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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예배당(Wesley's Chapel in City Road), 지하 박물관, 웨슬리 묘

성지순례/존웨슬리유적지(영국,미국)

by baesungsoo 2018. 3. 22.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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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채플        



런던 웨슬리 예배당은 세계 감리교회의 모 교회이다. 지금도 이 곳에서는 2백여 명이 예배를 드린다. 영국 여성수상 대처가 이 곳에서 결혼식을 하면서 기념으로 제단을 기증하였다. 또 이 예배당의 대리석 기둥 일부는 찰스 왕이 기증한 것인데 감리교 운동이 신앙운동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 개혁운동으로 이어져 영국 사회를 살렸기 때문이다. 웨슬리 예배당은 1778.11.1에 왕공 되었는데 설계는 조지 댄스가, 건축은 사무엘 투스가 하였다.  1779년 최초의 감리교 연회가 모였고 1881년에는 최초의 에큐메니칼 감리교 연회가 개최되었다. 3번의 화재로 인한 위험이 있었으나 무사하였고 2차 대전중에는 주위의 많은 건물들이 무너졌으나 웨슬리 예배당은 안전히 지켜졌다. (글 출처- 웨슬리 스토리)



웨슬리 동상  

 

웨슬리 동상은 아담스 엑톤(Adams Acton)에 의해 1891년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웨슬리의 한손에는 성경이, 다른 손은 축복을 하고있다 (글 출처- 웨슬리 스토리)

















김선도 목사(광림교회)  지하 웨슬리 박물관 리모델링에 많은 후원을 한 공로로 흉상을 만들었다.




존 웨슬리 예배당 내부          

 

웨슬리 채플은 1778년 건축가 조지 댄스가 설계했고 건축업자요 속회 인도자 겸 순회 설교자이기도 했던 사무엘 투스가 지은 예배당이다. 건축 당시의 내부는 매우 단순했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 기념 조형물과 스테인드 글래스가 덧붙여졌다. 영국 곳곳에 세워진 대성당(cathedral, bishop의 교좌가 있고 교구의 중심이 되는 성당)에 비하면 규모가 미미하고 예술적인 섬세함이나 장중미도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나름대로 소박미를 잘 간직하고 있었다. 웨슬리는 이 채플이 지어졌을 때 "완벽하게 산뜻하기는 하지만 훌륭한 것은 아니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중앙에 강단이 있고 뒤편으로 기념물, 양쪽으로 3개씩 6개의 기념비가 있으며 3점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보인다. 스테인드 글라스의 내용은 왼쪽으로 부터 "동방박사의 경배" " 사도적 위임" " 솔로몬의 포치, 현관입구" 이다. 웨슬리 당시 설교단은 15피트(약4.60m) 높이 였으며 1864년에 5피트로 낮아졌다.  















스테인드 글라스            

 

웨슬리예배당(City Road Chaple)에는 모두 19점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구약의 내용을 담고있는 것이 3점, 나머지 13점은 신약의 내용을 담고있다. 그리고 남은 3점은 웨슬리와 관련된 것으로  “웨슬리 형제의 회심창문(The wesleys conversion)"  이다. (* 북쪽벽, 제단을 정면으로 했을 때 왼쪽, 2층에 있다.)  존의 회심일(1738. 5. 24)에 쓴 찰스의 일기를 보는 듯하다. “열시 경, 형이 승리에 차서 동료들과 들어왔다. 그리고는 ‘나는 믿는다.’라고 외쳤다. 우리는 큰 기쁨으로 찬송을 했다.  그림 위쪽에 두 천사가 든 배너는 그들이 부른 찬송이 (찰스 웨슬리의 회심찬송) “놀라워하는 내 영혼 어디에서 시작할까(Where Shall My Wondering Soul Begin?)”임을 나타내준다.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쪽에 있는 부분이 찰스가 자신의 회심찬송을 작사하는 장면이다. 이전에도 찰스는 시를 쓰긴 하였지만 약 9000곡이나 되는 많은 찬송시를 지을 수 있었던 동기는 바로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림에서 찰스는 드레스 가운을 입고 있다. (실내인데다가 밤 늦은 시간이므로.) 당시 찰스는 올더스게이트 거리 바로 옆에 있는 존 브레이(John Bray)의 집에 머물고 있었고 여기에서 형보다 3일 앞선 5월 21일(성령강림주일)에 회심하게 된다. 이로부터 일년 후 찰스는 자신들의 회심을 기념하여 "For the Anniversary Day of one's Conversion"라는 곡을 지었는데 바로 "만입이 내게 있으면"이다. 1740년 Hymns and Sacred Poems에 수록될 때는 원래 18절로 되어 있었다. 그 중 1절에서 6절까지는 체험이 있기까지의 상황을 그렸다면 7절부터는 복음전파에 대한 내용이 표현되어 있다. (* 찬송가 23장은 7절부터 나와 있습니다.) 마치 교향곡의 서곡처럼, 이 찬송은 감리교찬송가에서 거의 1장에 있었다. 바로 이러한 체험이 성화와 부흥의 발화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강단 후면 기념물             

 

설교단 뒤의 기념물은  존 웨슬리가 가장 많이 부르짖었던 Holy Holy Holy 라는 글자가 세겨져있고 아래쪽에 3가지 기념물이 있는데 가운데 면에는 사도신경이, 좌우편에는 마태 22:37-40 (새 계명) 의 말씀이 나누어 기록되어 있다. 주위에는 6개의 기념비가 있는데 왼쪽에는 맨 위에 존 웨슬리, 아래로 존 플렛처, 조셉 벤슨의 기념비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맨 위에 촬스 웨슬리, 아래로 토마스 코크, 아담 클락의 기념비가 놓여있다.  (글 출처- 웨슬리 스토리)





강단 기념비               (출처- http://blog.daum.net/seoulpr7555/498)













웨슬리 채플내부의자 및 바닥, 기둥  

 

본래 예배당 기둥은 배의 돛대로 사용되던 소나무를 국왕 조지3세가 존 웨슬리에게 하사해서 만들어졌었다. 이 기둥은 석고로 치장되어 대리석 효과를 주었는데 1891년 미국과 캐나다, 남아프리카, 호주, 서인도제도, 아일랜드의 감리교회에서 헌납된 프랑스 벽옥으로 대체 되었다. 현재 돛대로 만든 기둥은 성전 현관에 남아있다. (글 출처- 웨슬리 스토리)





<존 웨슬리 묘>

 

존 웨슬리 묘지         (출처- http://blog.daum.net/seoulpr7555/498)

 

웨슬리 예배당 뒤편 뜰에는 존 웨슬리의 무덤이 있다.  웨슬리 채플과 웨슬리 하우스 바로 건너편에는 번힐 필즈라는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주로 비국교도들이 묻혔던 곳이다.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의 유해가 바로 이곳에 안장되어 있었으며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다니엘 디포와 음유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버니언 등의 무덤 역시 이곳에 함께 있다. 수잔나는 영국성공회신부의 아내로 국교도들의 무덤에 묻혀야 되지만, 감리교운동의 지도자의 어머니란 이유로 이 곳에 묻히게 된 것이다

 

존 웨슬리 묘             (출처- http://cafe.daum.net/jdcclondon/O31t/)

 

웨슬리의 무덤에 얽힌 일화가 있다. 1791년 3월 2일 오전 10시 경 향년 88세를 일기로 웨슬리 선생이 서거했을 때 자기의 시신을 절대로 값비싼 비단으로 감싸지 말고 그저 평범한 울이면 족하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또한 만일 자기 주머니에 조금이라도 돈이 나올 경우 자신이 지명한 가난한 순회 설교자 4 사람에게 똑같이 나누어주라고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장례식에는 절대로 영구차나 사륜 마차를 쓰지 말라고 당부했으며 관을 운반할 때 실직해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 6 명을 고용해서 1파운드씩 주라고도 부탁했다. 웨슬리의 제자들은 장례식 때 몰려들 인파를 걱정한 나머지 문상객들의 숫자를 최대한 줄이려는 의도에서 3월 9일의 장례식을 횃불을 밝힌 채 새벽 5시에 서둘러 시작해서 동이 트기 전에 끝냈다고 한다. 장례식에 참석한 조객들은 웨슬리의 초상이 새겨진 기념 비스킷을 하나씩 받았다고 한다. 더욱이 웨슬리의 유해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웨슬리 채플 뒤뜰에 다른 감리교 설교자들과 나란히 묻어 전혀 화려하지도 두드러지지도 않게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웨슬리의 무덤은 내부가 7층으로 되어 있어서 선생의 여동생 마르타 홀 등 10 여구의 시신이 함께 안장되어 있다고도 했다. 일생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청빈 생활을 했으며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고결하기 짝이 없었던 웨슬리를 생각했을 때 경모의 정은 깊어만 갔다  


 

<파운더리 기념예배당> 



파운더리 기념 예배당(Foundery Chaple)

 

웨슬리 예배당 옆에는 파운더리 기념 예배당(Foundery Chaple)이 있는데 웨슬리 당시의 의자(benches), 찰스 웨슬리의 오르간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파운더리 예배당 오르간          

   

처음 오르간은 1906년에 만들어 졌으나 현재 사용중인 오르간은 1938년 교체 되었다




파운더리 기념 예배당 웨슬리 당시 의자









<지하박물관>



지하 웨슬리 박물관

 

박물관은 1984.9.2 에 개장되었다. 이곳에는 존 웨슬리와 감리교에 관한 많은 기념물들과 자료들이 있다. 박물관은 중앙 전시물과 주변 전시물로 되어있다. 이곳에는 파운드리 예배당에서 가져온 목재 설교단과 기념도자기, 조각상, 기금조성 모금함, 존 웨슬리 성경책, 웨슬리 흉상, 존 웨슬리의 설교 장면과 임종 장면이 담긴 그림이 있다.




존 웨슬리의 임종             

 

웨슬리가 죽기 하루 전날, 그는 잠을 많이 자고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낮지만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고는  거룩함으로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반석도 없습니다". 다음 날 웨슬리가 "나의 생의 최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라고 두 번 외치고 세상을 떠날 때 주위에 20명이 둘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침대 주위에 흰 오라가 비추었다고 한다









웨슬리 설교단























 

웨슬리의 부인 Mary Vazeille

 

웨슬리는 이 여인 (Mary Vazeille) 와 1751년에 결혼하였다. 이 여인은 부자였던 상인의 미망인이였고 여러명의 애들이 있었는데 매우 훌륭한 어머니로 알려지고 있다. 웨슬리는 1751년 2월 10일에 런던 다리를 건너가다 넘어지면서 이 여인의 집에서 이 여인의 간호를 받으면서 사랑에 빠졌다. 그들의 약혼식이 알려지자, 챨스 웨슬리는 벼락맞은 듯 놀랐다. 그는 말하길, "나는 하루종일 신음을 하였으며...식사도 제대로 할수 없었고, 설교도 할수 없었고, 쉴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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