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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노산 태평궁 (중국 청도)

타종교신전/도교사원

by baesungsoo 2006. 9. 17.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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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코스 지도  (블로그명 : 비즈공예)

 

태평궁 도교사원   (출처- 블로그명 : *어떤만화가마눌*)

 

태평궁은 노산 동부에 있는 궁관으로 송대에 창건한 도교 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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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도교

 

도교는 宋代에 이르러 한 차례 큰 변화를 겪게 되어 正一宗과 全眞宗으로 양분된다. 王重陽이 세운 全眞道敎는 이론적으로 도가와 불가와 유가를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王重陽은 노산에서 수양을 했으며 丘處機, 劉處玄, 譚處瑞, 馬鈺, 郝太古, 王處一, 孫不二라는 7명의 제자를 두었다. 스승을 따라서 노산에서 수양을 했던 이들을 ‘七眞’이라 부른다. TV드라마 ‘射雕英雄傳’은 七眞에 관한 이야기이다. 노산의 도교는 王重陽이 全眞派를 창건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全眞派의 北七眞이 모두 노산의 도교에 족적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 丘處機가 3차례나 노산에 와서 설법을 함으로써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죽은 다음에 北七眞이 각각 노산에서 종파를 창건하고 道觀을 서로 차지하려는 싸움이 벌어졌다. 明代에 이르면 ‘9宮8觀72庵’이라는 번영기를 누리게 된다. 이 때 노산의 全眞道敎는 ‘道敎의 2大叢林’을 자리를 잡게 된다. 명대에도 노산의 도교는 전혀 시들지 않았다. ‘武當派’의 開祖였던 張三豊도 明의 永樂年間에 노산에서 수련을 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明霞洞 옆에 있는 三豊洞이 그가 수련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張三豊은 이름이 通이었고, 字는 君實이었으며, 호를 三豊 또는 납탑(邋遢)이라 불렀다. 그는 나중에 노산에서 죽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노산에는 원래 耐冬(絡石 또는 雲丹이라고도 하는 담쟁이풀을 가리킴)이 없었는데 張三豊이 그것을 가져와 길렀다고 한다. 그 후로 耐冬은 노산의 名花가 되었다. 張三豊은 제자 徐復陽을 太和子라 부르며 眞人에 봉했다. 徐復陽은 仙鶴洞에서 수련을 하여 ‘鶴山派’를 창건했다. 노산의 도교는 오랜 세월 동안 천천히 발전을 했지만, 李哲玄, 劉若拙, 丘處機, 劉處玄, 李志明, 徐復陽, 張三豊, 孫玄淸, 耿義蘭, 齊本守 등의 유명한 도인들을 배출했고, 그들은 모두 황제로부터 부름을 받았었다. 도교가 노산에서 번성을 했던 것은 역대정권의 비호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서 도교의 경전인 《道藏》은 명의 成祖時代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英宗時代인 正統9년에 출판되었다. 만력28년인 1600년 이 《道藏》 가운데 한 질이 노산의 태평궁에 하사되었으며, 그 사실을 ‘勅論碑’에 새겨 두었다. 명대에 간행된 이 《道藏》은 현재도 잘 보존되고 있는 진귀한 고서적이다. 역대의 도교 사원인 宮과 觀은 모두 田地를 보유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靑山村의 주민들은 모두 太淸宮의 소작인들이어서, 봄가을에 太淸宮에 세금을 받쳐야했다. 청의 嘉慶年間에는 卽墨縣령이 太淸宮이 차지하는 토지의 범위에 대한 판정을 내리기도 했으며, 咸豊時代에는 현령이 명령을 내려 백성들이 태청궁 안에 있는 水晶石을 파내지 못하도록 했다. 關羽를 모신 關帝廟와 마찬가지로 도사 4~5명이 있는 작은 묘당에도 무려 60묘나 되는 토지를 주었다. 자료에 따르면, 도교에 대한 역대 조정의 비호는 중화인문공화국이 청도를 차지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도교사원의 도사들은 太和觀이 25세대, 玉淸宮과 太平宮이 24세대나 세습되었다. 그렇다면 노산일대의 대부분이 도교와 관련된 땅이었을 것이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도교사원의 소작인들이었을 것이다. 역대정권이 이렇게 도교를 우대한 것은 다른 종교와 달리 도교가 가진 단단한 조직력과 정부의 권위를 크게 인정하지 않는 교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중국정부가 가장 골치를 앓고 있는 것이 파륜공의 확산이다. 파륜공이 보급되는 과정을 보면 도교를 근간으로 결집되었던 과거의 반정부단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진나라가 통일을 한 다음부터 산동은 정치적 중심에서 비교적 멀어졌지만, 천연의 조건과 문화적 자부심, 그리고 산동사람들의 호전적이고 강인함이 도교라는 종교적 조직으로 결집될 때는 반드시 큰 반란이 일어났다. 역대 정권은 아마도 그것을 가장 경계했던 것 같다. “山不在高, 有仙則名”라는 말이 있다. 예로부터 노산은 경치는 아름답지만, 바다를 끼고 있고 산림이 울창하여, 일반인들이 쉽게 오르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지 못했다. 蘇東波는 이런 글을 남겼다. “牢山에 隱者가 많다던데, 듣기는 했지만 보지도 못했고, 보더라도 다가가지 못한다네.” 이런 전설도 있다. 樂正子는 늘 노산에서 선단을 만들어 먹고 180세가 되었지만 紅顔에 鶴髮을 유지했다. 신선 安期生은 노산과 봉래산을 오가며 참외만한 크기의 대추를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마 엄청나게 큰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풍경이 서로 융합되어 하나의 신기한 전설을 만들어 냈으며, 거기에서 다시 여러 가지의 민간고사가 탄생했다. 역대의 제왕들도 자기의 생명과 사직이 만세에 이어질 것을 갈망하면서 노산에서 그 방도를 구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吳王 夫差도 노산에서 《靈寶度人經》을 얻어서 이 경을 연구했지만 끝내 ‘超度’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얻지 못했다고 한다. 진시황도 노산에 올라갔다가 봉래산을 바라며 徐福에게 바다로 나가 선약을 구해오라고 했지만 사기꾼에게 걸린 셈이 되고 말았다. 한무제는 노산에서 신인에게 제사를 지냈고, 당태종 이세민과 송태조 조광윤도 모두 노산과 인연이 있었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다. 일세의 영웅인 징기스칸도 친히 ‘金虎符牌’와 聖旨를 새겨 노산의 태청궁 담벼락에 걸어 놓았다. 800년이 지난 지금도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평범한 문장이기는 하지만 사료적 가치가 상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글 출처- 블로그명 : 말괄량이삐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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