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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의 신전, 베수비오 화산 (이탈리아 폼페이)

타종교신전/로마신전

by baesungsoo 2013. 1. 2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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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Pompeii)                (이하 출처- http://gurida_polo.blog.me/20155156082)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 연안에 있던 고대도시이다. 지금은 내륙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의 관문에 해당하여 농업,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였으며, 제정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피서,피한의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다. 폼페이의 기원은 매우 오래 되었으며, 처음에는 오스키인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다. BC 470 ~ BC 424년경에는 에트루리아인이 차지하였고, 그 뒤 BC 80년까지는 삼니트인들이 도시를 지배하였다. 제정로마 초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폼페이는 고대도시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인구는 2만 ~ 5만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인구의 계절적 변동폭이 크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에서는 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63년 2월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전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 재건되었으나,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m 두께의 화산력과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렸다.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잊혀졌다. 16세기 말부터 소규모 발굴이 시작되고 1748년부터 본격 발굴에 착수하여 꾸분히 발굴이 계속되었으며, 옛 시가의 거의 절반 정도가 발굴 되었다. 벽화를 포함한 초기의 발굴품은 대부분 나폴리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가급적 현지에서 복원한다는 방침이다. 전성기에 갑자기 멸망하였으므로, 당시 로마 도시의 일상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었으며, 그것들은 상당히 쾌락적이고 현세향락적인 도시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폼페이의 많은 벽화를 통하여 유품이 적은 헬레니즘 회화를 엿볼 수 있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인근에 위치한 폼페이.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출처-폼페이 화산 폭발 도망치다..2000년만에 2명의 시신이 나왔다 (daum.net)

 

 

폼페이 화산 폭발 도망치다..2000년만에 2명의 시신이 나왔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인근에 위치한 고대 도시 폼페이에서 화산 폭발로 숨진 남성 두 명의 유해가 발견됐다. 폼페이는 한때 고대 로마에서 가장 번성했지만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

news.v.daum.net

 

폼페이 (Pompeii) 어촌, 당시 폼페이는 사르누스강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폼페이 (Pompeii) 포럼

 

칼리굴라 아치를 통과하면 나오는 넓은 잔디밭이 있는 광장이 나온다. 이곳은 폼페이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생활의 중심지인 포럼이다. 지금은 잔디밭으로 되어있는 광장을 중심으로 각종 신전과 공공건물이 이 주위에 밀집되어 있다.

 

 

 

 

 

 

 

 

 

 

 

 

 

 

 

 

 

 

 

 

 

 

폼페이 (Pompeii)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seoulpr7555/526)

 

 

폼페이 (Pompeii)

 

 

폼페이 (Pompeii)

 

 

폼페이 (Pompeii)

 

 

폼페이 (Pompeii)

 

 

폼페이 (Pompeii)

 

 

 

 

각각 다른 조각의 우물들 

 

 

각각 다른 조각의 우물들 

 

 

각각 다른 조각의 우물들 

 

 

각각 다른 조각의 우물들 

 

 

각각 다른 조각의 우물들 

 

 

창녀촌의 춘화

 

 

창녀촌의 춘화

 

 

창녀촌의 춘화

 

 

창녀촌의 춘화

 

 

창녀촌의 춘화 

 

<폼페이의 고대 신전들>

 

 

폼페이 (Pompeii) 주피터 신전    

 

주피터신전은 모든신전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치하고 있다. 주피터는 Juno, Minerva와 함께 신들의 최고의 위치에 서있었는데 이를 반영하듯이 주피터신전의 플랫폼은 높이 세워져 있고 이위에는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그그림들은 성상 안치소입구인 현관에 있으며 각측면을 따라 6개의칼럼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주피터의 제단은 사원입구의 밖에 위치하고 있다.주피터사원은 Pompeii가 79 A.D.에 파괴되였을 때 매우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62 A.D.지진에도 에도 손상을 입어서 현재까지 복구가 진행중이다.62 A.D 지진으로 주피터신전의 조각상들은 왼쪽으로 무너져 내렸는데 이것은 Lucius Caecilius Iucundus 집에서 조각한 것이었다.

 

 

폼페이 (Pompeii) 주피터 신전 

 

 

폼페이 (Pompeii) 주피터 신전 

 

 

폼페이 (Pompeii) 주피터 신전 

 

 

폼페이 (Pompeii) 주피터 신전 

 

 

폼페이 (Pompeii) 주피터 신전 

 

 

폼페이 (Pompeii) 주피터 신전  

 

 

폼페이 라레스 신전(로마 고유신),

 

 

폼페이 라레스 신전(로마 고유신), 가정의 수호신들인 라레스 푸블리치 동상들의 유적.

 

 

폼페이 라레스 신전(로마 고유신), 가정의 수호신들인 라레스 푸블리치 동상들의 유적.

 

 

폼페이 라레스 신전(로마 고유신),  

 

 

폼페이 라레스 신전(로마 고유신),  

 

 

폼페이 아폴론, 디아나 신전           (이하 출처- http://gurida_polo.blog.me/20155156082)

 

 

폼페이 아폴론, 디아나 신전 

 

 

폼페이 아폴로, 디아나 신전

 

 

폼페이 아폴로, 디아나 신전 

 

 

폼페이 아폴로, 디아나 신전 

 

 

폼페이 아폴로, 디아나 신전 

 

 

폼페이 아폴로, 디아나 신전 

 

 

폼페이 아폴로, 디아나 신전 

 

 

아폴론신전의 디아나(아르테미스) 여신상

 

아폴론 신전은 48개의 칼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이 사원의 가장신성한 부분은 그 성상 안치소로 1미터높이의 플래폼으로 만들어져있다. 성상안치소 그 자체는 30개의 칼럼들에 의하여 둘러싸여있고 그칼럼에는 신과 각종 의례에 대한 모습을 담은 조각상들이새겨 있다.그 제단은 성상 안치소입구 밖에서 있었습니다. 첫번째 신전은 BC 6 세기경에 지워졌으며 화재 이후에 BC 530 - 10년에 석조 신전으로 대체되었다. 이 신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인 높게 쌓아올린 재단을 첼라라고 하고 신전에서는 화살을 쏘는 모습으로 서 있는 아폴로 신과 사냥의 여신 디아나(아르테미스)를 모신다. 예전에는 머큐리 신에게도 제사를 올렸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도시의 의원들에의해 이름붙혀진 이오니아 칼럼은 성상 안치소에옆에 있었다.또한 해시계는 이 기둥의 꼭대기에 있었다. 2개의 청동제 조각상들 이사원에 있다이것은 아폴로와 그의 자매를 조각한것으로 옆의 사진들에서볼 수 있다.

 

 

아폴론 신

 

 

아폴론 신

 

 

아폴론 신

 

 

폼페이 (Pompeii)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제단

 

Vespasian 사원은 폼페이에서 로마제국의 예식에 대한 중요성을 반영하듯이 포럼의 가장 중요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사원의 성상 안치소는 건물의 중앙에서 뒤쪽 높이 세워지 플랫폼에 위치해 있다.이사원의 그 제단은 성당입구 밖에 있다.  Vespasian의 사원의 제단이며 흰색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있다. 이것은 황소를 제물로 바치기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로마제국의 전통적은 신전의식 행사였다.  

 


베스파시아누스 [Vespasianus, Titus Flavius, 9.11.17?~79.6.24]

 

로마의 황제(재위 69~79)이다. 사비니 리에티 출신. 트라키아에서 군대생활을 하고, 39년 프라이토르(법무관), 51년 콘술(집정관)이 되었다. 66년 말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황제 네로가 파견한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현지에 가서 잇달아 전과를 올렸다. 네로가 죽은 뒤 혼란 속에서, 69년 동방의 여러 군단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였고, 발칸지방 여러 군단도 지지를 표명하였다. 우선 부하를 로마로 진군시키고, 유대 반란 뒤처리를 아들 티투스에게 맡겼다. 한편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로마에 입성하여, 원로원의 황제 즉위 승인을 받았다. 중후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국가의 위신회복과 내란의 손해복구에 힘썼다. 71년 유대 반란의 평정귀환식을 가졌다. 한편 재정의 정리 ·개선을 꾀하며, 신전 ·플라비우스투기장(鬪技場: 콜로세움)을 건설하고, 정복한 지방의 로마화를 추진, 제국의 재건에 성공하였다. 죽은 뒤 두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가 차례로 황제가 되어, 플라비우스왕조를 이룩하였다.

 

폼페이 바실리카                  (이하 출처- http://gurida_polo.blog.me/20155156082)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

 

 

베수비오 화산      (아래 사진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259052)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평원의 나폴리 만 위로 솟아 있는 활화산이다. 1980년에는 화구구(火口丘)의 높이가 1,280m였으나, 대규모로 분화할 때마다 높이가 많이 달라진다. 해발 약 600m 지점에서 솜마 산으로 불리는 반원형의 산릉이 시작되어 북쪽에서 화구구를 둘러싸면서 1,132m의 높이에 이른다. 솜마 산과 원추 화산 사이에는 지간테 계곡이 있다. 화구구의 정상에 있는 깊이 300m, 폭 600m 정도의 큰 분화구는 1944년의 분화로 생긴 것이다. 베수비오 주변지역과 이 산의 아래쪽 비탈에 200만 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한다. 나폴리 만 연안을 따라 공업도시들이 있으며, 산의 북사면에는 소규모의 농업 중심지들이 있다. 베수비오는 지금으로부터 20만 년이 조금 안 된 홍적세 말기에 처음 생겼다. 비교적 역사가 짧은 화산이지만 수세기 동안 활동을 하지 않다가 79년에 대규모의 화산 폭발을 일으켜 폼페이 시와 스타비아이 시가 화산재와 화산력(火山礫)으로 뒤덮이고, 흘러내린 진흙에 헤르쿨라네움 시가 파묻혔다. 나폴리 서쪽 지역에 있었던 작가 플리니우스가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보낸 2통의 편지에 그당시의 대참사가 잘 묘사되어 있다. 79~1631년에 화산이 몇 차례에 걸쳐 폭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확인된 연도는 79, 203, 472, 512, 787, 968, 991, 999, 1007, 1036, 1631년이다. 특히 512년에 일어난 화산폭발은 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가 베수비오 산록의 주민에게 납세의무를 면제해주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수세기 동안 휴지상태에 있은 후, 점차 강도가 심해지는 지진이 6개월 동안 연속 일어나다가 1631년 12월 16일 엄청난 화산폭발이 일어났다. 이때 화산의 산록에 있던 마을들이 많이 파괴되었으며, 약 3,000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또한 용암이 바다까지 흘러내렸으며 재가 하늘을 며칠 동안 검게 뒤덮었다. 1631년 이후에는 화산의 분출형태가 바뀌면서 화산활동이 계속되었다. 이 화산은 휴지기와 분출기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 휴지기에는 화구가 막히는 반면, 분출기에는 화구가 계속 열려 있다. 1660년과 1944년 사이에 이같은 주기가 약 19번 있었다. 분출기 막바지에 일어나는 아주 격렬한 화산 분출은 1660, 1682, 1694, 1698, 1707, 1737, 1760, 1767, 1779, 1794, 1822, 1834, 1839, 1850, 1855, 1861, 1868, 1872, 1906, 1944년에 일어났다. 분출기의 기간은 6개월~30년 9개월로 다양하며, 휴지기의 기간은 18개월~7년 6개월이다. 베수비오 화산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된 것은 18세기말이다. 1845년 해발 600m 지점에 관측소를 세웠으며, 20세기에는 여러 지점에 많은 관측소를 설치해 화산학적인 측정을 하고 있다. 베수비오의 사면에는 포도원과 과수원이 많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는 '라크리마 크리스티'라는 상표로 알려져 있고, 특히 고대 폼페이에서는 포도주 단지에 베수비눔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온통 죽은 참나무와 밤나무로 덮여 있으며, 북쪽에는 솜마 산의 사면을 따라 정상까지 숲이 연결되어 있다. 서쪽 기슭에는 작은 숲들이 여기저기 나타나다가 해발 600m 지점에서부터 금작나무로 뒤덮인 기복이 심한 고원이 전개된다. 이곳에는 79년의 대폭발로 인해 생긴 분화구가 막혀 있다. 더 높이 올라가면 거대한 화구구의 사면과 솜마 산의 안쪽 사면의 지표는 거의 불모지로 되어 있는데, 휴지기에는 이곳이 초원성의 덤불로 뒤덮인다. 이곳의 토양은 매우 비옥하다. 1631년의 분출이 있기 전인 오랜 휴지기간 동안에 분화구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고, 방목된 가축들이 물을 먹던 호수도 3개 있었다. 사면의 식생(植生)은 분출기에는 화산 가스 때문에 모두 죽어버린다. 1906년의 화산폭발이 있은 뒤, 격렬한 화산폭발 후 항상 흘러내리는 진흙더미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산사면에 나무를 심었으며, 이 나무들은 토양이 비옥해 빨리 자랐다. BC 73년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불모의 솜마 산 정상에서 프라이토르(법무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게 포위당했을 때 이곳은 야생 포도넝쿨로 뒤덮인 험준한 바위들이 벽처럼 둘러선 넓고 평평한 함몰지였다. 스파르타쿠스는 포도넝쿨 가지를 꼬아 만든 밧줄로 경계가 소홀하던 분화구 가장자리의 틈새를 기어올라가 탈출에 성공했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된 그림들을 보면 이 산은 79년의 폭발 이전에는 봉우리가 하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퍼온글)

 

 

화산 폭발 상상도 

 

 

나폴리항에서 본 베수비오산       (출처-http://blog.daum.net/sunghwa/15853511)

 

 

나폴리항에서 본 베수비오산

 

 

나폴리항에서 본 베수비오산 

 

베수비오 화산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625939), 2010.2.5. 사진

 

베수비오 화산        (출처- cafe.daum.net/zaratravel/3m97/23),

 

 

베수비오 화산 정상        (출처- http://blog.naver.com/letin6749/130141073432)

 

 

베수비오 화산

 

베수비오 화산         (출처-

cafe.daum.net/zaratravel/3m97/23

), 

 

 

베수비오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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