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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변요한(DR. John Fairman Preston)

성지순례/선교사

by baesungsoo 2026. 2. 1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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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변요한(DR. John Fairman Preston, 1875. - 1975.4.30.)

 

프레스톤 선교사는 미국 조지아 주에서 1875년 출생하였으며 남장로교 출신으로 북장로교 학교인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 1903418일 목사안수를 받아 그해 190311월 아내 애니와 함께 목포에 도착했다. 그는 194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추방되기까지 호남지역의 든든한 복음의 조력자로 활약했다. 호남선교가 기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선교스테이션을 통한 선교의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테이션의 선교운동은 교회, 병원, 학교를 통한 영적 각성, 문맹 퇴치, 육체 치유, 항일운동을 통한 입체적인 선교활동이었다. 물론 예배 시에는 통회자복을 통한 눈물의 회개운동도 있었다. 프레스톤 선교사가 목포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안 되어 유진벨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가 광주 선교지부 개설을 위해 떠났다. 이에 프레스톤은 조셉 놀란과 함께 목포 및 인접 도서지방까지 돌보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임성옥 조사를 대동하여 지방전도 여행을 떠나 강진의 학명리교회와 해남의 원진교회, 맹진교회, 남창교회를 세웠고, 1905년 교장으로 취임한 목포 영흥학교를 최초의 석조 건물로 건축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프레스톤은 광주 선교지부가 확장되자 1909년에 광주로 이동했는데, 1909년 오웬이 갑자기 소천하자 오웬이 순회하며 전도하던 순천과 구례 등 전남 동부지역까지 맡게 되었다. 순천에는 오웬과 지원근 전도사의 노력으로 순천읍교회(현 순천중앙교회), 대기리교회, 구상리교회 등이 이미 설립되어 있었고, 이때 광주와 순천지역의 교회개척을 이끈 조상학이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프레스톤은 유진 벨과 함께 순천읍교회를 방문했을 때 매주 50여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적지 않은 도전을 받았다. 이곳에 미국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선각자의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레스톤 선교사는 남장로교 한국선교와 전남지역 기독교의 발전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그는 순천을 자주 오가며 순천지역에 선교기지를 신설해야 하는 필요성을 제시했다. 광주와 순천 사이에 높은 산들이 지역을 격리시키고, 육로 교통이 불편해 교회와 신자를 돌보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남해안 지역과 섬진강 유역을 감당할 선교기지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으로 1910년 선교기지 개설위원회가 구성되고, 1911년에는 개설 장소가 논의 되었다. 순천과 벌교가 주요 후보지로 거론되었는데, 벌교가 당시 교통 및 상업 중심지였지만, 앞으로 순천의 발전 가능성이 더 클 뿐 아니라 여수지방의 도서선교에도 유리한 지리적 이점이 있음을 고려해 마침내 순천에 선교지부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미국남장로회 선교지부는 19134월 순천 선교지부 선발대로 프레스톤과 코잇 가족을 순천으로 보내 매곡동(매산) 선교사 주택에 짐을 풀고 선교활동에 들어가도록 했다. 당시 매곡동은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의 매장지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이곳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복음의 전진기지로 활용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순천 매산학교이다. 매산학교는 19104월 순천 금곡동에 사숙을 설립해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으며, 은성학교라는 학교명으로 시작하여 매산남학교와 여학교를 건축했다. 19134월 매산남학교는 초대 교장 코잇, 192142대 교장에 크레인이 봉사하면서 가난한 학생들이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다 1916년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치는 문제로 일본과 충돌하여 1차 폐교당했다. 1919년 데라우치 총독이 사임하고 사이토 총독이 부임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통치제도도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체제로 변화하였는데, 매산학교가 이때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19379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가 이뤄지자 결국 다시 자진 폐교한 후, 19468월 해방이 된 이후에 2차로 복교를 하였다. 또한 프레스톤 선교사는 현지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현지인을 교회 지도자로 양성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농한기를 이용해 농촌지역 지도자 양성을 위한 달성경학교를 개설하였다. 달성경학교는 연초에 1개월 동안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었는데, 5년간 계속하게 되면 졸업한 후에 교회의 지도자급인 영수가 되거나 조사의 자격으로 개척교회를 담당하게 되었다. 후에 이 달성경학교는 순천보통성경학교로 발전하여 농촌교역자와 목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프레스톤은 의료선교사로 순천에 파송된 팀몬스 부부와 협력해 1915년에 순천 안력산 Alexander병원을 세웠는데, 이 병원은 35개의 침대, 좋은 설계와 시설을 갖춘 병원이었으며, 이곳을 통해 수많은 극빈자가 의료혜택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 복음전파에도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프레스톤은 부락마다 다니면서 쪽 복음 성경을 배포하는 등의 다양한 전도를 하였고, 교회 건축비를 지원하고 대출해 주는 방법으로 많은 교회를 설립해 전라남도의 부흥을 일으키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그는 순천에서 가곡리교회와 평중리교회, 사룡리교회의 설립에 기여하였다. 1918년에는 순천읍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교회역사 수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여수지역에서 여수, 장천, 봉양, 우학리교회와 여수서교회, 봉전리교회, 서정교회에서 동사목사로도 시무하는 등 그의 사역은 쉴 틈이 없었다. 이외에도 완도 관산리교회를 설립하였고, 나주 삼도리교회, 덕곡교회, 해남 고당리교회, 무안 성남 등에서 시무하고 진도 분토리교회를 설립하였다. 프레스톤 선교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순천노회장을 지내는 것을 비롯하여 여수와 순천지역 여러 교회의 설립과 당회를 조직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미국 남장로회 순천 선교지부는 개설 초기부터 큰 발전을 거듭하였는데, 그것은 학교를 세워 복음을 증거하고 인재를 양성했을 뿐 아니라, 병원을 세워서 사회에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남장로회 역시 복음전도, 병원사역, 교육사역이라는 세 개 항목을 선교지부 개설의 원칙으로 삼을 정도였다. 선교스테이션정책의 성공으로 인해 호남의 전도율은 약 30%까지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프레스톤은 일제의 강제 탄압으로 인해 1940년 광복을 5년 앞두고 한국을 떠나가야 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노회에서 탈퇴한 후 순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40년 그가 가르친 한국인 사역자들은 프레스톤을 배웅하며 순천역에서 환송예배를 드렸다. 일본은 이날의 환송식을 문제 삼아 환송 나갔던 목사와 전도사들에게 미국 첩보원이란 누명을 씌워 순천경찰서에 검속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광복을 이룰 때까지 일본에 의한 전남기독교 박해가 계속 이어졌다. 양용근 목사(구례읍교회)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수감되었다가 1943125일 광주형무소에서 옥사당했다. 제주도와 전라남도를 오가며 목회활동을 하던 이기풍 목사는 여수 경찰서에 구속되었다가 병으로 풀려나 1942620일 주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사랑의 성자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도 기나긴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프레스톤 선교사 헌신은 복음의 초석이 되었다. 그의 선교의 자취는 지금까지도 순천 곳곳에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출처 : 고신뉴스 KNC(http://www.kosinnews.com)

 

<순천 매산고등학교>

매산고등학교   (출처- 순천매산고등학교 - 나무위키)

 

(학교연혁)  (출처- 순천매산고등학교)

1910.03.01. 미국 선교사 변요한, 고라복 목사가 순천시 금곡동 사숙(私塾)에서 개교하다. 1911년 순천시 매곡동 신축 교사로 이전하다.

1913.09.01.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가 경영하는 성경을 가르치는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고라복(R.T.Coit)선교사를 설립자겸 초대 교장으로 하여 사립 은성학교를 설립하다.

1916.06.01.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성경정과 교수를 불허하므로 자진 폐교하다

1921.04.15.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 주선으로 성경을 정과로 하여 교육하는 학교로 인가를 받아 매산학교와 매산여학교가 개교되다.

1931.12.17. 재단법인 설립 인가를 받다.

1937.09.01.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불복하고 자진 폐교하다.

1946.09.03. 조선 예수교장로회 순천노회 유지재단으로 매산중학교(남녀 공학)를 개교하고 924일에 정식 인가를 얻다.

옛 매산학교

매산관  (출처 : 고신뉴스 KNC(http://www.kosinnews.com)

변요한 목사 선교기념비 (순천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  

고라복 목사 선교기념비 (순천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  

 

<매산여자고등학교>

매산여자고등학교

 

(학교연혁)

1910.4.1.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변요한 (John.F.Preston), 고라복(Robert coit) 목사에 의해 순천시 금곡동 사숙에서 개교

1921.4.15. 매산여학교 설립. 백미다( Miss. M. L Bigger )선교사 초대교장 취임

1937.09.01일제 신사 참배 강요로 불복하고 자진 폐교

1946.09.03조국 광복으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순천노회에서 매산중학교로 복교(남녀공학) 고려위 박사 교장 취임

 

<광주 숭일중학교(1908년), 숭일고등학교(1907년)>

 

(학교연혁)  (출처- 광주숭일고등학교 - 나무위키)

1907 03 05: 광주에 최초로 숭일학교 설립(설립자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3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배유지 목사)

설립자 배유지(Eugene Bell, 1868-1925) 선교사 1868년 미국 켄터키주 스코트스테이션에서 출생하여 센터 칼리지와 루이빌 신학교를 졸업한 후, 1895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다. 1904년 광주 양림동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광주지역 복음 선교를 시작하여 광주에 서구의 신문화가 전래되는 통로를 마련한다. 1908년에는 대한제국의 인가를 얻어 양림동에 남학교(30)와 여학교(20)를 세워서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시작하였다. 선교활동과 교육사업에 전념하다가 1925년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묻히다. 그는 목포와 광주에 남·여 학교를 세워 한국인의 교육은 물론 서구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한국의 개화운동에 선구자 역할을 감당하였다.

1908 02 01: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4년제 소학교 설립 인가(개교)

초대 교장 변요한(John Fairman Preston) 목사 취임

1910 01~12: 광주 최초 서양식 건물로 교사 준공(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66번지)

 

<순천 기독교 선교역사박물관>

1910년 순천진료소(순천 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

순천 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

순천 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2,3층)

 

<진도 초대교회, 분토리교회>

진도 분토리교회 

(출처 : [최초의 숨결을 따라 걷다] 진도 복음화의 초석 '진도초대교회' < 기획 < 기사본문 - 데일리굿뉴스 )

 

존 프레스톤(한국명 변요한)과 클레멘트 오웬(한국명 오기원) 선교사 등이 1905년 목포에서 출발해 해남 우수영을 거쳐 진도로 들어온 무렵이다. 유배에 처해져 진도로 온 김낙중이라는 선비를 선교팀이 만났고, 그를 중심으로 진도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 프레스톤 선교사의 보고서 내용이다. 바로 분토리교회, 현재의 진도초대교회(홍강원 목사)다.  “분토리교회는 1902년 7월 13일에 세워졌다는 게 우리 교회 자체의 정설입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교회가 이미 그 전부터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옵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가 소장한 교적부에 따르면 김맹환 장로님의 경우 1900년 10월 21일에 결신하고, 이듬해 10월 20일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홍 목사의 설명대로라면 이미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첫 번째 진도 방문이었던 1894년 이후에 예수 믿는 이들이 생겨났고, 자생적 예배공동체도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무튼 분토리교회의 초창기는 몹시 활발한 분위기였으리라 여겨진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의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분토리교회 시절을 이끈 미국남장로교 변요한 선교사. “진도군 분토리에 교회가 성립되다. 초 정경숙 김경원 김경오의 7인이 도정의의 전도로 신교하고, 동리서재를 차득하여 예배하다가 불과 일 년에 신도가 칠십여 인에 달하매 삼백여 원을 출연하여 예배당을 신축하였고, 후에 정경숙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가 조직되니라.” 도정의는 프레스톤 선교팀의 일원이자, 권서인의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그의 열정적인 전도와 선교사들의 돌봄, 그리고 초창기 성도들의 헌신으로 분토리교회는 예배당도 건립하고, 교세를 점점 확장해나갔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1926년 당회록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예배당 앞에 건립된 ‘진도 최초의 개신교 교회’ 기념표지와 옛 종이 어우러진 조형물.
(출처 : [최초의 숨결을 따라 걷다] 진도 복음화의 초석 '진도초대교회' < 기획 < 기사본문 - 데일리굿뉴스 )

 

<해남 고당리교회> 변요한 선교사 1907-1917년 동사목사로 시무

고당리교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904년 선교사들과 도정이의 전도 활동으로 마을 주민 김성우, 조병선, 김익천 등이 김성우 집에서 예배를 하기 시작하였다. 1906년 18평[약 59.50㎡] 규모로 첫 번째 교회를 건축하였고, 1907년 부설기관 영명의숙을 설립하였다. 1917년까지 목포선교부의 변요한, 맹현리 선교사, 임성옥, 김영진, 마서규, 김달성, 최병호 등이 순회하면서 시무하였다. 1917년 정관빈, 조병선을 초대 장로로 세웠고, 1918년 초대 교역자로 박종린 전도사가 부임하였다. 1933년 초대 목사로 김세열 목사가 부임하였다. 1981년 무고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96년에는 진도군 신진교회를 개척하였다. 1986년 5월 16일 다섯 번째 교회 건물을 건축하였다. 1997년 『고당교회 93년사』를 발간하였다. 2004년에는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와 임직식을 가졌는데, 노회 목회자, 마을 주민, 고당교회 출신 신도 등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비 제막과 축하공연 등이 펼쳐졌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해남 원진교회, 원진제일교회>

원진제일교회(예장)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원진교회(기장)

 

1907년 목포선교부에 있던 변요한 선교사와 임성옥 조사의 전도를 받은 진인범, 이치도 신자에 의해 원진마을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후에 이웃마을인 동창리로 교회 처소를 옮겼다. 원진교회의 역사는 19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남의 개신교 복음은 1894년 선교사에 의해 우수영에서 시작됐다. 이후 1902년 우수영교회와 옥천 백호교회가 세워지고 신덕리교회(1905년), 고당리교회(1906년)에 이어 다섯 번째로 원진교회(1907년)가 설립됐다. 이어 초송리교회(1908년), 맹진리교회(1909년), 해남읍교회(1910년)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원진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사설학교와 야학을 개설해 계몽사업과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다. 1920년 예배당을 동창리에서 다시 원진리로 옮겼으며, 맹현리 선교사와 마서규, 김달성 조사 등이 교회를 지도했다. 1923년에는 유치원을 개설하였다. 1930년 교회당을 새로 지었으며, 성탄절 때는 화산면, 현산면까지 순회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노래 놀이와 연극을 공연하였다. 1946년 신영희 전도사가 첫 교역자로 부임하였으며, 1952년 박병호 목사가 목사로 처음 부임하여 교회를 이끌었다. 1954년 2월 14일 한국장로교 분열로 인해 교회가 원진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와 원진제일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로 분리되었가 1967년 두 교회가 다시 하나로 합쳤다. 그러나 1973년 8월 1일 재차 분립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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