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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순교기념비 (3)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09. 5. 9.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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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장규명 목사 (장로교)

 

장규명 목사(1891-1950)


장규명 목사는 1891년 5월 11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농사꾼의 3남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규명은 15세가 되기 전 사서감경을 줄줄 읽을 정도였고 미문이어서 후에 총회장이 되어서도 총회내에서 알아주는 문필가였다는 것이 보필하던 목사들의 변이다. 농사꾼인 그의 부친은 " 대의명분에 사는 아들이 되라는" 지조높은 뜻을 그의 인생의 등뼈로 삼았다. 한문공부를 끝낸 그는 양시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신학문과 함께 기독교에 귀의했다. 국가 잃은 시름에 암울한 시대를 당시 인테리 젊은 층 중에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삶의 피안을 삼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 미국인 목사가 부흥회를 승동교회에서 개최했을 땐 빈자리가 없었고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열창할 때에는 얼마나 뛰면서 발을 굴렀던지 마룻장이 내려 앉을 정도였다. 예수쟁이가 되 그는 26세에 결혼을 하고 1924년 33세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17회) 1924년 졸업과 동시에 목사안수받고 선천중앙교회에 부임 기나긴 목회의 외길로 줄다름첬다. 평소 키가 크고 멋쟁이 기질을 타고 났던 장목사는 이내 교인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았지만 1930년대 들어서고 부터는 신사참배문제에 봉착해 본격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 1931년 제20회총회장에 당선된 그는 총회를 위해 큰 일을 했으나 1938년 제 27회 총회시 신사참배가 국민의례로 결정되자 그는 소리처 "아니오"를 연발해 주기철 김석창 장규명 최봉석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는 등 6회나 옥고를 치루었다.매일 장목사 사택에 일경을 상주시키고 감시감독하는 등 1945년 8월 18일을 기해 기독교지도자들을 사형에 처하려 각본을 짯지만 3일전인 1945년 8.15일 해방됨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다시 선천중앙교회로 돌아가 목회에 임해 마음놓고 목회할 줄 알고 마음도 부풀었으나 해방 후 기독교도연맹가입거부, 1947년 11월 3일 주일선거 협조하지 않는다 하여 이북5도 연합회 임원들이 모두 체포되던날 함께 보성학교 지하실로 끌려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3개월만에 풀려났다. 당시 그를 권총으로 위협하며 "살고 싶은가? 죽고싶지 않으면 당정에 협조하라"고 회유할 때 가슴을 드리대며 쏘아보라고 함으로 인민군은 섬짓해하며 총을 꽂았다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3개월만에 풀려났지만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월남하기 위해 기차를 타다가 발을 헛딛어 발가락 3개를 짤려 하나님이 북녁땅에 머물러 성전을 지키게 하시는 체험을 했다. 1948년 10월 정치보위부는 간첩혐의로 날조하여 그는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반동 종교인과 지식인을 숙청할 때 수감중인 장목사도 순교의 면류관을 썼으니 그의 나이 60세였다. (이하 글 출처- http://kcmma.org/)

 

순교자 장수은 전도사 (장로교)

 

장수은 전도사(1911-1950)


1911년 황해도 서흥읍에서 출생하여 재령 명신고녀를 9회로 졸업하고 1931년 평양여자신학교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1934년 동교를 졸업했다. 황해도 재령. 시흥등에서 유치원 일도 한 그는 모교인 평양여자신학교 사감으로 4년간 시무했다. 그 후 1942년 평양 신양리 신암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직하다가 1950년 6.25사변 전날 백인숙전도사와 함께 공산당에 의해 구속되어 깊은 구덩이에 쓸어넣는 생매장순교를 당하였다. 신암교회 김길수 목사의 순교 후 담임목사 없는 교회를 혼자 목회하며 교인을 성전에 모아 철야기도를 그치지 않았으며 새벽기도회 때이면 정보부원이 언제나 지키고 있었다. 6.25직전에 교회가 문을 닫게 되자 교인 집집마다 심방함으로 신앙을 지키며 교회를 사수 순결한 신앙을 널리 전하다 공산당에 의해 구속되어 깊은 구덩이에 쓸어넣는 생매장 순교를 하였다.

 

순교자 전진규 목사 (감리교)

 

전진규 목사(1895-1950)


1895년 6월 25일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읍내리에서 전사명 전도사의 장남으로 출생 개성의 한영서원과 송도고보를 졸업 일본 관서학원신학부와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 강원도 이천읍교회를 시작으로 개성 동문안 중앙 철원읍교회 철원지방 감리사 원산중앙교회 뤼하교 구세병원 이사장을 역임 서울 성동교회(현 보문교회)목회 중 1950년 8월 공산당에게 납치 순교했다.

1909년 8월 15일 세례받음(당시15세)

1919년 10월 1일 전도시작

1919년 10월 - 1920년 8월 강원도 이천읍교회 전도인

1920년 3월 27일 전도사 직첩받음

1921년 9월 -1922년 8월 남산교회(개성)전도사

1924년 9월 연회학습

1925년 9월 6일 집사 안수받음

1925년 4월 - 1926년 9월 강원도 이천읍교회 목사

1926년 9월 년회완속

1926년 9월 - 1927년 8월 개성 동문안(東門內)교회목사

1927년 9월 - 1930년 8월 개성중앙교회 목사

1930년 9월 - 1934년 8월 강원도 철원읍교회 목사

1934년 - 1935년 철원지방 감리사

1935년 - 1943년 원산 중앙교회 담임

1941년 강원 동지방 감리사

1935년 - 1943년 원산 루시 고등여학교 이사장

원산 구세병원 이사장

원산 광명학교 이사

원산 교회연합회 외장

감리교 신학교 이사

총리원 이사

주일학교 전국 연합회 회장

원산 보혜여자성경학원 이사 등 역임

1943년 8월 기독교조선감리교회 감독(당시 통리)역임

1943년 진남포 신흥리교회 담임

강서지방 감리사

1944년 해주 남본동교회 담임

1946년 월남하였음

1946년 개성중앙교회 담임

1947년 의정부교회 담임

1948년 - 1950년 8월 서울성동교회(현보문교회)담임

경동지방 감리사

총리원 전도국 위원회 위원장

재건파 복흥파 합동 추진위원회 위원장

총리원 이사

연희대학교 재단 이사회 이사

1950년 8월 성동교회에서 공산군에 남피 순교하시다

1980년 4월 10일 사모 이수산 권사 소천

1993년 10월 24일 보문교회에 전진규목사 순교비 제막

 

순교자 전치규 목사 (침례교)

 

전치규 목사(1878-1944)


전치규는 1878년 1월 5일 경북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농부 전달용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문서당에서 오랫동안 한문을 읽고 조금 자라서는 훈장이 되어 후학 양성에 힘썼다. 23세에 예수를 믿고 펜윅 선교사밑에서 6년 성경공부하고 1916년 38세에 목사가 되고 8년후 1924년에 동아기독교회 3대감독이 되어 10년동안에 124명의 전도인을 시베리아 만주 일대에 파송하는 전도의 개가를 불렀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교단 5역 김영관 백남조 이종덕 전치규 노재천을 수감해 3개월 옥고를 치루게 했다. 1942년 6월 복음찬미가에 수록된 찬미가의 내용(대황님 예수씨 보혈)을 꼬투리 잡아 5대감목을 가두고 이듬해 9월 11일에는 전체 동아기독교회 임원32명을 검거해 수감하고 천년왕국 신앙과 만왕의 왕 예수신앙이 천황체제에 위배 된다며 예수신앙을 버리지 않는 한 석방될 수 없음을 분명히했다. 일경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복음찬미 7장에 기록된 "대왕님 예수씨 보혈"이란글을 가지고 꼬투리 삼아 "예수가 대왕이면 천황은 대왕위인가?"고 묻는 일경에게 전치규목사는 "우리 주 예수는 천지를 창조하신 구세주이시다. 그 위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있을 뿐이다. 천황이 예수 위냐고 묻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스런 언행이다"라고 그를 취조하는 고등검찰을 호되게 책망을 했다. 전치규는 전기의자에 앉아 전기고문등 매일 심한 고문으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되 옥고를 치르며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는 1944년 2월 14일 그날도 한 차례의 심한 고문을 받고 자리에 누워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 땅에 있는 동안 아버지 영광에 살게 하시더니 이제 부르시옵니까?" 남겨진교단과 육신적 식구들을 부탁드리니 보살펴 주옵서서"하고 기도하는 중 숨졌으니 그의 나이 66세였다.

 

순교자 정치호 목사 (장로교)

 

정치호 목사(1917-1950)


정치호는 1917년 6월 30일 평안북도 철사군 여한면 서봉동에서 정대흥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이 일직 타계하고 부친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보천성 청원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부친이 깨인분이라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민족학교에입학해 예수를 알게 되었고 신학문에 눈뜨게 되었다. 험난한 생활전선에서도 그들 형제는 신앙만은 철저하여 그의 나이 19세에 무순교회 집사가 될 정도로 열심히 교회봉사를 했다. 봉천천 성경학교에 입학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땅끝 선교에 대한 사명감이 불타오르게 되었다. 성경학교 졸업반 때 22세에 본계호교회에서 목회하든 중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내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십계명에서 금한 우상숭배는 못한다"라고 거부함으로 '부정선인'으로 본계호교회 목양실에서 체포되어 평양경찰서로 압송되어 9개월간 모진 옥고를 치루고 출옥했으나 일경의 압제로 강단에 못서게 하여 만주로 돌아갔다. 일경은 교역자를 교회에서 쫓아내기 위하여 1. 장로를 회유해서 교역자를 강단에 못 서도록하고 2. 장로가 거절하면 장로의 사업체나 사상을 꼬투리 잡아 탄압 3. 주먹잡이들을 투입시켜 교인이 되게 한후 린치를 가해 스스로 도망가게 했다. 정전도사는 일경의 악랄한 제재 수단에 밀려 섬기던 교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문순의 부친에게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이름없는 성도로 교회를 섬겼다. 교역자가 총회참석으로 자리를 비울때 강단을 지켜달라고 부탁해서 주일 설교를 했는데 그것도 못하게 일경이 와서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다.(당신은 대 일본 제국의 중죄인이야. 설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하며 방해를 했다. 4년의 생활은 그에게 생지옥같은 생활이었다. 1945년 해방 후 그곳 탑련교회의 부름으로 고국에 귀국하지도 못하고 무순 탑련교회 전도사로 부임 섬기면서 1947년까지 봉천신학교 4학기를 마치고 1948년 2월에 서울로 돌아와 이태원교회 목회를 시작하면서 총회신학교에 편입해서 2회로 졸업했다. 이태원교회를 시무하던 정전도사는 1948년 12월 통일을 염원으로 남북교회(현 미암교회)를 개척하고 1950년 3월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봄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고 3개월 후 6.25동란이 일어나 나이많은 교우들과 교회를 사수하던 그는 기독교도연맹 가입거부로 내무서원들에 의해 연행되 북으로 끌려가고 돌아오지 못했다. 정목사의 유족으로는 아들 정준철과 사모 승병도 권사가 서울 은평구 증산동 166-20에 살며 서영교회를 출석한다. 장녀 정숙희 집사는 평강교회를 차녀 정숙명 집사는 대전에서 살며 대전성서침례교회에 출석하면서 경건한 신앙인들로 주어진 일터에서 충성을 다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순교자 조상학 목사 (장로교)

 

조상학(趙尙學) 목사 (1877-1950)  


전남 승주군 송광면 출생으로 일제에 투옥되고 공산당에 순교당한 장로교 목사이다. 조상학목사는 1877년에 전남 승주군 송광면에서 양반집 조형섭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생활정도도 풍요롭고 행세하는 양반의 가문에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별 어려움없이 순탄하게 살아왔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한문을 수학하면서 유교적 인생수업을 훈육받아 아직 젊기는 했지만 당시로 보아서 또 그렇게 어리지만도 않은 나이였다. 또 타고난 세도집 가문에서 고고ㅓ학게 전통적 선비로서 다른 학문이나 사상에 젖어들거나 수용할 만한 데라고 바늘끝 꽂을 만큼도 없는 인품에 꼿꼿한 이 젊은이에게 당시 감히 누가 "예수"소리를 할 수 없었고 또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따로 있지 그에게는 어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믿음의 저력과 끈질진 한 사람, 붙잡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 전도인이요 조사였던 지원근이 있었다. 이지 조사와 함께 물러설 줄 모르는 한 사람 서양인 선교사로 오웬(Owen,Clement Carrington)이 있었다. 오웬은 물론 하나님의 뜻하신 바이나 개인적으로 말하면 사람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도에 관록이 있었다. 벨 선교사와 함께 개척한 교회를 보면, 목포의 양동교회를 비롯, 송정리교회,해남군 선두리교회, 보성군 신천리교회,육곡교회,양동교회,운림리교회,양주 양림교회,완도군 관산리교회, 나주군 내산교회,방산리교회,장흥군 진목리교회,고흥군 옥하리교회,화순군 화순읍교회, 광양군 광양읍교회 그 밖에도 15개처 교회를 세운바 있는 이런 사람이다. 조상학이 아무리 고집센 젊은 선비라고도 해도 오웬이나 지원근 같은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도 없었다. 또한 오웬은 1898년 11월에 한국선교사로 내한한 이래 벨9Eugene,Bell:배우지)선교사와 함께 목포 선교를 시작하는 한편 목포진료소를 개설했고 의사이기도 한 그는 광주선교부를 시작하여 순천,광주,목포 등지를 순회하며, 의료 및 복음선교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람으로 그 때만 해도 그 신기하기만 한 그 서양 의학의 기술이었다. 이런 헤택을 주는 이 선교사가 비록 이국적인 외인이기는 하지만 무척이나 유식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조상학은 그래도, 이쯤은 되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양반 유학도의 입장에서 예수를 받아들일 만한 취지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학력과 인격에 끈질긴 전도에 드디어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광주에서 학습을 받고 2년 후엔 1909년 벨(Bell Eugen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완전히 거듭난 사람으로 이제는 성령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깊이 있는 성경을 배우면서 연구하는 중에 그토록 힘들여 복음을 받아들인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나도 전도인이 되어야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때 이천만 동포를 다 전도할 만한 부푼 마음과 성령의 인도로 뜨거워진 마음이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자기가 그렇게 어렵게 받아들였던 것은 두분의 전도자들에게 고마움과 함께 끝낸 인내와 성실로 그 전도를 자신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큰 덕이 아닐 수가 없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그는 개인적으로 전도에 열심을 다했다. 이같은 결과가 열매를 맺어 여천군 율촌면 장천리의 조의한이 예수를 믿던 날로부터 또 그런 열성이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동네에다가 장천리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또 다시 조의환과 함께 또 힘을 합해 한태원에 전도하자 그도 예수를 받아들여 광양군 신황리에 신황교회를 세웠다. 조상학의 전도열심은 더욱 그 열기를 더해 이번에는 보성지방의 최초의 교회인 무만동교회도 정태인과 김일현 그에게 전도받아 세운 교회였다. 이 중에 정태인은 목사가 되어 순천 삼미교회를 설립하고 1917년 평양장로교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노회에서 안수를 받아 보성군 벌교지방 목사로 무만교회를 비롯 낙안 평촌교회, 고흥읍교회 등을 순회 인도하다가 순천읍교회, 무만교회를 두루 시무하면서 제주노회로 옮겨 모슬포교회,삼양교회,월막교회, 고산교회를 시무하면서 목회에 큰 공을 세운바 있는 분이었다. 그리고 순천읍교회도 조의환과 함께 전도하여 최집사님과 최정의가 믿고 세운 교회로서 이와 같이 조상학은 전도받은 자가 일대에 머문 자가 하나도 없이 전도받아 믿으면 더 많은 전도를 하는 사람들이 되곤 하였다. 이 와 같은 업적은 그로 하여금 1911년에는 광주의 숭일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학원전도를 쉬지 않았다. 1916년에 순회전도사로 부름을 받아 각 지방을 순회전도하는 중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입학하여 1923년에 제16회로 졸업을 하고 바로 그 해 순천노회가 전남노회로부터 분립하면서 최초의 목사로 안수를 받아 광양읍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또 순천노회의 최초의 총대가 되어 제12회 총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율촌교회,1940년에는 경남하동읍교회, 1946년에는 여천 덕양교회에 시무하였다. 조목사는 1940년 순천노회 청년 조직 단체인 원탁회 사건으로 여러 목사 장로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는 순천중앙교회에서 청년들이 신사참배에 불참하고 항거할 것을 뜻하고 애국적 신앙사수의 목적으로 힘으로 모아 조직적으로 반대할 것을 결의한 조직체였는데, 황두연 장로를 비롯하여 목사로는 조상학, 양용근,김정복, 김상두,오석주,김형제,나덕환, 선재련,김순배,김형모등과 장로로는 박창귀,선춘근,김원식 장로등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때에는 조 목사는 청력이 약해 취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자 그대로 석방시킨 일도 있었다. 그때 벌써 연세가 70고개에 달한 노구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나날을 보내던 중에 이 민족에게도 일제의 패망으로 그 굴욕적이고도 치욕스러운 결박에서 해방이 되는 날은 왔다. 그러나 북한 땅은 공산정권으로 인하여 수난을 겪었지만 이제 우리 세상인가 하는 날들은 꿈결같이 사라지고 민족적 사상이 좌우로 갈려 편할 날이 없는 나날이 계속되던 중에 6.25가 터졌다. 남단 이곳에도 공산침략의 태풍이 거세게 소용돌이 쳤다. 제직들의 강한 권유로 피신을 종용했으나 강권을 뿌리친 채 막무가내로 교회를 사수하겠다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대신 희생할 테니 나의 시체는 저 산에다가 묻어주시오" 굳은 결의로 주의 피에 참례하는 성찬을 베풀고 난 그후 얼마 안되어 여수 내무서에서 보낸 3명의 서원에게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예수 전하는 일을 인지 않았다. 70일을 감방생활을 하고 그 해 9월 28일 10리 밖에 이는 미평공동묘지로 끌려갔다. 이 날 함께 동역하던 손양원 목사의 뒤를 따라 그 날 같은 곳에서 손 목사의 순교를 보면서 그 뒤를 따라 살해되니 73세를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썼다. (출처: http://kcm.co.kr/person/person_k013.htm)

 

순교자 주삼식 전도사 (장로교)

 

 

주삼식 전도사(1908-1950)


1908년 10월 24일 전남 목포시 옥암동에서 아버지 주경환의 3남 1녀중 3남으로 출생했다. 목포고등성경학교를 입학과 동시 무안 임성교회(현 목포시 옥임교회)를 개척하며 목회중에 1950년 3월 장로회신학교(서울남산소재)를 입학하여 재학중 6.25사변으로 1950년 8월 4일 옥암동 섬너리에서 예수선생이라는 죄명으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인민재판을 받은 후 총살형으로 순교했다.

 

순교자 주채원 목사 (장로교)

 

주채원 목사(1904-1950)


주채원은 1904년 9월 28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추면 서호리에서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주영섭의 2남으로 태어났다.태어나자 얼마 안되어 비밀리에 만주를 비밀리에 오가며 독립자금을 모금하던 부친은 친일파의 밀고로 헌병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끝에 세상을 떳다. 부인도 남편의 죽음소식을 듣고 시름시름 앓다가 남편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주채원은 형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15세에 그의 동리에 온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어야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라는 말에 주채원은 정신없이 예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주씨가 예수를 믿으면 주씨를 버려야 한다. 양반 주씨가 상놈 주씨로 전락하려느냐? 고래로 야소는 무부무군의 사도로서 한번 빠지면 부모조차 몰라보게 된다더라 하면서 핍박하는 어른들의 꾸중을 들으며 당시 사회주의 이념에 물든 집안이 양반같지가 않아 벌떼같이 일어나 구박을 하는데도 오로지 새벽제단에 나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기도를 통해 이사야43:1-3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위로에 용기를 얻어 더 열심히 예수를 믿고 캐나다 선교부에서 세운 함흥의 영생학교를 다니면서 지도자 자질향상에 노력했다. 1926년 22세 되던해 교회주선으로 결혼을 하고 평양에 가서 노동을 하며 11년만에 1937년 32회로 졸업을 하고 함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함흥중앙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다. 1938년 신사참배가 총회에서 결의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명령을 더 귀하게 여기고 거부하다가 옥에 갇히고 수난당하고 순교당하는 손양원 박경구 주기철 박관준 이영한 등 수 많은 교회지도자들을 보고 또한 창씨 개명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주목사는 차리리 옥에 갇히는 편을 택하겠다고 반발을 했다. 1940년 우리교회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창씨 개명을 권고하는 담임목사에게 "살기 위해 신앙을 버리고 살기위해 부모도 버린다면 그건 죽은 목숨아닙니까. 차라리 저는 옥에 갇히는 편을 택하겠습니다"하며 거부했다. 주채원 목사는 내선일체를 반대하는 비국민이라는 죄목으로 일경에 체포당하고 목사이기 때문에 더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3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하여 함흥중앙교회로 돌아가 섬길 때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주씨문중과 공산당의 회유를 거절하고 죽음의 위협을 피하여 월남해서 행화정교회를 부흥시키며 새로 교회를 신축했다. 월남하여 공산당 치하의 악몽이 가시기도 전에 6.25동란을 겪어야 했다. 피난을 권유하는 마포구 국회의원 기사돈 장로에게 "목사가 양떼를 두고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포탄이 퍼붓듯 할때도 행화정 교회를 지키며 매주 주일 예배를 드리던 중 8월 어느 주일 예배를 마칠때 정치보위부에서 나온이가 "갑시다 조사할 게 있습니다"하고 손에 수갑을 채워 체포해 끌고 간 후로 소식이 끊겼다. 그의 후예로는 LA에서 사역하는 주요한 목사와 신광교회에서 충성하는 주요셉장로 뎀바에 거주하며 교회봉사하는 셋째아들을 비롯해 딸은 권사, 사위는 장로 3남 3녀 모두가 그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순교자 진학철 목사 (장로교)

 

진학철 목사(1895-1950)


진학철은 1895년 2월 26일 서울에서 출생했다.진학철은 부친이 알렌의 제중원 의사이며 양부모가 초기 기독교 신자라서 장로교 초대선교사 원두우 선교사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유복한 가정으로 서울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창궐하는 천연두 퇴치를 위해 황해도로 파견되는 부친을 따라 황해도에 이주해 재령성경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 전도사로 파견되어야 하는데 그는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바라보며 구국일념에 불타 교육입국의 기치를 든 것이다. 따라서 전도보다 교육입국의 기치를 들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1919년 3.1만세운동에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같은 학숙의 동료교사 이기풍과 그가 출석하던 교회의 박기영조사와 손을 잡고 밤새워 태극기를 그려 사리원 장날인 3월 11일 만세운동을 봉기시켰다. 민중들은 요원의 불길 처럼 일어났고 헌병대와 주재소가 불타는 사태로 발전하자 그는 잡혀가 뼈를 분지르고 주리를트는 갖은 고문을 매일같이 당하다가 1년 6월의 징역언도를 받았다. 그는 옥살이를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평양신학교를 입학한지 10년만에 1932년에 신학교를 마쳤다. 그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6개교회를 돌아보면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우선되어야 하다"고 하면서 목회를 하다보니 먹을것 입을 것 쓸것이 제대로 남아날리 없었다. 그는 복학해 공부하는 시간보다 휴학해 현장 전도를 더 많이 하는 가운데 10년만에 마쳤다. 1932년 안수를 받은 후 평촌교회로 부임했으나 교인들을 괴롭히는 일제의 탄압으로 쫓겨 다니며 목회생활을 하는 중 목사안수 후 13년만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주일선거반대, 기독교도연맹가입 거부 등으로 체포되어 곤욕을 치룬일도 많았다. 공산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만식 장로등 뜻있는 이들과 빈번하게 만남으로 공산당의 눈의 가시가 되었다. 6.25가 터지자 파괴된 도로보수 공사장으로 강제로 투입되어 공사하든 중 B29가 폭탄을 투하할 때를 기회로 도주해 반공호로 들어갔다가 UN군의 진격으로 공산당들의 집이 불타는 새벽미명 집으로 돌아와 가족의 안부를 묻고 닭 울기 전 기도처인 이장로의 사과밭에 방공호에 갔다가 동산당원들의 집이 불타는 것으로 보고 새벽에 집안의안부가 걱정되어 안부를 묻고 기도처로 가려고 돌아서는 찰라 마을 반장의 고발로 공산당과 청년 몇명에게 목덜미를 검어쥐고 밖으로 끌고 나가 아내의 비명소리와 아이들의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끌려갔다. 공산당 패주병들에게 끌려가면서도 "예수믿어야 낙원에 간다"고 전도하는 그를 향해 " 좋은 나라에 너나 먼저 가라"총성이 요란하게 울리고 진목사는 정신없이 쓰러졌다. 진목사의 신음소리를 듣고 뛰어간 가족들이 총쏜 사람의 얼굴을 아느냐고 물었지만 진목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그들도 우리 이웃이니 그들을위해 기도하시오 이웃사랑이 큰 계명인거요."하고 "주님 제가 본 주님을 저들도 보게 하소서" 기도하고 "순천(수철)아 네가 내 뒤를 이어 목사가 되 주어라" 하는 마지막 최후의 기도와 부탁을 했다. 이렇게 1950년 10월 14일 새벽 진목사는 주님 나라로 떠났다. 후예중 맏딸은 자운철목사의 사모, 큰아들 수철목사는 한국기독교순교자유족회 회장 둘째아들 영천은 장로로 막내딸 순신은 노원철 목사의 사모로 신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순교자 최상은 목사 (장로교)

 

 

최상은 목사(1904-1950)


최상은은 1904년 11월 21일 황해도 평산에서 최일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네살에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안고 자랐으며 어려서는 한문과 붓글씨에 명필이였다. 1918년 미션스쿨인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 3.1만세 대열에 가담하였고 졸업 후 그는 일본인 경영 방직회사에 취직하여 사회 곳곳의 각종 일에 부딪치면서 일제의 수탈과 극심한 차별대우를 뼈저리게 경험하는 등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에 피가 꺼꾸로 솟구쳐 올랐고 일제에 대한 인상은 곱지 않았다. 그가 노동쟁의에 가담하게 된 것은 1924년 봄이었고 시위내지 파업건수가 전국적으로 45건에 이르렀다. 일경은 그를 반역행위로 규정하고 구속하여 심한 고문을 했고 재판결과 4년의 중형이 내려졌다.기도로 옥고를 극복한 후 그는 문평 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마르다 성경학교를 졸업한 전현숙과 결혼하고 교사로 있으면서 영흥교회의 전도사가 되었다. 평양신학교에 재학시 신사참배 반대설교가 적힌 노트의 학생들을 모두 잡아갔다. 1938년 8월 21일 신사참배불참이유로 학교를 자진 폐쇠하고 재학생들에게 무기휴학 통지를 발송했고 27회 총회가 9월 10일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되었다. 1939년 평신을 졸업한 그는 함해노회에서 목사로 안수 받은 후 혼자서 50여 교회를 순회하며 돌봤다. 패전이 가까울 무렵에는 더욱 교회를 탄압하여 문을 닫는 교회가 많았다. 8.15해방과 더불어 새아침이 밝았으나 1946년 11월 3일 주일선거 강요상황에서 1947년 5월초 아내와 식솔들을 월남시키고 수일 후 결국 자신도 38선을 넘었다. 1947년 응암교회 제 3대 담임으로 부임 교회가 부흥하여 건축이 과제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공비들이 예배를 방해하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공비의 표적이 된 그는 1950년 6월 18일 당회 앞에 사표를 내고 원남동 처가에 가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중 6.25동란이 터지고 설상가상 아들의 늑막염으로 장례를 치루는 등 슬픔에 잠겨 통곡의 기도를 하는 중 세사람의 내무서원에게 영행되어 소식이 끊겼으니 그의 나이 47세였고 사모와 8남매를 남겨둔채 아무 말없이 갔다. 전현숙 사모는 모진 고통과 가난의 굴례를 뚫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으며 사모는 삼양제일교회 전도사로 귀감이 되었고, 자부 한병옥 전도사는 순교자 유족회 총무로 봉사하고 있다.

 

순교자 최석모 목사 (성결교)

 

최석모 목사는 아현성결교회에서 23년간 목회하다가 한국 전쟁 당시 도주하는 북한군에 의하여 납북되었다.

 

순교자 최인규 권사 (감리교)

 

최인규 권사 (1891-1942)  

 

1881년 11월 15일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1921년 북평제일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속장, 유사, 권사로서 주일학교 교장으로도 봉사하였고 1932년 천곡교회를 권화선 속장과 함께 개척하여 열심히 전도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장로가 없는 교회에 장로 역활까지 했다. 또 자기의 전재산인 밭 539평과 논 1369평을 천곡교회 대지로 헌납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재목을 운반하는 등 초가 8칸의 예배당 건축에 헌시하여 1933년 봉헌식을 가질수 있었다. 강대상 3개도 만들어 옥계, 천곡, 북평교회에 기증하였다. 이와 같은 헌신적인 신앙생활로 감리교 총리원 이사회에서 선정한 모범신자에 선정되어 1938년 10월 포창을 받았다. 최인규는 창씨개명과 일어사용, 황국식민서사를 거부하는 민족주의자였고 철저한 신앙의 소유자로 일제의 억압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40년 5월 일경에 체포되어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이라고 기뻐하였다. 함흥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는 재판관 앞에서도 담대히 신앙을 증거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할 뿐 아니라 일본 천황도 하나님이 내신 사람으로 지인에 불과하다고 담대히 말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징역2년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감옥에서도 늘 기쁘게 찬송부르며 전도하다가 1941년 10월 주로 항일투사, 사상법들이 수용되어 있던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병을 얻어 갇힌지 3년이 되던 1942년 12월 16일 대전형무소에서 순교하였다. "형제 여러분 믿음위에 굳게 서서 주의 일 하시오. 나중 천국에서 우리 만납시다" 그가 남긴 유언이었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는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해방 후 1946년 3월 유골을 천곡교회로 옮겼고 12월 16일에는 수교 44주기를 맞아 기독교대한감리회 동해지방에서 정성을 모아 순교비를 건립했다. 순교한지 40년이 되던 1982년 8월 최인규 권사가 섬기던 천곡교회 마당에 선교탑이 세워졌다.   (글 출처- http://kcmma.org)

 

순교자 한경희 목사 (장로교)

 

한경희 목사(1881-1935?)


한경희는 1881년 평북 의주에서 부호로 권세를 부리던 한승주의 3남으로 태어났다. 7세시에 부친사망 후 가세가 기울어지자 형제들이 사업에 어느정도 성공 기반을 잡는 듯 하더니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모조리 잃어버리고 퇴락을 했다. 갑자기 평민으로 전락되자 형제들은 유명한 싸움꾼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서양전도인만 보면 행패를 부리고 싶어 안달이났던 그는 23세때 예수믿는 친구가 하루밤 함께 자다가 두고간 구세론이란 책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형제들의 반대와 구타에도 불구하고 믿은지 3년만에 세례를 받았고 3개의 교회를 개척한 열성파였지만 교역자로 부족함을 느끼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7회로 졸업하고 평북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노회 파송을 받아 외지 선교사가 되어 길림성으로 간 것이다. 길림교회에 정착해서 선교와 동시에 조선족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특히 조선인의 생활 지위문제에 착안하여 잘사는 것이 힘이라고 믿고 농무 상무 조합을 만들어 저축생활을 권장했고 중국관헌들과 교섭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농지 마련 등 실생활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교육을 통한 그의 민족의식고취는 조선족 동포들에게는 구세주의 목소리로 들렸으나 일인 통치자들에겐 반골 독립투사로 비쳐졌다. 남만노회장으로 동분서주하고 있을때 몇차레의 마적의 습격을 받고 살림을 탈취당했고 5회나 일경의 심사를 받아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되 3년간의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형무소에서 출소해 1935년 정월 초하루를 맞아 가정예배 겸 송별 예배를 인도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오소리강에 이르렀을 때 공산 비적 50여명이 나타났다. 마침 한목사를 마중하러 김창근영수가 합휴해 있었다. 그들의 행랑을 뒤졌으나 미싯가루 두봉지와 신의주 교회에서 여비를 준 돈 몇푼이 전부였다. "왜 이렇게 선교사로 간다는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거요."하면서 그 둘을 실신하도록 때리고 오소리강 얼음 구멍 속에 밀어넣고 공산 비적들은 왔던 길을 말을 타고 유유히 사라졌으니 한경희 나이 55세였다.

 

순교자 허  은 목사 (장로교)

 

허  은 목사(1913-1950)


허은은 1913년 2월 28일 평북 철산군 여한면 연수동 316번지에서 애국지사였으며 교회건축을 위해 사제를 털어 예배당터와 목재를 들여 건축하였던 열정적인 신앙인 허셕현 장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한후 선천성경학교를 졸업 이어 서울로 상경하여 피어선신학원에 재적하면서 양반교회로 소문난 안동교회 조사로서 활동했다. 똑똑하고 총명하며 애국애족혼에 뜨거웠던 허은은 안동교회 윤보선 대통령의 후원으로 일본닛본대학 종교학과를 1942년에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청빙받았으나 사양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해서 1944년에 졸업했다. 평신재학중에는 철산교회 조사가 되어 겸손하게 섬겼고 졸업 후엔 평북 철산군 백량면 풍천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46년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6년 기독교도연맹가입거부, 11월 3일 주일선거 거부등으로 시련을 당하다가 1948년 5월에2남 3녀중 딸 하나만 데리고 38선을 넘었다. 가족은 9월에 월남하여 서울에서 만나 전북노회 산하 고창읍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영락교회 한경직목사의 요청으로 영락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 은혜를 받아 해방교회 교우들이 허은목사를 당회장으로 초청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107평 2층 석조 교회당을 짓기 위하여 부흥회 인도로 받은 사례비를 봉투도 뜻지 않고 일꾼들 품삯으로 내 놓았고 친지들의 도움을 구하느라 하루도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1949년 해방교회를 신축하고 헌당예배는 1950년 3월 중순에 드렸다. 헌당 후 6.25가 터졌으나 교인들만 피난 시키고 두번 양떼를 버릴 수없다는 이유로 자신은 신축된 해방제단에 엎드려 낮밤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다가 1950년 7월 25일 정치보위부원의 손에 수갑이 채워져 가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아들을 향하여 "예수 잘 믿어야 한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겨주고 9월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교회에 불을 질러 허 은목사와 함께 한줌의 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허 은목사의 유족으로는 전옥자 사모가(82세) 있으며 맏딸 허오복 권사와 아들 허 전 장로(보성여고교장 은퇴)가 있으며 딸 허팔복 권사와 허희복 권사가 신앙의 유산을 성실히 이어가고 있다.

 

순교자 홍석황 장로 (장로교)

 

홍석황 장로(1901-1945)


1945년 11월 19일 소련군이 진주하고 북한 주민들은 소련군을 환영하기 위하여 용암포 국민학교에 모여 모두가 인공기로 무장한채 독립투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교회신도들의 얼굴이 비치지 않자 환영회가 끝날 무렵 공산당 정치부의 사주를 받은 누군가의 입에서 "민족과 공산주의를 배반하는 교회를 타파하자." 청년들이 우 합동으로 구호를 연창했다. 용암포제일교회로 몰려간 그들은 이기혁목사가 노회차 평양에가고 없자 가지고 간 곡괭이 삽 쇠스랑 등으로 강대상 파아노 의자들을 파괴했다. 그들이 무차별 성구를 부수고 있을때 소식을 들은 홍석황장로는 교회로 뛰어들어갔으나 살기가 번뜩이는 성난 무리들을 말릴 염도 나지 않아 교회당 한 구석에 선채로 조용히 눈을 감고 "주여! 이 살상과 증오로 가득찬 무리들 속에서도 당신은 계시는줄 압니다. 당신이 진정시켜 주옵소서" 이때였다."목사가 없으면 교회의 주인은 장로다"하며 성난 군중들은 홍장로 주변으로 모여들어 쇠스랑으로 무자비하게 홍장로의 등어리를 찍어 내렸다. "윽" 홍장로는 숨이 막혀 간헐적으로 단말마의 비명을 쏟아 놓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등 가죽에서 핏줄기가 물총처럼 솟구쳐 올랐다. 피.붉은 피가 예배당 마루바닥에 어지럽게 번져 나가자 무리들은 누가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홍장로의 쓰러진 몸을 짓 이겨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홍석황은 1901년 평북 용천군 용암포에서 용암포 제일교회 장로 홍승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3.1 운동 때 교회에서 경영하는 구세학교를 졸업한 후 신성학중학교를 졸업한 홍석황은 목공소를 경영하는 아버지와 함께 태극기를 목판에 새겨 복사해서 나누어주기도 했다. 1931년 홍석황은 30세에 용암포 제일교회에서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장로가 됨으로 3대장로의 가업을 이루게 되었다. 용암포는 비교적 조용한 동리였다. 온 마을의 주민들이 한 가족처럼 살았기 때문에 굶주리는 이들이 없었다. 조선의 천국이 바로 용암포였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공산당이 강점하고 정권을 수립하면서 용암포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땅 한평 갖지 못한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공산주의에 부화뇌동하여 용암포에 찬바람이 불기시작했다. 1945년 11월 19일 소련군 환영대회에 교우들이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여공산당 푸락지들은 난동을 부리면서 학교를 때려부수고 끝내는 교회까지 침범해 파괴를 해댔다.

 

순교자 홍순용 집사 

 

홍순용 집사(1909-1950)


홍순용은 1909년 9월 28일(음)전남 무언군 해제면 신정리405번지에서 홍성춘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읽었고 글씨가 얼마나 미문(美文)이었던지 동리에선 명필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견선여불급(見善如不及)하고 견불선여탐탕(見不善如探湯) 하라. 착한일을 보거든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하고 악한 일을 보거든 뜨거운 물을 더듬는 것처럼 하라” 순용의 머리는 총명했으나 가정이 부유한 편이 아니어서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청운의 꿈을 안고 각처에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사업을 구상하기도 하고 시도해 보기도  하면서 심지어는 일본을 왕래하며 사업을 개척해 보려는 꿈을 가지고 노력도 해 보았으나 당시 태평양전쟁으로 여의치 않게 되자 결국 혼순용은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장사를 하였다. 그의 나이 36세가 되었을 때 해제교회에 출석하는 천기조장로가 홍순용에게 다가왔다. “홍선생 예수 믿으시오. 믿어야 삽니다.” “아니 그럼 내가 죽었단 말이요?” “예수 믿지 안고는 살았어도 죽은거지요. 암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하지요.”  처음엔 천 장로의 전도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으나 천 장로는 집요하게 전도했다.  그런데 천장로가 자꾸 찾아올수록 이상하게 가슴을 압박했다. 악몽까지 꾸게 되었다.  게다가 그때 전도사까지 합세했다. .“홍 선생 위해 기도해 주러 왔지! 엊저녁 꿈에 홍선생이 괴로워하는 꿈을 꾸고 보니 찾아보고 싶어서 왔어!” 김전도사는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는데 홍순용의 방으로 성큼 성큼 들어왔다. 김전도사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답답하던 체증이 확 뚫리는 것 같으면서 찌프둥하던 머리가 상쾌해왔다. 홍순용의 입신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의 입신으로 그의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장자가 그것도 조상 봉제사할 사람이 사교인 야소교에 몰입돼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아버지 홍성춘은 펄펄 뛰며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지만 “아버지, 제가 예수 믿는 것은 집안 잘되자고 믿는 것인데 왜 쑥대밭을 만듭니까.” 또 지병 속병인 체증도 하루 아침에 고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가 의사라고 해도 못고치지 않았습니까?” 사실  그의 부친은 농사를 지으면서 한의술을 습득해 농촌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고마운 분이었다. 더욱이 그는 피부병에 좋다는 고약을 개발해 치료해 주기도 해 환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질 않았다. 한약재도 집안에 가득 가득 쌓여 한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홍성춘씨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집안에서 떠나 주기를 요구했다. “이놈, 더 이상 너를 보기 싫으니 우리 집에서 나가거라.” 홍순용은 더 이상 아버지를 모실 수 없을 정도로 신앙문제로 인하여 분가 하기에 이르렀고 가솔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야 했으며 예수 믿기가 어렵다는 것을 그는 절감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자는 얻으리라.(마태10:34-39). 그는 지역사회 유지로 알려저 동리 이장 일을 보면서도 북과 장고를 치며 전도하여 해제면의 많은 인재를 교회로 인도했다. 홍집사는 성령을 받아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해 지역사회에 많은 감화를 끼치는 복음의 증인이였다고 지역 사회에 알려지고 있다. 해방 이후  조국수호를 위해 좌익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공산주의 자 집에는 빨간 페인트칠을 해서 구분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6.25가 터지고 지방 빨갱이들은 죽창을 들고 교회 책임자들에게 찾아와 생명을 위협했다. 결국 그는 총을 소지한 채 공산군에 체포당했다. 그가 잡히기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이 있다.  그는 총을 지녔기에 죽창을 든 공산군들을 죽일 수도 있었으련만 그는 죽이기를 포기하고 죽는 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에게 체포되어 해제면 내무서로 끌려갔다. 악랄한 공산당은 출가한 큰 딸 홍정임마저 끌어내어 몽둥이로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몸을 던졌다. 그런 공산당이니 홍집사는 얼마나 두들겨 팼겠는가? 홍정애와 관표가 면회를 가자 그는 자녀들에게 등물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주님을 뵙더라도 깨끗한 몸으로 뵈어야 할 것이니 너희들의 손으로 친히 몸을 깨끗이 씻어 주기 바란다.“ 저녀들은 울면서 등을 밀어주었다. 피멍이 들어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홍 집사는 등물을 마친 후 자식들을 그 앞에 앉히고는 기도한 후 부탁했다. ”예수 잘 믿어야 한다“ 그 이튿날 새벽4시 5인의 지사들이 해제초등학교 교정으로 끌려나갔다. 임인재 장로, 김판업집사, 황인경집사, 홍순용십사, 경찰관 김지선 경위였다. 다섯 사람은 인민재판을 받고 총살형을 받았다. 그런데 인민군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총살당해 순교한 홍순용 집사의 시신만은 칼로 자상하여 확인사살을 한 것이다. 다섯 사람이 순교할 당시 바다 가운데 우뚝 선 마실산에선 다섯 개의 불덩이가 치솟아 올라 사형집행자들이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다고 목격자의 말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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