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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부란도 (Dr. Louis Christian Brand)

성지순례/선교사

by baesungsoo 2026. 2. 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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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란도 선교사(Dr. L. C. Brand, 1894.8.1. -1938.3.1.), 광주기독병원 제3대 원장

 

부란도 선교사(Dr. L. C. Brand)1924년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으며 군산과 전주에서 봉사하다가 광주에는 의사가 없어 군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브랜드 (Dr. Louis Christian Bland, 한국명 : 부란도, 이하 부란도로 표기) 선교사가 광주 제중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부란도 선교사는 1924년 군산 예수병원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1930년 광주로 전임되었다. 그런데 그가 광주에 온 지 8년 만에 그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지금도 양림동 동산에 안장되어 있으며, 그의 부인 메리 알버트는 남편을 제2의 고향 광주에 묻고 1938년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귀국했다. 부란도 선교사는 1930년부터 광주제중원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브랜드 선교사는 망국병이라고 불리울 만큼 심각하였던 결핵퇴치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면서 광주제중원은 결핵환자를 치료하는 대표적인 병원이 되었다1933년 병원에 화재가 발생하여 대부분의 약품과 의료기구와 함께 병원이 전소되었을 때에도 브랜드 선교사는 신속하게 간호사 기숙사를 병원으로 전환하여 화재 이후 9시간 만에 도로상에 병원은 정상 운영이라고 게시문을 내걸고 지속적인 치료를 하였다화재로 인하여 병원의 직원들은 심기일전하여 급여의 15%를 병원 복구비로 향후 6개월간 자진 헌금하기로 하였고 의사들도 수술 환자를 직접 회복실로 운반하는 일까지 담당하였으며 병원을 재건축하는 일에 선교부, 병원직원, 광주시민, 병원에서 치료받았던 환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협력하여 1934년 화재에도 잘 견디며 한국인에게 잘 맞는 온돌식 중앙난방시설을 갖춘 아름다운 새 병원을 갖게 되었다새 건물은 시멘트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이었지만 환자들의 병실의 바닥에는 뜨거운 물이 파이프를 통하여 지나도록 함으로써 온돌효과를 얻었으며 (폐렴 혹은 류마티즘 환자에게는 훨씬 더 이상적이다) 침대도 설비하여 기호에 따르게 하였다. 이 방식은 한국에서는 처음이므로 광주제중원에서의 성공사례는 여타의 병원 건물이나 기숙사에서 모방하기에 이르렀다. 이 공사는 광주 시내의 배관업자에게 시공토록 함으로써 스팀의 공기압 등은 자체적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또한 수술실은 환자의 친척들이 수술광경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이 건물에 대해 브랜드 원장은 한국의 온돌과, 일본의 x-ray 기계와 환기장치, 영국식 난방 설비와, 미국식 설계가 어루어진 합작품으로써 가장 경제적인 건물이다라고 자평하며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안에서 가장 편리한 영구적인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병원건물로 여겼다브랜드 선교사는 결핵퇴치에 온 정성을 다 쏟았으며 결핵전용병동과 결핵요양소를 설립하고자 노력하였다1936년 개설된 “탈마지 기념 결핵병동”은 한국의 남쪽에서는 최초의 결핵병동으로서 1년도 못되어 5개의 병실에 환자들로 가득하게 되어 밀려드는 환자를 수용하기 위하여 병실과 떨어진 방 2개마저 결핵환자 수용시설로 전환시켰으며 결핵병동을 증축하다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193844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하였으며 그의 밀알정신은 1951년 이후 고허번 선교사에 의해 그대로 이어졌다.  (출처- 양림동산 밀알이야기 - ◆ 생명까지 주는 밀알정신 : 브랜드 선교사 | 광주기독병원)

 

 

<군산예수병원, 구암병원, 구 구암예수병원>  

 (출처- 군산의 첫 서양병원, '구암병원'에 얽힌 사연 - 오마이뉴스)

 

근대 도시로서의 군산은 개항(1899년)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112년 전 일이지요. 그런데 서양의료역사는 개항보다 3년이나 먼저 시작되었으니 115년이 된 셈입니다. 서양의료사로 115년이면 유구(?)하다고 할 수 있는 연륜이지요. 애석하게도 지역 백과사전 역할을 하는 군산시사(群山市史)에는 서양의료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필자는 실종 위기에 처한 군산의 '서양의료사'를 한 번 건져 올렸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제 나름대로 수집한 자료와 조사한 바를 근거로 제국주의 침략의 통로 도시 군산의 서양의료사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필자의 말>
우리나라에서 첫 서양식 의료기관은 1885년 2월 미국의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Allen H)'이 고종의 윤허를 받아 지금의 서울 종로구 재동에 개원한 '광혜원'(개원 12일 만에 '제중원'으로 개칭)이다.

1896년 4월 의료선교사 ‘드루’와 ‘전킨’이 군산진영 터가 있었던 수덕산 기슭에 세운 포교소.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출처- 군산의 첫 서양병원, '구암병원'에 얽힌 사연 - 오마이뉴스)


기독교의 호남 교두보였던 군산에서 최초의 서양식 진료는 1896년 4월 의료선교사 '드루'(A, D, Drew 유대모)와 '전킨'(W. M. Junkin 전위렴)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군산진영 수덕산 기슭 초가를 매입하여 포교소(교회)를 설립하고 의료 선교 활동을 개시했다. 두루와 전킨은 포교소 한쪽에 약방을 꾸며놓고 오전에는 전도를, 오후에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주민의 호응이 날로 좋아져 포교소가 발전하면서 하루에 50건 이상의 환자를 돌보았고, 무료 진료여서 계란, 생선, 조개류 등이 감사의 선물로 들어왔다고 한다.

데이비스(좌)와 전킨(우). 군산 영명고 학생들이 데이비스의 삶을 기리는 기념비를 구암동에 세웠으나(1958년) 땅이 팔리면서 전주 외국인 묘지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1896년 가을에는 서울에 머물던 데이비스(Linnie Davis) 여선교사도 합류하였다. 데이비스는 1898년 해리슨(Harrison) 선교사와 결혼하여 전주에 터전을 잡고 환자를 돌보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03년 41세 나이로 병사, 전주 선교사 묘지에 안장된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가 군산에 포교소를 세운 것은 선박이 자주 입출항하고, 비교적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며, 호남 대도시 전주로 통하는 초입에 있는 교통의 요지이고, 서양인에 대한 지역민의 인심이 호의적인 점 등의 여러 배경이 참작된 것이다.
일제의 압력으로 '구암병원'이라 불러

두루 의료 선교사가 살던 집(사택). 옆방에서 예배도 봤다고 합니다.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두루와 전킨이 진료와 복음 전파를 위해 타고 다니던 전도선.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1899년 군산이 일제에 요구에 의해 개항되면서 수덕산 일대가 조계지역으로 지정되자 전도선(傳道船)이 정박하기 편리한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구암산(현 군산시 구암동) 기슭에 건물을 짓고 '예수'의 번역 한자어 '야소(耶蘇)'를 붙여 '야소병원'이라 하였다. 당시 구암리 지명이 '궁멀'이어서 '궁멀병원'으로도 불렸던 '야소병원'은 기독교를 백안시한 일제의 압력 때문에 '구암병원'이라하였다. 드루는 '전킨' 선교사와 전도선을 타고 연안 도서지방을 순회하면서 진료도 하고 기독교를 전파했다. 1902년 미국 버지니아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Society Lying' 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 '토마스 다니엘'(Dr. Thomas A. Daniel)이 1904년 결혼과 함께 군산에 도착하여 드루와 전킨이 설립한 '구암병원'을 인수받는다. 다니엘은 간호 선교사인 케슬러(계순라)와 드루를 대신해서 진료와 전도활동을 활발하게 하였고, 선교의사 알렉산더(A. J. A. Alexander)도 합류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두 달이 못되어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귀국한다.

구암병원이 있던 구암리(현 구암동)의 1900년대 초. 왼편 상단에 영명학교 건물이 보입니다.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다니엘이 물려받은 의료 시설은 낡고 보잘것 없었다. 작은 방에서 진찰하는 동안 대기실이 없어 환자들은 밖에서 추위에 떨며 애타게 차례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도 다니엘은 환자를 성실하게 돌보다 1910년 전주 예수병원으로 옮겨갔다. 급보를 받고 귀국하려던 알렉산더는 독립협회에서 활약하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군산으로 피신해 선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오긍선(吳兢善)에게 함께 도미할 것을 제의한다. 1902년 알렉산더와 미국으로 건너간 오긍선은 켄터키 주 센추럴 대학과 루이빌 의과대학을 수학, 1907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오긍선은 1909년 군산 영명중학교를 설립하고, 군산, 광주, 목포 등지의 '야소병원'장을 역임한다. 1912년에는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1934년 세브란스 의전 교장으로 일하면서 고아 구제 사업에 힘쓰다 1963년 사망했다.

구암병원 2대 원장 ‘패터슨’ 의료선교사(좌)와 간호선교사 케슬러(우).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다니엘 후임으로 의사 '패터슨'(J. B. Patterson, 손배돈)이 부임하여 병원을 확충하고 입원실을 온돌방으로 건·개축하였다. 특히 진찰을 정확하게 잘하므로 그 의술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여 구암병원은 국내 유명한 병원 중 하나가 되었다. 패터슨이 구암병원에서 근무한 기간은 7년이었다. 1924년에는 의사 '브랜드'(Louis Christian Brand, 부란도)가 내한해 구암병원에서 농촌 순회 진료를 하는 등 기독교 전파에 진력했다. 그러나 브랜드도 6년 후(1930년) 전주 예수병원으로 옮겨갔다. 한국인 의사로는 세브란스의전 출신 강필구(1931년), 홍복근(1937년)이 있었다. 홍복근 아버지 홍원경(45년 작고)도 구암병원 의사였는데, 33세 때 영명학교가 주관한 3·5 만세운동(1919년)에 가담했다. (2001년 2월 28일 새전북신문 참조)
선교사들은 떠났어도 진료는 이어져
기독교 전파사업을 병행하면서 운영되던 구암병원은 1941년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의료 선교사들을 체포, 감금하고 강제로 추방하면서 문을 내린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일제는 1940년 11월16일 국내 선교사의 절반에 가까운 160명의 선교사와 자녀 49명을 추방했다. 이후 각지에 있는 선교병원은 한국인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운영권을 이양했는데, 일제는 이 병원들을 계속 감시, 탄압했다. 특히 선교부가 소유한 병원은 '적산'이라 하여 몰수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병원에 신사 설치를 의무화하여 기독교인 의사들이 신앙적 양심을 포기해야 병원사업을 할 수 있었다. 서양 의료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병원이 문을 내리자 한국인 의사였던 홍복근은 서래장터 물문다리 옆(중동 서래산 아래) 함석집에 '구암병원' 간판을 걸고 개업하였다.

군산시 명산동 유곽시장(명산동 시장) 근처에 있었던 구암병원. ⓒ 조종안관련사진보기


서래산 아래는 중동과 경암동의 경계로 빈촌이었다. 아프면 굿을 하거나 점집을 찾던 빈민들이 홍복근의 구암병원 덕에 서양 의술을 이해하고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이후 구암병원은 명산동 유곽시장 근처(지금은 공영주차장)로 이사하여 1982년까지 진료하다 문을 닫았다.  암교회와 마주하고 있던 '고려제지'(페이퍼코리아) 사택에 살면서 몸이 아플 때마다 회사 통근버스로 진료를 받으러 다녔다는 정창훈(61세)씨는 가끔 옛날 생각이 난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고려제지 직원 가족들은 진료비 걱정 없이 아무때나 다녔습니다. 지금의 건강보험증 비슷하게 카드에 체크해두었다가 아버지 월급에서 제했어요. 그래서 조금만 다쳐도 병원에 갔지요. 몸에 빨간 '아까징끼'(머큐로크롬액) 바르는 게 자랑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정씨는 "구암병원은 기와를 얹은 2층 건물이었고, 입원실도 몇 개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고난도 시술이었던 맹장수술을 했을 정도니까 규모가 꽤 컸던 것 같다."면서 "조수가 같은 동네에 사는 나(羅)씨 아저씨여서 단골 환자가 많았는데 이제는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며 안타까워했다.  (출처- 군산의 첫 서양병원, '구암병원'에 얽힌 사연 - 오마이뉴스)

 

<광주기독병원> 제3대 원장

광주기독병원

 

광주기독병원은 1905,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놀란(J.W.Nolan)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1904년에 한국에 도착해 목포시에서 의료선교를 하다가, 1905 11 8일 광주로 넘어와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의 임시사택에서 진료소 시설을 준비한 후 11 20일 오후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진료소 문을 열고 9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이 후 우월순(Dr. R. M. Wilson; 2대원장)가 광주기독병원(제중병원)을 건축하고, 부란도(Dr. L. C. Brand; 3대원장), 고허번(Dr. H. A. Codington; 5대원장), 이철원(Dr. R. B. Dietrick; 7대원장), 여계남(Dr. J. K. Levie; 치과의사), 유수만(Dr. D. H. Nieusma; 치과의사), 서서평(Miss E. J. Shepping; 간호사), 변마지(Miss M. F. Pritchard; 간호사) …… 등 광주기독병원에서 봉사했던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열정과 헌신적 삶이 녹아 있으며 이러한 선교사들의 사랑으로 나누고 섬기며 희생하는 밀알정신과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은 오늘의 광주기독병원에 고스란히 전해져 있으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광주기독병원은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 지역사회를 지키면서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지역민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최선을 다하면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였다. 개원초기부터 광주제중병원을 통해서는 일반적인 질병을 치료하였고 광주나병원을 통해서는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면서 치료 후 자활할 수 있도록 직업교육과 함께 그들의 생활터전을 제공해 주었다1927년 우월순 선교사가 나환자들과 함께 여수 애양원으로 집단이주한 후 1930년부터 3대 원장인 부란도(L.C.Brand) 선교사는 결핵퇴치 사업으로 밀알정신을 이어가게 되었으며 과로로 인해 쓰러져 순교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1940년 신사참배 문제로 일제에 의해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병원이 강제 폐쇄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출처-광주기독병원)

광주 제중원 (광주기독병원 뿌리)

1911년 그라함병원(제중병원)  (출처 : 의학신문(http://www.bosa.co.kr)

 

<부란도 선교사 묘지,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지>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광주광역시 양림산 일대는, 1900년대 초까지, 광주시내 어린아이들이 죽으면 내다 버리던, 공동묘지 풍장터였다. 그러다가 1904, 선교사들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양림산은, 호남 지역 선교의 중심지로 변한 곳이다. 지금 이 자리에는, 호남신학교가 있다. 그러던 이곳에, 선교사 묘원이 만들어진 것은, 1909년 오웬 선교사가 병으로 순교하자, 이곳에 매장하면서부터이다. 원래는 오웬, 유진벨, 서서평 등 선교사와 그 가족 22기의 묘만 있었지만, 2010 23기의 묘비가 추가로 세워졌다. 호남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숨져, 양화진과 전주에 안장된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묘비를 동일한 모양과 크기로 재현해, 추가로 세워서, 지금은 총 45기의 묘비가 있다. 돌비마다 이역만리 선교지에서, 고귀한 자기 생명을 바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사연이 새겨져 있다. 그중 1913 4 26일과 27일 하루 차이로, 숨져 나란히 누워있는 어린 남매의 묘비는 보는 이의 애틋함을 더해 준다.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부란도 선교사 묘지

부란도 선교사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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