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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헨조다로 불교 유적(파키스탄)

타종교신전/불교사원

by baesungsoo 2005. 6. 1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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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 전체가 사원으로 생각되는 구조이다

 


유적지 전경

 

서쪽의 성채와 동쪽의 시가지가 일정한 규격의 흙 벽돌로 질서 있게 세워져 있다. 포장 도로 사이에 배수 시설이 완비된 2·3층의 주택들이 있고, 집집마다 우물이 있고, 수세식 화장실의 하수는 도로의 배수로와 연결되어 있다.

 


사원으로 생각되는 성채 유적지, 후에 탑파 중심으로 불교 신전이 있었다

 


성채의 입구

 


성채의 탑파, 후에 세워진 불교신전

 

요새 유적 정상의 탑파는 모헨조다로를 얼핏 불교유적으로 착각하기 딱 알 맞았다. 1922년 이 유적을 처음 조사했던 영국 고고학자 R D 배너지도 모헨조다로를 불교유적으로 보고 탑파 주변을 발굴했을 정도였다.  실제 AD 200년쯤 쿠산왕조시대의 동전이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탑파 주변을 더 깊이 파들어가서 생전 보지못했던 인장(印章)한 점 을 발굴해냈다. 그 인장은 바로 세기적 유물로, 모헨조다로가 인더스문명 유적 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제공한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모헨조다로는 BC2500∼1700년까지 8백년동안 번영을 누렸던 도시다. 그러니까 요새유적의 탑파는 모헨조다로가 멸망한 이후 1천9백여년이 지나고 나서 파괴된 모헨조다로 유적지위에다 쌓아올린 불교유적인 것이다. 어떻든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다른 세계가 거의 신석기시대를 살 무렵에 계획된 도시를 건설했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도시 면적은 어림잡아 4천8백여㎡를 웃돌았을 것으 로 보고있다. 오늘날 모헨조다로 유적은 편의상 네 블록으로 나누어 블록마다 고유부호 를 붙였다. 블록의 부호는 발굴자들 이름에서 약자를 따다 만든 것인데,요새 유적은 SD구역으로 되어있다. 탑은 쿠샨왕조시대의 것으로 아래에 있는 유적들보다 훨씬 뒤에 만들었다. 탑의 주변은 중요한 유적들이 많은데 大목욕탕이라든가, 곡물창고, 의회당등이 있다. 그러나 공중목욕탕은 분명한데 다른 유적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목욕탕과 주위 건물들 사이의 길은 매우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곡물창고, 목욕탕, 주택단지 등

 

모헨조다로에서는 사원으로 생각되는 성채의 언덕 위에 대욕장, 승원, 회의장, 대곡물창고 등의 공공시설 또는 지배자를 위한 시설이 있었다. 대욕장의 북쪽 작은 길 건너편에 소욕장이 2열로 늘어서 있는데, 이 소욕장은 신관들이, 대욕장은 일반시민이 각각 의례를 행하기 위하여 목욕재계하는 데에 사용했다고 생각된다.

 


대중 목욕탕

 

길이 12m,너비 6.9m,깊이 2.4m의 벽돌탱크가 설 치되었다. 욕조바닥 벽돌의 가장자리를 석고로 모르타르한 대욕탕은 방수처리 가 완벽했다. 욕조의 물은 세 개의 우물로부터 공급받는 상수도시설과 물을 빼내 흘려보 내는 배수및 하수도 시설도 갖추었다.  정방형 도시 서편의 공공시설 구역에 있는 큰 목욕탕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도 각종 설이 대립하고 있다. 세로 12m, 가로 7m, 깊이 2.5m인 이 대목욕탕 양편에는 갱의실로 보이는 수많은 방이 있다. 한때 학계는 귀족들의 수영장으로 보았으나 목욕탕 주변에서 아프라사스 신상(神像)이 발굴됨에 따라 고고학자나 문명사(文明史)에 관심을 둔 전문가들은 이 건물을 종교집회를 위한 성소(聖所)로 보았다.이곳이 종교의식을 행한 곳이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아프라사스신은 모권사회의 상징으로 '거룩한 창녀'를 겸한 여신. 따라서 목욕탕은 무녀와 창녀들의 '거룩한 영업장'이며 수많은 방 역시 매춘실로 보고 있는 것이다.

 

파키스탄 모헨조다로 유적


모헨조다로는 ‘죽음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파키스탄의 인더스강 서쪽 연안인 신드 지방의 라르카나 지구에 있다. 1921∼1931년 J.H.마셜, E.마케이 등이 발굴하였고, 1950년에는 R.휠러도 조사하였다. 도시는 남북으로 주축이 된 큰 통로에 의하여 바둑판처럼 구획되었고, 서쪽의 중앙에는 높게 기단(基壇)을 쌓은 성채가 있다. 동쪽의 시가지는 4개의 큰 통로에 의해 9블록으로 구획되었고, 다시 각 블록은 몇 개의 직교하는 작은 길로 나누어져 각 호(戶)가 배치되었으며, 가옥은 벽돌로 지었다. 성채는 성벽으로 둘러싸였는데, 높이는 최고 12 m이고 남북으로 긴 모양이며, 규모는 430×230 m 정도이다. 성채 안에는 사원으로 생각되는 대규모의 건물, 큰 욕장(浴場) ·곡물창고 ·회의장으로 추정되는 건물 등이 있는데, 특히 욕장은 욕통의 크기가 19×7.5 m, 깊이 2.5 m이다. 그 성격은 공공용(公共用)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정치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성채 ·시가지와 함께 배수설비도 완비되어 있어 각 호에서의 배수는 지하의 배수로에 의하여 큰길의 본하수도로 흐르도록 되어 있다. 이 면밀한 도시계획은 벽돌의 크기나 자 ·저울추의 출토에서 볼 수 있는 도량형의 규격화와 함께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졌음을 추측하게 한다. 그 밖에도 토기 ·동기(銅器), 아직 해독되지 못한 문자를 새긴 인장(印章), 장신구 등의 유물이 있다.

인도'란 말의 고향이랄 수 있는 신두는 그러나 지금의 인도 땅에 있지 않다. 파키스탄의 '신드(Sind)'주가 그 주인공이다. 그곳에는 정말 인더스 강이 흐르고 인더스문명의 실재를 증명하는 모헨조다로(MohenJo daro) 유적도 있다. 인더스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 등과 함께 세계 4대 고대문명을 이룬다. 발생시기도 이들과 거의 비슷한데, 성격상으로는 메소포타미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인지 건축물과 도로는 규격벽돌(길이 28cm, 너비 14cm, 높이 18cm)로 축조되었고, 찰흙을 구워서 만든 원통형 인장(印章)을 사용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바빌론 정도를 제외하면 그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 도시유적이 없는 메소포타미아문명과는 달리 인더스의 모헨조다로는 다행스럽게도 그 모두를 보여준다. 아직까지 해독되지 않은 인더스문자로 벽면을 장식한 박물관을 지나 마주하게 된 드넓은 모헨조다로유적은 바둑판처럼 잘 짜여진 도로, 다듬은 돌로 마감한 수로(水路)와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풀장처럼 생긴 대 목욕탕, 불에 탄 밀이 남아 있는 창고 터, 주택가에 식수를 공급했던 우물 터, 상수도와 하수도를 따로따로 두고 1층은 욕실과 창고로, 2층은 부엌과 거실로 이용한 2층 구조의 민가주택 등을 지금껏 간직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모헨조다로는 이처럼 메소포타미아나 고대이집트처럼 신전 또는 최고 권력자의 건축물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일반 백성들의 생활공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거기다 안전과 위생, 시민들의 편리를 우선 고려한 흔적까지 역력하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인더스사회는 권위적이지 않고 민주적이었으며 시민 모두가 빈부 격차가 없이 풍요로운 생활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모헨조다로유적은 4000년 전의 인류의 지혜를 보여주는 산 교육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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