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산 마리노 중세 고문박물관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244084)
산마리노 성문 들어서면 바로 우측에 있는 작은 박물관으로 영화, 사진, 혹은 만화 등에서 자주 접했던 각종 고문기구들의 실제 모습이 전시되어있다. 박물관은 아주 작다. 1층 포함해서 지하1, 2층 총 3 층으로 되어 있는데 맨 지하층은 지하감옥을 재현해놓았다. 이 외 무기 박물관도 있으며 산 마리노에는 각종 무기에 대한 전시물이나 무기 상품이 많다.
중세 고문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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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감방과 해골
< 중세기 종교재판, 사진출처:Mesum Inquisition - toture@ats.it, 글 출처- www.omega.or.kr)
중세기에 교황이 제정한 종교재판으로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을 고문 처형하는 모습들
가죽벗기기 고문
대못으로 머리 관통사
두 손 뒤를 묶어 공중에 매달기
화형
참수형
한 손 매달음과 누드 고문
로마 카톨릭의 종교재판 약사 - (A Brief History of The Inquisition) (글 출처 : www.omega.or.kr)
[로마카톨릭] 로버트 존스
서 론
"역사가에게 요구되고 그리스도인에게 허용되는 모든 사항을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종교 재판을 우리 시대의 전쟁과 박해와 함께 어떤 짐승에게서도 볼 수 없는 포학성을 드러낸 인간이 기록한 가장 암울한 오점 가운데 분류하지 않을 수 없다." (윌 듀란트) 로마 카톨릭의 종교 재판은 예수 그리스도 교회 역사의 가장 큰 황폐 요인이었다. 교회 역사에서 어떤 다른 제도도 그처럼 공포스럽고 그처럼 부당하며 그처럼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은 없다. 종교 재판이 1834년에 마침내 중단되었을 때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성도들의 삶이 투옥과 재산 몰수로 인해 파멸되었다. 전체 거주자가 고향을 떠나기도 했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손상된 명성의 메아리가 지금도 울려 퍼지고 있다. 본 소책자는 "칭의(稱義)"라는 관점을 포함하여 종교재판, 방법, 희생자, 그리고 이 가장 공포스러운 조직의 600년 간의 지배의 결과를 개략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종교 재판의 기초 (역사적 기초)
이단 (그리스어 하이레시스) ― "교회에서 용인되는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이나 교리; 정통적 신념에 반대되는 것" (홀만의 성서 사전)
20세기의 미국은 교회와 국가가 극단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단이 교회의 범죄였을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범죄였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세에는 세속과 교회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는데―카톨릭 주교가 황제와 왕을 즉위시켰으며; 그렇게 즉위한 황제와 왕들이 카톨릭 교회와 그 사제의 보호자가 되었다.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신학적이든 조직의 위계에 관한 문제이든) 전체 사회, 정치, 경제, 그리고 (물론) 중세 사회의 종교적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600년간 지속된 종교 재판은 카톨릭 교회와 국가 간의 확고한 (그리고 매우 성공적인) 야합의 산물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이단자를 색출하여 박해했으며 국가는 그들을 처벌했는데, 종종 기둥에 묶어 불태웠다. 이단이 카톨릭 교회 뿐만 아니라 세속적으로도 범죄라는 생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로마는 이단을 사형에 해당하는 반역으로 간주했는데, 초기 순교자들 중 다수가 로마 황제를 일종의 신(god)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했을 때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로마의 재판관은 이단 혐의자에 대한 심문 (인퀴시티오)―이 명칭으로부터 "종교 재판(Inquisition)"이 유래됨―을 할 수 있었다.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Justinian) 대법전은 이단을 반역과 동일시하는 조문(Da haereticis)을 성문화해서, 필요시 세속 법정에서 사형의 처벌이 가능하도록 했다. 유스티니아누스도 물론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을 그들의 믿음 때문에 박해했던 초기 로마 법이 이제는 그리스도교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적용되었다. 중세 카톨릭의 종교 재판이 시작되기 전 (공식적으로 시작한 것은 기원 1227/31년이었음) 200년 동안 이단자에 대한 화형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화형은 때때로 세속 당국이나 폭동에 의해 선동되었다. 잘 알려진 중세의 이단자 화형 중의 하나로서 기원 1022년에 프랑스 왕 로베르 비오가 회개하지 않는 이단자에게 가한 것이 있었다. 폭도에 의한 것은 1028년경의 밀라노 (Milan), 1114년의 쓰와쏭 (Soissons), 1143년의 콜로뉴 (Cologne)에서 성난 폭도들이 회개하지 않는 이단자를 카톨릭 교회 감옥으로부터 끌어내어 화형시키는 사태가 일어 났었다. 이와 같이 "이단자"를 화형시키는 것은 1227/31년의 종교 재판의 시작 당시 이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184년에 카톨릭 교황 루시우스 (Lucius) 3세는 이단자에 대한 칙서를 내렸는데, 후에 종교 재판에 채택된 주요 법체계의 많은 부분의 근간이 되었다. 그와 같은 주요 법체계 중 하나는 이단자를 은닉하거나 지원한 사람은 누구나 이단자와 동일한 처벌을 받도록 한 것인데, 회개하지 않은 이단자는 세속 법정에 넘겨주고, "되돌아간" 이단자는 더욱 가혹한 처벌 (재산 몰수를 포함한)을 받도록 했다. 흥미 있는 점은 종교 재판의 두 개의 주된 목표가 40년 후에 "카타리파(Catharists)"〔와 "리용의 빈자들" (왈도파-Waldensians)〕라는 이름으로 식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단자에 대한 교황 루시우스 3세의 칙령
"최근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다양하게 싹트고 있는 이단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카톨릭 교회에게 위임된 힘을 일깨우는 동시에 황제권의 지원을 받아 거짓된 목적을 가진 이단의 오만과 후안무치를 박멸하고, 거룩한 교회에 밝게 비치는 카톨릭의 단순성의 진리를 이단의 거짓 교리의 가증스러움으로부터 순수하고 자유스럽게 발현하기 위함이다. 나아가서 특히 모든 카타리파, 빠터파 (Paterines), 그리고 자신을 "리용의 빈자들"이라고 부르는 자들, 파시파 (Passignes), 조셉파 (Josephists), 아널드파 (Arnoldists)에 대해서 영구적인 파문을 선언한다. 그리고 당해 이단을 받아들이거나 옹호하는 모든 자들과 그들에게 어떤 호의나 정신적 지지를 나타내어 위로하거나, 믿거나 완전하게 하는 등 그 명칭이 어떠하든지 이단을 강화시키는 자들, 혹은 어떤 미신적인 명칭으로든 자신을 위장하는 자들에게 동일한 처벌을 선언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범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유죄로 판명된 평신도는 그 이단을 철회하고 즉시 정통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세속 재판관의 판결에 맡겨서 그 죄질에 상응하는 타당한 처벌을 받게 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단을 철회하거나 카톨릭 주교 앞에서 조사를 받아 자신을 깨끗이 한 후에 자신이 철회한 이단으로 돌아간 자들은 어떤 심리도 하지 않고 세속 당국에 ?琯도퓔?, 그들의 재산은 카톨릭 교회가 사용하기 위해 몰수한다는 것을 선언한다." (존스, 23쪽). 위에서 언급한 칙서의 사고 중 많은 부분은 역사적으로 가장 큰 카톨릭 교회 회의 (400명의 주교, 800명의 수도원장)―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성문화되었다. 로마 카톨릭의 그 공의회는 회개하지 않은 이단자는 반드시 파문하며, 세속 당국에 넘겨서 처벌할 것을 선언했다. 처벌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재산의 몰수는 분명하게 허용되었다. 이와 같이 장래의 종교 재판에서 가장 크게 남용된 분야 중 하나인 카톨릭 교회와 세속 당국에 의한 재산 몰수가 공식적으로 성문 법전에 명시되어 종교 재판을 위한 무대가 설치되었다.
종교 재판의 신학적 근거
종교 재판의 옹호자들은 (그리고 놀랍게도 종교 재판이 1834년에 끝난 후-현재도 간접 종교재판은 계속되고 있지만- 호교 교부들도) 종교 재판을 정당화하는 성서적 신학적 근원을 지적하고 있다. 초기 종교 재판관들에 의해 가장 자주 인용된 성구는 구약의 모세 율법이다. 물론 이것은 다소 의문스러운 신학 이론으로서, 말하자면 음식물의 제한에 관한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는 1세기 이래 계속 완전히 무시해 오다가, 갑자기 (13세기에) 수천명의 사람들을 기둥에 묶어 화형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그 법을 완벽하게 합리화 시키면서 정당하다고 본 것이다. 주요 성구는 아래에 인용되어 있다 (간략하게 편집했음): (신명기 13장)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네게 말하기를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너는 돌로 쳐 죽이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 같은 악을 다시는 너희 중에서 행하지 못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참 사실로 너희 중에 있으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생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얻은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다시는 건축됨이 없을 것이니라" (출애굽기 22:18) "너는 무당(sorceress-여자 마법사)을 살려 두지 말지니라." 모세의 율법에서 발췌한 위에서 언급한 원리 중 다수는 후에 종교 재판에서 모방되었는데 그 중에는 다음의 것이 포함되었다: ?예언자와 꿈을 꾸는 자의 "제거" (잔다르크의 죽음을 가져온 혐의) ?종교 재판에서 가족 성원은 서로에 대해서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한 것 ?다른 사람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단자를 죽이는 것 ?카톨릭 믿음에서 돌아 선 마을을 심문하고 살피고 조사하기 위한 지침이 후에 종교재판관의 직무 내용 설명서가 됨 ?이단을 척결하기 위해 전체 마을을 없애는 것 종교 재판 옹호자들이 신약성경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하기는 훨씬 더 어려웠다.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 구절은 요한 복음 15장에서다: (요한 복음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종교 재판의 방법은 당대의 가장 유명한 카톨릭 신학자들의 찬사를 받았는데, 성 토마스 아퀴나스 (기원 1225?∼1274)의 방대한 신학적 저술 신학 대전 (Summa Thelogica)의 다음과 같은 대경실색하게 하는 구절이 알려주는 바가 그러하다. 도미니크회(Dominican) 수도 신부였던 아퀴나스는 일반적으로 4/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가장 영향력있는 카톨릭 신학자로 여겨지는데 그는 이단의 박멸을 언급하고 있다. P(2b)-Q(11)-A(8)..."화폐 위조자와 기타 행악자들이 세속 당국에 의해 즉시 사형의 형벌을 받는다면, 이단자에게는 더욱더 그렇게 할 이유가 있는데, 그들이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자마자 파문을 시키는 동시에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쪽에서는 이단에 빠진 사람의 회개를 바라는 자비 때문에 당장 처벌하지는 않지만 사도가 지시하는 것처럼 "일 이차 권고 후에" 아직도 그가 고집을 부린다면 카톨릭 교회는 더 이상 그의 회개를 바랄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를 파문하고 카톨릭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며, 사형을 시켜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 세속 법정에 인도한다...아리우스 (Arius)는 알랙산드리아에서 하나의 불꽃에 불과했으나 그 불꽃은 금방 꺼지지 않고, 전 지구가 그 불꽃에 의해 소모되었다." (신학 대전-3권-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제2부(제1부) 중의 제 2부, 150쪽). 종교 재판의 재판관은 그들의 대의의 정당성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재판에 임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20세기 후반의 그리스도인의 눈에 그 대의명분은 너무나 혐오스러운 것이다. 역사가들은 흔히 종교 재판에 관한 연구를 두 개의 중요 부분으로 나누는데 교황권에 의한 중세의 (혹은 교황의) 종교 재판과 카톨릭 교회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나 주로 스페인 세속 정부의 도구였던 스페인의 종교 재판으로 나눈다. 편의를 위해 우리도 이와 같은 관례를 따르기로 한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황의 종교 재판
13세기까지는 성지의 영원한 십자군 왕국의 꿈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교황 이노센트(Innocent) 3세는 십자군에 대한 열의를 동료 카톨릭 그리스도인에게로 돌렸다. 1202년에 제4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됐으며 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그 다음 1209년에 이노센트 3세는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 지역)의 카타리파 (다음 소제목 참조)에 대해 십자군을 보냈다. 역사에 알비장스 십자군으로 알려진 이 유혈 원정은 제1차 종교 재판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알비장스 십자군은 (그렇게 명명된 이유는 프랑스의 도시 알비가 카타리파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1209년부터 1229년까지 20년간 지속되었다. 교?꼬? 의해서 공식적으로 허가되긴 했지만 실제적인 전쟁은 주로 세속 군대에 의해, 특히 시몽드몽포르(Simon de Montfort)의 지휘 하에 수행되었다. 카타리파 이단의 억압은 자신의 양 떼를 대하는데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난폭해진 새로운 원형을 만?榕駭?. 가장 유명한 사례는 1209년 7월 22일 베제 (Beziers)가 약탈 당했을 때인데 20,000명이 넘는 남녀 및 어린이가 십자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교황의 특사 아르노 (Arnaud)가 그 공격 중에 카톨릭 교인은 살려 두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모두 죽이세요,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을 아시니까요"라고 한 말 때문에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 화염을 일으킬 것이다. "모두 죽이세요,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을 아시니까요"―교황 특사 아르노가 1209년의 베제 공격 중에 카톨릭 교인은 살려 두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성경대로 믿는 카타리파의 집단 화형이 십자군 원정 중에 자행되어 1211년에 라보르 (Lavaur)가 함락되었을 때 400명의 성도들이 화형되었고, 같은 해에 카세 (Casses)가 함락되었을 때는 94명이 화형되었다. 이것은 교황 그레고리 9세가 1227/31년에 교황의 종교 재판을 설립한 배경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알비장스 십자군이 대부분의 카타리파 그리스도인 요새를 휩쓸었지만 아직도 잡아서 화형시켜야 할 이단자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의 다수는 십자군 원정시 도피했던 사람들이었다. 십자군 원정 후의 화형에 의한 카타리파 살육의 예는 1239년에 몽비메르 (마르네)에서 183명, 그리고 1244년에 몽세귀르 (Montsegur) 산성에서 카타리파의 완전한 사람들 (페르펙티, perfecti) 215명이다 (때때로 몽세귀르의 학살이라고도 언급된다) 종교 재판의 최초의 목표가 카타리파이긴 했지만 (여러 해 동안 사실이 그러했는데 "카타리(정결하다)"라는 말은 "이단"의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였다), 교황의 종교 재판 범위는 결국 카타리파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오래 계속되었다. 마침내 종교 재판의 희생자에는 왈도파, 프라티첼리파(Fraticelli)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분리 집단), 성전 기사단(십자군의 잔당들), 그리고 (아주 뒤에는) 프로테스탄트가 포함되게 되었다. 1233년까지는 도미니크 수도회 (1217년에 성 도미니크에 의해 창설된 수도회)에 종교 재판관으로 활동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으며, 그 뒤를 곧 이어 프란체스코 수도회 (1209/10년에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에 의해 창설됨)가 합세했다. 흥미롭게도 교황의 종교 재판의 처음 100년은 수도승 신부 집단 간의 싸움이었다. 이와 같은 집단 구성원 중 다수는 구걸 수도승이라고 언급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기본적인 필수품을 구걸로 충당했기 때문이다. 12/13세기까지 로마 카톨릭 사제들 중 다수가 상당히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수도원 생활이 포함되었다. 이 기간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사도들이 세운 모범―교회는 재산이 없어야 한다는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 여러 집단이 일어났다. 나아가서 교직자는 세속적인 재산을 포기하고 복음을 전파하러 사람들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수도승과 기성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논쟁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지은 장미의 이름 (The Name of the Rose) (과 그에 근거한 영화)에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 왜 어떤 수도승 신부 집단들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같은)은 교회의 환영을 받고 (그래서 실제 초기 종교 재판관이 되고) 다른 참된 그리스도인 집단들 (왈도파, 카타리파, 프라티첼리파)은 붙잡혀서 화형되었는지를 단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대답은 오히려 명확한데 전자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복종했고 후자는 궁극적으로 교황과 교직자의 권위를 배척했기 때문이다. 1227/31년에 교황의 종교 재판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지역 주교신부들이 지방의 로마 카톨릭 교회 재판소에서 이단을 심문하고 재판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종교 재판을 유별나게 만든 것은 종교 재판관들이 신학적으로 교황에게만 책임을 졌다는 것―지역 주교나 심지어 교파의 수장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음―이다. 이와 같은 자율권은 종교 재판이 독립된 재판소로 활동하여 지역의 세속 및 로마 카톨릭 교회 당국의 방해 없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사람에 대한 재판을 어디서든지 할 수 있게 했다. (종교 재판의 자율성을 침해하려는 사람들이 이단자로 낙인 찍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어지는 600년간(!) 지상의 여러 곳에서 지속된 종교 재판의 횡포로부터 피난하는 열차가 출발을 하게 되었다.
중세 종교 재판의 목표 (카타리파(The Catharists) 그리스도인들)
교황의 종교 재판의 (그리고 이어진 알비장스 십자군의) 초기 목표는 카타리파로 알려진 사람들의 집단이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정결한"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카타로이 (kathoroi)에서 유래했다. 카타리파는 랑그도크로 알려진 프랑스 남부 지역에 특히 많이 퍼져 있었는데 그들은 불가리 (발칸의 지방으로부터) 및 알비장스 (프랑스의 도시 알비로부터)로도 알려져 있었다. 종교 재판의 대상 중에서 다소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카타리파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받아들인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 및 교리"를 가졌다는 의미에서 그들에게는 진짜 "이단"이였다는 사실이다. 카타리파의 주요 성례는 콘솔라멘툼 (consolamentum) 혹은 위안이라고 하는 안수였다. 일단 카타리파가 이 성례를 받으면 금욕과 독신의 생활을 할 것이 기대되었으며,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엄격한 요구 조건 때문에 성례는 종종 임종시에 행해졌다. 콘솔라멘툼을 받기 전의 가타리파 신봉자들은 크레덴테스 (credentes) 혹은 "믿는 자"로 알려졌다. 성례를 받으면 완전한 사람들이 된다. 완전한 사람들 즉 카타리파 교회의 지도자들은 초기 교황 종교 재판의 주된 대상이었다. 카타리파는 어떤 커다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성배 즉 최후의 만찬 잔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타리파는 모든 의도와 목적이 14세기 초까지 (1463년에 터키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카타리파가 지속된 보스니아를 제외하고는) 무자비한 십자군과 가차없는 종교 재판의 희생물로서 소멸되었다.
왈도파(The Waldensians) 그리스도인들
왈도파는 리용의 부유한 상인 삐에르 왈도 (혹은 발데르)에 의해 창설되었다고 한다. 1173년경에 왈도는 그의 전 재산을 팔고 거지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이와 같은 행동의 신학적 근거는 마가복음 10:21인 것처럼 보인다.(왈덴시스는 골짜기파라는 밸리(valley)에서 유래하였다는 학설도 있다-역자주) (마가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느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때가 되자 다른 사람들도 삐에르 왈도의 금욕적이며 영적인 생활 방식에 이끌리게 되어, "리용의 빈자들"이 결성되었다. 삐에르 왈도가 몇 가지 방언 (프랑스의 프로방스어)으로 성서를 번역하도록 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왈도는 이 성경들을 주의 깊이 연구해서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 사용했다. 처음에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상당히 정통적인 신학 이론을 유지했지만, 리용의 대주교에 의해 복음 전파 허락이 거절되었을 때 카톨릭 교회로부터 탈퇴했다. 1184년에 교황 루시우스 3세는 "리용의 빈자들"을 파문했다. 때가 되어 왈도의 추종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교리들 중 다수를 배척했는데, 그 중에는 사제직, 면상(免償), 연옥, 성변화, 그리고 성인에 대한 기도가 포함되었다. 다수의 왈도파 그리스도인들은 보헤미아의 개혁자 존 허스 (John Hus) (1415년에 화형되었다)의 추종자가 되었다. 1532년에 왈도파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죤 칼빈(John Calvin)의 친구인 윌리엄 파렐 (William Farel)이 그 교류의 도구가 되었다. 수백 년 동안 종교 재판과 세속 당국에 의해 색출되어 살육을 당한 왈도파 만큼 오랫동안 그리고 끔찍하게 박해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은 없다. 왈도파에 대한 가장 악명 높은 박해는 "피드먼트 이스터 (Piedmont Easter)"로서 프랑스 군인들이 1,712명의 왈도파 그리스도인들 남녀와 어린이를 학살했다. 종교 재판의 목표가 된 다른 중세의 집단들과는 달리 그들은 파문된지 800년이 지난 오늘날도 여전히 세계 도처에 재침례교도로서 존재한다.
신전 기사단(The Knights Templar) 카톨릭 십자군 후예들(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정치조직)
신전 기사단은 아마 교황의 종교 재판의 가장 잘 알려진 희생자이며, 종교 재판이 사적 정치적 이득을 위해 어떻게 조종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신전 기사단은 기원 1190년에 성지 순례 여행 길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여러 번 이와 같은 전사 수도승들은 십자군의 주요 인물 (한 자료는 20,000명 이상의 신전 기사단이 십자군에서 살해되었다고 추산한다)이 되었다. 신전 기사단이 교황에게만 책임을 지고 지방 교회 당국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았던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때가 되자 신전 기사단은 지역 사무소 (신전이라고 부름)를 서구 그리스도교국 전체에 걸쳐 설치했다. 언제나 혁신적인 신전 기사단은 최초의 유럽 은행 체계라고 생각되는 것을 발족시켰는데, 그들의 몰락을 가져 온 것도 은행가로서의 그들의 관련성 때문이었다. 1300년대 초에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파리 신전 조직에 큰 빚을 지게 되었다. 1307년에 그는 그 기사단에 이단 혐의를 씌웠다. 신전 기사단에 불리하게 작용한 혐의에는 신전 기사단 지원자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 신전 기사단이 바호멧(Baphomet)이라는 이름의 신비에 싸인 우두머리를 숭배한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혐의는 종교 재판이라는 도구를 통해 고문을 가하여 얻어낸 자백이다. 프랑스의 종교 재판은 신전 기사단에게 공식적으로 혐의를 씌웠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앞에서 기술했듯이 신전 기사단이 지역 카톨릭 교회 당국의 관할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1312년의 비엔느 (Vienne) 종교 회의는 공식적으로 기사단을 해체하고 그들의 재산의 대부분을 유사 단체인 호스피털 기사단에에 주었다. 중세의 신전 기사단 역사의 마지막 사건은 1314년에 발생했는데, 그 때 기사단의 우두머리 쟈크 드 모레이 (Jacques de Molay)가 그의 이전의 자백을 철회한 후 산체로 화형되었다. 중세의 신전 기사단이 해체된 후 프랑스 왕은 기사단에게 진 모든 빚을 탕감 받고 아울러 그들의 금전적 부의 상당 부분도 취하게 되었다.(오늘날 유럽을 비롯 미국의 중요정치인들은 신전기사단이란 비밀 결사 회원으로 바티칸을 위해 일하고 있다 - 역자주)
잔다르크 (Joan of Arc 1412∼1431)
종교 재판의 가장 잘 알려진 희생자는 아마도 "오를레앙의 소녀" 잔다르크다. 잔다르크는 1412년에 프랑스의 동레미에서 태어났다. 13세 이후 줄곧 그녀는 일련의 환상을 천사장 미가엘과 성 캐서린 및 마가렛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1429년에 프랑스를 영국으로부터 해방시키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믿고 황태자 샤를 7세를 만나기 위해 적진을 통과하여 480㎞를 말을 타고 들어갔다. 마침내 샤를은 그녀의 힘이 진짜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군대를 그녀에게 맡겼다. 1429년에 잔다르크는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포위된 도시 오를레앙을 구하는 가장 큰 승리를 얻었다.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후 잔다르크는 영국을 몇 번의 전투에서 물리침으로써 몇 개의 프랑스 도시들을 해방시켰다. 1430년에 파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공격 중에 잔다르크는 브루고뉴파 (Burgundians)에게 사로잡혀 영국에 넘겨졌다. 그녀는 프랑스의 종교 재판에 의해 마술과 이단으로 재판을 받고 1431년에 화형되었다. 1456년에 종교 재판의 판결 결과가 교황 칼릭투스 (Calixtus) 3세에 의해 번복되었는데, 이와 같은 교황에 의한 종교 재판의 무효화는 드문 사례였다. 교황 베네딕트 (Benedict) 15세는 1920년에 잔다르크를 시성(諡聖)했다.
존 허스 (John Hus, 1369경∼1415)
존 허스 (John Hus)는 1369년경에 보헤미아의 후시넥 (Husinec)에서 태어나서 로마 카톨릭 사제로 서임되었으나 곧 그의 신학적 견해 때문에 카톨릭 교회 당국과 문제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의 견해 중 다수는 100년 후 프로테스탄트 개신교회에 의해 반향되었다. (조각은 와일리 작임) 허스의 신념에는 연옥의 존재에 대한 의문, 성변화에 대한 의문, 고백의 배척이 포함되었다. 허스는 교회를 하늘과 지상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전체로 정의했으며 (칼빈과 비슷함),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믿었다. 그를 따른 루터처럼 그는 성경이 최종적인 영적 권위라고 믿었다. 허스는 결국 콘스탄스 (Constance) 종교 회의 (종교 재판의 법정 역할을 함)에 의해 이단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1415년에 콘스탄스시에서 화형되었다. 그가 설립한 모라비안 (Moravian) 그리스도인 교회는 살아 남아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모라비안 교회는 브라데린 교회의 시초였고 오늘날의 형제교회 창시자 존 다비와는 다르다. - 역자주)
프라티첼리파 (The Fraticelli)
청빈한 사람들로도 알려진 프라티첼리파는 카톨릭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분리 집단이다. 그들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완전성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재산이 없었다는 그들의 주장 때문에 이단으로 고발되었다. 프라티첼리파에 대한 첫 번째 종교 재판은 1318년 마르세이유에서 4명이 화형됨으로써 일어났다. 그들은 1426년에 종교 재판 당국이 세속 당국의 지원을 받아 그들에게 동정적이라고 알려진 31개 마을을 황폐시킴으로써 완전히 일소되었다.
교황의 종교 재판의 재판관(The Inquisitors)
종교 재판관들은 탁발 수도승들로서, 특히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종교 재판의 법정을 맡았다. 그 두 수도회 설립자인 도미니크 구즈만 (Dominic Guzman)과 아시시의 프란시스 (Francis)가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도미니크 수도회(The Dominicans)
소위 성 도미니크는 1170년에 카스티야 (Castile)의 칼라메가 (Calamega)의 도밍고 데 구즈만 (Domingo de Guzman)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침내 아우구스티누스 카톨릭 수도회 회원이 되었고 빈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도미니크는 그리스도인 이단을 로마 카톨릭의 우리 안으로 되돌아 오게 하는 길은 "열정적인 전파와 사도적 겸손, 엄격함, 거룩함에 의해서라고 믿었다" (듀란트, 믿음의 시대, 803쪽) 역사적 운명의 그와 같은 이상한 왜곡으로 도미니크는 1205년에 프랑스의 랑그도크 지역에서 전파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동일 지역의 카타리파에 대해 알비장스 십자군 종교재판이 시작되기 4년전이었다. 1217년에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열정적인 전파를 통해 이단을 개종시키려는 도미니크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 검은 수사들 (왜냐하면 그들이 흰옷과 검은 케이프를 입었기 때문이다) 및 "주님의 개들" (Domini canes) 로도 알려진 "전파자의 집단" 창설 허가를 했다. 후에 그들은 주로 도미니크 수도회로 알려졌다. 1221년에 도미니크가 죽을 당시 60 개의 도미니크회 수도원이 있었으며, 1327년까지는 300개 이상이 되었다. 1233년에 종교 재판의 법정 운영 임명이 도미니크 수도회에 주어졌는데, 그들은 그 임명을 이어지는 수 백년 동안 엄청난 포학성과 효율성을 가지고 수행했다. 그러면 성 도미니크 (1233년에 시성됨)가 첫 번째의 종교 재판관으로 고려되어야 하는가? 1960년대의 발랄한 히트 곡인 도미니크 (Dominique)가 작곡된 대상 인물인 그 남자가 종교 재판의 발족자가 될 수 있는가? 도미니크는 교황이 도미니크 수도회를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하기 100년 이상 전에 사망했다. 그리고 도미니크가 이단을 화형시키는데 관여했다는 어떤 기록도 없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후에 그를 이단의 박해자 (Persecutor haereticorum)로 언급했다. 어떻든 도미니크는 후에 교황과 스페인 종교 재판의 토대를 형성한 집단을 설립한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다.
프란체스코 수도회(The Franciscans)
종교 재판 법정의 중추를 형성한 두 번째의 탁발 수도승 신부 집단은 프란체스코 카톨릭 수도회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인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1181-1226)에 의해 설립되었다. 1206년에 프란시스는 그의 부를 포기하고 빈자의 생활과 빈자에게 봉사하는 생활을 받아들였다. 그는 1209/10년에 프란체스코 수도를 설립했다. 프란시스의 내력은 삐에르 왈도의 내력과 비슷한데, 왜 한 사람은 시성되고 (프란시스, 1228년) 한 사람은 파문 (왈도, 1184년)되었는가? 탁발 수도승의 생활을 선택하긴 했으나 프란시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언제나 받아들였다. 프란시스는 교황 그레고리 9세가 그 수도회를 종교 재판관으로 봉사하도록 밀어 붙이기 몇 년 전인 1226년에 사망했다.
교황의 종교 재판의 다른 유명한 종교 재판관
?버나드 귀 (Bernard Gui) - 버나드 귀는 1324년까지 17년간 툴루즈에서 카톨릭 종교 재판관으로 일했다. 그는 흔히 프랑스의 카타리파 남은 자들을 일소한 공적을 인정받고 있다. 그가 종교 재판관으로 일하는 동안 930명의 그리스도인 이단자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고 45명을 사형시켰다 (듀란트). 그는 1323년경에 종교 재판관 편람〔프락티카 인퀴지티오니스 하에레티카에 프라비타티스 (Practica inquisitionis haereticae pravitatis)〕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편람에서 그는 가장 악랄한 이단에 카타리파, 왈도파, 베그하르트파 (Beghards), 유태인, 마녀, 그리고 천리안을 가진 자를 포함시켰다. 버나드 귀의 다소 가공된 공적은 움베르토 에코가 지은 훌륭한 책 (및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다. ?도미니크회의 로베르로서 불가르의 로베르 - 로베르는 카타리파에서 카톨릭으로 개종자였으며 1233년경에 프랑스 북동부의 종교 재판관으로 일했다. 그는 비밀 재판 대신에 이단과 공개적으로 대치하기를 선호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1239년에 몽트아이메 (Mont-Aime)에서 183명의 카타리파를 유죄 판결하여 모두 화형시켰다. 그는 마지막에 교황에 의해 직위를 박탈당하고 도미니크 수도회에 의해 투옥되었다. ?마르부르크의 콘라드 (독일) - 마르부르크의 콘라드는 1227년에 시작된 독일 종교 재판 관의 우두머리였다. 일반적으로 정신 이상자로 간주되는 그는 이단자를 검거하기 위해 폭 도를 부추겼다. 그는 독일에 대규모로 조직된 마귀 숭배자들이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마귀가 고양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믿어서 - 불쌍한 고양이를 마법사의 영원한 도구로 보았다. 그는 결국 강력한 귀족을 이단으로 혐의를 씌운 후에 사직을 하지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희생시킨 사람의 친구가 1233년에 그를 살해했다. ?베로나의 페테르 (Peter)는 이탈리아에서 종교 재판을 시작한 도미니크 카톨릭 수도승이었다. 그는 1245년에 카타리파와 가두 전쟁을 하기 위해 종교 단체 (라 콤파그니아 델라 피데)를 설립했다. 그는 1252년에 밀라노에서 암살되었으며 1년 뒤 성 페테르 마르티르로 시성되었다.
재개된 교황의 종교 재판(제수이트 예수회에의해)
15세기 말엽에 원래의 교황의 종교 재판 (카타리파를 박멸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기억하라)은 상당히 진척되었다 (화형시킬 더 이상의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종교 재판의 불길은 16세기 중엽에 새로운 연료를 얻게 되었는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새로운 적으로 인식된 프로테스탄트와 싸우기 위해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설립한 예수회에 의하여 재개되었다. 1540년대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유럽 전체에 걸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영향 때문에 동요하고 있었다. 한 때는 교황이 전체 서구 유럽제국을 지배했으나, 1540년까지는 전체 나라들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 즉 카톨릭이 말하는 프로테스탄트 찬탈자들에게 빼앗겼으며, 여기에는 영국 (헨리 8세), 독일 (루터) 그리고 스위스 (칼빈)가 포함되었다. 프랑스 역시 증가하는 칼빈개혁주의 사회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함에 따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것은) 프로테스탄트 개혁 주의는 심지어 이탈리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파손의 물결을 저지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 채택된 일련의 방법은 전체적으로 반종교 개혁으로 알려져 있다. 반종교 개혁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구하기 위한 시도에서 몇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그 중 하나는 전체 종교 회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는데,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가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려서 여러 가지 개혁을 시행하고 카톨릭 신앙을 고쳤다. 다른 방법으로는 호전적인 새로운 종교 집단 (예수회-The Jesuits)을 설립한 것과 프로테스탄트 요새와의 전쟁 (독일의 30년 전쟁)을 개시한 것이 포함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도구인 종교 재판이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예수회는 트렌트 공의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계 정부를 추진하고 있다 - 역자주) 1542년 6월 21일 교황 바오로 3세는 "종교 재판 의회" 혹은 "성성(聖省)" (상크툼 오피시움)으로서 교황의 종교 재판을 (리세트 아브 이니티오 칙서로) 재개했다. 교황은 종교 재판을 시행하도록 위원회를 임명하고 추기경 지오반니 카라파 (Giovanni Caraffa)를 최고 재판장으로 삼았다. 카라파는 다음과 같은 그의 성명으로서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아무도 칼빈주의는 물론 어떤 종류의 이단에 대해서도 관용을 보임으로써 스스로를 더렵혀서는 안 된다."―추기경 카라파 (후에 바오로 4세), 1542년 1555년에 그 종교 재판의 최고 재판장은 교황 바오로 4세가 되었다. 바오로 4세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종교 재판의 힘을 증가시켰다. 1559년에 그는 금서 색인 (인덱스 아우크토레움 ?p 리브로룸 프로히비토룸)을 처음으로 출판했다. 마침내 칼뱅, 쯔빙글리 (Zwingli), 루터 등 모든 주요 개혁자의 저술이 그 목록에 등장하게 되었다. 바오로 4세는 다음과 같은 어리둥절하게 하는 정서를 지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심지어 내 아버지가 이단이더라도, 나는 그를 화형시킬 나무를 모을 것이다." 1559년에 바오로 4세가 죽은 후 유럽은 몇 년간 종교 재판이 잠시 멈추게 되었다. 재판장 미셀 기슬리에리 (Michele Ghislieri) (바오로 4세에 의해 임명됨)는 교황 비오 5세 (1566∼1572)―종교 재판의 최고 재판장이 교황이 된지 10여년 후에 두 번째로 (1585년에, 이전의 종교 재판관이 다시 교황 식스투스 5세가 되었다)―교황이 되었다. 비오 5세 하에 고문이 다시 종교 재판의 일상 무기가 되었다. 1566년 6월 23일 비오 5세는 대중의 아우토 다 페스 ("믿음의 행위")가 된 여러 개 중 첫 번째 것을 로마 내에서 조직하였는데 참수와 화형이 일상사가 되었다. 재개된 교황의 종교 재판은 특히 이탈리아에서 성공적이 되어 거의 모든 초기 프로텐스탄트 주의의 자취가 16세 말까지는 일소되었다. 하지만 재개된 교황의 종교 재판의 가장 유명한 희생자는 17세기에 나타나는데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33년 2월에 종교 재판소로 행성의 운동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견해 (즉,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를 지지하는 우주의 위대한 체계 (The Great Systems of the Universe)를 출판한 혐의로 소환되었다. 불행하게도 갈릴레오는 1616년에 추기경 벨라미네 (Bellamine)로부터 지구가 도는지 어떤지에 관한 논쟁에 관여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었다. 이렇게 되어 그가 1633년에 종교 재판정에 섰을 때 상습범으로 판결이 나서 종신 투옥형을 받게 되었다. 그 판결은 나중에 교황에 의해 가택 연금으로 완화되었다. 그에 앞선 잔다르크처럼 갈릴레오에 대한 종교 재판의 혐의와 판결은 결국 번복되었으나 너무 늦은 1992년 10월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면 교황의 종교 재판은 언제 공식적으로 끝이 났는가? 성성의 의회는 1962/65년 제2 바티칸 공의회 중에 신앙 교리 위원회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Faith)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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