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자베스 셰핑(서서평, 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9.26.~1934.6.26.)
서서평(徐舒平, 1880년 9월 26일 ~ 1934년 6월 26일)은 독일 출신의 미국인 간호사이자 선교사로, 한국에서 22년간 봉사했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Elisabeth Johanna Shepping)이다. 셰핑은 이디시어로 샘에서 무엇을 끌어내다, 그로부터 큰 기쁨을 얻고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셰핑은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으로 이민하여 간호사가 된 후 개신교로 개종했다. 셰핑은 미국 남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선정한 "위대한 선교사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으며,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그녀를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라고 묘사했다. 셰핑은 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인 닐 성경학교를 설립했다. 그녀는 또한 여성을 위한 이일학교를 설립했다. 셰핑은 학교 설립 및 교육, 교회 건축, 간호사 활동, 간호 교과서 번역 및 저서 출판, 그리고 수백 명의 소녀를 매춘에서 구하는 등 그녀가 봉사했던 한국 공동체에 상당하고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일부 선교사들은 소외된 공동체와는 분리된 호화로운 삶을 살았지만, 셰핑은 정반대였다. 그녀는 자신이 봉사하는 한국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녀는 오로지 한국어로만 소통하고, 고아들을 양육하면서 가난한 과부들과 함께 살았으며, 이름을 한국식으로 서서평으로 바꾸었다. 엘리자베스 셰핑은 1880년 9월 26일 독일 비스바덴의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프랑켄 거리 정원 막사에서 태어났다.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안나 셰핑(결혼후 안나 슈나이더)은 할머니에게 맡기고 홀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할아버지는 안드레아스 셰핑(Andreas Schepping), 할머니는 엘리자베스 셰핑(결혼전 Elisabeth Faber)였다. 셰핑은 9살에 할머니를 여의자, 홀로 뉴욕으로 이민을 가서 어머니를 만나 학업을 마쳤다. 19세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21세에 정식 간호사가 되었다. 뉴욕 유대인 병원에서 야간 수석 간호사로 일하면서, 셰핑은 낮에는 성경교사훈련학교(Bible Teacher Training School, 현재의 뉴욕 신학대학)에서 종교 관련 과목을 수강했다. 셰핑은 이 학교의 설립자이자 전 총장인 윌버트 웹스터 화이트를 만났다. 화이트는 셰핑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그녀는 이 지식을 선교 활동에 활용했다. 이는 그녀가 간호학, 신학, 교육학을 탐구하게 했으며, 선교사가 되려는 영감을 주었다. 셰핑은 자신의 삶을 헌신적인 삶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학생 자원봉사 운동, 사회 복음 운동, 그리고 전 세계적인 기독교 단합을 촉진하는 에큐메니즘과 같은 여러 운동을 접했다. 셰핑은 또한 간호사 동료 중 한 명에게서 개신교를 소개받았다. 결국 그녀는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고, 이로 인해 어머니에게 의절당했다. 셰핑은 간호사로서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간호전문학교 졸업후 브루클린주 이시병원에서 근무했다. 1904년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의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Traveler's Aid Missionary)에서 1년 동안 봉사하였다. 간호사로서 셰핑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치료하려는 선교사로서 간호, 신학, 교육에 대한 지식을 결합했다. 신학교에 다니던 중, 그녀는 한국 병원에 간호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는 결국 그녀가 32세 때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회에 합류하여 조선으로 가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한국은 2년 전인 1910년에 일본 제국이 한국을 점령했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정부와 대부분의 사회는 약자들을 더욱 방치했다. 그 결과, 구걸하는 사람, 한센병 환자, 병든 환자의 수가 증가하여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셰핑은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1911년에 지원했고, 1912년 2월 20일 32세에 선교 여행을 떠나 남은 평생을 그곳에서 봉사하는 데 바쳤다. 1912년부터 1934년까지 셰핑은 광주, 군산, 부산, 서울 등 한국의 여러 지방에서 일했다. 특히 셰핑은 "여성, 과부, 고아, 한센병 환자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셰핑은 간호 활동에 가장 큰 우선순위를 두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 그녀는 광주제중원(광주기독병원), 구암 예수 병원, 세브란스병원, 그리고 한국의 다른 병원들에서 일했다. 간호사로서 그녀는 간호사들을 훈련하고 감독하는 책임도 맡았다. 셰핑은 한국에서 건강과 교육을 증진하기 위해 많은 간호 교과서를 출판하고 번역했다. 그녀가 저술한 간호 교과서 중 일부는 간호 교과서, 실습 간호 연구, 간호 지침서, 단순 위생법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녀는 1923년 조선간호부회(현 대한간호협회)의 설립자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10년간 회장으로 재직하며 대한간호협회가 국제간호협의회에 가입하는 데 성공했다. 간호 외에도 셰핑은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한국에 학교를 설립했다. 예를 들어, 셰핑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성경학교인 닐성경학교를 설립했는데, 한때 매년 3만~4만 명의 여성을 교육했다. 이 학교는 나중에 한일장신대학교로 알려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운영되고 있다. 설립부터 그녀의 사망까지, 셰핑은 이 학교에서 5~6과목을 직접 가르쳤다. 그녀가 다룬 주제 중 일부는 읽기, 쓰기, 찬송가, 성경 교육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에 질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의학과 간호도 포함되었다. 교육을 장려하는 동안, 셰핑의 주요 헌신은 여성들을 기독교로 교육하여 효과적인 성경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셰핑은 이일이라는 여성 학교를 설립하여 여성들이 스스로를 부양하고 생계를 꾸리는 방법을 가르쳤다. 셰핑은 누에를 키우고 여성들에게 바느질 방법을 교육하여 학교가 자립할 수 있도록 했다.[3] 낮에는 교사였지만 밤에는 전도 행사를 열고 여성들을 전도사로 훈련시켰다. 한국 여성들은 보통 가족이나 마을 이름을 따라 불렸기 때문에 셰핑은 그들에게 기독교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를 통해 여성들은 기독교인으로서 더 강하게 정체성을 확립하고 성경을 전파하는 데 힘을 얻었다. 다른 많은 선교사들과 달리, 셰핑은 한국 문화에 적극적으로 동화되려고 노력했고 자신을 한국 사람들과 동일시했다. 셰핑은 자신이 봉사하는 공동체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녀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서 증명된다. 그녀는 전통 한국 의상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했으며, 한국의 풍습, 문화, 신념을 따랐다. 어떤 사람들은 셰핑을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외국인"이라고 불렀다. 셰핑은 한국에서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34명의 가난한 과부들과 함께 살았고, 13명의 딸을 입양했으며, 된장국과 보리밥만 먹고, 함석 지붕이 있는 흙집에서 살았다. 이는 자신이 봉사하는 공동체와 분리된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았던 선교사들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셰핑은 자신의 이름을 서서평으로 바꾸고 일본이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수립했을 때도 오직 한국어로만 다른 사람들과 소통했다. 셰핑은 1934년 사망할 때까지 22년간 한국에서 봉사했으며,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시신을 세브란스병원에서 해부용으로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셰핑은 미국 남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광주에서 흡연, 음주, 매춘에 대한 금지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셰핑은 닐 성경학교(한일장신대학교)와 같이 그녀가 설립한 학교에 다니는 여성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대다수의 한국 여성들은 문맹이었고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여성 교육은 제한적이었고, 셰핑은 한국 여성들에게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고자 했다. 닐 성경학교는 그 지역의 여성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을 졸업한 많은 여성들은 계몽 운동과 신여성 운동의 선구자였다. 셰핑은 여성 교육과 문해력을 증진함으로써 여성 계몽의 사심 없는 선구자로 여겨졌다.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김모임은 셰핑을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사랑의 제자인 나이팅게일의 진정한 후예"라고 평가했다. 2017년에는 그녀의 봉사하는 삶을 다룬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개봉되었다. (출처- 서서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서평 (엘리제 셰핑:1880-1934)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NOT SUCCESS, BUT SERVICE)" 선교사님의 일침, 정신이 번쩍 들게하는 말입니다. 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이 메세지을 던진 주인공은 조선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주고 가신 한 아름다운 여성입니...다. 바로 서서평 선교사님입니다. 그녀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때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한 장 남았던 담요는, 반으로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눴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되었습니다. 전부 다 주고 떠나신 것이지요.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조선인’으로 살았던 그녀를 다시금 기억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어쩌면 성공주의 신화에 도취되어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분을 잊고 살아왔습니다.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선교강국과 교회성장의 그늘 속에 감춰지고 말았던 이 민족을 암흑에서 벗어나도록 일깨워 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다 가신 분들의 발자취를 되찾아야 합니다. 특별히 서서평 선교사님을 통해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정신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서서평이라는 우리말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엘리자베스 셰핑은 광주기독병원 간호사였습니다.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어 1912년 3월 32세 나이로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녀는 조선에 선교사로 왔지만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섬김에 사용합니다. 그녀는 조선인들의 일상의 눈높이에서 먹고 마시며 생활 하였습니다. 식민치하에서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전라도 일대의 나환자들과 걸인들을 돌보았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한집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나환우 아이를 데려다 양아들로 삼은 것을 비롯해 버려진 14명의 아이들을 양아들·양딸로 삼았습니다. 소박맞거나 오갈 데도 없는 미망인 38명도 데려와 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서서평선교사님은 1년 가운데 100일 정도를 나귀를 타고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전도여행을 다니며 병자들을 돌보고 여성들을 교육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그녀의 일상속엔 깊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서서평선교사님의 당시 일기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한달간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이 굶주리고 있거나 병이 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그녀가 활동했던 시기 이 민족의 어둠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8. 그녀는 당시 이름조차 없이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어멈" "부엌떼기" 등으로 불리던 조선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고, 자존감을 살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이일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농촌으로 가서 매년 3만~4만여명의 여성들을 교육시켜 존중받을 한 인간으로서 삶을 일깨우는 일에 헌신 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며 살기를 즐겨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을 돌보지 않는 헌신으로 인해 닳아서 없어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지나친 헌신으로 그 육체는 쇠약해져서 만성풍토병과 과로와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 54세였습니다. 광주시 최초로 시민사회장으로 거행된 장례식에는 수많은 나환자와 걸인들이 상여를 메고 뒤따르면서 "어머니! 어머니!"를 외치며 애도했습니다. 그녀의 부음을 듣고 집에 달려간 벗들은 그의 침대맡에 걸려있던 좌우명을 보았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NOT SUCCESS, BUT SERVICE)” 이 말이 귓가에 멤돕니다. 가슴에서 계속해서 울립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 맞습니다. 그래야 삽니다. 서서평 선교사님에 대한 책이 두 권 나왔는데 제목은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조선을 섬긴 행복”입니다. 제목 자체가 오늘 저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하나님의 메세지" 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성공을 위하여 위로는 아부하고 아첨하고 아래로는 비인격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허다한 이들이 있습니다. 말은 잘하지만 삶은 결코 잘 산다고 말할 수 없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비극입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변질되는 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사고가 아닌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를 할 때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유기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처럼 위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하여 교회를 이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5. 다시 섬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룟유다의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발람의 길에서 돌아서야만 합니다. 게하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섬김이 은혜요 섬김이 특권이요 섬김이 행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마디를 꼭 기억 하십시오.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출처- http://cafe.daum.net/vision12/Oys/)

엘리자베스 셰핑
(출처- 선교사열전 ⑮ 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1880-1934) < 선교 < 섹션 < 기사본문 - 고신뉴스 KNC )

(출처- 선교사열전 ⑮ 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1880-1934) < 선교 < 섹션 < 기사본문 - 고신뉴스 KNC )

엘리자베스 셰핑 (출처- 선교사열전 ⑮ 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1880-1934) < 선교 < 섹션 < 기사본문 - 고신뉴스 KNC )

(출처- 선교사열전 ⑮ 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1880-1934) < 선교 < 섹션 < 기사본문 - 고신뉴스 KNC )

1934년 6월 26일 53세의 나이로 그가 죽자 신문은 그를 ‘빈자(貧民)의 자모(慈母)’
‘환생(再生)한 예수(耶蘇)’라고 추모했다.

엘리자베스 셰핑 (출처- http://cafe.daum.net/vision12/Oys/)

엘리자베스 셰핑 (출처- http://cafe.daum.net/vision12/Oys/)

엘리자베스 셰핑 (출처- http://cafe.daum.net/vision12/Oys/)
< 엘리자베스 셰핑(서서평, Elizabeth Johanna Shepping 묘지,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지>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엘리자베스 셰핑(서서평, 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1984)
<한일장신대학교, 구 닐 성경학교>

한일장신대학교 (출처- 한일장신대학교 신학부 – KAATS)
한일장신대학교는 1922년 6월 2일 광주에서 여선교사 쉐핑 (E.J.Shepping)에 의해 여성을 위한 전도부인(Bible Woman) 양성학교로 시작되었다. 그 다음 해인 1923년 9월 4일 전주에 설립된 여성성경학교는 1928년에 미국에 있는 하밀톤부부(Mr.& Mrs. Thedres Hamilton)의 교사 신축헌금으로 중화산동 1가 155번지에 교사를 신축하고 교명을 '전주한예정성경학교'로 정하여 학생 교육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1940년 9월과 10월에 신사참배 거부로 광주와 전주의 성경 학교가 폐교를 당했으며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8월 복교했다.
전주 한예정성경학교는 1952년 전주 고등성경학교로 인가받아 보다 수준높은 교육을 실시하던 중 1956년 '전주 한예정 성서신학원'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전라북도 교육위원회로부터 고등학교령에 의한 각종학교로 허가받았다. 1961년 4월에는 전주 한예정성서신학원의 '한'자와 광주 이일성서 신학교의 '일'자만을 따서 '전주한일신학원'으로 합병하여 미국인 선교사 고인애 여사가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67년 7월 전라북도 교육위원회로부터 '한일신학원'을 '한일여자신학교'로 변경인가를 받았으며 74년 10월 제1대 학장에 강택현 목사가 취임하였고, 1978년 9월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총회로부터 지방 신학교로 인준을 받았다.

닐 성결학교 (여성성경학교)
(학교연혁) (출처- 한일장신대학교)
1922. 06. 02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파견한 서서평(elizabeth johanna shepping)선교사가 광주에 여성들을 위한 전도부인(bible woman)양성학교로 시작
1923. 09. 04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전주에 '여성성경학교' 개교(초대교장 : 테이트(mattie ingold tate) 선교사
1940. 09 ~ 10 신사참배 거부로 여성성경학교 폐교
1947. 09 해방후 전주 한예정 성경학교 복교
1948. 09 광주 이일학교 복교
(설립자) (출처- 한일장신대학교)

설립자 서서평 선교사
한국 사랑에 삶을 바친 '작은 예수'
1912년 2월 20일 이 땅에 발을 디딘 이후, 1934년까지 22년간 복음의 열정을 안고 주님의 종으로 치열한 삶을 살다 간 처녀 선교사. 서서평(徐徐平·Elizabeth Johanna Shepping)이다. 서서평은 1880년 9월 26일 독일 가톨릭집안에서 태어났다. 9세때 홀로 미국으로 와 19세때 미국 시민권을 받고 21세에 정식 간호사가 됐다. 간호사가 된 후 동료 간호사의 초청으로 참석한 개신교회 예배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가톨릭을 떠나 개신교로 개종했다. 뉴욕의 쥬이시병원 야간 수간호사로 일하면서 성서교사훈련학교(현 뉴욕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선교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품게 됐다. 이 열망은 선교사역에 필요한 간호학, 신학, 교육학 등을 준비할 수 있게 했다. (조선간호학계의 개척자) 간호선교사로 왔던 서서평은 간호사역을 가장 중심에 두었다. 내한이래 기독병원의 전신인 광주 제중원, 군산의 구암예수병원, 세브란스병원 등에서 일했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간호원을 총감독하고 훈련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우리말에 능통해 많은 책을 한글로 저술하고 외국서적을 번역했다. 그가 쓴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교과서라 할 수있는 『간호교과서』, 『실용간호학』,『간호요강』,『간이위생법』 등은 당시 한국간호협회 지정출판도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 간호협회 교과서 제정위원, 간호회지의 출판위원과 편집위원을 맡았다. 그는 강인한 조직력과 추진력으로 1923년 대한간호협회의 전신인 조선간호부회를 창립해 10년간 회장을 맡았다. 그는 조선간호부회를 국제간호협의회(ICN)에 가입시키기 위해 국제간호협의회 총회에서 연설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그가 세상을떠난 1949년에야 우리나라는 정회원국이 되었다. 간호사 그리고 간호교육사로서 한국 간호사의 역사를 창출한 그의 공로는 헤아릴 수 없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던 김모임은 “한국 여성운동의 개척자이며 사랑의 사도인 나이팅게일의 참 후예”라고 했다.

광주이일학교 1933년 제7회 졸업기념 사진. 맨위 중앙이 서선교사다. (출처- 한일장신대학교)
(여성계몽에 앞장 선 교육자)
일반적인 성경공부반이나 기관은 여성들의 실제적이고 영적인 리더십을 개발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 서서평은 불우하고 기회를 놓친 다양한 계층의 여인들을 위한 학교를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이일학교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좁은 안방에서 시작한 학교는 1926년 광주 양림동 뒷동산에 붉은 벽돌 3층 교사를 짓고 ‘광주이일학교’로 발전했다. 당시 대부분의 여자들은 문맹이었고 경제권이나 의식도 없었다. 여성들의 교육기회가 제한되어있던 상황에서 이일학교는 점차 이 지방 여성교육기관으로서 상당한 지위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당시 이름도 없이 ‘큰년이’ ‘개똥어멈’ 등으로 불리던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주고 해마다 3∼4만여명씩 교육시켜 존중받을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일깨웠다. 그는 설립부터 1934년 서거할 때까지 5∼6개 과목을 직접 가르쳤다. 보통학교 교육과 성경교육 뿐 아니라 병을 예방하기 위해 의학과 간호에 관한 과목도 가르쳤다. 또 학생들의 자립정신을 기르기 위해 양잠과 직조기술, 바느질과 자수를 익히게 했다. 책상보, 손수건 등 학생들이 만든 수예품은 미국에도 수출됐고 그 판매수익금은 학비로 쓰여졌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비기독교인도 예외없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1922년부터 35년까지 이일학교 졸업생은 265명이다. 여성교육기관으로서 호남지역의 많은 여성지도자를 배출한 이일학교 졸업생중에는 여전도사를 비롯해 목회자 사모, 간호사, 교사 등 계몽사업과 신여성운동의 선봉에서 활약한 사람이 많다. 그리고 이일학교는 현재 5개학부 12개전공과 6개 대학원에서 해마다 1500여명의 재학생이 공부하는 4년제 종합대학인 ‘한일장신대학교’로 발전했다.

조랑말을 탄 서선교사와 그가 입양한 고아들 (출처- 한일장신대학교)
조랑말 전도 선교
서서평은 전도를 위해 영문 전도지를 번역했고 전도대를 편성해 전라도 일대를 다녔다. 육로로 때로는 수로로 다니면서 믿지 않은 지역을 찾아가 가가호호 방문하며 복음의 씨앗을 멀리 그리고 넓게 심었다. 그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조랑말을 타거나 달구지를 타고 나가 전도했다. 호랑이와 강도가 출몰하는 고개를 조랑말을 타고 넘을 정도로 그는 ‘여걸 선교사’로 불릴 만큼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 1천명분의 일을 할만큼 열정과 근면함이 남달랐다. 그는 전도만 한 것이 아니라 각 교회를 방문해 부인조력회(현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시초)를 만들고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도 힘썼다. 또 일종의 노방전도인 ‘확장 주일학교’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일학교 학생, 교사들과 함께 교회가 없는 마을에 찾아가 주로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가 조랑말을 타고 동분서주한다는 사실이 미국 선교부에까지 알려지자 미국 독지가로부터 포장을 친 수송용 트럭 한 대를 받아 보다 편리하게 활동하게 됐다. 확장주일학교는 당시 45여곳이었고 개별 교회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후 확장주일학교는 광주 주변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됐다. 이 운동으로 주일학교가 활성화되면서 1922년 한국주일학교연합회가 창립됐다.

서서평 선교사 선교 20주년기념사진. 그때 제작된 선교20주년 기념비는 한일장신대 캠퍼스에 세워져 전해오고 있다. (출처- 한일장신대학교)

1930년 뉴욕에서 찍은 사진. 한복을 입고 부채를 들고 사진을 찍을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다
(출처- 한일장신대학교)
진정한 한국인
서서평은 한국과 결혼했다. 겉모습은 외국인이었지만 마음은 완전한 한국인이었다. 한국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교양있는 언어를 구사하려 노력했고 한국어 발음은 정확했다. 한글말살정책이 시행되던 일제 때 한글 사용을 강조했고 여러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했으며, 영어와 한국어로 병기되던 간호회지와 조선간호부회 회칙에도 한국어만 사용하기를 못박았다. 3·1운동에도 관여해 교도소에 갇힌 애국지사의 필수품을 차입해주기도 했다. 그의 성격은 완벽을 추구하고 직설적이며 급했다. 그래서 자신의 급한 성격을 다스리고자 성을 ‘천천히’라는 뜻의 서(徐)씨로 정했다. 그는 스스로 절제에 앞장섰다. 다른 선교사들이 미국식 삶을 고수하고 좋은 건물에서 살거나 사냥을 즐긴 반면, 그는 조선 농촌여성과 같이 무명 베옷을 입고 맞는 신발이 없어 남자 고무신을 신었으며 보리밥에 서양인들이 혐오하는 음식인 된장국을 먹고 살 정도로 진정한 한국인이 되고자 했다. 동아일보에서 그의 집을 ‘찌그러진 집’으로 소개할 정도로 무너져가는 양철지붕의 흙집이었지만 집을 가꾸지 않았다. 또 그 어떤 잡기나 오락을 하지 않았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주님께 온전한 것을 드리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사치와 낭비, 오락도 일체 하지 않았다. 학교안에서도 값비싼 의복이나 필요이상의 화장을 금했다. 그의 헌신에 한국인들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 있다. 1932년 6월 10일 이일학교에서 열린 서서평의 선교20주년기념행사다. 이런 행사는 대부분 25년만에 실시하지만 그의 건강이 악화돼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5년을 앞당겨 강행했다. 이날 한 청년이 연설했다. “저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서서평 교장이 진실로 가치있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저는 기독교를 좋아합니다.” 또 하나. 1949년 5월에는 선교20주년기념비를 제자리에 다시 세우는 행사가 열렸다. 일제강점기 이일학교가 폐교됐을 때 전쟁중에 망실될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10년동안 땅속에 묻어둔 것이었다. 이 기념비는 현재 우리대학 고인애기념관앞에 세워져있다. 서서평은 1912년 한국에 와서 1934년까지 선교사역을 마칠 때까지 스프루(Sprue)라는 일종의 만성흡수불량증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그는 유능한 간호사였지만 여러 역할로 인해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가중되고 건강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직접적인 사인인 영양실조까지 보태져 그는 임종전 약 4개월동안 병과 사투를 벌였다. 수술을 받았으나 1주일후인 1934년 6월 26일 새벽 4시 소천하고 말았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할렐루야!”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당시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었던 그는 시체를 해부해 연구자료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원인을 규명해 다시는 자기와 같은 환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장기를 기증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시신 기증은 놀라운 일이었다. 장례식은 6월 27일 광주 최초의 시민 사회장으로 진행됐다.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과 불교인, 일본인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전국에서 참석했다. 모여든 사람들이 “어머니 어머니!”라고 목놓아우는 통곡소리는 마치 비행기소리와 같았다고 한다.

서서평 선교사의 선교 20주년기념사진. 그때 제작된 선교20주년 기념비는 한일장신대 캠퍼스에 세워져 전해오고 있다. (출처- 한일장신대학교)
이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그의 공로를 높이 사 전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했다. 서서평의 정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가 온 지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흠모하고 그 뒤를 따르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2012년 3월 17일 광주 기독간호대학 오웬기념각에서는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예배’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1천여명의 사람들이 참석해 그를 추억했다. 그의 삶을 다룬 책은 고 백춘성 장로(광주신안교회)가 그의 삶 전체를 조사해가며 쓴 책 『천국에서 만납시다』(1980년)과 올해 내한 100주년을 기념해 나온 평전 『조선을 섬긴 행복』(양창삼 한양대 명예교수),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양국주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대표) 등이 있다. 그러나 저자들의 말대로 책 한 권에 그의 일생을 담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서서평은 방대하고 위대한 삶을 살았다. (출처- 한일장신대학교)
<광주기독병원>

광주기독병원
광주기독병원은 1905년,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놀란(J.W.Nolan)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1904년에 한국에 도착해 목포시에서 의료선교를 하다가, 1905년 11월 8일 광주로 넘어와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의 임시사택에서 진료소 시설을 준비한 후 11월 20일 오후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진료소 문을 열고 9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이 후 우월순(Dr. R. M. Wilson; 2대원장)가 광주기독병원(제중병원)을 건축하고, 부란도(Dr. L. C. Brand; 3대원장), 고허번(Dr. H. A. Codington; 5대원장), 이철원(Dr. R. B. Dietrick; 7대원장), 여계남(Dr. J. K. Levie; 치과의사), 유수만(Dr. D. H. Nieusma; 치과의사), 서서평(Miss E. J. Shepping; 간호사), 변마지(Miss M. F. Pritchard; 간호사) …… 등 광주기독병원에서 봉사했던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열정과 헌신적 삶이 녹아 있으며 이러한 선교사들의 사랑으로 나누고 섬기며 희생하는 밀알정신과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은 오늘의 광주기독병원에 고스란히 전해져 있으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 광주기독병원은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 지역사회를 지키면서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지역민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최선을 다하면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였다. 개원초기부터 광주제중병원을 통해서는 일반적인 질병을 치료하였고 광주나병원을 통해서는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면서 치료 후 자활할 수 있도록 직업교육과 함께 그들의 생활터전을 제공해 주었다. 1927년 우월순 선교사가 나환자들과 함께 여수 애양원으로 집단이주한 후 1930년부터 3대 원장인 부란도(L.C.Brand) 선교사는 결핵퇴치 사업으로 밀알정신을 이어가게 되었으며 과로로 인해 쓰러져 순교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1940년 신사참배 문제로 일제에 의해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병원이 강제 폐쇄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출처-광주기독병원)

광주 제중원 (광주기독병원 뿌리)

1911년 그라함병원(제중병원) (출처 : 의학신문(http://www.bosa.co.kr)
<구암병원, 구 구암예수병원> (출처- 군산의 첫 서양병원, '구암병원'에 얽힌 사연 - 오마이뉴스)
근대 도시로서의 군산은 개항(1899년)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112년 전 일이지요. 그런데 서양의료역사는 개항보다 3년이나 먼저 시작되었으니 115년이 된 셈입니다. 서양의료사로 115년이면 유구(?)하다고 할 수 있는 연륜이지요. 애석하게도 지역 백과사전 역할을 하는 군산시사(群山市史)에는 서양의료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필자는 실종 위기에 처한 군산의 '서양의료사'를 한 번 건져 올렸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제 나름대로 수집한 자료와 조사한 바를 근거로 제국주의 침략의 통로 도시 군산의 서양의료사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필자의 말>
우리나라에서 첫 서양식 의료기관은 1885년 2월 미국의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Allen H)'이 고종의 윤허를 받아 지금의 서울 종로구 재동에 개원한 '광혜원'(개원 12일 만에 '제중원'으로 개칭)이다.

1896년 4월 의료선교사 ‘드루’와 ‘전킨’이 군산진영 터가 있었던 수덕산 기슭에 세운 포교소.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출처- 군산의 첫 서양병원, '구암병원'에 얽힌 사연 - 오마이뉴스)
기독교의 호남 교두보였던 군산에서 최초의 서양식 진료는 1896년 4월 의료선교사 '드루'(A, D, Drew 유대모)와 '전킨'(W. M. Junkin 전위렴)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군산진영 수덕산 기슭 초가를 매입하여 포교소(교회)를 설립하고 의료 선교 활동을 개시했다. 두루와 전킨은 포교소 한쪽에 약방을 꾸며놓고 오전에는 전도를, 오후에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주민의 호응이 날로 좋아져 포교소가 발전하면서 하루에 50건 이상의 환자를 돌보았고, 무료 진료여서 계란, 생선, 조개류 등이 감사의 선물로 들어왔다고 한다.

데이비스(좌)와 전킨(우). 군산 영명고 학생들이 데이비스의 삶을 기리는 기념비를 구암동에 세웠으나(1958년) 땅이 팔리면서 전주 외국인 묘지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1896년 가을에는 서울에 머물던 데이비스(Linnie Davis) 여선교사도 합류하였다. 데이비스는 1898년 해리슨(Harrison) 선교사와 결혼하여 전주에 터전을 잡고 환자를 돌보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03년 41세 나이로 병사, 전주 선교사 묘지에 안장된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가 군산에 포교소를 세운 것은 선박이 자주 입출항하고, 비교적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며, 호남 대도시 전주로 통하는 초입에 있는 교통의 요지이고, 서양인에 대한 지역민의 인심이 호의적인 점 등의 여러 배경이 참작된 것이다.
일제의 압력으로 '구암병원'이라 불러

두루 의료 선교사가 살던 집(사택). 옆방에서 예배도 봤다고 합니다.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두루와 전킨이 진료와 복음 전파를 위해 타고 다니던 전도선.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1899년 군산이 일제에 요구에 의해 개항되면서 수덕산 일대가 조계지역으로 지정되자 전도선(傳道船)이 정박하기 편리한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구암산(현 군산시 구암동) 기슭에 건물을 짓고 '예수'의 번역 한자어 '야소(耶蘇)'를 붙여 '야소병원'이라 하였다. 당시 구암리 지명이 '궁멀'이어서 '궁멀병원'으로도 불렸던 '야소병원'은 기독교를 백안시한 일제의 압력 때문에 '구암병원'이라하였다. 드루는 '전킨' 선교사와 전도선을 타고 연안 도서지방을 순회하면서 진료도 하고 기독교를 전파했다. 1902년 미국 버지니아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Society Lying' 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 '토마스 다니엘'(Dr. Thomas A. Daniel)이 1904년 결혼과 함께 군산에 도착하여 드루와 전킨이 설립한 '구암병원'을 인수받는다. 다니엘은 간호 선교사인 케슬러(계순라)와 드루를 대신해서 진료와 전도활동을 활발하게 하였고, 선교의사 알렉산더(A. J. A. Alexander)도 합류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두 달이 못되어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귀국한다.

구암병원이 있던 구암리(현 구암동)의 1900년대 초. 왼편 상단에 영명학교 건물이 보입니다.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다니엘이 물려받은 의료 시설은 낡고 보잘것 없었다. 작은 방에서 진찰하는 동안 대기실이 없어 환자들은 밖에서 추위에 떨며 애타게 차례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도 다니엘은 환자를 성실하게 돌보다 1910년 전주 예수병원으로 옮겨갔다. 급보를 받고 귀국하려던 알렉산더는 독립협회에서 활약하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군산으로 피신해 선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오긍선(吳兢善)에게 함께 도미할 것을 제의한다. 1902년 알렉산더와 미국으로 건너간 오긍선은 켄터키 주 센추럴 대학과 루이빌 의과대학을 수학, 1907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오긍선은 1909년 군산 영명중학교를 설립하고, 군산, 광주, 목포 등지의 '야소병원'장을 역임한다. 1912년에는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1934년 세브란스 의전 교장으로 일하면서 고아 구제 사업에 힘쓰다 1963년 사망했다.

구암병원 2대 원장 ‘패터슨’ 의료선교사(좌)와 간호선교사 케슬러(우).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다니엘 후임으로 의사 '패터슨'(J. B. Patterson, 손배돈)이 부임하여 병원을 확충하고 입원실을 온돌방으로 건·개축하였다. 특히 진찰을 정확하게 잘하므로 그 의술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여 구암병원은 국내 유명한 병원 중 하나가 되었다. 패터슨이 구암병원에서 근무한 기간은 7년이었다. 1924년에는 의사 '브랜드'(Louis Christian Brand, 부란도)가 내한해 구암병원에서 농촌 순회 진료를 하는 등 기독교 전파에 진력했다. 그러나 브랜드도 6년 후(1930년) 전주 예수병원으로 옮겨갔다. 한국인 의사로는 세브란스의전 출신 강필구(1931년), 홍복근(1937년)이 있었다. 홍복근 아버지 홍원경(45년 작고)도 구암병원 의사였는데, 33세 때 영명학교가 주관한 3·5 만세운동(1919년)에 가담했다. (2001년 2월 28일 새전북신문 참조)
선교사들은 떠났어도 진료는 이어져
기독교 전파사업을 병행하면서 운영되던 구암병원은 1941년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의료 선교사들을 체포, 감금하고 강제로 추방하면서 문을 내린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일제는 1940년 11월16일 국내 선교사의 절반에 가까운 160명의 선교사와 자녀 49명을 추방했다. 이후 각지에 있는 선교병원은 한국인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운영권을 이양했는데, 일제는 이 병원들을 계속 감시, 탄압했다. 특히 선교부가 소유한 병원은 '적산'이라 하여 몰수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병원에 신사 설치를 의무화하여 기독교인 의사들이 신앙적 양심을 포기해야 병원사업을 할 수 있었다. 서양 의료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병원이 문을 내리자 한국인 의사였던 홍복근은 서래장터 물문다리 옆(중동 서래산 아래) 함석집에 '구암병원' 간판을 걸고 개업하였다.

군산시 명산동 유곽시장(명산동 시장) 근처에 있었던 구암병원.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서래산 아래는 중동과 경암동의 경계로 빈촌이었다. 아프면 굿을 하거나 점집을 찾던 빈민들이 홍복근의 구암병원 덕에 서양 의술을 이해하고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이후 구암병원은 명산동 유곽시장 근처(지금은 공영주차장)로 이사하여 1982년까지 진료하다 문을 닫았다. 구암교회와 마주하고 있던 '고려제지'(페이퍼코리아) 사택에 살면서 몸이 아플 때마다 회사 통근버스로 진료를 받으러 다녔다는 정창훈(61세)씨는 가끔 옛날 생각이 난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고려제지 직원 가족들은 진료비 걱정 없이 아무때나 다녔습니다. 지금의 건강보험증 비슷하게 카드에 체크해두었다가 아버지 월급에서 제했어요. 그래서 조금만 다쳐도 병원에 갔지요. 몸에 빨간 '아까징끼'(머큐로크롬액) 바르는 게 자랑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정씨는 "구암병원은 기와를 얹은 2층 건물이었고, 입원실도 몇 개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고난도 시술이었던 맹장수술을 했을 정도니까 규모가 꽤 컸던 것 같다."면서 "조수가 같은 동네에 사는 나(羅)씨 아저씨여서 단골 환자가 많았는데 이제는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며 안타까워했다. (출처- 군산의 첫 서양병원, '구암병원'에 얽힌 사연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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