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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비에르 성당 (가고시마)

성지순례/필리핀,중국,아시아,일본 등

by baesungsoo 2007. 5. 6.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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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비에르 성당    (출처-  http://blog.naver.com/takethat79/)

 

 

가고시마에 세워져 있는 기념공원과 성당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Xavier, Francisco, 1506년∼1552년)가 일본에 온 지 400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1949년에 세운 것이다. 예수회 선교사였던 스페인의 사비에르는 1545년∼1547년에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제도 포교에 전념하다가 1549년에 가고시마에 상륙하였다. 그를 통해 최초로 천주교가 일본에 흘러 들어온 것이다. 현대식 건물이지만, 그 내부는 상상 밖이었다. 일본 곳곳에 세워진 현대식의 깔끔한 예술 건축물 중의 하나가 이 사비에르 성당이다. 성당 외부는 노출 콘크리트라서 차가운 느낌이 들지만, 성당 내부는 목재로 처리하여 따뜻한 느낌이 든다.  (글- 오마이뉴스 2003-09-07 14:12 노시경 기자)

 

 성당 내부

 

내부 성당 벽면과 빛  (출처- http://blog.naver.com/prowriter )

 

 파이프 오르간과 스테인드글라스

 

성당 내부는 목재로 처리하여 따뜻한 느낌이 든다. 성당 2층에는 대예배당이 있고, 대예배당 뒤편에는 성당의 상징, 파이프 오르간이 자리하고 있다. 유럽 성당의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에 비해 이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은 크기가 작은 편이다. 그러나 이 오르간보다는 이 오르간 뒤에 자리한 불타는 듯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장관이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지척에 활화산이 자리한 불의 도시, 가고시마의 화염을 상징하고 있다. 성당 정면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푸른빛을 띠고 있다. 현란한 장식을 마다하고 외부의 빛을 이용해 성스러운 분위기를 이끌어 내고 마음의 안녕을 가져오게 한다. 파이프 오르간의 음율이 퍼지면서 따사로운 빛이 성당 안으로 들어올 때를 생각해 본다. 빛과 소리의 조화가 대단할 것 같다.

 

내부 부조, 사비에르와 스님과의 대화

 

당의 계단 벽면에는 사비에르가 일본의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이 두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았을까? 사비에르는 혹시 이 스님까지 포교대상으로 삼았던 것일까? 이미 이때부터 일본은 근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16세기 중반,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조선에서는 제13대 왕인 명종(明宗, 1534년∼1567년)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TV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중종과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둘째아들이었다. 명종은 그의 형인 인종이 죽고 12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 때부터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여인천하'가 열렸던 것이다.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 일파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등의 일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1547년∼1549년 동안 벽서사건, 필화사건, 옥사 등을 일으켜 100여 명의 선비들의 목숨을 잔인하게 빼앗았다. 1553년에 명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지만,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간섭은 여전하였다. 이러니 나라가 발전하고 백성이 편하게 살 수 있었겠는가? 일본은 천주교와 함께 유럽의 문물이 전래되면서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고 있는데, 조선은 중앙집권화된 왕권 아래에서 한 여인과 그 인척들의 아집, 독선으로 나라가 썩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지방 번주(藩主)들이 조총을 도입하고 자국 내의 경쟁을 통하여 전투능력을 급속히 향상시키고 있었다. 물론 당시 일본의 무사들이 백성들을 위하여 이러한 선진문물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왜군들은 사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한 때부터 계산하면 불과 40년 만에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능멸한다. 물론 사비에르가 이러한 조선에 들어왔다고 하여도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조선의 지도계층에 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양반들은 중화사상에 젖어 있고, 조선의 왕은 제대로 외교권마저 가지지 못했었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일 자세가 된 조선의 지식인들은 18세기~19세기에 들어서야 출현하지만, 그 힘도 미약했다. (글- 오마이뉴스 2003-09-07 14:12 노시경 기자

 

 콘크리트 성경말씀 부조

 

사비에르 성당 벽면에는 '목마른 자는 나에게 오라'고 되어 있다. 사비에르는 중국 남부와 일본 남부의 항구도시에서 이러한 성경 말씀을 전파하면서 일생을 바쳤지만, 동양에서 천주교가 가장 널리 퍼진 곳은 사비에르가 발 한번 디뎌보지 않은 한반도였다.

 

예배 안내문

 

사비에르 공원과 성당   


가고시마에 세워져 있는 기념공원과 성당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Xavier, Francisco, 1506년∼1552년)가 일본에 온 지 400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1949년에 세운 것이다. 예수회 선교사였던 스페인의 사비에르는 1545년∼1547년에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제도 포교에 전념하다가 1549년에 가고시마에 상륙하였다. 그를 통해 최초로 천주교가 일본에 흘러 들어온 것이다.

 

 사비에르 공원     (출처- http://blog.naver.com/prowriter )

 

사비에르

 

사비에르 기념공원의 설명문

 

일본에 체류하였던 사비에르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다. 사비에르는 스페인 북부 지방의 나바라 왕국 귀족으로서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천주교 수도회인 예수회에 속했던 스페인의 선교사였다. 그는 27세 때인 1534년에 로욜라(Loyola)와 함께 '예수회(Jesuit)'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황특사로서 동양 일대의 선교책임을 맡아 일하는 '동방의 사도'가 되었고 일본에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전하게 되었다.사비에르 기념공원에는 일본인들을 거느린 사비에르가 설교를 하는 듯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가고시마에 도착했던 그는 일본 불교도들의 격렬한 반대로 인하여 10개월만에 나가사키 현의 히라도(平戶)로 쫓겨가고 말았다. 사비에르에 의해 전해진 천주교는 큐슈의 나가사키에서 무역관계가 얽힌 종교분쟁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대두시켰다. 그래서 막부의 통치하에 있던 일본은 무역항을 나가사키항 만으로 제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도 천주교의 전래는 쉽지 않은 과정을 겪었다.  ( 글- 오마이뉴스 2003-09-07 14:12 노시경 기자) 

 

 

 

 

일본에서의 기독교 布敎와 禁制    


현재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연구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대략 1~2%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일본의 기독교 인구가 크게 잡아 전체 인구의 2% 미만이라는 널리 알려진 사실을 생각한다면 근세(early modern) 일본의 기독교의 전파는 꽤나 흥미롭다. 이 또한 연구 결과에 따라 편차를 보이기는 하지만 최소 30만 명에서 최대 70만 명까지 추정된다. 이는 놀라운 수치이며 에도 막부의 무자비한 탄압이 있은 지 200년이 지난 후에도 5만 명에 달하는 기독교가 남아있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일본에서의 기독교의 역사는 크게 3단계로 나눠 볼 수가 있다. 1. 사비에르의 상륙(1549년) 이후 활발한 포교활동과 전파의 시기 2. 이에야스의 크리스트교 금제 도쿠가와 시대에 쇄국(1641) 선교사 추방, 카톨릭 박해  3. 메이지 시대 1874년 조약에 따른 외압에 의해 기독교 금지령 철회 이후.

<일본에서의 기독교의 전파>

사비에르(St. Francis Xavier)와 기리시단(吉利支丹)의 탄생

프란시스 사비에르(마카오에 가면 사비에르 성당이 있는데 아직도 많은 일본인들은 이곳을 방문한다.)가 1549년에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예수회의 카톨릭 전도한 것이 일본 기독교의 시작이었다. 당시 예수회는 반종교개혁의 분위기 속에 선교의 열망이 충만해 있었다. 특히 유럽의 대항해 시대의 시작은 대서양을 마주하고 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인 일본에 선교사가 도착한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분위기에 사비에르는 로욜라와 권고와 교황의 명령을 받고 포르투칼령 인도로 향하였고, 고아에서 8년 간 생활한 후 일본에 도착했다. 사비에르가 일본으로 향하였을 때 동행한 일본인이 있었는데 야지로라는 도망자였다. 야지로는 신흥무역상의 한 사람으로 살인죄를 짓고 국외로 도망가 말라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사비에르를 만나 감화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는 바울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동생과 부하 역시 카톨릭 교도로 개종하게 된다. 사비에르와 일본에 도착한 동행들은 규슈 지방 가고시마에서 다이묘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로부터 환대를 받는다. 그들은 가고시마에서 1년 동안 포교활동을 벌여 100~150명의 신자를 얻었다. 이후 지속적인 포교를 벌여 2년 3개월간 2000여명에 가까운 기독교인을 만들었다. 이후 급속도로 퍼져나가 전성기에는 30만 명 이상의 신도를 확보하게 된다.

노부나가와 세례 받은 다이묘

카톨릭은 일본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려는 전환기에 전해졌다. 당시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크게 세 가지로 당시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왜구, 도이키(土一撥), 신흥무사단이 그것이다. 왜구의 해외 진출을 출발로 활발한 해외무역이 촉진되었으며, 이는 포르투갈 상인을 일본으로 유입하였다. 무역을 위해 카톨릭 선교를 허용하는 실리적인 입장이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한다. 다음으로 이키가 빈번이 발생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실력을 중심으로 낮은 신분에서 세력을 장악한 무사계층이 성장하고 있었다. 일본에 기독교가 급속히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전국을 통일시키면서 생겨난 크리스찬 다이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영주가 개종하면 속민들 또한 대규모로 개종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이 큰 몫을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노부나가는 통일의 반대 세력인 불교를 약화시키기 위해 승려를 박해했는데, 불교의 대항 세력으로 기독교를 보호하고 선교사들로부터 무기, 과학 기술 등의 문물을 수입하려고 하였다. 이에 기독교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난젠지(南蠻寺) 설립, 야스토에 신학교 설립 등을 추진하였다.

(글 출처- http://toddle.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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