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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재선 목사 ( 김재원 장로, 조남수 목사)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25. 11. 2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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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교자 김재선 목사, 1894- 1950년 8월 3일 순교>

김 재 선 ( 金 在 善 , 1894~ 1950 )

 

전택부 장로가 쓴 토박이 신앙산맥(2) 제주도 선교에 관해 쓴 글이다.

(글 출처- https://www.kctusa.org/news/articleView.html?idxno=65482)

이 글을 중심으로 김재선 목사님의 사역을 조사한 결과 몇 교회에는 교회 연혁에 김재선 목사님의 사역 기록이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아직 확인되지 않은 기록이 있을지도 모르고, 기록이 소실된 곳도 있다고 생각한다.   

전택부 장로의 글에서 누락된 제주선교의 추가 기록은 아래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를 참조 바란다. 특히 제주세화교회 사역(1933년)과 제주 지역 교회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첨부 하였다.

 

제주도에 떨어진 복음의 씨는 자라고 훌륭한 기독교 가문을 이루었다. 김재원(在元) 장로는 1946425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동생 재선(在善)은 유명한 목사가 되었고, 유명한 목사인 김재선은 바로 1894년 9월10일 제주시에서 출생하여 제주선교에 크게 공을 세웠던 형님인 김재원 장로(제주 최초의 기독교인, 장로로 아래 글과 사진을 추가 하였다.)와 같이 초대신자의 한 사람이다. 최초로 선교를 받았던 김재원은 언제 예수를 믿었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구전으로 내려오는 말로는 김재원이 늑막염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서울 세브란스에 가면 나을 수 있다는 풍문을 듣고 범선을 타고 목포를 거쳐서 인천으로 해서 마포까지 왔었다고 한다. 그 길로 다시 남대문 옆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서양병원인 세브란스에 입원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수술을 해서 성공하여 9년만에 회복이 되어 병원안에서 예수를 믿고 또 세례까지 받고 제주도에서 오게 되었는데 이때 동생 재선도 형님의 소개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들 형제가 예수를 믿게 될 무렵 총회에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었고,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 목사는 이들과 같이 성내교회를 창설케 되었다. 믿음이 독실한 김재원은 제주도에서 초대 영수를 거쳐서 초대 장로가 되었고, 동생인 김재선은 제주농업학교를 다니면서도 교회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그래서 그의 가문에서는 장차 신학교를 공부 시키기 위해서 미션학교인 목포영풍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며 다시 평양숭실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그는 잠시 부인 홍마대(紅馬大)와 같이 여수앞바다에 있는 거문도에 가서 부부교사로서의 전도를 하면서 첫 전도사업을 전개케 되었다. 김재선은 다시 육지로 나와서 

 2. 장흥읍교회 전도사(192 ?-   , 교회연혁에 김재선 목사님에 대한 기록이 없다 ) 로 활동하면서 시간 나는대로 장흥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활동을 하였다1930년 전남노회로부터 제주선교의 활성화를 위해서 제주노회를 창설 (아래 제주선교 100년사 참조)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기도 하였고, 그리하여 그는 전남노회의 거목인 최흥종 목사를 노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노회 부회장직을 받았다. 다음 노회장으로 자신이 될 수 있었지만 초대선교사인 이기풍 목사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고 제주노회 내지 교회가 부흥되어야 한다면서 자신은 역시 부회장직과 또 순회목사로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다시 강진지방으로 자리를 옮기어 3. 병영교회(1926 ?- 1928, 불확실 )를 시무하면서 평양신학교를 다녔다이어 1927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자 고향인  4. 제주 삼양교회(1928-1931)를 개척하고 교회에서 위임식을 갖고 약 3년간 삼양교회를 중심해서 순회목사로 겸임하였다그리하여 그는  5. 제주 한림교회(1932sus)    6. 조수교회(1932),    7. 용수교회(1932?),  8. 고산교회(1932-1933),     9. 두모교회(한경교회, 1933- ?를 시무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원래 부지런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그는 조금도 방심할 겨를도 없이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래서 제주도에 있는 모든 교역자들이 그를 가리켜 기계처럼 지칠줄 모르게 일을 한다고 칭찬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달변가였다고 한다. 한번 노방전도에 나가면 사람들이 그를 붙잡고 자진해서 그의 전도강연 듣기를 원했다고 한다. 1932년 제주노회 제3의 노회가 개회될 때 선배들이 먼저 노회장을 해야 한다면서 몇 번이고 사양했지만 모든 노회원들이 허락하지 않아 노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잠시 한림교회를 거쳐서 세화교회에서 1935년까지 목회를 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부흥되기 시작하였으며 부흥이 되면 후진들에게 양보하고 또 자신은 보다 연약한 교회를 찾아 다녀 결국 고산교회,   금성교회 (불확실)를 시무하여 역시 큰교회로 부흥을 시켰다.  일본과 가까운 제주도에는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김재선 목사는 일본에 있는 제주도민을 위해서 선교해야 한다면서 일본에 자진해서 선교사업차 도일하게 되었다. 오사카 지방을 다니면서 동포를 위로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신사참배에 부딪치고 결국 그는 신앙생활과 신앙지도를 할 수 없다고 결정한 다음 수많은 제주도 노동자를 놔 둔채 다시 고향 제주도로 오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집에서 경영하는 농토를 바라보면서 소일을 하였고, 밤만되면 새벽을 잊은채 긴긴 밤을 기도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전도강연에 대한 말을 전하지 못할때도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서 일본제국주의 패망을 한없이 외치고 세월을 보냈다그렇게 바라던 일본은 드디어 1945 8 15일 패망하고 말았다. 이때 김재선 목사는 다시 제주선교에 힘을 기울여서 신사참배로 인하여 문을 닫았던 교회를 하나씩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또 밤만 되면 좌익 우익으로 나눠진 제주 청년들을 교회에 모아놓고 불온한 사상을 가진 좌익 청년들을 우익으로 전환시키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그래서 김재선목사는 제주도에서만 크게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신생 대한민국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에게 꼭 필요한 일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형무소였다. 목포형무소는 좌익사상범이 방마다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을 전향시키기 위해서 사상이 바르고 이론이 밝은 김재선 목사는 1948년 8월 15일자로 전국에서 뽑힘을 받은 15명 목사의 한 사람으로 임명을 받고 그는 10. 목포형무소 형목이 되었다. 그는 감방마다 찾아 다니면서 전도도 하였고 또 좌익사상범을 전향시키는데 그의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일을 하였다1950 71일 공산군에게 쫓겨난 목포 시민들은 선창가에 모여 아비규환의 장소가 되었다. 김재선 목사도 국가공무원이었기에 당국에서 준비해준 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지만 형무소장이 때마침 승선을 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장을 모시려 간다면서 배에서 내려와 시내를 달려서 목포형무소를 가 보았지만 소장은 온데간데 없고 이미 공산군이 형무소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어 뛰면서 선창가에 가 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었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다가 탈옥한 죄수에게 붙들리어 목포형무소에서 수감되고 말았다. (아래 1948-1950년 목포형무소에는 4.3 사건 관련자들이 다수 수감되어 있었고, 1949년 9월 탈옥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0일간 구금되었다가 첫 인민재판이 실시되었던 1950 8 3일 형무소 뒷산에서 다른 애국청년 7명과 같이 처형되고 말았다김재선 목사는 순교로서 순국의 귀한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면서 몇 번이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마지막으로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하면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찬송을 부르면서 57세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옮기어 가셨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추가)  김재선 목사의 묘지는 도시 개발로 인해 소실된것으로 보고있다. (순교자 자손의 증언 참조)

(추가) 김재선은 결국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목사 수업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28년 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제23회 평양신학교 동창 중에는 강신창, 김현복, 박선택, 오종덕 등이 있다. 김재선은 전남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제주도에 내려와 제주노회 창립에 공헌 < 아래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을 참조하기 바란다> 하고 삼양교회를 섬기면서 3년간 열악한 교회를 순회하면서 한경면 조수·용수·고산·두모 교회 등을 부흥시켰다.

(출처- 제주기독신문 | 교회탐방 > 제주교회역사)

<순교자 김재선 목사님의 가족 사항>

목포시에 남은 사모인 홍마대는 여러 자녀들을 두었는데 김은복, 김은실, 김은심, 김은석, 김은권, 김은정이다. 목회자 시절에도 음악을 사랑하여 트럼펫을 불던 아버지 김재선 목사처럼, 자녀들 중에 아들 김은석(1932~) 장로는 서울 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광주 교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동생 김은권도 광주교대 교수로서 교육자를 양성하는 일에 평생 헌신하였다. 이들은 모두 장로가 되어 교회의 일꾼으로 평생토록 충성·봉사하였다. 김은석 장로는 교회음악을 위해서도 크게 공헌하였다. 광주아가페 장로성가단을 창단한 지휘자로서 수고하였다. 동요작곡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21세기 찬송가는 그의 곡을 두 편 수록하고 있다. 594 감사하세 찬양하세’, 603 태초에 하나님이를 보면 작곡자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추가) 김재선 목사의 처가인 홍순흥 장로의 가정도 훌륭한 기독교 명가를 이루고 있다. 제주동부 교회의 목사였던 홍성봉 목사의 부친인 영흥학교 교사 홍익표, 그리고 일본 동지사 대학을 나온 홍군표, 광주 양림교회 장로였던 홍천표 이런 분들이 김재선 목사의 처남이었다.  (출처- 제주기독신문 | 교회탐방 > 제주교회역사)

용인에 위치한 기독교100주년 순교자 기념관에 임광원 장로와 함께 방문했다. 그곳에 김재선목사(세째 할아버지)가 순교자 반열에 모셔져 있었다.   (출처- 김씨 family | 기독교100주년 순교자 기념관 - Daum 카페)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출처-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제주 성내교회의 "제주 100주년 선교 기념비" (출처- [제주선교여행] 제주기독교순례길 5코스 선교의 길(제주성내교회~이기풍선교기념관) 선교초기 제주의 상황과 이기풍목사의 활동 : 네이버 블로그)

1935년 이후 일제시대 제주 행정도 (출처- #10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이기풍 목사는 제주 선교사로 재차 부임한 후 1928년에 회갑을 맞이하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노년에 접어들어 옛날처럼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성내교회에서 처음부터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던 김재원 장로의 동생 김재선 목사 1928년에 제주도 출신으로서 목사로 장립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렸다. 이미 제주도 출신으로 전북노회에서 1927년에 임직한 이도종 목사에 이은 경사였다.

김재선은 1921년 6월 제8회 전남노회에서 신학 지원자로 허락을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고, 1928년에 전남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고 제주도 삼양교회 담임목사( 1928- 1931 재직)로 부임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도종이 1922 2월에 회집한 제9회 전남노회에서 신학 지원자로 허락을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하고, 1927 6월에 전북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고 김제의 성말, 신풍, 월봉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김재선 목사는 1928년부터, 이도종 목사는 1930년부터 제주도 에서 사역하여, 이제 제주도가 나름대로 독립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이기풍, 최흥종 두 목사의 배려도 컸다. 즉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제주의 경제 상황이 어려워진 가운데 전라남도 여러 지방까지 정기, 임시노회에 참석하고 이어서 긴급한 서류 작성을 위하여 노회 사무실을 찾아야 하는 교통비와 번거로움 등을 감안하여 제주시찰이 전남노회로부터 독립하여 제주노회로 서게 하였다. 이러한 독립은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와 전남노회에서 두 목회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 전남노회 및 총회의 결의

1930 9 12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한 제19회 총회 앞으로 전남노회는 제주시찰을 제주노회로 분립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당시 조직교회 6개처, 미조직교회 11개처였으므로, 형식상의 요건인 5조직교회라는 기준은 넘어섰다. 하지만 노회를 운영할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교통의 불편함을 감안하고, 분립 이후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이렇게 선택하였을 것이다. ‘전남노회 상황 보고는 다음과 같다.

4. 특별 형편

1. 제주시찰 구역은 형편에 의하여 금번 노회 결의로 분립 청원을 하오며

2. 제주 모슬포 지경에서는 반종교운동의 핍박으로 교역자와 직원의 곤란이 있사오며.

이상과 같은 청원을 받아들여서 총회는 이렇게 결정하였다.

​​. 전남노회장의 청원한 제주노회 분립 청원은 허락하되

1. 명칭 : 제주노회로                2. 장소: 제주 성내교회로

3. 시일 : 본년 11월 내로          4.조직 : 회장은 최흥종 씨로

5. 문부는 전남노회에 위임하기로 6. 재정은 전남노회 청원대로 2/3는 전남노회에게 1/3은 제주노회에게 주되 채권채무가 있으면 이상과 같이하기로

7. 전남노회 선교사 중 1인은 제주노회에 언권회원이 되어 방조케 할 일이외다.

이러한 총회의 허락에 의하여 제주노회는 1930 11 14일 창립 노회를 개최하였다.

창립 노회의 초록은 다음과 같다.

1. 장소: 제주 성내교회당          2. 일시: 11 14일 하오 8~17일 하오 1

3. 회원수: 목사 6, 장로 7, 언권방조회원 선교사 3, 목사 1

4. 임원선거: 회장최흥종, 부회장김재선, 서기이도종, 부서기부상규,

    회계김재원, 부회계이덕련

5. 목사 이동: 이도종 목사는 중문리, 법환리, 서귀포, 효돈 등 4개처 교회 전도목사,

김재선 목사는 성읍리(기록 손실), 세화리(김재선 목사 1933년 시무) 2처 교회,  남원리(남원교회 연혁 1932.10.15- 1934.1.31 이도종 목사 시무),  표선리(표선교회, 1948년 창립, 기록없음), 오조리, 성산포(성산포교회, 기록없음), 김녕리 전도목사(김녕교회, 기록없음)

6. 삼양리, 조천리 2처 교회가 연합하여 목사를 청빙하기로 함.

7. 장로 선택: 4인 허락

8. 시찰 구역은 동,  2구역으로 하되 동구역은 성내로부터 서귀포까지,

서구역은 법환리에서 내도리까지.

9. 성경학원의 위치는 성내에 치()하기로 함.

10. 노회 재산은 재단법인이 분립될 시까지 전남노회 재단법인에 보관하여 두기로 함.

11. 별 신학생은 김재선, 주일학교 강습생은 김영식 씨로 함.

12. 규칙은 당분간 내 정기노회 시까지 전남노회의 규칙을 준용키로 함.

13. 내회 장소는 신우면 금성교회당으로 함.

노회 구성에서 이도종 목사는 서기에, 아버지 이덕련 장로는 부회계에, 그리고 김재선 목사는 부회장에, 형인 김재원 장로는 회계에 선출되었다(출처-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예장 총회 순교자 기념 선교회 1950-1953 (6.25 동란 순교자 명단 220

(출처-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

 

강광범 김병구 김응도 노형래 배덕영 안덕윤 이마태 장수은 주남선 강성진 김병엽 김응록 노홍균 배영석 안인호 이복만

장   순 주삼식강은영 김병은 김익두 도복일 배영초 안중보 이병휘 장종식 주재명 강준의 김병희 김재선 류상덕 배추달

양주삼 이상해 장형수 주채원   184

 

<순교자 김재선 목사님의 사역 교회들>

<1. 제주 외도교회-  현 성지교회 (1922-   ?) > 1922년 김재선 전도사 사역

제주성지교회(옛 외도교회)   (출처- [새벽예배]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제주성지교회(통합)(23.12.12 05:00 화~토) : 네이버 블로그)

제주성지교회(옛 외도교회)   (출처- [새벽예배]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제주성지교회(통합)(23.12.12 05:00 화~토) : 네이버 블로그)

 

(교회연혁)

 

제주성지교회(옛 외도교회- 외도일동 435-5) 의 교회 연혁에 보면 1922년 김재선 전도사, 이창규 목사, 김덕련 전도인이 예배당을 증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제주성지교회)

 

옛 외도교회 (현 성지교회)  (출처- #54 외도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2. 전남 기장 장흥읍교회 (192 ?-   ), 예장 장흥중앙교회김재선 목사님 사역 기록이 없다.

기장 장흥읍교회 (출처- [장흥군] 장흥읍교회/장흥중앙교회, 100년 .. : 네이버블로그)

예장 장흥중앙교회

 

<기장 장흥읍교회, 예장 장흥중앙교회 교회연혁>

장흥읍교회에서 분리 된 장흥중앙교회는 예장으로 초기 교회 연혁은 같다. 아래 교회 연혁에서 보면 순교자 김재선 목사가 전도사로 사역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전화로 문의한 결과도 잘 알수 없다는 답변이다. 따라서 김재선 목사님의 장흥읍 교회 사역은 아직 확실하지 않은 부분으로 앞으로 더 자세히 알아 보아야 하는 부분이다.

1943.07.30. 장성철 전도사 부임, 임시 당회장 김주환 목사
  1939.03.21. 임원식 전도사 부임, 임시 당회장 최병호 목사
  1938.03. 조하파(Joseph Harper) 목사(선교사) 사임, 임시 당회장 김아열 목사(선교사)
  1936.04.22. 박소아 전도사 부임
  1935.10.13. 제1차 예배당 헌당 예배
  1934.10.21. 제1대 정기신, 박병근 장로 장립 – 조직교회로 선언 제1대 당회장 조하파(Joseph Harper) 목사(선교사) 제1회 정기 당회에서 서리집사 4인(남 2, 여 2) 임명
  1932.04.10. 제1차 예배당 건축 기공 예배
  1920. 제1대 조하파(Joseph Harper) 목사(선교사) 부임 ※삭금, 대리(명덕), 진목, 지천교회 순회하며 예배 인도
  1910.10.21. 장흥읍 남동리 83번지(남문 고개)에 조선 야소교 장로회 전남노회 소속 장흥읍교회 설립
  1906. 목포 양동교회를 설립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장흥 지역 복음 전파에 의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장흥읍 남동리 83번지 정기신 씨 댁에서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림(정기신 씨(후에 초대 장로), 한치 할머니, 이다복 할머니 등) - 故조무기 씨 증언

 

<3. 제주 삼양교회 (1928- 1931)1928년  김재선 목사 부임 / 1931 사임

제주 삼양교회   (출처- 삼양교회)

교회내부, 2023년 성탄절   (출처- 삼양교회)

제주 삼양교회 옛 사진    (출처- 삼양교회)

 

<제주 삼양교회 교회 연혁>

1921년 12월    오주병을 영수로 고원구, 신평석, 김병학을 서리집사로 세우다.

1922년  삼양2리 2208번지에 초가35평 예배당을 건축하다.

1924년  이도종 전도사 부임 / 1925 사임

1924년 4월  김정복 목사 부임(위임,동사목사) / 1926 사임

1924년 8월 6일  당회조직, 장로 장립 / 오주병

1926년 4월  김성원 목사 부임 / 1928 . 4 사임

1928년  김재선 목사 부임 / 1931 사임

1928년 1월  장로 장립 / 김근서

 

옛 삼양교회   (출처- #54 외도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4. 제주 한림교회>  1932- 1933년 김재선 목사 시무, 1932년 협재교회 분리

한림교회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한림교회는 1915년 11월 이기풍 묵사님이 수원리 양운룡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이듬해 김흥수가 자기 집 바깥채 초가 6칸을 바쳐 기도처로 정하면서 도내 9번째인 수원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수원리 예배 처소는 14년 동안 사용되다가 교인수가 많아지면서 한림 쪽으로 옮기게 되고 교회명도 한림교회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즈음에 일본군을 겨냥한 미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나 1947년 일본 신사터를 받아 이곳에 4번째 성전을 짓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한림교회 예배당은 1987년에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한림교회는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 후 유치원을 개설하여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을 돕는 일에 앞장 섰으며 1959년에는 여자 농민학교를 열어 농촌 계몽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1999년에는 사회복지법인 한림소망의 집을 열어 장애인 보호시설과 청소년 문화공간으로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한림교회 1989년11월5일 다섯번째 예배당 헌당  (출처- 제주한림교회 )

첫 번째 예배당 터 (수원교회, 수원리 549번지 김흥수 씨 가옥)   (출처- 제주한림교회 )

1931년 한림교회 두 번째 예배당  (김영식 목사)   (출처- 제주한림교회 )  

1934년 세번째 예배당 (정순모 목사)   (출처- 제주한림교회 )  

 

(교회연혁)   (출처- 제주한림교회 )

1915. 11. 2 이기풍 목사 와 전도인들의 순회 전도로 안평길, 김중현, 양운룡, 김흥수, 이순효, 하일청씨 6명이 수원리 양운룡씨 자택에서 집회 시작 

1916. 김흥수씨가 수원리 549번지 가옥(바깥채 초가 6)을 예배처소로 헌납. 순회 전도자 윤식명 목사가 노창수씨를 영수로, 김흥수씨를 서리집사로 임명하고 수원교회로 발족 

1930. 1.    초대 담임목사로 김영식 목사 부임(1932. 6 사임) 

1930. 11. 2  수원리에서 한림리 1314번지(현 한림다리 동북쪽)로 이전하고, 한림교회로 명칭변경 

1931. 2. 28  두 번째 예배당 기공(한림리 1314번지), 99(30) 

1931. 5. 24  예배당 헌당 및 초대 문명옥 장로 임직(1950. 9. 6 소천)  (참석목사 : 김영식, 조상학, 김재선, 이기풍) 

1931. 6. 1   1회 당회개최(성경 : 7:17, 신편찬송가 155:“내 평생 소원 이것 뿐”) 

1932. 7      제2대 김재선 목사 부임(1933. 12 사임), 협재교회 분리

1934. 7      3대 정순모 목사 부임(1936. 11 사임)

 

옛 한림교회   (출처- #54 외도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5. 제주 조수교회(1932)>  1932년 1월 24일 김재선 목사 사역

조수교회  (출처-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kws51&logNo)

 

1920년대 중반에 조수마을에서 환자가 생겨 바닷가 마을 두모교회(현 한경교회)에 조수리 주민 문찬오(문현오), 이달평, 이상선, 조남준 씨등이 출석하였다. 1932 1월에 드디어 조수리의 문성국씨 집에서 김재선 목사의 인도로 교회가 시작되었고 1932 1 24일 조수리 홍자하씨 댁에서 설립예배를 드렸다. 1934 4 29일 조수리 300번지에 초가집 3간을 매입하여 정식 예배당이 문을 열었다. 1934 6 11일 조수교회는 세례교인 6명 학습교인 11명으로 기도처에서 교회로 승격되었다. 김재선 목사는 용수교회와 고산, 두모, 한림, 금성교회 등을 순회하거나 담임을 하면서 각 교회를 부흥 발전시켰다. 또한 김재선 목사는 1946 6 5일부터 1948 8월10일까지 제주를 떠나 전남노회 소속의 목포 산정교회의 목사로 위임을 받았다. 해방 후 닫혀 있던 교회를 재건하여 부흥하게 한, 참 능력 있는 지도자였다. 김재선 목사는 한국 전쟁시 공산군에 의해 순교 하였다.(아래 글 참조) 제주출신 첫 목사인 순회 목사 이도종 목사 1948 4.3 사건 때 순교를 당하였다. 또한 4.3 시간 때 1935년 정태인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조남수 목사는 고향 출신 목사로 당시 치안 사령관과 담판하여 많은 사람을 살려낸 교회이기도 하다. 2017년 지어진 현재 교회는 4번째 교회로 2008 5월3일에 봉헌 되었다. 2005년- 2016년에는 해외 선교에 힘써 콩 농사와 비엔날레 유치 수익으로 히말라야 신학대학을 세워 현지 교회 지도자를 배출 하였다.  (출처- 제주기독신문 | 교회탐방 > 제주교회역사)

 

(추가) 조수교회 건립은 조남수 목사 공이 크다하겠다. 조남수 목사 일생에 관련하여서는 파일로 올리도록 함(내용이 많아서) 1971년 신자 수가 늘면서 조수리 331-1번지에 교회가 신축되었다. 현재 교회는 2008년 5월 3일 헌당 된 성전으로 2017년 새로 지은 건축물이다. 또 조수교회 목사을 중심으로 신자들께서 한라산 중턱에 콩을 갈아 수확하여 판매하고 비엔날레를 유치하여 얻은 종자돈으로 히말라야 지역에 신학대학을 세워 선교사들을 양성하고 있다.

[출처] 제주시 한경면 조수리 조수교회의 발상|작성자 곰솔 김원순)

조수교회   (출처-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kws51&logNo)

교회내부

조수교회 역사 (출처-https://pdjch.tistory.com/1534)

조수교회 역사  (출처-https://blog.naver.com/gmldnswns20/223421808232)

 

<조수교회 연혁 (1920-1930년대)>

(출처-https://www.josu.or.kr/Page/Index/17 조수교회 홈페이지)

1920년대 조수리 주민 몇 명이 두모교회() 한경교회)에 출석. 조수리 문성국씨 집을 기도 처로 모이다

1932년 1월 24일 김재선 목사의 인도로 조수리 홍자하씨 댁에서 설립예배 드리다

1933년 김재선 목사가 이달평, 이상선씨에게 세례를 베풀다

1935 정태인 목사가 조남수, 문병천씨에게 세례를 베풀다

1937 이도종 목사의 인도로 제직회를 갖다

자료관에 전시 된 90년 전 당회록과 제직회의록, 주보 필사도구와 학습세례자 명부 등. 교회 제공

(출처-https://jeju.nocutnews.co.kr/news/5827280)

조수교회 역사 자료, 1932년 당회록   (출처-https://www.josu.or.kr/Page/Index/17)

 

옛 조수교회   (출처- #54 외도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6. 제주 고산교회(1932-19331932년 10월제 2대 김재선 목사 부임(1933.5.사임)

제주 고산교회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

 

제주 고산교회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

제주 고산교회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

고산교회 교회내부 (2025년) (출처- 제주고산교회)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고산교회는 1916년에 창립되었다. 당시 제주 서북지역에서 활발한 전도활동을 펼치던 김기평씨의 전도를 받은 서관오, 위국진, 추씨산옥 등이 한경면 고산리 2728번지에서 기도회로 모인 것이 유구한 역사의 초석이 되었다. 1920년, 전라도 광주에서 양화재봉업을 하던 박재하씨 후원으로 제주에 파송된 김진배 전도인을 통해 8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강홍섭씨의 사가(私家)를 기도처소로 정해 예배를 드렸다. 그 이듬해에는 윤식명목사를 통해 여종섭씨가 세례를 받았고, 7명의 학습인을 세웠다. 고산교회는 창립 초기부터 성경구락부를 운영하며 주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1940년대에는 ‘춘계전도대회’의 명목으로 거리전도에 힘쓰며 꾸준한 성장을 이어간다. 1977년에는 교인들을 중심으로 고산신협을 창립하여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교회로 자리매김 해왔다. 특히 고산신협은 지역민들의 땀과 정성이 담긴 농산물을 전국적으로 판매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어왔다. 2016년 교회창립 100주년에는 이웃사랑을 위한 기금 일천만원을 한경면장에게 전달하였고, 월드비전 제주지부를 통해 방글라데시 식수위생사업 지원과 콜롬비아에 선교사로 파송된 본교회 출신 서춘길 선교사를 통해 콜롬비아 현지인 신학대생 2명의 학비로 각각 일천만원씩을 전달했다.  (출처- 제주 고산교회 - YouTube)

 

<고산교회 연혁>

1916년 2월 15일교회창립

1930년제 1대 조상학 목사 부임(1931.12. 사임)

1931년 4월 5일 장로 장립, 초대장로 강홍섭

1931년 4월 5일 당회조직 당회장-조상학 목사, 서기-강홍립

1932년 10월제 2대 김재선 목사 부임(1933.5.사임)

1933년 6월제 3대 정태인 목사 부임(1937 사임)

 

옛 고산교회   (출처- #54 외도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7. 제주 한경교회- 옛 두모교회(1933- 1934>    1933년 김재선 목사가 당회장으로 임명 - 1933년 세화교회 시무 겸함 

제주 한경교회(옛 두모교회)   (출처-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한경교회)

제주 한경교회 (옛 두모교회)  (출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가마솥 교회가 되겠습니다” < 미션 < 기사본문 - 투데이N)

(출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가마솥 교회가 되겠습니다” < 미션 < 기사본문 - 투데이N)

100주년 기념종탑   (출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가마솥 교회가 되겠습니다” < 미션 < 기사본문 - 투데이N)

교회 창립 1920.3.3.       (출처-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한경교회)

목사위임예식   (출처-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한경교회)

 

<제주 두모교회- 현 한경교회 연혁>

1920. 3. 3. 두모리 기도처에서 시작되어 제주에서 14번째 교회로 설립.

1920. 6. 광주 봉선리교회에서 김경신 전도인을 파송.

1922. 1. 두모리교회 첫 예배당 건축.

1924. 원용학 전도인을 파송.

1927. 박병근 전도인을 파송.

1928.12. 23. 초대장로 박병근 전도인, 당회장 모슬포교회 이경필 목사로 임명되어 두모리 장로교회가 설립됨.

1930. 조상학 목사가 당회장으로 임명.

1932. 김영식 목사가 당회장으로 임명.

1933. 김재선 목사가 당회장으로 임명.

1934. 정태인 목사가 당회장으로 임명.

 

옛 두모교회 (현 한경교회)  (출처- #54 외도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8. 제주세화교회>   김재선 목사 1933년 시무. 1933년 두모교회(한경교회) 당회장 겸임 

(출처- 제주 세화교회 제주도에서 예배드리기★ : 네이버 블로그)

 

교회 내부  (출처- 제주 세화장로교회장의자 강대상 납품했습니다(주.. : 네이버블로그)

 

<세화교회 연혁>  (출처- 세화교회)

 

1915.11.28. 한동 부상규 집사 집에서 예배드림

1924.09 부상규 집사 세화로 이사, 이기풍 목사 약 2개월 동안 전도

영수 : 부상규, 집사 : 최문환, 박강빈

1926.12 예배 처소로 18평 초가 신축

1927 이경필 목사 6개월 동안 시무

1928 정순모 목사가 당회장으로 시무하면서 본 예배 처소를 교회로 설립하고

부상규 영수를 장로 장립

1930 김윤풍 권사, 김상두 집사, 박유덕 집사, 주지찬 집사 시무, 교인 수는 30명가량 모임

1933 김재선 목사(노회 파송, 고향 : 제주) 시무, 정우태씨 집사 선택(이도종 목사 순교)

 

옛 세화교회   (출처- #54 외도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9. 목포형무소>   김재선 목사님 순교 1950.8.3. 

 

현 목포교도소 청사 (무안소재) (출처- 교정기관 안내>광주·전라·제주>목포교도소>기관안내)

전남 무안군 일로읍 일로중앙로 78, 1989년 목포에서 무안으로 이전하였다.

 

1. 연혁[편집]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에 통감부가 광주감옥 목포분감으로 개설하였으며, 일제강점기인 1920년 목포감옥으로 승격, 1923년에는 목포형무소로 개칭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목포형무소로 계속 운영되다가 1961년 목포교도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89년에는 목포시 산정동에서 지금의 무안군 일로읍으로 이전하였다. 2009년에는 개청 100년을 맞아 목포 교도소 100년사를 발간하였다.

2. 사건 사고[편집]

1949914일에는 목포형무소 탈옥 사건이 발생하여 전국에 알려졌으며 이는 당시의 과밀 수용 및 제주 4.3 사건과 여수· 순천 10.19 사건 등의 여파로 알려졌다.  (출처- 목포교도소 - 나무위키)

현 목포교도소 민원실  (출처- 교정기관 안내>광주·전라·제주>목포교도소>기관안내)

1940년대 목포형무소  (출처- [기획/목포의 아픈역사 기억하기②]두 번의 집단 탈옥 그리고 해방불명 - 목포시민신문)

옛 목포형무소 옥사 (현 일신아파트)   (출처- 목포형무소 : 네이버 블로그)

옛 목포형무소 (현 일신아파트)   (출처- 목포답사 ⑩ 구 목포형무소 : 네이버 블로그)

 

<1949 9 14일 목포형무소 탈옥 사건>

 

1949년 9월 14일 400여명 탈옥  집단처형 추정

1950년 9월 28일 220여명 탈옥 김대중 구사일생

목포형무소 수형인명부 4.3 관련자 671명으로 수록

6·25전쟁 전후 목포서 제주4·3’ 400여명 행방불명

 

#후문을 파괴 탈옥사건의 경위(목포발)= 목포형무소 죄수들의 탈옥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4일 하오 5 10분경 작업을 끝마친 미결수들이 저녁밥을 마치고 감방에 들어 갈려고 할 무렵에 돌연 약 4백여명의 죄수들이 봉기하여 무기창고를 습격한 다음 약간의 무기를 탈취 뒷문을 파괴하고 형무소로부터 약 20키로 가량 떨어진 이로산을 넘어 무안군 일로면 방면으로 도주하였다한다. 이 급보에 접한 경찰당국에서는 삼엄한 경계 아래 이를 추적하여 포위작전을 전개하고 있는데 완전한 진압은 시간문제이라 하며 피해상황은 목하 미상이라 한다. 한편 동형무소에는 1천여명의 죄수가 수감되어 있었다한다.

#팔십명을 사살 체포(광주발)= 목포형무소에서 대규모의 탈옥사건이 발생한 동일 하오 10시 현재 그중 팔십명을 사살 또는 체포하고 그들이 탈거하였던 무기 오정을 탈환하였다한다. 그런데 그들 탈옥수의 대부분은 지난번 제주도 반란사건으로 복역 중에 있던 장기수이라 하며 사건발생과 동시에 광주에서는 경찰응원부대가 급거 현지에 출동하여 협력하고 있는데 목포시내는 평온하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9 9 16일자>

“1949 9 15일 산정동에 위치해 있던 목포형무소를 수형인 약 4백여 명이 탈옥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무안, 함평 방면으로 도주하였는데 경찰과 군은 이들을 추적했으며, 대한청년단과 우익청년, 학생들도 합세했다. 그 결과 85명이 체포되었고 약 300여 명이 사살됐다.” (출처 : 목포시민신문(http://www.mokposm.co.kr))

 

<1948-1950년 목포형무소 재소자 상황- 박찬식 논문>

한국전쟁 발발 당시 목포형무소에는 4·3 관련 재소자들이 상당수 남아있었다. 만기·형집행정지·감형으로 출소한 사람과 1949년 탈옥사건으로 사망한 사람 외에도 그 수는 400명을 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의 부족으로 목포형무소에 정확히 몇 명이 수감되어 있었고, 전쟁 직후 이들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면회·서신 왕래·기타 증언 등을 통해 전쟁 당시 목포형무소에 수감 중임이 분명하다고 밝혀진 사람들 가운데 생존자는 한 명도 없다. 목포형무소의 경우, 언제 어디서 몇 명을 총살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다만 국가기록원에 소장 중인 6·25당시 탈옥수명부(법무부, 1951)에는 목포형무소 재소자 가운데 탈옥수 명단이 정리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일반재판을 거친 4·3관련자 다수가 등재되어 있다. 이들은 탈옥이 아니라 군에 의해 집단 총살,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가운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으며, 유가족들 대부분이 6·25 직후 총살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949 9월 탈옥사건 때로부터 1950 6·25 직후까지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제주출신 4·3관련 재소자의 행방에 대한 조사 결과를 정리해 보았다. 이 기간에 목포형무소에는 일반재판을 거친 재소자 120여 명, 1948년 군법회의 대상자 251명과 1949년 군법회의 대상자 215명 등 총 600여 명의 제주출신 재소자가 있었다. 이들은  1949년 탈옥사건에 연루되어 총살된 사람  탈옥사건에 참여하지 않아서 출소한 사람  장기징역형 재소자 또는 탈옥사건 이후 새로 수감된 자로서 1950 6·25 직후 총살된 사람  미확인자 등으로 나누어진다.

[출처] 4·3관련 목포형무소 재소자의 행방에 대한 조사 결과 ----- 박 찬 식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 1|작성자 무명씨

 

<2. 김재원 장로(金在元 長老, 1878-1946),   순교자 김재선 목사 형님>  

주도 최초 기독교 신자 (1897제주도 최초 기독교 장로 (1917)

제주 조수교회 순교자 김재선 목사 형님

 

1878년(출생) 음력104일 아침 제주도 제주성외 이호리에서 김해후인 김진철공(19)과 경주 후인 김인애씨(입신후 작명, 21)사이에 장남으로 출생(32녀중)

1885(8) 향리 서당에서 한학 입문

1893(12) 선생을 찾아 당시 도내 학촌으로 알려진 향리에서 40여리 떨어진 거노리 로 유학

1893(16)도평리 병대부락 파평후 윤사인 공과 공주 후인 최씨 사이인 무남독녀 도원(입산후 작명: 18세과 혼례 거행

1894(17) 거노리에 유학중 발병으로 인하여 귀향하여 와병, 도내 명의들에게 삼년간 이나 치료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고 몸은 극도로 쇠약 1896(19) 부친이 당시 서울에 양의가 입국, 웬만한 난치의 병도 능히 잘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전 가산을 들여서라도 장남을 기어이 살려내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환자인 장남을 범선에 싣고 해로로 근 10일만에 제물포를 경유, 한강을 상류 하여 마포나루에 상륙, 서울 제중원(현 연세의료원)을 찾음. 제중원 에서는 너무 늦어 회생할 가망이 없으니 예수 믿고 영혼이나 구원받도록 권하면서 수술을 거절당했으나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니 수술 한번 받아보면 천 여리 바다건너 왔어도 여한이 없겠노라고 제삼 간청하여 우선 세례를 받고 생명은 하나님께 전적 의탁한다는 신앙심으로 미국인 선교사요 제중원 4대원장인 의사 어비신 박사 집도하에 4년간 전후 7차에 걸친 내종 대수술을 받으므로 제주도 최초의 신자가 됨1900(23) 하나님의 은총과 신앙심으로 7년간의 병고에서 완치되어 귀향하면서 쪽 복음 성경을 다량으로 가지고 와서 전도를 시작하다. 그러나 당시 제주도 특유의 유교 거물급 후손들의 핍박과 미신에 사로잡힌 서민의 방해는 형언키 어려운 정도였고 끝내 집안에서의 회유와 엄벌에도 굽히지 않자 부친은 촉망했던 장남이 가산을 다하여 서울까지 보내어 회생시킨 자식이 천주 악쟁이가 된 것을 한탄하여 술병으로 190445세로 급서하시다. 1908(31) 이기풍 목사 선교사로 제주도 도착. 서울에서 미리 소문을 듣고 이호리 자택으로 찾아와 서로 상면. 두 분이 제휴하여 도내 복음전도 활동을 개시. 21일 성내 향교골(2도동)에서 예배시작. 대영성서공회 매서인으로서 쪽복음성경. 찬송가등을 가지고 초대

교인 김행권씨에게 지개에 메워 도내3읍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수술 자국을 스스럼없이 공개 간증 하면서 유성기(후 축음기)에 찬송가 음반을 휴대 사용하는 방법으로 복음 전도에 투신 전력 하였음(제주도 최초 축음기 도입자)

1909(32) 1도리 중인문안에 초가 6칸을 매입. 예배당으로 사용

1910(33) 3도리 구 한국출신청(YMCA회관) 8간 건물과 부지를 매입하여 성내교회당 으로 삼음. 남녀 학생 수십명을 모집하여 교회학교를 운영하여 교육사업도 병행. 영수 성직을 받음(도내 최초 영수)

1912(35) 예배당 4간을 증축하여 12간 예배당을 이루고 예배와 학교교실로 겸용하기 시작

1917(40) 41일 초대 장로로 장립받음(홍형홍씨와 함께)제주도 최초 장로

1919(42) 3.1운동 이후 교회학교 패쇄

1922(45) 영흥학교(4년제)설립. 예배당을 교실로 겸용

1924(47) 구 예배당 건물(구 출신청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목사사택을 신축

1927(50) 영흥학교 패교 조치됨

1929(52) 제주노회가 전남노회에서 분립되어 제1회 노회가 성내 교회당에서 개회되어 초대 회계에 피선.

1938(61) 교회 구내에 노회경영. 성경학교 교사와 기숙사를 신축. 음력1010일 회갑겸 장로장립 20주년 기념식 거행

1941(64) 동부교회당 준공 그 동안 전국 장로교 총회 총대로 15-16회 참석하여 중대한 발언과 활약을 많이 했음

1945(68) 4월에 전남 보성군 겸백면 남양리로 피난 중, 8.15 조국 해방을 맞음. 10월광주시 서석동 1062로 이사

1946년(69세) 425일 오시에 광주 서석동 자택에서 소천함. 광주 방림동 기독교 묘지에 안장 후 1987103일 광주시 북구 망월동 광주공원 묘지로 이장

김재원 장로

 

<초기 제주도 개신교 형성사, 김재원 장로와 이기풍 목사>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제주도 기독교의 역사가 1908년 이기풍 목사의 선교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주도는 이기풍 목사가 도착하기 전인 1899년 이미 천주교의 공식적인 선교가 이루어진 곳이었다. 더구나 그 시기에 제주도에는 개신교 현지인 신앙공동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장로교회는 신앙공동체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이 공동체는 1904년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한국장로교회는 이기풍 목사를 그 섬에 보냈으며, 그는 그곳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선교활동을 펼쳤다기록에 의하면, 한국장로교회의 선교 이전, 제주도에는 두 신앙공동체가 있었다. 이호리 신앙공동체는 김재원의 전도에 의해 1904년에 시작되었다. 이 공동체는 선교사를 제주도로 보내달라고 한국장로교회에 요청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선교사업의 베이스캠프가 되었으며 제주도에서 여러 교회들이 설립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조봉호에 의해 1907년에 설립된 두 번째 금성리 신앙공동체는 제주도를 위한 근대화 및 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공동체는 기독교의 신앙을 애국하는 마음으로 연결시켰다이들 공동체를 통해 제주도 기독교 역사에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현지인들이 예배모임을 가졌고 그들이 선교사를 요청했으며, 그로 인해 제주도 교회들이 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초기에 교회들이 형성되는 맥락과 동일한 패턴을 보여주었다. 둘째는 개신교 신앙공동체들이 천주교의 선교활동이 진행 중일 때 시작되었는데, 사실상,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지도자들은 제주도의 근대화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었으며, 개신교를 통해 현지인들이 품고 있었던 종교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지금까지 김재원에 대한 구전과 신앙공동체에 대한 존재가 끊임없이 학계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사 관련 학계에서는 이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에비슨 선교사의 회고록 Memories of Life in Korea김재원에 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회고록의 내용은 김재원에 관한 구전과 거의 일치했다. 에비슨의 회고록이 제주도 신앙공동체의 시작과 성장을 재구성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 셈이다이 두 신앙공동체는 1908년에 합류되었다. 그 결과, 초기 제주도 교회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이기풍 목사의 선교활동과 함께, 초기 제주도 개신교의 두 개의 흐름이 하나로 합류되었던 것이다. 이 공동체들의 특성은 한편으로 질병의 치유를 통한 선교와 다른 한편으로 근대화를 향한 선교였다. 여기에는 현지인들과 이기풍 목사의 좋은 협력이 있었다. 이와 같이 한국장로교회의 초기 제주도 선교는 두 공동체들의 합류를 통해서 현지인들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답했다고 하겠다.

(글 출처-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225517)

김재원 장로 내외 (출처- 김씨 family | 김재원 장로님 내외 - Daum 카페)

김재원 장로 묘지 (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새목포제일교회 공원묘지)

 

제주도 최초의 세례교인이자 이기풍 목사를 도와 제주선교에 헌신했던 김재원 장로의 묘지가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새목포제일교회 공원묘지에서 발견됐다. 당초 김 장로의 묘지는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소재의 광주공원 묘지에 안장됐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갓을 쓴 안창호로 알려진 인물 가운데 왼편에 있는 사람이 이기풍 목사로 확인됐다.

발견된 묘지는 이기풍 목사 증손자인 이준호 목사(광주풍성한교회)가 증조부를 도왔던 인물들을 찾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이 목사는 김장로의 정보를 찾는 과정에서 후손들과 연결이 됐다면서 묘를 찾기 위해 교회 공원 묘지를 일일이 대조했다고 전했다. 이어 한국교회사에서 선교사를 제외한 국내인들의 정보가 많이 없다이번의 발견으로 기록을 바로 잡게 됐다고 밝혔다김재원 장로는 어비슨 선교사에게 제주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기독인이다. 이후 서상륜에게 양육을 받았다. 그는 제주로 돌아와 죽다 살아난 증거로 자신의 수술자국을 보여주면서 전도했다. 이후 어비슨 선교사에게 목회자를 파송해줄 것을 요청하고,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07년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이기풍 목사를 파송할 것을 결의했다김 장로는 성내교회에서 영수로 교회를 섬기다 1917년 제주 최초의 장로 장립을 받았었다교회 공원묘지에는 김재원 장로의 아들 김은식 장로도 함께 묻혀 있다김재원 장로는 1893년 윤도원과 결혼해 12녀의 자녀를 두었다.

김은식 장로는 41녀가 있다. 전 목포대 김정민 교수와 목포요양병원장인 김성민 목사가 김 장로의 차남과 삼남이다.

(출처 : 가스펠투데이(http://www.gospeltoday.co.kr))

1908년 이기풍 목사와 김재원 장로, 홍순홍 장로, 김행권 등이 향교골에 성내교회를 세웠다.

1917년 김재원 장로, 홍순홍 장로가 제주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1992년 창립 75주년 기념비에 김재원 장로, 홍순홍 장로의 공로가 기록 되어 있다.

성내교회에 세워진 이기풍 목사, 김재원 장로 공적비

성내교회에 세워진 이기풍 목사, 김재원 장로 공적비

성내교회에 세워진 이기풍 목사, 김재원 장로 공적비

제주노회 창립기념 사진. 앞줄 왼쪽에서 8번째 김재원 장로, 뒷줄 8번째 이기풍 목사
(출처: 제주기독신문 캡처)
 

 

<3. 조남수 목사 (1914- 1997),  모슬포교회,  한국판 쉰들러,  조수교회 출신)>

조남수 목사(1914~1997)  

(출처- 제주 4·3사건 때 양민 살린 '한국판 쉰들러'.. 모슬포교회 故 조남수 목사 화해 사역 재조명)

 

제주시 한경면 조수리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유학을 했고, 1943년 조선신학교를 졸업해 이듬해 목사가 됐다. 1947년 모슬포교회 8대 목사로 부임했다. 4·3의 발발한 1948년 군·경은 대정읍 출신 좌익 총책을 검거하고, 무장대(산사람)에 협조한 100여 명의 명단을 입수했다. 만주 독립군 출신으로 당시 모슬포경찰서장을 맡고 있던 문형순(1897~1966)은 이들에게 자수를 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처형될까봐 두려워 아무도 자수를 하지 않았다. 입산한 무장대 중에는 가족과 이웃이 있었기에 쌀과 돈, 옷과 양말을 내준 양민들이 많았다. 이 사실을 고백하고 자수를 하면 죽임을 당할 것으로 여겼다. 이 때 조 목사가 자수를 권고하는 강연에 나섰다. 그는 문 서장에게서 자수하는 사람은 죄의 유무를 불문에 붙여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첫 강연에서 자수를 한 100여 명이 처형을 당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자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대정은 물론 한림·화순·중문·서귀포에서 강연 신청이 들어왔다. 150회에 걸친 강연으로 3000여 명이 자수를 해 목숨을 건졌다. 조 목사는 자수를 했다가 처벌을 받으면 내가 먼저 자결 하겠다며 목숨을 담보로 한 연설로 양민들을 설득시켰다. 무장대의 협박으로 삐라를 살포했다가 사형 집행이 확정된 양민 20명은 조 목사가 개과천선에 책임지겠다고 군·경에 애원해 살아남게 됐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물론 도민들에게 귀감이 된 조 목사의 사명감은 사명의 길로 거듭났다.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news.com)

 

조수교회 건립은 조남수 목사 공이 크다하겠다. 조남수 목사 일생에 관련하여서는 파일로 올리도록 함(내용이 많아서) 1971년 신자 수가 늘면서 조수리 331-1번지에 교회가 신축되었다. 현재 교회는 2008년 5월 3일 헌당 된 성전으로 2017년 새로 지은 건축물이다. 또 조수교회 목사을 중심으로 신자들께서 한라산 중턱에 콩을 갈아 수확하여 판매하고 비엔날레를 유치하여 얻은 종자돈으로 히말라야 지역에 신학대학을 세워 선교사들을 양성하고 있다.

[출처] 제주시 한경면 조수리 조수교회의 발상|작성자 곰솔 김원순)

 

제주 모슬포항구 인근 진개동산에 건립된 조남수 목사의 공덕비 (제주 환경일보)

제주 4.3 사건 (1948)위령비, 김남원 면장, 조남수 목사, 문형순 경찰서장 공덕비

제주 모슬포항구 인근 진개동산에 건립된 조남수 목사의 공덕비.

 

진개동산이라 불리는 모슬포 항구 인근 언덕길에는 세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있다. 왼편의 4·3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비와 오른편의 당시 경찰서장 문형순을 기리는 공덕비 사이 한가운데에 한 목회자의 공덕비가 놓여있다. 주인공은 모슬포교회를 담임한 조남수 목사이다. 조남수 목사를 제주 사람들은 한국판 쉰들러라고도 부른다.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에서 학살의 위기에 처한 수많은 유태인들을 구해냈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실제 인물 오스카 쉰들러에 비견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조국 해방이 되었을 때 조남수는 제주에 남아있던 유일한 목회자였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향해 가던 무렵, 일본은 미국이 한반도 진격을 위해 제주를 먼저 공략할 것에 대비해 가장 의심되는 존재인 교회들 대부분을 폐쇄하고 목회자들은 육지로 이주시켰다. 조남수 목사는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이유로 한림교회의 강문호 목사와 함께 제주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목회자에 대한 배급중단 처분 때문에 간신히 연명해야 했고, 의지하던 강문호 목사마저 미군의 공습으로 교회당과 사택이 폭격을 맞고 가족과 교우들까지 잃는 바람에 큰 충격을 받아 섬을 떠나면서 그야말로 외로운 처지가 됐다. 기적처럼 해방이 왔지만 제주도 곳곳에 산재한 24개 교회를 조남수 목사 혼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낙심해있던 이도종 목사를 설득해 복귀시키고, 육지로 나간 강문호 목사를 불러들여 닫혀있던 복음의 문을 다시 열었다.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제주의 교세는 빠르게 회복되는 듯했다.

그러나 1948년 벌어진 4·3사태로 제주에는 또 다른 암흑기가 찾아왔다. 좌익과 우익이 서로에게 가차 없이 총부리를 겨누면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무장대 혹은 토벌군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가옥이 불타고, 크고 작은 약탈을 당하는 성도들은 부지기수였다. 조남수 목사는 이 난국 속에 절친한 동역자 이도종 목사를 잃었고, 모슬포교회를 함께 섬기던 허재성 장로와 최순임 허영국 고창선 등 여러 교우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잇달아 지켜봐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조 목사 본인까지 한밤 중 무장대의 습격으로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 뻔한 위기를 넘겼다. 이러한 극단적 상황에서도 조 목사는 모슬포경찰서를 찾아가 설득을 시작했다.“우향도 좌향도 모르는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을 막아야 합니다.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약속해주십시오. 이 일에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자신이 무장대의 습격을 받은 지 닷새 후부터 조남수 목사의 자수선무 강연이 시작됐다. 첫 강연을 듣고 자수한 100여 명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퍼져나갔다. 강연은 무려 150회나 계속됐다. ‘자수했다가 처벌 받는 일이 생기면 내가 먼저 자결할 것이라는 그의 다짐에 사람들은 진심을 느꼈다.

총부리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한쪽 편을 들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의 사면에 앞장서고, 억울한 피해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두루두루 주변을 세심하게 살핀 조 목사 덕분에 수천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보존했다. 주민들 손으로 목사의 공덕비가 세워진 사연은 이러하다. 조남수 목사가 보여준 화해자로서 삶은 4·3사태의 기억이 사람들 뇌리에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고 나란히 남아있을 것이다. 모슬포교회 내 사료전시관에는 제주선교 역사와 함께 조 목사의 빛나는 행적이 소개되고 있다. [박창건 목사의 제주교회이야기]

(출처- (8) 4·3사건과 조남수 목사 공덕비 < 박창건 목사의 제주교회이야기 < 힐링 < 기사본문 - 주간기독신문)

 

조남수 목사와 문형순 대장의 대화

 

.조남수 : 밤에는 공비의 흉기에 양민이 죽고, 낮에는 군경의 총에 혐의 양민이 매일 같이 죽고……30만 도민이 모두 죽겠으니 백성 없는 나라를 세우겠습니까?

문형순 : 제주도는 좌익운동의 온상지라고 듣고 왔습니다. 한라산 토벌대에서 노획한 불온문서인데 이 명단에는 부락민 90%가 공비들에게 식량을 비롯한 각종 생필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조남수 : 왜곡된 지식은 중대한 과오를 범할 소지가 있습니다. 제주도는 일본과 가까워 유학한 분들이 많고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많습니다. 애국운동 사회운동을 하다 보니 좌익으로 몰린 분도 있고 또한 과격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 숙청되고 도피하고 현재 남아 있는 자들은 극소수의 부화뇌동한 사람들이며 …… 방금 보여주신 불온문서 명단 역시 동조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칠야삼경에 무장 공비가 나타나서 총기를 들이대고 내놓으라는 것을 누가 감히 불응하겠습니까?

(출처 : 나정연복음신문(http://www.njygn.com)

 

조남수 목사의 선무강연

 

여러분의 주소와 성명이 기재되어 있는 명단을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 명단에 기명된 사람들의 생명은 어쩌면 시간 문제만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살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대로 자수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불문에 부치기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자수하였다가 그분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죽임을 당하면 나는 여러분 앞에서 할복할 것을 약속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믿고 자수하십시오. 나는 기독교 목사입니다. 내가 강연회 폐회를 선언하고, 군중에게 자수할 사람은 내 뒤를 따르십시오.” 모슬포 경찰서에 따라온 사람은 약 300명 가량이었다. 집에 와 보니 수십 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다시 경찰에 인계하였으며 계속하여 밀려들었다. 며칠 동안은 계속하여 집으로 밀려드는 자수자들을 받아 경찰에 인계하는 일로 즐거운 비명을 울렸다. 이 소식이 요원의 불길처럼 각 부락에 퍼져 나갔다. 대정 지역에서는 각 부락을 빠짐없이 순회하며 자수 강연을 하였으며, 다음은 중문면, 서귀면까지 서쪽으로는 고산, 용수, 두모, 신창, 판포, 월령, 귀덕까지 순회하면서 150여 회의 자수강연을 가졌다.

(출처 : 나정연복음신문(http://www.njygn.com)

조남수 목사 공덕비  (출처- 생명을 살린 신앙 – 조남수 목사의 제주 4·.. : 네이버블로그)

모슬포교회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모슬포교회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모슬포교회에 있는 사료관. 뉴스앤조이 박요셉   (출처 : 뉴스앤조이(https://www.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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