기념문 [West Propylon(25)]옆에 위치한 아고라를 떠나면, 오래된 바투스 거리는 아크로 폴리스까지 똑바로 이어지게 된다. 테메테르 사원 뒤쪽, 서쪽 기념문의 북쪽에는 연무장(34)으로 짐작되는 규칙적으로 배치된 골조가 부분적으로 발굴되었다. 연무장의 중앙 출입구는 현대적 규격을 갖춘 기념문 쪽으로 향해 있으며, 지붕을 4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중앙 홀로 이어져 있다. 이 중앙 홀은, 이오니아식 기둥이 측면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중앙 마당으로 통하게 되며, 만약 이곳이 체육관이 맞다면, 중앙 도로로 나 있는 조그만 방들은 탈의실로 여겨진다. 건물의 반쪽 즉, 북쪽에 위치한 다른 방들은 후세에 세워진 식품 저장 창고로 인하여 전체 윤곽이 혼란을 주고 있다. 건물의 북동쪽, 악간 깊은 곳에 모자익 바닥으로 장식된 헬레니즘 시기의 개인 집을 볼 수 있다. 체육관은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로마 시대에 재건축 되었다. 체육관 후면에 위치한, 도로 측면의 건물들은 현재까지 발굴이 되지 않았으며, 1916년에 설치한 이태리 방어벽을 지나, 고대 통행로에 인접하게 된다. 통행로는 곧, 우리가 방금 떠났던 시민들의 산책로를 보여주는, 서쪽 기념문에 도달하게 된다. 아크로폴리스 출입구(Acropolis Gate)는, 한개의 넓은 출입구로 되어 있으며, 상부의 돌출된 사각탑에 의해 지탱되어 있으며, 비문의 원래 위치는 Gateway 상부에 있었으나 현재는 땅위에 놓여 있다. 당시, 비문에는 “요새의 벽 (The walls of the Citadel)"이라고 새겨져 있고, 당시 아우구스 지역 총독인 ”루카니스 프로쿨루스“에 의해, 보수 작업이 실시되었다. 노출된 정도를 통하여, 아크로폴리스의 벽은, 복구한 분명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며, 추가적인 다른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향후 계속적인 연구를 하지 않고는 원래의 시기를 분명히 구별하는 것은 현재까지는 불가능하다. 현존하는 석조 건물의 주된 건물들은,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며, 초기의 그리스 건축물이라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아크로폴리스 안쪽으로는 약간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1910년 미국인 탐험대에 의해 발굴된 호화로운 집의 잔해는 오늘날은 파편만 남아 있으며, 이태리 방어벽에 의해 가리워져 있다. 그러므로 방문객들은 쉽게 아크로폴리스 Wall을 발견할 수 있으며, Corner-Tower(B)로부터 “아시스 신전(C)"까지 진행할 수 있다. 후자의 “아시스 신전(아폴로 신전의 조그만 사원과 혼동하지 않기 바람.)”은 1915년경, 처음 발굴이 시작되어 1935년 완전히 노출되었다. 아시스 신전은, 아크로폴리스 주변 안쪽으로 굽은 위치를 하고 있으며, 그의 존재는 초기 로마시대에 재 건축된 Wall의 배치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신전에는 2개의 사원이 있으며, 2개의 사원 중, 동쪽에 위치한 사원이 오래 되었으나, 4세기경 화재로 소실되었다. 사원은 간단한 형식의 현관과 성스러운 장소 및 이교도 조각상이 북쪽 Wall을 향하여 서있는 간단한 구조였다. 기초는 세라피스와 이시스를 모방한 2개의 인물 초상을 위한 Foot-Socket이 있으며, 세라피스의 조그만 대리석 상반신 조각품은 1935년 발견되었다. 동쪽 사원은 파괴된 후 재건축이 되지 않았으나, 그 대신 그 자리에 약간 서쪽으로 아크로폴리스 Wall에 대치하여 조악하게 건축한 매우 다른 특성을 가진 사원이 건립되었다. 사원 내부에서는 동전도 발견이 되었으며, 이것은 이교도의 영광을 재현시키고저 짧은 시기 동안 시도했던 쥴리안 황제 (서기 361 ~ 363) 시대에 건축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교도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였고, 오래된 이교도의 조각상들은 사원의 뒷 뜰에 묻혀지게 되었으며, 1915년경 발굴되었다. 그 중에는 이시스 동상, 그녀의 영광을 새긴 묘비명, 삼 인의 그리스인 및 베레니스의 수장 등, 예술품도 함께 발굴되었다. (Sculpture 박물관 소장) 이시스 신전으로부터 가파른 내리막길의 계단이 북서쪽으로 나있는데, 이 계단은 중앙 계곡으로 향해 있다. 아직 확인되지 않고 발굴이 완전히 되지도 않은 많은 건물들이 여기 저기 튀어나와 있으며, Valley-street 바로 위 언덕에 2개의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는 직사각형의 "Edifice (E)"가 세워져 있으나 역할이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발굴도 진행중이다. Edifice 동쪽에 바로 인접하여 약간 낮은 곳에 "House of the Dionysus Mosaic (F)"가 작으나 로마시대의 잘 보존된 저택이 있다. 명칭은 디오니수스를 모방한 모자이크 패널에서 따 왔으며, 현재는 조각 기념관(Sculpture Museum)에 보존되어 있다. 이 건물로부터 서쪽으로 약간 내리막길의 언덕길은 신전으로 향하고 있으며, “바투스로 통하는 길”이라고 잘못 알려진 핀다르에 의해 명칭이 잘못 붙여졌다. 이 도로는 아폴로의 기초 주변에서 끝나고 있으며, 의심할 것도 없이 남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집에 물을 길어 나르기 위한 도로로 사용되었었다. 아폴로 신전까지의 종교 의식을 위한 행렬은 아마도 Valley-street로 통하는 준비된 넓고 쉬운 통로를 따라 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Cyrene's Necropolis encompasses hundreds of tombs expertly cut into the hills.

 (출처- http://www.temehu.com/Cities_sites/cyrene-cyrenaica.htm)


바투스 왕은 초기 40년 이상, 소수 이민 공동체를 통치하였는데,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고 현명하게 합리적으로 통치하였다. 후대에 개발된 도시와 비교해서는 비록 미흡하였으나, 키레네는 점점 정리되고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아폴로 신전이 샘키레네(큐라, 혹은 큐라나)로 불린 우물 가까이 세워졌고, 쭉 뻗은 도로도 건설되었다. 바투스가 죽었을 때, 그의 무덤은 숭배를 받아, 그 주위는 공공장소 (후에는 아고라로 칭함)로 바뀌었다. 바투스의 아들, 아르세시라우스 1세는 키레네를 16년간 통치를 하였으나, 그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바 없다. 키레네의 3대왕은 바투스 2세(기원전 583-560)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행운아”라고 불렀지만, 그의 통치는, 이전의 그리스와 리비아간 우호적인 관계를 단절시켰다. 그러나, 델피의 현인으로부터 다시 훈시를 받고, 새로운 땅을 분배하겠다고 약속한 정착자 들로부터 용기를 얻어, 그리스의 여러 곳에서 이민자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리비아 사람들이 그 땅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리비아의 왕, 아크디란은 이집트의 왕, 파라오에게 구원을 요청함에 따라 이집트 군대가 키레네를 침공했으나, 이라사에서 그리스인들에게 패하였다. (기원전 570) 키레네의 4대왕인 아르세시라우스 2세는 그의 별명인 Cruel"처럼, 자기 방식대로 생활하였다. 한편, 그와 같이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그의 형제들은 도시를 떠나 서쪽 고원 지대로 이주하여, 바르카 (지금의 알메르지) 에서, 그들은 새로운 도시를 발견했으며, 동시에 아르세시라우스 2세에 반란을 도모하도록 리비아 사람들을 부추겼다.  계속적인 전쟁으로 인하여, 7,000여명의 키레네 사람들이 죽었으며, 왕도 그후에 암살을 당했다. 아르세시라우스 2세의 아들, 바투스 3세는 개혁을 단행한다는 조건으로, 불안전한 왕위를 계승하였다. 델피의 현자는 다시 한번, 키레네 장래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듣고, 멘티네에서 데모낙스라는 법률 자문가에게 법률 자문을 의뢰한 결과에 따라, 정착자들은 원래 토지의 크기에 따라 3지파로 나누고 왕족 소유의 땅을 줄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키레네는 오랫동안 평온하지 못했다. 바투스 3세 아들인 아르세시라우스 3세는, 데모낙스의 개혁을 거절한 결과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권력을 쥐고 있는 그의 어머니, 페레티마로 부터 용기를 얻어 자유로운 땅을 약속한다는 명목으로, 사모스에서 군대를 일으켜 키레네로 되돌아가 적들에게 복수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반대 세력 때문에, 아르세시라우스 3세는 그의 장인 알라지가 통치하고 있던 바르카로 주거지를 옮기기로 결정하였을 때, 현자들은 그에게 “물로 둘러싸인 그곳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아르세시라우스 3세는 이 말을, 봄과 여름사이에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몇 년마다 홍수가 바르카 지역을 뒤엎어 물 중앙에 있는 섬과 같은 그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였다. 결국, 아르세시라우스와 장인 알라지가 바르카 거리를 산책하고 있을 때, 반적들이 그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여왕 페르티마는, 그녀의 아들을 살해한 학살자 들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않고, 당시 페르시아인 들이 통치하고 있는 이집트로 도망하여, 통치자 아리안데스를 설득하여, 아리안데스의 도움으로 군대를 키레네로 진격시켰다. 아르세시라우스의 학살을 주도한 바르카 사람들을, 오랫동안 포위하여 마침내 이집트 군은 바르카를 함락했다. 페르티마는 아들을 살해한 적들에게 복수를 하였으며, 주동자들은 성벽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죄가 경미한 자들은 박트리아로 추방되었고, 바티아드 왕조의 몇몇 사람만이 살아 남았다. 고대 기록서에 의하면,“도가 지나친 복수를 하면, 신의 노여움을 받는다.” 라는 말대로 그후, 페레티마는 이집트에 돌아와 몹 쓸 병에 걸려 고통 속에 죽었다. 페르시아 병사들이 오랜만에 이집트에 돌아와 보니, 도로는 황폐해지고 잔류 병사들과 후위군들은, 그들의 옷과 장신구들을 뺏긴 채 리비아인 들에게 살해당했었다. 이시기에 그리스인들은, 처음으로 트리폴리에 정착을 시도하였다. 스파르타 원정대는 서부 그리스로 항해하였으나, 델픽 (그리스의 옛도읍)의 현자의 자문을 구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Cinyps강 (렙티스 마그나 근처) 입구에서의 그들의 정착 기간은 길지 않았으며, 아마도 이것은 리비아인들과 카르타고 (아프리카 북안에 있던 고대 도시 국가) 인들이 힘을 합쳐, 스파르타인 들을 내쫓으려고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키레네의 큰 관심사는, 키레네 서쪽땅 끝에 새로운 그리스 도시 설립이었다. "Euhes"라는 이름을 가진 이 도시는, 현재의 벵가지 부근 바닷가에 위치 하였으며, 농사가 잘되는 인접 지역에 위치한 이 도시의 설립은, 키레네 경제와 관련한 무역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이는 봄바에서 벵가지까지의 가파른 지역에 자라는 야생식물로, 상업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런 야생식물은 리비아인들이 재배하여, 그리스에 수출하였으며, 의학 가치가 매우 높아서 로마 시대 이전, 키레네 번영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바투스 4세인 페레티아 사망후, Handsome이 키레네의 왕이 되었으며, 영토는 바르카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기원전 515-470까지 키레네를 통치하였고, 그의 통치 기간중 키레네는 부유하게 되었으며,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시기의 정치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다. 그는 Arcesilaus 4세로 계승되어, 신전 예언서에 기록된 바티아드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신전 예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8세대의 사람들이 키레네를 통치할 것이며, 4세대의 사람들은 바투스라  불리고, 4세대의 사람들은 아르세실라우스로 불릴 것이다” 초기 그리스 정착들은, 번영의 원천인 물이 있는 아폴로 샘에 가능한 가까이 그들의 주거지를 세웠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샘 아래에 있는 테라스에는, 공간이 제한적이었으며, 특히 종교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더욱이 초기 많은 비로 인한 물의 범람은, 이곳 테라스를 주거지로서 가장 적합하지 않은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초기 정착 민들은, 후에 아크로폴리스가 되는, 방어가 쉬운, 높고, 샘으로부터 남동쪽으로 난 피난처로 좋은 계곡 면을 따라 주거지를 만들었다. 훗날 키레네 도시 설계의 기초가 되는 이 계곡은, 처음엔 겨울에는 진흙 투성이의 수로였으나, 바투스1세는 남서쪽 언덕 끝으로부터 이어지는 마른 진입로를 만들었고, 이것은 후에 성벽의 일부가 되었으며, 로마시대에는 거대한 大路로 발전하였다. 그리스 아고라에 있는 바투스 왕의 신전은 초기 정착 자들이 아크로폴리스 샘의 동쪽 방향으로는 거의 확장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초기의 키레네의 지세를 재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도시의 설계나 건축 등이 현재에는 과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기 때문이며, 더욱이 우리에게 전해진 유일한 기록은, 핀다르의 시와 베데커 여행 안내서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칼리마추스 “Callimachus” 등이다. 현존하는 고대 건축물로는 단지 신전의 일부와 무덤만이 남아 있을 뿐이며, 훗날 도시의 기원이 되는 이러한 것들은 처음부터 가장 우수한 구조물이었으며, 적어도 2-3세기 동안, 개인 주거지는 매우 소박하고 연약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날 방문자들에 의해 발견된 고대 도시는 헬레니즘 양식으로 개개의 건물이 재 건축되었거나, 로마시대에 다시 건축되었다. 키레네의 부드러운 석회암은, 기후에 대한 저항이 약하고 계속적인 보수가 필요하였으며, 성벽은 그들의 위대한 확장기인 Ptolemaic시대에 완성, 보수되어, 로마시대에 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중앙 계곡으로부터 분할된 두개의 언덕(해수면보다 600미터를 조금 더 올라가는)을 둘러쌓았다. 많은 기념물들이 발굴된 남서쪽 언덕은,1916년 이태리인에 의해 만들어져 남아 있는 방어벽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폐쇄되었다. 북서쪽 언덕은 근대식 건물과 농장, 경작지로 나뉘었다. 비록 다른 뛰어난 기념물들이, 땅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지 위대한 제우스신전만이 발굴되었다.  구불구불한 지형 때문에, 최대 확장기(B.C 300-A.D 200)에도, 키레네의 도시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으나, 우리는 그것의 주요 외곽 선을 다시 건설할 수 있다. 두개의 언덕사이에 난 중앙 계곡의 주요 축 (북서와 남동)을 따라 세개의 중심도로가 나 있었으며, 경사지에 모인 모든 빗물을 처리할 수 있는 거대한 배수구를 만든 로마인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배수되는 계곡의 길은, 훗날 도시의 주요 상업로가 되었다. 또, 데르나와 아폴로니아로부터 바퀴 달린 운송수단을 운반하게 주었으며, 아폴로 신전에 갈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접근법을 제공하여 주었다. 조금은 계곡의 길과 평행한 남서쪽 언덕의 꼭대기 마루는, 바투스의 옛길을 따라 아고라광장과 아크로폴리스 진입로까지 연결되었다.

 

Sanctuary of Demeter and Kore, 4th - 3rd century B.C.
Demeter and Kore were Greek fertility goddesses. Newly married women came here to pray for children; pregnant wives prayed for a safe delivery of a male child     (출처- http://www.normpowersphotography.com/Travel/Libya#!/i-xgCQDW4/A)

 

헤르메스(Hermes) ,Mercury 는 제우스와 아틀라스 딸인 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제우스의 전령이자 죽음 의 나라에 영혼을 인도하는 안내자. 길과 여행자를 지키고 행운을 가져다주며, 도둑과 상인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깃털이 달린 넓은 차양의 모자를 쓰고 역시 깃털이 달린 샌들을 신었으며, 두 마리 뱀이 감겨있는 전령의 지팡이인 케리케 이온를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탄생설화 : 제우스는 아틀라스의 딸인 마이아를 사랑하여, 헤라가 잠든 사이에 키레네산중의 동굴에서 헤르메스를 낳게 되었다. 일화 : 아폴론과 친했던 그는, 아폴론이 그를 가축의 수호신으로 삼고 돌로 점을 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소몰이에 사용하는 지팡이인 케리케이온도 주었다. 헤르메스는 종종 어깨에 새끼양을 메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노미오 스('양치기'의 뜻)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헤르메스는 제우스를 비롯한 다른 신들에 대한 전령으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또 그는 저승과도 관련이 있다. 헤르메스는 페르세포네를 어머니인 데메테르에게 다시 한 번 되돌려주도록 교섭 하러 가기도 하고, 헤라클레스가 케르베로스 사냥을 위해 저승에 가는 일을 돕 기도 하였다.

 

키레네 (Cyrene)  아폴로 신전      (출처- http://www.temehu.com/Cities_sites/cyrene-cyrenaica.htm)

 

비록, 아폴로 신전과 분수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더라도 그들 건물의 내역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로마인들이 도시의 동쪽 변두리에 물탱크와 보조 도수관을 설치하기 전에 아폴로 분수는 수많은 구유 모양의 물받이 통에 의해 보여지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람과 동물들에게 물을 제공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동물들의 통행은 우물이 고갈되는 하절기에 집중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 졌으며, 신성한 지역내 에서 짐승들의 울음소리 및 오염이 되는 것을 피 할수 없었다. 우리는 그러므로, 길고 좁은 언덕이 아폴로 분수에서 넘쳐흐르는 물을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저장되는 가파른 절벽으로 향해 있음을 알게되며, 넓은 언덕 아래에 많은 성지 및 기념물들이 아폴로 사원을 둘러싸고 있음을 보게 된다. Watering Point와는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상부 대지는 그리스인들의 연극을 위한 장소로 제공되었으며, 나중에는 로마인들의 원형 극장으로 사용 되었다. 이런 사실들은 현대의 방문객들에게는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으며, 돌로 만들어진 선반이 여러 군데 붕괴되었으나 극장으로 통하는 도로의 흔적이 현재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초기의 로마 지배 시기까지도 짐승들이 분수까지 접근 할 수 있었다고 여겨지나,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그 지역 총독인 “베스탈리스”가 이 지역의 동쪽 끝을 봉쇄하였으며, 대신에 그는, “아쿠아 아우구스타”라고 불리는 새로운 분수를 만들어서 사용케 하였으며, 아폴로 분수는 오염이 되지 않도록 사람만 사용토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반기 로마 시절, 토목 기술자들은 도시 주변에 동물을 위한 광범위한 물 공급 장소를 설치하여 전지역의 우물에 동물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으며, 우물의 물줄기를 로마 사람을 위한 공중 목욕탕으로 돌렸다. 그러나 새로운 분수에 의해 단단한 지형이 무너지고, 위험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란 옹벽을 설치하고 중간에 중재 지역을 두었다. 이 옹벽은 또한, 계곡 도로 주변에 있는 주랑으로 보호되는 뒷담 역할도 하였으며, 겨울철 나그네 및 극장 관객들에게도 좋은 보호막 역할을 하였다. 서기 98년에 건설된 목욕탕은 상대적으로 신전의 지역을 좁게 하는 결과가 되어 나중에는 공식적인 신전 입구를 건설토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분수 및 신전 지역의 급격한 변화는 방문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구성 요소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들게 하였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건물들은 동시에 같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며, 그들의 어떤 것들은 그 당시 상황에는 쓸모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기 되는 설명들이 다양한 현상을 분명히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나, 그 당의 많은 사항들이 아직도 분명치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여기에 언급된 여행안내서에는 건물의 전체 구성을 이해하기 쉽도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방문자들은 아래쪽 입구에서 반대 방향으로 아폴로 제단을 관람토록 하는 것이 유리하며, 시간이 촉박하면, 급격하게 이어진 계단을 올라서 곧바로 분수에 도달 할 수 있다. 아폴로 분수(1)는, 이 지역에 도시가 건립되게 한 가장 큰 이유로, 그것은 아폴로 신이 구혼하여 그의 신부를 리비아에 데려온 그리스 소녀 “쿠라 혹은 쿠라나(키레네)” 요정에 관한 전설과 연결되어 있다. 시인 “핀다르”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를 찿다가 사자와 한바탕 격전을 치룬 아폴로는 경이로움과 감탄에 쌓여 켄타우로스에게 자문을 구한다. “공공연하게 내 손을 그녀에게 내밀거나 혹은 신부 침대의 향기로운 꽃을 꺾어 버리는 이런 것들이 합법적인가 ?” 켄타우로스는 아폴로에게 결혼에 대해 이렇게 조언하였다. “이 처녀와 혼인하기 위해 당신은 이 골자기로 들어오시오. 그대는 그녀와 맺어질 운명이며, 키레네 평원 가운데에 당신이 섬사람들(테란)을 한곳으로 모을 때, 당신은 그녀를 이 도시의 여왕으로 만들어줄 바다 건너 선택된 제우스의 정원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아폴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그날 아폴로는 그 일들을 성취하였으며, 리비아의 금으로 장식된 방에서 그녀와 동침하였다. 고대의 다른 작가들은 같은 줄거리를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이는 “쿠라나는 그녀 자신 스스로 리비아로 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그녀가 도시 주변을 파괴하고 다니는 사자를 죽이고 왕국을 얻었다”고 하는 작가도 있다. 이런 모든 이야기들은 그녀의 이름을 따온 도시들의 수호신이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Kurana 혹은 Kurene"가 원래 이름이며, "Cyrene 혹은 Cirene"라는 말은 현대의 앵글로색슨 혹은 라틴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원래 그리스어에서는 아랍 지역 이름인 "Grenuah"임을 알수 있으며, 도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평원을 뜻하는 말로써,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기간의 “Silphium" 문장 사용 후, 키레네의 동전에는 맨손으로 사자를 짓누르고 있는 여신, 키레네의 모습으로 대체 사용되었다. 이 조각품의 가장 잘 알려진 샘플은 현재,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비너스 사원에서 출토된, 부조품에서 볼 수 있다. 그 부조품에 나타난 모습은, 리비아 여신이 요정의 머리 위에 월계관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최소한 2개 이상의 키레네와 사자 조각상이 도시의 분수대에 세워 졌으며, 사자의 벌어진 입에서는 항상 물이 흐르도록 하고, 믿어지지 않게도 님프는 황량한 아프리카에, 사자의 커다란 입에서 생명의 근원인 물을 풍부하게 제공하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아폴로 분수(1)의 물은 상부 언덕에 있는 동굴로부터 흘러 나왔으며, 샘은 언덕 중심부에 위치한 300야드 정도 길이, 동굴의 끝에 있었다. 이 터널은 매우 꾸불꾸불하며, 바깥쪽 절반 정도는 순수한 자연적인 동굴이나, 안쪽 절반은 고대시기에 인위적으로 만들어 졌으며, 벽은 진흙으로 바른 흔적 및 물이 고여 있던 흔적이 보인다. 조각들은 주로 로마 시대에 만들어 졌으며, 터널은 님프(요정)에게 봉헌된 신성한 지역임을 상징하며, 때로는 순례자 및 여행자들에게 순례 장소였다. 상류 쪽에서 다른 통로를 만들어서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돌렸기 때문에, 방문자들은 발이 물에 젖지는 않았다. 현재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옛날보다는 감흥이 덜할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옛날 물줄기를 돌렸던 챤넬은 폐쇄되었고, 모든 동굴이 막혔으며, 현재 마을에 물을 공급하는 관계로 그곳에 접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江의 요정인, 아케로우스에게 봉헌된 제단이 있는데, 이 제단은 크리토라와 테오크레스토스의 딸인, 메고가 세웠다. 분수 서쪽에는 Rock-Face가 솟아 있고, 초기까지 계단으로 남아 있었으나 “Nymphaeum"이전에 개발되었다. 그 밑에는 초기 모습 그대로의 물통이 있는데, 현재 수위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기원전 18년, Sotas의 아들인, 사제 디오니시우스가 분수의 위치를 낮게 하고 Rock-Face에서 볼수 있도록 하게 한 흔적, 외관 및 차양을 설치하여 복구하였다. 그후, 서기 70년경, 플라마 게멜로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분수 옆에 암벽을 깎아 직사각형의 수로를 건설하였다. 분수를 지나서, 일정이 촉박한 방문자는 계단(2)를 내려가서, 아폴로 사원 및 목욕탕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신전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상부 언덕을 따라 중앙 계곡의 입구로 가는 것이 좋다 좌측의 높은 담은 신전 고유 영역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이며, 우측 삼각 문장이 있는 낮은 담 옆에는 많은 짐승들의 구유가 있으며, 가장 위쪽에 기독교 승리 후에 불태워버린 많은 이교도 상의 Byzantine lime-kilns(3)이 있다. 언덕 아래에는 우리가 나중에 음미할, 복구된 Strategheion (7)이 있으며, 바로 동쪽에 조상대를 받히기 위해 복구된 4개의 도릭식 기둥으로 되어 있는 Greek Propylea(4)가 있다. 기원전 4세기경, 아폴로 사원의 사제, Praxiades가 로마 목욕탕이 건립되기 전, 신전의 출입구를 표시하였다. 이런 기념물 출입구는 로마 사람들이 목욕탕을 세울 때 허물었으며, “Sacred Way" 의 옹벽(호안)이나 주랑 등도 파괴되었다. 그러나, 출입구는 서쪽 멀리 눕혀있는 “Roman Propylea(8)에 의해 복구되었으며, 아마도 Trajan이나 Hadrian시기에 복구 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입구 정문에 있는 코린토식 4개의 기둥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으며, 처음과 나중 출입구 사이에, 방문자들은 3개의 중요한 기념물울 지나게 되는데, 첫 번째는, 통로의 우측에 아마도 여신, 아프로디테로 여겨지는 여신이 위치했던 담 뒤쪽에 파괴된 “절(5)”가 있다. 사원 뒤편, 계곡 거리 끝에, 베스탈리스의 새로운 샘에서 목욕탕 각 부분에 물을 공급하던 수도관을 볼 수 있다. 바로 옆에는 짧은 주랑으로 지탱되고 있는 열린 현관 “Byzantine Bath(6)"로 가는 출입구가 있으며, 이 문을 지나 공중 목욕탕의 Main Cold Bath로 가게 되며, 북쪽은 Hot Room으로 통해 있다. Trajan시기에 건설되었던 초기 목욕탕은,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그후 서기 400년경, 다시 건설되었다. 나중에 건설된 목욕탕에도 주 출입구가 있으며, 비잔틴 시기에 해체된 트라얀식 출입구에 있는 기둥에 흠이 있는 하얀 대리석 기둥의 상부를 볼 수 있다. 2개의 목욕탕 부근에 초기 시대의 많은 담벼락이 있으며, 서기 98년, 초기 목욕탕을 건설하면서, 신에게 바쳐진 건물에 속해있는 제단 등을 볼 수 있다. 서쪽으로 진행하여 로마식 개선문에 다다를 수 있으며, 가는 도중 왼편에는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구된 “Strategheion (7)"이 있다. 그 건물은 이름에서와 같이, 기원전 4세기경, 3명의 키레니아 출신 장군들이 세웠으며, 그것은 시르틱 걸프 지역의 승리, Libyan Marcae 및 Nasamones를 향해 행군하면서 거둬들인 전리품을 십일조를 바치는 신과의 관례에 따라 아폴로 신에게 헌상 되었었다. 이 시기의 정확한 사실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남아 있는 것은 단지 원형 조각품이나 중앙 바닥의 제단 받침만 남아 있다. 로마 지배 초기에 많은 건물들이 보수되었으며, 지방 총독이었던, “Sufenas"에 의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헌납되었다. 또한 그는, Forum도 보수하였다. 헌정의 말을 기초에 새긴 티베리우스의 동상은 벽 쪽에 세웠으나, 동상의 머리 부분은, 서기 115년, 유태인 반란 시, 손상이 되었다가 아마 그후에 다시 보수 된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 개선문(8)을 지나면, 방문자들은 신전 영내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 좌측에는 매력적인 헬레니즘 양식의 분수(9)가 있으며, 아폴로 분수로부터 공급되는 물이 저수조에 모였다가 다시 헬레니즘 분수로 흐르는데, 현재도 물이 흐르고 있다. 4계단의 작은 인공 폭포를 내려오면서, 지붕을 받히는 가냘픈 열주가 지탱하고 있는 하부 물 받침대로 떨어지게 된다. 기념문과 같은 축으로, 고대 순례자들의 첫 번째 성지 형태를 한 것은, 지하 세계의 지배자인 “Temple of Hades(10)"이 케르베루스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동상의 머리와 손발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부분은 일반 돌로 만들어 졌으며, 이러한 재료의 혼합 사용은 다른 지역에서와 같이 키레네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사원의 기초가 계단식으로 된 것은 그리스나 헬레니즘이 기원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으나, 외관은 서기 2세기경에 재 보수되었으며, 기둥의 한곳에는 사제의 이름도 새겨진 채 남아 있다. 하데스 사원 남쪽에, 적은 규모지만, 하데스의 부인, 페르세포네를 위한 로마 시대의 사원이 있으며, 근처에서 페르세포네의 머리 없는 동상이 발견되었다. 또한 근처에서, 아그리피나의 깨어진 초상화가 발견되었으나, 현재는 Baths of Museum(목욕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Temple of Zeus; Greek, 5th century B.C.   
The temple has been undergoing a years-long restoration by Italian archeologists

 (출처- http://www.normpowersphotography.com/Travel/Libya#!/i-qdzLcMS/A)

 

Temple of Zeus; Greek, 5th century B.C.
The temple has been undergoing a years-long restoration by Italian archeologists

 (출처- http://www.normpowersphotography.com/Travel/Libya#!/i-qdzLcMS/A)

 

Cyrene: the temple of the Sun-god Zeus, 6th century BC, rebuilt during the 2nd century AD

(출처- http://www.temehu.com/Cities_sites/cyrene-cyrenaica.htm)

 

A damaged statue of a goddess still standing in the open air

(출처- http://www.temehu.com/Cities_sites/cyrene-cyrenaica.htm)

 

One of several pieces found in Cyrenaica, which show the Libyan Amazons.
This particular one, currently on display in Tolmeita Museum , was found in Wadi Khamish

(출처- http://www.temehu.com/Cities_sites/cyrene-cyrenaica.htm)

 

Theater, originally Greek 3rd/4th century B.C.; then Roman, 2nd century A.D

(출처- http://www.normpowersphotography.com/Travel/Libya#!/i-qdzLcM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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