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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부 아스카베신사

타종교신전/일본신사

by baesungsoo 2006. 7. 1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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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부  아스카베신사

 

오사카부의 아스카베신사는 백제계 아스카베 노미야코 일족의 조상신인 '아스카오 오가미'를 제사지내고 있다. '아스카오 오가미'는 백제의 곤지왕이다.  아스카베 신사는 곤지왕을 모시고 있다. 곤지왕은 백제 개로왕의 동생으로 5세기의 인물이다. 일본땅에서 곤지는 신으로 추앙되고 있다. 아스카베 신사는 곤지를 일컬어 아스카를 이룬 일족의 조상신이라고 말하고 있다.일본이라는 통일 국가가 있기 전에 먼저 곤지의 일족이 아스카를 개척했다는 뜻이다. 곤지왕의 신사는 아스카 지역이 백제의 담로였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이곳은 백제인과 백제의 왕이 이었던 곳이며, 후에 백제 24대, 25대 왕(곤지의 두 아들)을 배출한 곳이다

 

미카도 신사

 

그들이 신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은 바로 백제 왕이다. 전설은 이렇게 전한다. '1300년전 백제가 멸망하고 얼마뒤 정가왕이라는 백제왕이 난을 피해 큐슈로 오던 중 폭풍우를 만났다. 정가왕의 배는 육지에 닿았고, 왕은 이곳 난고촌에 와 정착했다.' 정가왕의 장남 복지왕이 타고 있었던 또 한척의 배.  그 배는 다른 해안에 표착했고 복지왕은 난고촌에서 남쪽으로 약 90km 떨어진 이 지역 오늘날의 기조정에 터를 잡았다

 

히키신사

 

모시고 있는 신주가 바로 복지왕이다. 이 신사에 전해내려오는 고문서. 여기에 정가왕과 복지왕의 전설이 그대로 기록으로남아 있다.  두 부자는 서로의 행방을 알게된 후에도 각자의 터전을 지키며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쫓는 추격군이 이곳 난고촌에 들어왔고, 복지왕이 달려가 부왕 정가왕을 도왔으나 그들은 결국 난고촌 뒷산까지 밀려나 최후를 맞는다. 난고촌 사람들은 바로 이 돌밭이 두 왕이 피를 흘리며 전사한 곳이라 굳게 믿고 있다. 왕이 흘린 피가 이 돌들을 붉게 물들렸다는 것이다

 

 

센켄신사

 

하나의 문서가 발견됐다. 난고촌의 예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신사의 창고를 뒤져 찾아낸 것이었다. 문서에는 백제왕의 도래 사실이 뚜렷이 기록돼 있었다. 백제 왕족이 분명한 그들은 왜 하필 이쪽으로 몰려온 것일까? 센켄의 기록에 따르면 과거에 이곳은 일향이란 나라의 영역이었다. 그것은 일본 서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나라의 이름이기도 하다. 일향(日向)의 나라(國)...日向國. 이 일대야 말로 일본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 알려진 지역이며, 일본 열도에서 가장 오랜 인류의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일향시 일원은 옛 일향의 권역. 백제 왕의 전설을 담고 있는 마을들은 모두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일본 서기 신대기는 이 지역을 처음 개척한 사람이 백제인일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으로 기록된 그 이름은 스사노노 미코토. 그의 원적지는 웅성이었다. 웅성을 일본말로 읽으면 구마나이, 곧 곰나루로 백제의 도읍 웅진을 뜻하게 된다. 그는 곰나루에서 배를 타고 이곳으로 건너왔다. 미개지 왜 땅에서 그가 제일먼저 한 일은 나무를 심은 것이었다. 한반도를 오갈 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KBS 일요스페셜> 잊혀진 땅 - 백제 22담로의 비밀

 

서기 523년 5월 왕을 돌아가셨다. 그 죽음과 함께 위대했던 왕의 시대는 길고 긴 어둠에 묻혔다.  왕의 나라와 그 나라의 역사 또한 세월의 비바람 속에 까맣게 잊혀졌다. 1971년 왕릉이 다시 열렸을 때 1400년의 어둠을 뚫고 비로소 왕의 이름은 현실 속에 되살아 났다. 백제 25대왕 무령왕의 릉이었다. 왕릉은 그대로 하나의 강력한 증언어있다. 왕이 다스린 나라. 사라져버린 나라. 그러나 강성했던 나라 백제의 실체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백제는 약소국이 아니었다. 놀라운 해상능력을 바탕으로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 무대를 누볐던 강국이었다. 정치외교의 주역이었으며, 무역으로 국부를 쌓았던 백제.  그 백제인들의 영역은 한반도의 경계를 넘어설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을 여는 열쇠가 바로 담로였다.  백제가 가스렸다는 땅 22개의 담로. 일본 큐슈 산림지대에 미야자키현에 작은 마을 난고촌이 자리잡고 있다. 전체 인구를 통틀어도 3000명에 지나지 않는 산골 마을 난고촌. 그러나 오늘 마을은 왠지 예사롭지 않다. 찾아드는 외지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속에는 한국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초청한 인사들의 이름표 속에도 한국식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마을에서는 간판조차 모두 한글로 쓰여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한 것이 백제라는 이름이다.  난고촌 사람들은 놀랍게도 자신들의 마을을 스스로 백제마을이라 일컫고 있는 것이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한국의 사물놀이까지 몸으로 익히고 있다. 이곳 미카도 신사에 그들이 신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은 바로 백제 왕이다. 전설은 이렇게 전한다. '1300년전 백제가 멸망하고 얼마뒤 정가왕이라는 백제왕이 난을 피해 큐슈로 오던 중 폭풍우를 만났다. 정가왕의 배는 육지에 닿았고, 왕은 이곳 난고촌에 와 정착했다.' 정가왕의 장남 복지왕이 타고 있었던 또 한척의 배.  그 배는 다른 해안에 표착했고 복지왕은 난고촌에서 남쪽으로 약 90km 떨어진 이 지역 오늘날의 기조정에 터를 잡았다. 이곳 히키신사에 모시고 있는 신주가 바로 복지왕이다. 이 신사에 전해내려오는 고문서. 여기에 정가왕과 복지왕의 전설이 그대로 기록으로남아 있다.  두 부자는 서로의 행방을 알게된 후에도 각자의 터전을 지키며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쫓는 추격군이 이곳 난고촌에 들어왔고, 복지왕이 달려가 부왕 정가왕을 도왔으나 그들은 결국 난고촌 뒷산까지 밀려나 최후를 맞는다. 난고촌 사람들은 바로 이 돌밭이 두 왕이 피를 흘리며 전사한 곳이라 굳게 믿고 있다. 왕이 흘린 피가 이 돌들을 붉게 물들렸다는 것이다. 난고촌 입구에는 정가왕의 시신을 거두어 묻었다는 무덤자리마저 전해지고 있다. 매년 12월이면 난고촌과 기조정 사람들은 함게 맞지리를 펼친다. 아들 복지왕이 아버지 정가왕을 뵈러가는 행차를 재현하고, 그들의 혼백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두 마을 사람들의 맞지리 속에 1300여년 간 백제왕의 전설이 전해져왔다. 그렇다고 해도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었다. 그런데 6년전 정가왕 신사에서 그 전설의 신빙성을 증명하는 놀라운 유물들이 발견됐다. 4~7세기를 망라하는 고대 청동거울이 33개나 쏟아져 나왔다. <소진철 교수> 고대의 거울은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다. 이러한 것들이 백제왕 신사에서 33장이나 나왔다고 하는 사실은 여기 왔다는 정가왕은 물론이고 그 이전부터 이직에는 강력한 백제계 세력이 세습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이곳에는 분명 오랜 역사를 지닌 어떤 권력의 실체가 있었던 것이다.  이 거울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난고촌 사람들은 서정창원을 건립했다. 그렇게 많은 거울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던 세력집단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미야자키현 다노정. 난고촌과 기조정 말고도 이 일대는 백제왕이 왔다는 전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또 다른 백제왕은 이 산길을 걸어갔다. 기조정에서 남쪽으로 약 50km. 사람들이 왕의 일행을 맞았다는 장소엔 어김없이 작은 사당이 모셔져 있다.  오늘날 까지도 이 앞을 지나는 그 신성을 믿는 이들은 술과 돈과 예를 바치고 지나간다. 마을의 외곽에는 왕의 죽음을 알리는 돌비석도 하나 서 있다. 어느날 왕은 말을 달리다 바로 이곳에 있었던 우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왕이 살았다는 마을 다노정. 이제까지 그것은 전설이었다. 그러나 2년전 센켄신사에서 하나의 문서가 발견됐다. 난고촌의 예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신사의 창고를 뒤져 찾아낸 것이었다. 문서에는 백제왕의 도래 사실이 뚜렷이 기록돼 있었다. 백제 왕족이 분명한 그들은 왜 하필 이쪽으로 몰려온 것일까? 센켄의 기록에 따르면 과거에 이곳은 일향이란 나라의 영역이었다. 그것은 일본 서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나라의 이름이기도 하다. 일향(日向)의 나라(國)...日向國. 이 일대야 말로 일본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 알려진 지역이며, 일본 열도에서 가장 오랜 인류의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일향시 일원은 옛 일향의 권역. 백제 왕의 전설을 담고 있는 마을들은 모두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일본 서기 신대기는 이 지역을 처음 개척한 사람이 백제인일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으로 기록된 그 이름은 스사노노 미코토. 그의 원적지는 웅성이었다. 웅성을 일본말로 읽으면 구마나이, 곧 곰나루로 백제의 도읍 웅진을 뜻하게 된다. 그는 곰나루에서 배를 타고 이곳으로 건너왔다. 미개지 왜 땅에서 그가 제일먼저 한 일은 나무를 심은 것이었다. 한반도를 오갈 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이지역 고분에서 발굴된 고대 토기는 전형적인 한국 선(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에는 실로 오래 전부터 백제인들이 진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왕족들이 이곳으로 찾아들수 있었던 것을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땅이 있고 사람이 있고 통치하는 왕권이 있었다. 중국 사서인 양서는 이지역 성격에 대해 하나의 단서를 던져준다. 왕족을 파견하여 백제 고유의 담로를 다스리게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백제 왕성은 '고마', 큰 성은 '담로'라여 22개의 담로를 모두 왕의 자제나 종족으로 하여 다스리게 했다.' 일본 내의 백제 담로. 그곳은 백제의 왕족의 마지막 도피처가 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백제는 담로라는 독특한 지방 통치제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백제의 왕은 수 많은 담로의 왕들을 거느린 제왕의 위치에 있었다는 얘기다. 백제의 영토를 알려줄 담로들은 과연 어디에 위치해 있었을까? 우리는 일본 신화시대의 '일향'이라는 지명이 오늘날 까지 남아있는 예를 보았다. 지명의 생명력이 놀랄만큼 길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담로라는 지명 또한 어딘가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법하다. 그 흔적을 찾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먼저 담로란 말의 뜻부터 알아보자. <김성호 박사> 담로의 어원을 추적하자면 고구려에서부터 시작한다. 고구려에서는 빼앗은 땅, 점령지 다모리라 했다.  백제인들의 정착지도 다모리라했다. 이 다모리는 다물, 담라, 담로로 변천했다. '담'은 담장 또는 경계를 뜻하고 '로'는 나라는 뜻한다. 이 말은 백제의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물이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담의 유래를 다물에서 찾는다면 타당한 것일까.  이점을 시사해주는 단서가 있다.  전남 해안이나 도서 지방에는 밭두렁에 돌담을 쌓아놓는데 이것을 돌다모리라고 한다. 여기는 백제의 옛 영토였다. 이 다모리가 다물로 바뀌고 현재는 담으로 변했는데 다물은 성을 뜻하기도 하는데, 새로 개척해서 담을 두른 영지(정복지)를 다물이라고 한다. 한반도에는 담로를 뜻하는 여러 지명들이 제주도까지 걸쳐 남아있다. 일본 열도의 가당도는 백제 무령왕이 태어난 곳이다. 여기에도 다마나라는 담로계 지명이 남아 있다. 큐슈 다마나시. 다마나는 탐라, 담로와 같은 전형적인 담로계 지명이다. 부근에 구마모토, 구마 즉 곰을 뜻하는 지명은 백제 왕성을 뜻하는 말이다. 곰은 백제의 상징이었다. 백제와 관련된 유적에는 곰과 관련된 지명이 발견된다. 한국의 금강의 어원은 곰강이다. 이곳에 구마천(곰강)이 흐르고 있다. 한반도 금강 상류에는 곰나루를 뜻하는 웅진이 있고, 그 하류에는 또 다른 곰마을 웅포가 있었는데 모두 왕급의 유물이 발견됐다. 구다라, 이것은 일본에서 백제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마을에는 구다라기라는 국민학교가 있다. 그 이전에도 이 학교는 구다라기 국민학교였는데 소리만 두고 한자를 바꾼 것이었다. 가장 오래된 이름은 백제래였다. 즉 백제가 왔다는 뜻이다. 후나야마고분(전방후원분)은 다마나 일대를 담로로 추정할 수 있는 강력한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한다. 이 고분은 5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일본 최고 최대의 유물들이 발굴됐다. 무덤의 내부는 백제의 대표적 묘제로 알려진 횡혈식 석실 구조이다. 여기서 나온 유물들의 주인이 극히 고귀한 신분임을 말해준다. 명문이 새겨진 대도, 은상감의 명문이 새겨진 이 큰칼은 지배층만이 가지는 권력의 상징이다. 후나야마 출토품은 백제의 왕릉급 출토품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이 고분의 주인은 백제 왕족이 분명한 것이다. 이 무덤은 전방후원 형태를 위하고 있는 이 무덤 양식의 초기 원형은 한반도 일대에서 찾을 수 있다. 혼슈의 아스카 지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전방후원분 밀집지역이다. 오사카부의 아스카베신사는 백제계 아스카베 노미야코 일족의 조상신인 '아스카오 오가미'를 제사지내고 있다. '아스카오 오가미'는 백제의 곤지왕이다.  아스카베 신사는 곤지왕을 모시고 있다. 곤지왕은 백제 개로왕의 동생으로 5세기의 인물이다. 일본땅에서 곤지는 신으로 추앙되고 있다. 아스카베 신사는 곤지를 일컬어 아스카를 이룬 일족의 조상신이라고 말하고 있다.일본이라는 통일 국가가 있기 전에 먼저 곤지의 일족이 아스카를 개척했다는 뜻이다. 곤지왕의 신사는 아스카 지역이 백제의 담로였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이곳은 백제인과 백제의 왕이 이었던 곳이며, 후에 백제 24대, 25대 왕(곤지의 두 아들)을 배출한 곳이다. 백제 25대 사마왕, 그가 바로 무령왕이다. 무령왕은 곤지가 왜 열도로 가던 도중 낳은 아들이었다.  24대 동성왕은 무령왕의 동생이다. 아스카는 이 두 왕이 성장한 곳이다. 이것은 본국 백제와 담로가 하나의 정치체제 속에 통합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담로는 백제의 일부분인 것이다. 미네가즈카 고분(아스카, 전방후원분). 이 고분은 전 일본 열도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미네가즈카 고분은 천황릉인가? 여기서서 출토된 유물들은 미네가즈카 고분의 주인공이 백제인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무령왕의 유물과 재질, 형태까지 똑같은 유물들이 출토됐다. 일본서기에는 이것에 관한 해답이 될만한 천지장조 신화가 적혀있다. 신화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음양 두 신이 결합하여 부부가 됐다. 자식을 낳을 때에 이르러 맨 처음 담로를 모태로 하여 여러 땅을 낳았다. 그런데 기분이 나빠 담로의 이름을 미와지시마로 했다.' 일본의 천지창조는 담로로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즉,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기 전에 일본 땅에는 이미 백제인이 담로를 형성하며 진출해 있었다는 것이다

 

출처- <KBS 일요스페셜> 잊혀진 땅 - 백제 22담로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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