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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이도종 목사 (1892- 1948)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25. 12. 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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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이도종 목사  (출처- 이도종(목사) - 나무위키)

 

제주 출신 1호 목사, 제주 출신 제1호 순교자이다. 순교자 이도종 목사는 1892년 9월 13 제주도 애월읍 금성리에서 이덕연과 박열선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한문을 읽으며 선비 행세를 하였다고 한다. 관읍장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고 세인의 귀여움과 부러움을 샀다. 1908년 이도종이 17세에 제주도 선교사 이기풍목사를 만나 예수를 믿었다. 1915425일 이기풍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도종은 이기풍목사의 소개장을 들고 평양 숭실중학교(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입학, 나이 34세로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 1926년에 20회로 졸업 후 1927113일에 강도사 인허를 받았고 1927년 6월 26에 전북 김제읍교회에서 안수 받아 제주1호 목사가 되었다. 192836세에 김제 신풍리지역에서 김제중앙교회를 설립했다. 이때 가족으로는 김도전 사모(1892~1977)14남을 두었다. 목사로 김제중앙교회를 섬기던 이도종목사는 항일에 대한 남다른 견해로 언제나 감시의 대상이었다. 어느날 지역 유지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맡은 이도종목사는 당시 시국과 관련한 연설을 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갔다. 일본 경찰은 이도종목사가 제주출신이라는 점에 그의 시국관련 행동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그의 아들 이영복씨(현재 80)는 증언하고 있다. 1929.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곳이 고향이면 어떻고 타향이면 어떠하겠냐 생각하겠지만 이도종목사는 고향 제주의 첫 목회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주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자 제주에 다시 가자라고 다짐했다. 아들 이영복씨는 아버지 이도종목사가 고향으로 가면서 제주 지역 농어촌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주출신 첫 목회자 이도종목사는 고향을 찾은 이듬해 부터 제주노회에 중심적인 활동을 하며 제주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다. 1930년 노회 서기를 시작으로 노회일을 맡으며 본격적인 전도활동에 들어갔다. 이도종은 신학교에 가기 전 1910(1921)년 협재교회 전도사(1)로 시무했고 졸업 후 1924-1925년까지 제주시 삼양교회의 전도사(2)로 시무, 신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전라북도 김제로 가 성말, 신풍, 대송, 판교, 봉월교회 전도사 자전거를 타고 2~3킬로씩 떨어진 교회들을 시무하였다. 김제 성말교회에 시무당시 미국선교사가 와서 설교를 하면 이도종목사가 통역하곤 하였다. 일제의 교회탄압으로 교역자들 대부분이 제주를 떠나 교역자가 거의 없었던 터라 이목사는 새벽부터 교회를 찾아가 인도하고 밤이 늦어서야 귀가했다. 이목사는 김제 신풍리에 중앙교회(3. 김제제일교회,  4.김제중앙교회,  5.중앙장로교회 모두 옥산리교회에서 분리되어 초기 역사에는 이도종 목사 사역이 포함되어 있다)를 세우고 목회할 무렵 한 결혼식 주례사 중에 시국관련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잡혀가기도 하였다. 계속된 일본경찰의 압력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김제에서 제주로 들어와 1929년 성읍교회(6), 신풍교회(김제), 1929년 고향 제주도로 돌아와 1931년 서귀포교회(7), 법환교회(8), 1932년 남원교회(9) 개척, 1933년에는 중문교회(10) 1934-35년에는 표선교회(11), 35-36년은 남원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35년 남원교회 시무 제6대 노회장에 선출되는 등 총 4회 노회장을 맡았다. 이목사는 제주지역에서의 종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직접 만주 상해까지 가서 모금을 해서 제주시 서문골 부근 지금의 제주 YMCA 건물 자리에 제주성경학교를 세워 제주교역자와 전도일꾼들을 양성했다. 성읍이나 표선교회에서 시무할 때에 공회당에서 시국강연을 하던 중 갑자기 일경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강연을 중지시키고 이목사와 주최자들은 함께 연행되고 삭발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1937년에는 79일에 고산교회(12)4대목사로 취임하고 가까운 용수, 두모(13 현 한경교회), 조수교회(14)도 맡아 시무하였다. 19384월 제주노회 신사참배 결의사건 이후 큰 환난을 당했다. 신사참배 결의를 위해 소집된 평양총회에 참석을 거부한 것이다. 평양총회에는 전국 노회 중 제주노회와 경남노회만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일제치하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조직 독립희생회(獨立犧牲會)제주지부를 결성해 제주지역 회원 4450명을 연결해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을 주도했다. 이후 나라와 민족을 위한 시국강연을 했다는 이유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 목사는 목회사역에서 은퇴한뒤 고산에서 농사를 지으며 일제의 환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어 1945년 해방후 와해된 제주교회를 회복시키는 일에 매달렸다. 그사이 제주도에는 조남수(趙南洙)목사가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있었는데 두사람은 보다 효율적인 전도를 위해 상의를 했다조목사님이 제주 남쪽을 맡으시지요제가 북쪽을 맡겠습니다같은 곳을 두사람이 다니는 것 보다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목회자가 거의 없는 교회들을 순회하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예배를 요청하는 곳을 다니다 보면 항상 밤이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피곤한 육신이었지만 주님이 주시는 용기와 힘으로 하루하루를 이겨나갔다. 그는 중산간지역 마을의 교인들을 돌봤다. 1948년에는 인성(현 대정교회)(15)과 화순교회(현 안덕교회) 전도목사(16)로 시무하고 김제중앙, 서귀포, 남원 등 10교회를 설립하는 등 이목사가 위임 또는 전도목사로 목회한 교회를 포함 21개 교회에 이른다.  194843한국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사건이 제주도에서 발발했다‘4·3제주폭동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민중봉기는 공산무장폭도에 의해 일어났다정부는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관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양민과 폭도를 구분치 못하고 난을 제압함으로 더 큰 사건으로 발전했다이럴 때는 조용히 숨어 있거나 선교활동을 제한해야 함에도 이목사는 담대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일을 계속했다예배를 원하는 곳이 있는데 목사가 신변의 위협을 받는다고 그것을 마다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1948년 한라산에서 공산 무장 폭도(남노당)가 난을 일으킨 제주도 4.3사건 시기인 1948년 6월 16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전거에 성경과 찬송을 싣고 화순교회로 예배인도하기 위해 떠난 이도종목사는 고산에서 대정교회로 오다 재정읍 인향동(순교지)(17)에서 남조선로동당 당원들에게 붙잡혔다. 총구를 이목사에게 들이댔다손들어어디 가느냐” “저는 목사인데 화순교회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당신이 양놈들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로구만당신은 분명 미 제국주의 스파이로군.우리를 따라 오시오변명도 소용이 없었다이목사는 자전거를 내팽개친 채 그들에게 끌려 산 속으로 들어갔다산 속에 그들이 기거하는 막사가 있었는데 이 때 이목사님하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리니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에 마른피가 엉켜붙었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화순교회 이집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행방불명됐다고 교회에서 걱정했는데 여기에 끌려 와 있었던 것이다이목사에 대한 취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목사님뵙고 싶었습니다예수교가 그렇게 좋다면 공산인민이 이 싸움에서 이기도록 간절히 기도좀 해주시겠습니까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목사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죄없는 양민을 죽이는 무신론집단의 승리를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다조금도 양보의 기색이 없는 이목사를 그들은 다른 10여명과 함께 막사밖 숲 속으로 끌고 갔다그리고 거의 실신할 정도로 두들겨 팼다계속 찬송을 부르는 이목사를 크게 파놓은 구덩이에 생매장을 해버렸다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이목사는 생의 마지막을 기도로 마치며 숨을 거두었다향년 58세였다.

 

<추가>

목사님은 자신의 성경과 회중시계를 땅에 놓고 나는 이제 하나님 앞으로 가니 이것들은 자네들에게 선물로 주겠네. 여러분들도 예수를 믿고 후일 천국에서 만나봅시다라고 말한 후 두 팔을 높이 들어 간절히 기도하며 큰소리로 주여! 이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구원 받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라며 기도하셨다 한다. 점차 흙이 쌓이자 목사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주여!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소리만 땅속에서 새어 나오다 뚝 끊어졌다고 한다. 실종 후 1년의 세월이 지나갈 무렵, 어느 날 몽치라는 별명을 가진 무장대 한 사람이 배가 고파 마을로 내려왔는데 마침 이 목사님의 동생 기종과 성종이 마을 입구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가 그를 발견한 후 두 형제가 덮쳐서 잡고는 고산지서로 끌고 갔고 그를 취조하는 가운데 이도종 목사님을 생매장시킨 사연을 실토하게 됨으로 이 목사님의 순교사가 밝혀지게 된 것이다. 몽치의 증언에 의해서 경찰과 가족, 그리고 교회관계자들이 인향동 부근 야산에서 일제 때 파놓은 1인용 참호에서 이도종 목사님의 부패한 시신을 찾게 되었는데, 목사님은 순교 당일 아침에 입고 나가셨던 비둘기색 두루마기를 입으신 채 엎드려 기도하시는 모습 그대로 유골이 남아 있었다 한다. 주변의 다른 참호에서는 달걀장사를 하던 대정 사람과 신도리에서 실종되었던 교인 처녀가 역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제주인물대사전, 블로그 꿈의사람, 제주일보151117)

부인 金道傳 여사와의 사이에 昌九, 永福, 元福, 泰福 4남과 딸 福順을 두었으며, 장손인 李東海 장로와 자손들이 그의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안성리 1639번지 대정교회 입구에는 순교자 이도종 목사 성지라는 돌탑이 세워져 있고, 왼쪽에는 1957424일에 세운 牧師 李道宗 記念碑가 있다. 2007년에 세운 기념비도 바로 옆에 있다. 20088월에 유해가 이곳(안성리 대정교회)에 이전안장되었다.  (출처- [향토문화] 제주인 1호 목사..무릉2리 이도종 목사 순교터 - 제주환경일보)

 

<추가>

그의 시신은 대정교회 교인들이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인근 삼방산에서 돌을 가져다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2003년 제주노회에서 순교자 이도종 목사의 순교자기념비를 새롭게 세웠다. 대정교회 앞에는 순교자기념비와 함께 오래된 대정교회의 기념종이 있다. 제주도는 전국에서 복음화율(5~7%)이 가장 낮은 지역이고 여전히 4.3사태의 아픔이 남아서 복음 전파가 어려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90여 년 전 ‘종교의 길’(道宗)이라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제주 방방곡곡을 누비며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 당함으로써 한 알의 밀알이 된 제주도출신 1호 목사 이도종의 헌신과 순교사실을 기억할 때, 머지않아 제주도에도 하늘의 영적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출처- <한국교회사81> 제주도 출신 1호목사 순교자 이도종의 이야기)

 

<추가>

<순교자 이도종 목사에 대한 장손 이동해 장로 증언>

(출처- "한국교회 순교의 신앙 회복돼야")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 목사의 장손인 제광교회 이동해 장로와 함께 이도종 목사의 유적이 남아있는 대정교회를 함께 찾았다. 이동해 장로가 생후 8개월에 이도종 목사가 순교하셨기 때문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고 그에 대한 얘기만 친척들을 통해 전해들었다고 한다. 이도종 목사는 어떤 성격이었냐는 질문에 "할아버지는 성격이 아주 급하고 호탕한 성격이라고 들었다"고 했다. 열정적인 성격이 목사가 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더니 장손인 이 장로는 "당시에 제주에서 평양까지 유학을 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도 숭실중학교와 평양신학교에 2번씩이나 유학한 것을 보면 선각자적인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겠느냐."고 답했다. 척박한 제주에서 처음에 어떻게 복음을 받아드렸냐는 질문에 그는 "이기풍 목사님이 제주에 오시면서 금성리에서 마을리장을 맡고 계셨던 증조부 이덕련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받아들였다고 들었다" "당시 이기풍 목사가 시장 한복판 식당에서 식사기도를 하는 것을 본 증조부께서 호기심을 보이며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대정교회 앞쪽에 들어서니 큰 기념비가 보였는데 바로 '이도종목사순교기념비'였다. '1892-1948 이도종 목사'의 이름이 새겨진 표지석 옆에는 오래된 순교비도 보였다. 이동해 장로는 이 순교비에 대해 "대정교회 성도들이 산방산에서 직접 돌을 구해다 세워놓은 순교비다"며 특별함을 나타냈다. 대정교회에 자주 오느냐는 질문에 그는"부끄럽게도 한 해에 두 번 정도밖에 오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올 때마다 할아버지의 품에 온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순교로 가족들의 아픔이 상당히 컸을 것 갔다고 했더니 이 장로는 "무엇보다 장남이었던 아버지가 큰 충격을 받고 결국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발길을 돌리셨다" "하지만 할머니께서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해주셨기에 내가 지금의 장로의 자리에서 섬길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고 얘기했다. 대정교회를 나서 이도종 목사의 순교지로 추측되는 곳을 함께 방문했다. 그곳은 당시 인양동 속칭 고린다리로 불리던 곳으로 현재는 대정지역에 위치해 있다. 이동해 장로는 "이도종 목사님은 주일을 앞둔 토요일에 말씀을 전하러 인양동으로 가기 위해 지름길로 가던 중 폭도들에 의해 생매장 당하셨다"고 했다순교지에서 이도종 목사를 생각하며 그가 생전에 즐겨 부르던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부르며 기도하던 이동해 장로의 눈에는 어느덧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이동해 장로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적 자세에 대해 "이제는 기복적인 신앙을 버리고 순교자적인 신앙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그래야 형태가 변질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고 강조했다. 척박한 제주에서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린 제주 1호 목사인 이도종 목사의 신앙적 용기와 열정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zzzini@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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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이기풍 목사는 제주 선교사로 재차 부임한 후 1928년에 회갑을 맞이하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노년에 접어들어 옛날처럼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성내교회에서 처음부터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던 김재원 장로의 동생 김재선 목사가 1928년에 제주도 출신으로서 목사로 장립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렸다. 이미 제주도 출신으로 전북노회에서 1927년에 임직한 이도종 목사에 이은 경사였다. ​김재선은 1921년 6월 제8회 전남노회에서 신학 지원자로 허락을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고, 1928년에 전남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고 제주도 삼양교회 담임목사( 1928- 1931 재직)로 부임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도종이 1922년 2월에 회집한 제9회 전남노회에서 신학 지원자로 허락을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하고, 1927년 6월에 전북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고 김제의 성말, 신풍, 월봉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김재선 목사는 1928년부터, 이도종 목사는 1930년부터 제주도 에서 사역하여, 이제 제주도가 나름대로 독립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여기에는 이기풍, 최흥종 두 목사의 배려도 컸다. 즉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제주의 경제 상황이 어려워진 가운데 전라남도 여러 지방까지 정기, 임시노회에 참석하고 이어서 긴급한 서류 작성을 위하여 노회 사무실을 찾아야 하는 교통비와 번거로움 등을 감안하여 제주시찰이 전남노회로부터 독립하여 제주노회로 서게 하였다. 이러한 독립은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와 전남노회에서 두 목회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 전남노회 및 총회의 결의

1930 9 12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한 제19회 총회 앞으로 전남노회는 제주시찰을 제주노회로 분립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당시 조직교회 6개처, 미조직교회 11개처였으므로, 형식상의 요건인 5조직교회라는 기준은 넘어섰다. 하지만 노회를 운영할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교통의 불편함을 감안하고, 분립 이후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이렇게 선택하였을 것이다. ‘전남노회 상황 보고는 다음과 같다.

4. 특별 형편

1. 제주시찰 구역은 형편에 의하여 금번 노회 결의로 분립 청원을 하오며

2. 제주 모슬포 지경에서는 반종교운동의 핍박으로 교역자와 직원의 곤란이 있사오며.

이상과 같은 청원을 받아들여서 총회는 이렇게 결정하였다.

​​. 전남노회장의 청원한 제주노회 분립 청원은 허락하되

1. 명칭 : 제주노회로                2. 장소: 제주 성내교회로

3. 시일 : 본년 11월 내로          4.조직 : 회장은 최흥종 씨로

5. 문부는 전남노회에 위임하기로 6. 재정은 전남노회 청원대로 2/3는 전남노회에게 1/3은 제주노회에게 주되 채권채무가 있으면 이상과 같이하기로

7. 전남노회 선교사 중 1인은 제주노회에 언권회원이 되어 방조케 할 일이외다.

이러한 총회의 허락에 의하여 제주노회는 1930 11 14일 창립 노회를 개최하였다.

창립 노회의 초록은 다음과 같다.

1. 장소: 제주 성내교회당          2. 일시: 11 14일 하오 8~17일 하오 1

3. 회원수: 목사 6, 장로 7, 언권방조회원 선교사 3, 목사 1

4. 임원선거: 회장최흥종, 부회장-김재선, 서기-이도종, 부서기-부상규,

    회계-김재원, 부회계이덕련

5. 목사 이동: 이도종 목사는 중문리, 법환리, 서귀포, 효돈 등 4개처 교회 전도목사,

김재선 목사는 성읍리, 세화리(김재선 목사 1933년 시무) 2처 교회, 남원리(남원교회 연혁 1932.10.15- 1934.1.31 이도종 목사 시무),  표선리(표선교회, 1948년 창립), 오조리, 성산포(성산포교회), 김녕리 전도목사(김녕교회)

 

(추가)

제주도 부흥의 주역 목회자들 (이도종)

제주도 교회는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이기풍 목사, 최흥종 목사, 김영식 목사, 조상학 목사 등 목회자들이 떠남으로써 새로운 목회자가 부임하는 1933년 후반에 이르기까지 약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가 1933년 중반부터 최희준 목사와 정순모 목사가 부임함으로써 부흥의 발판이 마련되었으며, 여기에 이도종 목사와 강문호 목사가 적극적으로 가세함으로써 제주도 교회는 일제 말엽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이도종 목사>

이도종 목사는 1927 6월에 전북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고 시무하다가 1930년부터 총회전도부 파송 제주도 전도목사로 황해노회에서 파송하였던 양성춘 목사의 후임으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맡았던 지역은 중문, 법환, 서귀포 3개처 교회였다. 이도종 목사가 1931년 제20회 총회 보고서에 서귀포교회가 설립되었으며……서귀포 신설 교회는 중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시민들에게 동정금을 모집하여 시가 500원의 구대를 매수하였사오며……라고 보고한 것을 통해 서귀포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32 9월 제21회 총회에서는 이도종 목사의 활동을 이렇게 말하였다.

제주 () 시무 목사 이도종, () 시무 구역: 동편 효돈 서편 서한현 지방, () 교인 도합 138, () 직원 도합 12, () 신설한 교회 1처에 교인 40, () 면려청년회 3처에 회원이 35, () 부인조력회 3처에 회원이 32.31) 이로 보건대 이도종 목사는 총회 전도부로부터 200원의 보조금으로 생활하면서 제주도의 영적인 성장을 노력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설 교회란 그가 세운 남원 기도처가 교회로 발전한 데 대한 설명이었다. 이도종 목사는 1932 11월에 삼양 지역에서도 다음과 같이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주 교회 진흥 활동>

제주 삼양교회에서는 조선진흥운동의 시기와 방법에 수응하여 진흥 활동을 개시한 바 10 16일부터 개인전도 공과를 수요일마다 가르쳐 제6회에 마치고, 11 13일부터 1주간 부인조력회를 표준하여 새벽기도회를 하고, 11 27일부터 1주간 서귀포교회 목사 이도종 씨를 청하여 매일 오전 5시부터 6시까지 교회 일동이 영적 부흥을 위하여 모이고, 오후 7시부터 8시까지는 불신자를 위하여 전도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제직회와 조력회를 합하여 전도대를 조직하고 11대로 나누어 사방 십리 안에 4천여 호 되는 각 마을을 11대로 나누어 매일 1 1구로 전도하여 매 구역마다 7일간 매일 다른 전도대를 파송하게 하였는데, 이 진흥운동으로 말미암아 크게 부흥하였다더라. 이 보도에 의하면, 이도종 목사는 삼양교회에서 한 주간 부흥집회를 인도하면서 삼양지역 전역에 걸쳐서 전도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삼양교회의 부흥을 크게 진작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도종 목사는 1933년에는 중문리교회에서 제주도 농촌 진흥 전도 강연회의 강사가 되어 순회강연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중문교회의 악대가 동반함으로써 청중 동원에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활동을 기독신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이도종 목사를 강사로 하고 중문 악대를 영솔한 농촌 진흥 순회 전도 강연단 일행은, 지방 각 기관의 후원을 수()하고 좌() 1 10개리 중요 농촌 집단 부락 12개처에 순회 전도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각 동리에서 인민회의소, 청년회관, 학교 등을 집회 장소로 허락 환영하고, 지방 인사들은 남녀노유가 총출동하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이 목사의 진정한 동포애 및 영육공존 양생의 활로를 전개시키는 순복음주의적인 사자고함과 같은 진정 열정에서 울려나오는 열렬한 설교에 성신의 뜨거운 불이 같이하여 일반 청중은 불교인, 보천교인, 유교학자를 물론하고 죄를 각성 통회하며……. 이도종 목사는 1935년부터 총회 파송 전도목사로서의 사역을 중단하고 단독적으로 전도목사로서의 사역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937 2월에 고산교회의 위임목사로 청빙을 받아서 부임하게 된다이도종 목사는 1935 2월부터 1939 5월까지 고산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동안에 교회를 부흥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의 재임기간의 부흥은 이렇게 비교할 수 있다통계에 따르면 낮예배 참석자가 38%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산교회는 2년 동안에 전반적으로 30%의 성장을 보여 줌으로써 자립의 단계를 넘어서 주변의 교회들에게도 나눠 줄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산교회는 주변에 있는 조수교회도 협력하였다. 그렇지만 이도종 목사는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1939년에 고산교회 위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원래의 전도목사 신분으로 전환하게 되고, 고산교회는 양동혁 목사가 맡는다. 이도종 목사의 사임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주된 이유는 1938 4월 성내교회에서 회집한 제9회 정기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된 데 대한 반성의 표현이었을 것으로 본다. 특히 강력한 후원자였던 탈마지, 스위코드, 크레인 등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도종 목사의 이러한 반성의 표현이 그의 순교로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출처-https://jjcbs.co.kr/index.php?mid=christianitydata&document_srl=52976&listStyle=list)

 

<이도종 목사 생가-  제주시 애월읍 금성상1길 11>

이도종 목사 생가 마을 길  (출처 이도종 목사 생가(The Pastor Dojong Lee's birth home) - 1코스 - 순례길자료 - 제주CBS )

이도종 목사 생가 입구  (출처 이도종 목사 생가(The Pastor Dojong Lee's birth home) - 1코스 - 순례길자료 - 제주CBS )  

이도종 목사 생가 내부  (출처 이도종 목사 생가(The Pastor Dojong Lee's birth home) - 1코스 - 순례길자료 - 제주CBS )  

​ 이도종 목사 생가 내부  (출처 이도종 목사 생가(The Pastor Dojong Lee's birth home) - 1코스 - 순례길자료 - 제주CBS )

 

<이도종 목사의 사역 교회>

 

<0. 제주금성교회) 이도종 목사 출신 교회, 시무 기록은 없다.

제주 금성교회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북제주군 애월읍에 위치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금성교회는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오기 전인 조봉호 전도사가 평양에서 신학을 마치고 돌아와 전도한 양석종, 조운길, 이덕련, 이도종 등 8명이 예수를 믿어 양석봉의 집에서 첫예배를 드렸다. 조봉호 전도사는 부유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경신중학교에 유학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숭실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고향 귀덕리에서 쫓겨나 금성리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다 제주도에 입도한 이기풍 목사를 도와 동역하였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지역 선교사로 정식으로 파송 받아 순회예배를 드리던 첫번째 교회가 금성교회이다. 금성교회가 제주 기독교 복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조봉호는 38세에 독립자금 모금에 앞장서다 붙잡혀 모진 고문 속에서 1920년 4월 28일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 후 이도종 목사는 금성교회 이덕련 장로의 아들로 태어난 금성교회 초대 성도이며, 제주도 제1호 목사이자 제주도 제1호 순교자이기도 하다. 이도종 목사는 복음 전도 중 4.3 사건 때 아쉽게 피살 순교했다. 금성교회의 첫 번째 예배 처소는 양석봉의 집였으며, 두 번째 예배 처소는 조봉호씨 생가였고, 세 번째 예배 처소는 이덕련 씨의 집, 1923년 네 번째 예배 처소는 지금의 금성리 591번지에 초가집을 짓고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출처- 제주 금성교회 & 곽지 해수욕장 : 네이버 블로그)

 

<금성교회 문앞 안내판>

제주출신 제1호 목사인 이도종목사(李道宗·1891∼1948)는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다 순교하였다.

제주읍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도종은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착실히 공부하며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의 나이가 열일곱이던 1907년, 제주선교사로 부임한 이기풍목사를 만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다. 평양의 폭력배였다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 전도자가 된 이기풍목사는 색다른 전도를 하겠다는 결심으로 제주 선교를 자원했던 것이다. 이기풍목사가 부임한 1907년 당시 제주는 육지와 다른 이방지대였다.풍속과 말도 달랐고 외지인에 대해서는 무조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이 때문에 이기풍목사는 서양종교를 전한다고 몰매를 맞고 너무 굶어 쓰러지기도 하는 등 숱한 고생을 했다.그러나 특유의 뚝심으로 13년을 사역하며 제주 최초의 교회인 성내교회를 비롯해 삼양 내도 금성 등 15곳에 교회를 설립했다.이도종목사는 이기풍목사가 전도한 첫열매이다. 이도종목사는 북제주군 애월읍 금성리 출신이다.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작성자 성경환목사

 

옛 금성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1. 제주 협재교회>  이도종 목사 1921년 전도사 사역 

협재교회  (출처- 한림 협재교회에서 같이 예배드려요/ 예배시간 .. : 네이버블로그 )

 

협재교회는 1921.02.11 창립한 교회이다. 1921년2월 당시 협재리는 300여세다가 살고 있는 큰 마을이었지만 토속신앙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당시 모슬포교회 최정숙 집사가 자비로 전도인을 파송하려고 물색하던 중 금성교회 이도종 청년이 전도인의 자격이 있다는 주위의 추천을 받아 그를 협재리에 파송하였다. 1948년 4.3사건 당시 예배당이 소각되어 개인주택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53년 170평 대지에 30평 규모의 예배당을 신축했고, 1979년에는 예배당 확장, 1997년 증축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협재교회는 지난 100년의 역사 동안 지역과 함께 하는 교회로 굳건히 자리매김해 왔다. 지역의 문맹퇴치를 위해 1952년부터 성경구락부를 개설해 운영했고, 기도처로 시작해 월령교회와 금릉교회를 분립하기도 했다.

1954년에 만들어진 종   (출처- 한림 협재교회에서 같이 예배드려요/ 예배시간 .. : 네이버블로그 )

 

옛 협재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2. 제주 삼양교회>  1924-1925 이도종 목사 사역

삼양교회

 

삼양교회의 시작은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1948년 4·3사건의 불길은 이 교회의 예배당을 집어삼켰고, 그와 함께 귀중한 문서와 기록들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남겨진 몇 편의 교단 자료와 구전,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삼양의 신앙 역사를 더듬어야 한다. 이 길의 시작엔 오주병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복음을 접한 후 철저히 회개하고, 믿음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집을 예배당으로 내어주었고, 삼양교회가 공동체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바쳤다. 그 회개의 감동은 단지 한 개인의 변화로 끝나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성내교회, 금성교회, 수원교회 등지에서 자발적으로 헌금을 보내왔다. 삼양은 그렇게 섬김의 연결 속에서 믿음의 싹을 틔우게 되었다. 나는 조용한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여느 교회와 다르지 않은 예배당이지만, 이 자리에 뿌려졌던 기도와 눈물의 깊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특히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생각하게 만든 인물은 이도종 목사였다. 삼양교회는 그가 사역했던 교회다. 평양신학교 재학 중, 목회자 없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삼양교회의 상황을 듣고 그는 과감히 휴학을 결심한다. 약 2년 동안 삼양에서 전도와 목회에 전념하며, 성도들과 함께 삶을 나눈다. 이후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에 깃든 헌신과 사명의 뿌리는 바로 이 교회에서 시작된 셈이다. 지금도 교회 마당 한쪽에는 그를 기리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삼양교회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4·3의 비극을 모두 지나왔다. 4·3 당시 예배당은 전소되고, 한 교인이 집에서 공비에게 피살당하는 비극도 있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다. 제주노회는 재건을 위해 20만 원을 지원했고, 성도들은 다시 벽을 세우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일본에 이주한 교우들은 자신들의 피 같은 노동 수입을 삼양교회에 보내왔고, 그 헌신은 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귀한 힘이 되었다.

[출처] 제주 기독교 순례길 답사기 9 - 삼양교회|작성자 베이스캠프

옛 삼양교회

 

삼양교회는 1915년에 설립되어 교세를 확장해가다가 1949년 1월 3일 4·3사건의 여파로 예배당이 소실되면서 당시의 모든 기록이 없어지고 말았다. 1951년에 원래 자리를 신축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삼양2동 김건의씨(45)는 관련하여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예수를 믿으면 ‘반동(무장대에 협조 하니 않는 주민들)’이라고 불렸고, 우리 가족도 당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산사람(무장대)에 의해서 피해를 많이 봤다. 우리교회가 올해로 108년이 되었다. 예전에는 우리집 바로 옆에 교회가 있었는데, 산사람들이 와서 전부 우리집과 함께 교회를 불태웠다. 당시 교회 자리의 땅은 교회가 팔았다가 지금의 교회를 짓고 주차공간을 마련하려고 교회가 다시 매입했다. 교회 재산은 모두 불타버렸다.

(출처- 삼양교회 옛터 - (사)제주다크투어)

삼양교회 100년사  (출처- 제주기독신문 | 교계소식 > 교계소식)

 

창립105주년을 맞은 삼양교회(담임 정석범목사)가 지난 4일 ‘삼양교회 100년사’ 발간 감사예배를 드렸다. 편찬위원장 송중용장로는 “자료를 정리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일은 1949년 4·3사건으로 교회가 소실되면서, 1915년부터 34년간의 기록이 소실된 것”이라며 “그럼에도 지난 100년의 역사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이며, 현재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음을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발간한 ‘삼양교회 100년사’가 제주교회의 한 이정표가 되고, 우리 후손들의 길잡이가 되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한편 ‘삼양교회 100년사’는 제주 초기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과 삼양교회의 설립과 성장, 삼양교회에 대한 초기 기록 모음, 예배당 신축과 이전, 소실, 재건축의 역사, 제2의 창립으로 도약하는 과정, 100주년 기념사업, 세례·입교·등록교인 명부 등 총 11개 챕터로 나뉘어 교회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제주 삼양교회 교회 연혁>

1921년 12월    오주병을 영수로 고원구, 신평석, 김병학을 서리집사로 세우다.

1922년  삼양2리 2208번지에 초가35평 예배당을 건축하다.

1924년  이도종 전도사 부임 / 1925 사임

1924년 4월  김정복 목사 부임(위임,동사목사) / 1926 사임

1924년 8월 6일  당회조직, 장로 장립 / 오주병

1926년 4월  김성원 목사 부임 / 1928 . 4 사임

1928년  김재선 목사 부임 / 1931 사임

1928년 1월  장로 장립 / 김근서

 

옛 삼양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이도종 목사가 사역한 전북 김제의 첫 교회들>   (출처- 전북 김제의 첫교회들 : 네이버 블로그)

송지동교회(1897)    봉월교회(1900/입석리교회)    대창교회(1903)   월성교회(1903)

금산교회(1904/ 두정리교회)   대송교회(1904)   복죽교회(1904)   김제동부교회(1905/선인동교회)

난산교회(1907)  연정교회(1908)   원평교회(1909/구봉교회)

김제제일교회(1910/옥산교회)  김제중앙교회(1910/옥산교회)  중앙장로교회(1910/옥산교회)

 

 

<3. 김제 제일교회>  1926-1928년 이도종 목사 사역

김제제일장로교회    (출처- 전북 김제의 첫교회들 : 네이버 블로그)

 

<교회연혁)

1910. 7. 10. 김제옥산교회 창립
    주은선 조사 시무, 당회장 이율선 선교사
1913.   김응규 목사(2대) 부임
1917.   윤식명 목사(3대) 부임
1921.   목조 예배당 신축(40평)
1922.   김여일, 정공선 장로 장립
1926.   이도종 목사(4대) 부임
1928.   유재영 조사(5대) 부임

 

<4. 김제중앙교회> 1927- 1929년 이도종 목사 시무 

 

        김제중앙교회

 

(교회연혁)

1910년 7월 7일  김제 옥산리에 옥산교회가 설립

1910년 7월 7일  김여일외 몇몇 신자들이 읍중심지인 옥거리에 옥산리 교회를 세우다.  

순회전도 목사 리눌서 선교사의 지도와 치리를 받다

1917년 8월 27일  리눌서 선교사와 동사 목사 김응규가 김제 남쪽 6처(주:옥산리교회 포함) 교회를 맡아 시무

1922년 3월 15일  김응규목사 사임

1922년 8월 23일  제주선교를 중단하고 돌아온 윤식명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

1925년 1월 1일  교회 명칭이 노회록에 김제읍교회로 통상 사용하게 되다.

1926년 11월 8일  윤식명 목사 사임

1927년 6월 8일  전복노회 21회 정기회에서 강도사 이도종 씨를 청빙하고 목사 안수 후 허락 받다.

1929년 5월 30일  전복노회 7인 전권위는 김제읍교회를 양분시켜 원교회는 '김제중앙교회'로 하고 분립한 교회는

김제 옥산리 교회로 명칭 하도록 결의

1929년 11월 19일  전복노회 23회 3차 임시회에서 담임 이도종 목사 사면, 황재삼 목사 6대 담임목사로 청빙 허락

 

<5. 중앙장로교회> 이도종 목사 시무 기록 없다.

중앙장로교회

 

(교회연혁)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곳 김제지역에 ​1894년 미국 남장로교회 레이놀드(W.D Reynolds)   ​선교사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래되어

1910. 7. 7. 김여일 외 몇몇 신자들이 읍중심지인 옥거리에 옥산리 교회를세우다.

순회전도 목사 리눌서 선교사의 지도와 치리를 받다.

1917. 8. 27. 리눌서선교사와 동사목사 김응규가 김제남쪽6처(주:옥산리교회포함)교회를 맡아

1922. 초 옥산리에다 목조 24평의 예배당을 신축

1925. 교회 명칭이 노회록에 김제읍교회로 통상 사용하게 되다.

1929. 5. 30. 전북 노회는 김제읍교회를 양분시켜 원교회(源敎會)는 김제중앙교회로 하고 분립한 교회는 

​김제 옥산리 교회로 명칭하도록 결의.

 

 

<6. 제주 성읍교회> 1929년 이후 이도종 목사 시무 기록이 없다.

제주 성읍교회  (출처-https://m.blog.naver.com/ablemay/220969246410)

 

성읍교회는 제주도에 이기풍 선교사가 세운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이다. 1907년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파송된 이후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타문화권 선교사 파송이 이루어진 것은 1913년에 이르러서였다. 이선광 전도사는 1908년 제주선교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선광 전도사는 평양노회 여전도회에서 파송을 받아 상당 기간 제주사역을 계속했다1908년 도내 첫 교회인 제주시 성내교회가 세워진 다음 해(1909) 성읍교회가 창설되었다.  450평 규모의 교회시설은 1970년에 개축된 것이다.(제주성읍민속마을 홈피, 미디어제주 110120 고희범 글1917 126일 제주도에 임정찬을 전도목사로 파송하였다. 임 목사는 1918 421일 성읍 지방에서 이미 세례 받은 교인 양경수를 중심으로 성읍리교회의 기초를 탄탄히 하였고 1918 76일 전남노회 제2회 회의에서 황해노회 전도구역으로 제주 동편 6개면을 허락받아 선교에 주력하였다.이 뿐만 아니라, 황해노회 부인전도회에서는 여전도사로 김경신을 파송하여 임정찬 목사를 도와 전도에 조력케 했으며 이 일로 더욱 힘을 얻은 임 목사는 1918 928일 성읍지역의 교회재건과 전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황해도 지역의 수해로 인해서 1922 915일 임정찬 목사는 황해노회로 복귀하였다(제주기독신문 080926)

종탑은 1909년 교회 설립 때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제주 현무암을 거친다듬하여 정사각형 평면에 사각뿔대 모양으로 아랫단을 만들고 그 위에 정사각기둥 모양으로 윗단을 쌓았다. 각 단은 약 3m 높이이다. 그 위에 철골을 세워 십자가를 맨 위에 세우고 돌로 된 탑의 바로 위에 종을 달았다. (출처 : 제주환경일보(http://www.newsje.com)

옛 성읍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7. 제주 서귀포교회>  1930- 1933, 1936- 1939 이도종 목사 시무 

서귀포교회  (출처- 서귀포교회 - YouTube )  1966.4.7. 서귀포제일교회와 분립

  •  (서귀포교회 연혁)

    1966.04.07 

    제50회 제주노회가 교회분립허가 부동산 매각 처분 후 반분하고 남부교회 분립(현 제일교회)

    (서귀포제일교회 연혁)

    1966년 4월 7일부동산 매각 처분 후 반분하고, 남부교회(현, 서귀포제일교회)와 북부교회(현, 서귀포교회)로 분립

(교회연혁)   (출처- 서귀포교회)

1928.02.08  초대 양성춘 목사 황해노해의 전도목사로 파송, 서귀면 서귀리 700-5 박경옥씨 자택에서 창립예배('29 사임)

1930. 제2대 이도종목사 부임('33 사임)

1930.03. 서귀면 서귀리 454번지 대지100평과 초가 2동을 매입, 예배당으로 헌납

1932. 강현신 전도사 부임(36 사임)

1934. 제3대 강문호 목사 부임('36 사임)

1936. 제4대 이도종 목사 부임('39 사임)

1939. 제5대 이근택 목사 부임('40 사임)

1940. 제6대 조의환 목사 부임('42 사임)

1942. 제7대 김응규 목사 부임('44 사임)

1944.07.30 제8대 조남수 목사 부임('47.9.10 사임)

 

옛 서귀포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7-1. 서귀포제일교회>  1930- 1933, 1936-1939 이도종 목사 시무 

서귀포제일교회, 1966.4.7. 서귀포교회에서 분립

  •  (서귀포교회 연혁)

    1966.04.07 

    제50회 제주노회가 교회분립허가 부동산 매각 처분 후 반분하고 남부교회 분립(현 제일교회)

    (서귀포제일교회 연혁)

    1966년 4월 7일부동산 매각 처분 후 반분하고, 남부교회(현, 서귀포제일교회)와 북부교회(현, 서귀포교회)로 분립

(교회연혁)   (출처- 서귀포제일교회 ) 서귀포교회와 초기 교회 연혁이 같다. 

1928.02.08  초대 양성춘 목사 황해노해의 전도목사로 파송, 서귀면 서귀리 700-5 박경옥씨 자택에서 창립예배('29 사임)

1930. 제2대 이도종목사 부임('33 사임)

1930.03. 서귀면 서귀리 454번지 대지100평과 초가 2동을 매입, 예배당으로 헌납

1932. 강현신 전도사 부임(36 사임)

1934. 제3대 강문호 목사 부임('36 사임)

1936. 제4대 이도종 목사 부임('39 사임)

1939. 제5대 이근택 목사 부임('40 사임)

1940. 제6대 조의환 목사 부임('42 사임)

1942. 제7대 김응규 목사 부임('44 사임)

1944.07.30 제8대 조남수 목사 부임('47.9.10 사임)

 

옛 서귀포제일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8. 제주 법환교회> 1930.4- 1934.12 이도종 목사 시무

제주 법환교회   (출처- “450개 제주교회 연합통해 제주 영적 부흥 기대” < 실시간뉴스 < 종교 < 기사본문 - 제주매일)

제주 볍환교회   (출처- 제주법환교회 100년사 (2017) : 네이버 블로그) 

하와이 이민노동자로 자신의 고향인 제주에 법환교회가 세워지도록 물심양면 헌신한 강한준의 가족사진.

 

저는 현재 하와이에서 살고 있는 강한준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5년 동안 매년 미화 60원씩을 보내겠습니다. 이 돈으로 제가 살던 제주의 법환리에 전도인 한 명을 보내셔서, 교회가 세워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전남노회 전도국에 이런 내용을 담은 편지가 전해진 것은 19176월의 일이었다. 강한준은 제주에서 살다가 천주교도들과 연루된 신축교란, 일명 이재수의 난이 벌어졌을 때 마침 조선인의 대규모 노동이민이 이루어지던 하와이로 이주한 인물이다. 이민하는 과정에서 예수를 믿게 된 강한준은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고, 하와이의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섬기면서 법환리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처음 5개월 동안은 15원씩, 이후로는 25원씩의 전도비를 꾸준히 보냈다. 당시 제주선교사 월급이 22원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강한준의 지원이 제주선교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법환리 전도를 담당한 인물은 윤식명 목사였다. 윤 목사는 이미 1914년 전라노회를 통해 제주도에 파송되어 모슬포를 중심으로 한 산남 일대에서 왕성한 사역을 펼치는 중이었다. 산남지역은 뿌리 깊은 유교사상으로 복음이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윤식명 목사와 그의 동역자들은 합심하여 전도에 매진해 상당한 열매를 거두었다. 기독신보 1916712월자에는 제주선교와 관련해 이런 내용이 실렸다. “가장 재미있는 곳은 법환리라 하는 500~600호 되는 동네입니다. 그 동네에 강만호라 하는 80대 노인이 전도를 듣고 믿기로 작정한 후 주일을 부지런히 지키는데, 예배당에 주일마다 약 100명씩 회집하니 감사한 일입니다. 누구든지 제주도의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여 주십시오.” 이런 과정을 거쳐, 강한준의 지원금을 보내오기 시작한지 4개월 만인 1917101일 법환교회의 설립예배가 열렸다. 태평양 너머 하와이에서 부르짖던 한 사람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은 놀라운 섭리로 응답하신 것이다. 하지만 윤식명 목사의 사역이 마냥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교회 설립 이듬해 10, 윤 목사는 법환리로 전도하던 길에 만난 한 신흥종교 신도들에게 집단으로 폭행당해 한쪽 팔이 부러지는 봉변을 당한다. 뿐만 아니라 다시 한 해 뒤에는 3·1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조봉호 전도사의 독립자금 모금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까지 치른다.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법환교회의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광주에서 파송된 원용혁 조사는 윤 목사와 애환을 함께 하며 법환교회를 열심히 섬겨, 부인조력회(여전도회)와 당회가 조직되어 안정된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오랜 기간 공헌한다. 전도부인 천아나는 법환교회의 첫 번째 전도사로서 자신이 가진 은사를 발휘하여 교회 부흥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법환포구 너른 광장에서 주민들의 일손을 도우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던 그녀의 모습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져있다. 이들의 수고를 통해 성장한 법환교회는 1922년 6월에 첫 예배당을 마련한다. 초가 2동과 대지 100평의 예배당을 구입하는 데는 다시 하와이에서 강한준이 보내준 거액의 헌금이 큰 힘이 됐다. 이후 80년 동안 법환교회는 복음을 위해 한 길을 걸어왔다. 한일월드컵축구대회가 열린 2002년 당시에는 월드컵기념교회로 선정돼, 각계의 지원 속에서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선교와 문화사역을 활발하게 펼치기도 했다. 법환교회 역사관에는 이 모든 세월들이 집약되어있다. 지금도 법환교회는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라는 슬로건 아래 강한준이 이역의 섬에서, 윤식명 원용혁 천아나가 삼다도의 현장에서 꿈꾸었던 소망을 계속 현실로 이루어가는 중이다(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옛 법환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9. 제주 남원교회>  1932- 1934 이도종 목사 시무 

제주 남원교회  (출처- 제주기독신문 | 교회탐방 > 교회탐방)

 

남원교회는 일제강점기에 남원읍에서 가장 먼저 설립되었다. 1932년 10월 15일 제주노회 소속 이도종 목사가 파송되면서 개척 전도가 시작되었다. 그는 남원리 99번지에 방 한 칸을 빌어 오성원, 강기정 부부와 장년 10여 명과 유년 10여 명의 신자를 모아 예배를 하였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기에 교회에서 활동하는데 많은 억압과 제약이 따랐다. 1936년부터 10여 년 간 교회는 교역자 없이 일제의 핍박 속에 시련기를 겪게 되자, 1942년 오성원과 현묘생 장로는 교회 대지와 건물을 매도하고, 매도금과 교회재정 잔액을 제주노회에 기탁하고 떠남으로 교회는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1945년 해방 후 돌아온 오성원과 현묘생 장로 가정은 교회 재건을 위해 기도하던 차에 1947년 11월경 제주시 성안교회(서부교회) 이윤학 목사에 의해 남원초등학교 교정에서 전도 집회를 가짐으로써 상당한 신자를 얻게 되어 오성원과 현묘생의 가정을 돌아가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런 전도 활동으로 1950년 2월 1일 남원리 139번지에 대지 297㎡, 초가 594㎡를 매입하여 교회를 재건하게 되었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재건된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1950년 7월 남원고등공민학교(남원중학교 전신)를 남원면으로부터 인수하여 1년여 간 운영하였다. 1965년 남원리 152번지에 석조 슬레이트 24평 규모의 교회를 신축하였고, 여전도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2년에 청년회 및 중등부 등 더욱 체계적으로 교회의 조직을 구성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 교회가 날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1977년에 남전도회(현 남선교회)가 조직되었고, 교회도 증축하였다. 2년 후 1979년 5월에 남원리 156번지에 2,380㎡를 매입하고, 1980년 이곳에 먼저 유치원 건물 79㎡를 신축하여 남원지역사회에서는 처음으로 육아교육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86년에는 992㎡ 규모의 교회를 신축하였는데 이것이 현재의 남원교회이다. 출처 : 제주환경일보(http://www.newsje.com)

 

(교회연혁)  (출처- 남원교회)

1932-10-15  제주노회 소속 이도종목사님이 파송되어 남원리 99번지에 방 한칸을 빌어 개척 전도를 시작하다.   오성원 강기정  씨 가정(부부)과 장년 10여명과 유년10여명의 신자를 얻어서 기도처로 예배드리다.

1933-09-07  제주노회에서 남원교회 설립허락 받음으로 교회가 창립되다. 이도종목사 부임

1933-12-12  김용련장로 난방기 2대 헌납 

1934-  좌한경전도사 부임(6개월 시무)

1934-01-31  이도종목사 사임

옛 남원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10. 제주 중문교회>  1933- 1934년 이도종 목사 시무

제주 중문교회  (출처- 제주중문장로교회-제주여행객의 인도자 오공익 목사 시무하는 교회)

 

서귀포시 색달동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교회이다. 1914년 최대현 전도인의 전도 활동으로 이기언·강규언·김성하·고임생·강문호 등이 중문교회를 설립하였다. 강문호·강규언 등은 3·1 운동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룬 인물이다. 중문교회는 1956년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분열로 한때 교회가 분립되기도 하였으나, 19654월에 다시 하나가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1974년 현 서귀포시 중문동 2073번지 자리에 새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중문관광단지가 조성되고 1987년에 오공익 목사가 부임한 이후 선교와 봉사를 위해 재정의 30% 이상을 환원하고 관광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점점 교회가 부흥하게 되자, 2004년 제주중문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20089월 서귀포시 색달동 2436번지의 현주소지로 이전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옛 중문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11. 제주 표선교회> 1934- 1935년 이도종 목사 시무, 교회 연혁은 1948년부터 시작된다. 이전 기록은 없다. 

표선장로교회  (출처- [제주 일 년 살이 기록] 표선교회 주일예배 후 똣똣 베트남 쌀국수와 지환이네 해산물 그리고 철 지난 유채꽃 : 네이버 블로그)

 

<교회연혁 >

1948.8.5.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손정현장로를 전도사로 파송하여 개인집 방한칸을 얻어 7(강두주, 강사생, 송순이, 현양길, 어린이3)이 예배를 드리므로 교회가 창립

1949.6. 표선면 '야유공사(耶有公社)' 건물 20평을 2만환에 매입

(출처- 표선장로교회)

 

옛 표선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12. 제주 고산교회> 1937- 1940년 이도종 목사 시무

제주 고산교회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고산교회는 1916년에 창립되었다. 당시 제주 서북지역에서 활발한 전도활동을 펼치던 김기평씨의 전도를 받은 서관오, 위국진, 추씨산옥 등이 한경면 고산리 2728번지에서 기도회로 모인 것이 유구한 역사의 초석이 되었다. 1920년, 전라도 광주에서 양화재봉업을 하던 박재하씨 후원으로 제주에 파송된 김진배 전도인을 통해 8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강홍섭씨의 사가(私家)를 기도처소로 정해 예배를 드렸다. 그 이듬해에는 윤식명목사를 통해 여종섭씨가 세례를 받았고, 7명의 학습인을 세웠다. 고산교회는 창립 초기부터 성경구락부를 운영하며 주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1940년대에는 ‘춘계전도대회’의 명목으로 거리전도에 힘쓰며 꾸준한 성장을 이어간다. 1977년에는 교인들을 중심으로 고산신협을 창립하여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교회로 자리매김 해왔다. 특히 고산신협은 지역민들의 땀과 정성이 담긴 농산물을 전국적으로 판매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어왔다. 2016년 교회창립 100주년에는 이웃사랑을 위한 기금 일천만원을 한경면장에게 전달하였고, 월드비전 제주지부를 통해 방글라데시 식수위생사업 지원과 콜롬비아에 선교사로 파송된 본교회 출신 서춘길 선교사를 통해 콜롬비아 현지인 신학대생 2명의 학비로 각각 일천만원씩을 전달했다.  (출처- 제주 고산교회 - YouTube)

 

옛 고산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교회연혁)

1916년 2월 15일  교회창립

1930년  제 1대 조상학 목사 부임(1931.12. 사임)

1931년 4월 5일  장로 장립, 초대장로 강홍섭

1931년 4월 5일  당회조직 당회장-조상학 목사, 서기-강홍립

1932년 10월  제 2대 김재선 목사 부임(1933.5.사임)

1933년 6월  제 3대 정태인 목사 부임(1937 사임)

1935년 8월  고산리 2192번지, 36평 목조함석 예배당과 사택 초가 15평을 건축

1937년 7월  제 4대 이도종 목사 부임(1940 사임)

1937년 7월  제 2대 장양선 장로 장립

 

<제주 한경교회- 옛 두모교회>  1937-1939, 1945-1948년 이도종 목사 시무 

제주 한경교회 (옛 두모교회)  (출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가마솥 교회가 되겠습니다” < 미션 < 기사본문 - 투데이N)

(출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가마솥 교회가 되겠습니다” < 미션 < 기사본문 - 투데이N)

 

초창기 제주선교의 역사가 담긴 제주 지역교회의 100년사가 발간됐다. 100년 전 믿음의 선진들이 흘린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오늘의 신앙이 가능함을 확인하는 기회다. ‘한경교회 100년사’를 출간한 윤강현(68) 제주 한경교회 목사를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만났다. 한경교회는 제주특별자치도에서도 가장 낙후된 서북쪽 제주시 한경면에 있는 성도 70~80명의 작은 공동체다. 하지만 4대에 걸쳐 100년간 이어온 신앙의 행적은 간단치 않다. 교회는 1920년 3월 ‘두모리 기도처’ 이름으로 모인 데서 출발한다. 앞서 제주선교는 1908년 시작된 이기풍 목사의 사역과 이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에서 유래한다. 1914년 전남노회 파송을 받아 제주 순회 목회의 길을 연 윤식명 목사와 전도인들은 광주 봉선리교회의 한센병 성도들과 여전도회의 고귀한 후원으로 두모리 기도처 등을 설립했다. 98년 한경교회에 부임해 23년째 사역 중인 윤 목사는 “믿음의 선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오늘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앞선 이들의 사랑과 충성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뒤에 오는 믿음의 후손들에게 우리가 물려받은 하나님 축복과 감사를 전해줄 책임이 있어 100년사를 발간하게 됐습니다. 1920년 두모리 기도처에서 시작한 한경교회는 제주에서 14번째로 설립됐고 28년엔 조직 교회를 설립합니다. 우리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32년에 조수교회, 50년엔 판교교회를 분립해 제주 서북지역 복음화에 이바지했습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70483

 

(교회연혁)

1920. 3. 3.  두모리 기도처에서 시작되어 제주에서 14번째 교회로 설립.

1920. 6.  광주 봉선리교회에서 김경신 전도인을 파송.

1922. 1.  두모리교회 첫 예배당 건축.

1924.  원용학 전도인을 파송.

1927.  박병근 전도인을 파송.

1928.12. 23.  초대장로 박병근 전도인, 당회장 모슬포교회 이경필 목사로 임명되어 두모리 장로교회가 설립됨.

1930.  조상학 목사가 당회장으로 임명.

1932.  김영식 목사가 당회장으로 임명.

1933.  김재선 목사가 당회장으로 임명.

1934.  정태인 목사가 당회장으로 임명.

1937. 7.  이도종 목사가 당회장으로 임명.

1940. 4.  양혁 목사가 당회장으로 임명.

1944.12.  강문호 목사가 당회장으로 임명.

1945. 9.  이도종 목사가 당회장으로 임명. 1948년 순교

1950.11.12.  이준수 목사 위임.

 

옛 두모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14. 제주 조수교회> 1937년 이도종 목사 시무

조수교회  (출처-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kws51&logNo)

 

1920년대 중반에 조수마을에서 환자가 생겨 바닷가 마을 두모교회(현 한경교회)에 조수리 주민 문찬오(문현오), 이달평, 이상선, 조남준 씨등이 출석하였다. 1932 1월에 드디어 조수리의 문성국씨 집에서 김재선 목사의 인도로 교회가 시작되었고 1932 1 24일 조수리 홍자하씨 댁에서 설립예배를 드렸다. 1934 4 29일 조수리 300번지에 초가집 3간을 매입하여 정식 예배당이 문을 열었다. 1934 6 11일 조수교회는 세례교인 6명 학습교인 11명으로 기도처에서 교회로 승격되었다. 김재선 목사는 용수교회와 고산, 두모, 한림, 금성교회 등을 순회하거나 담임을 하면서 각 교회를 부흥 발전시켰다. 또한 김재선 목사는 1946 6 5일부터 1948 8월10일까지 제주를 떠나 전남노회 소속의 목포 산정교회의 목사로 위임을 받았다. 해방 후 닫혀 있던 교회를 재건하여 부흥하게 한, 참 능력 있는 지도자였다. 김재선 목사는 한국 전쟁시 공산군에 의해 순교 하였다.(아래 글 참조) 제주출신 첫 목사인 순회 목사 이도종 목사(1937년 순회목사 시무) 1948 4.3 사건 때 순교를 당하였다. 또한 4.3 시간 때 1935년 정태인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조남수 목사는 고향 출신 목사로 당시 치안 사령관과 담판하여 많은 사람을 살려낸 교회이기도 하다. 2017년 지어진 현재 교회는 4번째 교회로 2008 5월3일에 봉헌 되었다. 2005년- 2016년에는 해외 선교에 힘써 콩 농사와 비엔날레 유치 수익으로 히말라야 신학대학을 세워 현지 교회 지도자를 배출 하였다.  (출처- 제주기독신문 | 교회탐방 > 제주교회역사)

조수교회 역사  (출처-https://blog.naver.com/gmldnswns20/223421808232)

 

(교회연혁)  (출처-https://www.josu.or.kr/Page/Index/17 조수교회 홈페이지)

1920년대 조수리 주민 몇 명이 두모교회() 한경교회)에 출석. 조수리 문성국씨 집을 기도 처로 모이다

1932년 1월 24일 김재선 목사의 인도로 조수리 홍자하씨 댁에서 설립예배 드리다

1933년 김재선 목사가 이달평, 이상선씨에게 세례를 베풀다

1935 정태인 목사가 조남수, 문병천씨에게 세례를 베풀다

1937년 이도종 목사의 인도로 제직회를 갖다. 1948년 순교

 

엣 조수교회   (출처- #44 조수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제주효돈교회) 

이도종 목사님이 효돈지역에서 전도 목사로 활동한  기록( 1930.11. 제주노회에서 김재선 목사와 함께 이도종 목사에게 순회 전도목사의 임명이 있었는데 이 때  이도종 목사는 중문리, 법환리, 서귀포, 효돈 등 4개처 교회 전도목사로 임명 되었다.  그런데 효돈교회는 1951년에 창립되었기에 아마도 1930- 1948년 순교 이전에 효돈 지역에서 전도 활동이 있었다고 추측이 된다. 물론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효돈교회

 

6·25전쟁은 북한 평양지방의 기독교 신자들을 남한 방방곡곡 흩어 놓았다. 서귀포 동쪽 효돈마을에도 이때 전쟁 피난민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었다. 195119, 피난 성도들 가운데 교역자들은 신효리 향사, 평신도들은 하효리 향사에서 처음 예배를 드렸다. 당시 향사는 의자도 없는 마루바닥 뿐인 빈 공간이었다. 한 달 정도 지나고 225일부터는 함께 예배를 드리기로 하고, 예배장소를 국민학교 교실로 옮겼다.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춰지면서 예배위원회도 조직되어 서금찬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최화정, 우상필, 김희선, 장덕호, 전경국, 김원규 등 7명의 목사가 예배위원으로 예배를 인도하였다. 김광수 전도사는 성경구락부를 맡았다. 같은 해 729일에 성전건축위원회가 조직되고 서금찬 김희선 목사 등이 대구 부산 등지로 나가 모금한 헌금과 피난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 927일 서귀면 하효리 148번지에 24평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121일 노재남 목사가 초대목사로 시무하였다. 예배당은 '남녀유별'의 유교윤리를 존중하여 두 개의 출입문 중 안에서 바깥을 향해 오른쪽 문은 남성, 왼쪽으로는 여성 신자가 출입했다. 예배당 내부 좌석도 좌우로 남녀석을 분리하였다. 전쟁이 마무리되자 교회를 창립하고 섬기던 목사님들은 육지로 떠났고 단신으로 피난 나온 강창성 전도사가 혼자 남아, 1960년대 말까지 시무하였다. 피난 교인들이 제주를 떠나면서 교회는 재정적으로 어려워졌다. 이때 하효리에서 '송의원'을 운영하는 송재일 집사(후일 장로)가 재정을 맡아 교회에 큰 힘이 되었다. 한편 195933일에는 신효리 김태용 백이화 부부가 각각 초대 장로와 권사로 임직되었다. *역대 교역자; 노재남 김창성(전도사) 강성빈 김대용 김창종 방성모 박장래 한천석 (자료: 제주 기독교 10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 그리고 1980122일 서귀포시 신효동 145-1의 부지 282평을 매입하여 524일 새 성전에 입당하였다. [출처] 효돈교회|작성자 한락산

1952. 5. 4 꽃주일 야외예배 출발하기 전 사진. 야외예배는 바다와 해안가 전망이 매우 아름다운 '예촌망앞 동산'으로 자주 갔었다

1951년 창립 봉헌

 

옛 효돈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16. 대정교회- 순교자 이도종 목사 성지>  1948년 이도종 목사 시무

제주 대정교회 (순교자 이도종 목사 성지)

 

대정교회는 이기풍 목사의 제자로 제주도 최초의 현지 목사인 이도종 목사(1892-1948)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순교 기념비를 세운 교회이다. 순교 당시 이도종 목사는 인근 고산교회 담임으로 인근 화순교회, 대정교회 등을 순회하며 예배를 드렸고 전도하며 교회를 세웠다. 1948년 6월 순회 예배를 드리기 위해 대정으로 가던 중 산사람들에게 산속으로 끌려가 "양놈의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 "미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혐의와 핍박속에 다른 10여명과 함께 구덩이에 생 매장되어 순교 하였다. 그 시신을 대정교회 교인들이 장사 지냈으며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인근 삼방산에서 돌을 가져다 순교 기념비를 세우므로 성지가 되었다. 2003년 제주 노회에서 이도종 목사 순교 기념비를 새롭게 세웠다. 

순교자 기념비

순교기념비 앞에서 제주 출신 담임목사 박경식 목사와 함께 배성수 목사(좌, 필자) 박경식 목사(우)

 

옛 대정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17. 제주 안덕교회--  옛 화순교회> 1944-1946 년 이도종 목사 순회 시무

제주 안덕교회 (옛 화순교회)   (출처- 대한예수교장로회 안덕교회 | 살아계신 하나님아버지께서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안덕교회^^♡ - Daum 카페)

안덕교회(옛 화순교회)의 역사는 1937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 연혁에 따르면 당시 모슬포교회에 출석하던 양기운, 고춘, 양신애, 김부화, 이봉록, 김자출 등이 고춘씨의 집을 기도처로 정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교회가 시작됐다. 이후 1940년 제11회 정기노회에 전도인 파송을 청원하고, 그 이듬해인 1941년 제12회 정기노회에서 화순기도처를 화순교회로 분립한다는 결의가 있게 된다. 1952년에는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의 교단분열로 인해 안덕교회 역시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1968년에 양 교단으로 분열됐던 교회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통합을 선포했고, 그 이듬해인 1969년 2월에 예장통합 제주노회에 가입하는 하나됨의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옛 화순교회  (출처- #36 화순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교회연혁)  1944년 순회시무 기록

 

 

 

<18. 이도종 목사 순교지>  무릉2리 인향동, 무릉교차로 인근 (1948년 6월 18일 순교)

이도종 목사 순교 터 

이도종 목사 순교지 순교추모비  (출처- 기독교순례길 2코스(순교의길) 

 

순교자 이도종(李道宗)목사는 고산교회 목사로 시무중 순회목회차 고산에서 산길로 자전거를 타고 대정교회로 향하던 중 대정읍 무릉2리 인향동에서 무장대에 붙잡혀 순교하였다. 일주도로변에 순교 터임을 나타내는 표석이 세워졌다.

이도종 목사 순교지 순교추모비  (출처- [제주선교여행] 제주기독교순례길 2코스 순교의 길(협재교회, 조수교회, 이도종목사순교터 등) : 네이버 블로그)

이도종 목사 순교지 순교추모비  (출처- 01.모슬포, 대정, 이도종 목사 순교터/제주 – KOREAN BIBLE ROAD ) 

이도종 목사 순교지 순교추모비 제주노회 해설 (출처- 기독교순례길 2코스(순교의길) 

 

 

<순교자 이도종 목사 다큐멘터리> ‘제주도 출신 최초 목사 이도종

 

순교자 이도종 목사

 

 

우리나라 기독교 순교자, 6.25 희생자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역사탐방에 힘쓰는 하늘교회 김재동 목사는 제주도를 방문할 때마다 순교자 이도종 목사(1892-1948)의 일대기를 다룬 영상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던 중 이기풍, 주기철, 손양원, 문준경 등 우리나라 기독교 순교자들의 영화와 다큐멘터리 여러 편을 제작한 권순도 감독을 만나,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을 실현했다.이도종 목사는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중국 상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지는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투옥된다. 모진 고문을 받은 그는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된다. 독립운동을 하기 어렵게 된 그는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영혼 구원에 나서는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신사참배 반대에도 힘썼던 그는 해방이 되자 목회자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던 제주도에서 조남수 목사와 구역을 나누어 순회 목회를 하며 제주도 교회들을 섬겼다.

생매장당하는 이도종 목사.

(출처- 다큐멘터리 ‘제주도 출신 최초 목사 이도종’ 공개 : 문화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해방 후 우리나라는 공산주의 사상에 크게 경도되어 있었다. 양반, 상놈을 차별해 살다가 일제의 억압에 눌렸던 국민들은 모두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 당시 새로운 개념의 공산주의 사상을 환영했다. 하지만 이도종 목사를 비롯하여 깨어 있는 기독교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도종 목사는 조남수 목사와 함께 마을마다 다니며 반공 강연을 하였다. 당시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제주도에서는 사상 대립이 특히나 심각했다. 공산주의 사상을 지지하는 좌익 세력들에게 반공 강연을 주도했던 이도종 목사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제주도에서 4.3 사건이 터지고 약 2개월이 지난 1948618, 좌익들은 순회 목회 중이던 이도종 목사를 납치해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 수 있게,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위협했다. 이를 거절했던 이도종 목사는 생매장당해 순교했다. 마지막 생매장 순교 장면은 주연 권반석 씨의 열연과 어우러져 눈물을 선사한다.

이도종 목사를 소개하는 모습

(출처- 다큐멘터리 ‘제주도 출신 최초 목사 이도종’ 공개 : 문화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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