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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갑 목사 묘소(아산) 및 기념비(꽃재교회)

성지순례/순교자

by baesungsoo 2026. 1. 1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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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갑 목사 (1888.11.5.- 1970.3.20.)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종교인(목사). 꽃재교회 14대 담임목사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충무공 이순신의 10대손이며, 아내 이애라와 친형 이규풍(李奎豐) 또한 독립유공자이다. 1888115일 충청도 아산현 신흥면 서강리(현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2리 서강마을)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9대손으로 화순군수를 지낸 아버지 이도희(李道熙, 1842. 4. 25 ~ 1902. 11. 29)와 어머니 밀양 박씨 박안라(1853. 10. 16 ~ 1922. 5. 27)[4] 사이에서 2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수학하고 개신교 목사로 시무했다. 이후 일본에 잠깐 유학하면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다니기도 했다. 1911년에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지하단체인 신조선당을 조직했다. 1919년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평정관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410일 상하이에 도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에는 국내에서 안재홍, 조병옥, 홍명희 등이 조직한 신간회 경동지회위원장으로 취임해 활동했다. 8.15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을 지냈으며, 조선공산당의 조선청년전위대 대장으로 있던 김두한을 설득하기도 하였다. 당시 김두한은 왜 아무도 자신한테 얘기해주지 않았냐고 따졌었는데 그건 말해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대한국민당에 입당해 감찰위원장을 지냈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아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홍순철 후보에게 밀려서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영준 후보에게 밀려서 낙선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민주공화당에 몸담았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70320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이문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추가)

이규갑(1987~1970)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13세때 부친을 여의고 가정을 돌보다 상경하여 한성사범학교와 감리교신학대학의 전신인 협성신학교, 와세다대학 정치과에서 공부했다. 선교사의 중매로 1912년에 이애라와 결혼하여 1918년 초까지 공주 영명학교, 예성학교 등에서 교육활동을 하였고 그 와중에 비밀결사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 1919년 2월에 기미독립선언 거사 준비에 참여했다. 같은 해 3월 20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평정관에 선출되었다. 국채통칙 및 국채발행조례를 통과시키는 등 의정원 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러시아 국경지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헌신했다. 한편 그의 부인 이애라는 평양에서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지하독립운동 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중 서울에서 체포됐다. 이 와중에 100일된 아기가 길바닥에 내동댕이 쳐져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1921년 석방되어 가족과 함께 남편을 만나러 만주로 향하던 중 함경도에서 다시 체포되어 고문 끝에 숨졌다. 1922년 귀국한 이규갑은 미감리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블라디보스토크, 만주, 돈암, 월곡, 우이동, 남산, 창동, 광희문, 의정부교회 등에서 목회했다. 목회중에도 신간회와 의병조직 등 민족운동을 벌여 36회의 검속과 수감생활을 이어갔다. 해방후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을 맡았고 교회 재건과정에서 일제의 강요로 통합된 교단으로부터 교파환원을 주장했으며, 남산교회, 서대문교회 등을 설립하였고, 조선감리회 유지위원회(재건파) 위원장, 총리원 전도국 총무 등을 맡았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으로 충남 아산에서 출마하여 당선되고 문교사회분과위원장, 대한국민당 최고위원, 1952년 순국선열 유가족 위원장, 1956년 충국열사기념사업회 회장, 1959년 대한기독교반공위원회 위원장, 1963 민주공화당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70년 3월 20일, 서울 이문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여 숭의여고 교정에서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 선영인 충남 아산에 안장됐다.  (출처 : 당당뉴스(https://www.dangdangnews.com))

 서울 꽃재교회 순국 기념비

(출처- 광복회 강북지회 회원들 아산 이규갑 목사 묘소를 찾다 - 당당뉴스)

 

 

<광희문교회> 1933년 이규갑 목사 시무

광희문교회 (출처- I'm a Pedestrian! :: 광희문교회)

1897 6 21일 서울 남송현(현 소공동)의 초대 리드선교사 자택에서 첫예배 드림

1897 6 21일 윤치호의 설교로 서울교회 (광희문교회) 창립

■1899년 제2대 무야곱 선교사 (한국선교장로사) 부임

1904년 띄골(현 오장동)로 이전 (일명 수구문교회 -청녕교교회라 칭함)

1904 9월 제3대 한운설 선교사 (배재대학교수) 부임

1908년 서울구역에서 수구문 (광희문) 선교처로 독립

1908 9월 제4대 고을리 (C.T.Collyer) 선교사 부임

1909 9월 제5대 하디 (R.A. Hardie 원산부흥운동. 신학교 교수) 선교사 부임

1911년 교회용 공동묘지설치(김영환 교우 기부) 한국교회 최초로 추정

1911 3 1일 광희문 배화여학교 (마이너여사 교장) 분교 개교

1911 9월 제6대 크람 (W.G.Cram) 선교사 (수표교교회 겸임) 부임

1912 9월 제7대 하디 (R.A.Harde) 선교사 부임

1912 9월 여선교 사업으로 배화학교 설립자 캠벨 여선교사 파송

1915 9월 제8대 김영학 목사 부임

1933년  광희문 배화학교 분교 폐교(선교지원금 중단으로 인한 재정난)

1933년 3월  제15대 이규갑 목사 부임

1934년  광희배명학교로 개편 (조용구 장로 학교인수) 개교

1935년 4월  제16대 현병찬 목사 부임

1937년 10월 15일  창립40주년 기념예배 (교회 신축계획)

 

<의정부중앙교회> 1935년 이규갑 목사 시무

의정부중앙교회  

 

(교회연혁)

1941년 5월 31일  제13대 교역자 신공숙 목사 부임.

1935년 4월 25일  제12대 교역자 이규갑 목사 부임.

1934년  지교회 축석령교회 창립.

1933년 12월  신축교회 입당.

1932년 9월 19일  제11대 교역자 김영배 목사 부임. 의정부리 121, 대지 123평에 석조기와 30평 신축하다. 

 

 

<우이교회> 1937년 이규갑 목사 겸임 

우이교회 (출처-담임목사 인사말 - 우이교회)

우이교회 내부  (출처- 우이 갤러리 - 우이교회)

 

(교회연혁)

 

1934 창동구역(창동, 중계리, 우이동)이 동부연회 경성동지방으로 편입.
쌍문동 492번지에 함석지붕 6칸짜리 새예배당 건축.
1935.01 경성동지방에서 유상렬이 본처 전도사로 신천.
1937 제 15대 담임자로 양주구역 담임자인 이규갑 목사 겸임.
1939 창동구역에서 월계리구역으로 편입.
제 18대 담임자로 월계구역 전희진 전도사가 겸임.
1940 제 19대 담임자로 월계리구역 이창선 전도사 겸임.
1941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우이동교회 예배당은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고, 교인들은 가정집회로 신앙을 유지.

 

<남산감리교회> 1945년, 1948년 이규갑 목사 시무

남산감리교회  (출처- 남산교회)  

1950년대 남산교회  (출처- 남산교회)

교회내부     (출처- 남산교회)

 

(교회연혁)

11.30 1945.11.30. 이규갑 목사에 의하여 일본기독교단 욱정교회를 인수하여, 같은 해 12월 첫 주일(2일) 예배의 시작으로 남산교회가 설립
(서울 중구 회현동 2가 2번지 소재)   
12.02 1945.12.2. 김인영 목사 부임하여 1946년 6월까지 시무
06. 1946.6. 박연서 목사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48년 5월까지 시무
05.20 1948.5.20. 강태희 목사 담임목사로 부임
12.06 1948.12.6. 이규갑 목사 재부임하여 1950년 3월까지 시무
03. 1950.3. 변홍규 목사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67년 2월까지 시무

 

 

 

<꽃재교회>  제14대 이규갑 목사 시무

꽃재교회

 

(교회연혁)

1905년 하나님의 뜻 가운데 꽃재교회가 창립되었다. 꽃재지역 최석훈 가정에 처음으로 복음의 씨가 뿌려진 것은 1902년이었고, 이들은 동대문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 후 1905년 봄부터 최석훈 가정을 포함하여 일곱 가정의 자생적인 신앙공동체가 꽃재의 심판서 댁 사랑채에 모여 독자적으로 예배를 드림으로써 꽃재교회가 시작되었다 당시의 예배는 동대문교회 지역전도사역자의 순회지도로 진행되었다. 그 후 1907년 김인권 전도사가 동대문교회로부터 선교 위임받고 첫 교역자로 파송되었고, 그는 늘어나는 교인을 수용하기 위한 교회 건축을 구상하고 있었다. 벙커(Bunker) 선교사의 도움으로 1909년 드디어 첫 예배당인 워너(Warner) 기념 벽돌예배당을 건립(제1성전)한 것은 그의 끈질긴 기도가 성취된 것이었다. 그는 주일학교를 개설하는 한편, 교회 안에 마커(한국명 瑪巨)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 부설 왕십리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와 교육에 주력함으로써 교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김인권 전도사의 뒤를 이어 1913년 조선감리회 연회에서 파송된 이필주 전도사는 독자적인 전도부흥회를 개최하고 성례를 베풀었으며, 왕십리여학교와는 별도로 늘어나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교회학교를 장년교(남자 3반, 여자 3반)와 유년교(수개반)로 나누어 인재 육성에 심혈을 기울여 7명의 전도사를 배출시켜 동역하였고, 엡윗 청년회, 매일학교 등을 운영하며 본격적인 사역을 실시했다. 한편, 한강교회와 두모포(현재 옥수동) 교회 사경회를 인도하는 등 복음선교와 교육에 전념하여 놀랄만한 부흥을 이루었다. 1915년 연회에서 정회원으로 허입(장로목사 안수)된 후에는 용두리교회를 겸임 관리하였다. 그리고 1917년에는 4일간 독자적인 전도대부흥회(강사 : 현순, 김유순, 이필주)를 개최하여 227명의 영혼을 구원하는 등 재임 8년 동안 교회는 날로 부흥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18년 그는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이임하였고, 3·1 운동의 민족 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참여하였다. 1918년 이필주 목사의 이임 후, 이듬해 3·1운동을 거치면서 교회는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 이유는 거목이었던 이필주 목사의 사임과 3.1운동 이후 사회적으로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교역자가 한 교회에서 오래 사역하지 못하고 빈번하게 교체된 것을 들 수 있다. 1918년 이후 이필주 목사가 다시 부임한 1933년까지 이종화, 김태현, 박봉래, 전효배, 이동욱, 김태현 등 6명의 교역자가 바뀌고, 그것도 용두리교회와 겸임하는 처지였기에 교회는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기간에 왕십리여학교가 한때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교회학교 내실, 두모리교회 설립(1923, 박봉래 목사 시절), 꽃재유치원 개원(1923, 박봉래 목사 시절), 야학 왕십리여자학원 개설(1927, 전효배 목사 시절) 등 교회의 사역은 꾸준히 이어졌다. 일제 말기를 거쳐 조국의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교회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유화정책의 하나로 소위 문화정책을 내세우면서도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날로 심해져 급기야 교단조직이 개편되고 신사참배가 강요되었다. 또 신교단 규칙에 의거하여 예배내용까지 간섭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이규갑 목사(제14대)는 4년간 수십 차례 연행, 감금, 고문을 당하는 곤욕을 치렀고, 왕십리여학교와 꽃재유치원이 폐교되는 등 일제의 강 압 통치 아래 교회는 크게 위축되었다. 또 해방 후에는 일제시대의 죄과(일제에 협력한 죄)를 청산하는 문제를 놓고 재건파와 복흥파로 분열하여 교회는 큰 혼란을 겪었으며, 갑자기 불어닥친 한국전쟁으로 교회는 또 한 차례 시련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교회는 일제치하와 한국전쟁 중에도 외부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속회 사역을 통해 안정을 강화하고, 박 중근, 민원숙, 이재근, 송명섭, 이영의, 박문규, 박인석 평신도 지도자(전도사, 장로)들의 수란 극복의 의지와 적극적인 활동으로 외적 환경을 잘 극복해 나갔다.

 

아산 이규갑목사 묘지  (출처- 광복회 강북지회 회원들 아산 이규갑 목사 묘소를 찾다 - 당당뉴스)

아산 이규갑목사 묘지  (출처- 광복회 강북지회 회원들 아산 이규갑 목사 묘소를 찾다 - 당당뉴스)

 

 

이규갑 목사, 이애라 사모 묘소 및 순국기념비

 

이종만 기자. 봉재교회]대한민국 광복회 강북지회(노기석 회장)59() 11시 조국 광복 80주년을 맞아 3.1운동과 임시정부에 참여한 부부 독립운동가 이규갑·이애라 부부의 묘소가 있는 아산시 공세리를 찾아 헌화와 그들의 나라사랑을 기억하였다. 아산 피나클랜드 안의 선산을 찾은 광복회 강북지회 회원 28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무처장의 사회로 애국가와 순국선열의 묵념에 이어 노기석 회장은 이규갑 목사에 대해 이순신장군 9대손이며 감리교목사요 교육가요 독립운동가로서 1962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고 소개했다.

이규갑.이애라 부부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갓난아이를 잃었고 부인 이애라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순국하였다. 지난 2019년 서울 왕십리 꽃재교회(김성복 감독)는 이규갑 목사가 꽃재교회 제14대 담임목사(1941.31945.3)로 사역하면서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한 것을 기리며 교회공원에 믿음의 선배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기념비를 세웠다. 광복회 강북지회 회원들은 오후에는 이순신 장군 탄신 480주년을 맞이하여 현충사와 이순신장군 묘소를 방문하여 헌화하였다.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김승태 박사의 동의를 얻어 일제강점기 이규갑.이애라 부부의 민족운동 논문을 첨부한다.  (출처- 광복회 강북지회 회원들 아산 이규갑 목사 묘소를 찾다 - 당당뉴스)

 

연 구 논 문

일제강점기 이규갑·이애라 부부의 민족운동                 김 승 태

 

1. 머리말

2. 이규갑과 이애라

3. 민족운동 참여와 역할

4. 맺음말

 

1. 머리말

이규갑과 이애라는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에 참여한 부부 독립운동가이다. 더욱이 그들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갓난아이를 잃었고, 이애라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순국하기까지 하였다. 이들은 일찍이 1962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정부로부터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렇지만, 이규갑의 한성정부수립 참여를 제외하면, 이들의 생애와 행적이 깊이 있게 연구되지 못했다.1) 이는 단편적인 회고를 제외하고는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2) 더욱이 한성정부수립 참여와 관련하여서는 이규갑이 서거하기 1년 전에 한 월간 잡지에 발표한 한성정부수립의 전말이라는 회고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신빙성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그간 연구에 의하여 한성정부는 그 설립시도가 무산된 전단정부에 불과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다만 이것이 해외에 잘못 전달되어 이승만이 그 정통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3) 그러나 이규갑의 민족운동 참여는 한성정부수립 참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1910년대 충남 공주에서의 교육운동, 1920년대 노령지역에서의 목회활동과 독립운동 지원, 1920년대 말 신간회 참여, 1930년대 이후의 목회활동도 넓은 의미의 민족운동 범위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2. 이규갑과 이애라

1) 이규갑(李奎甲; 1888.11.5~1970.3.20)

 

이규갑에 대한 가장 상세한 자료는 추영수의 '구원의 횃불'(중앙여중·고교, 1971)에 실린 이규갑(李奎甲) 선생이다.5) 이 자료는 그 끝에 이상은 찬하회 석상에서 해주신 말씀과 1969년 가을에 서신으로 주신 말씀임이라고 부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이규갑의 말년 회고를 근거로 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자료는 이규갑이 '신동아' 19694월호에 기고한 한성정부 수립의 전말이라는 증언 기록이다.6) 그러나 당사자들의 회고나 증언 기록은 가장 기초적인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부정확성과 왜곡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자료 비판이 필요하다. 이제 이하에서 이들 자료를 중심으로 자료 비평을 하면서 그의 생애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규갑은 1888115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9세손인 아버지 이도희(李道熙)와 어머니 박안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규갑이 태어날 무렵 무관인 첨지(僉知)였지만, 규갑이 10살되던 1897년 무렵에는 전라남도 화순 군수를 지내고 1902년에 별세하였다.7) 형인 이규풍(李奎豊)도 무과에 급제하여 대한제국 무관으로 봉직하다가 1907년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노령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활동을 하였다.8) 앞에서 든 이규갑(李奎甲) 선생에는 3·1운동 이전의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1906년 한성사범을 졸업하고 충남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항일전에 매진하였으며, 1909년 교육에 종사하여 후배의 정신지도에 전념하던 중 1910년 일본 헌병대에 입감되었다. 감옥에서 한일병합의 통지를 받고 자결하려다가 후일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자는 권유로 목숨을 유지하였다. 그의 출감은 한일병합일(韓日倂合日)에 얻은 특사이니 오히려 가슴 저미는 아픔을 통감하며 혀를 깨무는 결의를 다짐했다. 1911년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더 좀 배워야 그들과 싸우겠다고 생각한 그는 도일하여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정치과를 수업하고 뜻한 바 있어 귀국하여 공주 영명학교에서 교감으로 시무하며 지하운동을 계속하였고 직산 예성학교를 설립하여 설립자로서 갖은 애를 쓰는 한편 무산자들을 모아놓고 수업하며 애국이념을 부어주기에 온 심혈을 기울이다가 비밀결사 사건으로 공주서 투옥당하였다.”9)

이규갑의 학력으로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그후 감리교 신학교인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서술되는 사항이다. 위 자료에서도 1906년에 한성사범을 졸업하고, 1911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한성사범과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 졸업연도에는 착오가 있는것 같다. 그 무렵 한성사범학교는 22세 이상에게 입학자격이 주어졌고,10) 19065월부터 모집한 교원임시양성과에서만 18세 이상 30세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11) 그리고 교육기간은 본과는 4, 속성과는 1, 임시양성과는 3개월이었다. 따라서 1906년 졸업이 확실하다면, 본과가 아니라 3개월 과정인 교원임시양성과일 가능성이 크다.

1911년 협성신학교 졸업도 확실한 근거가 없다. 협성신학교는 북감리회선교부와 남감리회선교부가 19076월부터 협동으로 운영하던 신학교로 초기에는 협성신학당이라고 하였다. 이 신학교는 19101월 서울에 교사(校舍) 기지를 구입하기 전까지는 각 지방에서 매년 1개월에서 3개월씩 성경을 교수하였다. 서울에 교사를 마련한 이후부터는 감리교회협성신학교로 명칭을 변경하고 3년제로 운영하였다. 협성신학교의 제1회 졸업식은 19111220일에 있었는데, 졸업생은 최병헌, 전덕기, 정춘수, 현순, 현석칠 등 38명인데, 졸업자 명단에 이규갑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12) 이후 이규갑이 북감리회 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확인받은 1929년까지 협성신학교는 15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그 가운데도 이규갑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제15회 졸업생은 졸업생 수만 18명으로 알려져 있을 뿐 최창신 외에는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아 여기에 끼어 있거나, 졸업자 명부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당시에는 신학교에 재학하면서 전도사 직첩을 받고, 졸업하면 곧 바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므로, 19193·1운동 직전까지 평양기독교병원 전도사로 있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13) 이 무렵에 신학교 재학 중이었고, 그후 독립운동 참여로 학업을 중단했다가 1920년대 후반에 복학하여 19293월에 졸업한 것이라고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무튼 그는 19296월 조선기독교 미감리교회 연회에 참석하여 집사성품(執事聖品)”을 인정받았고,14) 미아리교회 본처목사로 파송받았으며,15) 이듬해 9월에는 장로목사로 안수 받았다.16)

 

이규갑의 의병활동과 헌병대 입감 기록,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기록은 그 객관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17) 다만 그가 교육활동을 했던 기록은 다음과 같은 두 기록이 남아있어 확인된다.

충남 공주군 영명녀학교 교감 리규갑 씨의 통신을 거한즉 해 학교 제일회 졸업식을 거 42일에 해군(該郡) 예배당에서 행하였는데 당일 성황은 관민간 내빈이 4백여인이오 기타 관광 제씨가 수백인이라 학생들의 청아한 창가와 내빈의 유익한 연설이며 권설을 자미있게 들을 때에 청중이 박수 갈채하고 교장이 졸업증서를 수여하니 졸업생은 진영신·김일나·박루이사·서유돌라·강면네·로마리아 등 6인이며 또한 진급생은 서순애 등 32인이니 기쁘도다. 이 여학교 졸업식은 충남에 처음 있는 일이니 충남 여자계에 빛이라 할 수 있다 하였더라.18)

공주 영명여학교 교감 이규갑이 191342일에 거행된 그 학교 제1회 졸업식 상황을 당시 교계신문인 '그리스도회보'에 제보하여 519일자 그 신문에 실린 것이다. 이규갑은 같은 신문 19111015일자에 공주에서 그리스도회보 대금 납부자 명단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공주지역의 이 신문의 구독자이기도 했다. 당시 영명여학교는 미북감리회 선교부에서 설립 운영하던 여자 초등교육 기관이었다. 이 학교에 대해서는 세이퍼(Miss Olga P. Shaffer) 여선교사가 'The Korea Mission Field' 19128월호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올해 공주여자매일학교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발전을 보았다. 출석률의 큰 증가는 부분적으로 볼 때, 학교가 교회에 가까이 있다는 유리한 조건 때문이다.

가을에 여선교회 사역자들을 위한 새 가옥의 완성으로 우리는 2년 동안 숙소로 사용하고 있던 여학교 건물을 비울 수 있게 되었고, 가장 기쁘게도 여학생들이 그들 본래의 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될 때 약 60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러나 숫자는 매주 늘어서 방학이 가까웠을 때쯤에는 총명하고 행복한 88명의 소녀들이 세속적인 야망이 아닌, 그보다 더 원대한 공부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이런 소녀들이 미래 한국의 여인상을 만들어 낼 것이다.19)

이규갑은 이 학교의 교감으로서 실제적인 운영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면 이규갑이 언제부터 이 학교에 관여하였을까? 직접적으로 이름이 언급된 것은 아니지만, 위의 세이퍼의 보고서에 추측할 만한 다음과 같은 단서가 들어있다.

지난 해 후반기 동안 우리 학교에서 한문을 훌륭히 가르친 한 젊은이를 계속 고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에게 아내를 찾아줄 필요가 있었다. 새로 부임한 선교사인 나에게 이것은 학교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한 매우 흥미로운 성질의 것이었다. 샤프 부인(Mrs. Sharp)중매자로 선택했다. 그녀는 (학교) 선생과 (젊은이의) 아내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여자를 골라달라고 이화학당 교장에게 부탁하였다. 왜냐하면 그 여자가 우리 학교에서 다른 선생이 자리를 비우고 나간 그 자리를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화학당) 교장과 중매인은 그 신성한 신뢰를 매우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관계된 양측 모두에게 가장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비록 서울에 있는 정동제일교회의 제단 앞에서 (결혼) 예식이 거행되기 하루 이틀 전까지도 가장 관심있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지 못했지만, 그 결합은 사랑과 온정의 결합임에 틀림없었다.20)

이 자료에 나오는 한문을 가르치는 젊은이는 이규갑이고, 샤프 부인과 이화학당 교장이 중매한 여자는 이규갑과 결혼하고 그 학교의 교사도 맡았던 이애라 즉 李心淑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규갑이 그 학교에 관여한 것은 1911년 가을학기부터가 되고, 교수 과목은 한문이었으며, 이화학당 출신의 이애라와 결혼한 해도 기존에 알려져 있던 1913년이 아니라21) 1912년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이규갑은 19175월부터 공주에서 여자야학교도 설립하여 아내와 함께 운영하였다. 다음은 191829일자 '매일신보'에 보도된 기사다.

대정(大正) 6(1917) 5월부터 교감 이규갑 씨의 열심으로 여자야학교를 설립한 바 교사는 영명학교 교사 이심숙(李心淑)과 여자고등보통학교생 중 이신애(李信愛)의 열심으로 교도하야 출석학생이 30명인데 근근자자(勤勤孜孜)하고 일장월취(日將月就)하며 전진지망(前進之望)이 파다한 고로 여자야학교 성황이 여차함은 이규갑 씨의 열심소치라고 칭송이 유()하더라.22)

여기서도 이규갑이 교감을 맡고 있는 것은 교장은 선교사가 맡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제적인 설립자와 교사로서 자신의 아내이자 전 영명여학교 교사였던 이심숙(李愛羅), 이신애와 함께 여성교육에 힘썼던 것이다.

 

2) 이애라(李愛羅, 李愛日羅, 李心淑; 1894.1.7~1921.9.4)

 

이애라는 189417일 전주이씨로 시종을 지낸 李春植의 셋째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李心淑으로 1910년대 초 이화학당 중학과를 졸업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보통과 4, 고등과 3, 중학과 4, 대학과 4년제로 하여 19109월부터 대학과를 두고 있었다.23) 이애라는 졸업생 명단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이화학당 당장의 추천과 중매로 1912년 이규갑과 결혼하고 공주영명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것을 고려한다면,24) 19123월 졸업생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25)

이애라는 앞에서 서술한대로 결혼 후 남편 이규갑과 함께 공주영명여학교 교사로 근무하였고, 19175월 남편이 공주여자야학교를 설립하고 나서도 그 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적을 뒷받침할 객관적 자료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여러 설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김기승·천경석의 논문에서는 “1917년 이규갑이 평양기독병원 전도사로 가게 되자 이애라도 평양 정의여학교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26) 앞에서 인용한 '매일신보' 191829일자 기사에 따르면 적어도 그 무렵까지는 공주에서 여자야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27) 이와 같이 자료적 뒷받침에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참고하기 위하여 김기승·천경석의 논문에서 19193·1운동부터 192194일 순국하기까지의 이애라에 대한 서술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919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평양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풀려났다. 이미 이규갑은 그 전에 만세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상경하였기 때문에 그녀도 석방 뒤 부군을 돕기 위해 서울로 갔다. 韓南洙·金思國·홍면희·이규갑 등이 비밀리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대회를 소집하는 일을 돕는 한편 투옥인사 후원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남편이 상해로 간 4월 이후에 임시정부를 뒷받침하기 위한 여성 조직 애국부인회에 참가해서 활동을 하였다.

1920년에는 수원·공주·아산 등 지방교회를 순회하면서 비밀리에 애국부인회를 조직하는 활동을 하다가 상경한 뒤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이미 공주에서도 경찰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한 뒤 아산에서 몸을 숨겼다가 상경한 것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당시에(1919년인지 1920년인지 확인되지 않음) 어린 막내딸을 업고 아현동을 지나다가 경찰에 붙잡힐 지경이 되어 이를 피하려다가 아이를 빼앗겼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아기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떨치고 달아나려 하자 경찰이 아이를 길에 내동댕이쳐서 죽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는 애국부인회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결국 그녀는 체포되었으며 이규갑이 러시아로 망명한 이후에 석방되었다고 한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연행되어 고문을 당했다.

1921년에는 천안의 양대여학교(良垈女學校) 교사로 있었는데 일제의 탄압을 견디기 어려워 마침내 연해주로 망명길에 올랐으나 함경북도 웅기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오랜 동안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석방되어, 또는 고문 끝에 사망을 염려한 경찰이 사가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하였을 때 간신히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갔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얼마 뒤인 94일 순국하였다.28)

여기서 죽은 아기는 동대문교회 유 전도부인이 교회묘지에 묻어주었다고 한다.”든가, 192130여 명의 가까운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향해 가는 도중 웅기항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이민호 의사의 기지로 석방되었으나, 이 여사는 세상을 뜨고 나머지 식구들만 해삼위로 가서 지냈다는 기술도 있다.29) 죽은 아이의 이야기는 이규갑의 회고에도 나오는데, 상해로 건너가기 전 이민태 집에 은거하던 때의 이야기이므로, 이규갑이 상해로 가기 위해 서울을 떠난 19194월 중순 이전의 일이다. 이 아이는 백일이 채 못 된 갓난아이였고, 이애라를 뒤따르던 전도부인(동대문교회 유득신 권사로 알려짐)이 경찰이 팽개친 아이를 주어 안았지만, 이미 죽어 있어 아현고개에 묻어주었다고 한다.30) 아무튼 이애라는 3·1운동 이후 남편을 도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남편이 있던 러시아로 망명 과정에서 순국·요절한 것은 사실이다.

 

3. 민족운동 참여와 역할

1) 3·1독립운동

이규갑과 이애라가 19193·1독립운동에 깊이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성정부수립과 관련된 자료를 제외하면 이에 대해서도 별다른 자료가 없다. 특히 이규갑의 경우 3월 초순부터 숨어 지내면서 임시정부 수립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만세시위 자체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던것 같다. 그는 그 무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191931일 만세시위를 치르고 나는 일단 지하로 숨었다. 당일 태화관인 별유천지에서 민족대표 32(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당일 체포됨-필자)이 모두 일경에게 잡혀가고 그 후사를 우리가 맡게 되었는데 만세시위는 점점 격렬하게 전국 각지에 파급되고 이에 맞서 일경이나 일군헌병들은 데모 진압과 주모자 색출 검거에 혈안이 되어 있어 우리는 그들의 감시아래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기능을 잃고 말았다.31)

이규갑은 그 무렵 평양 남산현교회 전도사로 있었으나, 19192월 평양지역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서울에 올라와 3·1독립운동 준비에 가담하였다.32) 이것도 그의 회고를 근거로 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앞에서 든 이규갑 선생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 후 그는 이애라 씨와 결혼하고 평양에서 계속 교육에 투신하여 구국운동을 암암리에 전개하던 중 평양에서 서울 본부로 보낼 대표로서 신홍식, 길선주, 안세항, 이규갑 등 네 명을 선출하므로 평양 대표가 되었다. 19192월 신홍식, 안세항, 이규갑 등 3인만 상경하여 그 즉시 안세항 씨는 일본 동경으로 떠나서 우리 교포와 유학생의 연락을 맡고, 이규갑과 신홍식 씨는 縉紳(한말 고관을 지낸 분들-필자)을 교섭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도록 권유하다가 신홍식 씨가 우리 국민 대표로 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된 후에는 그가 직접 진신을 교섭하여 경향에서 만세운동하는 것을 감독 지도하였다.33)

 

이 서술은 꼭 이대로는 아니라도 상당한 진실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신홍식 목사는 1913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공주동지방 순회목사가 되었으며, 1915년부터는 장로목사 안수를 받고 공주읍교회 담임을 거쳐 1917년 평양남산현교회를 담임하다가 3·1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러니까 이규갑은 공주에서 공주여학교 교감으로 있을 때부터 그를 알고 지냈으며, 19192월 바로 그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함께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신홍식이 이규갑을 평양으로 불러 전도사를 맡겼을 가능성도 크다. 신홍식은 1919215일 평양 기홀병원에서 이승훈의 권유를 받고 219일 상경하여 독립운동 준비모임에 참여했으므로34) 이규갑도 이때에 신홍식과 동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규갑이 현순을 만난 것도 바로 그 때였을 것이다. 이승훈 함태영 등 기독교계 인사들이 현순을 외교통신원으로 상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인 220일이었고, 현순은 상해로 가기 위해 24일 밤 서울을 떠나 31일 상해에 도착하였다.35) 이규갑이 3월 중순경 김사국을 만나 상해의 현순에게서 온 편지를 보여주었다든가,36) 48일 한남수를 상해에 파견하면서 현순·孫貞道와 만나 일을 추진하도록 했다는 기록은 다 이규갑이 미리 현순과 친분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37)

이규갑이 3월 초순부터 세브란스병원에 출입하며, 부상자를 위로하고, 4월 초 李日宣에게 국민신보 발행 자금을 제공한 자료도 남아있다.

李日宣金慶, 吳祥根 외 수명과 함께 공모하여 불온인쇄물을 발행하고 이미 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검사국에 송치를 마친 이래 수배중인 자였는데, 그의 진술에 의하면 본년 4월 상순부터 국민신보 발행을 시작하였는데 그 동기는 3월 초순 독립신문이라는 것을 발행하는 자가 있어 자기도 그런 종류의 인쇄물을 발행할 심산이었지만, 자금이 없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데, 마침 3월 초순 소요사건의 부상자를 위문하러 충청도 사람 예수교 전도사 李奎甲이라는 자가 수회 세브란스병원을 출입했는데 그 병원에서 그의 심정을 털어놓자 과연 실행할 결심이 있다면 돈은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다는 약속을 해두고 4월 초 그가 병원에 찾아와서 돈은 마련해 주지만, 이 돈은 반드시 인쇄물 비용에 충당하고 조금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10엔을 주었다. 그 이래 그 취지에 따라서 이를 지출하였지만, 8월 말까지 전부 소비하고 그 후 비용 출처가 궁하여 거의 발행하지 못했다.38)

이일선은 이규갑으로부터 받은 돈으로 등사판과 종이를 구입하여 국민신보 제1(4월 중순 발행)에서 제28(828일 발행)까지 매회 300여 매씩 등사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종로통과 동대문 부근 민가에 배포하였다.39) 특히 1919425일 종로통에서 일경이 수습한 '국민신보' 11호는 한성정부의 조직과 423일의 국민대회를 알리는 특집호이다.40)

 

한편, 이규갑의 아내 이애라는 앞에서 서술한 대로 평양 정의여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평양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피체되어 평양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후 남편의 일을 돕기 위해 갓난아이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활동을 하다가 아이를 잃고 다시 피체되었으나, 이규갑이 상해로 떠난 4월 중순 이후 풀려나 지방을 순회하며 임시정부를 돕기 위한 여성 조직에 헌신하였다.

 

2) 한성정부

이규갑은 홍면희(19194월 홍진으로 개명)와 함께 이른바 한성정부수립의 주역이었다. 그리고 근래에 한성정부의 조직주체와 선포경위, 그 성격에 대한 상세한 연구들이 이루어져 그 실체와 성격이 어느 정도 규명되었다.41) 이제 여기서는 이러한 선행 연구들의 성과를 참작하면서 한성정부수립에서 이규갑의 역할에 중점을 두어 정리하고자 한다. 이규갑과 홍면희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으며, 이들이 만나 교유하게 된 것은 홍면희가 변호사로 활동하던 평양에서였을 것으로 추측한다.42) 이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서울에 올라와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를 느끼고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193월 초순경부터였다.43) 이규갑은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 동지들은 비밀히 연락을 취하여 우선 이 운동을 조직화할 것을 궁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면 당장에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더라도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장차 독립투쟁을 위한 전열을 정비하는 구심점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3월 초순 어느 날 동지 李敎憲·尹履炳·尹龍周·崔銓九·李容珪·金奎 등 제씨가 내가 숨어있던 내 재종조카인 李敏台의 집으로 비밀히 연락을 하고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제의하여 왔다. 나는 정부를 만들려면 우선 국민의 총의를 대표할만한 지역 대표라든지 또는 각 단체의 대표들을 모아 그 이름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44)

이때 이규갑에게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제의해 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후에 조선민족대동단에 참여한 유림계열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이규갑이 동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이규갑이 그 이전에 그들과 교유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그가 縉紳을 교섭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도록 권유했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45) 이규갑과 홍면희도 이미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때였으므로, 이규갑은 그가 참여하고 있던 비밀독립운동본부의 한남수 홍면희 김사국 이민태 민강 제씨와 의논하여 이 문제를 거론하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열기로 합의하였다.”46) 그리하여 홍면희의 교섭으로 현직 검사인 한성오의 집에서 317일 전술한 유림계열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갖고,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각원들을 선출하였으며, 13도 대표자 대회를 4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고 이를 국민에게 공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경성 부인성서학원 교사 이동욱에게 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 선포문을 집필토록 의뢰하고, 홍면희 이규갑 김규 민강 등에게는 각 지방의 대표들을 권유하여 42일 인천 만국공원에 모이게 하는 임무를 맡겼다. 임시정부는 해외망명정부로서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각원들은 모두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국지사들로 선임하였다. 각원의 명칭도 총장으로 하고, “정부조직을 대통령제로 하지 말고, 帝國 式의 이름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선임된 임시정부 각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총재 이동휘

외무부 총장 박용만

내무부 총장 이동녕

군무부 총장 노백린

재무부 총장 이시영 차장 한남수

법무부 총장 신규식

학무부 총장 김규식

교통부 총장 문창범

노동국 총판 안창호

참모부 총장 유동열 차장 이세영

이 밖에 評政官 18, “파리강화회의에 국민대표로 출석할 위원” 7, “13도 대표자” 25, 6개조의 約法도 이 회의에서 마련된 것 같다.

이규갑은 각도 대표들에게 42일 인천 만국공원에 모이도록 통고하는 한편, 이동욱이 작성한 국민대회 취지서및 국민대회 선포문을 서소문동에 있던 그의 집안사람인 李敏洪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조각공 두사람을 고용하여 木版에 새겨 6천 매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당시 재정을 맡았던 민강과 함께 그 목판을 그 집 뜰에 묻어버렸다.47)

마침내 42일이 되어 이규갑은 홍면희 등과 함께 인천 만국공원에 갔으나, 지방 대표들은 수원 강화 인천 등 인근 지역의 10여 명이 참석하였을 뿐 거의 나오지 않았고, 서울에서 참석하기로 한 각 단체 대표들만 참석하여 20명 내외밖에 모이지 않았다.48) 이들은 음식점의 조용한 방을 빌어서 음식을 시켜 먹으면서 임시정부를 어떤 절차와 방법을 통하여 발표할지, “국민대회를 여는 데 있어서의 인원동원 문제와 지방 조직의 강화 문제등을 의논하고, 단체대표로 이상재와 박승봉을 내정했다가 독립문제로 일본정부와 담판할 일이 생겼을 때 민족대표로 이들을 추대하기로 하고 철회하였다.

그날 모임에서 이규갑과 홍면희는 그대로 국민대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세워서 운동을 하기로 하자고 제안하였으나, 한남수가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강화회의의 상황도 모르고, 上海에는 임시정부가 되어 있다는 말이 있으니 만약 上海에 임시정부가 세워져 있다면 두셋의 임시정부를 세워서는 안 될 것이니 우선 강화회의의 상황과 上海에서의 임시정부가 섰는지 어떤지부터 조사하고 나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말하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어 다시 모여 상의하기로 하고 해산하였다.49) 이규갑은 서울에 가던 길을 돌이켜 인천에 남아있던 한남수를 찾아와 국민대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세우는 일에 진력해 달라고 당부했으나, 한남수는 상해에 가서 알아보지 않고는 그런 일은 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이규갑은 44일 한남수를 다시 서울로 불러 그가 직접 상해에 가서 알아보고 암호 전보를 보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런 제안에 따라 한남수는 이규갑이 마련해 준 여비 3백 원을 받고 48일 출발하여 416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를 밀정으로 오해하여 상황 파악에 시일이 걸려 421일 아침에야 약속된 암호 전문을 김규가 머물던 집 주인 김하원에게 보냈다.50) 그 전보의 내용은 이미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으므로 국내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세우는 계획을 중단하라는 의미였다.

한편, 이규갑은 학생층을 포섭하여 국민대회를 준비하며 한남수의 전보를 기다렸으나, 전보가 늦어지자 국민대회 개최의 일과 지방조직, 그리고 운동자금염출, 옥중에 있는 민족대표자들의 옥바라지 등자신이 맡아 하던 일을 공주에서 3·1운동을 일으키고 그 무렵 서울로 피신해 있던 현석칠에게 맡기고, 4월 중순경에 홍명희와 함께 상해로 가기 위해 서울을 떠났다. 그는 그가 상해로 가기로 결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첫째 우리가 임시정부를 조직했다고는 하지만, 국내에서 일경의 눈을 피하여 정부구실을 하기는 불가능하였다. 3·1만세 이후 일경은 눈에 불을 켜들고 우리 독립운동자들을 잡는데 혈안이 돼 있었고 정부를 지하로끌고 들어간다 하면 결과적으로 그 기능이 유명무실하게 된다. 기왕 독립은 선포한 것이고 이를 근거로 하여 정부도 만들었으니 이를 해외로 가지고 가서 행동의 자유가 보장된 국제무대에서 외교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나는 원래 의병운동에 다소 경험도 있고 그 때 형님이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으니 기회가 되면 만주로 가서 형님과 독립군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에서였다.51)

 

이규갑과 홍명희는 앞서 목판으로 인쇄한 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 내각 명단과 약법 등이 수록된 국민대회 선언서를 담배갑과 성냥갑 속에 숨기고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420일경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는 이미 10여 일 전인 410일에 임시의정원이 성립되고, 다음날인 411일에 정부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규갑이 출국하기 전에 김사국·현석칠 등에게 위임하였던 국민대회는 그가 3월 말경에 포섭하였던 김유인을 중심으로 한 학생조직이 4월 중순부터 참여하여 423일에 시도되었다. 이날 행사 계획은 첫째, 자동차 3대를 빌려 한 사람씩 탄 다음 국민대회 공화만세라는 깃발을 달고 동대문·서대문·남대문에서 각각 출발하여 길가마다 인쇄물을 배포함으로써 정오를 기하여 사람들이 종로 보신각 앞에 집합하게 한다. 둘째, 노동자 3,000명을 종로 보신각 앞에 배치하여 지휘자 3명에게 국민대회등의 기를 게양케 하고 정오를 기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시위운동을 벌인다. 셋째, 종로에서 시위운동을 개시함과 동시에 ‘13도 대표자들이 봉춘관에 모여 한성정부의 성립을 선포한다.”는 것이었다.52) 그러나 당일에 ‘13도 대표자들은 봉춘관에 나타나지 않았고, 시위도 시내에서 학생차림의 5명이 국민대회 공화만세라는 깃발 3개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달려간 것에 그쳤다. 다만 그날 시내 곳곳에 이들에 의해 국민대회 취지서와 내각 명단이 수록된 선포문등 전단이 뿌려졌다. 그리고 이 전단을 그 하루 전날인 422, ‘미 감리교 백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던 신흥우가 입수하여 5월 말경 미국에 있던 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53)

 

3)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앞에서 서술한 대로 이규갑과 홍면희가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19420일경이었다.54) 이미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임시의정원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규갑은 우선 상해정부에 내가 이러한 일로 왔다는 전갈만 해놓고 각원들이나 기타 중진급 지도자들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리며홍면희와 함께 여관에 투숙하였다. 그러나 상해 임시의정원에서는 “423일 경성에서 제정한 임시정부 조직 선포문과 각원 선정에 대해이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55) 공교롭게도 서울에서는 한성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국민대회를 열던 날, 상해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한 것이다. ‘한성정부가 인정받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는 현순도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四月下頃韓南洙 李奎甲 洪震 張鵬 等國內來滬하야 漢城國民 代表會에서 組織政府宣布하니 卽 總裁李承晩所謂 多煩多端漢城系統政府이었다. 在滬人士들과 聯席하야 數次 會商하야 漢城政府勿施하고 上海 系統臨時政府를 그대로 推戴하야 內外施政에만 努力하기로 하였다.56)

그러자 이규갑은 한인청년회에 들어가 54일 청년회와 청년단이 대한청년단으로 합병하는 회의에서 서무부장 겸 서무부 비밀부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청년단은 임시정부의 내각을 원조하기로 결정하였다.57) 결국 이규갑은 상해 임시정부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청년단을 통해서 임시정부 내각을 원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525일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미주 교포들이 모아준 정치자금을 가지고 상해에 부임해 옴으로써 상황이 변하였다. 이규갑은 한말 신민회 시절부터 안면이 있던 안창호에게 한성정부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였다고 한다.58) 지나치게 과장되어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규갑은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어렵게 생각했던 두 정부의 통합문제도 島山과 내가 마주앉아 의논하게 되니 쉽사리 그 실마리가 풀려나갔다. 명목상 도산이 상해정부의 대표이고 내가 한성정부의 대표 자격이었지만, 우리는 十年知己의 다정한 해후의 분위기를 지켜나갔다. 나는 한성정부보다 상해정부가 단 며칠이라도 먼저 생겼으니 우리가 상해정부에 합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양보하였고, 도산은 아무리 상해정부가 활동력 있는 쟁쟁한 독립지사들이 만든 것이라 하더라도 이는 나라를 떠난 유랑자들에 의하여 된 정부이고, 한성정부야말로 국내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의 總意에 입각하여 만든 정부이니 상해정부를 해체하고 한성정부의 法統에 순응해야 한다고 극력 사양하였다.59)

이규갑은 안창호의 권유로 191977일에 개회한 제5회 임시의정원부터 충청도 의원(보결 선임)으로 참여하였다. 홍진(홍명희)은 이미 430일에 개회한 제4회 임시의정원부터 충청도 의원과 청원법률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여, 5회에서는 법제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특히 임시의정원 제6(1919.8.18~9.17) 중에는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조안이 제안되어 통과됨으로써, 국무총리제를 대통령제로 바꾸고 임시헌법도 개정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한 명실상부한 통합 정부가 출범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성정부의 주역이었던 이규갑과 홍진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규갑은 임시의정원 의원 활동 이외에도 상해 대한적십자회에도 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60) 그의 상해에서의 임시의정원 의원 활동은 19203󰡔독립신문'에 의원자격 상실 기사가 실린 이후로 사라진다.61) 아마 회의 무단 불참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이규갑은 이 무렵부터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에 참여하였던 것 같다. 19324월 일제가 상해교민단 사무실을 급습하여 압수한 자료를 토대로 편집한 '조선민족운동연감'19201128일조에 三一學校 강사 李奎甲 보고라 하여 三一學校 兵學生들은 愛國靑年血誠團을 조직함이라는 짤막한 기사가 실린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62) 그가 중국 흑룡강성 운랍간(雲拉間)이라는 곳을 개척하여 청년들을 모아 군사교육을 시키던 그의 형 이규풍을 찾아가 그곳 군관학교를 도왔고, 192112월 일본군과 마적의 연합군의 내습을 받아 전투를 치르다가 팔에 부상을 입었다는 기록도 있다.63) 이규갑은 192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그곳에서 남감리회 소속 목회자로서 기독교 선교와 교육사업에 종사하던 중 1925년 그곳에 교사로 부임해 온 이화여전 출신의 김애라(金愛羅)와 재혼했다.64)

이규갑이 1920년대 중반 블라디보스토크 지방에서 남감리회 소속으로 목회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에도 가담하고 있었음은 다음과 같은 일제 영사관의 기밀 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31일은 소위 삼일운동 제8() 기념일로서 浦潮 신한촌에서는 그곳 남감리교회당 樓上에 다음과 같은 주최자가 집합하여 과격한 강연을 하고 회중은 약 1,500명에 이르렀으며, 만세 소리 속에 해산하였다고 한다.

주최자: 남감리교 목사 金永學

() 柳燦熙

() 李奎甲

고려공산당원 李濟

() 李永善

先鋒社 主幹 吳成默65)

여기서 이규갑이 목사라는 것은 잘못된 정보일 수 있지만,66) 남감리회 소속 교역자로서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교회당에 모여 3·1절 기념행사를 주최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4) 신간회 참여와 목회활동

이규갑이 해외 망명생활을 끝내고 가족과 함께 귀국한 것은 1927년 무렵이었다.67) 그 무렵 국내에서는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협동전선의 최고 기관인 신간회가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신간회는 홍명희·안재홍·신석우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종교계 지도자들과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으며 타락하지 않은 민족주의 세력과 동맹을 모색하던 조선공산당계 인사들을 망라하여 1927119일 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215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출범하였다. 처음부터 총독부의 인가를 얻어 합법적인 단체로 출범하려 하였기 때문에 발기인 대회에서 채택한 강령은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이라는 간결하고 온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포된 의미는 본부와 각 지회들의 현실적 정책제안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민족의 정치적 완전 독립과 경제적 해방, 자치운동의 부인, 타협적 개량주의 운동의 배격, 민족의 총단결, 민족적 권익의 실현을 지향한 것이었다.68) 실제로 신간회에서 입안하고 추구했던 정책들은 타협주의 정치운동 배격과 민족운동 지원, 한국인의 빼앗긴 기본권 회복, 한국인에 대한 탄압법령의 철폐, 일본인 이민과 착취기관 철폐, 일제의 경제수탈 철폐, 조선인본위 교육과 조선어 사용 교육 실시, 여성에 대한 차별·억압제도 폐지, 형평사원 등에 대한 차별 반대, 농민 소작인의 권익 옹호, 노동자의 권익 옹호 등이었다.69)

신간회는 본부를 서울에 두고 전국 각지에 군단위 지회가 설치되었으며, 만주의 간도, 일본의 東京·京都·大阪·名古屋 등 해외에도 지회가 설립되었다. 신간회 지회는 각 지역의 청년단체와 사회운동단체의 회원들, 비타협적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는데, 192712월까지 104개의 지회가 설립되어 회원이 2만 명을 넘어섰고, 이듬해 12월에는 그 수가 143개로 증가하였으며, 회원수도 4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신간회가 확산되고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마지못해 허가하였던 신간회 본부는 물론 지회까지도 과격한 불온단체로 보고, 그 임원들을 요시찰인물로 감시하며, 집회나 활동을 불허하거나 방해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1928년과 1929년에는 예정된 정기대회 마저 불허하여 신간회 본부는 19296월 복대표대회라는 약식대회를 개최하여 규약을 개정하고 회장제를 집행위원장제로 바꾸었다. 그해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적극적으로 지원활동에 나서 대대적인 반일시위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일제 경찰의 사전 단속으로 민중대회가 좌절되고 중앙집행위원장 허헌을 비롯한 다수의 집행부까지 구속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규갑이 신간회 京東支會 설립에 참여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인 19294월부터였다. 1929616일 경동지회 설립대회에서 李垣浩가 한 경과보고는 다음과 같다.

본회는 지난 427일 권유복 이규갑 서광훈 심의성 정관진 등 유지의 주창으로 발기하여 57일 오후 3시 전기 유지는 숭인동 156 이규갑 집에서 발기회를 개최하고 본부의 찬동을 얻기로 하는 한편 회원 모집에 노력하여 신입회원 31명의 원서를 첨부하여 본부에 신청하여 설치 승인을 얻고 다음으로 530일 준비위원회를 신설리 신설학원에서 개최하고 대회에 요하는 경비는 준비위원회에서 부담하기로 결의하고 오늘 이에 총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70)

이규갑이 경동지회 설립의 주역임을 알 수 있다. 경동지회는 당시 서울 근교인 고양군 崇仁面·漢芝面·纛島面 일대를 구역으로 한 지회였다.71) 처음에는 설립대회를 신설리 신설학원에서 열기로 계획하고 동대문경찰서의 허락까지 받아두었으나, 학원측의 완강한 거부로 장소를 안암리 요리집 盛春館으로 바꾸어 옥외 집회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다시 허가를 받아 열게 되었는데 100명에 가까운 회원과 내빈이 출석한 가운데 이규갑의 사회와 개회사로 시작되었다.72) 이 설립대회에서 선임된 경동지회 임원들은 다음과 같다.

회장 : 권유상 부회장 : 이윤우

(): 심의성·이규갑·장세걸·이원섭·이규성·이인강·강극주·윤충식·김영수··김의월·손석호·김순자·이원호·이재소·이순재·김순희·김성진·김일·마호·이병은73)

그리고 618일 제1회 간사회를 이규갑의 집(숭인동 156번지)에서 열어 간사 장세걸의 사임 보류와 각 부서 배치의 건, 반조직의 건, 회관문제, 유지 방침의 건 등을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이때 이규갑은 서무부 총무간사를 맡았다. 이 회의에서 예산을 편성하면서 회원을 230명으로 예상하고 회비를 1명에 30전씩으로 계상하면서도, “현재 명부에 의한 회원은 103명으로 금후 경성지회 회원 중에서 본회로 입회할 자 약 10명이 예상되지만, 겨우 110여 명이어서 과연 230명의 입회자가 있을지는 의문이다.”라고 주기하고 있다.74)

그러나 그 무렵 신간회 본부에서 복대표대회로 조직 변경이 결의되어 지회에도 조직변경 지령이 내려왔다. 그러자 712일 제2회 간사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토의한 결과 720일에 임시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의하였다.75) 예정대로 720일 오후 8시 회원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대회를 열어 회장 권유상의 개회사가 있은 후 임시의장으로 이규갑을 선임하여 그의 주재하에 변경된 집행위원제의 간부와 본부 대표를 선임하였다. 이때 선임된 임원과 본부대표 회원은 다음과 같다.

집행위원장 : 이규갑

집행위원 : 전효배·이원호·윤충식·이정구·서광훈·김성진·정순

·홍종기·조충구·이규성·이병은··김선월·박용진·이정

·박기채·정광혁·이대우·강극주

검사위원 : 권유상·이원섭·김 일·김영수·오순엽

집행위원 후보 : 박상현·신영식·최우식·마 호·진강제

본부대표 회원 : 박희도·윤충식76)

신간회 경동지회 집행위원장에 선임된 이규갑은 723일 제1회 집행위원회를 열고 여러 가지 사항을 토의한 후 회관문제에 대하여는 각 위원이 각기 부담하기로 하고 각 부서를 배정하였다.77) 87일에는 사무실을 동대문밖 신설리로 옮기고 그곳에서 제2회 집행위원회를 열어 본부회관 건축 문제, 기관지 발행의 건, 회원 정리 및 회비 징수의 건, 지회회관 건축의 건 등을 토의하고 임원보선을 하였으며, 특히 이규갑을 포함한 7인을 지회관건축기성위원으로 선임하였다.78) 1929121일 제2회 정기대회에서는 집행위원장이 이석으로 개선되었고, 1931124일 제3회 정기대회에서는 집행위원장이 박희도로 바뀌었지만, 3회 정기대회에서도 이규갑이 검사위원에 선임된 것으로 보아 19315월 신간회가 해소되기까지 계속 경동지회 간부로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79) 특히 이규갑이 참여했던 신간회 경동지회는 신간회 해소에 신중한 입장을 취해 끝까지 반대했던 지회로 알려져 있다.80) 다음과 같은 경성지회 제3회 정기대회 주요 의안도 그 점을 시사해 준다.

1. 신간회 해소 문제 비판의 건

해소문제 연구부를 설치하고 해소의 가부를 충분히 연구하기로 함

1. 중앙 간부 신임 여부에 관한 건

조사부로부터 다소 조사한 것이 있으나 확실하다고 인식치 못하므로 또 신임위원에게 일임하야 조사결정키로 함

1. 본부 대 京支 문제에 관한 건

이것도 또 한 번 신임 위원에게 일임하야 충분히 조사키로 함

1. 예산안 문제81)

그러나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이규갑은 신간회가 해소된 후에도 해오던 목회활동을 계속하였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는 돈암리구역을 담임하였고, 1932년부터 1934년까지는 도화동구역을 담임하였으며, 1934년 연회에서는 광희문구역 담임자로 파송받았다. 그리고 그 때까지는 협동회원(본처목사)으로 있었으나, 19354월 정동제일예배당에서 열린 제5회 연회에서 동부연회 소속으로 정회원이 되었다.82) 이 무렵 경동지방 감리사 전효배 목사는 이규갑 목사가 맡고 있던 광희문구역에 대해서 연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光熙門區域光熙門, 水鐵里 兩敎會組織되어 있는데 이 亦 自治區 域으로 그 區域形便擔任 牧師 李奎甲氏熱心으로 일하시는 結果로 앞으로 많은 所望이 있사오며83)

그는 광희문 구역을 잘 목회하고 있었으나, 그해 연회에서 정회원이 되면서 경기도 양주구역을 담임하게 되었다. 이 구역을 담임하고 있으면서 구역내 어려운 가정을 돌보고,84) 양주중학교를 설립하는 일에도 관여하여 설립기성위원을 맡기도 하였다.85) 이 무렵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전시체제하 감리교의 부일협력에 대해서는 이규갑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정춘수, 이동욱과 같이 친일의 일선에 나서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438월 전진규 통리 하에서 경기교구장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86) 이는 정춘수와 변홍규의 혁신교단 참여로 감리교단이 진통을 겪고 있을 때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감리교단 특별총회에서 선임된 것이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에서 이 선거가 부적절하게 이루어졌다는 트집을 잡아 무효화시키고,87) 한 달 여 만인 같은 해 103일 경무국의 비호 하에 특별총회를 다시 열어 일제 경찰이 원하는 대로 정춘수를 다시 통리자로 선임하였다.88) 해방후 이규갑이 감리교 재건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제말기에 흠 잡힐 만한 친일협력을 하지 않았던 것을 반증해 준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이규갑·이애라 부부의 생애와 민족운동을 정리해 보았다. 이제 이상에서 앚혀진 몇 가지 사실을 요약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로 이규갑과 이애라는 선교사의 중매로 1912년에 결혼하고 1918년 초까지 공주에서 함께 교육활동을 하였다.

둘째로 이규갑이 1911년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으며, 1910년대에 신학을 공부한 것은 사실일 수 있지만, 졸업 여부는 알 수 없으며, 졸업을 했다고 하더라도 1920년대 후반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19296월 북감리회 조선연회에 참석하여 집사성품을 인정받았고, 이듬해 9월 연회에서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셋째로 이애라의 갓난아이가 일경의 폭행으로 사망한 것은 이규갑이 상해로 가기 위해 서울을 떠난 19194월 중순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넷째로 19194월 하순경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규갑과 홍면희가 전한 국내 4·23 국민대회와 한성정부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다섯째, 이규갑은 안창호의 권유로 19197월부터 19203월 의원 자격을 상실할 때까지 충청도 의원으로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다.

여섯째, 이규갑은 1920년대 중반 블라디보스토크 지방에서 남감리회 소속으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가담했다.

일곱째, 이규갑은 1927년경 해외 망명생활을 끝내고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목회활동을 하면서 19294월부터 신간회 경동지회를 설립하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여덟째, 이규갑은 19309월 북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장로목사 안수를 받고 협동회원(본처목사)으로서, 돈암리구역을 담임하다가 1932년 도화동구역, 1934년 광희문구역 담임으로 전임하였고, 19354월 정회원으로 승격되어 경기도 양주구역을 담임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이규갑·이애라 부부의 생애는 일제강점기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을 포함한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그 가운데 어린 아이와 아내를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이규갑은 이런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1930년대 그의 목회활동도 일제 감시라는 큰 제약이 따르긴 하였지만,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광복회 강북지회 회원들 아산 이규갑 목사 묘소를 찾다 - 당당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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