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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기념성당 (히라도 성당)

성지순례/필리핀,중국,아시아,일본 등

by baesungsoo 2007. 5. 1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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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기념성당(히라도 성당)    (출처- http://paxkorea.co.kr)


성당이 불교 사원에 둘러싸여 있는 이 곳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뒤섞여 조화를 이루는 히라도의 상징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이국적인 조각이나 스테인드 글라스 등을 보며 예술적인 감성도 키울 수 있는 성당이다. 1931년에 세워진 교회로서 사비에르 기념비가 세워졌을 때, 성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교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항구로부터는 코우묘우(光明時)지와 즈이운지(瑞雲時) 절이 교회와 함께 겹쳐져 보인다. 또한 황혼이 저물 무렵의 교회는 석양빛의 반사속에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이 된다. 1550년 가고시마를 거쳐 히라도를 방문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신부는 세 차례 히라도를 방문하여 영주 타카노부의 허락을 얻어 히라도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포교했다. 히라도의 가톨릭 역사는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의 전도로 시작되어 그 신앙의 깊이에 따른 비극이 기독교도 탄압으로 구전되고 있다. 지금도 시마노우치(島內) 성지에는 매일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그들의 기도가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진달래로 유명한 사키카타공원의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동상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포교활동을 위해서 1550년에 1개월간 히라도에 체제한 이후, 40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기념비이다. 

 

성 프란치스코 사비에르와 성당 내부

 

성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기념비, 동상

 

이 동상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포교활동을 위해서 1550년에 1개월간 히라도에 체제한 이후, 40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기념비이다.

 

성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기념비

 

 

항구로부터는 코우묘우(光明時)지와 즈이운지(瑞雲時) 절이 교회와 함께 겹쳐져 보인다. 

 

 

히라도


일본 최초의 해외무역항로 대륙과 일본의 교류거점으로 번영을 누린 히라도는 동서 문화의 이국적인 향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진정한 역사를 만끽할 수 있는 고장이다. 히라도는 역사적인 국제교류 도시이다. 옛부터 한반도와 대륙과의 무호로써 번영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16세기에 기독교가 이 곳에 전해진 이후, 유럽의 문물이 많이 들어왔으며 아시아와 유럽이 혼연일체가 된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어 번영하여왔다. 또한 기독교가 금지됨에 따라 신분을 감춘 카톨릭신자와 순교자들의 수많은 애한이 서려있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히라도의 역사를 애환과 낭만으로 물들이고 있다. 1592년부터 일어난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곳 히라도에서도 많은 파병이 있었으며, 한일 양국의 많은 희생자를 낸 역사적 사실도 남아있다. 영주 마츠우라씨는 귀국시에 조선도공 등, 약 100명을 데리고 와서 히라도야키라는 도자기 문화를 열어 조선문화를 도입하였다.


히라도와 서구제국


히라도의 독특한 문화는 서구제국과의 깊은 관계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1550년에 처음으로 포르투갈 배가 입항하여 무역항으로서의 히라도가 발전하면서 약 90년에 걸쳐 에스파니아(스페인),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 등이 차례로 내항하여 당시의 히라도는 「서구의 도시」라고 불리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사비에르에 의해 전해진 가톨릭교는 무역관계가 얽힌 종교분쟁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대두시켜 결국은 1641년에는 네덜란드 상관(무역관)의 폐쇄와 함게 대외무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막부의 통치하에 일본의 무역항은 나가사키항으로 제한받게 되었던 것이다.


카쿠레키리시탄(신분을 감춘 카톨릭 신자)


사비에르의 포교활동으로부터 37년이 지난 1587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카톨릭 추방령」을 내렸다. 더욱이 토쿠가와이에야스의 금교령이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어 카톨릭교 신자에게는 암흑 시대가 도래했다. 표면상으로는 불교도로 가장하여 신분을 감추고 신앙을 계속 믿는 사람들도 많아져 신분을 감춘 카톨릭 신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순교자의 희생이 앞을 다투었고 또한 끝까지 신앙을 지킨 신자들도 수없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히라도에서의 가톨릭교는 본래의 가톨릭교와는 달리 독특한 종교로써 지방문화속에 정착, 발전해 왔다.  (출처- http://paxkorea.co.kr)

 

 

기리시단 성화, 19세기 일본 성화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16세기 예수회 신부인 에스파냐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의 전도로 시작 되었다. 기리시단은 일본의 카톨릭 신자를 부르는 이름이다. 처음 50년 동안은 번성 하였으나 도요토미, 도쿠가와 시대에 핍박으로 수천 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이후 19세기까지 숨은 기리시단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는데 이때 지방의 기리시단들은 불교도로 위장하여 혼합적 종교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 그림 역시 불교의 보현 보살(십자가 바로 아래 그림)에다 십자가와 예수의 라틴어 머리글자 "IHS" 를 새겨 놓고 예배시 사용 하였다. 십자가 부분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이 그림은 일본 남부 시고쿠 지방 츠시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의 기독교의 전파>


사비에르(St. Francis Xavier)와 기리시단(吉利支丹)의 탄생


프란시스 사비에르(마카오에 가면 사비에르 성당이 있는데 아직도 많은 일본인들은 이곳을 방문한다.)가 1549년에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예수회의 카톨릭 전도한 것이 일본 기독교의 시작이었다. 당시 예수회는 반종교개혁의 분위기 속에 선교의 열망이 충만해 있었다. 특히 유럽의 대항해 시대의 시작은 대서양을 마주하고 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인 일본에 선교사가 도착한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분위기에 사비에르는 로욜라와 권고와 교황의 명령을 받고 포르투칼령 인도로 향하였고, 고아에서 8년 간 생활한 후 일본에 도착했다. 사비에르가 일본으로 향하였을 때 동행한 일본인이 있었는데 야지로라는 도망자였다. 야지로는 신흥무역상의 한 사람으로 살인죄를 짓고 국외로 도망가 말라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사비에르를 만나 감화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는 바울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동생과 부하 역시 카톨릭 교도로 개종하게 된다. 사비에르와 일본에 도착한 동행들은 규슈 지방 가고시마에서 다이묘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로부터 환대를 받는다. 그들은 가고시마에서 1년 동안 포교활동을 벌여 100~150명의 신자를 얻었다. 이후 지속적인 포교를 벌여 2년 3개월간 2000여명에 가까운 기독교인을 만들었다. 이후 급속도로 퍼져나가 전성기에는 30만 명 이상의 신도를 확보하게 된다.


노부나가와 세례 받은 다이묘


카톨릭은 일본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려는 전환기에 전해졌다. 당시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크게 세 가지로 당시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왜구, 도이키(土一撥), 신흥무사단이 그것이다. 왜구의 해외 진출을 출발로 활발한 해외무역이 촉진되었으며, 이는 포르투갈 상인을 일본으로 유입하였다. 무역을 위해 카톨릭 선교를 허용하는 실리적인 입장이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한다. 다음으로 이키가 빈번이 발생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실력을 중심으로 낮은 신분에서 세력을 장악한 무사계층이 성장하고 있었다. 일본에 기독교가 급속히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전국을 통일시키면서 생겨난 크리스찬 다이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영주가 개종하면 속민들 또한 대규모로 개종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이 큰 몫을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노부나가는 통일의 반대 세력인 불교를 약화시키기 위해 승려를 박해했는데, 불교의 대항 세력으로 기독교를 보호하고 선교사들로부터 무기, 과학 기술 등의 문물을 수입하려고 하였다. 이에 기독교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난젠지(南蠻寺) 설립, 야스토에 신학교 설립 등을 추진하였다.

(글 출처- http://toddle.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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