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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나교 사트룬자야 산 사원도시(서인도)

타종교신전/자이나교사원

by baesungsoo 2005. 5. 2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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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트룬자야의 산악 사원도시, 팔리타나 부근

 


카라타라바시·투크의 사원군, 사트룬자야산

 


비말라바시·투크의 메인·스트리트, 사트룬자야산

 


비말라바시·투크의 가장 안쪽에 서 있는 아디슈와라 사원, 16세기

 

서인도 사트룬자야산의 「사원도시」

 

구자라트주의 파리타나라는 마을에서  산을 올라가기 시작하여 2시간 가까이 걸어 산 정상에  도착하면  920개에 달하는 자이나교 석조사원의 당탑(堂塔)이 산 정상 빽빽하게 들어 차 있다. 사원도시는 남북의 2개의 봉우리와 그 사이의 계곡으로 이루어지고, 사원군은 <투크>라고 불리는 클러스터(cluster)마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요새화 되어 있다. 북쪽 봉우리는 카라타라바시·투크를 비롯한 6개의 투크로 이루어지고, 계곡부는 모티샤와 바라바이의 2개의 투크로 이루어지지만, 남쪽 봉우리는 전체가 하나의 투크를 형성하며 비말라바시·투크라고 불린다. 이 남봉의 투크 문을 들어가면 양측에 다수의 대소 사원군이 나란히 서있는 메인·스트리트가 계속되고 메인·스트리트의 제일 안에 있는 아디슈와라 사원이 있다. 반대 북쪽 봉우리에는 사원군이 있다. 전체 사원의 스타일은 거의가 북방양식의 시카라 형식인데 카주라호의 사원 등과 다른 것은 만다파(홀)의 지붕으로서, 엎어 놓은 종 같은 작은 것이45도 경사진 모임지붕을 덮고 있는데 이것을 <삼바라나(Samvarana) 지붕>이라고 부른다.  아디슈와라 사원은 960년에 창건된 것으로서 현재의 것은 1530년에 개축된 것이라고 한다. 자이나 교도는 사원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늘 수선하고 재건하면서 새로운 집을 짓기 때문에 시대를 특정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이들 사원의 반 정도는 근세 이후의 것으로서 중세에는 훨씬 수가 적었을 것이다고 생각된다.

 

자이나교의 이상과 산악 사원도시

그런데 자이나 교도는 왜 이러한 「산악 사원도시」를 만드는 데에 그렇게 열성적이었던 것일까? 그 제1의 원인으로는 산악신앙을 들 수 있다. 인도에서는 예로부터 산악신앙이 성행하였고, 사원의 구성을 신들의 거처로서의 성산과 유사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우주의 중심을 이룬다고 하는 메르산(수미산)이나 시바신의 거처로서의 카일라사산이 그 대표이지만, 자이나교로서는 그러한 전설상의 산 이외에 현실의 성산을 순례하는 것을 공덕으로 생각하여 그러한 성지(티르타(Tirtha))에 옛부터 사원을 건립한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이교도에 의한 사원파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11세기 가즈나 왕조의 마흐무드에 의한 침공 이래 많은 자이나 사원이나 힌두사원, 불교사원이 무슬림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이것을 종교적 박해라고 해석한다면 조금은 사실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닐 것 같다. 이슬람은 대체로 이교도에게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정복한 토지를 약탈하는 것은 전쟁에서 늘 있었고, 또한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하여 무슬림의 예배장소를 확보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정복지의 석조사원을 해체하여 그 부재를 모스크에 전용한 것이다.  본질적으로 열주(列柱) 홀인 모스크를 짖기 위하여는 기둥이 많은 자이나 사원이 더 없는 좋은 재료였다. 아쥬메르나 델리 그리고 아마다바드에는 그 전형적인 예가 보인다. 이슬람으로서는 우상숭배가 엄격히 금지되기 때문에 그러한 모스크에서는 기둥이나 보의 조각에서 우상 부분만을 깎아내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구조나 인도식 돔천장 등은 그 대로이기 때문에 현저하게 자이나·힌두적인 이슬람건축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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