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마니교와 투르판 베제클릭(천불동) 석굴 유적지

타종교신전/중국,한국,투르판 등

by baesungsoo 2005. 12. 24. 12:12

본문

 

 

베제클릭 사원

 

베제클리크 석굴은 위구르 어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란 뜻이다.  지금껏 발굴된 석굴은 83 개로, 그중 벽화가 일부라도 남은 것은 40여 개뿐이다. 굴을 만든 때는 6세기 국씨 고창국시대부터 7세기 당·서주시대를 거쳐 13세기 원나라 때까지인데, 전성기는 10세기를 전후한 회골(위구르) 칸국시대다. 석굴은 파라미어와 서하어, 위구르어 등으로 쓰여진 숱한 불경 사본과 여러 시기에 그려진 천불도를 소장한 불교문화의 보고다. 특히 왕가 전속 사원이 된 회골 칸국시대의 공양상과 경변도(經變圖), 보살도 등은 장엄의 극치를 이룬다.

 

베제클릭 천불동 사원

 

절벽에 굴을 파고 입구에 문을 만든 다른 석굴에 비해 이곳은 둥근 돔 형식으로 지붕을 만들어 장식을 했다. 그래서 굴이라 부르지 않고 장식된 집이라 했나보다. 당시 석굴 중에는 가운데에 주로 예불공간인 중당이 놓이고, 이를 회랑이 둘러싼 구조인 것이 많다. 중앙의 천장은 둥근 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펜으로 그린 그림처럼 섬세한 선으로 묘사한 중국 미술의 영향을 받은 그림과 명암과 양감을 강조하는 위구르 및 서역양식의 그림이 있었다.

출처-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97082

        오마이뉴스 조수영 기자, 2007.3  투르판 여행기 

 

투르판 토욕구 천불동 석굴

 

베제클릭 석굴 마니교 그림, 10-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석굴은 마니교 연구자들의 이목을 끌기도 한다. 고비사막 북쪽에 살던 위구르인들은 9세기 중엽 고창(투르판)으로 옮겨와서 신봉하던 마니교를 퍼뜨렸는데, 그 생생한 자취가 여기에 남아 있다. 석굴에는 위구르어로 쓴 마니교 경전이 보전되어 있고, 삼신광명수(三身光明樹) 같은 마니교 성수가 그려져 있으며, 마니동상(높이 9㎝)도 발견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오타니 컬렉션’ 승려 탐험가 오타니 조선총독부 기증, 고양보살상 등 투루판 명품만 600여점


투르판 보물들의 상당수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물려받은 것인데, 보통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한다. 스타인·르콕 등과 더불어 20세기 초 실크로드를 답사했던 일본 승려 오타니 고즈이(1876~1948)와 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3차례 조사 끝에 수집한 유물들 중 일부다. 오타니는 탐험 뒤 재정난에 시달리자 구하라란 상인에게 유물 일부를 팔았고, 구하라가 1916년 이를 다시 총독부에 기증해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 중앙아시아실에 전시중인 투르판 유물들은 오타니 컬렉션 소장품(1500여 점) 가운데 40%로 가장 많다. 베제클리크, 토욕구 등 석굴 벽화 조각들과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부장품·생활유물들이 주종인데, 세계적 수준의 컬렉션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9~12세기 투르판을 지배한 위구르인들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는 서원화들과 마니교 관련 회화들의 가치는 지대하다. 서원화는 중앙부의 큼직한 과거불 앞에서 위구르족 상인, 왕 등이 미래 성불하겠다는 서약을 바치는 그림인데, 투르판이 중세 동서교역 중심지로 큰 재력을 쌓으며 번영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베제클리크 15굴에서 절취해온 10~12세기 공양보살상의 경우 열다섯 주제 서원화의 조각 그림인데, 가장 아름다운 서역 보살상으로 첫손꼽힌다. 민병훈 학예관은 “안목 높은 학승들이 교리상 중요한 벽화 모티브를 골라 뜯어왔기 때문에 소장 벽화들은 미술사적 의미가 특출한 명품들”이라고 말한다. 아스타나 고분 출토품들은 한인 왕조인 국씨 고창국 시대의 유물들로 묘표,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 직조유물 등 다양한 부장품들을 망라한다. 중국·서역 문화가 지역 특색에 맞게 교류·융합된 양상을 대변하는 기준 유물이란 점이 주목된다. 특히 무덤 천정에 붙였던 중국 신화의 창조신 복희와 여와의 삼베 그림은 채색이나 구도 등이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유명하다. 이밖에 카라호자에서 출토된 13~14세기께의 꽃무늬 바구니도 이후 출토사례가 보고되지 않은 희귀품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우리가 박물관에서 수시로 보는 투르판 유물들 또한 반달리즘의 악몽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유물들 대부분은 오타니 탐험대의 3차 조사 주역인 절집 사무라이(무사) 출신의 요시카와가 보물찾기하듯 털어온 것들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투르판 토육 천불동 마니교 벽화, 10-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투루판은 혈통을 달리하는 다민족 지역으로 변했다. 오늘날 50만 인구 중에서 위구르족과 회족, 한족이 주류를 이루나, 비율은 변화 중이다. 1949년부터 2004년까지 55년 사이 위구르족은 90%에서 70%로, 회족은 9.6%에서 7.6%로 줄어든 반면 한족은 1%에서 22%로 급증했다. 그밖에 여러 소수민족도 공존한다. 문화적 다양성의 폭이 더욱 넓은데, 그 중심에 종교가 있다. 고대에는 주류인 불교에 유교나 마니교,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등의 동서 종교가 합류되었다면, 중세부터는 이슬람교 일색이다. 시내 서쪽으로 10㎞쯤 떨어진 ‘버들잎 모양’의 교하고성은 2천년 전 차사전국의 수도로 남북 80m, 동서 40m에 달하는 불교 사원구역이 있다. 중앙탑 중심으로 승방, 소탑들이 배치된 양식은 인도의 사라나르 불적이나 나란다 탑군 등에서 보이는 초기 인도 양식이다. 교하고성 동쪽 40㎞ 지점에 있는 국씨 고창국의 도읍터 고창고성의 궁전 부근 절터에서도 인도식 복발탑(覆鉢塔:탑 노반 위에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처럼 둥근 탑)이나 방형탑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모두 인도에 원류를 둔 불교의 동전을 말해주는 유적 유물들이다. 시 중심에서 동쪽으로 60㎞쯤 가면 수바스강을 낀 ‘토욕구’란 계곡이 나타나는데, 그 동서 양쪽에 94개의 동굴이 있다. 3세기 만들어진 이 동굴군은 1879년 발견되었으나, 지난해 10월에야 처음 공식 개방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불교와 마니교의 공존이다. 흔히 마니교 동굴이라고 하는 42동을 보면, 원래 불교의 관상(觀想)을 위한 굴로서 지금도 동서벽에는 이와 관련한 벽화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후일 마니교가 들어오면서 중앙벽에는 나무가지마다 금박장식을 한 ‘생명의 나무’ 49개를 비롯해 온통 마니교 관련 그림들이 들어차게 되었다. 이 굴에서는 마니교 경전도 발견되었다. 고창국과 당나라 때 무덤떼인 아스타나 고분군에서는 무덤 456기가 발굴되었다. 거기서 총 1만근이 넘는 2700여 건의 문서가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300여 건은 토카라어나 소그드어, 위구르어로 씌어진 불교와 마니교, 경교 등 종교 문서다. 216호분 묘실 정면에는 유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풀이한 6첩 병풍이 그려져 있다. 그중 4첩은 성인도로서 왼쪽부터 앞가슴이나 등에 ‘옥인(玉人)’, ‘금인(金人)’, ‘석인(石人)’, ‘목인(木人)’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공자묘의 네 성인을 말하는 것으로 흰 옷 입은 옥인은 청렴결백을, 입을 삼중으로 막은 금인은 언행신중을, 석인은 돌처럼 결심이 굳어 흔들리지 않는 결심부동을, 목인은 거짓이 없이 바르고 곧은 무위정직(無僞正直)을 뜻한다

 

마니교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拜火敎]에서 파생되고, 기독교와 불교의 여러 요소를 가미한 종교로서, 교조(敎祖) 마니의 이름을 따서 마니교라고 불렀다. 마니에 관한 사실(史實)은 불확실한 점이 많으나, 일찍이 조로아스터교에 귀의하여 신의 계시를 받고, 30세 때 예언자로서의 자각을 한 후,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깨달은 바를 전파,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분파하였다. 그 후 조로아스터교의 박해를 받고 화형을 당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 즉 《생명의 책》 《샤브라칸》 《신비의 책》 《마니서한(書翰)》(교훈집) 《거인(巨人)의 책》 등이 마니교의 성전(聖典)이 되었는데, 14세기 마니교 소멸 후에 없어져 그 내용을 알 수 없었으나, 20세기에 와서 유럽 학자가 그 사본을 발견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려졌다. 마니교(摩尼敎)의 출처나 기원, 그리고 교리는 약간의 모호성을 지니고 있으나 마니교가 3세기 중엽에 자기 자신을 예언자라고 자처하며 새로운 교리를 선포하여 마침내는 추방당한 페르시아 사람인 마니(Manes, A.D. 215-275)와 관련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에게 알려진 바 그의 견해들은 어떤 terebinthus에서 끄집어낸 사상으로 페르시아 이원론과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Marcionism)와 기독교의 서로 다른 요소들을 혼합시킨 것이다. 거기에는 선과 악이란 두 가지의 기본적이며 서로 반대되는 원칙이 있는데, 세상과 인간 속에 내재하는 선행의 요소는 전자로부터 나오고 악의 요소는 후자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악의 지배로부터 선의 요소들이 방해되는 것으로 만물은 절대저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구원과 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도 이 목적에 공헌한 사람 중의 하나로서 지금은 마니에 의해 계승되었다. 또한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가현적(假現的, docetic) 요소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으며, 부활을 부정하고(그러나 전생(轉生)은 비마니교도의 운명이다) 엄격한 금욕 훈련을 강요하는 것은 놀랄 일도 못되며 세속의 권위와 물리적인 권세 역시 비난받았다. 마니(Manes)의 추종자들은 평신도와 선택자란 주된 두 집단으로 조직되었었는데, 선택자 계층에는 그리스도와 열 두 사도를 모방하여 한 명의 지도자와 열 두 명의 수령들로 구성되었다. 기독교의 진리에는 위배되는 교리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마니교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고 추종자들도 얻었으며, 어거스틴조차 젊은 시절에 한 때 매료되었을 정도였다. 어거스틴은 그가 9년 간 머물렀던 마니교 시절 이원론적 유물론적 범신론의 영향을 받아 악에 관한 입장 또한 유물론적 측면에서 선과 대립하는 실체로서 견지했다. 곧 마니교 시절 어거스틴이 갖고 있었던 악에 관한 입장은 마니교의 신관을 반영한 것으로서 악 또한 물질적인 실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마니교의 이원론적 사유체계는 어거스틴에게 죄의 문제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명백하며 편리한 현실도피의 길을 제시하였다. 도한 어거스틴이 마니교 시절에 가진 악에 대한 입장은 선과 악을 대립적인 영원한 실체로 이해하는 마니교의 이원론적 선악관을 따르게 했다. 결국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를 디딤돌로 삼아 성서적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까지 그는 마니교의 이원론적 유물론적 실체론의 범주에서 악에 관한 사유를 갖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마니교에 몸담았던 시절에 가졌던 선악관을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서로 상반되는 두 물체를 가정하게 되었으니 이 둘은 다 무한하되 악은 비교적 더 좁고 선은 더 광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니교는 당시 교세가 급격히 발전하여 중앙아시아 일대와 로마제국에까지 확장되고, 다시 인도·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나 13∼14세기에 쇠퇴, 소멸하였다. 그러나 마니교는 동서 양세계를 문화적·종교적으로 결부시키는 가교적 역할을 한 공로가 크다. 마니교가 끼친 영향은 중세와 종교 개혁 시기의 종파들과 현대의 여러 이교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마니교(Manichaeism)의 신학사상


마니교는 주후 3세기에 페르시아에서 발생하였던 이원론적인 종교운동이었다. 마니교는 오랫동안 기독교의 이단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사실상 그 자체는하나의 독자적인 종교였다. 마니교는 그 교리들과 철저한 조직 및 제도의 일관성 때문에 그 전체 역사를 통해서 통일성과 독특한 성격을 유지하여 왔다. 더욱이 마니교는 그 성장에 있어서, 특히 그 목적과 초기의 의욕으로 미루어 볼때, 세계적인 종교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실로 마니교는 하나의 교회였으며, 신도들은 그들 자신을 일컬어 '거룩한 종교', '거룩한 교회'라고 하였다. 마니(Manes)는 그의 선행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조로아스터교와 석가모니,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부분적인 진리들을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는 진정한 '보편적' 종교를 창시하고자 하였다.다른 형태이 영지주의처럼 마니교도 인간이 처한 상황 안에 내재하고 있는 번민에서 발생되었다.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이란 그 인간에게 용납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으며 철저하게 악한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그 자신이 육체와 시간과 세상 속에 노예처럼 속박되어 있음을 느낀다. 또한 그는 악에 휩쓸리고 끊임없이 위협을 받으며 더럽혀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만일 인간이 이와 같이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체험할 수 있다면, 이는 그가 본질적으로 현재 상황보다는 우월한 존재이며, 육체와 시간, 그리고 세상 안에서의 체험과는 무관한 존재이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의 현재 상황은 일종의 타락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인간은 그 자신이 이 세상에 대해 본질적으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 자신도 또한 이 세상과는 무관하신 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오직 선과 진리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이러한 고통과 기만을 원하실 리 없다. 따라서 이런 책임은 악하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원리의 것으로 돌릴 수밖에 없게 된다. 모든 형태의 영지주의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과 하나님께 대한 이와 같은 지식은 구원의 확실성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상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다시 한번 아는 것이며, 전에 육체와 물질로 혼합되어 무지와 자의식의 부족으로 가려졌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마니교에서 이와 같은 자아 인식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초월세계에서 온 빛의 한 분자로 보며, 또한 현재의 상태가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원하며 내재적인 연결에 의하여 높은 세계와 언제까지나 통합되어 있는 존재로서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본질적인 요점이다. 영혼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를 분유한다. 즉 영혼은 아래 세상에 내려온 하나님의 일부이다. 이런 관계로 인간은 하나님께서그 자신의 일원들을 구원하는 데 관심을 잃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게 된다. 즉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회복시켜 그들을 하나님 자신 안으로 통합하실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그 자신을 구원하신다. 즉 하나님은 구원자이시자 동시에 구원을 받는 존재이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구원받는 구세주'이시다. 인간도 역시 '구원받은 구원자들'이다. 구원받는 요소는 인간의 영혼이며, 구원하는 요소는 영, 즉 이성(nous)이다. 인간을 새로이 발견된 nous와 연결시켜 주는 내적 자각 즉 영지(gnosis)와 예언자들이 인간에게 알려준 현시는 인간에게 그 인간 자신의 현재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인간을 영혼이 타락하기 이전의 과거 상황과 악이멸망하고 인간의 근본적 상황이 복구될 미래의 상태와 연결시켜 줄 수도 있는하나의 과학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지는 인간으로 하여금그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그가 왜 타락했는지, 그리고그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도록 해준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영적 측면 때문에 신성을 공유하고 육체적 측면 때문에 세속적 존재인 까닭에, 인간의본질과 운명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우주의 본질과 운명에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영지는 신화적인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영지는 마니가 여러 이야기와 무수한 인물들 및 상세한 묘사들로 가득 채우고 또한 다소 인위적인 관계들 가운데 모든 요소들을 연결시키는 대칭적인 구성형태를 따라 배열한 복잡한 조직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러나 마니교의 신화를 통틀어 살펴볼 때 끊임없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오직 한 영웅과 한 상황이 있다. 즉 물질 속으로 타락되었다가 nous에 의해 다시 해방되는 영혼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신화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 국면으로 나누어진다:

(1) 두개의 근본적으로 별개의것들인 본질들, 즉 영혼과 물질, 선과 악, 빛과 어두움의 분리에 의한 완전한 이원성이 존재하였던 과거의 시기,

(2) 두개의 본질들의 혼합이 시작되어 계속되는 현재에 해당하는 중간 시기,

(3) 미래에 이 본래적인 분리가 다시 일어나는 후기 시기이다.

따라서 마니교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원론적인 교리인 '두 원리'와 '세개의 시기'를 인정하는 것이다. 태초에 두개의 대립적인 본질인 절대적 선과 근본적 악, 즉 빛과 어두움이 있었다. 이 두 본질 모두가 창조되지 않았고, 영원하며, 동등한 것이고 각기 별개의 지역에 존재한다. 하나님의 왕국은 북쪽.동쪽.서쪽에 있으며 악의 왕국은 남쪽에 있다. 하나님 왕국의 지배자는 '고귀하신 아버지'이시며 악의 왕국의 지배자는 '어두움의 왕자'이다. 하나님 왕국은 다섯개의 '처소들' 즉 하나님의 일원들(오성.이성.사고.반성.의지)로 이루어지며 또한 수많은 아이온들(aeons)로 차 있다. 악의 왕국은 다섯개의 '지옥들'(연기의 세계, 화염의 불,파괴적인 바람, 역청, 어두움)이 층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괴물의 악마적인모습을 한 다섯 우두머리, 즉 '지배자'(Archon)들이 각 지옥을 관장한다. 이곳에는 또한 각각 다른 다섯 형태의 지옥 생물들로 꽉 차 있다. 지옥의 모든 곳은 무질서와 어리석음과 혐오와 악취로 가득 찼으나 반대로 하나님 왕국은 평화와 이해와 순결과 사랑이 그 특징을 이룬다. 중기는 격변과 함께 시작되었다. 어두움이 빛의 왕국을 침범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은 '생명의 어머니'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그 자신으로부터 불러낸 그 자신의 아들 가운데서 인간화된 그 자신의 영혼에 의해서 그 위험과 싸우고자 하였다. 그의 아들은 '최초의 인간'이었다. 최초의 인간이 그의 전신갑주인 다섯 아들(다섯개의 빛의 요소: 공기.바람.빛.물.불)과 함께 지옥의 심연으로 내려가자 악마들은 그의 아들들을 멸망시켜 삼켜 버렸다. 이리하여 빛의 본질 중 한 부분은 물질의 본질에 혼합되고 물체에 종속되었다. 그때 이후로 하나님은 신성한 본질을 분리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데 스스로 전력을 다하고자 하였다. 최초의 인간은 그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였다.이 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귀하신 아버지'는 두번째 창조를 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빛의 친구', '위대한 건축가', 그리고 '생명의 영'을 불러내었다. 생명의 영은 그의 다섯 아들(빛의 장식, 명예의 왕, 빛의 아다마스, 영광의 왕,아틀라스)들을 데리고 어두움의 지역 경계에 이르러 통곡하며 외치자 타락한 인간의 열렬하고 확신에 찬 응답이 울려 퍼졌다. 이러한 부름과 응답은 두 거룩한 실체, 즉 위격이 되었다. 생명의 영은 다시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내부에까지 들어왔다. 그는 바른손을 내밀고 최초의 인간으로 하여금 그 손을 잡게 하여(이 악수가 마니교회 내에서 의식적이고 상징적인 몸짓이 되었다) 어두움 속에 갇혀 있는 그를 들어 올렸다. 최초의 인간은 빛의 낙원인 그의 하늘나라를 되찾았다. 즉 그는 맨 처음으로 타락하였다가 이처럼 처음으로 구원받았는데,이는 인간의 타락의 모델이자 구원의 모델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영혼을 어두움 속에 남겨둔 채 떠나 왔다.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만드셨다. 이 일을 맡은 자는 역시 생명의 영이었다. 그는 그의 다섯 아들들의 도움으로 악의 통치자들을 벌하였는데, 그들의 피부를 벗겨 하늘을 만들었고, 그들의 뼈로 산을 만들었으며, 그들의 살과 배설물로 땅을 만들었고, 열개의 하늘과 여덟개의 땅으로 된우주를 건설하였다. 그는 물질과 혼합되어 있는 빛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세개의 부분으로 나누었다. 물질과 전혀 접촉이 없었던 부분은 해와 달을 형성하였고, 물질이 약간 혼합된 부분은 별을 발생시켰으며, 나머지는 해방시키는데 많은 기술과 시간을 요하는 제3의 물질이 되었다. 이것은 특히 제3의 창조, 즉 '제3의 전달자'로부터 파생되는 실체들과 관련된 작업이었다. 제3의 전달자는 그 자신이 어두움 속에 갇혀진 빛을 이끌어 내고 다듬어서 순화시켜 나가는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정도까지 이 세상을 구원하였다. 우주의 기계는 바람과 물과 불 그리고 특히 태양과 달의 '바퀴'들로 만들어졌다. 매달 첫 15일 동안, 해방된 본질-모두 영혼들인 빛의 미립자들-은 '영광의 기둥'에서 달에 이르도록 치솟아 오르는데, 달은 이 힘의 팽창으로 보름달이 된다. 매월 마지막 15일 동안 이 힘은 달에서 태양으로 옮겨 가고 태양에서 다시 '새 낙원'으로 옮겨 간다. 그러나 제3의 전달자는 또한 덜 기계적인 해방수단을 실천하였다. 그는 태양 가운데서 나신으로 나타났다. 즉 남성지배자 앞에서는 여자의 모습으로, 여성 악마에게는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그는 남성 통치자들로 하여금 음욕을 품어 사정케 함으로써 그들이 삼켰던 빛을 정액과 함께 땅에 떨어지도록 하였다. 물 속으로 떨어진 씨앗은 바다 괴물이 되었는데, 빛의 아다마스가 칼을 들고 달려들어 이 괴물을 찔러 해치웠다. 땅에 떨어진 씨앗은 다섯 그루의 나무가 되었는데, 이들로부터 모든 식물들의 싹이 돋아난다. 유산한 여자 악마들과 그녀들의 유산한 아이들은 땅에 떨어져 나무의 싹들을 집어 삼킴으로써 정액과 방출된 빛을 융합시켜 더욱 많은 악마들을 번식시켰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빛의 일부는 이렇게 땅 위에 함께 모여 있다가 흩어져서 식물과 악마의 몸 속에 갇히게 되었다. 구속과정을 방해하기 위하여 물질은 아샤클룬과 남라엘로 하여금 유산된 자들의 모든 자손을 집어 삼키버리도록 촉구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몸 안에 빛이 증가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서 이 한쌍은 성교하여 아담과 하와를 낳았다. 아담은 애초에 구세주이신 영광의 예수에 의하여 운명지어졌던 동물적인무의식의 상태로부터 해방된 것으로, 예수는 아담의 의식을 일깨워 주었고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의 영혼이 신적 기원을 갖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주었다. 이 이야기는 '최초의 인간'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와 유사한 것으로서 영지에 의하여 얻어지는 구원의 전형적인 예로서 간주되었다. 불행하게도 아담의 후손은 물질의 계획에 따라 결합과 출산의 유형을 계속 보존해 가고 있다. 절대적인 금욕을 지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빛나는 영혼을 강압하는 육체적 어두움 안에 부끄럽고 고통스럽게 연속적으로 종속된 상태는 종말에 가서야, 즉 신화의 제3 운동 직전에 가서야 끝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묵시적 재난기와 최후의 심판이 끝나게 되면 지구는 1,468년 동안 불타게 될 것이다. 아직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빛의 분자는 하늘로 올라가며, 이 세상은 전멸되고, 물질은 악마와 함께 광대한 지옥에 갇히고 말 것이다. 빛과 어두움의 절대적인 분리가 다시 확립될 것이다. 이 우주개벽설의 결과는 인간이 그의 누스, 즉 살아있는 자의식의 덕택으로 신성을 분유하게 된다는 사실로 나타난다. 구원은 인간 자신 그리고 그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식을 다시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영지 특히 마니와 그의 교회의 계시에 의하여 성취된다. 인간은 죽어서 본래의 빛의천국으로 돌아간다. 만일 인간의 영혼이 계속해서 육체의 더러움 속에 빠져 있고 물질적 욕구의 노예가 된다면, 그는 스스로 육체로 다시 태어나는 운명을 받게 된다. 따라서 간음, 출산, 소유, 경작이나 추수, 살인 및 육식이나 음주를 금하라. 이들은 모두 자아를 오염시키는 것이며, 육체 안에 갇혀진 빛을 더럽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원론을 주장하는 유사 이단들


중세 유럽의 대표적인 이단 종파라 하면 그노시스파, 카타리파, 보고밀파, 알비파, 파울리키우파등이 있다.

 

그노시스 파

그리스어로 '그노시스'는 지식 특히 영지(靈知)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적 주지주의(主知主義)라고 주창하고 이성 편중에, 보통 그리스도교 신앙지식 이상의 신비적 신앙지식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신앙적 태도는 신앙의 실제를 벗어나 사변(思辨)에 빠지고 말았는데, 그 결과 그리스의 철학 및 동양의 여러 종교관념과 그리스도교 교리와의 혼합이 생겨나, 단순 소박한 신앙심을 현혹시켰다. 그 대표자로는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이 처음이고, 2세기의 사토르닐로스(Satornilos), 바실리데스(Basilides), 3세기의 발렌티누스(Valentinus) 등이 있다. 그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창조주와 예수가 말한 아버지 하느님을 구별하여, 전자를 데미우르고스(제작자란 뜻)라는 하급 신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또 우주가 이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영(靈)과 물질을 이원적(二元的)으로 대립시켜 놓고 그리스도가 취한 육신은 참 육신이 아니고 가짜였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가현설(假現說:Docetism)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가짜로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영(靈)의 힘으로 육체를 벗어나 영화(靈化)되는 데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정통파로부터 배척되었다. 신약성서에도 등장하는데, 공동 서간의 하나인 유다의 편지에서는 교회 공동체가 참된 신앙으로 돌아가 이 그노시스 이단에 대항해서 철저하게 싸울 것을 권고한다. 3세기에는 쇠퇴하였다.


카타리파

청정무구(淸淨無垢)를 의미하며, 물질을 악의 근원이라 해서 신과 대립시키는 이원론(二元論)과 육식 ·결혼생활, 재산의 사유 등을 부정하는 극단적이고도 엄격한 금욕주의를 내세웠다. 11세기 후반 불가리아의 보고밀파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은 종파(宗派)가 남유럽에 나타나, 특히 1140년부터 30년간에 걸쳐 그 교세가 급속히 신장하여 오늘날의 독일 지역에 해당하는 라인란트, 남북 프랑스,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까지 퍼지는 등, 교세를 확장한 결과12세기 말까지 11개의 주교구(主敎區)가 개설되었다. 교황청에서는 이를 이단으로 단정하고 여러 차례 교회 성직자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했으나 효과가 없자, 교황 이노첸시오 3세는 1181∼1229년 3차례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한다. 그 결과 이 카타리파는 이때부터 붕괴되어 15세기 초 완전히 소멸되었다.


보고밀파

10세기 중엽 동방정교회(正敎會) 개혁운동인 지방적 슬라브운동과 파울리키우파의 마니교적 이원론(二元論)을 결합해 보고밀(그리스 명은 테오필로스)이 창시한 종교단체로, 보그밀파라고도 한다. 교리는 선과 악 두 원리의 존재를 인정하는이원론을 바탕으로 한다. 즉 선의 원리인 천사·영혼들의 세계와 악의 원리인 물질의세계로 이분해 물질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점에서는 카타리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따라서 결혼 ·성교 ·육식 등 육체나 물질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죄악시하였으며, 철저하고 엄격한 금욕 생활을 지킴으로써 '완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방교회에서 시작하여 11∼12세기에는 비잔틴 제국 각지로 퍼져, 서방교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 널리 퍼져 가난한 농부들과 직공들, 심지어 귀족들에게도 많은 공감을 일으키며 가타리파(카타리파)로 이름을 떨쳤으나 서방교회의 지속적인 탄압과 도미니크회 ·프란체스코회 같은 엄격한 탁발 수도회의 출현과 그 활약으로 13세기 말 거의 소멸하였다. 그러나 12세기 후반, 세르비아를 거쳐 보스니아에 이른 보고밀파는국민적 종교로까지 발전해 14세기까지 '보스니아교'로 존속하는 등 1150년경부터 프랑스 ·이탈리아의 카타리파 또는 알비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13세기 초에는 흑해에서 대서양까지 석권함으로써 최성기를 이루었다. 불가리아에서는 14세기까지 지속되다가 이슬람화하거나 발칸 지방의 민간신앙에 흡수되었다. 아직까지도 동방 교회의 신학 중에는 보고밀파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파울리키우파

7세기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 이단파로 마르키온파 및 마니교의 직접적인 영향하에 현세를 지배하는 악한 신과 앞으로 다가올 선한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이원론(二元論)을 교지(敎旨)로 하며, 창도자는 콘스탄티누스 시르와누스라고 전한다. 이들은 성서(聖書)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나 구약성서 및 신약 성서 중의 "베드로의 편지"를 거부했다. 또한 물 ·빵 ·포도주·기름 등으로 행하는 성찬례나 지상의 교회, 교회 조직의 위계(位階)를 부정하였다. 이 파는 당초 비잔틴제국 내에 정치적 ·군사적 반란을 일으켰으며, 콘스탄티누스 3세, 유스티니아누스 2세 등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지요. 9세기 후반에 이르러 다시 부활하여 그리스 ·소아시아에서 흥성했으나 872년 바실리오 1세의 원정대에게 제국 밖으로 추방당했고, 일부는 불가리아 근처 국경 경비원으로 배치되었다. 이 파의 교리는 10세기 초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보고밀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알비파(카타리파의 추종세력)

발칸반도, 북부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등지를 거쳐, 12세기 중엽 프랑스 툴루즈 지방의 알비에 전파되면서 세력을 크게 떨쳤다. 마니교적 이원론에 바탕을 둔 교리로서, 그리스도교의 신은 영적인 것만을 창조하였으며, 반신(反神)인 악마는 신에게 반기를 든 인간을 물질 속에 가두었으므로, 인간은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금욕적인 계율을 지켰으며, 대중 앞에서의 성서낭독과 통과의례 등을 중시하였다. 특히 통과의례를 통하여 일반신자는 완전한 자, 즉 ‘카타리’가 되었다. 교회에서는 이들의 이단에 맞서 이단심문제도를 만들었으며, 또한 이들의 융성은 프란치스코 수도회나 도미니크 수도회 같은 탁발수도회의 발달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