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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하노버교회와 로버트 토마스선교사

성지순례/서유럽(영국)

by baesungsoo 2006. 6. 2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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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교회

 

로버트 토마스선교사

 

교회 벽의 토마스선교사 사진과 기념석판

 

토마스 선교사, 한국100주년 순교자기념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장면 (평양대동강변)  블로그명 : ━☆Jesus is praying for you☆━

 

토마스선교사 무덤, 1866 병인교난시 순교

 

한국 토마스기념교회 (대동강변), 한국기독교 역사박물관 소장그림

 

한국교회는 토머스의 순교를 기려 1926년 순교 60년 기념회를 조직, 1927년 5월8일 그의 순교지에서 1천여명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으며 1928년에는 오문환목사의 집필로 전기가 나왔고 1933년 9월14일에는 대동강변에 토머스기념 예배당이 세워졌다

 

2006년 출간

 

 

 

영국 하노버교회  ‘한국인 사랑’ 순교자 토마스 교회  


순교자의 피는 복음의 토양이다. 세계 교회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거니와 이 땅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 개신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84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의해서다. 이보다 18년 앞선 1866년 영국인 선교사 로버트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1839∼1866) 목사가 대동강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토머스를 키워낸 교회가 영국 웨일스 지방에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는 18세기 영국을 변화시킨 존 웨슬리의 영성현장을 답사한 뒤 런던에서 5시간 가까이 달려 웨일스 남부지방 하노버에 도착했다. 19세기 중엽 영적 미개지였던 ‘동방의 작은 땅’에 와서 최초로 순교의 피를 흘린 토머스 선교사가 신앙생활을 한 하노버 교회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노버는 웨일스 남부의 목가적인 서정을 간직한 조용한 마을이었다. 하노버 교회는 그러한 분위기에 걸맞게 작고 검소했다. ‘이처럼 한적한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순교자가 나오다니…’ 하는 의아심과 감회어린 마음으로 회중석에 앉아 한동안 묵상했다. 150여명 남짓 앉을 수 있는 크기의 예배실 벽에는 토머스 선교사의 사진과 함께 그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석판이 장식돼 있었고 그가 남긴 유품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특히 1990년대초 한국인으로는 처음 이곳을 찾아 박사학위 논문을 쓴 예장통합 기독공보 사장 고무송 목사의 논문집 등이 보존돼 있어 반갑고 놀라웠다.  토머스는 1839년 웨일스 북부 라드노주 라야더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웨일스 남부지방 하노버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로버트 토머스 목사(1810∼84)는 이곳에서 36년간 목회했으며 그는 지금 교회 정원에 잠들어 있다. 토머스 선교사는 하노버에서 고교를 마친 후 잠시 초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857년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러나 건강문제와 지방교회 전도 활동 등으로 1863년 늦게서야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은 토머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선교사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자 지체하지 않고 해외선교를 지원했다. 런던선교회로부터 중국선교사로 임명된 토머스 선교사는 1863년 6월4일 아버지가 시무하는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는다. 목사 안수와 함께 중국으로 떠나기 위해 고드페리와 결혼을 하고 7월21일 중국 상하이(上海)로 출발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교지에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돼 실의와 충격을 견디지 못한 토머스 선교사는 런던선교회에 사표를 제출,청나라 해상세관의 통역관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토머스는 선교 사명을 포기한 자신의 행동에 늘 괴로워하다가 세상 직업을 청산하고 다시 선교활동에 발벗고 나섰다. ‘사명길’과 ‘세상길’의 갈림길에서 동요할 때 그를 붙잡아준 인물이 당시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윌리엄슨 선교사였다고 한다. 토머스 선교사는 이 무렵 한국 천주교인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윌리엄슨과 협력하여 한국 선교의 꿈을 갖게 되었다. 1865년 윌리엄슨으로부터 물려받은 상당량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황해도 자라리 해안에 도착,2개월반 동안 선교활동을 벌리면서 한국어를 익히기 시작한다. 한양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만주를 거쳐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잠시 중서학원(Angro-Chinese College) 원장직을 맡고 런던선교회에 복직하는 등 한순간도 한국 선교에의 꿈을 포기하지 못했다.  토머스 선교사는 다시 조선땅으로 들어가려 노력하던 중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교역차 조선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1866년 8월9일 이 배에 승선하게 된다. 제너럴 셔먼호는 서해안에서 대동강을 거슬러올라 가다가 평양 인근에 정박했다. 선원들은 조선 관리의 저지와 경고를 무시한 채 상거래를 요구하면서 대포를 쏘는 등 난폭한 행동과 살상으로 조선 당국의 분노를 샀다. 그 결과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1866년 9월5일 제너럴 셔먼호는 불타게 된다. 이런 경황 속에서도 토머스는 선두에 서서 성경을 들고 전도하다가 조선군의 칼에 순교의 피를 흘렸으니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사력을 다해 강가로 성경을 던지며 “하나님,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단 한 권이라도 조선인에게 성경을 전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외쳤다고 한다. 토머스를 체포하여 처단한 사람은 박춘권이란 자인데 토머스는 그 순간에도 가슴에 품고 있던 성경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토머스로부터 성경을 받은 박춘권은 훗날 평양교회 장로가 되었으니 살아있는 말씀의 역사며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땅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함께 복음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18년 후 1884년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손에는 이미 한글로 된 성경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살아있는 말씀만이 죄인을 변화시키고 국가와 민족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한국 초기 교회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영적 위기의 시대에 한국 교회는 ‘성서 한국’을 이룩하기 위해 말씀으로 더욱 무장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하노버 교회에서 발견한 중요한 사실을 여기 소개한다. 하노버교회 정원 건너편에는 낡은 건물이 하나 서 있는데 그것이 1774년 지어진 최초의 교회 건물이라고 한다. 토머스 선교사가 유년 교회학교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건물이라고 한다. 교회 관리인 낸시 윌슨 여사의 설명으로는 교회 재정이 어려워 이 최초의 교회 건물을 ‘매물’로 내놓았단다. 이 사실을 알고 필자는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던 토머스 선교사의 영성이 살아있는 역사적인 하노버 교회 최초 건물이 일반인에게 팔려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성영(성결대 총장·시인)   [국민일보 200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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