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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판 베제클릭 석굴 사원(천불동, 중앙아시아)

타종교신전/불교사원

by baesungsoo 2013. 1. 26.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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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동(千佛洞),  키질 가하(Kizilgaha)              (출처- http://blog.daum.net/ds3goj/15851338)

 

키질 천불동은 바이를 질러 흐르는 무자터강 북쪽의 암석산우에 있다. 동서로 약 2키로메터가량 석굴이 들어 앉았는데 우뚝우뚝 솟은 누각과도 같다. 키질 천불동에는 정리를 거쳐 번호에 든 동굴이 236개, 그중에서 70여개는 <정사>(절이라는 뜻)로서 중들이 정수하거나 경 읽는 곳이며 160여개는 불상을 공양하며 예불하는 <지제>(탑묘라는 뜻)로서 중들이 거처하는 작은 집, 화장한 재를 파묻어두는 나한굴 그리고 양식과 음식물을 저장해두는 창고 등이다. 키질 천불동의 석굴예술은 벽화가 위주이다. 많은 석굴의 전실,후실,사면벽,천정은 귀중하고 아름다운 벽화로 장식되여 있다. 어떤 동굴은 지어 바닥까지 아름다운 주단식 도안으로 되여 있다. 가장 큰 벽화는 높이가 16m 나 되며 가장 작은 벽화는 20-30cm 밖에 안된다. 벽화의 내용을 보면 크기가 같지 않고 자태가 각이한 부처와 보살 그리고 나한들이 앉았거나 서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가지 부처의 본생 이야기,불교의 전설이야기,경변도안,기악도,비천상과 민족적 특색을 가진 공양인 형상들도 있으며 사슴,곰,노루,토끼,뱀,용,소,말,양,방술 등 동물들의 형상이 있는가 하면 대량의 민간 풍속 그림과 대중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도 있다. 벽화의 경읽는 부처와 보살, 인물형상과 동물형상들은 모두 형상이 신통하여 생명력이 있는것 같은 실감을 준다. 거문고,생황,북,피리로 연주하는 악사들은 저마다 동작이 자연스럽고 자태가 생동하다. 천불동 입구에는 두개의 코스가 사진과 함께 붙어 있다.  서쪽과 동쪽 두 곳으로 나누어 있는데 서쪽 석굴에는 독일 탐험대가 천장의 비파 켜는 벽화를 보고 음악동(音樂洞)이라 명명했다는 38 굴이 있다

 

천불동               (출처- http://blog.daum.net/ds3goj/15851338)

 

천불동               (출처- http://blog.daum.net/ds3goj/15851338)

 

천불동               (출처- http://blog.daum.net/ds3goj/15851338)

 

천불동               (출처- http://blog.daum.net/ds3goj/15851338)

 

천불동               (출처- http://blog.daum.net/ds3goj/15851338)

 

천불동               (출처- http://blog.daum.net/ds3goj/15851338)

 

천불동               (출처- http://blog.daum.net/ds3goj/15851338)

 

천불동               (출처- http://blog.daum.net/ds3goj/15851338)

 

천불동               (출처- http://blog.daum.net/ds3goj/15851338)

천불동               (출처- http://blog.daum.net/ds3goj/15851338)

 


천불동(千佛洞)과 쿠처 출신 고승 구마라습 동상


키질 석굴 앞에는 이곳 쿠처 출신의 구마라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키질 석굴은 비파를 켜는 벽화가 있고 천장에 악천도(樂天圖)가 그려져 있어 독일 탐험대가 음악동(音樂洞)이라고 불렀다는 유명한 석굴도 있다. 특히 조선족 작가 한락연(韓樂然) 선생이 벽화의 고증에 참여하여 그의 글씨가 제10호굴 벽면에 크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석굴 사원 평면도

 

4굴 평면도

 

4굴 입면도

 

암벽 석굴 구조

 

석굴암 입구

 

원래 82개의 석굴은 지금은 42개만 남아있고 그나마 6개만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사진은 6개 중의 하나.  

 

벽화를 잔인하게 뜯어간 흔적. 칼과 톱을 이용하여 독일, 일본 등으로 싹쓸이 해 갔다

 

위구르인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후 이슬람 세력들이 들어와 벽화를 칼로 긁고 또 파괴했으며, 심지어는 눈알을 파내어 버렸다. 이들은 종교상 모든 형태를 부정했기 때문에 이란과 파키스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불상과 많은 유적들을 파괴했다. 게다가 1898년 러시아학자 클레멘츠가 석굴을 발견한 이래, 20세기에 이르러 독일 고고학자 르콕과 그륀베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네 차례 조사하며 위구르인 공양도, 사천왕도 같은 수백 상자 분량의 벽화조각들을 칼과 톱으로 무자비하게 떼어갔다. 이런 식으로 가져간 벽화들은 동굴 하나를 거의 완벽하게 옮겨 놓은 듯했다. 그러나 이 벽화들은 베를린 박물관에 있다가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뒤이어 일본 승려 오타니 탐험대와 아스타나 고분을 발굴한 영국의 스타인도 들러 남아있는 유물들을 하이에나처럼 쓸어갔다. 도둑들은 벽화의 외곽 둘레에 깊은 칼자국을 낸 뒤 뒤로 톱을 집어넣어서 벽에서 떼어냈다. 석굴들은 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벽에는 아직도 약탈의 잔인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뜯어간 유물은 현재 독일의 베를린박물관, 인도 뉴델리박물관, 러시아 박물관, 일본의 동경박물관 등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다.

출처-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97082

        오마이뉴스 조수영 기자, 2007.3  투르판 여행기  

 

이슬람 교도들은 벽화를 긁고, 심지어 눈알을 파내어 벼렸다

 

제 33굴의 각국사절도 

 

제33굴의 뒷벽에는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는 그림이 있는데 아랫부분은 없어지고 윗부분만 남았다. ‘각국사절도’라 불리며 그림의 왼쪽에는 보살과 호법신들이, 우측에는 각국에서 온 사절단이 있다. 동서 문화교류가 왕성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각 민족의 얼굴 생김새와 표정, 풍속 등이 잘 나타나 이곳의 상징적 벽화로 입장권에도 그려져 있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천불도의 단편 

 

투루판 보물들의 상당수는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물려받은 것인데 보통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한다. 20세기 초 실크로드를 답사했던 일본 승려 오타니와 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3차례 조사 끝에 수집한 유물들 중 일부다. 오타니는 탐험 뒤 재정난에 시달리자 구하라라는 상인에게 유물 일부를 팔았고, 구하라가 1916년 이를 다시 총독부에 기증해 오늘날에 이른다. 베제크릭과 토욕구 등에서 가져온 석굴 벽화 조각들과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생활유물들이 주종이다. 베제크릭 15굴에서 절취해온 공양보살상의 경우 가장 아름다운 서역 보살상으로 손꼽힌다. 또한 아스타나 고분 출토품 중에는 무덤 천정에 붙였던 중국 신화의 창조신 복희와 여와의 삼베 그림이 있는데 채색이나 구도 등이 뛰어난 걸작이다.

 

서원화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서원화는 석가모니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전 당시 부처로 부터 먼 훗날 부처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내용을 그린 것이다. 15굴에 과거불 이라는 벽화가 있으며 그 밑에 왕, 브라만, 상인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석굴 내 벽화(서원화 파편), 10-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투루판 베제클릭 석굴사원 부처의 서원화(誓願花)로 10~12세기 경의 작품이다. 자타카(本生經)을 표현한 그림인데 부처가 전생에 부처가 될 것을 서원하며 공양한 꽃이다.

 

15굴 서원화, 석가모니가 왕이었을 때, 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서원화의 일 부분으로 석가모니가 왕이었을 때의 모습이다. 

 

15굴 서원화, 공양하는 사람, 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서원화의 일 부분으로 그림 중앙의 부처를 향해 무릎을 꿇고있다.  오른쪽 아래 부분에는 당시의 부처 또는 과거불이 밟고 서있던 연꽃 대좌의 일부가 보인다

 

15굴 벽화 장막, 10-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15굴 벽화 장막, 10-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석굴 벽화 단편, 위구르 문자, 10-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석굴 벽화 단편, 위구르 문자, 10-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위구르어, 국립중앙박물관

 

 석굴 벽화

 

15굴 내 벽화

 

15굴 내 벽화

 

15굴 내 벽화

 

15굴 내 벽화

 

제 17굴 벽화     (출처- http://www.e-worldphoto.com/china) 

 

투르판 베제클릭柏孜里克 석굴

 

천산북로 상에서 예술적 경향을 드러내는 도시를 꼽으라면, 쿠차(500~700년대)와 투프판(650~1200년대)을 들 수 있다. 쿠차에 축조된 석굴 사원의 수많은 벽화들을 통해, 인도 및 이란의 영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지방 양식을 인도•이란 양식이라 칭한다. 인도적 요소는 불교 설화를 소재로 한 불화와 불상에 보이며, 이란의 영향은 장식품 및 의복 등의 세부 표현에 드러난다. 한편, 동쪽의 투르판 지방에는 사람들의 얼굴, 의복, 물건들에서 중국 영향이 보이지만, 오늘날 까지도 인구의 대부분이 위구르인(약 10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위구르 특징을 보이는 작품이 많이 있다. 따라서, 투르판의 베제클릭 설굴 벽화에는 위구르적인 소재가 많이 표현되어 있다.  베제클릭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을 뜻하는 말이다. 투르판 동쪽 57㎞에 위치한 베제클릭 석굴은 현재 83굴까지 확인되고 있는데, 그 중 벽화가 남아있는 굴은 50개이며, 벽화의 총면적은 1,200m에 달한다. 장방형의 기본 구조에 궁륭형穹窿形 천장 구조인 석굴이 많고, 백화는 내벽 전면에 장식되어 있다. 여기에 묘사된 인물의 모습과 복장은 중국풍과 더불어 위구르, 몽골식도 보이는데, 9세기 이후에는 대개 위구르인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벽화의 주제는 주로 불교적인 내용인데 그런 가운데 예외적인 그림도 존재 한다. 석굴 38호 벽화에는 나무 아래에 흰옷을 입은 마니교 신도들이 표현 되어 있다. 이는 위구르족이 고창高昌으로 이주해온 직후만 해도 주로 마니교도들이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예이다. 베제클릭 벽화의 불교 주네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에 서원화誓願畵와 천불도가 주를 이루고 있다. 베제클릭 회화에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중국 소재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가 표현 되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석굴 33호의〈석가열반도〉의 애도하는 제자상들은 비개성적인 안면 처리에서 탈피해 다양한 생동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어 주목되며, 석굴 16호의 〈기악도伎樂圖〉에 보이는 고대악기인 소홀뢰小忽雷, 또는 석굴 17호의 〈지옥변地獄變〉등의 경우는 중국 석굴에서는 흔하지 않은 독특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제4호(현20호)

4호굴 입구의 좁은 회랑 좌우 벽면에는 갖가지 서원도들이 그려져 있다. 15개의 주제로 된 서원화로서 모두 전생의 석가부처님의 과거불過去佛에게 공양을 올려 미래에 성불할 것을 보장받는다는 줄거리를 다채롭게 표현하였다. 이 그림들은 20세기 초까지는 잘 보존되고 있었으나, 독일의 그륀베델과 르콕, 일본의 오오타니, 러시아의 올덴버그, 영국의 스타인등이 차례로 드나들면서 벽화와 소조 불상들을 절취해 가 현재는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다.

 제 8호굴

7세기에 만든 것으로서 부처와 제자의 조상이 있고 벽화는 반쯤 손상이 되어 있다. 다행히 천장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비파를 켜는 그림이 있다.

 제9호( 현27호)

9호굴 벽화의 대부분은 독일의 르콕이 절취해서 베를린 박물관에 복원 진열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 때의 전재戰災로 모두 손실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서원도 15주제는 거의 완전한 모습이어서 서원도 연구에 기본이 되고 있지만, 실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정확한 연구는 불가능 하다.

(3) 위구르 왕자•왕녀상

베제클릭 벽화의 명품이라 할 수 있는 〈위구르 왕자, 왕녀상〉에서는 세밀학 묘사된 안면의 각 부위, 세심한 옷감의 문양 처리, 바닥의 양탄자 등의 사실적인 표현을 발견 할 수 있다. 〈위구르왕자回鶻王子〉는 베제클릭 제 9굴 중당中堂 문벽門壁안벽 오른쪽에 3인씩 3단에 걸쳐 그려진 남성 시주자施主者중의 일부 이다. 벽화의 세 사람은 모두 높은 관冠을 썼고, 관끈을 턱밑에서 매었으며 긴 머리카락을 등 뒤 허리께에까지 드리우고 있다. 가장 오른쪽의 사람은 수염 숱이 적은 왼편의 두 사람과는 얼굴빛이나 눈 꼬리의 치켜진 정도가 다르게 표현 되었는데, 이로 보아 이 인물은 다른 두 사람보다 고위의 위구르 귀족으로 시주자의 중심인물인 듯하다. 세 사람 모두 읍한 자세의 두 손에 꽃 한줄기씩을 잡고 있는데, 이 꽃줄기는 저들이 죽은 후에 더해진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앞의 인물 오른쪽의 여백에는 샤리족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이들은 고창에서 장기간 영화를 누린 위구르의 명족名族으로 전해진다. 베제클릭 제9굴 중당 문 벽의 안벽 왼쪽에 있는 3단의 여성 시주자상 가운데 제일 위의 단 부분에 있는〈위구르왕녀回鶻王女〉에는 각기 한줄기씩의 꽃가지를 읍한 두 손에 잡고 화면 왼편을 향하여 나란히 선 두 여성이 묘사되어 있다. 화면 오른편 위의 명문을 르콕이 해독 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름다운 왕녀의 초상화”라고 한다. 중앙아시아 회화의 대부분은 벽화의 형태로 남아 있다. 회화작품의 주제는 종교를 비롯한 제식祭式, 설화, 신화, 민속, 역사 등 매우 다양한데, 무엇보다도 종교에서는 불교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적 주제가 부각되었던 현상은 실크로드가 불교 전파의 통로였기도 하거니와 중앙아시아의 많은 유목민들과 지배자들이 불교를 받아들여, 이 지역이 이슬람화 되기 전까지는 불교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되어, 많은 사원이 조성되었던 사실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인도의 영향으로 석굴사원이 유행 하였고, 불교 자체의 교리를 시각적 언어로 표현한 벽화의 제작이 증가 되었던 것이다. 베제클릭 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중앙아시아 회화는 그들의 토착문화와 외래 요소, 헬레니즘 문화, 이란 문화, 인도 문화, 불교문화, 중국문화 등이 효과적으로 혼합된 독창적인 미술이라 할 수 있겠다. 

 제 10호 굴

이 굴의 벽면에 네모형태의 굵직한 글씨가 써있다. 거기에 한락연(韓樂然)이라는 이름이다

한락연 선생은 1898년에 태어나 1930년대에서 부터 1940년대 까지 중국에서 활동했던 화가라고 한다. 그의 생의 마지막을 이곳 키질 석굴에서 유물들의 고증에 전념하다가 1947년 우루무치에서 난주로 가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세상을 떴다.

 제 17호굴

17호 굴은 너비가 약 3m 가량 되고 길이가 약 7m 가량 되는 장방형으로 되였다. 뒤쪽 중간에는 천정에 닿인 정방형 기둥을 쪼아세웠다. 굴은 이 기중에 의해 전실과 후실로 갈라졌는데 전실은 높다랗고 널직하며 후실은 낮다. 기둥 양켠에는 각기 전실과 후실로 통하는 좁다란 복도가 있는데 이것은 부처를 공양하는 사람들이 예배때 사용하는 <지제굴>이다. 굴의 천정,사면벽의 복도,감실의 문미에는 아름다운 채색벽화가 그려 있다. 반원형으로 된 굴천정의 매개 능형네모칸에는 붉은 색, 남색, 녹색, 검은색 등 같지 않은 색갈로 그린 각이한 내용의 부처본생이야기 그림들이 있다. 이른바 부처본생이야기라는것은 바로 석가모니가 전세에 고난고행하며 적선적덕한 이야기이다. 인물, 화조,산수를 그린 화면들은 각기 한 이야기주제를 집중적으로 표현하였다. 불교경전을 반영하는 이런 본생도는 거즐천불동벽화의 정수이다. 이것이 기타 천불동의 본생도와 다른 점은 지루한 이야기들을 하나의 능형화면에 개괄시킨 그것이다. 석가모니가 생전에 원숭이무리를 사랑하고 몸을 바쳐 원숭이를 구한 미후왕의 본생이야기를 그림이지만 돈황 천불동은 16절지 크기나 되는 화면 2백여개로 반영하였고 키질 천불동은 하나로 반영하였다. 여기에서 키질 천불동의 벽화가 회화기교면에서 한결 영활성이 있고 생동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17호굴은 중형동굴로서 아주 작은 굴 천정에 38종의 본생도를 그려 놓았으며 <이야기그림중의 으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키질 천불동에는 현재까지 알아낸 본생도가 60-70종이나 되여 돈황,운강,용문 세곳의 본생도를 합한 총수보다도 두배 더 된다. 17호굴 벽화의 풍격을 보면 한왕조나 위왕조의 풍격과 근사하며 선이 굵고 소탈하다. 그림가운데의 인물이 수척하고 의관이 옛스럽고 소박한것을 보면 17호굴의 벽화는 키질 천불동에서의 초기작품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림들이 나타난 연대는 1800-1900년전까지 소급할수 있다. 47호굴,63호굴,175호굴,180호굴도 다 이와 유사한 풍격들을 가지고 있는것들이다. 그림중의 인물들은 얼굴이 위엄있고 눈에 광채가 돌며 입술이 불그스레하고 아래턱이 비대한것으로 보아 형상과 표정에 중시를 돌렸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를테면 80호 석굴의 벽화에 웃통을 드러내고 수건을 걸치고 어깨 나란히 춤추는 한쌍의 보살이 있는데 이 그림은 형상과 표정을 잘 나타냈다. 당왕조때의 화풍과 비슷한 69호굴의 벽화는 이미 거즐천불동벽화의 번성기에 이르렀다.

 

제 27호 굴

7세기에 만든 것으로서 불상이 놓일 자리가 여러 줄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불상은 보이지 않는다. 벽화는 거의 해손 되어 버려 약 5%에 불과한 것 같다.


제 32호 굴

천장에 벽화가 조금 있는데 검정색과 연녹색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머리에 뭔가를 이고 있는 장면이 있다.


제 34호 굴

태양신 굴이라고 하는데 천장에 부처가 그려진 벽화가 보인다.


제 38호 굴 음악동 (音樂洞) 

 

독일 탐험대가 천장의 비파 켜는 벽화를 보고 음악동이라 명명했다는 유명한 벽화이다.


제 42호 굴

한자로 靜而然 이라고 쓰여 있는데 맨 마지막 글자는 무슨 자인지 모르겠다. 한쪽에 이슬교도로 보이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제 47호 굴

높이 16.5m, 폭 7.6m의 대상굴(大像窟)이라고 하는데 불상은 없고 불상 자리만 있다. 호랑이의 그림도 보인다. 4세기에 만든 굴이라고 한다.


제 48호 굴

47호 굴과 마찬가지로 대상굴인데 보존을 위해서 그림 덧 씌우기를 하고 있다.


제 49호굴

불상 벽화만이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음악동에 관한 그림도 있다. 다름 아닌 비파를 켜고 있는 그림이다. 이 쿠처 악기가 일본 까지 전래되어 일본 정창원(?)에 있는 것과 흡사하다고 NHK 실크로드 다큐멘터리에 소개된다.

 

69호 굴

벽화는 기타 동굴의 벽화들과는 달리 흙땜을 하지 않고 직접 암벽에 그렸다. 사용된 안료로는 람동광,공작석,주사,양홍 등 광물안료와 투명한 안료들이다. 화법을 보면 수분이 벽에 스며들고 퍼지기 때문에 고루게도 색칠하고 두드러지게도 색칠하였다. 이것은 색이 진한 전통적인 벽화의 화법과 확실히 다르다. 효과면에서는 울룩불룩한 입체감을 가지고 있어 아주 미세한 질감도 똑똑하게 표현되고 있다. 69호굴 후실의 부처열반(부처나 고승이 죽었다는 뜻)상에는 많은 불교신자들이 슬피 울고 있는데 그들의 옷무늬와 근육이 슬픔으로 하여 떨고 있는듯한 감을 준다. 이것이 바로 우에서 말한 화법으로 그려낸 것이다. 동굴벽화의 내용을 보면 불상을 그린 화면과 불교교리를 보여주는 화면을 제외하고도 밭갈이,수렵,도자기제조,수레,배 등 많은 인간생활의 화상들이 있으며 그 가운데는 인물도 있고 자연경치를 안받침한것도 있다.

 

 제 175호굴

두폭의 이름난 벽화가 있는데 하나는 한 장대기에 메운 살찐 소 두마리가 보습을 힘있게 끄는 <이우태강>이고 다른 하나는 반바지를 입고 작은 모자를 쓴 농민이 <칸트만>을 휘두르며 기음을 매는 <경작도>이다. 그림에 나오는 사람의 옷차림,노동도구,노동방식을 보면 서진과 동지때의 귀자인들은 근대의 위글족과 아주 비슷하다.화면의 실감있는 생산정경은 동굴예술에서의 생활의 숨결이 맥박치고 있을 뿐만아니라 관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름없는 예술가들의 몸에서 풍기는 촌맛을 느끼게 하고 있다.

 (4) 17굴- 33굴  은 만신창이다. 원래 전면에 커다란 불상이 각각 좌우로 3좌씩 있었는데, 온데간데 없다. 천정 벽화도 거의 뜯겨 벽화 속 불상들의 눈은 몽땅 도려내어졌다.  20굴은 회골 칸국시대 공양상으로 유명한 굴이다. 중앙에 정방형의 중당이 있고, 그 주위에 좁은 회랑이 둘러있는데, 그 좌우벽에 서원을 주제로 한 왕이나 왕후, 귀족들의 공양도가 그려져 있다. 공양상마다 한문이나 위구르어, 산스그리트어로 방제(榜題: 제사받는 사람의 이름)가 쓰여져 있다. 공양도는 독일인 폰 르콕이 20세기 초 뜯어가 독일 베를린 박물관에 두었는데, 이 마저도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상당수가 불타버렸다고 한다. 회골 칸국의 후기 동굴벽화에 속하는 27굴은 내용상 앞의 20굴과 비슷하다. 역시 르콕의 분탕질에 걸려 텅 비다시피 되어버렸고 소조불상들의 눈도 성한 데가 없다. 게다가 무지한 현지인들이 청소한답시고 물로 알카리성 황토벽을 씻어내리다 벽이 그만 거무튀튀하게 변색되고 말았다. 31굴에는 동벽에 배를 타고 피안으로 가는 석가의 본행경도(本行經圖)와 열반경변도, 공양도가, 불단 정면에는 회골 칸의 공양도가, 서벽에는 복식 세밀도가 그려졌으나 지금은 거지반 없어졌다. 남은 부분은 뜯어가지 못하게끔 흙으로 덧칠해놓았다. 벽면 곳곳에 송곳으로 긋거나 갈퀴로 긁은 자국이 역력하고, 지금은 4장의 사진만 떼어간 자리에 오도카니 붙었다. 33굴 뒷벽에는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는 그림이 있는데, 아랫 부분은 없어지고 윗 부분만 남아 있다. 그림의 좌측에는 보살과 천룡팔부(天龍八部) 등 호법신들이, 우측에는 각국에서 온 100명의 왕자들이 도열해 있다. 왕자들의 눈만은 온전히 남았다. 마지막 굴인 39굴에서도 벽 한채를 아예 통째로 떼어갔는가 하면, 제단 속을 파헤치다가 아무 것도 없으니 그냥 되묻은 흔적도 보였다. 둘러보지 않은 나머지 굴들의 상황도 대채로 대동소이하다고 한다. 이처럼 베제클리크 석굴은 인위적 파괴를 당했다.  첫 장본인은 르콕을 비롯한 독일인들이다. 1902년부터 1914년 사이에 독일은 네 차례에 걸쳐 ‘탐험대’란 이름의 도굴꾼들을 투르판에 투입했다. 첫 탐험대는 베를린 민속학박물관의 인도부 부장 그룬베델을 대장으로 한 3명이었다. 대무기상 크루프의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던 그들이 예비조사에 불과했던 첫 탐험에서 46상자나 되는 유물을 챙겨오자 횡재의 꿈은 부풀었다. 급기야 황제와 크루프의 후원을 받는 재단이 설립되고 장기 탐험을 주관할 전문위원회도 만들어졌다. 그룬베델의 건강이 악화되자 위원회는 2차 탐험대장에 르콕을 임명한다. 베를린의 부유한 포도주 판매상 아들로 태어난 르콕은 영국과 미국을 전전하다 베를린 동양언어학원에서 아랍어, 페르시아, 산스크리트어 등의 동양어를 배운다. 마흔 두 살 때 처음 민속박물관에 무보수 견습생으로 채용된다. 그러다가 행운의 기회를 잡은 그는 1904년 9월 투르판으로 향한다. 그의 저서 <사막에 묻힌 중국령 동투르키스탄의 유물들>에는 이때의 행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책을 보면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중국 국경 부근에 도착한 그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러시아 영사의 말을 듣고 금화 1만 2천 루블을 넣은 주머니 위에 앉아 라이플 권총을 한손에 든 채 우루무치까지 간다. 약 두달 뒤인 11월18일 투르판의 카라호자에 도착해 약 4달간 머물면서 베제클리크 석굴을 비롯한 유적지들에서 유물 편취에 몰두한다. 베제클리크 석굴 밑 강가와 멀리 토욕구 석굴로 들어가는 어귀에 그가 머물었던 집터가 있다. 그는 10년간 하미에서 카슈가르에 이르는 신장 전역을 샅샅이 누비고 다녔다. 르콕을 비롯한 2차 탐험대는 103상자분의 유물을 뜯어갔고, 그후 그룬베델이 합류한 1905~7년의 3차 탐험에서는 128상자의 유물을 또 가져갔다. 르콕은 노획한 ‘기적의 전리품’에 대해 후일 양심의 가책도 없이 덤덤히 ‘성공담’을 회상하고 있다. “오랜 시간 힘들여 작업한 끝에 벽화를 모두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20개월 걸려 그것들은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했다. 벽화들은 박물관의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르콕은 극단적인 문명파괴자였다. 20세기 초반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지의 도굴꾼들이 투르판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일원에서 가져간 유물들은 유럽과 미국의 30여 개 박물관에 지금껏 ‘유물(流物)’로 유폐되어 있다. 영국의 스타인은 늘 경쟁자들을 조소하면서 독일인들은 ‘항상 떼거리로 사냥하러 다닌다’고 비난했다. 독일과 러시아간에는 유적 발굴을 둘러싸고 무력충돌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래서 영국의 피터 홉커크는 저서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이들 탐험가들을 겨냥해 듣기에는 좀 섬뜩하지만, ‘악마들’이라고 일침한다. 석굴의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민간신앙에 현혹된 일부 무슬림들은 불상의 눈을 모든 재앙의 근원인 이른바 흉안(凶眼: 아이눈 랏마)으로 착각한 나머지 통째로 도려내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오타니 컬렉션’ 승려 탐험가 오타니 조선총독부 기증, 고양보살상 등 투루판 명품만 600여점


투르판 보물들의 상당수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물려받은 것인데, 보통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한다. 스타인·르콕 등과 더불어 20세기 초 실크로드를 답사했던 일본 승려 오타니 고즈이(1876~1948)와 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3차례 조사 끝에 수집한 유물들 중 일부다. 오타니는 탐험 뒤 재정난에 시달리자 구하라란 상인에게 유물 일부를 팔았고, 구하라가 1916년 이를 다시 총독부에 기증해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 중앙아시아실에 전시중인 투르판 유물들은 오타니 컬렉션 소장품(1500여 점) 가운데 40%로 가장 많다. 베제클리크, 토욕구 등 석굴 벽화 조각들과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부장품·생활유물들이 주종인데, 세계적 수준의 컬렉션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9~12세기 투르판을 지배한 위구르인들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는 서원화들과 마니교 관련 회화들의 가치는 지대하다. 서원화는 중앙부의 큼직한 과거불 앞에서 위구르족 상인, 왕 등이 미래 성불하겠다는 서약을 바치는 그림인데, 투르판이 중세 동서교역 중심지로 큰 재력을 쌓으며 번영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베제클리크 15굴에서 절취해온 10~12세기 공양보살상의 경우 열다섯 주제 서원화의 조각 그림인데, 가장 아름다운 서역 보살상으로 첫손꼽힌다. 민병훈 학예관은 “안목 높은 학승들이 교리상 중요한 벽화 모티브를 골라 뜯어왔기 때문에 소장 벽화들은 미술사적 의미가 특출한 명품들”이라고 말한다. 아스타나 고분 출토품들은 한인 왕조인 국씨 고창국 시대의 유물들로 묘표,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 직조유물 등 다양한 부장품들을 망라한다. 중국·서역 문화가 지역 특색에 맞게 교류·융합된 양상을 대변하는 기준 유물이란 점이 주목된다. 특히 무덤 천정에 붙였던 중국 신화의 창조신 복희와 여와의 삼베 그림은 채색이나 구도 등이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유명하다. 이밖에 카라호자에서 출토된 13~14세기께의 꽃무늬 바구니도 이후 출토사례가 보고되지 않은 희귀품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우리가 박물관에서 수시로 보는 투르판 유물들 또한 반달리즘의 악몽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유물들 대부분은 오타니 탐험대의 3차 조사 주역인 절집 사무라이(무사) 출신의 요시카와가 보물찾기하듯 털어온 것들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불교


처음 불교가 전해진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1세기 중엽 한(漢)나라 때 서역(西域:티베트)지방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역지방은 옛날부터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요로에 있어 양쪽 문화의 접촉장소가 되어왔으므로 인도의 불교가 재빨리 서역에 전해지고 다시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서역지방에도 독특한 불교문화가 개화하였는데, 그 서역불교의 발자취는 둔황[敦煌]을 비롯한 여러 곳의 유적에서 엿볼 수 있다. 초전기(初傳期)에서 4세기까지를 중국불교의 제1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시대에는 서역방면으로부터의 내입승(來入僧)의 활약이 눈에 띈다. 즉 안세고(安世高) ·지루가참(支婁迦懺) 축법호(竺法護) 불도징(佛圖澄) 등이며 그들은 대승 ·소승의 경전을 번역하여 불교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를 넓히는 데 노력하였다. 중국인 불도(佛徒)로 주사행(朱士行) ·도안(道安) ·혜원(慧遠) 등이 나왔고, 특히 도안 ·혜원 등은 학문적이고 이론적이었던 불교를 실천으로써 이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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