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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하투샤 대신전 (앙카라 보아즈칼레)

타종교신전/터키신전

by baesungsoo 2006. 7. 11.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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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투샤 아크로폴리스

 

하투샤 아크로폴리스

 

하투샤 아크로폴리스

 

하투샤 아크로폴리스 물 저장소

 

하투샤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본 정경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 본 정경

 

하투샤 히타이트 유적

 

하투샤 히타이트 유적 가이드 문

 

하투샤 유적지로 올라가는 중

 

성문

 

성문

 

성벽 아래통로

 

성벽 아래통로

 

스핑크스 문

 

왕의 문

 

왕의 문 주변의 신전 터

 

왕의 문 주변의 신전 터

 

포스턴 벽의 문

 

하투샤 성벽

 

하투샤 성벽의 돌들

 

하투샤의 히타이트 신전 터

 

하투샤의 히타이트 신전 터

 

하투샤의 히타이트 신전 터

 

하투샤의 히타이트 신전 터

 

히타이트 하투샤(보아즈칼레) 유적지 전경


하투샤는 기원전1400년경 남쪽으로는 키프로스, 서쪽으로는 에게해에 이르는 철기문명의 대제국 히타이트 수도였다.  하투샤는 터키에서 현재 지명이 보아즈칼레이다. 이 보아즈칼레는 그전의 이름은 보아즈쾨이였다. 보아즈쾨이에서 보아즈칼레로이름이 바뀌게 된 이유는 1982년  터키정부의 인구 증가로 인한 행정구역개편 때문이다. 터키어로 ‘보아즈’는 목이라는 듯이고 ‘쾨이’는 촌이라는 뜻이다. 이름으로도 하투샤의 협곡을 사이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목이 죄인 지형에 자리한 마을의 지형적인 성격이 나타난다. 또한 보아즈칼레에서 ‘칼레’는 성이라는 뜻으로 하투샤에 성곽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하투샤를 수도로 삼은 히타이트는 구약에서는 헷이라는 족속으로 표기되어있다. 구약에 나타난 부분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부인 사라가 죽자 헷(히타이트)족속에게 헤브론의 막벨라 동산을 사서 그곳에 동굴에 장사지냈다는 부분과  다윗이 예루살렘에 살던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불러다 동침하여 솔로몬을 낳았다는 부분과(삼하11:2-11)  또 다윗이 히타이트 상인들로부터 철제 2륜 전차를 구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듯 성서에서도 상세히 기록되지 않은 히타이트 또한 그 수도인 하투샤가 세상에 처음 알려 진 것은 건축가이자 여행가인 프랑스 사람 샤를르텍시에 의해서이다. 그  이후  점토판을 발견되고 해석되어지며 1906년에 이르러 당시 오스만 제국박물관장인 마크리디가 주도하에 독일인 아시리아 정공학자 위고 빙클러가 참여한 하투샤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52년부터 현재까지 독일 고고학 연구소에서 발굴작업을 시행하고 있다. 하투샤발굴의 결과를 살펴보면 167만㎡(약 50만 평 규모)정도의 하투샤는 두개의 도시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경사면을 따라 경사면의 위쪽, 즉 남쪽 지역의 상 도시와 경사면의 아래쪽, 즉 북쪽 지역의 하  도시로 고고학자들이 임의로 명명하여 연구되어지고 있다. 이 두 도시는 그 위치적으로 구분이 될 뿐 아니라 하 도시는 기원전 15세기 후반 히타이트 왕국 시대, 상 도시는  13세기 히타이트 제국 시대에 들어 도시를 확장하면서 세워진 것으로 각각의 건립시기 다름으로 구분이 되어진 것이다. 하투샤를 상도시와 하도시로 구분하여 살펴보자.

1. 상도시에는 세 개의 성문이 있다. 남서쪽에 있는 ‘사자의 문’, 남쪽 정상에 위치한 ‘스핑크스의 문’과 사자의 문 반대편에 있는 ‘대왕의 문’이 그것이다. 성문 이름은 히타이트인들이 붙인 것이 아니라, 하투샤 발굴단이 그 곳에 있는 석조물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하투샤 성곽 내에 유일하게 있는 모습을 그대로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성문은 모두 사방 네 군데에 돌로 쌓은 기둥을 만들었기 때문에 성문을 들어서면 현관 같은 가로 10,15m의 사각형의 공간을 두고 있고, 아치형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문은 목재로 되었고 두 쪽으로 된 문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경우 문이 안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었다. 지금은 일부 돌기둥과 사자, 스핑크스, 히타이트 전사의 신 같은 부조물만 남아 있다.  사자의 문은 기원전 13세기경 만들어졌으며, 왼쪽 사자 머리 오른쪽에는 상형 문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스핑크스 문은 이집트 영향을 받아서 안쪽에 두개, 바깥쪽에 두 개 등 총 네 개의 스핑크스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또한 스핑크스 문에서 성 안은 이 되면 히타이트 왕들이 출정에서 돌아오면서 그곳에 신상들을 약탈해 가져와 모신 신전터로 추정된다.  대왕의 문은 크기와 건조 양식 면에서 사자의 문과 아주 흡사하다. 대왕의 문 안쪽 기둥에는 발끝에서 모자까지 2.25m인 짧은 치마같은 바지에 왼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오른손에는 도끼를 들고 있는 전사의 모습을 한 조각상이 있다. 고고학자들을 처음에는 전사를 조각한 것으로 여겼으나 모자에 세겨진 뿔이 신의 상징물이라는 점이 확인되어 그 조각상이 신상이다고 발표했다. 이와 같이 상도시에는 특색있는 성문이 있을뿐만 아니라 터널과 인공저수지가 있다. 지하터널은 지상의 문이라고 불려지기도 하는데 이 지하터널은 히타이트 제국의 마지막 왕인 수필룰리우마 2세가 스핑크스의 문 안쪽에 높고 경사진 방어벽을 쌓고 그 밑으로 만들었다. 길이는 길이가 71m이며 높이가 3~3.3m으로 어른 손 5-6뼘쯤 되는 큰 돌로 만들어졌다. 흙과 돌로 쌓은 방어벽은 35도 경사 각도로 축조되었으며, 폭은 80m, 높이 15m, 길이가 250m나 된다. 지하터널과 커다란 방어벽이 구축됨으로써 스핑크스 문이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두개의 인공저수지는 대왕의 문 아래에 있는 남쪽 성의 남동쪽 아래에 있다. 하투샤의 수원지였던 이 저수지의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각각 60m, 90m이다. 첫 번째 호수의 서쪽과 북쪽에는 모서리가 있는 쪽으로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인 석실 한개가 있다.  또 다른 석실에는 루비상형문자가 세겨져 있다. 깊이 4m 높이 3m의 아치형으로 된 석실 끝벽에는 이집트 생명의 신 앙크가 세겨져 있다. 석실의 왼쪽 벽에는 히타이트 제국의 마지막 왕 수필룰리우마가 머리에 신들이 쓰는 원추형 뾰족 모자에 자신의 이름을 세겨 쓰고 허리 벨트에는 칼을 차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으로는 어깨에 활을 맨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그 반대편 석벽에는 수필룰리우마 왕이 타르훈 타쉬샤를 포함하여 정복한 땅을 신에게 알리고 신의 도움을 청하는 한편, 신에게 제물을 바친 것을 알리는 내용으로,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표현인 제의 행사상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의 행사 때 사용되었다 고고학자들은 발표하고 있다.  상도시 남쪽에 위치한 성에는 제국의 마지막 왕인 수필룰리우마의 이름과 그의 족보와   슈필룰리우마 2세가 투탈리야 4세를 위해 야즐르카야에 신전을 만들고 알라시아와 싸워 이긴 전승 등의 내용이 8.5m암석에 기록되어진 루비상형문자가 있다.

2. 하도시는 하투샤의 입구로 하투샤에서 제일 큰 대신전이 있는 곳이다. 대신전의 규모는 2730㎡이고, 창수 및 부속 건물을 다 포함하며14,500㎡이다. 신전은 목재로 기둥을 열주형태로 세우고, 벽과 지붕은 흙으로 마무리하는 건축 방식으로 세워졌다. 신전 안에는 위가 트인 넓은 중정이 있다. 제의 행사는 이 중정에서 치러졌으며, 제의 행사나 종교 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다 중정에 모였다. 신전에 깔린 큰 돌에는 원형의 조그마한 구멍이 있는데, 이것이 돌과 돌을 연결하기 위해 청동 못을 박았던 자리이다. 대신전 바로 옆에는 아시리아 인들이 세운 시장, 카룸의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기원전 3,000년 경 초기 청동기 시대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히타이트 인들이 정착하면서 도시가 발전된 뷔윅칼레가 있다. 터키어로는 부윅은 큰 또는 위대한 이라는 형용사이고 칼레는 성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대 하투샤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사방을 다 깎아 놓은 듯한 고원 위에 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왕궁 앞 지역에서  왕이나 왕비, 관리들이 공문서에 사용했던 흙이나 금속으로 만든 인장들이약 3,000개가 발굴되어 공공건물이 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이 곳에는 왕궁과 왕의 저택 왕의 접견실 관리와 시종들의 사무실 주택 및 신전등이 있다. 터키의 앙카라로부터 동북쪽으로 200km가 조금 넘는 거리에 있는 하투샤를 상도시와 하도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상도시는 하도시에 비해 후대에 세워져 그 유적이나 유물이 더욱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역사에서 이름만으로 남아 있는 한 나라의 수도 하투샤는 이제는 그 나라의 성격을 알려주는 열쇠를 가진 지역이었다

 

출처-   http://holyland.mar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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