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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순교기념비 (2)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09. 5. 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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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안길선 목사 (장로교)

 

 

안길선 목사(1891-1950)


해방 이후로 지금까지 성동구에 자리한 한국교회의 지표로서 그 자리를 지켜온 신당중앙교회. 그 숨쉬는 역사를 힘있는 맥박으로 이어지게 한 심장부가 있다면 바로 교회 마당에 자리한 '안길선목사 순교기념비'의 신앙적 유산일 것이다. 그는 1891년 12월 8일 함북 성진에서 출생하셨다. 신사참배반대로 평양신학교를 중퇴하고 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인 경성신학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음. 만주 각지역 교회를 순회하며 신사참배 거부집회를 기획해 나갔다. 신사참배 거부로 중국에 망명 연변 용정에서 동산교회를 시무하시다가 1945년 해방과 함께 청진에 남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이승만의 앞잡이로 오인받기도 했다. 1948년 2월 월남하여 바로 신당중앙교회 시무하였다. 그는 자주적인 민족목회를 주장했고 신학교시절부터 교분이 두터웠던 친구로는 송창근 목사(조선신학 학장)와 박형용목사(고려신학 학장) 인권운동가로 유명한 김재준목사 등이 있고 송창근 목사는 안목사와 함께 북으로 납치되었다. 1950년 6월 27일 신당동을 지나가는 피난민을 보며 가족들은 안목사를 설득했지만 "만주서도 양떼들을 버리고 나왔는데 어떻게 나만 살자고 또 여기를 떠나겠느냐, 아직 피난가지 못한 교인들도 있는데 난 교회를 지킬테니 어머니를 모시고 너희들만 떠나거라" 고 하고 1950년 8월 23일 오전 10시 교회에서 기도하시다가 납북되어 순교하셨다. 아들 안철호 장로는 누이동생과 어머니를 모시고 부산에 피난갔다가 9.28수복으로 서울에 올라온 가족들은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소식을 접하고 당혹감과 슬픔 속에 빠졌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아오지의 한'은 남궁혁 박상건 송창근 등 60명의 저명 종교계 납치 인사들은 50년 12월 10일쯤 압폭강 연안의 만포 부근까지 당도하여 헐어빠진 농가에 수용시키고 기독교도연맹에 협조할 것을 설득하다가 실패하자 식사도 제대로 안주고 불도 때 주지 않아 종교인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시달리며 새우잠을 자야했고 발진티푸스에 걸리고 사경을 헤메는 등 결국 납치 당했던 인사들은 북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하늘나라에 안식했다. 안길선목사는 김광훈목사, 한만영, 최원일, 정원석 목사 등 한국 교계의 귀한 종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많은 목회자와 일꾼들을 배출해냈다. 안길선 목사의 외아들인 안철호장로는 서울대에서 40년 교수생활을 하며 우리나라 토목학계의 거목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안철호는 (주)범아 엔지니어링 회장으로 항공축량사업계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슬하에 2남 1녀의 자녀교육은 물론 회사에 신우회를 창립해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며 직원들의 영성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지키기 위해 타협을 거부하고 순결하게 살다가신 아버지 안길선 목사의 뜻을 기리며 안철호 장로는 이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과 주께서 흠향하실 향기로운 찬양의 메아리를 위해 헨드벨 콰이어 사역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하 글 출처- http://kcmma.org/)

 

순교자 안덕윤 목사 (장로교)

 

안덕윤 목사(1897-1950)


안덕윤은 1897년 11월 22일 전남 광양군 진상면 원당리에서 태어났다. 성경학교 신학교 시절에 광양의 농촌교회, 평양의 여러교회 전도사로 시무 1939년 평양신학교를 34회로 졸업하고 1940년에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광양중앙교회 담임으로 시무하였다. 말씀의 능력과 신유의 은사가 있어 부흥사협회에 가입하고 부흥사로 파송받았다. 1943년 목포지방에서 부흥회 하던중 "천황은 신이 아니다, 2-3년내에 일본이 망하고 조선도 해방을 맞는다"고 한 설교가 일경의 귀에 들어가 2년 6개월 옥살이 하던중 해방을 맞았다. 안목사의 예견은 정확했던 것이다. 출옥한 안목사는 고성읍교회 죽산교회를 거쳐 6.25 한해 전에 대창교회로 옮겨 시무하다가 6.25를 맞은 것이다. 아내가 피하기를 권했지만 "살면 충성이요 죽으면 순교자의 면류관을 받는 것인데 무엇을 염려합니까."? 하며 담대하게 교회를 지켰다. 물밀듯이 밀어닦친 공산군은 대창교회를 접수해 인민군 임시본부로 사용했고 교회 사택도 쓸만한 물건은 모조리 가지고 갔다. 1950년 9.28 수복으로 서울을 탈환하는 등 전세가 180도 바뀌었는데도 김제는 여전히 인민군이 동리를 장악하고 철통같은 수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남포에서는 동리 청년들이 성급하게도 라디오 방송을 듣고 태극기를 만들어 흔들며 농악대를 앞세우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다가 졸지에 40여명의 청년들이 인민군에 의해 체포당해 교회당에 감금되었다. 이때 안목사도 배후조정 가능자라고 하여 함께 연행돼 함께 교회 당에 감금되었다가 40명 청년들과 함께 총살당하고 인민군들은 퇴각하고 말았다. 1950년 9.28수복시에 농악대를 앞세우고 "대한민국만세"를 부르는 청년들의 배후조정 가능자라고 하여 함께 연행하여 교회당에 감금당했다가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40여명의 청년들과 함께 안목사를 끌고 가다가 총살하였다.

 

순교자 안봉진 목사 (장로교)

 

 

안봉진 목사(1895-1949)


안봉진은 1895년 8월 10일(음)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 장호리 116 번지에서 안기환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오성학교시절 입신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의술까지 시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에 서울에가서 서울의전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재정보증인이 없어 물거품이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안봉진은 청산학원을 졸업하고 신흥우 박사의 스칼라쉽을 얻어 미국유학길에 고향에 들렸다. 조모의 반대로 미국유학 기회를 놓치고 장로교에서 안수받고 순회목사가 되어 경기도 양주 강원도 협곡 호양 고저교회를 돌보든 중 1948년 함경도 원산 신창 속후 등 여러교회를 전전하다가 북청교회에 안착하였다. 일제하에 그의 목회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아 북청교회 당회장으로 있으면서 함남노회장을 역임 교회재건에 동분서주 했다. 번듯한 민족교회를 역설한 그는 붉은 국가 건설을 위해 협력할 것을 강요하는 공산당의 요청을 반대하고 오히려 공산당이 싫어하는 조선 민주당 북청군당 위원장으로 활동을 하며 신앙의 절개를 다짐했다. 자연 공산당의 눈밖에 날 것은 당연했다. 공산당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 편을 만들려고 8.15,3.1절같은 국경일에 원고를 미리 써주고 연사로 협력할 것을 강요하고 기독교도연맹에 군당위원장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죽기를 각오하고 거절 반동으로 몰아 가택수색을 하는등 공산당의 사찰정치에 시달렸으나 월남하지 않고 교회를 지켰다. 공산당의 사찰정치에 견디지 못한 교역자들이 하나둘 월남하자 1947년 북청성동초등학교 교사였던 외동 딸이 "그러지말고 아버지 남한에가서 살자고 "애원했지만 "목자가 양떼를 두고 어찌 도망치듯 피난할 수 있느냐? 이 아비를 삯군목자로 만들지 말거라" 그리고는 1948년 중앙교회를 거쳐 고향인 신창교회로 임지를 옮겼다. 안목사가 고향교회로 부임하자 기독교도연맹은 그를 군당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꼭두각시 노릇을 시키려고 했지만 안목사는 죽기를 각오한 듯 강경하게 거절했다. 1949년 크리스마스 때 내무서에서는 의도적으로 집회허가를 내주지 않고 크리스마스 전야에 집회승인 문제로 잠간 왔다가라는 연락을 받고 출두했으나 밤 10시에 서시베리아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은 남편이 돌아오나 해서 끝내 월남하지 않고 공사당의 학정에 몸서리치다가 정신분열증세를 보인 2남과 함께 북에 남았다. 세째 아들 순천만을 월남시켜 딸 준삼씨와 함게 교회 집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순천씨의 가족으로 자부 김월순 집사 사이에 손자 용검이와 손녀 미영이가 있고 딸 준삼씨도 3남 1녀를 슬하에 두었다. 한평용목사는 순교자라는 시를 써서 시베리아로 유배간 순교자들을 신학세계에 헌시해 위로 했다. 바람찬 시베리아 감옥 안에서 스라린 온갖 고생 다 당하다가 정 깊은 고국 하늘 바라보면서 불쌍타 남 모르게 세상 떠났네.

 

순교자 원성덕 목사 (장로교)

 

 

원성덕 목사(1889-1951?)

 

1889년 10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에서 태어나 민족의 요람 선천 신성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구성면 면서기가 되어 근무했다. 면서기로 근무하든 중 3.1만세 사건이 전국을 강타하게 되었을 때 독립선언문을 구해서 친히 손으로 써서 등사를 하여 구성군의 유지와 청년들에게 배포했고 원성덕의 애국적 행위에 감동받은 군민들은 4월 첫 구성장날을 택해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을 폈다. 필적수사를 통해 원성덕의 필적임을 알게된 일경은 그를 수배했고 원성덕은 윤하영과 함께 최창학의 폐광굴로 숨어들어 부인이 두레박으로 내려주는 주먹밥을 먹으며 피신하다가 중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할 계획으로 윤하영과 약속하고 헤어진 후 부인과 작별을 하고 산자락을 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선천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미 잡혀온 윤하영과 함께 일경에게 고문당해 몇번이고 까무라쳤다. 마침 선천경찰서장이 원성덕의 먼 친척으로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어 2년 형을 받고 출소했으나 그와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6명의 동지들이 하나같이 고문으로 옥사한 사실을 알고는 세상의 허망함을 느끼던 나머지 하나님의 사자가 된다는 소명감을 가지고 평신에 입학 1926년 19회로 졸업한후 평북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남시교회에 부임했다.남시교회를 시발로 천산의 영동교회 원세평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중 1945년 8월 14일 어린이들에게 조선의 애국가를 가르침으로 반일감정을 고취했다고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이튿날 해방을 맞아 출옥했다. 공산군은 원목사에게 애국자라는 표창을 주며 회유했으나 거부하자 요시찰인물로 일거수 일투족 감시대상이 되었다. 공산화된 북한에서 신시교회, 영산교회를 를 섬기든중 6.25사변을 맞고 가족들의 월남권유를 "양떼를 버리고 목자가 어디를 가겠느냐?"하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교회를 사수하다가 UN군 북진할 때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 산에서 대검에 무참히 찔려 죽임을 당했다. 살아있는 원목사를 대검으로 찔러죽인후 머리, 팔, 다리 등을 각을 떠서 주검의 시체는 가마니에 넣고가버렸다. 잡혀가는 원목사를 뒤따르던 교인들과 부인과 자손들이 원목사의 주검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원목사의 후손으로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다문리에 사는 딸 원옥경씨가 있다.

 

순교자 유계준 장로 (장로교)

 

 

유계준 장로(1879-1950)


유계준은 1879년 4월 3일 평안남도 안주군 청산면 오리에서 유석덕씨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영변에서 알아주는 거부였으나 몰락하고 세상을 떠나자 13세에 아버지를 잃은 유계준은 평양으로 나와 어떤 상점의 점원이 되어 3년간 일하다가 1895년 청일전쟁으로 상점이 대성구지라는 곳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그의 재치 있는 솜씨가 주인의 마음에 들어 상점주인의 사위가 되어 단독으로 장사를 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평양에 이주 장인이 마련해준 미림리 장터에 한 가옥에서 단독으로 장사를 하게 되었다. 성실했으나 술만 먹으면 부인을 때리고 술주정을 하고 싸움만하면 치료비를 도맡아 물어주던 그가 평양서문통을 지나가다가 깡패 이기풍이 던진 돌에 맞아 터진 이마를 손으로 누루며 시종 웃는 얼굴로 "형님 예수믿고 구원 얻으세요" 하는 선교사 마포삼열의 행동에 아상한 감동을 받고 가까이 지내는 한석진을 찾아가 그 선교사는 미국에서 박사까지 한 석학인데 조선에까지 와서 선교하는 훌륭한 분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중에 전도를 받아 감동되어 중생되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유계준의 부인은 남편에 대해 회고하기를 "중생이란 뜻이 무엇인지를 남편을 보고 알게 되었어요. 예수 믿기 전에는 맹수 같았는데 복음이 들어가자 사람이 변해도 어찌 그렇게 변할 수가 있어요?" 천부적으로 효자였던 그는 예수를 믿자 홀어머니와 동생 계삼이를 평양으로 불러 한집에 살면서 동생을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숭덕학교 교사로 일하게 만들었다. 결혼 6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자 부인은 새벽마다 산정현교회에 가서 기도하여 6년만에 장자 기원을 얻어 기뻤으나 아들이 예능방면에 관심을 갖는 아들의 캠퍼스를 찢고 목사가 되라고 했으나 목사는 못하고 의학을 해서 인술을 베픈다고 하여 그것까지 막을 수 없었다. 자기의 기업을 사기업으로 키우지 않고 민족기업으로 키운 청지기 사상이 뚜렸한 기업으로 평을 받았다. 교육사업에 눈을 돌리고 숭덕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 이사장이 되었다. 교육사업은 항상 미쪘고 모자라는 월급은 기업에서 충당했고 그러면서 그는 일찍이 양로원 사업을 시작했다. 극심한 기근과 일제의 수탈로 젊은이는 이민가고 노인만 고향에서 고생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며 굶어죽는 수가 적지 않아 기도하는 중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 땅에서도 알아주는 소금장사로 수출하는 소금속에 독립신문을 감추어 배포하였고 산정현교회에서 장로안수를 받은 그는 독립자금모금 등 독립운동에 힘썼고 창씨개명 반대 학도병제도 반대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한 민족적 거목이었다. 교회헌납을 강요하는 공산정권에 반대하여 교회 정문에 두러누워 버티다가 1백명의 무장 군인에 의해 교회를 징발당하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사가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6.25가 발발하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9.28 북진하는 국군의 공세에 몰려 퇴패하든 공산군에 의하여72세에 총살당해 주님의 품에 안겼다.

 

순교자 유세근 목사 (성결교)

 

兪世根(유세근·1909-1950) 


대한성결교회 서울시 독립문교회 목사이다. 8월23일 오후 4시경 서울 독립문 성결교회에서 수요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당을 나오다가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되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경성신학교 교수들과 함께 납북되었다. 유세근 목사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납북된 인물들로, 2000년 들어서 본 교단에서 순교자로 추서되었다. 한편 용인한국교회순교자기념관은 한국교회 10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으며 장로교와 감리교, 본 교단 등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기간 중 순교한 한국교회 순교자들과 그들의 헌신적인 신앙의 기록이 사진과 자료로 전시되어 있다.

 

순교자 유영복 정교 (구세군)

 

 

유영복 정교(1914-1950)


유영복은 1914년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서 사업을 하던 유춘실의 2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중학교때 부친이 부도가 나 빚독촉에 못이겨 금화로 이사가는 바람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부친을 따라가 토건업을 하면서 토관제조업에 착수 1년만에 약관 20에 큰 토관제조회사로 발돋움했다. 그대 유영복에게 새로운 전기가 될 기회가 왔다. 김화시장에 군복을 입은 이들이 북을 치며 강연하는 것을 듣는 인파에 들어갔다가 예수를 믿으면 죽지 않는 다는 강연을 듣고 죽어도 다시 사는 비밀을 알아보기 위해 영문에 출석하기 시작 하게 되어 병사가 된 것이다. 유영복은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금주 금연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김화영문에 출입하기 시작한 그는 성령세려를 받아 열심있는 병사가 되었다. 바쁜 일중에도 전도대원들과 함께 매주일과 수요일 오후에는 북을 치며 찬송을 부르며 전도를 하며 큰 소리로 목청을 높였다. 그의 열심으로 아내는 물론 부모까지도 교인이 되었고 유씨 집안은 이제 착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유영복은 25세에 부교가 되었고 그의 열심은 4년후 30이 되기전 정교가 되었다. 그가 정교가 된 후에는 김화영문의 살림을 도맡아 했다. 김화영문에서는 강습소를 운영했는데 구세강습소는 학교를 가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초등학교 과정에서 중등학교 과정까지 있었다. 대입검정도 지도했는데 김화에서는 구세강습회가 명문고로 통하고 있었다. 학생도 물론이고 교사강사료도 무료였고 영문이 담당했는데 그것은 바로 유영복정교의 몫이었다. 금화영문의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구세강습소를 무료로 운영하며 담임사관을 불편없이 보필함으로 교세가 불어났다. 그의 사업은 이상하리만치 번창했고 구세강습회는 많은 학생들을 수용했다. 유영복정교는 구세군 영문중에서도 사관님을 따뜻하게 모시는 정교로 소문날 정도였다. 담임사관이 오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쌀도 팔아다 독에 채워 드리고 도서비다 심방비다 예비비다 해서 목회에 지장이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일제의 교회 탄압으로 교세가 위축될때에도 김화영문은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고 교육에도 힘을 기울여 교세가 부쩍부쩍 늘어났다. 그가 남다른 열정으로 김화지역 선교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일제하에서도 그의 열정은 그의 사업도 잘되고 교세도 불어난 것이다. 1945년 해방후 영문안 프락치들은 담임사관의 설교를 메모해 보고하고 기독교도연맹에 가입압력에 못이겨 영문사관이 서울로 가버리고 유영복정교가 책임을 지게 되었다. 유영복은 담임사관 파견을 요청했지만 공산당이 교회를 없애려고 탄압을 느추지 않고 박해중이라 오는이가 없어 유영복이 영문을 책임지고 이끌어갔다. 1950년 6.25가 터지자 남한으로 피난가자는 권유도 물리치고 교회를 지키다가 1950년 10월 28일 UN군에 패퇴하던 인민군에게 끌려가며 배교를 요구받았으나 거부하자 배우개고개에서 따발총으로 사살했다.

 

순교자 유정철 목사 (기장)

 

柳禎喆(유정철, 1904-1950) 


기독교 장로회 신남포교회(장로교) 목사이다. 8월21일 오후 10시경 중구 장충동 2가 162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되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시무 중이던 신남포교회에서 6월23일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에 피살되었다.

 

순교자 이  건 목사 (성결교)

 

 

이  건 목사(1896- 1951) 


이 건은 1896년 10월 20일 함경남도 북청(北淸)에서 엄격한 유교 가문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향리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다. 머리가 명석한 그는 학업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여 20살 때에는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이 건은 유교의 전통에 젖어든 부모의 슬하에 자라면서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가 17,8세가 될 때에 기독교를 접하자마자 곧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대쪽같이 곧고 바른 그의 성격을 바탕으로 그는 열심히 경건한 신앙행활과 교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이씨 조선이 한말 일제의 침략과정에서 어이없이 무너져내리자, 이 건은 기독교를 통한 민족의 구원을 내다보게 되었다. 유교의 인습에 강하게 젖은 그의 부친은 제사 문제 등의 이유로 그의 교회출석을 몹시 반대하였으나, 갖은 핍박 속에서도 이 건은 신앙생활에 더 열심을 내었다. 그는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였고, 기도에도 열심이었으며, 주일학생을 가르치고, 교회봉사에 충성을 다하였다. 그럴수록 가정의 핍박이 더 심해져서 그가 아끼던 종교서적들을 불태우곤 하였다. 1920년에 이 건은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 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가장 싫어하는 신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일체의 학비와 생활비 보조를 받을 수 없었던 그는 피눈물나게 고학으로 공부하였다. 추운 방에서 굶주린 배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2년 동안 공부를 계속하였지만 그의 생활은 날로 곤궁해져갔다. 결국 그는 고향친구요 믿음의 동지인 이원균의 권면을 받아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한 후에 그는 나라를 빼앗긴 조국을 위해 일하고자 하였으나 그럴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겨레를 구원하는 것이 조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보다 더 급한 임무임을 깨달은 그는 1922년 경성성서학원(京城聖書學院: 현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이 건은 천성이 경건하고 인물이 준수하며 신학문과 구학문을 겸비한 수재였으며, 신학생 시절부터 뛰어난 독서열과 학구열을 보였다. 1925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성서학원을 졸업한 그는 그해 6월에 평양으로 파송을 받아, 부교역자 김제근(金濟根)과 함께 평양교회(일명 상수리 교회)를 개척하였다. 유학시절의 가난 때문에 병약하였고 뼈가 앙상하였던 그의 사역을 가족은 극구 반대하였으나, 그는 부인과 자녀들을 이끌고 상수리 교회에 부임하여 3년간 목회에 전념하였다. 평양교회의 신자가 100여명으로 늘어나 교회의 공간이 협소해지자, 이 건은 1928년에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같은 해에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평안남도 지방 감리목사 대리로서 산하 교회의 감독과 치리(治理) 등에도 힘썼다.  육신의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1931년에 이 건은 경성성서학원의 교수로 초빙을 받아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명직 목사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그는 교무과장 혹은 학생과장의 직책을 맡았으며,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神社參拜)의 거부로 1934년에 교단이 해산되고 경성성서학원이 폐쇄될 때까지 후진양성에 힘썼다. 천성이 강직한 이 건은 신사참배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교 중에도 천황숭배가 우상숭배의 죄임을 강조하였다. "활천"에 기고한 그의 글 '기독교 재림문제'가 곧 이를 잘 보여준다. 밤이 캄캄할수록 별은 더욱 빛나는 것같이 時代가 暗黑에 빠져들어갈수록 하나님의 擇하신 子女의 빛은 더욱 드러난다.  우리가 初夜에 天空을 쳐다보면 별들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밤이 깊어오면 天空이 캄캄하여진다. 이때에 별들은 그 값없는 빛을 明朗하게 드러내인다. 今日 우리의 處地도 그러하다. 참빛의 아들된 信者나 敎役者이면 至今이 곧 빛을 드러낼 때이다. ... 末世敎會에도 一邊 主의 在臨을 悲望하며 順福音을 傳하고 있는 者가 많은 것이다. '사데에 오히려 몇 명이 있어 흰옷을 더럽히지 아니한지라, 저들이 合當한 자니 白衣를 입고 나와 함께 행하리라'(묵 3:4) 한 말씀과 같이 우리들은 遺殘者의 班列에서 主를 證據하며 살 것이다. 不義한 자 그대로 不義하고 깨끗하지 못한 자 그대로 깨끗지 못하되 오직 우리들은 信仰貞燥를 굳게 지켜 나갈 것이다." 8,15 광복 후에 이 건은 새로 개교한 경성신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여 혼란기의 교단 목회자의 양성에 노력하는 한편, 교단 기관지 "활천"의 주필도 겸직하여 교단 목사들의 자질 향상, 영적 지도에 힘을 쏟았다. 1950년 6,25전쟁 때에 그는 박현명, 김유연 목사 등과 함께 피난을 가지 않고 신학교를 지키겠다고 남아 있다가, 같은 해 8월 23일 아침에 북한 정치보위부원 3명에게 붙들려 납북되었다. 납북된 이후의 그에 대한 소식은 알 수 없다. 1962년에 내외문제연구소가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던 글 "죽음의 세월"에 의하면, 이 건은 발진푸스에 시달리며 평양까지 끌려가, 북한에서 지하 신앙운동을 일으키던 김인준(金仁俊), 박상철(朴相澈) 목사와 연락하며 수용소 안에서 신앙운동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끝내는 1951년 말엽에 김유연 목사와 함께 순교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성서영해전집(聖書靈解全集), 성서인물강화(聖書人物講話) 및 설교집 "진리의 강단" 등이 있다.

(글 출처- http://blog.naver.com/bianco100/10010428579)

 

순교자 이병휘 장로

 

순교자 이성태 집사 (장로교)

 

 

이상태 집사(1915-1943)


순교자 이상태 집사는 1915년 4월 3일 경북 금천군 구소요면 도암동 198에서 이동하의 4남으로 출생 익산으로 이거함.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심하고 기독교 탄압이 고도에 달한 시절을 사셨고 창씨개명과 신사침배가 극심했던 일제 강점 중 하반기에도 신앙을 지켰으며 초등학교에도 친구들이 증언하는대로 신앙이 좋았고 영명미션스쿨 재학시 민족 독립운동에 심취하셨고 유학적 가정교육과 함께 기독교교육을 받으심. 초등학교시절 주일학교 학생으로 부모님과 같이 신앙생활을 시작하셨고 영명학교시절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셨고 주일학교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주일예배인도자로 안수집사로 설교자로 열심히 봉사하셨고 철야기도와 수시 교회기도와 밤 산기도에 열심히셨음. 1920년부터 1943년 순교하기까지 익산고현교회에서 안수집사로 교회 각분야에서 교사 찬양대 구역인도자 설교자로 신사참배반대를 강력히 주장하셨고 병자방문 심방기도 간호에도 열심히셨음. 강단에서 설교시 신사찹배는 우상이라고 강조하고 군산노회석상에서 신사참배 가결은 불법이요 우상숭배라고 외친 사실로 경찰에 수배되어 서울로 피신하였으나 민족해방운동과 노방전도중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과 옥고를 치루고 깊은 병에 신경으로 가석방되었으나 병석에서 순교하심. 아들 이성수 장로 군산 주암교회 시무 전북장로회 회장 전국장로회연합회 부회장 총회재정부장 순교자기념사업부 면려부 부 총무로 학생지도부 회계. 순교자기념사업부 서기로 봉사하고 있음.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시요!라고 부인에게 유언.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요 우상숭배하는 나라와 민족은 망합니다“라고 외침. 유품으로는 거의 소실되었으나 사용하시던 성경 교인들 초상화 스켓취북 사진등이 있다.

 

순교자 이우석 목사 (장로교)

 

이우석 목사(?- 1942)


이우석은 을미사변을 비롯한 구한말의 어수선한 소용돌이와 함께 복음의 씨앗이 싹터오르는 시절 전북 전주 화원정에서 봉산이씨 이선명씨와 전주 최씨 선자씨의 2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미국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13세에 예수를 영접하였다. 복음성가단을 만들어 이들이 가는 곳 마다 간증과 연주로 청중의 심령을 사로잡았다. 그 복음성가단원중 이석우는 목사가 되었고 현재명같은 훌륭한 음악가가 배출되었다. 예수냐 조상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아버지의 명령에 거역하게 된것은 부위렴 선교사를 통하여 교회에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1942년 봄 세례를 받고 부위렴 선교사의 눈에 들어 평양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고 아버지로부터 외면을 당한채 집을 나온 이우석은 학교구내 이발사가 되어 학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트럼팻연주를 익히며 새로운 양식을 익히니 이 모두 은혜로운 연단이었고 부위렴 목사의 배려였다. 1938년 신사참배결의, 1941년 하와이 기습한 전쟁과 함께 선교사 추방 당하여 부위렴선교사와 이우석목사가 헤어진다. "일본은 이 전쟁에 이기지 못하고 망합니다" 마지막까지 승리하십시오"하며 헤어지는 부위량 선교사의 말에 기대와 꿈이 되었고 민족을 일깨우는 메시지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1942년 신사참배 애국헌납기 등 강압적인 요구로 교회의 숨통이 터지자 이우석목사는 부위렴 선교사가 마지막 남기고 간 "일본은 망한다"고 한 말을 주일 설교때마다 반복하니 일본은 이우석목사를 민족주의자로 지목하고 괴롭히다가 검속하게 된다. 일경의 유혹에 답하지 않기 위해서 이우석은 혀를 깨물어 취조가 불가능해지자 석방한다. 석방 후 보성읍교호로 임지를 옮기게 된다. 설교에 불온사상이 내포되었다고 연행하는 일은 예사일이 되었다. 목회 심방 경찰서 연행 부흥사경회 --- 모두 마지막기회로 알고 나팔수의 연주는 복음전파도 되었지만 피로함과 무리는 경찰서 연행과 함께 발병된 임파선 염으로 인하여 진안읍교회에 부임을 앞두고 1942년 11월 6일 오후 16시 230장을 가족들 앞에 브르며 가족들에게 "도를 굳게 지켜라, 오직 믿음으로 성취하라"는 말을 남기도 주님의 품에 안겼다. 미망인 취금례. 장남 봉일장로 둘째 용일 장로 셋째 영일 새샘교회 담임 넷째 호일은 문화교회 시무중 장녀 영자 권사 차녀 광자 명성교회 충성 (유복녀) 이봉일장로는 순교자유족회 임원이다.

 

순교자 이유택 목사 (장로교)

 

이유택 목사(1905-1949)


이유택은 1905년 1월 9일 경북 안동군 도산면 운곡동에서 이퇴계 선생의 후예로 태어났다. 4대독자 유복자로 태어나 한문을 읽다가 14살에 조혼하여 15살에 첫 딸을 낳았다. 그는 예안보통학교에 다니든 중 평양에서 온 김선생이란 분을 알게 되어 예수를믿게 되어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집안 어른들의 "그래 네가 그토록 야소를 믿으려면 할 수 없다. 너는 이 문중에서 나가야 하느니라"는 호통에도 이유택은 부동자세로 엎드려 입을 열줄 몰랐다. 4대독자이지만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식은 그대로 살려둘 필요가 없다하여 가문회의에서는 처형하기로 결정하여 멍석말이를 하고 발로 밟아 처형하는 한창 도중에 문중의 어른들이 곰곰히 생각하고 "그런대로 쓸모있는 놈을 그대로 죽이기는 애석하다"하여 중단했다. 멍석말이에 풀려난 그를 보고 있던 문중 어른 중 외삼촌이 신주단지를모두 끄집어 내어 냇가에 내동댕이 치고 신주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으니 이런 놈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낫을 던져 찍었지만 다행히도 빗나가 목숨을 구했다. 어린 중학생의 몸으로 슬하에 딸 셋이 있었고 문중에 축출을 당해 가족을 먹여 살리랴 학비를 벌랴 갖은 고생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머리가 비상하여 시간에 쫏기면서도 항상수석을 차지하여 매퀸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매퀸은 이유택을 전문학교를 거쳐 미국유학을 시킬 계획이었지만 김인서 장로가 매퀸에게 길선주목사가 교회를 개척하고 훌륭한 젊은 전도사를 찾는다고 하니까 이유택을 소개했다. 이유택은 미국유학을 포기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 1937년 32회로 졸업한 후 평양노회에서 1937년 목사안수받고 신현교회 담임으로 부임. 1938년 9월 10일 제 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가결시킬 때 이미 금강산 수양관에서 10일동안 주기철, 김화식목사와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던 이유택목사는 땅을 치고 울었다. 1938년 농후회사건에 연루되어 주기철목사와 함께 주동자로 몰려 경북 의성 경찰서로 잡혀가 7개월간 갖은 고문을 받았다. 출옥 후 1941년 신현교회는 폐쇄 당하고 남신의주 교회에 부임 해방을 맞았다. 일제에 의하여 신앙의 용장이 된 이유택목사는 해방 후 신현교회를 재건함과 동시에 이북 5도 연합노회를 결성하는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재건된 신학교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공산당의 탄압으로 월남을 권유받았지만 500명의 양떼를 버리고 갈 수 없어 교회를 사수하다가 1949년 12월 28일 공산당에의해 문제의 교역자로 검거가 되었으니 이듬해 일으킬 6.25의 전초전이었다. 수요일 찬양예배를 마치고 사택으로 가든중 어둠속에서 나타난 내무서원이 그의 팔장을 끼고 "갑시다. 조사할 것이 있으니 --" 이목사는 가족이나 교인들에게 작별인사 한마디 못하고 영원히 오지못할 곳으로 가고 이삼열목사가 부친의 뒤를 이었다. 이삼열목사는 대구 계성고등학교 은퇴 교목이다.

 

순교자 이정흡 목사 (장로교)

 

이정흡 목사(1910-1950)


이정흡은 1910년 2월 10일 평남 박천에서 장로 이용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숭실학교와 평양 의과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어 도회리교회와 용전교회 조사로 시무하여 의료 봉사활동을 펴고 있었다. 부친 이용훈장로는 민족애가 뜨거운 사람으로 도화면 무릉리로 이주해 왔을때 질곡교회 기주복목사가 시무하는 질곡교회 장로로 시무하다가 1945년 해방 후 고당 조만식 장로가 이끄는 민주당 곡산군당 위원장직을 맡아 구국운동에 혼신을 경주하게 되었다. 이정흡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기주복목사가 목회하던 안주노회 소속 도회리교회를 담임한 이정흡목사는 부친 이장로가 월남할 때도 목양지를 지키겠다며 월남을 거부했다. 그의 목회는 남다른데가 있었다. 목사이면서 의사로서 가난한 지방민들에게 의료사업을 베풀어 신, 불신간에 지역사회에 존경받는 목사로 소문나 있었다. 그래서 그의 교회는 항상 소독내로 찌들어 있었다. 6.25발발하자 인민병원에 근무하라는 공산당의 명령에 대해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원목으로 근무할 것을 요구했으나 "의사가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려야 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냥 의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 의사입니다. 나를 인민병원에 근무시키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는 목사로서 근무하게 해 주십시요 그러면 제 의술을 죽어가는 생명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이목사의 제안은 종교를 아편으로 보는 공산주의 자들에게는 천부당 만부당 한 일로 말씀전하는 원목제도를 허락할 이가 없었다. 이목사의 제안을 거절한 그들은 "악질반동 이정흡이는 공산주의의 기본정신을 뿌리채 흔들려는 인민의 적이다."라고 하며 반동으로 몰려 6.25가 터지고 이내 도회리 국민학교로 끌려가 트럭에 태워져 교인들과 함께 어느 외진 들판에서 장렬히 순교한 것이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순교지 이창실 목사 (장로교)

 

이창실 목사(1890-1949)


이창실은 상해 무관학교 제 2회 졸업식에 졸업생 대표로 선서를 낭독하였다. 주님 사랑이 곧 겨레사랑이고 겨레사랑이 곧 주님 사랑임을 실천할 무대에서 다시태어나는 이창실의 얼굴에는 굳은 의지가 번뜩였다. 이창실은 1890년(경인) 4월 21일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송학리에서 이영기씨의 5남매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년시 한문서당에서 수학. 정신이 총명하여 천재란 별명을 들었고 송천교회 설립한 해서제일학교에 입학 수업하였고 학예회를 개최하고 토론회 연설회를 하면 매번 일등연사로 칭찬이 자자하며 부친이 그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고 귀가하여 형제분이 교회를 열심히 봉사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어 소래에 있는 금세학교를 졸업한 후 풍천양재학교 교사로 4년 광선학교에서 5년을 근무하였고 1917년부터 전도사에 임명되어 송학교회, 금곡, 진목 3교회를 시무하다가 1918년 평양신학교에 진학했다. 1919년 신학교 2학년때 3.1운동에 참가한후 고향 은율로 돌아와 3.1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장연경찰서에 체포 구금당했다 온갖 고역을 치룬 후 출옥했지만 1920년 .구월산대-독립혁명군 사건에 연루되어 밀정에 의해 대장등 7명이 전사당하고 교회지도자 24명이 고발당하여 쑥대밭이 되는 위급한 상황에서 쫏기는 몸이 되어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군관학교에 입학 제2회로 졸업한 것이다. 1921년 8월 32세의 나이로 한국독립운동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3월 16일 풍천장날 시장중앙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선두시위하며 독립만세로 천지를 진동시켰다. 항일투사들과 구월산 구엽사 지하실을 열락본부로 정하고 상해 임정과 연락인으로 군자금을 모집케하고 상해 임정에 들어가 광복군에 입대 훈련받고 무력항쟁에 밀명을 받고 은률로 잠입해 시민들 앞에 동립선언서를 낭독해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송화 지구에서 활약하다가 일본군과 교전끝에 체포당해 7년형을 받고 해주, 평양, 서울, 마포 등지 형무소에 수형생활을 하다가 1925년 9월 대정가에 경사로 특사 운운하며 석방하였으니 5년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출옥했다. 1927년 해창교회 전도사4년 1930년 재영읍교회 4년간 전도사 1934년 재령군 북율면 거실포 교회 시무중 신학교에 입학 1935년 3월 평신을 28회로 졸업하고 동 4월에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2월에 거실포 교회에 위임목사로 취임하니 46세로 18년 만에 졸업을 한 것이다.1940년에 남천읍에 장로교회를 세우고 목회하였으나 독립군이라는 전직이 따라붙어 항상 일경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였다. 한때 군민들의 원에 의하여 평산군수로 지낸바 있으며 해방을 맞아 사리원 남부교회에서 시무하다가 기독교도 연맹에 가입을 거부하고 월남하지 않고 끝까지 강단을 지키다가 1949년 4월 부활절예배를 마치고 공산당 내무서의 문제 교역자 검거령에 연행돼 영영 불귀의 몸이 되었다. 공산군은 독립운동가라면 대접을 해 주어야 할 이창실목사를 오히려 항일투쟁 경력 때문에 이목사를 살려둘 수 없다하여 체포되는 즉시 총살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창실목사의 재판시에 남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송화읍 일심재판시에 판사가 7년형을 언도하고 피고로서 할말이 있으면 하라하자 이목사는 나는 무엇으로든지 여기 김남섭보다 우수하다. 지성으로던지 인격으로던지 독립운동 한것으로든지 무엇으로든지 그보다 우수하다 나는 김난서보다 10배 일을 더한 나인데 왜 나는 7년 김남섭은 12년으로 판정하니 아무래도 이 재판은 오판이니 내게 형을 더 달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방청석은 박수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진실여사. 아들 성진은 의사로 활약했는데 1947년 3월 공산군에 납치당한 후 소식이 없다. 자부와 두딸은 월남하여 여전도사로 성업의 대를 이었고 그 손자는 이응삼목사로 영락교회 부목사로 14년간 목회 하다가 1996년부터 현재 순교자기념선교회 총무로 수고하고 있다.

  

순교자 이창현 영수

 

이창현 영수(1898-1950)


이창현은 1889년 8월 15일 황해도 청곡면 평천리에서 이성지씨의 3남 3녀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창현은 어려서부터 재기가 뛰어났지만 고집도 남다른 편이었다. 한번 옳다고 여기는 것은 숱한 매를 맞으면서도 아니라고 번복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는 취학전에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읽었다. 이창현은 나이가 들어 신학문의 전당인 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었다. 북한쪽 주민들은 북장로교의 극성스러운 선교사들의 전도로 일찍부터 예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목회자가 되어 신유의 은총을 나타내는 부흥사가 되고 싶었고 애기전도사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1919년 30세가 되던 해에 3.1운동이 일어나 교역자들이 숫하게 끌려가 매를 맞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3.1운동의 전후를 통하여 감동만 받은 것이 아니라 변절자들의 슬픈 모습도 목도했다. 평원교회 영수가 되어 죽을때까지 영수로 봉사했다. 일제하에 신사참배의 올무가 싫어서 시골교회에 몸담고 살았고 해방 후에 주일선거 반대, 기독교도연맹가입 압력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순수한 믿음을 지키려 노력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나서 공산당의 탄압은 더 무서웠고 공산당과 타협을 거부하고 순수하게 믿기 위해선 죽어야 한다는 진리를 사수해 교회 뒷산으로 끌려가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하고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고백하는 동시에 총성과 함께 구덩이에 쓸어넣었다. 1950년 11월 18일 62세 환갑이 지난지 3개월째 되던 해에 순교를 했다. 함께 총살당할 때 귀바퀴만 뚫고 지나가 붕대를 감고 살아 한달만에 돌아온 유정엽선생이 나타나 순교현장에 대해 그때의 상황을 증언 해 주었다. 후손들은 월남하여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선교사로 순교자의 신앙유업을 계승해가고 있다. 이선각집사. 이선장 장로. 이복단권사(성지기도원 원장) 이복녀권사. 이승조목사(육군군종감 역임 현재 문성교회 담임) 이승신목사(러시아 선교사). 이순혜전도사(성지기도원 부원장). 양영근목사(러시아 선교사)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1:34)

 

순교자 이태석 목사 (장로교)

 

이태석 목사(1901-1950)


1919년 경신중학교 1년시에 3.1운동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감시를 피해 고향에 돌아가 태탄사립학교에서 훈도를 하는 등 숭실중학교 편입하여 수학하던 중 학생의열단을 조직하여 조국독립을 위한 지하운동을 벌이다가 해주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국내에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일본에가서 고학하면서 오사카 명교중학교을 졸업 도쿄중앙대학예과를 거쳐 상과를 졸업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를 귀국시켜 경성성서학원(현서울신학대학)에서 32세로 졸업한 후 첫 목회지로 충남 금산읍 금산성결교회 초대교역자로 파송 3년간 시무하게 하신 후 평양시내 상수리교회, 신암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목회하시다. 1945년 해방 후 평양 신임리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 교회를 폐쇄하는데 항의하였다. 해방 후 조국해방과 1950년 6.25동란 등 수많은 혼란과 위협의 와중에서도 강단수호와 교인들의 양육을 위하여 불철주야 애쓰다가 1950년 6.25가 터지고 국군과 공산군이 교대로 남과 북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바람에 교회지도자 목사님들과 성도들 그리고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희생당할 때 이태석 목사의 순교도 이런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1950년 9.28 수복 국군북진 평양폭격 공산군의 눈을 피해 살던 이목사의 세 아들과 많은 신앙인들은 숨어있다가 비행기만 나타나면 자유와 평화로 마음이 가득찼다. 이목사와 사모와 네 딸과 손자들이 평남 강서로 피난을 갔고 20세 안팎의 승욱, 승만, 승규 삼형제만은 평양에 숨어 살도록 잔유했다. 사랑하는 세 아들이 평양에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시골서 평양에 와 보곤 하던 이목사는 10월 11일 평양에 왔다가 후퇴중인 공산당에게 끌려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쇠사슬에 묶인 채 채찍질과 구두발로 말로 다 못할 곤욕을 치루며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다. 1950년 10월 20일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 이목사의 아들 삼형제와 온 평양시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영을 했지만 체포된채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이태석 목사는 이 기쁜 평양탈환의 자리에 엇었다. 이목사의 행방을 찾던 가족들은 안타깝게도 이목사의 싸늘한 시체를 만날 수 밖에 없었다. 후퇴하던 공산군들에 의해 동평양 철도역 근처 평천리 야구장 한모퉁이 반공호속에서 40여명의 납치인사들과 함께 총살되었다.항상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온갖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며 평소에 찬송가 226장을 부르던 이목사는 50세의 나이로 험란했던 한 생애를 마감하고 하나님 나라로 영접받아 옮긴 것이다. 학구와 독립운동 그리고 목회자의 길을 향하여 뜻을 세워 달려오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다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주님의 이름으로 순교의 꽃을 피운 것은 단순한 인간의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섬리에 의한 복음사역의 한 과정임을 입증해 준다.평양서문밖교회 교우들과 친척들의 애도와 찬송중에 장례예배를 마치고 평양근처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예로 두 아들은 1950년 12월 월남, 차남 이승만 목사는 미국NCC회장으로 있으면서 극동지역선교책임을 맡으면서 이미 80년초부터 북남을 오고가며 소식을 전하였고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PC USA총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유니온신학교 교수로 수고하는 등 그의 리더쉽을 전 세계에 떨쳤다. 3남 이승규장로는 순교자의 신앙적 유산을 따라 교회에 충성할 뿐 아니라 삼성, 효성, 롯데그룹등에서 기업경영을 했고 은퇴 후 사회복지사업분야에서 장애인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 이태석 목사와 사별했던 사모와 네 딸 등 유가족들은 북한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고 있고 딸중에 한분은 의사로, 또 한분은 철도청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부인 김송희사모는 1970년 12월 6일 월남한 두 아들 이름을 부르다가 함흥에서 별세했다.

 

순교자 임성근 장로

 

임성근 장로(1886-1950)


임성근목사는 1886년 황해도 안악군 용문면 동창리에서 조그만 과수원을 경영하는 임창화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읽고 그의 나이 19세에는 그보다 나은 학자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한학에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이같이 한학에 깊이를 더하던 무렵 마포삼열 선교사를 만남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 이유로 부모에게 숱한 매를 맞아가면서 부모를 설득해 예수를 믿게 했고 29세에 동창교회 초대장로로 세움받았다. 1919년 33세에 동창 장날을 기해 안악 학생들과 연대해 3.1우동을 주도했다. 임장로의 기지로 동창 장날 조기를 받는 김장독에 태극기를 감추어 장터에 내 놓았다가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우어주고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동창 장날이 되면 상인들이 조기를 받기 위해 종종 김장독을 동원하기 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3.1만세 시위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돼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고 1년만에 황태자 탄생으로 특사되었다. 출옥 후 그는 동창교회 조사로 근무하게 되었으나 일제는 예배시간이면 두명의 정복 경찰관으로 칼을 차고 참석해서 신사참배를 하나 안하나를 감시하였다. 처음에는 교인들의 완강한 저항이 있었지만 악랄한 일경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색출해 배급을 중지해 버리고 말았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교인들이 하나 둘 고집을 꺾자 괴로워하던 임성근 전도사는 신사참배 강요에 못이겨 가족을 이끌고 1943년 만주로 건너가 장사를 해서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1945년 그렇게 그리던 해방은 되었으나 해방 후 장개석 군대가 패배하고 팔로군이 만주땅을 점령하게 되자 임성근 전도사는 재산을 몰수 당하고 인민재판에 회부 당했다. 그러나 그 혼란스런 인민재판중에도 어떤 변호인의 정직한 변호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감사하며 1948년 가족을 이끌고 빈손으로 귀국했다. 김익두목사가 시무하는 서부교회에 전도사로 이명을 받아 사명을 다해 전도사일에 열중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김익두목사를 모시고 교회를 사수하는 중 1950년 10월 13일 공산치하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반공의거가 안악에서 일어나 북진하는 UN군을 환영하고 공산군은 물러가라고 외치게 되자 북으로 후퇴하던 공산군은 반공의거의 보루로 지목되는 신천 서부교회로 몰려가 새벽예배를 드리는 교인들을 무차별 사격했다. 김익두목사와 임성근 전도사 이천실집사 등 다수와 인근교회 청년3명도 그자리에서 총살되고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순교자 임수열 전도사 (성결교)

 

임수열 전도사


한국교회 순교자들을 추모하는 순교자 추모예배가 지난 11월 6일 경기도 용인의 한국교회순교자기념관에서 진행됐다. 특히 이번 추모예배에서는 성결교단 순교자로 추서된 최석모, 이건, 유세근 목사와 임수열 전도사의 존영을 게시하고 추모비 제막식을 함께 진행해 그 의미를 더했다. 임수열 전도사 또한 한국전쟁 당시 교회를 위해 헌신하다 순교해 순교자로 추서됐다. 한편 용인한국교회순교자기념관은 한국교회 10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으며 장로교와 감리교, 본 교단 등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기간 중 순교한 한국교회 순교자들과 그들의 헌신적인 신앙의 기록이 사진과 자료로 전시되어 있다.

 

순교자 임인재 장로 (장로교)

 

 

임인재 장로(1900-1955)


임인재는 1900년 3월 2일 황해도 화우군 삼전면 철도리 941번지에서 태어났다 . 그는 아버지와 함께 그의 집 사랑방에서 교회를 개척했고 어릴때부터 충성스럽게 교회봉사에 임했다. 그의 사랑방교회를 찾아오던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션스쿨 영흥중학교를 졸업한뒤 상경하여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해재면 신정리 무의촌에 들어가 해동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개업을 했다. 그가 무의촌을 택한 것은 기독교신앙에 연유된 것이고 목포 양동교회 이남규목사의 권면을 받았던 것이고 그의 아내 정득씨의 조언도 큰 힘이 되었다. 주일이면 교역자 없는 양매교회 나가 교역자 역할도 했고 1942년 10월 5일 무안교회는 그를 장로로 안수해 개교회 교역자로 세운 것이다.그는 의사요 교역자요 면에 유지로 행정 자문까지 맡게 되었다. 2차대전에 전쟁물자 공출로 경찰들이 교회의 종을 떼고 있을 때 "하나님의 집의 성물을 감히 경찰이 압수해 갈 수 있다니"하면서 소리치자 공무방해죄로 연행해 무수히 구타하며 시시콜콜 감시하며 괴롭혔다. 1945년 해방되자 면지도자로 대한독립촉성회 및 국민회장직을 받았다. 공산주의가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활동하면서 임장로는 타도대상이 되었다. 임장로를 괴롭히기 위해 그들은 임장로가 사랑하는 교회에 불을 질렀다.임장로는 한걸음에 뛰어가 종을 처서 화재사실을 알려 진화했다. 30분 이상 불이 탔는데 지붕만 탔고 기둥과 석가래는 말짱했다. 임장로는 땅에 무릎을 꿇고 감사하며 몸바쳐 축성하기로 기도를 했다. 1950년 6.25가 터지자 공산주의 자들은 지도 세력을 무차별 감금하기 시작했다. 교인들의 피난 권고에도 임장로는 머리를 저으며 " 양들을 버리고 장로가 저만 살겠다고 도망을 치라고요? 저는 못합니다 아니 합니다"하고 거절했다. 결국 임장로는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당하여 모진 매질을 당하던 중 부상병들이 몰려오자 공산군은 그에게 치료를 부탁했지만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에게 의술을 페풀수 없다고 하여 거부하자 국민학교 교사인 그의 맏아들 정순씨를 아버지 앞에서 고문하여 후유증으로 6개월만에 죽게 했다. 1950년 8월 8일 해제국민학교 교정에서 임장로를 비롯한 양매교회 전도사 집사 등 네사람을 인민재판으로 총살했다. 임장로는 세번의 총을 맞고 총살을 당하면서도 입에서 성경말씀이 쏟아져 나왔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한12:25) 어디서 '흑흑'우는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면민들은 소리내어 울지는 못하지만 얼굴위로 흘러 내리는 눈물을 지우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의사로 사랑으로 상처를 싸매주던 임장로에 대한 위로의 조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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