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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포사이드(William H.Forsythe)

성지순례/선교사

by baesungsoo 2026. 2. 8.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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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 1873.12.25.- 1918.)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1873년 12월 25 미국 켄터키 주 해로스 버그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1890~1894), 1898년 루이빌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 과정을 마친 후, 쿠바에서 벌어진 미국과 스페인 전쟁 때 군의관으로 참전했다포사이드는 1904810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의료 선교사로 파송되어 입국했다. 그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순회 진료를 하며 고아원을 운영했다. 1905년 어느날 망골(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했던 말목 장터 근방 마을)에서 강도에게 습격 당한 부상자를 치료해 달라는 간청을 받고 마을에 찾아가 부상자를 치료해 주고 밤이 늦어 그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날 밤 포사이드는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다. 귀가 잘리고 두개골이 깨지고 얼굴과 목에 큰 상처를 입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이 때 진실한 사람들이 그를 조심스럽게 전주로 데려와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귀와 머리의 상처가 깊어서 순조롭게 아물지 않아 미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고 2년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포사이드는 목포에서 의료 선교를 하게 되었다오웬(Clement Carrington Owen) 선교사는 1867719일 미국 버지니아 주 쿨러스터 스프링에서 태어났다. 1886년 햄튼 시드니 대학을 졸업하고, 1894년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오웬은 복음 전도자와 의사의 자격을 갖추고 1898년 입국하여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울 겨를도 없이 서둘러 목포로 내려가 유진 벨이 개설한 목포 선교부에 합류하여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고 의료 선교를 하며 교회에서는 성경 공부를 가르쳤다19001212일 여의사 와이팅(Dr. Whiting)과 결혼했다. 그리고 1904년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광주로 왔다화순, 보성, 장흥, 순천 등 13개 군이 그의 선교 지역이었다. 1개월씩 순회 선교를 했다. 때로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430명에게 학습(교리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19093~4월 초에 광주 남쪽 250리 지역에서 순회 진료를 하던 중 과로로 인하여 쓰러졌다그때에 진실한 한국인 친구가 그를 가마에 태우고 광주로 향했다. 하지만 여행길에 먹지도 못하고, 차가운 북풍에 시달리며 산을 셋이나 넘는 고단한 여행을 해야 했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광주에 도착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차도가 있는 듯했으나 토요일에 갑자기 폐렴이 악화되었다. 닥터 윌슨이 오웬의 몸 상태를 보고 걱정이 되어서 목포에 있는 닥터 포사이드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보를 쳤다닥터 포사이드는 전보를 받고 44일 광주로 향했다. 조랑말을 타고 오던 그는 광주 길목 40리 밖에서 길가에 쓰러져있는 한 여인을 발견한다. 포사이드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길에 버려진 그 여인을 살펴본다. 손과 발은 짓물렀고 퉁퉁 부어 있었다.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걸친 누더기 옷은 피고름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병 환자였다닥터 포사이드는 위독한 동료 선교사의 병을 고치러 가는 바쁜 길이었지만 길가에 버려져 신음하고 있는 환자를 그냥 버려두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포사이드는 피고름을 흘리고 있는 그 여인을 감싸안아 자신의 말에 태웠다. 그리고 자신은 말고삐를 잡고 걸어서 광주로 들어왔다. 광주에 도착한 닥터 포사이드가 그의 조랑말에서 나병 환자 여인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아 내리는 것을 구경꾼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던 당시 광주에서 깡패로 악명이 높던 최흥종은 마음에 가책과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선교사들의 일을 적극 도왔고, 후일에 목사가 되어 나환자를 돕는 일과 사회사업을 하였다포사이드 선교사에게 광주는 낯선 곳이었고, 잠깐 다녀가는 곳이었다. 포사이드는 동료 선교사 닥터 윌슨(우월순)을 찾아가서 그 여인에 대한 치료와 거처를 부탁해 보았으나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그는 고심 끝에 광주 동남쪽에 위치한 옹기 가마터를 발견하고 그곳을 그 여인의 임시 거처로 정하고, 선교사들이 쓰던 침구와 옷가지를 얻어 챙겨주고 목포로 돌아왔다. 닥터 포사이드와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던 나병 환자 여인과의 우연한 만남은 한국에 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이 세워지는 계기가 된다닥터 포사이드가 목포로 돌아가고 나서 파란눈 노랑머리 서양의사가 나병 환자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나병 환자들이 하나 둘씩 광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닥터 포사이드의 동료 선교사 닥터 윌슨을 비롯해 광주 지역 선교사들은 닥터 포사이드의 헌신적인 행동에 감명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고 병원 시설 준비를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뜻밖의 어려움에 부딪치는데 광주 주민들이 병원의 설립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나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광주 한복판에는 안 된다는 항의였다. 선교사들은 1912년에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봉선리교회, 광주나병원) 나병 환자 수용소와 병원을 세웠다. 닥터 포사이드와 한 나병 환자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어서 4년만에 병원과 수용소가 준공된 것이다. 광주 나환자병원,이후 여수 애양원과 고흥 소록도 나환자 병원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1911년 건강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에 돌아간 포사이드는 한국 의료선교 후원과 개발에도 기여하였고, 그의 권면에 감동을 받은 후원자들을 통해 광주 제중원(광주기독병원)과 목포 프렌치병원 건물이 세워졌다. 풍토병인 스프루(Sprue)로 인해 투병하며 지내다 1918년 켄터키 주 루이빌에 있는 본가에서 사망했다.  (출처 : 크리스찬저널(https://www.kcjlogos.org)

포사이드 선교사, 오방 최흥종(광주 깡패 회개), 이거두리(이보한)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최홍종)

광주에 도착한 닥터 포사이드가 그의 조랑말에서 나병 환자 여인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아 내리는 것을 구경꾼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던 당시 광주에서 깡패로 악명이 높던 최흥종은 마음에 가책과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선교사들의 일을 적극 도왔고, 후일에 목사가 되어 나환자를 돕는 일과 사회사업을 하였다.

(이보한)

포사이드 선교사가 자기 집에 왕진을 와서 강도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치료를 받는 과정을 지켜 본 이경호의 서자인 이보한이 자원해서 교회에 나온 것이다. 그는 부친이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진 마음의 빚과 테이트 선교사와 한 약속을 지키려고 자신을 대신하여 교회에 나갈 사람을 찾을 때 자신이 교회에 나가겠다고 선뜻 자원하였다.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감화를 받은 그는 전주 교회에 나와 전킨 선교사의 지도 아래 성경과 영어를 배웠으며 예수를 믿은 지 1년 만에 전주교회의 대표적인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거듭난 이보한이 변화된 놀라운 사실은 한국 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긴다.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포사이드 선교사, 여수 애양병원 기념비(중앙),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 포사이드 묘비(우, 1918년 사망)

 

< 청주 탑동 선교사 양관 단지(청주 일신여중고)>

4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4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4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이 건물은 1906년 양관 가운데 처음으로 완성되었다. 붉은 벽돌, 아치식 창문, 전통 기와 지붕이다. 처마 장식과 주추도 한국 전통식으로 하여 서양식과 조화 되었다. 내부는 온돌 대신 스팀 난방과 벽난로 시설이 되어있다. 실내 화장실도 있다. 이 집은 주로 독신 선교사나 초임 선교사들이 거주 하였다. 미국 시카고의 포사이드 부부가 주택 건축을 위해 3천불을 보내 주었다. 특별히 이 양관은 옛 순교자들이 갇혔던 형무소에서 가져온 화강석을 초석으로 하여 지었다.

4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4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4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4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측면 

4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옆면 창문

4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측면 

4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뒷면 

4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 옛 순교자들이 갇혔던 형무소에서 가져온 화강석을 초석으로 하여 지었다.

 

<여수 애양 병원>

여수애양원 병원

 

한국 최초의 나병원인 광주나병원은 1925년 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터를 마련하고 1928년 한센병자 600여 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 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여수 애양원 시대가 시작되었다.  

여수애양원 병원

여수애양원 병원

여수애양원 병원 

역대 원장 기념비 (왼쪽에서 첫 번째 포사이드기념비)

초대 포사이트 원장 기념비(우), 2대 우월순 원장 기념비(좌)

초기 애양병원

 

애양원은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1904년 2월 목포 선교부에서 광주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하고 유진 벨 목사와 오웬목사를 파송하여 광주 선교부를 만드면서 1904.12.25. 성탄절 예배와 함께 광주 선교가 시작되었다. 오웬목사는 이 후 전남 동부지역의 능주, 남평, 화순, 장흥 등지를 맡아 선교하였다. 오웬은 1909.4.3. 급성 폐럼으로 순교하게 되는데 당시 오웬을 치료하기위해 목포에서 활동중이던 의사 포사이트(Wiley H. Forsythe) 는 급히 광주로 떠났다. 광주로 오던 포사이트는 남평 부근에서 길가에 버려진 여자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말에 태우고 광주까지 걸어왔다. 이 한센병 여인은 1908.3. 에 부임하여 선교활동을 하던 윌슨(Robert M. Wilson, 우월순) 과 선교사들에 의해 치료받게 되었다. 윌슨과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사택 건축을 위해 사용하던 벽돌 가마터를 단장하고 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것이 서양의학으로 한센병을 치료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다. 그러나 정성된 치료에도 불구하고 여 한센병 환자는 주님을 영접하고 수 주일 후 소천하였다. 이일을 시작으로 1909년 여름 인근 봉선리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집을 짓고 20여 명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 나병원인 광주나병원의 시작이었고 1928년 여수로 옮긴 후 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수애양병원

 

현재의 애양병원은 정형외과, 피부과, 마취통증과, 내과 진료를 하고있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와 일반 장애인들에게 의료적, 직업적, 정신적으로 재활을 도모하고 영적 구원을 위해 설립되었다. 사회복지법인 애양원은 애양병원 이외에 애양평안요양소, 애양재활직업보도소 등도 함께 운영하고있다.

애양원 역사박물관

애양원 역사박물관

애양원 역사박물관

 

역사박물관은 애양원이 여수로 이주한 후 현재의 현대식 병원이 세워지기 전까지 한센 환우들을 치료했던 병원 본관 건물이었다. 한동안 양로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그 후 개보수하여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박물관에는 애양원의 역사를 한 눈에 볼수 있도록 당시 사용하던 의료기구들, 의료진들의 활동, 환우들의 생활상 등을 생생하게 전시하고 있다. 

역사박물관과 손양원목사 순교기념비, 박물관은 성산교회 건너편에 위치해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여수애양재활병원 현판  

옛 교회 종

의료기구  

애양병원 역대 원장, 포사이드 1대 원장(좌에서 1번째)

초기 애양원 사진

설립자 포싸이트 선교사

 

<제주에서 만난 포사이드 선교사>

 

제주도는 슬픈 역사를 간직한 섬이다. 제주도는 고려시대, 삼별초가 진압된 후 몽골의 지배를 100년 동안 받았다. 그 후 목마장이 설치되어 말()로 유명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인조7년부터 순조25년까지, 200년간 제주 사람은 육지로 나갈 수 없도록 법으로 정했다. 굶주림으로 주민들이 육지로 나가면 말과 귤을 키울 사람이 감소할 것을 염려해 금족령을 내렸던 것이다조선의 양반들은 귀양을 가든 임지로 발령을 받던지 제주도로 가는 것 자체를 죽음으로 여겼다. 이재수의 난, 4.3 사건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역사 전체는 슬픈 역사였다. 이러한 제주에 100년 전, 파란 눈의 의료 선교사가 왔다. 포사이드 선교사(William H.Forsythe 1873-1918)였다. 1908년 이기풍 목사가 들어 온지 1년 후 1909년 프레스톤 선교사와 함께 제주읍으로 들어와 진료를 하고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이기풍 목사가 세운 제주성내교회 당회록에는 포사이드 선교사가 전도지 3천권을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 구좌읍에 있는 세화교회 설립 기록에도 이와 같이 나와 있다제주 한동리 출신인 부상규가 목포에 주재하고 있었던 의료선교사 포사이드에게 복음을 받았고, 부산진에 사역하던 왕길지 목사에게 학습을 받았으며, 1918년 가을 이기풍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이곳의 초대신자가 되었다.” 포사이드가 한국의 프란체스코라 불렸다. 동물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긍휼이 중세의 성자 프란체스코를 닮았기 때문이다. 포사이드는 아이들이 참새를 잡아 구이를 해먹으려고 할 때 참새를 사서 풀어주었다. 조선의 사람들이 복날에 개를 잡아끌고 갈 때 이 짐승도 하나님이 만드신 짐승이니 풀어주세요라고 울면서 간곡히 요청해 풀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선교사들의 선교비를 갖고 오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만나 다 나누어주어 선교사들로부터 질책과 원망을 듣기도 하였다그의 긍휼은 광주나병원도 만들었다. 오웬 선교사를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광주로 가던 포사이드는 죽어가던 한센병이 걸린 여인을 자기 말에 태우고 갔다. 그 여인을 치료한 것이 광주나병원의 시작이 되었다. 광주나병원이 지금의 여수 애양원이다. 광주나병원이 세워진 이후에 한센인들이 모이는 봉선리 교회(1908년 3월 18일 창립, 현재 애양원 교회)가 세워졌다. 봉선리 교회 한센인들은 제주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듣고 매일 한 끼씩 금식하여 돈을 모아 1918년 김경신 선교사를 제주에 파송했다. 그리하여 제주 한경교회 설립을 돕게 된다. 한센교인들이 모이는 봉선리 교회의 지속적인 도움은 제주 산남지역 교회들이 부흥하는데 기여하였다. 포사이드의 사랑이 광주 봉선리에서 제주 한경리까지 흘러간 것이다포사이드는 병세가 깊어져 1911년 미국으로 돌아가 7년 간 투병하다 1918년 마흔다섯의 나이로 주님께 갔다. 한센인들이 포사이드를 잊을 수 없어 세운 애양원에 있는 포사이드 기념비와 미국 켄터키에 있는 그의 묘비는 우리와 함께한 포사이드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보통 사람들은 힘이 있고 강한 사람과 함께함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나 포사이드는 조선의 가난하고 힘든 자들과 함께하여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었다. 그의 묘비에 있는 ‘MISSIONARY TO KOREA’라는 글귀는 조선과 함께한 포사이드를 지금도 말해준다. 함께는 조선의 땅 끝, 제주 세화교회, 한경교회에 남아 우리를 만난다.

(출처 : 아름다운동행(https://www.iwithjesus.com)

 

<제주 세화교회>

제주 세화교회

제주 세화교회

 

세화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주노회에 속한 교회로 한동리 출신인 부상규씨가 목포에 주재하고 있던 의료선교사 포사이드(보의사)에게 복음을 받았고부산진 엥겔(왕길지) 목사에게 학습을 받았으며, 1918년 가을 이기풍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이곳의 초대신자가 되었다19151128일 한동리 부상규씨 집에서 8명의 신자들이 기도회로 모이기 시작하여 교회의 모태가 되었고, 1922년 가을 최문환 집사가 초가 3간을 매입하여 교회에 헌납하니 이에 예배소가 세화리로 이전되었으며, 1924년 봄 부상규씨가 밭을 팔아 교회에 바치니 이에 교회는 구 예배당을 매각하고 새 부지에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제주 한경교회>

제주 한경교회

 

한경교회는 1920년 3월 ‘두모리 기도처’ 이름으로 모인 데서 출발한다. 앞서 제주선교는 1908년 시작된 이기풍 목사의 사역과 이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에서 유래한다. 1914년 전남노회 파송을 받아 제주 순회 목회의 길을 연 윤식명 목사와 전도인들은 광주 봉선리교회의(포사이드, 우월순 선교사) 한센병 성도들과 여전도회의 고귀한 후원으로 두모리 기도처 등을 설립했다. 98년 한경교회에 부임해 23년째 사역 중인 윤 목사는 “믿음의 선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오늘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앞선 이들의 사랑과 충성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뒤에 오는 믿음의 후손들에게 우리가 물려받은 하나님 축복과 감사를 전해줄 책임이 있어 100년사를 발간하게 됐습니다. 1920년 두모리 기도처에서 시작한 한경교회는 제주에서 14번째로 설립됐고 28년엔 조직 교회를 설립합니다. 우리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32년에 조수교회, 50년엔 판교교회를 분립해 제주 서북지역 복음화에 이바지했습니다.”[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70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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