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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순교기념비(1)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09. 5. 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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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강은영 목사  (감리교)

 

강은영 목사(1905-1950)


강은영은 1905년 음력으로 2월 30일 전라북도 정읍군 신태인읍 구사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읽다가 전주 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 성서학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 2학년 때 부터 원효로에 교회를 개척 성공적인 목회에 돌입했다. 그의 힘있는 설교는 성령의 은혜가 넘치고 이웃교회에서 부흥회 인도를 부탁할 정도로 학생부흥사이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개척한 교회를 후배목사에게 일임하고 해주로 내려가 해주제일교회 조사로 시무하다가 1941년 평양신학교에 편입했으나 김인준교장 등 교수 전원이 신사참배 거부로 페교조치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는 해주제일교회를 떠나 평안남도 강서로 내려가 대안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장로교가 아닌 감리교 서부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신암리교회, 신덕교회, 온정리교회, 삼화읍교회를 전전하며 목회를 했다. 그가 여러교회를 전전한 이유는 신사참배강요에 있었다. 신사참배에 타협처인 감리교회의 태도와는 달리 강은영목사는 교단의 허락한 문제였지만 십계명에서 지시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강은영목사는 일제하에서 경찰서 유치장을 여러차례 들락거리다가 해방을 맞았으나 기독교도연맹의 음모로 공산당 내무서원에 의해 철저하게 협박당했다."동무 그렇게 독불장군처럼 까불다가는 어느 귀신이 잡아갈지 한번 생각해 보았소?" "어느 귀신은 어느 귀신이겠소 예수귀신이겠지 오히려 나는 그 귀신에 사로잡히기를 바라는 바요." 그가 신암리교회 목회할 때 장터에가서 사과상자를 연단으로 하고 복음을 증거했다. 그는 앉으면 기도 서면 전도한다는 목표가 생활화 되었다. 새벽기도는 3시부터 교회 강단에 나가 먼동이 트는 7시까지 되어서야 일어났고 평일 낮에는 산기도에 올라가 깊은 기도에 잠기기도 했다. 강목사는 해방 후 전국을 돌아치며 부흥회를 인도했고 부흥회에는 젊은 청년들이 많이 몰려와 회심하는 특징을 나타냈다. 해박한 한문지식과 위트와 유모어가 넘치는 달변때문에 많은 젊은 청년들이 몰려와 회심을 하는 것이었다. 글씨도 미문이어서 부흥회하는 교회에 족자를 남기기도 했고 교회 간판이 시원치 않으면 송판을 구해다가 친히 써서 달아주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인간미를 보여주었다. 그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삼화읍교회에 시무시에 1949년 새벽송 도는 청년들을 안면방해로 구금시켰을 때에 내무서장을 찾아가서 내무서장을 쏘아보며 비수같은 항의를 쏟아놓았다. "진리의 탄생을 축하하는 사람을 잡아 가둔다면 이 땅 위에는 비진리의 어둠의 세력만 판치라는 소립니까? 하나님의 무서운 징치가 있을 것이라" 항의했다. 강목사의 눈에서는 불이 펄펄 일고 있었고 그의 항의가 주효했던지 모두 풀려나와 크리스마스 예배를 은혜롭게 보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강목사에 대한 감시는 이때부터 본격화 되어 내무서원이 주택에 상주했다. 성도들 집에 피해 있으라는 교인들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일이나 수요일이면 교회에 나타나 예배를 인도했다. 1950년 6월 24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나오는 강목사를 두사람의 내무서원이 팔을 끼어 끌려가 용문동 굴속에 몰아넣고 강제 노역에 처했다. 4개월간 소식 한자 없던 강목사가 8월 14일에 정치보위부 한교선과 사택에 나타나 "여보 때가 되었오 겨울 내복을 주시요" 하고 부억에 따라 들어가 배가 고프다고 하며 사모에게 밥한 그릇을 차려먹고 "여보 갱도안은 너무 추우니 오바를 주시오"하고 겨울 오바를 꺼내다 주는 아내를 애잔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한교선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의 북진이 계속되고 사화읍이 국군통치하에 들었을때 한교선이 잡혔다. 그는 피모르 장거리 숲속에 죽여 매장한 것을 실토했다. 당시 강은영 목사를 위시하여 장로교목사 등 탄부감리교회 남전도사 등 14명이 순교했다. 교회는 이들을 모두 교회 과수원에 가매장을 했다. 후예로는 사모 윤성란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강신일목사와 강신평목사가 그들이다. (이하 글 출처- http://kcmma.org/)

 

순교자 강종근 목사 (감리교)

 

강종근 목사 (1904.9.26-1942.6.3)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태어났다. 1910년 부모의 신앙을 따라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으며 1925년 배재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윤희성과 결혼하였다. 1933년 4월 중부연회에 허입한 후 첫 목회지로 경성지방의 창동교회에 파송 받아 목회하였고, 1935년에 창동교회가 동부연회로 편입됨에 따라 그의 소속도 동부연회로 옮겨지게 되었다. 1937년에는 철원지방 연천교회를 이듬해인 1938년에는 창도교회를 그리고 1939년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정회원에 허입한 후 철원지방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한 그는 열심히 봉직하였고 그로 인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매 교인은 물론 일반 불신자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따라서 일본 경찰은 교회 행사에 일일이 간섭하고 방해하며 강종근 목사를 호출하여 방해하곤 하였다. 1940년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은 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받은 고문으로 신병이 약해지자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아내 윤희성 사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주를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가 1942년 6월 3일 이었다.  윤희성 여사는 아현동에 신성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장로로서 충성을 다해 교회를 섬겼다.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 한국에 남아있는 가족이 없었던 고 강 목사는 지난 8년간 강 목사의 제자이자 장남 서웅 씨의 친구인 이창건 박사의 노력 끝에 2003년 8월 15일 뒤늦게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그리고 2006.11. 국립대전현충원에 유해를 안장하는 예식이 거행됐다. 예식을 치룬 뒤 이 박사는 “오늘 뜻 깊은 자리까지 오게 돼 감격스럽다”며 “고 강종근 목사를 위해 감리교회 모두가 기도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순교자 강준의 목사 (장로교)

 

순교자 강준의 목사(1893- 1950)


강준의목사(백낙준박사와 동창)는 1893년 6월 26일 평북 선천에서 9남매중 4남으로 태어났다. 신성중학교 보성전문을 졸업한 후 평양신학교 1924년 제17회로 졸업하고 장로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지적하고 시정해야 마음이 풀리는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이면서도 사랑이 넘치는 부드럽고 인자한 그의 모습앞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마련이었다. 그분의 불같고 뜨거운 정렬은 일제당시 독립운동과 관련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서게 했으며 이것 때문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1926년 문맹퇴치 운동을 통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영명학원(보통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15년간 봉사하였고 기독교 실업인들의 많은 후원을 받으며 교육에 힘썼다. 수업에 앞서 모든 학생과 함께 애국가를 불렀기 때문에 일본 경찰에 의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수난을 겪어야 했고 1939년 강목사가 출타한 틈을 타서 일경의 사주를 받은 비류들에 의해 영명학원은 불타버렸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하여 중국에 지하교회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1940년에 노량진 흑석동에 조선기독교장로교회를 개척하고 1944년 신사참배 반대로 교회를 사임하고 강원도 영월 마차리 탄광촌 골짜기로 가서 노동자로 들어가 같이 일하며 복음을 전하고 마차리 교회를 개척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로 복귀하여 3백만 부흥운동에 손양원목사와도 손을 잡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말씀대로 자신의 일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 아내도 자녀도 심지어 목숨까지도 복음을 위하여 배설물처럼 여겼다. 6.25동란중에도 쉬지않고 복음사역에 앞장서 활약하던 중 공산당에게 수난을 받게 되었으며 6.25사변 당시 신임하던 장로의 아들이 자신의 부친과 강목사를 밀고하여 강경으로 체포 부여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다가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몸이 결박된채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1950년 9월 20일 장남 강태문(하바드 신학대학 졸업반)에 의하여 시신이 모시밭에서 발견되었을때에 손과 발목이 잘려 있었다. 충남 논산군 광석면 서울에서 1시간 가량 가면 이사리 신촌동 비석도 없이 풀만 무성한 묘지를 만나게 된다. 살아생전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그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토레이 박사의 "완전한 사람" 이란 말이 생각난다. 우리 하나님은 피의 소리를 들으시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순교한 순교자들의 피가 오늘날 발전된 한국교회의 터전의 역할을 하였 음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한다.

 

순교자 기주복 목사 (장로교)

 

기주복 목사(1897-1950)


“김구와 이승만의 卒徒(졸도) 기주복을 타도하자” 시뻘건 글씨로 플랭카드를 만들어 든 젊은 공산당원들이 곡산읍교회 사택 앞으로 몰려와 소리를 질렀다. 1946년 11월 8일 새벽 2시 온 식구들은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몰려 잠이 깨었다. 그때 젊은 공산당들은 손에 망치와 삽 괭이를 들고 있었다. 얼마만큼 구호를 외치다 이제는 대문이며 방문을 짓부수고 광기어린 몸짓으로 집안을 부수고 수라장으로 만든 후 기주복목사를 잡아갔다. 기목사는 “11월 3일 선거 안한 것은 주일이기 때문이요 보시오 이게 민족해방을 외치는 붉은 당원들의 모습이란 말이요 ----” 기목사는 1897년 10월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대정리 두대동 뒤주터에서 기형달 영수와  정영애 여사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주일날 낳기 때문에 주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졸업반 때인 1919년 2월 서울에서 올라온 민족대표들이 3월 1일 만세운동을 부르기 위해 태극기제작 독립선언서 복사등 준비를 시켰다. 기주복은 황해도 수안의 만세운동을 책임지고 고향으로 파견되어 구두 밑창에 독립선언서를 깔고 다시 못질을 해서 신었다. 고향에 와 아버지 기영수와  교회대표들과 상의하고 동리의 뜻을 같이할 동지들과 협의했다. 그들의 결의는 대단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첩보 제공자에 의해서 주동자인 기영수의 집은 경찰에 포위되고 기주복은 그 어머니가 쌀독밑에 넣고 쌀로 덮어놓아 발각되지 않았고 기주복 부친 기영수는  잡혀가고 기주복은 동생과 함께 간도로 갔다. 이듬해 동생이 돌림병으로 죽자 어머니의 간청으로 귀국해서 숭실중학교 선생으로 일했다. 교육위원회에 자격상신을 했고 저녁에 집에와서 식사를 할 때 일경이 들어닥쳐 그에게 쇠고랑을 채웠다. 죄목은 수안면 3.1운동 주모자 평양감옥에서 2년형기를 치루었다. 형기를 마친 후 곡산학원 교사로 봉직했다가 부름을 받아 평신에 입학했고 1932년 제27회 절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천곡대정리 교회를 시무하다가 봉산군 사인면 계동교회로 옮겨 시무하였다. 계동교회 기목사 주관으로 강병석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5개교회가 야유회로 정방산 대성사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대성사 안에 일본 천황의 영정을 보고도 고개한번 끄떠김 없이 지나친 강병석 목사의 일로 주지승과 다투다가 기목사가 책임지기로 했는데 몇일 후 황주경찰서에서 기목사를 연행해 천황불경죄로 해주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해방후 목회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946년 11월 3일 주일 선거를 안했다는 이유로 반동분자가 되었고 감시대상이 되었다. 타도 주기복을 외친 것도 이같은 연유였다. 처남이 남한으로 피난가자고 했지만 교인이 다 간 후에 가겠다고 했는데 1950년 6월 24일 평양에서 전보가 왔다. “위독속래 평양 아들”평양에는 기목사의 장남이 있었는데 그 아들에게서 보낸 공산당들의 술책의 전보였다.그날 새벽 기목사가 조반을 먹고 있었는데 평양에서 사모님께 전화가 와서 받으라고 해서 사모님이 나갔다 돌아오니 기목사는 공산당에게 끌려가고 보이지 않았다. 공산당들은 요시찰 인물들을 미리 잡아 감금함으로 후환을 없애려 한 것이고 그후 기목사는 소식이 없다 그를 잡아 평양으로 압송했던 이인형은 남한에서 붙잡혀서 죄값을 치루었다. 기주복목사의 뒤를 이어 아들 기현두목사는 2008년 현재 새온교회 담임목사로 충성하고 있다.

 

순교자 김개수 장로 (기장)

 

김개수 장로(1900-1950)


1900년 4월 6일에 전남 장흥에서 김문오의 외아들로 출생 1927년 5월 20일 안장례씨와 결혼하고 같은 날부터 목포 양동교회 출석 예수를 영접하였고 그 교회 민족주의자 박연세목사 밑에서 신앙행활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일본사람들을 상대로 어묵을 만들어 사업에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었다. 교회를 봉사하든 중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하면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아 순교하기 까지 유년주일학교 교장으로 섬겼다. 조실부모하고 외로움을 경험한 그는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부모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교회학교 교사로 또는 밤 늦게 박연세 목사의 뜻을 받들어 부녀자들과 청년을 위한 야학당을 개설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1929년 박연세목사의 목회 지침에 의해서 목포 동쪽 연동교회를 기도처로하여 출석하여 봉사하고 1934년 초대 교역자 문명록 전도사부임 초대목사 이남규목사가 부임 교회가 부흥하고 김개수는 여러 집사들 틈에 끼어 스데반 처럼 살겟다고 다짐한 일등 집사였다. 1946년 6월 장로임직 이남규목사의 영향을 받아 애국적인 신앙인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자리잡았다. 신사 참배에 항거하다가 박연세 목사, 김창옥 장로, 이남규 목사 등 20여명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순교 등 고문을 당했고 김개수장로는 조선교 조선교단으로 부터 목사직을 박탈당한 이남규목사를 모시고 30리 밖에 시골인 무안군 일로면 상리교회로 출석하면서 신사참배 없는 예배를 드렸다. 해방 후 정부수립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해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철저한 반공주의로 국방장관 표창을 받았고 해방 후 첫번선거를 공정하게 치른 공로로 국회의장의 공로표창을 받기도 했다. 해방 후 무법천지에 동네 파출소를 손수 지어 6명의 순경을 두어 악습에 빠진 청년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기도 했다. 당시 연동교회를 시무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옷도 벗어주는 자애롭고 경건한 최명길 목사를 존경했고 최목사는 김장로를 든든한 동역자로 여겼다. 그는 행동하는 애국자이면서 신앙인이었다. 그의 강연은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유모어와 탁월한 설득력이 있어 청중을 사로잡아 이끄는 거인이었다. 그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식구까지 불러모아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에도 모범이 되고 자녀들을 철저한 신앙의 사람으로 양육하며 아브라함이나 고넬료를 흠모하였다. 6.25전란으로 애국청년단체의 단장으로 숙청대상 1호였다. 제주도는 이미 빨지산에 수중에 들어가고 목포도 시간문제였다. 연동교회 당회가 모여서 교인들을 어디로 피난을 시켜 보호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특별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회의를 마치고 문밖에서 김개수 장로가 최명길 목사에게 "그러면 우리 잘 죽읍시다"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최명길 목사도 김개수 장로를 붙들고 "그래요 우리 잘 죽읍시다."하고 인사를 하면서 헤어졌다. 김개수장로는 최목사와 약속한대로 총칼로 무장한 공산당들에 의해 연행되었으나 그의 신앙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담대하게 예수를 전하고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에 애국청년단의 일에 대해서도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변호하고 1950년 음력8월 16일 밤중에 대박산으로 끌려가 기도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집단 처형 당해 순교했다. 장남 김옥남 목사. 차남 김승남 목사. 장녀 김옥금권사. 차녀 김순자 김갑배목사부인.(장남 김종현목사 차남 김종철목사) 삼녀 이순이 권사. 사녀 김순옥 권사 국제어린이 재활원 원장.  

 

순교자 김규흥 장로 (감리교) 

 

김규흥 장로(1894-1950)


김규흥장로는 1894년 5월 6일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죽률리에서 김경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믿음의 동기는 부친이 병환중 먼저 믿고 교회 어른들이 자주 와서 기도해 주시는 동안에 아버지를 위한 교인들의 따뜻한 사랑에 감화되고 전하는 설교말씀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독실한 신앙을 간직하게 되었다.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상청 설치문제로 문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버티어 신앙으로 이겼다. 그 후 뜻한바 있어 서울협성신학교에 입학 2년 수료하고 고향에 돌아와 청년 전도사로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군자 거무게교회를 세워 목회하니 교회는 부흥되고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 원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한편 피 압박 민족의 쓰라린 비운을 누구보다 더 가슴 아프게 느낀 김장로는 민족이 살길로 삼대목표를 세웠다. 1. 하나님께 대한 믿음. 2. 신학문교육. 3. 농촌 자립경제, 그는 신학문과 특별히 여성교육을 강조하고 동네 문맹 부인들을 모아 손수 가르쳤고 농촌경제를 위해서 농업협동조합을 조직하여 생필품을 싸게 구매하고 농사개량과 축산장려 신생활 운동에 앞장 서는 등 강습회를 통해 계몽하는 한편 각종 도서를 구입하여 청소년 교양 및 후진 양성에 힘썼다. 신앙생활과 논촌계몽운동으로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그는 요시찰 인물로 주목받아 어려움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1945년 해방 후 논현동에 교회를 개척하고 전임목사를 모시는 등 동민의 복음화와 복지사회를 위하여 전력하게 되었다. 1950년 8월 19일 안선재 권사와 함께 내무서원에게 끌려가던 중 수수밭에 이르렀을 때 안선재권사를 피신하게 하고 김장로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대로 저들의 손에 끌려 영원히 사는 길로 갔다. 유자녀로는 김태선장로로 대원건설 대표이사이고 김연화권사와의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다. 큰 딸 김갑순은 송재수목사의 부인이 되어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고 둘째딸 김신덕권사는 진남덕 집사의 부인이고, 세째딸 김과숙권사는 한강교회 정운상 목사의 사모로 교회봉사를 하고 있다.

 

순교자 김길수 목사(1905-1949) 장로교


일제시대와 6·25동란을 거치며 한국교회는 숱한 순교자를 배출했다.교회의 탄압을 온몸으로 막아낸 ‘믿음의 투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이외의 절대신이 있을 수 없다며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성수주일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이 가운데 해방후 행방불명돼 순교한 김길수목사(金吉洙·1905∼1949)는 복음전파 뿐 아니라 민족운동과 청년운동, 교육사업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고 또 교회의 미래를 내다보는 선각자적인 삶을 살다간 목회자였다. 김목사의 신앙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었고 주일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 공산정권과 맞선 것이 결국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평남 용강군 양곡면 남동리. 유복한 유교가정에서 출생한 김길수는 소학교를 마친뒤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대학 중학부를 마쳤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기 직전 부친의 별세로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오랫만에 본 조국의 모습은 일본과 비교해 너무 피폐했다. “지금 우리 민족에 필요한 것은 민족정신이며 청년들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설 수 있다.공부보다 민족·청년운동이 더 절실하다” 20대 초반의 청년 김길수는 고향에서 남동(南桐)학교를 개교해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족의식과 바른 사고를 깨치는 일에 주력했다.이 과정에서 조만식선생과 이상재선생등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들의 사고(思考)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신앙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뒤 스스로 기독교인이 될 것을 다짐한다. 김길수의 개종은 집안에 큰 파란을 일으켰지만 그는 오히려 평양고등성경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함으로 기독교에 더 몰입한다. 진남포 비석리교회, 평양 남문밖교회 등의 전도사를 거쳐 42년 목사안수를 받은 뒤 부임한 곳이 평양 신암교회였다. 당시 일제는 41년에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모두 강제출국시킨 뒤 조선기독교 통리직을 만들었다. 교단적 특징을 없애고 하나의 교회로 만들어 마음대로 통제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강사였던 선교사들이 떠난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열심히 목회하던 김목사는 항상 청년들에게 소망과 비전을 주는 메시지를 전했다.45년 8월15일.식민지 아래에 있던 민족의 해방은 지하에 숨어 은밀히 신앙생활을 하던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다. 잃었던 교단을 재건하고 복음전도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3·8선 이북을 맡은 소련군정과 김일성이 교회탄압을 시작했다. 당시 목사와 성도들은 세가지 부류로 나뉜다. 처음은 무조건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에 대해 항거하고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자는 파와 공산당과는 대화가 되지 않으니 무조건 피해 남한으로 내려가자는 파, 셋째는 강단을 지키며 현실을 인정하고 신앙을 유지해 나가자는 파 등이었다. 김길수목사는 첫번째 파에 속했다. 김목사는 45년 12월,장로교 이북5도연합노회를 발기하는데 앞장섬으로 처음 공산정권의 눈총을 받았다. 또 46년 3월1일은 해방후 처음맞는 기념일이어서 강양욱이 주도하는 기독교연맹은 평양역전에서 기념예배를 갖기로 했다. 그런데 김목사는 바로 이날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3·1절기념예배를 갖는다고 공포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장대현교회 예배를 중지시키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허사가 되었다. 5천여명이 성도가 모인 이날 행사로 인해 김목사는 ‘인민의 적’으로 간주되며 정치보위부의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47년에 김목사는 더 큰 일을 냈다. 11월3일로 확정된 인민위원회 총선거를 주일성수를 이유로 반대한 것이다. 담판을 짓기 위해 김일성까지 만났던 김목사는 결국 선거가 예정대로 주일에 치러지자 성도들을 토요일 오후 모두 교회로 불러 모은 뒤 철야예배를 드리게 하고 다음 주일날 저녁 예배후까지 데리고 있다 귀가시켰다. 당시 결의문을 쓴 김목사는 “신자의 주일성수는 생명이며 정치와 종교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고 어디에서든 집회와 신앙의 자유가 확보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치보위부는 김목사에 대해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았다. 48년도에 체포돼 1년간 심한 옥살이를 하다 49년 3월에 잠시 석방 되었고 곧바로 다시 연행돼 행방불명이 되고 밀았다. 당시 신암교회 당회원들이 대동강에 배를 준비하고 남하할 것을 권유했으나 “양을 놓아두고 목자가 어떻게 도피하느냐.한사람이 있어도 교회를 지키겠다”고 말한 일화가 유언처럼 남아 있다. 공산당에 의한 납치로 아무로 모르게 죽임을 당한 김길수목사.복음전파와 후진양성으로 일관된 그의 삶은 오늘의 우리에게 주일성수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키며 신앙의 귀감이 되고 있다. 김길수목사는 부인 김화연권사(85년 소천)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장남 김만용목사(76·평양신학원학장)와 차남 김완용집사(73·영락교회)는 모친과 남하해 순교자 유족으로서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맺고 있다. 특히 김만용목사는 부친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어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이야기를 듣는다. 일본중앙대학에서 수학,평양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김만용목사는 남하해 1951년부터 학교법인 숭의학원 설립의 산파역을 맡아 교육일선에 일생을 헌신해 왔다. 53년에 교회장로가 된 그는 지난 92년 부친의 유업을 잇기 위해 숭의학원장직을 떠나 뒤늦게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부친이 제자를 가르치던 신학교육의 맥을 이어 현재 서울 홍익동에 있는 평양신학원 학장을 맡고 있다. “목회자 가정은 누구나 들여다 보기에 유리와 같은 것이라며 항상 언행에 조심할 것을 당부하시던 부친의 모습이 생생합니다.어려울 때마다 아버님의 말씀이 삶의 큰 지침이 되었습니다.부친은강양욱과 절친한 사이였으나 정권과 타협치 않으셨고 이윤영목사님이 월남할 때 동행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이것도 거절하셨습니다” 김만용목사가 부친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49년,26세 교사시절이었다. “지방의 연합집회인도를 위해 집을 나선 뒤 이후의 소식을 아는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당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교회의 진리를 사수하신 부친의 신앙을 유산처럼 생각하며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습니다 ” 김목사는 교육자로 이제 목회자로 무탈한 삶을 살았고 1남4녀의 모든 자녀들이 신앙안에서 훌륭하게 성장해 제몫을 다해주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며 남을 후진양성에 더욱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글 출처- http://www.ihappy99.com)

 

순교자 김동철 목사 (감리교)

 

김동철 목사(1899-1950)


1945년 만주에서 서울로 귀국한 김동철은 오갈데 없는 많은 귀국동포들을 불쌍히 여겨 세운 교회가 서소문 교회이다. 1899년 출생하면서 부터 부모를 따라 만주 용정땅에서 애국지사들의 학교인 명동학교를 졸업하고 영안학교 교사를 하든 중 소명을 받았다. 서울에 돌아와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만주땅 용정으로 돌아가 용정교회 부담임으로 일하면서 용정교회 소년학관의 사감을 보았다. 용정교회에서 수련과정을 거친후 신경시로 옮겨 신경입선정교회를 개척하고 목단강 가에서 국적없는 한국이들이 걸인처럼 부랑하는 이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서울에 돌아와 만주 용정, 신경, 하얼빈에서 귀국한 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돌보는 일을 시작한 것이 서소문교회가 되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식구들만 피난시키고 교회에 남아 갈곳 없는 교인들과 함께 숙식을 하다가 인민의 적으로 몰아 인민군에게 8월 23일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형무소에 끌려가던 새벽에 그는 설교에서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는 남다른 생의 경험을 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갖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일본 헌병들에게 착취당했고 공산 비적들에게 물건을 빼았겨 가면서 살았고 중국 본토인들에게도 갖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공산당은 서울을 점령하고 민족해방군임을 선전합니다. 6.25전 미군은 자기들이 세계의 경찰이 되겠다고 큰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이들을 믿는 이가 없습니다. ----- 고통과 역경에서, 수난과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신 이는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공산당도 신뢰하지 맙시다. 미군이라고 천사라고하지 맙시다. 주님만 의지하고 삽시다" 외세나 환경에 전혀 동요할줄 몰랐던 김목사는 오직 주님의 옷자락만을 붙잡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의 벗이 되기를 기도하다가 공산당의 채찍에 쓰러져 하나님 나라로 이적해 갔습니다. 김동철목사의 유족으로는 부인 안마리아 권사, 장남 김창국목사가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교하리에 교하교회(기장)를 개척했고, 차남 김창렬은 YMCA총무를 역임했고 사남 김창덕은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집사로, 김창길은 미국 뉴저지 한인 장로교회 목사로, 육남 김창림은 내과 의사며 미국인교회 집사로 순교자 선친의 순교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순교자 김두병 장로 (기장)

 

김두병 장로(1906-1950)


1906년 3월 25일 전북 남원군 대강면 풍산리에서 김창원의 3남 1녀중 장남으로 출생.예수를 믿기 전 무속에 빠져 교회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그가 첫 아이를 잃고 아내를 동부교회에 나가라고 하여 아내가 교회에가서 목사님의 기도중 마귀 잡귀를 일체 틈타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면서 나도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하고 그 다음주부터 동부교회에 출석하다가 친구들의 권유로 전주 중앙교회로 옮겨 극진히 봉사하였다. 1943년 일제 말기에 징용병으로 일본 북해도 북단 아오모리 광산지구에서 강제 노역을 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선을 타고 오던 중 부산 앞바다에서 어뢰에 난파되어 기름 바다를 헤치며 가까스로 생환했다. 1949년 6월에 전주 중앙교회에서 제 6대 장로로 임직하며 기쁨에 넘쳐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할것을 결의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로 교회시설에 '중앙교회'라고 페인트로 표시하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를 사랑하며 목회자를 섬기고 자신의 직임에 충성을 다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다가 교회의일이 마음 놓이질 않아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전주로 돌아와 지하실에서 살다가 인민위원회 사무실에 끌려가 민주인사들과 줄줄이 묶여 개처럼 끌려다니며 가두시위를 했다. 전북 토목관구사무소에서 인민재판을 했는데 학살에 가담한 자들은 술을 마셔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쳐죽이는 천인 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공산주의자들은 김장로에게 "너는 믿는 사람이니 어디 죽여도 사나보자"고 조롱하면서 마지막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할 때 김장로는 "죽으면 천국에 갈터이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만 다만 아쉬운 것은 나는 일흔이 넘으신 어머님이 계신데 내가 먼저 죽는것이요. 또 하나는 마지막 죽는 자리에서 사랑하는 교우들과 함께 고별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손을 모으고 머리 숙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곡괭이와 삽에 찍혀 순교했다. 그는 평소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완전히 변화된 생을 살다가 간 사람으로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했으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몸으로 살아 낸 사람으로 후손들에게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유언과 몸소 그런 삶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기도중에 1950년 9월 28일에 순교하였는데 전주시 효자공원묘지에 모셨다. 유족으로는 아내 김복순 권사는 81세를 일기로 1994년에 소천했고 장남 용신은 집사로 차남 용희, 삼남 용문, 사남 용운은 열심히 교회에 충성하고 있다. 손자중 장손자 손녀 정곤 승곤 형균 옥현 중 김정곤씨는 현재 '군산한일교회' 담임목사로 시무중이다.

 

순교자 김성기 집사 (장로교)

 

김성기 집사(1914-1950)


1914년 11월 5일 전북 전주시 겨원동에서 김만성의 3남으로 출생했다. 전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농업과 상업을 하였고 영상교회(전남산교회) 교사 성가대 안수집사로 봉사하였음. 청년시절에 입교하여 전도에 불타 많은 결실을 맺었고 친구 박복수집사와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를 섬기며 안수집사로 섬겼다. 당시 친일파 세력들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애국청년들은 거의 애국심이 불타는 신자들이었음. 송지동교회에서 안수집사로 봉사하던 중 잡혀 황산지서에서 수많은 고문을 당하고 영상교회로 넘겨져 10명이 사형당하기전 하늘가는 밝은 길을 찬송부르고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인사한 후 1950년 8월 10일 스데반처럼 순교하였음

유족으로는 아내 김길례 권사. 자 금은식 목사. 자부 성경례 사모. 손자 김성국 김성진 김성일 이 순교신앙을 지키고 있음.

 

순교자 김영윤 목사 (장로교)

 

김영윤 목사(1902-1950)


1919년 3.1운동시 3월8일 대구 장날을 기해 계성학교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평양신학교 재학중 신사참배 강요에 정면 대치한 것이 일경의 노여움을 사 투옥당했다가 1935년에 출옥하여 안악읍교회 조사로 봉사하다가 1938년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안수받고 안악읍교회 담임으로 부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몇번의 옥고를 치루었지만 교회는 그때마다 다른 목사를 두지 않고 기다렸다가 김목사를 다시 당회장으로 환영하기를 몇차례 목회경력이 16년에 이르렀다. 1945년 해방 후 황해노회 노회장으로 노회를 재건 교회확장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안악읍교회는 대지가 1200평 본당규모 160평 화강암 석재건물로 장년만도 500-600명이었다. 성전아래층을 교육관으로 하여 완벽한 여성훈련의 도장으로 만들었고 당시로선 생각지도 못한 선견자적 목회자였다. 교회운동장에는 정구 코트와 운동시설을 갖추어 놓고 앞서가는 모범교회상을 심었다. 청년회로 하여금 밴드부를 조직케하여 월 1회 정기연주회 겸 노방전도를 벌려 시민들의 눈을 교회로 돌리게 했다. 교회학교내에 고등성경학교를 개설해 스스로 교장이 되어 농어촌 교역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 1946년 조직된 기독교도연맹 가입에 거절하자 시시콜콜 박해를 받았으나 이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선한목사는 양들을 버릴 수가 없다'는 이유로 월남하지 않고 탄압을 견디었다. 1950년 6.25동난 하루전 공사군에 체포당해 해주형무소에 감금당했다. 전쟁이 길어지고 유엔군이 북진이 이루어지게 되자 공산당은 감옥에 반체제 목사들을 위시해서 반공인사 반동지식인들을 반공호에 몰아넣고 수류탄을 터뜨려 죽이거나 우물에 넣어 생매장을 하고 손도끼로 찍어 죽이기도 했고 해주형무소에 불을 지르고 도망쳐 나오면 해주 앞바다 용당포에 던져넣어 수장을 시켰다. 김영윤목사는 고문에 온 몸이 상하고 찢어졌는데도 원래 건강하다보니 끝까지 견디었지만 용당포에 던져 넣을 때 던지워 한많은 세상을 떠나 하나님나라로 옮겨갔으니 49세였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김신덕권사. 장남 김정식장로는 뉴져지주 의사. 차남 김정환장로는 해성여상 교감을역임. 현재 평양신학 신학연구원 교학처장. 삼남 김정권 장로는 와싱톤 거주 기독교사상 편집국장 역임. 장녀 기정순권사는 계성고교 교목실장 이삼열목사의 사모. 차녀 기정심권사. 삼녀 김정실집사 등 선친의 순교신앙을 전승하며 각 분야에서 선한열매를 맺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애국지사 김영학 목사의 묘, 대전 국립현충원 안장 묘역, 애국지사 2묘역  2-580        

 

애지제 2-580: 순교자, 순국선열, 애국지사 김영학(1877-1932)의 대전 국립현충원 안장 묘역 표기이다. 감리교회 순교자 김영학 목사는

1932년 12월 16일  시베리아선교 활동을 하다 공산당에 체포,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시베리아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김영학 목사

 

김영학 목사 (1877-1932 권서인, 감리교 목사, 시베리아선교 순교자)

 

1. 방탕한 젊은 시절과 전도대와의 시비         (글 출처- http://blog.daum.net/parkland/15714891)

김영학 목사는 황해도 금천군 금천읍 조포리 양반가문을 배경으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향리 한문사숙에서 글공부를 시작하여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모두 읽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 양반 가문에서 익힌 양반수업이 그가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바깥 물정에 눈을 뜨면 체면도 헌신짝처럼 벗어버리고 숨어서 나쁜 친구들과 배운 술담배로부터 정도 이상의 주색잡기로 난봉꾼으로 그 고을에서는 이름이 나 있을 정도였다. 그의 방탕한 생활을 억제시킬 만한 힘이나 방법이 없었다. 그가 30살이 되던 어느날 토산장이 서는 날이었다. 영학은 아직 낮인데 그는 술에 만취되어 거리를 휩쓸었다. 아는 이들은 미리 비켜가고 상대를 하려 들지를 않았다. 그러나. 이 날만은 달랐다. 어떤 일단 무리들이 종이 조각을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무엇인가 부탁하고 권면하는 듯이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교회의 전도대원이었고, "예수를 믿으세요, 믿고 구원 얻읍시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 믿으시요"하면서 전도지를 건네주며 전도를 하고 있었다. 영학이가 나타나면 으례껏 비켜서든가 우루루 달아나서 흩어지든자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았다. 취기어린 눈을 부비고 그는 딱버텨셨다. 그리고 그는 벽력 같은 소리로 고함을 한껏 질렀다 '이 멍청이 새끼들아! 저리 꺼져, 이 병신들아! 썩 거지지 못해 ' 그래도, 이 사람들은 여전히 겁을 내는 기색이 없었다. "형님! 예수 믿으시오.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술김에도 잔뜩 자존심이 상하였다. 이쯤 되고 보면 알아서 피해갈 일인데, 시장터에는 공동 우물이 하나 있었다. 거기 있는 대로 물을 퍼서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웃으면서 자애로운 어머니가 어린 애기를 다루듯 하는 것 같아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오늘은 운좋게도 그냥 지나갈 줄 알았는데 본색을 들어 냈다. 전도지를 마구 뺏아 찢고, 발길로 걷어찼다. 그러나 대꾸없는 이들에게 이런 짓은 망난이 같은 자신에게 흥미거리도 못 되었고, 더 이상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2. 전도집회에서 회개하고 권서인이 됨.

언제쯤이나 되었을까? 그 이튿날에야 정신을 차리고 어제의 일을 생각해 본다. 차츰 후회하는 쪽으로 생각은 기울었고 그는 쪽지에 적힌 글을 읽고 그곳으로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에 벌떡 일어나 단숨에 달려가 본즉 그곳은 전도집회 장소였다. 이 청년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고 또 지금까지 이런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점점 그 분위기에 빨려 들었고 목사님의 설교는 그의 젊은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고 또 그 감동으로 달아 올랐다. 그는 한없이 울었다. 그 집회를 끝까지 참예하였고 이날부터 믿기로 결심하였다. 어떤 이에게서 성경을 권해 받았다. "이 성경을 보고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님은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고 하였거니와 한 사람을 목사로 애국자로 목숨을 바치게 하고도 남는 힘이 있었다. 그 길로 그는 한해를 수일을 보내듯 이 신앙에 깊이 들어가 온갖 열심을 쏟아 바쳤다. 그는 난봉꾼으로 부랑하기 그지없었던 것 만큼이나 새 사람이 되어서 신앙의 열심 또한 그랬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정신이상자 취급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그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처음에 이상하게 보던 사람들이 그의 엄청난 변화에 감동을 받아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그리고 믿게 된 다음해에 권서인이 되어서 성서공회에서 공급하는 성경, 찬송가, 쪽복음을 등에 지고 전도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3. 독립운동으로 체포 옥고를 치름.

1911년 해에 정식으로 전도사의 직분을 맡아서 충성을 다하기 시작했다. 1914년에서 감리교 연회에서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에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1919년까지 그 동안에 평산,금천,장연,철원,서울종교,수표교,양양교회를 담임 목회하였다. 양양에서 1919년 3.1운동을 맞았다. 이 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열망, 가혹한 총독정치가 채택하고 있는 헌병군사통치의 비인도적 횡포, 그리고 일제의 조선민족성 박멸기도,조선인 차별대우와 기회불균등, 언론이나 신앙,그리고 결사의 자유박탈, 기독교에 대한 근절정책, 농전토의 수탉,그리고 살벌한 만주 벌판에의 강제 이거 이민 정책 이런 것들은 이대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민족적 분노를 자아내게 했고, 김 목사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성경을 통해 바른 민족정신을 신앙으로 설교하던 중에 만세운동이 서울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자 대열의 선봉에 섰고 교인을 비롯한 국민들을 지도하였다. 이로 인해서 일본 관헌들은 그를 체포했고 그는 4년간이나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것만 보아도 그의 애국 운동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극비문서에 그에 대하여 '민족절대독립주의,배일사상 포지자"로 규정하고 있듯이 그는 민족독립운동가였다.

 

4. 시베리아선교 활동, 공산당에 체포,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

1922년 5월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하여 가평읍교회를 시무하면서 당시 남감리회가 펼친 선교백년기념사업에 가담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교제확장과 선교사명과 전력을 경주하였다. 1921년 감리교연회는 양주삼 목사를 중심으로 만주 및 시베리아 선교를 시작하였다. 시베리아의 한 도시 블라디보스톡은 우리나라 두만강 바로 건너, 동해에 면한 항구로서 러시아의 동양 진출을 위한 중요 요지이다. 한일 합방으로 나라 잃은 동포들은 만주와 이곳 시베리아로 망명하였다. 우국지사들이 모여 들었고 혁명투사들이 반일항거의 근건지로 삼고 후임을 위하여 이곳에서 도모하였다. 여기서 한인촌이 이루어지고 한국인을 위한 해조신문(海朝新聞) 등이 발간되기도 했다. 이런 곳에 동포를 위한 선교사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지사요 또한 시기적으로 적절하였다. 시베리아는 당시 러시아 공산혁명이 일어난 지 6년 밖에 안된 때였다. 과격파들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 하여 교회를 핍박하고 괴롭히던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따라서 시베리아 선교를 지원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시피하던 때였다. 그러나 김목사는 혹심한 옥고를 치렀던 뒤라서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자원하여 그는 이곳에 왔고 나라 없이 외롭게 사는 교포들을 위로하는 한편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교포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때문에 교회는 곤경중에서도 견고히 발전하였다. 9년간을 목회에 전념했으나 ,1930년 공산당들은 소위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김목사를 구금하였고 근 1년간을 공갈, 협박 또는 회유책을 써가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단연코 거절하자 1931년 3월에 가장 악질적인 반동이라는 죄목으로 10년 중노동형을 받고 임지에서 약 100리 떨어진 곳에서 복역을 하였다. 이곳은 보통 영하 40-50도 오르내리는 추운 지대였다. 어느날 눈과 얼음이 쌓인 곳에서 이날도 중노등에 시달리던 중에 있었는데 갈라진 얼음 사이에 수십명이 떼죽음을 하던 중에 김영학 목사 그도 여기 함께 희생당하니 공산당의 배교의 강요를 배격하고 신절을 지켜 영광스러운 순교 대열의 참가하였다.

 

최양섭 목사는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1997년, “일제하 양양지방 독립운동과 기독교인의 역할” 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양양지역에서 목회하면서 그 지역의 초기 기독교 인사들의 독립운동 참여와 주도적 역할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오랜 시간 자료를 추적하며 연구하여 발표한 그의 소중한 논문이다. 1919년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의 국권침탈에 비폭력, 무저항 만세 운동을 통해 나라의 독립과 자주를 부르짖었다. 이 역사적인 항거와 분리할 수 없는 현실은 기독교 인사들의 집단적인 참여와 주도적 영향이다. 유관순, 신석구, 제암리 교회 등이 그 증거이다. 이러한 대표적 맥락 외에 전국 각처에 밝혀지지 않고 조명되지 못한 인물과 순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는 듯, 최 목사의 논문은 ‘양양지역의 만세운동에서 기독교 인사들의 역할’을 집중하여 연구한다. 이러한 양양 만세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1919년 양양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김영학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상세히 논술한다. 논문은 김영학에 대하여 ‘양양지역의 교회와 교인들에게 가장 큰 지도력과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최 목사의 초기 한국 감리교 지도자들의 사역과 민족운동 연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2012년 5월 중순 양양의 현산문화제에 강사로 초청되어 양양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한 특별강연을 하여 뜨거운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는 순교자 김영학 목사와 같은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후대의 교회에 대해 참으로 안타까워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영학 목사의 후손을 만나면 “감리교회를 대신하여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다”는 말도 하였다. 숭고한 신앙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한 이 시대 우리 신앙인들의 처절하고 비참한 자화상에 대한 통렬한 ‘자기부인’이었다. 순교자 김영학 목사의 후손을 만났다. 음악을 전공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손녀 김지영 선생(탁사 최병헌 목사의 외손녀이기도 함)과 할아버지와 같이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사가 된 손자 김00(선교지역과 실명을 밝힐 수 없음)이다. 그들과 함께 서 있는 순교자 김영학 목사의 묘비가 차가운 시베리아의 얼음을 뚫고 80년을 지난 오늘날 우리의 교회를 향하여 외치는 듯하다. ‘나는 죽은 사람’, ‘주님을 바로 믿고 나라 사랑을 생활화하라’, ‘수 십 명의 교인이 있는데 어찌 목사로서 그를 버리고 나만 살려고 가겠느냐’, ‘목사는 교회를 위하여 순교하는 것이 마지막 사명이라.’  (출처- http://www.kmc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34004)

 

1933년 10월 31일자 조선일보. <김영학 목사의 순사>       (출처- http://www.kmc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34004)

 

<로령서 선교하든 김영학목사 순교>, 1933년 10월 31일자 조선일보. <김영학 목사의 순사>, 1933년 10월 25일자 4면 기독신보. 기독신보의 보도 내용을 인용한다. “기자는 다시 그의 부인인 안원정씨를 사직동 자택으로 방문하매 그 부인은 비통 중에 차있어 상복을 만드시다가 ‘이 소식은 참으로 꿈같습니다. 주를 위하여 교인을 위하여 가진 고생과 고초를 다 겪으시다가 마침내 이렇게 무참히도 세상을 떠나신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최선을 다하여 그의 소식을 각 방면으로 알아보았으나 일 년 넘어 소식이 없었습니다. 아마 북쪽으로 전감가신 뒤부터는 소식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에게는 영광의 죽음이 되겠습니다. 그는 평소에 늘 하시는 말씀이 <목사는 교회를 위하여 순교하는 것이 마지막 사명이라> 하시면서 가족을 그 위험지대에 두고도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20여일 40여일씩을 늘 위험한 가운데로 순회하셨답니다. 이번 나올 때에도 같이 돌아오자 한 즉 책망하고 거절하였습니다. 수 십 명의 교인이 있는데 어찌 목사로서 그를 버리고 나만 살려고 가겠느냐 하시고 계시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순교자 김이준 목사(감리교)

 

김이준 목사(1912-1945)


김이준은 1912년 8월 1일 충청남도 금산에서 출생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굶기를 밥먹듯했다. 가난한 그의 부친은 남보다 높은 향학열을 가지고 있어서 아들 이준을 그곳 소학교에 보내서 공부를 시켰다. 남아이며 최소한도 자기 이름자는 쓸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였다. 겨우 소학교를 졸업할 때 죽어도 땅을 파다 죽을 각오를 하고 부친을 따라 남만주지방으로 이민을 갔다. 임자 없는 땅을 부지런히 파혜쳐 생활이 낳아지자 부친은 아들 김이준을 용정에 독립투사들이 설립한 중등학교에 보냈다. 고향에서부터 예수를 믿은 그의 가족은 만주에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유지 하게 되었다. 일제 탄압에 못 견디고 외국까지 밀려 고생하는 동포들을 볼때 가슴이 쑤시는 아픔을 느낀 김이준은 중등교육을 마치는 대로 "내 동포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자가 되리라 ." 결심하고 만주신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에 제 1회로 졸업을 하고 목사가 된 김이준은 재만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 자체를 항일 독립군으로 보는 일제의 시각은 애국운동을 하기 위하여 망명한 애국지사들의 집결지 용정에 기독교를 그들이 세운 괴뢰정권을 통해 교회를 탄압하였다. 김목사가 신학교를 졸업한 1941년은 장. 감. 성 교파의 독자성이 무너지고 만주조선기독교도연맹에 통페합되어 있었음으로 교회의 독자적인 신앙행위도 인정을 하려하지 않고 중앙에서 명령하는 처지였다. 감리교는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국가의 의례로 받아들였지만 김이준 목사는 달랐다. 신사에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완강히 거절하고 교회에서도 신사참배를 죄라고 가르쳤다. 일경은 김이준 목사를 국헌위반자로 체포하여 죽음보다 못한 옥살이를 시켰고 고문과 영양실조 정신적인 압박속에 건강하던 김목사도 견디어내지를 못하고 끝내 쓸어졌다 1945년 8월 1일이었으니 그의 나이 33세였다.  

 

순교자 김철훈 목사 (장로교)

 

 

김철훈 목사(1904- 1948) 


김철훈은 1904년 10월 7일 경기도 양평에서 독립유공자 김경덕 목사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본 헌병에 검속되어 4년의 옥고를 치렀다. 부친의 옥살이로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어 김철훈은 하루 세끼 식사하는 것 마저 자유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민족지도자가 되기위해서는 배워야했기에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4년의 옥고를 치룬 부친을 지켜보면서 감수성이 예민한 김철훈은 한으로 얼룩진 민족애를 배웠다. 그리고 고학을 결심하고 평양을 택했는데 이는 부친 김경덕 목사의 친구인 선교사 곽안련 목사의 도움이 있었기 가능했었다. 숭실전문학교 시절인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 의거사건이 발생하여 서울을 거처 동년 12월 14일 숭실전문학교로 번저 평양시에 독립운동의 격문이 붙기 시작하여 진행되었다. 겨울 방학 시 잠시 주춤하다가 1930년 1월 21일과 22일 양일 숭실전문학교 종교부장이던 김철훈 학생과 그의 친구 강태민 학생이 주동이 되여 숭실전문학교 전교생과 평양시 12개교 학생이 참가하는 대규모 학생 만세 사건을 일으켜 140여명이 검거되었다. 이때 김철훈은 최초의 1개월의 옥살이가 시작되었다. 뼈가 꺾이고 갈비뼈가 우골 드는 고문 속에서 그는 이를 다물고 예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예수를 만나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후 평양신학교로 진학한 것이다. 1936년 3월 목사안수 후 숭실중학교 교목으로 채용되었으나 학생시절 평양 학생만세사건으로 옥살이 하던 자에게 학생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로 수업 중 일본 경찰에 끌려가 숭실중학교 교목으로 부임 후 3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1936년 8월에 용강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년여 기간이 지났을 때 당국에서 교회 뜰에 일장기를 계양하고 예배 전에 일본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를 낭독하도록 강요한 것을 김철훈 목사의 강직한 성격은 즉각 거절하고 그 교회를 사임하였다. 1938년 2월에 송산리교회 목사로 부임하여서 당시 일본 식민정책으로 조선인의 목을 조이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가혹한 옥고를 치루고 9개월 만에 출옥했다. 동년 11월 의성교회 시무했던 유재기 목사가 평양신학교 학생시절 배민수, 박학전, 송영길, 김철훈 등 10여명을 상대로 농우회(農友會)를 조직하고 졸업 후에도 이를 유지해왔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위장 단체라 하여 일경이 평소 감시하던 김철훈 목사를 농우회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국내 사정이 악화되어 만주로 가려고 시무하던 송산리교회 까지 사임했다. 1939년 3월 삼성리교회 장로들의 간청에 이끌리어 삼성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지나던 중 1942년 3월에 성서조선 잡지 158호의 수필부분에 “조와”를 문제 삼아 폐간시킬 의도로 독자인 김철훈 목사를 그 잡지의 필화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의심하여 8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고대하던 일본의 강점에서 해방되자 1945년 9월에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인 고당 조만식 옛 스승을 보필하게 되여 고당은 김철훈 목사를 밀사로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의 공문을 휴대 월남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여운형 선생을 만나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1945년 10월에 800여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동평양교회에 부임하였고 총회를 잠정 대행(통일될 때까지)하는 이북5도(16개 노회) 교회연합회 서기를 맡아 연합 사업을 했으나 공산당의 교회탄압은 날로 가중되고 있었다. 1947년 강양욱은 기독교연맹을 조직 가입을 권고했으나 이를 거절하였고 동년 11월 3일 주일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기독교인을 앞장세우려 했으나 이북5도 회장 김진수 목사와 김화식, 김길수, 김철훈 목사 등이 반대하자 교회탄압에 광분하기 시작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배출한 산정현교회는 해방 후 온건파와 강경파로 내분되어 1947년도에는 7개월 동안 강단에 공백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유계준 장로를 중심으로 산정현교회를 평양노회에 복귀시켰다. 일본의 탄압과 교회분쟁으로 인해 교인은 1000명에서 200여명으로 줄고 교회사정은 몹시 어려웠다. 이때 유계준 장로는 김철훈 목사를 방문 간청함으로 편안한 동평양교회를 뒤로하고 어려운 산정현교회를 택하고 김철훈 목사는 산정현교회를 위해 죽으라는 하나님의 계시의 메시지로 알고 1948년 2월에 부임해 오직 교회의 부흥과 선교에만 매진하다가 그해 6월 25일 서평양역 근처에서 공산당에 체포당하여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유족으로는 연금봉 사모가 2009년 현재 101세로 건강하며 아들 김기영 목사와 딸 김명희 권사(사위 이금세 장로) 김성희 장로(산정현교회, 유치원장)가 그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

 

순교자 김화식 목사 (장로교)

 

 

김화식 목사(1894- 1947 연행)    


김화식은 평양의 숙천에서 김찬성 목사의 두 아들중 맞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찬성목사는 평양신학교 2회 졸업생으로 슬하에 두 아들도 목사가 되었다. 첫째 아들이 김화식이요 둘째 아들이 김성여 목사였다. 1919년 김화식의 나이25세가 되던 해 아버지 김찬성목사는 평안북도 안주군 안주읍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그때 3.1운동을 맞아 부자는 3.1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시위를 벌리다 아버지 김찬성목사와 함께 부자가 일경에 체포당해 주동자로 2년 6개월 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했다. 김화식은 감옥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옥중에도 전도해 목사가 되게 한 이만 8명이 되었고 그중에 33회 총회장을 지닌 이원영목사가 그 중 한사람이다. 김화식목사의 목회는 경건주의 일변도로 수면하는 만큼 독경을 해야한다고 강조했고 성경연구에도 조예가 깊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빌립보서 강해와 두권의 강도집을 갖기도 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총회적으로 결의할 때 주기철 이유택 등과 함께 묘향산에가서 기도하고 힘을 합해 저지하려고 했지만 감옥에 끌려갔다. 일제하에 감옥을 안방 드나들듯 하며 고통의 세월속에 해방과 함께 장대현교회로 강단을 옮겼다. 이북교회의 중심인 장대현교회에서 시무하며 기독교이념의 실현을 위하여 무실론 이데오로기인 공산당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평양의 염혈 목사들과 기독청년들을 규합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김화식목사가 결성한 기독교자유당은 1947년 9월 23일 유엔총회에서 한국의 남북통일 문제가 협의되고 난 후 국제 사회에 본격적으로 여론화시켜야 한다는 급박한 사정 때문에 고한규장로를 당수로 추대하여 1947년 11월 19일 결당 날짜를 정했는데 하루 전 11월 18일 내부고발로 창당도 못하고 40여명 전원이 연행되어 중형선고를 받았고 김목사도 13년 형을 선고받고 이들은 시베리아 아오지 탄광에 강제노동에 처해지고 김목사를 위시한 몇 목사들은 총살형에 처해져 기독교의 인맥을 끊으려 했다.

 

순교자 김희서 교사 (침례교)

 

 

김희서 교사(1878-1918)


김희서는 1873년 충청남도 부여군 양화면 원당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여에서 양반, 뼈대있는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한학을 읽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그가 어릴 때 돌아가시고 형님의 집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의 안에 내재한 문학성이 발휘된 것은 너무도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던 그가 예수를 만난 것은 1895년이었다. 그는 서당 시절에 두보의 시를 좋아했다. 1895 당시 익산 난포에 내려가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든 중 서양여자 두사람이 서당에 찾아와 전해준 한문성경을 등잔불 밑에서 펼쳐 읽고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빛이 스며옴을 느껴 그는 밤을 밝혀 창세기를 다 읽었다.여자선교사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전할 때는 "무부무군의 사교를 믿으라고 하느냐"고 얼굴엔 노여움이 서리었던 그가 밤새 성경을 읽고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 당신이 내게 오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을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노여움을 사고 창세기를 다 읽은 후 "희서야 너는 내것이니라. 교회로 가서 가르침을 받으라"는 음성을 듣고 무작정 걸어서 난곡침례교회 앞에 갔고 불이 밝혀져 있는 대문을 밀치고 들어가 갓을 쓴 외국인이 나와 정중히 맞았고 전날 낮에 서당을 찾았던 여가가 있었고 그들은 희서를 보며 부르던 찬송을 계속했다.그가 신앙을 고백한 것은 1895년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1908년 그는 부여 칠산교회에 부임해 교역자생활을 시작했으며 1915년 목사 후보인 교사 직분을 받고 함경북도, 간도를 중심하여 만주일대르 선교지로 삼아 순회전도를 했다. 1918년 원산대회에서 시베리아 선교를 명받았는데 조장은 박노기 목사 부조장은 김희서 교사였다. 김교사는 시베리아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면 목사로서 안수받기로되어 있었다. 조장과 부조장 전영태 총찰과 최응선 감로 넷이서 함께 러시아 선교를 위해 수청 연추지방을 향하여 항해하게 되었다. 1918년 10월 20일 그들이 탄 선박이 노영 보시엘해 모커우 지점에 이르렀을 때 돌풍을 만나 끝내 파선하므로 네 사람도 파선하는 배와 함께 풍랑에 휩쓸려 순교했다. 김희서의 45세되는 생일날이었다.  

 

순교자 노형래 집사 (성결교)

 

 

노형래 집사(1923-1950)


노형래는 1923년 7월 27일 충남 서천군 마서면 한성리에서 한성교회 장로 노승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기독교신앙으로 자랐기 때문에 부여를 거쳐 예산군 고덕면으로 이사해 삽교 보통학교를 재학할 때는 신사에 절하지 않아 호되게 야단을 맞고도 반성하지 않는다하여 급기야는 퇴학처분을 받았다. “잘했다.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신앙에의 길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란다” 아버지 노승우 장로는 오히려 아들 형래를 칭찬했다. 그 길로 노장로는 아들을 기독교 계통인 사립예수교 배양학교에 편입학시켰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형래는 배양학교에서 특출나게 공부를 잘했고 졸업 후에는 서울로 상경하여 학업을 계속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17세에 결혼을 했으며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할 일을 찾고 있었다. 이후 기독교 사립학교인 배양학교를 졸업하였다. 1948년 노승우 장로 부자는 사랑방을 털어 한성성결교회로 간판을 걸었고 노형래 집사는 자전거로 4 개 교회 예배처를 돌며 예배를 집전했다. 2차대전으로 젊은 이들을 전선으로 내몰자 부친의 권유에 따라 노형래는 만주로 피신했다가 귀국해 1945년 해방이 되자 . 해방된 조국은 노형래같은 인텔리 청년을 농사만 짓도록 가만 두지않았다. 당시 도마다 건국 준비위원들이 선발되어 있었고 청년단 운동이 군 단위까지 파급되어 조국건설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민족청년단에 가입했고, 서천군 당 위원장이 되어 활동을 했다. 그는 그러한 분주한 중에서도 성수주일은 물론 교역자없는 4개의 교회를 돌며 예배를 집례했다. 이런 분주한 세월속에 노형래는 6.25를 맞았다. 공산군은 삽시간에 서울을 점령했고 1주일이 가기 전 대전까지 점령했다. 서천도 이내 공산화되고 말았다. 부친 노장로는 결사적으로 아들을 피난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망설였다. 민족청년단은 뒤로 미룰 수 있었지만 교회만은 떠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아떻게 교회를 버리고 도망하겠습니까” 노형래는 많은 고민을 했다. 피난해서 생명을 구할 것인가 주의 강단을 지키다가 순교할 것인가? 친우 최동규전도사를 만난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노형래는 끝내 죽는 길을 택했다. 육신은 죽으나 영원히 사는 길,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다. 결국 노형래 부친장로와 또 동생 등 3부자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내무서에 갇히게 되었다. 1950년 6.25로 서천도 공산화되고 노형래 집사는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에게 체포되었다. 노형래 집사는 교회지도자로 활동하지 말 것과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오히려 그를 심문하는 내무서원에게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며 전도했다.결국 회유가 불가능하자, 대전 형무소로 이감된 후 처형되었다. 1951년 8월 3일 서천군청에서는 유족들과 그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위령제를 드리고 장례식을 거행했다. 순교자 노형래의 시신은 불타고 없어 그가 평소에 사용하던 식기를 관에 넣어 교회 앞산 가족묘지에 묻었다.(장례예배에서 황봉의 장로가 낭독한 고인의 약사는 순교신서 4권 163-65쪽에 있음) 유족으로는 장남 노태철 목사(제일교회 당회장), 차남 노희석목사(명일교회 당회장) 딸 노평란(허성활 목사 사모), 손자로는 노윤식 목사(미국 에즈베리 신학대학원 졸, 성결대학교 선교학 교수), 노윤숙(유경렬 목사 사모), 노윤성 안수집사(미국 NYU 졸업, CJ 부장), 노윤철 집사(미국 하바드 졸, 치과의사), 노유림(디자이너), 허상범 목사(미국 바이올라 대학 선교학박사과정), 허종범 집사(컴퓨터 전공박사), 허대범(회사원) 이 있다.

 

순교자 도복일 목사 (감리교)

 

도복일 목사(1914-1950)


도복일은 1914년 경북 경산에서 도봉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직이 영남지방에서 선교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전도를 받아들여 예수를 믿었던 초기 신자였다. 도복일은 모태신앙으로 민족주의자 아버지 도봉희가 3.1운동 참여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도복일은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땅 용정으로 이주함으로 용정학교와 서전의숙을 나왔고 1935년 해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감리교 만주연회가 경영하는 만주신학원을 졸업하고 만주 조선기독교연맹 만주교구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고 만주영안교회 부임한후 1개월만에 해방이 되어 1년간 공산치하에서 목회하다가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1946년 8월 총리원으로부터 당진교회 파송되어 1949년까지 3년동안 당진교회를 비롯 지역 여러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고 1950년 삽교로 옮기고 몇달이 못되어 6.25사변이 터지는 비운을 겪게 되어 부여지역으로 피난했다가 9월 초 "여보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장중에 달렸으니 비겁하게 살지말고 차라리 의롭게 죽읍시다"라는 도복일 목사의 간곡한 말에 사모도 눈시울이 굵어졌고 "당신의 뜻이 정 그렇다면 좋을대로 하시지요 저는 당신이 하자시는대로 하겟습니다." 교인들의 권고로 부여로 피란갔던 도복일 목사는 조바심이 나서 죽음을 불사하는 결단을 하고 가족을 이끌고 목회지 삽교교회로 다시 돌아와 교회를 돌보며 남은 교인들을 살피며 위로했다. 1950년 9월 21일 유엔군의 활약으로 후퇴하는 공산군은 남쪽 지도자들을 나포해 가면서 도목사도 체포해 삽교천 뚝방으로 끌고가 총살한 것이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글 출처- http://kcmma.org)

 

순교자 리춘석 집사

 

 

리춘석 집사(1919-1950)


이춘석 집사는 1919년 8월 15일 서천군 서천면 두왕리에서 진사인 이중현씨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3살 때 마을 훈장이었던 엄친께서 영서하시고 편모슬하에 장성하였다. 서천군 거산면 완걸리 야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역경과 비운속에서 장성하였다. 1933년 어느 봄날 부위렴 선교사가 파송한 전도대가 완길리에 들어왔을 때 그 전도대에 의해 12살된 이춘석은 어머니와 함께 입신 종주하여 예수를 영접하고 18세에 부위렴 목사에게 세례받고 교회를 열심히 봉사했다.18세에 화신교회 성극태씨 장녀 성경용씨와 결혼하였다. 19세에 집사임명을 받고 신전교회에 열심히 봉사하였다. 22세에 장남 요한을 낳았고 선춘교회에 이주하여 전북노회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석촌교회를 인도하며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2차대전 발발하게 되매 야학당에서 젊은이들에게 나라사랑의 길을 깨우치고 애국적인 노래들을 가르쳐 왜경들의 감시를 받던중 신사참배거부로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는등 신앙의 절개를 지키던 26세의 그를 왜경이 강제징용으로 일본으로 보내버렸다. 일본에서 강제노역 중에 2년동안 강제노역에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전도에 열심인 이집사는 총감독 마쓰다의 호의로 식량관리자로 있으면서 징용자들의 예배를 인도했고 징용으로 번돈으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해방 후 귀국하여 남은 돈을 이집사가 출석하는 석촌교회에 헌금하였다. 귀국 후 석천군청에 취직되어 근무하면서 신천, 남전, 옥산교회를 개척하고 순회예배 인도와 신송기도실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두신 뜻이 있음을 기도로 찾으며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6.25가 터졌다. 그무렵 서천읍교회 강단을 맡고 있는 그를 미워하고 있던 공산당은 인천 상륙작전 소식을 듣고 후퇴하기 전에 그를 체포하어 서천등기소에 감금했다가 1950년 8월 16일 감금된채 쏘아죽인후 방화해 버렸으니 그는 동족의 죄와 화해를 위해 기도하면서 아쉬움 없는 32세의 젊음을 불태워 하나님께 드렸고 그의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장남 이요한 목사는 부친의 뒤를 이었다.

 

순교자 박만익 장로 (장로교)

 

 

박만익 장로(1906-1949)


1906년 8월 7일 경북 영덕군 삼사동에서 박해문장로의 장남으로 출생했으며 3대에 걸쳐 믿는 가정에서 부친의 엄격한 청교도 신앙을 본받아 어릴 때부너 신앙심이 돈독하였다. 일본 동경에 유학하여 전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후배양성을 위해 동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면서 삽시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였다. 최연매 권사와 결혼하여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였고 지역사회와 교회를 위하여 충성 봉사하시든 중 1942년 장로가 되었으며 항상 스데반과 같이 순교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다가 영덕 경찰서에 투옥 중 1945년 8월 15일 석방되어 여전히 교회와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하였다. 해방 후 좌우익의 혼란기에 국민회의 회장으로 공산주의자들의 표적이 되든중 6.25가 발발되자 공비들의 피습을 받아 우익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신문보도에 친지들과 목회자들까지 피난을 가라고 권고하였으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버리고 도망가겠느냐"면서 스스로 순교자의 각오를 하고. 당시 교회가 열악하여 목회자를 모시지 못하는 때라 고 박만익 장로가 설교도 하시면서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9년 2월 18일 집에서 공비의 기습을 받아 창과 칼에 찔려 당시 중학생으로 주일학교 반주도 하든 아들 재은과 함께 무침히 살해되어 순교하여 하늘나라로 가셨다. 장남을 살려두면 후에 원수를 갚는다고 하여 어린 학생을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현재 두 분은 독립운동과 순교의 공을 인정받아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직계 자손들은 현재 44명이며 고 박만익장로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장로 박재화, 안수집사 박성화, 권사 박선호, 집사 이필우 등 각 소속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자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의사가 4명 대학교수 2명 강사, 교사, 공무원, 장교, 회사원으로 각각 자기 맡은 자리에 교회와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순교자 박연서 목사 (감리교)

 

 

박연서 목사(1893-1950)


박연서목사는 1893년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 청담이란 곳에서 박성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고향마을 청담을 사랑해 일생을 청담이란 아호를 사용했다. 어려서는 8년동안 한문을 읽었고 1908년 그의 나이 16세가 되던 해에 보성초등학교를 졸업했다.1910년 3월 개성보창학교를 거쳐 1917년 6월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백모에게 기름을 받았던 그는 다정다감한 성격에 예수까지 믿게되자 폭넓은 아량을 가진 젊은이로 성장했다. 피어선 성경학교에 재학시절부터 서석, 철원, 화천, 연천 등지에서 목회했던 그는 1919년에 일어났던 ‘철원애국단’연락 책임자로 연루되어 원산 형무소와 서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뤘다. 그의 인간성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최석주의 "내가 본 인생백경 박연서"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루고 나온 박연서는 연천읍교회에 시무하다가 1923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바로 이듬해 장감연합공의회 소속 선교사가 되어 일본 관서지방 거주한 교포들의 신앙문제와 권익문제를 위해 파송되었다. 관서지방 선교사로 4년 활동하다가 귀국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철원,화천, 연천, 서석, 포천 등지에서 교역을 했다. 기독신보가 계획대로 일간지로 돌아설 수 없자 박목사는 손을 떼고 목회일선으로 복귀해 선교교회, 원산상중앙교회, 서울 남산교회 등지에서 1948년까지 목회에 정진하면서 감리사 혹은 교구장 등을 역임하면서 감리교 법을 일괄 손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50년 몸이 쇠약하여 자택에서 요양하다가 6.25사변이 터져 그해 8월 23일 내무서원들에게 끌려가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어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수감 20여일만인 1950년 9월 20일 58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63년 3.1절 국가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유가족으로는 부인 차사라 여사와의 사이에 2남 4녀가 있다. 아들 박은표장로는 경신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퇴임했다. 박연서 목사의 사위 도건일 목사는 현재 서울 창전동 서강 감리교회에서 32년째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 도건일 목사의 부인 박영조 사모는 박연서 목사의 4녀이다. 이와 같이 순교자 박연서 목사의 자녀손들은 선친의 순교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순교자 박헌근 장로 (순복음)

 

 

박헌근 장로(1914-1950)


순교자 박헌근 장로는 1914년 9월 3일에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봉산리 567번지에서 부친 밀양 박씨 민상(敏相)님과 모친 이영풍(李永豊)님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어렵게 살다가 10세에 부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까시에 거주하면서 도교시(東城區) 나마노마찌(生野町)에 있는 일본고등학교를 다니던 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인쇄회사에서 일하다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 이꼬마(生駒) 신학교에서 4년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 후 최예님씨와 결혼하였고 1942년도에는 귀국하여 대전 중동 제일장로교회의 창립과 동시에 집사로 임명받아 면류 청년회장과 주일학교 교사로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1948년 11월에는 순천경찰서 남쪽 남내동에 세워진 순천 오순절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가 담임한 후 순천교회는 300명이 모이는 큰 교회가 되었다. 1950년 4월 9일에는 그 곳에서 박 장로가 주축이 되어 제1회 대한기독교 오순절대회가 열렸고 박 성산, 윤 성덕, 허 홍, 김 성환 목사 등과 박 귀임 전도사를 비롯하여 약 200명의 신자들이 모였다. 이 대회에서 박 성산 목사는 사회를 맡았고, 박 장로는 성회를 인도하였다. 기도와 성경 읽기에 열중하였던 그가 순천교회에 부임해 온지 2년 뒤 여름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피난하지 않고 교우가정 심방과 주일예배에 열성을 다하던 그는 공산군이 순천시를 점령하고 가진 행패를 다하기 시작하자 더욱 더 열심과 용기를 다하여 양들을 지키기에 심혈을 쏟고 있었다. 방언, 신유 등 오순절적 역사가 더욱 강하게 일어나는 가운데 교우가정을 비밀리 심방하고 다니던 그는 공산군 치안 대원에게 검거되어 순천경찰서에 감금당하였다. 신앙을 버리면 살려준다고 회유하는 공산군에게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며 전도하였다. 순천 오순절교회가 순천경찰서 인근에 있어서 그가 고문당하며 부르짖는 비명과 신음소리가 교우들에게까지 들렸다고 한다. 9월에 들어서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들의 행패는 더욱 심하여져서 박 장로에게 가하는 고문은 더욱 혹독해졌다. 그러던 중 유엔군의 인천 상륙과 서울 탈환으로 공산군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퇴각하던 공산군은 감금된 양민들을 대부분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때 박 헌근 장로도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당시 같이 감금되었던 순천중앙병원 원장(최氏)에 따르면, 그는 가족들과 교우들이 보내준 김밥과 옷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전해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피난 중에 잠시 그를 만났던 어느 교인의 증언에 의하면 당신은 노모의 피난 권유를 뿌리치면서도 교인들에게는 얼마 안 남았으니 계속 잘 피신하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양들을 지키다가 노모와 처, 어린 자녀들을 두고 순교한 그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삶을 그대로 실천했던 숭고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남은 유족으로 두 딸이 있는데 차녀 박청자 권사는 광주 서현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4녀 박성실은 군산시 서수면 화등리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성교회의 정진일 담임목사의 사모로서 교회를 섬기며 박헌근 장로님의 순교신앙을 이어오고 있다. 첫째 사위는 전남 강진읍 기독교 장로교회 장로로 있으며 제이차 사위는 전남 광주기술공업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은퇴하시고 사위는 전북방면과 서현장로교회 목사님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소천한 3녀 박성제는 충북 청천 순복음교회에 전도사 직분을 다하다가 40전에 소천한 딸도 있습니다. 순교하신 박헌근 후예들 첫딸 삼남매, 둘째딸 자녀 사남매, 막내딸 가족 4남매가 잘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가정을 이룩한 외손자 외손녀도 있습니다.

 

순교자 백봉렵 전도사 (장로교)

 

백봉렵 전도사(1906-1948)


백봉엽은 1906년 8월 12일 평북 의주군 피연면 태마동에서 초대교회 성도 백낙승 장로와 김락도 권사의 일곱남매 중 들째아들로 태어났다. 백봉엽 전도사는 1948년 1월 눈쌓인 중국 길림성 회덕현 남가자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가 팔로군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중국교회도 북한 교회와 마찬가지로 장개석 군대와 모택동 군대가 맞붙어 대륙을 말발급아래 밟히게 했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모택동은 중원땅에서 종교를 몰아내기에 이르렀다. 백봉엽전도사가 섬기는 남가자교회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예배중지를 명령받았지만 일제 치하에서 목숨걸고 선교하던 백봉엽은 중국당국의 요청으로 예배를 중단할 수 는 없었다. 백전도사는 죽음의 순간을 알았을까? 죽기 한달전부터 죽음의 준비를 하듯 기도에 전념했다. 1948년 1월 어느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오다 교회를 찾아온 팔로군을 만났다. 예배행위를 중지해 달라고 요구하러 온 사람들은 아니고 총을 메고 쩔뜩이는 병사들은 백목사가 성경찬송을 끼고 가는 교인들에게 일일히 인사하는 것을 보자 갑자기 총을 들고 백전도사에게 몇방 쏘아댔다." 아버지는 백봉엽이 보통학교를 나올 때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믿음좋은 어머니 밑에서 신의주 고보를 다니며 주일학교 교사에서부터 청년회 일까지 도맡아서 일을 하면서 교회를 섬기는 법을 배웠다. 형은 왠일인지 돈에 초월한 사람이라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관심이 없었고 백봉엽은 유기그릇 장사를 시작 도자기도 구워서 중국으로도 수출을했다. 청년 그 무렵 청년 백봉엽은 마침 미국유학을 마치고 신의주 제2교회로 부임해 일대 도약의 기회를 맞은 교회 한경직목의 지도를 받으며 소명감을 가지게 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1930년 후반기로 오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한경직 목사 이하 13명의 신의주 제2교회 교인을 감옥에 같히게 했으니 백봉엽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악랄한 고문으로 가뜩이나 폐결핵을 앓고 있던 한경직목사는 옥중에서 병을 얻었고 고문에 못이겨 천황의 신사에 절했다고 고백하며 노안을 적신 것이 바로 이때였다. 김인범 장로가 보증을 서서 출옥을 했지만 13명의 용사들은 찢어진 마음에서 피를 흘리며 울며 뿔뿔이 흩어졌다. 한목사는 교회를 떠나 양로원 원장이 되었고 백봉엽전도사는 중국땅 북경에 망명하여 하북성 석가장에서 석가장교회를 개척설립했으니 1938년 장로교 제27회 총회가 열리던 해였다. 석가장교회 교세가 확장되어 자립할 형편이 되자 길림성 회덕현으로 옮겨 남가자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남가자교회가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올랐을 때 1945년 8.15해방이 되었다. 중국 교포들중에 아주 부자이거나 아주 가난한자 외에는 속속 귀국길에 올랐다. 백전도사는 형제들과 아들들은 서둘러 귀국을 시키고 아내 염영선 집사와 모친 김락도 권사만은 함께 남았다. 목자 없는 어린 양들을 두고 자신들만 귀국하는 몰염치를 저지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48년 1월, 중국의 전세는 혼미했고 그런 혼미속에 목회하던 백전도사는 팔로군의 총에 맞아 교회당 뜰에서 순교했다. 총에 맞아 피를 쏟으면서 아내에게 "모친과 함께 고국으로 가시오" "나는 고요히 하늘나라로 먼저 갑니다" 이 말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으니 이 때 나이 43세였다. 백전도사의 유족으로 여동생 백은엽 권사가 유일하게 살아 매제 박순복 장로와 함께 영락교회를 섬기고 있다.

 

순교자 서기훈 목사 (감리교)

 

서기훈 목사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죽음이 아니요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다.”

 

 한 줌 흙을 퍼 옮겨놓으면 아마 그런 모습일 것이다. 철원평야 한가운데서 長防山은 화선지에 찍힌 획 하나처럼 작고 보잘 것 없었다. 온통 낙엽송 밭이었다. 그리고 그 나무그늘 속에 마을이 소복히 앉아있었다. 마을의 돌담들은 나이가 든듯했다. 한탄강이나 대교천 강돌들일텐데 덕지덕지 세월의 때가 묻어있는 것 같았다. 장흥교회도 돌집이었다. 검고 구멍이 숭숭 뚫린 곰보둘들이었다. 철원 제일교회의 무너진 벽채와 돌계단에서 보았던 바로 그 현무암들이었다. 넌즈시 한 시대를 공유했던 두 교회의 아픔을 암시하고 있었다. 17평 벽돌집을 이어붙였지만 뒷채 곰보돌 벽엔 여전히 잔인한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기독교 감리교단의 첫 반공 희생 사건이자 장흥교회가 연루된 첫 순교 사건은 48년 8월에 일어났다. 이시영 부통령은 멀지않아 38선이 헐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극비리에 ‘38선이북관리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통령은 김윤옥목사(당시 34세)를 불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상임이사를 지낸 김병조 목사(1876∼1947)의 아들. 김목사는 38선 이북 강원도 반공책임자가 되어 38선을 넘어 철원 제일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다. 젊은 부목사는 장흥교회를 주목했다. 이 교회는 1920년 장방산마을 고봉기씨집에서 창립한 철원교회의 자교회.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이었던 신석구 목사를 비롯해 명관조 박경룡 목사등이 담임하면서 민족교육이 단단히 착근한 교회였다. 이 교회 청년 30명을 모아 ‘신한애국청년회’를 결성했다. 46년 3월이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그해 8월 일망타진됐다. 장흥교회 청년들은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갔다. 그리고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박성배장로는 8년, 박정배(당시 36세)는 5년, 김정필(당시 37세) 정창화(당시 35세)는 각각 15년형을 언도받았으나 모두 옥사했다. 몇사람이 옥고를 치르고 돌아왔으나 이내 그들은 다시 함경고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다. 이 사건으로 장흥리 사람들은 시퍼런 한을 장방산에 묻었다. 장방산은 한많은 산이었다. 50년 10월 10일 육군 백골부대가 철원읍에 진주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1백5가구중 30가구가 공산당원이었던 장흥리에는 아직도 서슬이 퍼런 그들의 시선이 마을을 감시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장방산에 ‘터졌다 38선. 만나보자 부모형제’란 삐라가 뿌려졌다. 마을 봉기의 예고탄이었다. 마을 청년들은 어느새 토마토 빨갱이 30명을 공회당에 감금해 놓았다. 그들은 누구 하나 저지를 죄과를 벗어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출타중이던 徐琦勳목사(1882∼1951)는 이 소식을 마을 밖에서 들었다. 그는 허겁지겁 마을로 달려왔다. 이미 두 사람이 처형된 뒤였다. “내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徐목사는 준엄하게 청년들을 꾸짖었다. 徐목사는 徐榮九논산군수의 장남이다.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이미 고저 구역장, 철원지방 감리사, 원산 구세병원 원목, 원산 신고산교회 담임 등을 지낸 원로목사. 47년 5월 신한애국청년회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된 장흥교회를 수습하기 위해 파송된 그의 권위는 대단했다. “내말을 듣지않으면 내가 마을을 떠나겠다”는 호령에 청년들은 ‘원수’를 풀어줬다. 그러나 徐목사는 바로 그 원수들의 손에 순교했다. 전세가 역전돼 마을은 다시 공산군 수중에 들어갔다. 徐목사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경기도 포천군 관인면 냉정리에서 첫 밤을 보내던 徐목사는 열 집이 마을을 떠나지 못한 사실을 알았다. 그날밤 노목사는 가족을 이끌고 장방산으로 돌아왔다. 열 집의 마을 주민들은 내무서원의 눈길을 피해 아궁이나 돌각더미속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노목사가 울리는 새벽종소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리고 한 밤중 돌담장모퉁이에서 “오늘은 약력으로 섣달 스무사흘, 음력으로 동짓달 스무하루, 30분만 있으면 자정”이라고 날자와 시간을 알려주는 노인의 부르짖음을 듣고 있었다. 51년 새해 첫날, 실성한 사람처럼 어두운 마을을 순회하던 노목사의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장흥교회는 종이 울리지 않았다. 다시 장방산으로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러나 노목사는 교회에 없었다. 내무서원들은 노목사에게 처음 외아들 기택씨(현 인천 영화학교 교장)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아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요리의 빈창고로 끌려갔다. 그들은 창고에 훤히 불을 밝혀 놓았다. 등화관제를 하지 않은 건물은 B-29의 좋은 표적이었다. 그들은 목사의 아들을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포탄이 떨어지는 틈을 타 철원을 탈출했다. 그해 12월 13일 몰래 교회를 찾아온 권오창 장로에게 徐목사는‘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죽음이 아니오,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라)란묘한 글귀 하나를 적어줬다. 철원평야는 큰 눈으로 새해를 맞았다. 작은벌 끝 대교천변의 韓집사집에 기거하던 徐목사에게 새해 손님이 찾아왔다. 잘 아는 내무서원이었다. “갑시다.”들판을 가로 질러간 발자국은 세 개였다. 하나는 내무서원의 것이고 하나는 徐모사의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노목사의 길을 마지막까지 동행하던 그의 지팡이 자국이었다. 발자국은 들판을 지나 장방산으로 올랐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발자국은 오래도록 멈춰 서 있었던 것처럼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자국은 동송 사문안골로 이어졌다. 거긴 지금도 철원사람들이 그곳으로 끌려간 사람중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고 해 ‘死不還’골로 고쳐 부르는 곳이다. 15년 뒤인 67년 마을 사람들은 장흥교회 뜨락에 오석으로 된 비 하나를 세웠다. 작은 비신이었지만 이수와 비좌를 갖춘 정성을 들인 비였다. ‘故 서기훈 목사 순교 기념비’에는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이란 그의 시구가 적혀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요(요:25∼26)’란 성경구절은 마을 사람들이 노목사의 음성인양 가슴에 묻고 싶은 바램같은 것일 것이다. 작은 동산 장방산은 동으로 자릿벌, 서로 달챙이들, 남으로 메닷다니들, 북으로 작은벌 등 온통 철원평야를 거느리며 한탄강과 대교천을 굽어보고 있었다. 옛사람들이 둔덕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장방산이라고 멧산자 하나를 더붙인 것은 아마 그 산이 작지만 큰 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출처: http://www.dmzline.com) 

 

순교자 서두성 목사 (성결교)

 

 

서두성 목사(1920-1950?)


서두성 목사는 1920년 2월 11일(음)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에서 부친 서정원씨와 모친 최옥진여사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는 한편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이수 후 향학열에 불타는 소년으로 마을 어른들께 칭찬받는 모범학생으로 손년기를 보냈다. 예수믿는 노인 여집사의 인도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 노인집사의 외손녀와 백년가약을 맺었고 부인 이기남 권사는 독립문성결교회 권사였다. 신혼의 보금자리에서 멀지 않은 단양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그는 낮에는 농군 밤에는 야학선생님 마을 무료봉사 이발사 주일에는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중추적인 역활을 하였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서울신학교에 입학였으며 신학생 시절에 마포구 신수동의 신수동성결교회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1948년 11월 첫 부임지이자 마지막 사역지이기도 한 경기도 용인군 백암리 소재 백암 성결교회에 부임하여 목사안수를 받았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한 해로 사상적 경제적 혼란한 어려운 시국에 지방관서의 협조를 얻어 시국강연회를 얼어 공순주의의 이중성에 현혹되지 않게 노력을 했다. 서목사는 거리가 멀거나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할 수 없는 청소년들을 보고 교회사택을 수리하여 교실을 만들고 서울에서 선생님을 초청하여 수업을 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백암중학교의 모체이다. 청년들의 의식개혁을 위하여 청년단을 조직하여 사경회 시국강연회등을 열어 신앙을 바탕으로 한 확고부동한 국가관을 심어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6.25 전쟁으로 모두 피난을 떠날 때에도 서목사는 교인과 인민군 점령하에 숨죽이며 교회에 모여 기도하며 교회를 지키다 공산군에 체포되어 다른 교인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감금되었다가 1주일 후 석방되어 사택에 머물다가 내무서로 연행되어 북송되던 중 수원의 어느 야산에서 살해되었다. 후배로 목사님을 따르던 권유석(현 부산 소재 동광성결교회 담임)목사도 서목사의 목회활동과 그의 사랑실천과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청년운동 어린이 정서교육을 힘쓰고있다. 또한 특히 굶주린 사람을 만나면 당신이 잡수시던 것 까지도 내어주었으며 유치장에서도 당신 몫으로 나온 밥을 먼저 체포당해 오랜 옥고로 몸이 쇠약해진 사람에게 먹여주었고 평상시 추위에 떠는 이웃에겐 입었던 옷까지 벗어 주므로서 목사는 변변한 외출복도 없었다고 한다. 유족들은 목사님의 뜻을 이어받아 그분께서 못다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도리이며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꿋꿋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순교자 석박남 전도사 (장로교)

 

 

석박남 전도사(1903-1950?)


석박남은 1903년 5월 9일 함흥시 풍량리 석승필 옹의 차녀로 태어났다.석승필은 당시 선교차 함흥에 온 카나다 선교사들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교육열이 남달라 아들은 물론 딸들까지 8남매를 모두 신학문을 공부시켰다. 별난사람이라는 비난의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딸들까지 공부를 시켰다. 석박남과 그 언니는 영생여학교 초대 졸업생이 되어 둘다 선생이 되어 민족교육에 이바지 하였다. 석박남은 주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야간에는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학원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전도자 까지 검했다. 동정녀로 살기로 결심하고 복음전도에 열심을 내다가 서울에 와서 정신학교를 마치고 요꼬하마 공립여자신학교를 졸업했다. 뛰어난 손재주로 수예품을 만들어 학비를 조달하다보니 춘하추동 한벌의 의복, 운동화 한켤레, 1일 1식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그를 친언니 처럼 따랐던 윤보선 대통령부인 공덕귀여사는 그를 가르켜 "석전도사는 성녀였다"고 증언 한다. 일본 고배중앙신학교 출신 가가와 선생의 영향을 받아 빈민선교를 통해 생활속에서 그리스도를 심어야 한다는 철학을 실천하였다. 1934년 카나다 선교부의 선교프로젝트로 사할린 등 로서아지방 노무자들을 위한 선교프로젝트에 10년간 참여했다. 그의 선교사업의 특징은 생활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로 만드는 것이었다. 사할린 선교사로 7년을 마치고 해방과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와 큰교회의 청빙을 물리치고 미자립교회인 서상리교회를 담임했다. 해방 후 1947년 동생들은 모두 월남하여 소식이 끊겼고 2년 후 6.25발발 후 그는 공산치하에서 박해에도 불구하고 월남을 거부하고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하였다. 1978년 경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여사가 순교소식을 동생 석영근 집사에게 알려주었다. 석영근 집사는 "제 누님은 하나님이 이 시대에 보내신 성녀였습니다. 그의 소유라고는 성경 찬송 몇벌과 그가 배우던 종교서적이 전재산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사랑을 몸소 실천해 보임으로 대 사회적인 기독교의 모습이 어떠해야 되는 가를 보여준 분입니다"라고 증언했다. 동정녀로 주님위해 살다가 순교한 석전도사의 동기는 석박순권사, 석영근집사, 석정복권사, 석춘복권사, 석춘근집사, 부산인제대학교수 석동수박사 등이다. 

 

순교자 석옥린 목사 (장로교)

 

 

석옥린 목사(1900-1950)


일신의숙 이사장으로 민족교육을 시도하였다. 부백리교회에는 인근 동리에서 몰려온 청소년들로 가득찼다. 그들앞에 나선 석옥린목사는 청중을 휘둘러 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아는 것이 힘입니다. 배워야 삽니다. 우리 조선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 고생을 하는 것도 공부하지 못한 대중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 따라서 하세요.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배워야 산다” 청소년들은 목에 힘을 주고 교회가 떠나가라 외쳤다. 일신학원은 석옥린목사에 의해 세워진 민족학교였다. 석옥린은 1900년 2월 28일 평안남도 평원군 동암면 부백리에서 석은찬 영수의 3남으로 출생했다. 부친 석영수는 부백리교회를 개척 설립한 인물로서 비교적 개화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석옥린은 한문만 읽은게 아니라 보통학교도 다닐 수가 있었다. 그가 20살 되던 해에 3.1만세운동이 터졌다. 석옥린은 청년들을 이끌고 부백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 일경은 눈이 시뻘개서 석옥린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산속으로 들어가 1년을 숨어 살았다. 그러다가 시국이 좀 잠잠해지자 나와서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아무래도 민족을 이끌려면 배워야 하겠다고 생가해서 21살이란 나이에 중등교육기관에 뛰어든 것이다. 5년의 중등교육 과정을 마친 그는 숭실전문대학으로 가지 않고 평양신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전도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신학생이란 개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다녔는데 한학기 공부하고 1-2년 쉬고 또 등록해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석옥린도 그런 교육과정을 밟았다. 그래서 그는 신학교를 9년만에 졸업했다. 1941년 36회로 졸업을 한 것이다. 석옥린은 목사가 되어 아버지가 세운 부백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평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민족교육에 대한 계획을 실천해 나갔다. 一信學院을 창교한 것이다. 평원군은 내륙고원에 위치한 산골이어서 가난이 깊었다. 주민들은 공부하기 보다 먹고 살기에 바빠 흙 두더지처럼 땅만 파고 살았다. 석목사가 일신의숙을 사작한다고 간판을 내 걸었을 때에 구름떼처럼 모여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 전체를 발로 뛰며 지역민들을 설득했다.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제 이름자나 쓸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면사무소에서 공문이 날아들면 무슨 공문인가 읽을 줄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를 보내십시요. 무료로 가르쳐 주겠습니다.” 무료라고 해도 무지한 주민들은 선뜻 아이들을 보내지 않았다. 그 어린아이의 일손도 귀해 당장 급한 농사를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석목사는 일신의숙을 낮에만 가르치는 주간학교를 운영하지 않고 야간학교까지 운영했다. 그들이 바로 이 나라의 부흥을 책임진 동양의 재목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교육하며 민족의식과 함께 신앙을 아울러 주지시켰다. 민족의식 교육은 이 나라에 태어난 것에 대한 자각의식이고 신앙교육이란 하나님의 뜻때로 살아갈 의로운 백성을 만드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석옥린은 목사가 되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뛰었다. 일제하에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구호를 복창하며 일신학원 창교하여 8.15해방까지 민족의식과 함께 신앙심을 아울러 주입시키고 실천했다. 해방직 후 동암국민학교 명예교장으로 교회를 시무하면서도 학교를 재건축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해방 후 기독교도연맹 결성하고 가입을 강요하는 강양욱의 요구를 거부하고 김화식목사를 중심으로 의식있는 목사들이 기독교자유당을 창당하여 남북이 통일될때 기독교정신을 구현할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창당준비를 할때 석옥린목사도 중심멤버가 되었으나 내부고발로 창당도 못하고 체포당해 함흥 본궁교화소(형무소)에 수감되어 강제도동에 시달리든중 6.25가 터졌고 1950년 12월 북진하는 UN군들의 의해 함흥과 흥남이 접수되자 퇴각하는 공산당들은 10월 15일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석옥린목사등 애국지사들을 무차별 사살했다. 장남 석윤경목사 차남 석윤식목사 삼남 석윤초장로 장녀 석윤란집사. 손자 석남식목사. 증손 석승권(장신대)으로 신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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