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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리드 (Clarence Frederick Reid, 이덕)

성지순례/선교사

by baesungsoo 2026. 2. 9.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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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리드 (C. F. Reid, 이덕, 1849.7.19.- 1915.9.7.) 

 

남감리회의 첫 선교사로 1895년 10월에 내한한 리드(Reid,C.F.)목사를 한국명으로 李德목사라 부른다. 1844년 6월 제14회 미국 감리회 총회에서 "안드류감독의 직권 정지안"이 110표 대 68표로 가결이 되자 남부 총대들은 오히려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안드류 감독(Bishop Andrew,J.O)에 동정하여 남부 노예주에 속하는 14주 연회 대표들이 별도로 총회 조직을 서둘렀다.그리하여 1846년 5월 피터스버그시(Petersburg,Va.)에서 미국 남감리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므로 분열되어 해외선교도 각각 추진하게 되었다. 한국 선교도 미감리회는 1885년 4월에 아펜 젤러(Henry G.Appenzeller)를,1895년 10월에남감리회가 리드(Clarence F. Reid)를 10년 사이를 두고 각각 처음으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미감리회와 남감리회가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오다가 1930년 12월 합동하여 "기독교 조선 감리회"라는 이름으로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비록 미국에서는 두 모교회가 한국 선교를 실시했으나 선교지 한국에서는 하나로 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미국에서도 한국보다 10년 늦게,1940년 4월에 미감리회,  남감리회, 감리회프로테스탄트 등 3파가 합동하였다. 미감리회의 선교는 어디까지나 미국측에서 일방적으로 한국선교를 실시하였으나,남감리회는 미국 유학 중에 윤치호의 선교기금 기탁과 귀국 후에 그의 활동에 힘입어 실현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윤치호(1865-1945)는 1881년 봄 17세 때에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 왔고,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초대 주한 미국 공사 푸트(Foote,L.H)의 통역을 맡았었다. 그리고 푸트공사가 1885년 1월 귀국할 때 함께 한국을 떠나 푸트공사의 소개장을 가지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미국 남감리회에서 경영하는 상해 중서대학(Chinese-Anglo College)에 입학하여 재학중에 예수를 믿고 지도교수인 본넬 목사(Rev.Bonnel.W.B)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윤치호는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1888년 10월 윤치호는 중서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서 11월 테네시주(Nashivill,Tenn)에 있는 벤더빌트대학교(Vanderbilt Univ)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그후 1890년 9월 죠지아주(Oxford,Ga)에 있는 에모리대학(Emory College)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틈틈이 순회강연을 하고 받은 돈과 학비를 절약하여 모은 돈 등 모두 200달러를 1893년 3월11일 캔들러 (Dr Candler,W.A)총장에 한국에 기독교학교 설립하는데 쓰도록 청탁하였다. 윤치호는 정치적 망명을 한 몸이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고 1893년 11월 모교인 상해 중서대학으로 가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1894년 새해 갑오 동학 혁명이 청일전쟁으로 확대되어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청국을 배경으로 하던 정권이 무너지고 친일정권이 조직되자 윤치호는 조국을 떠난지 10년 만인 1895년 2월 그리던 조국의 품안에 돌아왔다. 1895년 4월 청일간의 조약이 체결되자 잠시나마 한국은 청국의 속국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다. 윤치호는 귀국하자 곧 갠들러총장과 중서대학장(Allen,Y.J.)에게 하루 빨리 한국선교에 착수하도록 간청하였다. 윤치호는 미국 유학 시절에 기탁한 한국선교 기금과 남감리회 감독과 총장들과 이미 친교가 있었던 관계로 순조롭게 한국 선교가 실현되었다. 1895년 8월에 윤치호의 한국선교 요청이 10월 13일 핸드릭스 감독(Bishop Hendrix,E.R)이 최초의 선교사 리드 목사와 함께 선편으로 인천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리드(Reid,C.F) 는 한자로 이덕이라 표기하여 한국에서도 이덕 박사로 알려졌다. 그는 1849년 7월 19일 미국 뉴욕주(South Oxford.N.Y)에서 출생하였고 목사가 되기 전에 "평신도 선교운동(The Laymen's Missionary Movement)"의 총무로 활동하다가 1878년 남감리회 켄터키연합회원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그해 중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상해로 부임하여 선교사로 일선에서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추진하여 크게 공헌하여 서주지방의 감리사(장로사)가 되었고, 1886년에 중국 선교연회를 조직하는 데도 중심 인물이었다. 중국에서 17년간 선교 경험을 쌓은 뒤 새로운 선교지를 찾다가 직접 자진하여 헨드릭스 감독(Bishop Hendrix E.R)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여 남감리회 최초의 주재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우선 단신으로 한국을 직접 현지답사를 하고 현재 한국은행이 있는 곳에 선교 기지를 구입하고,1895년 10월 20일 서울을 떠나 갔다가 1896년 5월 두번째 내한하여 주택을 수리하고 상해로 가서 가족을 데리고 8월 14일에 완전히 내한하였다. 몇주 뒤에 "중국 연회 한국지방 감리사(장노사)"로 임명되었다. 1896년 12월부터 전도사엽에 힘쓸 때에 미감리회 상동교회 담임자 스크랜튼 목사(Rev,Scranton,W.B)가 그 교회 청년 김주현과 김홍순을 리드 목사에게 보내어 협조하도록 하였는데 그들을 매서인으로 서울 근교에 복음을 전하여 경기도 고양읍내에 그 결실을 보아 1897년 5월2일 리드목사 집례로 고양읍에서 장년 24인 유년 3인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조직하니 남감리회에서는 최초의 고양읍교회가 탄생하여 이날이 남감리회 기념일이 되었다. 먼저 농촌 교회로 고양읍교회를 세우고 그 다음 달인 6월 21일에는 서울 리드 목사 댁에서 처음으로 공중 예배를 시작하였는데 윤치호 선생이 설교했다. 이 교회가 뒤에 광희문교회가 되었다. 같은해 9월 10일에 리드 목사 사회로 제1회 한국 지방회를 개최하고 서울구역과 개성구역으로 분할하였으며 리드 목사는 한국지방 회장이 되었고 윤치호 선행은 서기가 되었다. 1897년 5월에 선교연회에서 공식으로 "한국 선교처"로 인정받아 리드 목사가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리드 목사는 부인의 병환으로 1899년 4월 20일 귀국하게 되자 교우들이 전송하면서 하루 속히 한국으로 다시 와서 전도하기를 원하였으나 부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1901년 5월 17일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그러나 리드 목사는 한국선교를 잊을길 없어 그해 9월 14일부터 18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제5회 선교회 때에 한국에 나와 선교 관리자로서의 모든 선교업무를 처리하고 귀국하였고,그의 아들인 이위만 (W.T.Reid M.D)의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개성에서 의료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리드 목사는 귀국하여 평신도 선교운동에 총무로 1909년까지 활동하였고 총회에서 제반 입법위원으로 1914년까지 활동하였으며,1915년 10월 7일 켄터키주(Erlanger,Ky)에서 66세로 별세하였다.(이성삼)

(출처-C. F. Reid : 리드(이덕) (남감리회의 첫 선교사)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

 

남감리회 선교의 시작은 개화파 지도자 윤치호가 망명중인 1887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세례 받고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면서 부터이다. 그는 미국에 유학할 때부터 남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였다. 이에 1895년 10월 18일 중국에 있던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선교사가 내한하였고 이듬해 8월 리드 부부가 서울에 정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1897년 5월 2일 고양읍에 첫 남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남감리회에서도 배화여학교, 한영서원, 호수돈여학교, 구세병원 등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였고, 태화여자관을 비롯하여 개성, 원산, 춘천 등지에 여자사회관을 설립하여 한국 근대 사회복지사업의 문을 열었다. 남감리회는 선교 초기부터 신학교육에 있어서 미감리회와 협력하였고, 1907년에 두 교회 연합으로 협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남감리회는 1907년 동만주 선교를 시작으로 만주, 시베리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 종교교회> 1896년 리드 선교사 종교교회 시작

종교교회 세번째 성전 (2001- )

 

1896. 05 좌옹 윤치호의 요청으로 리드(C.F.Reid)목사 한국선교사로 내한 종교교회 시작

1900. 04. 15 캠벨부인이 설립한 배화학당 기도실에서 부활주일 예배드림 (자골교회)

1901. 09 지금의 서울시경옆 내자아파트자리에 2층으로 된 붉은벽돌예배당신축

(건축비기증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Louise Walker Chaple로 명명)

1904. 03 R.Hardie 선교사의 서울부흥회 주최하여 대부흥

1909 남감리회 최초의 한국인 목사로 초대 정춘수 목사 취임(민족대표33인중 한명)

1910. 06. 09 지금의 도렴동자리에 십자형벽돌 2층 성전 신축하고 종교교회라 칭함

1916. 01 ?청년회가 종교 노동 야학강습소를 운영하고 영신축하동서양음악회 개최

1919 - 1921 양주삼목사 봉직

1930. 12. 08 북감리교회(정동,상동,동대문의 동자 계열)와 남감리교회(종교,자교,수표교등 교자 계열) 가 양주삼목사와 윤치호선생의 노력으로 통합. 양주삼목사가 통합감리교단 초대 총리사로 취임 

(출처- http://chongkyo.net/)

종교교회사 (1900-2004, 2005 발행)

역사자료실

남감리교의 역사

 

1871년 신미양요에 의해 한미수호조약이 체결(조선대표 신현)되고, 이로 인해 푸트공사가 조선에 주재하게 된다. 푸트공사의 통역관으로 있었던 윤치호는 갑신정변에 그의 아버지 윤웅렬이 연루돼 입장이 난처해지자 상해로 망명겸 유학길을 떠나 남감리교회가 운영한 중서서원에 수학했다. 수구파의 승리로 김옥균이 살해되자 절망한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본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된다. 윤치호는 동학란으로 야기된 청일전쟁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그는 귀국하여 정부요직을 맞게 되었고, 편지를 내 조선에 선교를 요청한다. 남감리교회 선교본부는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양선교 관리감독인 핸드릭스로 하여금 중국에서 활동중인 리드(C.F.Reid) 선교사에게 조선을 답사하도록 하였다. 이에 리드 선교사가 1895년 10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남감리교회 선교가 시작되며 지금의 한국은행자리에 선교부를 설치하여 선교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한국감리교회 시작

 

한반도 선교의 시작은 미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1885년 정동제일교회를 세움으로 시작된다. 이어 남감리교의 리드 선교사가 1895 10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함으로 한국선교가 활성화 되며 복음의 씨가 뿌려진다. 평양대부흥과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한반도 부흥의 불씨를 지폈던 리드 선교사의 흔적이 남은 교회가 있다. 그곳이 바로 서울 종로구 도렴동에 있는 종교교회이다. 종교교회역사는 100년을 넘어 한국교회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또한 교회사의 족적을 크게 남기므로 그 의미가 남다른 교회로 한국 개신교에 우뚝 서 있다. 종교교회는 리드 선교사 부부에 의해 세워진 남감리교 최초의 한국 개신교 교회이다.

좌옹 윤치호

 

본관 해평(海平). 호 좌옹(佐翁). 충남 아산(牙山) 출생. 일찍부터 개화운동에 투신,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배웠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 비준 때 초대 주한(駐韓) 미국공사 L.H.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개화인사라는 이유로 의심을 받게 되자 상하이[上海]로 망명,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3년 동안 공부하며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선교사 A.J.앨런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서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영어·신학·인문사회과학 등을 공부하였다. 1895년 귀국, 총리대신 비서관을 거쳐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었으나, 춘생문(春生門)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후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898년 독립신문사 제2대 사장, 함경도 덕원부윤(德源府尹), 천안군수 등을 지냈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회장이 되어 교육사업에 힘썼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을 조직한 후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으로 있다가 11 105인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강점기 말에 한때 변절,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다. 저서에 우스운 소리, 영어문법첩경(捷徑) 등이 있다. 윤치호와 남감리교회, 종교교회 시작에 공헌한 윤치호의 사적을 보면 수구파의 승리로 김옥균이 살해되자 절망한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본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된다. 윤치호는 동학란으로 야기된 청일전쟁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그는 귀국하여 정부요직을 맞게 되었고, 편지를 내 조선에 선교를 요청한다. 남감리교회 선교본부는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양선교 관리감독인 핸드릭스로 하여금 중국에서 활동중인 리드(C.F.Reid) 선교사에게 조선을 답사하도록 하였다. 이에 리드 선교사가 1895 10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남감리교회 선교가 시작되며 지금의 한국은행자리에 선교부를 설치하여 선교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2. 고양읍교회> 1897년 리드 목사 시무

현재의 고양교회. 벽제관터 바로 옆이다.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90039

고양감리교회  (출처- 고양 감리교회)

 

윤치호 선생과 선교사 리드가 설립한 완벽한 조직의 감리교회 고양 감리교회는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회로 12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교인이자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서 에모리(Emory)대학과 벤더빌트 (Vanderbit)에서 공부한 윤치호 선생에 의해 세워졌으며, 한국인의 촉구와 주선으로 시작된 남감리교의 선교는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전파 된 북감리교(아펜젤러), 북장로교(언더우드)와 달리 자주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윤치호 선생과 그의 요청으로 내한한 리드 선교사는 개성을 중심으로 선교를 하다가, 1897년 5월 2일, 벽제관이 있던 곳으로서 당시로는 번성했던 마을이었던 고양읍에서 리드와 콜리건이 장년 24인과 유년 3명에게 세례식을 집례하고 속장을 선출하면서 완벽한 조직을 갖춘 감리교회를 세웠습니다.이후 양주삼 목사와 윤치호 선생 등이 노력하여 1931년 <조선감리교회>를 탄생시켜 미국보다 먼저 분열된 감리교의 통합을 이루었습니다. (출처: https://trails.tistory.com/13 [나들길:티스토리]

 

(교회연혁)

1897. 5. 2. 고양읍교회 창립, 제1대 리 드 ( C. F. Reid )선교사 담임 (상동교회 출신 권서인 김흥순,
                 김주현의 전도로 장년 24명과 아동3명이 리드선교사에게 세례를 받다. 좌옹 윤치호선생이 
                 대지 및 5칸 예배당 기증)
1898-1907 제2대 콜리어 ( C. T. Collyer )선교사 담임 (개성주재)
1930년경   처음교회 폐쇠
1954. 9.     고양교회 재건, 제3대 윤성렬 목사 담임

1950년대 말로 추정되는 경기도 고양감리교회 성전건축 사진. 성도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고양교회는 1897년 무렵 설립된 미국 남감리회 한국선교부 첫 교회였으나 1930년대 장로회와 감리회의 선교지 분할 정책에 따라 조직교회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다 1954년 회복됐다. 이 컬러사진은 선교사가 찍은 것으로 판단된다. 고양교회 제공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90039

1997년에 세운 100주년 표지석.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90039

 

고양교회는 점쟁이에서 회심한 백사겸이 전도자로 사역한 곳이다. 벽제관 터 옆에 자리한 예배당 벽면에 여름 수양회 각종 프로그램을 알리는 현수막이 생동감을 준다. 교회 입구엔 1997년 세운 ‘기독교대한감리회 고양교회 창립 100주년기념비’가 자리했다. 1897년 설립됐고 1930년 폐쇄됐으며 1954년 재건됐음을 음각했다. 그 뒷면 ‘역대 담임자’로 ‘1898~1907 콜리어 선교사, 김흥순 전도사, 백사겸 전도사’라고 기록됐다.

백사겸 전도자 (1860~1940)   [출처] - 국민일보


평남 평원 출신인 백사겸은 평범한 농부 아들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아홉 살에 눈병으로 ‘장님’이 됐다. 그리고 몇 해 되지 않아 어머니마저 잃고 형과 단둘만 남아 거지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맹인’은 10명 중 8명이 복술업에 종사했다. 형 손에 이끌려 4년여 복술을 배운 그는 산통(算筒)과 죽장에 의지해 열다섯부터 대동강 줄기 따라 다니며 돈을 벌었다. ‘죽장으로 길등을 긁으며 사람들에게 처량한 신호를 보내고 근심 중인 그들을 유혹하여 불러 모았다.’(‘숨은보배’ 중) 한데 눈치가 빠르고 상황 판단이 정확했던 그였는지라 금세 명복으로 소문이 퍼졌다. 이때부터 그는 ‘백 장님’으로 불리며 떼돈을 벌었다. 활동 범위도 서울 이천 원주 등으로 넓어졌다. 장가갈 나이가 되어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자 “딸을 성한 사람에게 시집 보내면 일찍 죽는다”며 양갓집 딸을 아내로 맞았다. 부부가 정착한 곳이 고양고읍(현 고양시 고양동·벽제동 일대)이었다. 백사겸은 으레 인마로 모셔가는 우상의 우두머리였다. 그가 그렇게 호의호식할 때 조선은 부정부패와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백성의 삶이 더욱 궁핍해졌다. 무당은 길흉화복을 주관했다. 백사겸에게도 낙오된 인생들, 즉 창기 소첩 정신병자 등 버림받은 민중이 줄을 섰다. 동학, 정감록, 후천개벽 등 민중 종교가 우후죽순 생겼다. 백사겸은 한 서린 민중에게 연민의 감정이 있었고 나름대로 구도에 힘썼다. 그는 1897년 정월을 전후해 100일 기도를 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친 1월 12일(음력) 매서인 김제옥이라는 이가 찾아와 전도지를 주며 이리 말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도리를 적은 말씀인데 한번 읽어 보십시오.” "숨은보배’에는 이 권면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 있다. ‘나는 예수교에 반대한 터나 체면을 보아서 받기는 받았다. 그러나 독한 벌레가 손에 닿는 듯이 선뜻하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백사겸은 환상을 보았다. “나는 예수다. 내가 주는 산통은 의의 산통이니 받아가지라.” 몇 날 며칠을 그렇게 꿈을 꿨다. 백사겸은 아내에게 전도지를 읽어 달라 했고 그 내용이 꿈속 예수의 말씀과 같은 것을 알고 “경 치는 일을 단연코 그만두겠소”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김제옥과 함께 회당으로 갔다. 고양읍교회였다. 그는 유명 복술가였던지라 바로 공중 기도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 해서 그간 자신의 삶이 술수와 기만이었음을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의가 있음을 몰랐다”고 했다. [출처] - 국민일보

 

<광희문교회> 1897년 리드 선교사 시무

광희문교회  (출처- 광희문교회)

 

1895년(고종 32)에 입국한 미국의 남감리회 선교사 리드(Reid, C.F.)는 1896년 8월 중국연회 조선지방 장로사(長老司:현 감리사)로 임명되어 1897년에 경기도 고양읍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선교부에서 조선선교처가 분립되자 관리자로 임명되어 그 해 6월 21일 일요일에 사택에서 처음으로 공중예배를 열고 윤치호(尹致昊)가 설교를 했는데, 이것이 광희문교회의 시발이 되었다. 그 해 9월 10일에 제1회 조선지방회가 광희문교회의 산실인 선교사 리드의 사택에서 열려 서울구역과 개성구역으로 나뉘고, 교회건립을 위해 사두었던 가옥을 수리하여 교회건물로 사용함으로써 그 뒤 서울의 선교 사업이 이 교회를 기지로 해서 전개되었다. 교세가 점차 늘어나자 1904년 10월에 띠꿀(지금의 五壯洞)로 이전하여 교회명을 일명 수구문교회라고 불렀고, 1916년광희동에 대지 400평을 구입해서 양옥 2층의 교회를 건축하고, 1924년 이후 부터 ‘광희문교회’로 불렀다. 교회건물이 준공되자 청소년교육을 통해 선교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1911년에 광희문여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 뒤에 배명중고등학교(培明中高等學校)로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족 항일기 말기에 종교탄압이 심해지면서 1942년 3월에 담임목사인 전효배(田斅培)가 검거되고, 광희문교회는 폐쇄되어 동대문교회로 병합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교회재건을 위한 교인들의 노력에 의해, 1956년신당동에 2백 평 규모의 교회건물을 신축하여 1995년까지 사용하다 1996년 교회를 다시 신축했다. 현재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교회로서, 광희문교회는 국내 미자립교회 선교비 지원, 해외 선교사 파송 등의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출처- 광희문교회(光熙門敎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희문교회 

 

(교회연혁)

1897년 6월 21일 서울 남송현(현 소공동)의 초대 리드선교사 자택에서 첫예배 드림

1897621일 윤치호의 설교로 서울교회 (광희문교회) 창립

1899년 제2대 무야곱 선교사 (한국선교장로사) 부임

1904년 띄골(현 오장동)로 이전 (일명 수구문교회 -청녕교교회라 칭함)

19049월 제3대 한운설 선교사 (배재대학교수) 부임

1908년 서울구역에서 수구문 (광희문) 선교처로 독립

19089월 제4대 고을리 (C.T.Collyer) 선교사 부임

19099월 제5대 하디 (R.A. Hardie 원산부흥운동. 신학교 교수) 선교사 부임

1911년 교회용 공동묘지설치(김영환 교우 기부) 한국교회 최초로 추정

191131일 광희문 배화여학교 (마이너여사 교장) 분교 개교

19119월 제6대 크람 (W.G.Cram) 선교사 (수표교교회 겸임) 부임

19129월 제7대 하디 (R.A.Harde) 선교사 부임

19129월 여선교 사업으로 배화학교 설립자 캠벨 여선교사 파송

19159월 제8대 김영학 목사 부임

광희문교회  (출처- I'm a Pedestrian! :: 광희문교회 )

광희문교회  (출처- I'm a Pedestrian! :: 광희문교회 )

광희문교회는 지난 4월 29일 창립 120주년 기념 음악회를 개최했다.

(출처 : 웨슬리안타임즈(http://www.kmcdaily.com)

서울 광희문교회 정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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