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학(趙尙學) 목사 (1877- 1950.9.28 순교)
전남 승주군 송광면 출생으로 일제에 투옥되고 공산당에 순교당한 장로교 목사이다.
1. 도도한 유학도인 조상학과 전도인 지원근과 선교사 오웬의 만남.
조상학목사는 1877년에 전남 승주군 송광면에서 양반집 조형섭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생활정도도 풍요롭고 행세하는 양반의 가문에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별 어려움없이 순탄하게 살아왔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한문을 수학하면서 유교적 인생수업을 훈육받아 아직 젊기는 했지만 당시로 보아서 또 그렇게 어리지만도 않은 나이였다. 또 타고난 세도집 가문에서 고고ㅓ학게 전통적 선비로서 다른 학문이나 사상에 젖어들거나 수용할 만한 데라고 바늘끝 꽂을 만큼도 없는 인품에 꼿꼿한 이 젊은이에게 당시 감히 누가 "예수"소리를 할 수 없었고 또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따로 있지 그에게는 어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믿음의 저력과 끈질진 한 사람, 붙잡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 전도인이요 조사였던 지원근이 있었다. 이지 조사와 함께 물러설 줄 모르는 한 사람 서양인 선교사로 오웬(Owen,Clement Carrington)이 있었다. 오웬은 물론 하나님의 뜻하신 바이나 개인적으로 말하면 사람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도에 관록이 있었다. 벨 선교사와 함께 개척한 교회를 보면, 목포의 양동교회를 비롯, 송정리교회, 해남군 선두리교회, 보성군 신천리교회, 육곡교회, 운림리교회, 광주 양림교회, 완도군 관산리교회(현 약산제일교회), 나주군 내산교회, 방산리교회, 장흥군 진목리교회, 고흥군 옥하리교회, 화순군 화순읍교회, 광양군 광양읍교회 그 밖에도 15개처 교회를 세운바 있는 이런 사람이다.
2. 끈질긴 전도에 무릎을 꿇어
조상학이 아무리 고집센 젊은 선비라고도 해도 오웬이나 지원근 같은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도 없었다. 또한 오웬은 1898년 11월에 한국선교사로 내한한 이래 벨9Eugene,Bell:배우지)선교사와 함께 목포 선교를 시작하는 한편 목포진료소를 개설했고 의사이기도 한 그는 광주선교부를 시작하여 순천,광주,목포 등지를 순회하며, 의료 및 복음선교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람으로 그 때만 해도 그 신기하기만 한 그 서양 의학의 기술이었다. 이런 헤택을 주는 이 선교사가 비록 이국적인 외인이기는 하지만 무척이나 유식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조상학은 그래도, 이쯤은 되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양반 유학도의 입장에서 예수를 받아들일 만한 취지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학력과 인격에 끈질긴 전도에 드디어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3. 성령의 인도, 전도에 열심다해
그는 광주에서 학습을 받고 2년 후엔 1909년 벨(Bell Eugen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완전히 거듭난 사람으로 이제는 성령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깊이 있는 성경을 배우면서 연구하는 중에 그토록 힘들여 복음을 받아들인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나도 전도인이 되어야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때 이천만 동포를 다 전도할 만한 부푼 마음과 성령의 인도로 뜨거워진 마음이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자기가 그렇게 어렵게 받아들였던 것은 두분의 전도자들에게 고마움과 함께 끝낸 인내와 성실로 그 전도를 자신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큰 덕이 아닐 수가 없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그는 개인적으로 전도에 열심을 다했다. 이같은 결과가 열매를 맺어 여천군 율촌면 장천리의 조의한이 예수를 믿던 날로부터 또 그런 열성이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동네에다가 장천리교회(현 율촌 장천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또 다시 조의환과 함께 또 힘을 합해 한태원에 전도하자 그도 예수를 받아들여 광양군 신황리에 신황교회를 세웠다. 조상학의 전도열심은 더욱 그 열기를 더해 이번에는 보성지방의 최초의 교회인 무만동교회도 정태인과 김일현 그에게 전도받아 세운 교회였다. 이 중에 정태인은 목사가 되어 순천 삼미교회를 설립하고 1917년 평양장로교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노회에서 안수를 받아 보성군 벌교지방 목사로 무만교회를 비롯 낙안 평촌교회, 고흥읍교회 등을 순회 인도하다가 순천읍교회(현 순천중앙교회), 벌교 무만교회를 두루 시무하면서 제주노회로 옮겨 모슬포교회, 삼양교회, 월막교회, 고산교회(1930)를 시무하면서 목회에 큰 공을 세운바 있는 분이었다.
4. 목사안수를 받음
그리고 순천읍교회도 조의환과 함께 전도하여 최집사님과 최정의가 믿고 세운 교회로서 이와 같이 조상학은 전도받은 자가 일대에 머문 자가 하나도 없이 전도받아 믿으면 더 많은 전도를 하는 사람들이 되곤 하였다. 이 와 같은 업적은 그로 하여금 1911년에는 광주의 숭일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학원전도를 쉬지 않았다. 1916년에 순회전도사로 부름을 받아 각 지방을 순회전도하는 중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입학하여 1923년에 제16회로 졸업을 하고 바로 그 해 순천노회가 전남노회로부터 분립하면서 최초의 목사로 안수를 받아 광양읍교회(1919-1924)에서 목회를 하였다. 또 순천노회의 최초의 총대가 되어 제12회 총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1935년에는 율촌장천교회, 1942년에는 경남하동읍교회, 1946년에는 여천 덕양교회(현 주향교회)에 시무하였다.
5. 신사참배 거부로 연행됨
조목사는 1940년 순천노회 청년 조직 단체인 원탁회 사건으로 여러 목사 장로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는 순천중앙교회에서 청년들이 신사참배에 불참하고 항거할 것을 뜻하고 애국적 신앙사수의 목적으로 힘으로 모아 조직적으로 반대할 것을 결의한 조직체였는데, 황두연 장로를 비롯하여 목사로는 조상학, 양용근,김정복, 김상두,오석주,김형제,나덕환, 선재련,김순배,김형모등과 장로로는 박창귀,선춘근,김원식 장로등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때에는 조 목사는 청력이 약해 취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자 그대로 석방시킨 일도 있었다. 그때 벌써 연세가 70고개에 달한 노구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나날을 보내던 중에 이 민족에게도 일제의 패망으로 그 굴욕적이고도 치욕스러운 결박에서 해방이 되는 날은 왔다.
6. 교회를 사수하다 순교
그러나 북한 땅은 공산정권으로 인하여 수난을 겪었지만 이제 우리 세상인가 하는 날들은 꿈결같이 사라지고 민족적 사상이 좌우로 갈려 편할 날이 없는 나날이 계속되던 중에 6.25가 터졌다. 남단 이곳에도 공산침략의 태풍이 거세게 소용돌이 쳤다. 제직들의 강한 권유로 피신을 종용했으나 강권을 뿌리친 채 막무가내로 교회를 사수하겠다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대신 희생할 테니 나의 시체는 저 산에다가 묻어주시오" 굳은 결의로 주의 피에 참례하는 성찬을 베풀고 난 그후 얼마 안되어 여수 내무서에서 보낸 3명의 서원에게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예수 전하는 일을 인지 않았다. 70일을 감방생활을 하고 1950년 9월 28일 10리 밖에 이는 미평공동묘지로 끌려갔다. 이 날 함께 동역하던 손양원 목사의 뒤를 따라 그 날 같은 곳에서 손 목사의 순교를 보면서 그 뒤를 따라 살해되니 73세를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썼다.
(출처: http://kcm.co.kr/person/person_k013.htm)
<조상학 목사 순교기념비, 유품>

양지 100주년 순교자 기념관

조상학 목사 순교 기념비 (주향교회, 구 덕양교회)
"주여 할 수 있거든 이 쓴 잔을 내게서 멀리 하소서. 그러나 내뜻대
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말세에 주의 종이 나타났으니 대속의 진리를 선포하는 사자로다.
악당은 제 할 것을 다했음이 이 희생의 제물을 고요히 한 위를떴도다.
무지한 자의 손에서 발하는 총소리에 나의 갈길 다가도록 신호로다.
평소의 건강한 신상애의 열매됨이여!
주의 약속하신 말씀 신실토다.
순교자의 피를 보고 그 발바닥에 묻힌 자 누구뇨.
오직 믿음의 전속뿐 살아 있어, 따르기 어려운 십자가의 길임이여, 감
격의 눈물어린 눈동자의 미소를 허락하소서!아멘."

광양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광양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광양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광양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광양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순교자 명예의 전당

조상학 목사 성경 유품

조상학 목사 성경 유품

조상학 목사 성경 유품

순교자 조상학 목사 유품

순교자 조상학 목사 유품

순교자 조상학 목사 유품

손양원 목사 추모관 (출처- 하나님만 따라서 | 손양원 목사님 추모관을 다녀와서 - Daum 카페)
<1. 광양대방교회> 1920년대 조상학 목사 시무

광양 대방교회 (출처- 광양기독교 선교 110주년, 광양 대방교회를 .. : 네이버블로그)
대방교회는 1906년 봄 야소교(크리스트교)를 접한 대방동의 서한옥(당시 25세)씨가 그의 형 한봉과 정기영 씨를 전도하면서부터다. 이후 이들 세 가정은 진상면 신황리 교회를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을 전도해 신도들이 늘자 1908년 5월10일 용곡리 349번지 한문 학당을 사들여 ‘대방동교회’로 창립예배를 드린 것이 대방교회의 출발이다. 이후 신도가 급격히 늘어 옆 150번지 초가산간을 사들여 교회로 개조, 1920년 11월15일 봉헌에 이른다. 한문학당 예배장소는 사택으로 쓰였다. 그러나 초가 건물이 낡아 선교부 도움으로 82.645㎡(25평)규모의 석조 건물에 지붕은 함석으로 건축돼 1925년 11월20일 봉헌에 이른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착취와 수탈로 농촌이 쇠퇴하고 살기 어려워지면서 교회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교인도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1945년 해방 후 집에서 기도를 하던 신도들이 옥룡 전 지역에서 몰려들었다. 이에 대방교회는 옥룡의 중앙 지점인 운평리에 대지를 사들여 1957년 4월10일 답15번지에 165.29㎡(50평)규모의 교회를 건축한다. 단 한 차례도 예배 중단 된 적 없어 대방교회 초창기 역사의 특징적이고 자랑할 만한 일은 교인이 줄고 시련과 역경에 처했던 시기에 단 한 차례도 예배가 중단된 적 없이 계속되었으며, 목회자 또한 1~4대까지는 조사가 예배를 인도했고 이후 조상학 목사와 조사와 전도사, 강도사 목사로 이어지는 믿음으로 줄기차게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다. 해방 후 대방교회는 옥룡면 전 지역에서 신도들이 몰려들자 옥룡의 중앙 지점인 운평리에 대지를 사들여 165.29㎡(50평)규모로 건축된다. 이후 대방교회는 뜨겁게 부흥하여 성장을 이루었으며 그 부흥의 여세로 1993년에 교회당을 신축하였고 2002년 8월30일 태풍 루사로 교회 위치가 하천에 편입돼 현 위치인 운평리 22-4번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 1553.72㎡(470평)규모로 지어졌다.

광양 대방교회 (출처- 광양기독교 선교 110주년, 광양 대방교회를 .. : 네이버블로그)

대방교회 100주년 기념탑 (출처- 광양기독교 선교 110주년, 광양 대방교회를 .. : 네이버블로그)
탑의 상단에는 성경책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성경 구절이 적혀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그리고 아래에는 작은 종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더 큰 종이 있습니다. 기단에는 은혜의 100년, 비젼의 100년이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2. 광양읍교회> 1919년- 1924년 조상학 목사 시무

광양읍교회 (출처- 강기만 색소폰 STUDIO | 강기만 전남 광양읍 교회 연주 일정 - Daum 카페)

광양읍교회 (출처- 광양읍교회)

교회내부 (출처- 광양읍교회)
(교회연혁)
1917년 6월 20일 제1대 교역자 오석주 조사 부임(1919. 사임)
1918년 반양제(半洋製)로 된 22평의 새 예배당 신축(고라복 선교사가 300원을 드려 5칸 사택을 신축)
1919년 제2대 교역자 조상학 조사 부임(1924. 사임)
1923년 2월 12일 조상학 조사 목사 안수 받음
1923년 6월 5일 장로 장립 - 강성봉
1924년 3월 1일 제3대 오석주 목사 부임(1927. 사임)
<3. 구례중앙교회, 옛 구례읍교회) 1924년- 1928년 조상학 목사 시무

구례중앙교회 (출처 전남 구례중앙교회 시공 : 네이버 블로그 )

교회내부 (출처- 구례중앙교회 | 구례중앙교회 추수감사절 찬송경연대회1 (2016/11/20) - Daum 카페)

교회내부 (출처- 구례중앙교회 | 구례중앙교회 추수감사절 찬송경연대회1 (2016/11/20) - Daum 카페)
(교회연혁)

<4. 제주 고산교회> 1930년- 1931년 조상학 목사 시무

제주 고산교회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고산교회는 1916년에 창립되었다. 당시 제주 서북지역에서 활발한 전도활동을 펼치던 김기평씨의 전도를 받은 서관오, 위국진, 추씨산옥 등이 한경면 고산리 2728번지에서 기도회로 모인 것이 유구한 역사의 초석이 되었다. 1920년, 전라도 광주에서 양화재봉업을 하던 박재하씨 후원으로 제주에 파송된 김진배 전도인을 통해 8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강홍섭씨의 사가(私家)를 기도처소로 정해 예배를 드렸다. 그 이듬해에는 윤식명목사를 통해 여종섭씨가 세례를 받았고, 7명의 학습인을 세웠다. 고산교회는 창립 초기부터 성경구락부를 운영하며 주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1940년대에는 ‘춘계전도대회’의 명목으로 거리전도에 힘쓰며 꾸준한 성장을 이어간다. 1977년에는 교인들을 중심으로 고산신협을 창립하여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교회로 자리매김 해왔다. 특히 고산신협은 지역민들의 땀과 정성이 담긴 농산물을 전국적으로 판매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어왔다. 2016년 교회창립 100주년에는 이웃사랑을 위한 기금 일천만원을 한경면장에게 전달하였고, 월드비전 제주지부를 통해 방글라데시 식수위생사업 지원과 콜롬비아에 선교사로 파송된 본교회 출신 서춘길 선교사를 통해 콜롬비아 현지인 신학대생 2명의 학비로 각각 일천만원씩을 전달했다. (출처- 제주 고산교회 - YouTube)
(교회연혁)
1916년 2월 15일교회창립
1930년제 1대 조상학 목사 부임(1931.12. 사임)
1931년 4월 5일장로 장립, 초대장로 강홍섭
1931년 4월 5일당회조직 당회장-조상학 목사, 서기-강홍립
1932년 10월제 2대 김재선 목사 부임(1933.5.사임)
1933년 6월제 3대 정태인 목사 부임(1937 사임)
1935년 8월고산리 2192번지, 36평 목조함석 예배당과 사택 초가 15평을 건축
1937년 7월제 3대 이도종 목사 부임(1940 사임)
1937년 7월제 2대 장양선 장로 장립

옛 고산교회 (출처- #42 고산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5. 여수 율촌 장천교회> 1935년 조상학 목사 시무

장천교회, 1929(좌, 등록문화제 115호), 1973년 (중앙), 2005년(우)
장천교회는 1907년 10월 15일에 설립된 교회입니다. 조일환과 조의환, 이기홍, 박경주, 지재한, 박중호 등이 조의환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장천교회는 3개의 예배당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제일 왼쪽에 있는 예배당은 1929년에 건축한 것이고, 중앙에 있는 예배당은 1973년에 건축한 것입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현대식 예배당은 2005년에 준공한 예배당입니다. 장천교회는 1912년 교회 부설로 율촌여흥소학교를 설립하여 1935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제3예배당으로 불리는 석조예배당은 1925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29년에 준공했습니다. 설계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프레스톤 선교사가 담당했습니다. 석조 2층, 84평으로 지은 예배당은 종탑을 쌓을 기술자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완공하는데 4년이 걸렸습니다. 현재는 건물의 외부는 남겨두고 내부를 개수해서 어린이집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당은 여수지역 최초의 근대식 석조건물입니다. 2004년 12월 31일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115호로 등재되었습니다. 장천교회는 일제 강점기때 빼앗기지 않은 종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일경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종을 숨겼습니다. 이 종은 조일환과 조의환 등이 1929년에 부모님의 이름을 새긴 종을 헌납한 것입니다. 이 종은 1929년에 건축한 제3예배당 종각에 달아 사용하다가 지금은 제4예배당 종각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장천교회 출신 김순배 목사는 광주숭일학교에 다닐 때 3.1만세운동에 참가했습니다. 태극기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누어 준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여수읍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는 말세론을 설교하다가 1년 동안 옥고를 치루는 등 3년 동안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장천교회는 6.25 전쟁 중에 여러 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지재한 장로의 4남 지홍선은 6.25 전쟁 중에 손양원 목사와 함께 순교를 당했습니다. 지재구의 3남인 지한영 강도사는 장천교회 부설 여흥학교와 평양의 숭실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는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장천교회 강도사로 시무하다가 여순반란사건때 아들 지준철과 함께 순교를 당했습니다. 교회에서는 2015년 10월 15일 두 사람의 순교비를 제막하였습니다. 상해임시정부 비밀정보원에게 독립자금을 전달한 김성수는 여순반란사건때 반란군에 잡혀갔다가 도망쳐서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나의 부지에 세 채의 예배당을 잘 보존하고 있는 장천교회의 신앙유산 보존 정신이 아름답습니다.[출처] [여수시] 여수 장천교회, 100년 교회 성지순례(46)|작성자 100년 교회연구소장

교회내부 (출처- 안재우 소장님-복화술 간증예배 : 율촌장천교회)
(교회연혁) (출처- 율촌장천교회)
<7. 여수 주향교회, 옛 덕양교회> 1946년 조상학 목사 시무


주향교회 (옛 덕양교회)

교회내부
(교회연혁)
| 1923 | 교회 창립 · 김형진 장로 시무 · 변요한 선교사 시무 · 주형진 장로 부임 · 정명환 장로 부임 · 박인식 선생 부임 · 장성은 전도사 부임 · 김상두 목사 부임 · 이도둔 전도사 부임 · 안영준 목사 부임 · 강대현 장로 장립 · 조상학 목사 부임 (1950년 9월 28일 미평 삼거리에서 순교) · 이용철 장로 장립 · 이근택 목사 부임 · 김종선 전도사 부임 · 정원기 전도사 부임 · 김흥모 장로 장립 · 강경림 전도사 부임 · 신효식 전도사 부임 |

조상학 목사 순교 기념비 (주향교회, 구 덕양교회)
<8. 광동중앙교회> 1947-1948년 조상학 목사 시무

광동중앙교회 (출처- 광동중앙교회 연혁 : 네이버 블로그)
(교회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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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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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창립. 신황리교회를 왕래하며 예배하던 장주환(張周煥)이 전도하여 섬거리에 예배당6간과 사숙을 새로 짓고 예배드림으로 섬거리교회가 설립되다. 선교사 고라복은 가옥을 구입하여 교역자사택으로 드리다.
또한 같은 해 신황리교회를 왕래하며 예배하던 강대오가 전도하여 예배당을 건축하여 예배하므로 지랑리교회가 설립되다. 그 후 강대오는 만주로 이사하고 김순권(故김형모목사부친)이 교회를 위하여 힘쓰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 p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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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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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환 목사 시무(지랑리, 신황리, 원당리, 지계리, 웅동리교회 등 6개교회 동시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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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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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권 장로 (초대 장로로 장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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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6~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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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담 목사 시무(당회장치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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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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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호 장로 (2대 장로로 장립- 당회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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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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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리에 예배당 건축하다(순천노회 제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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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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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배 목사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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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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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면 지원리에 이전한 “섬거교회” 명칭을 “광동중앙교회”로 변경하다.(순천노회 제18회 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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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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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윤 목사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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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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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원 장로(전도사)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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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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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일만, 이보흥 장로 장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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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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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학 목사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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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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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조상학 목사 순교지- 손양원 목사 순교지와 동일>

여수 새중앙교회, 손양원 목사 순교지

여수 새중앙교회, 손양원 목사 순교지

순교비

조상학 목사도 함께 순교 (1950.9.28)
<교회를 사수하다 순교>
그러나 북한 땅은 공산정권으로 인하여 수난을 겪었지만 이제 우리 세상인가 하는 날들은 꿈결같이 사라지고 민족적 사상이 좌우로 갈려 편할 날이 없는 나날이 계속되던 중에 6.25가 터졌다. 남단 이곳에도 공산침략의 태풍이 거세게 소용돌이 쳤다. 제직들의 강한 권유로 피신을 종용했으나 강권을 뿌리친 채 막무가내로 교회를 사수하겠다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대신 희생할 테니 나의 시체는 저 산에다가 묻어주시오" 굳은 결의로 주의 피에 참례하는 성찬을 베풀고 난 그후 얼마 안되어 여수 내무서에서 보낸 3명의 서원에게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예수 전하는 일을 인지 않았다. 70일을 감방생활을 하고 1950년 9월 28일 10리 밖에 이는 미평공동묘지로 끌려갔다. 이 날 함께 동역하던 손양원 목사의 뒤를 따라 그 날 같은 곳에서 손 목사의 순교를 보면서 그 뒤를 따라 살해되니 73세를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썼다.
(출처: http://kcm.co.kr/person/person_k013.htm)

여수 새중앙교회, 손양원 목사 순교지

여수 새중앙교회, 손양원 목사 순교지
| 순교자 손양원 목사 (2) | 2026.01.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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