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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손양원 목사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26. 1. 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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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양 원 ( 孫 良 源 , 1902 ~ 1950.9.28 순교 )

손양원은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부친 손종일(孫宗一)과 모친 김은수 사이의 삼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부터 부모를 따라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손양원은 1913년 칠원공립보통학교에 입학, 3학년 때 맥레이(Macrae, F.J.L.·孟浩恩)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조회 때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당하자 우상숭배라고 거절하여 퇴학당한 적이 있었다. 이때 선교사가 강력히 항의하여 복교되었으며, 1917년 7월 졸업하였다. 손양원은 1918년 2월 서울로 올라가 신문배달과 만두장사를 하면서 중동중학교에 다니며 안국동교회를 다녔다. 1919년 3·1운동에 연루되어 아버지가 실형을 선고받고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자퇴하고 고향에 내려왔다. 1920년 봄 부친이 풀려나자 손양원은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巢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 졸업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10월 칠원읍교회의 집사로 피선되었다. 이듬해 1월에는 정쾌조(鄭快兆)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1924년 3월 도일(渡日)했다가 성결교회의 나카다주이치(中田 重治)목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성결교 동양선교회의 노방전도에 큰 감화를 받고 조국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그 해 10월 귀국해 부산에 있던 경남 성경학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초량교회의 주기철(朱基徹)목사와 친교를 맺었다. 한편 부산 감만동 상애원이라는 나환자수용소 교회에서 전도사로 교역을 시작한 손양원전도사는 '손불'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열심히 집회를 인도했다. 손전도사는 10여년 간 밀양 수산교회, 울산 방어진교회(현 방어진제일교회), 울산 남창(南倉)교회, 부산 남부민동교회, 양산 원동(院洞)교회 등을 개척, 설립하였다. 손전도사는 1935년 4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에 열중하면서 평양 능라도(綾羅島)교회(1935년)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졸업한 다음 부산지방 시찰회 강도사로 목회자가 없는 작은 교회를 순회하며 복음을 증거했다. 이때도 손전도사는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설교하며 반대운동을 벌였다. 당시 신사참배를 결의한 경남노회는 산돌에게 목사 안수조차 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전도사 자격도 박탈하였다. 이후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1939년 7월 15일 손양원은 신학교 동창인 김형모목사의 추천으로 전남 여천군 율촌면 산풍리에 있는 나병환자 요양원 애양원(愛養院) 교회(현 성산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손전도사는 이곳에서 일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하고 이름도 '양원'(본래 아명 연준, 호 산돌)으로 고쳤고 그의 부인도 양순(良順)으로 개명했다. 거듭되는 신사참배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던 손전도사는 1940년 9월 25일 연행돼 여수경찰서에 미결수로 감금됐다. 1941년 7월 광주구치소로 이감되고 11월 광주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 형이 확정되었다. 1943년 5월 출옥될 예정이었으나 전향(轉向)해야 한다는 검사 위협에 끝내 거부하여 경성 구금소로 넘겨졌다가 1943년 10월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해방이 되어 1945년 8월 17일 6년 만에 출옥하자 손전도사는 애양원교회로 돌아갔다.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새로운 목회를 시작했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으로 두 아들을 잃었으나 범인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아 "사랑의 원자 탄"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여 피난을 권하는 교인들에게 나환자 교인들을 버려두고 혼자 피난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교회를 지키던 손양원목사는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가, 전세가 불리해 후퇴하던 이들에 의해 1950년 9월 28일 새벽 여수 근처 미평과수원에서 총살, 49세에 순교하였다. 두 손바닥에 총탄이 지나간 흔적이 있어, 죽는 순간에도 기도했음을 알 수 있었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으로 두 아들을 잃은 사건, 원수를 사랑하라>

장남 동인(가운데)과 함께한 손양원 목사(왼쪽)와 정양순 사모.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출처 : 자유일보(https://www.jayupress.com)

 손양원 목사,  손동인, 송동신 

손동인, 손동신 

손양원원 목사 내외(뒤), 손동인, 손동신의 묘 (앞의 두 묘소) 

순교자 손양원 목사, 정양순 사모 묘역

 

애양원 동쪽 끝인 동도섬에는 1950년 9월28일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모두 세개의 묘소가 있는데 앞의 두개는 1948년 10월21일 순교한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의 묘이다. 뒤의 묘소는 손양원 목사님과 1977년 11월26일 소천하신 정양순 사모님이 합장되어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 정양순 사모 묘역

순교자 손동인, 손동신 묘역

두 아들 묘역 앞에선 손양원 목사   

(출처- "원수를 사랑하라"…증오를 사랑으로 승화한 손양원 목사 자취 | 연합뉴스)

 

(여수=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중략)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손양원 목사의 '감사의 기도' 중에서)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이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을 조명하고자 기획한 답사의 하나로 24일 찾아간 전남 여수시 율촌면 소재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에서는 현대사의 비극을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목회자의 숭고한 정신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76년이 지나도록 후대의 마음을 울리는 주인공은 손양원(1902∼1950) 목사다. 장남 손동인과 차남 손동신이 이른바 여순사건 때 좌익 계열 학생인 안재선(∼1979)의 총을 맞고 숨진 뒤 손 목사가 장례에서 올렸다는 '감사의 기도'를 기념관 앞마당 순교자 기념비와 전시관 내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재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와 순천 일대를 점령하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된 일련의 사건이다. 혼란 속에 이념 대립이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사건 당시 손동인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좌익계열 학생들에게 친미·반동주의자로 몰렸다고 한다. 형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 달려온 동생과 함께 희생됐다. 놀랍게도 손 목사는 두 아들이 순교했다며 감사하는 헌금을 했다. 기념관에서 헌금 봉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순교의 두 아달(아들)이나 주신 감사의 봉헌금", "순교 2자(子)의 부 손양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애양원교회 송영오 장로는 헌금액이 현재 가치로 대략 수천만원 정도일 것이라면서 "(장남 손동인의) 유학 자금이 아닐까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손 목사는 슬픔을 딛고 상상을 초월하는 결단을 내린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오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처럼 안재선을 위해 기도하고 그를 양아들로 삼기로 결심한 것이다. 실제로 국군에게 붙잡혀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안재선을 살리기 위해 순천에서 활동하는 나덕환 목사를 통해 구명 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목숨을 부지한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아 함께 살았다. 손 목사는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9월 28일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한다.

(출처- "원수를 사랑하라"…증오를 사랑으로 승화한 손양원 목사 자취 | 연합뉴스)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앞마당에 새겨진 손 목사의 '감사의 기도'

 "순교의 두 아달(아들)이나 주신 감사의 봉헌금", "순교 2자(子)의 부 손양원"

손양원 목사 장례 때 두건 쓴 양아들 안재선

 

안재선은 잘못을 뉘우치고 장차 목사가 되길 원했던 손 목사의 바람에 따라 한때 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죄책감 때문인지 중도 포기하고 나중에 사업 등을 하다 1979년 생을 마감한다. 다만 그의 아들이 부친의 유언에 따라 목사가 됐다고 한다. 송 장로는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 용서, 화해를 가장 강조하셨던 분"이라며 "손 목사님을 통해서 화합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근처에 있는 애양원역사박물관에서는 미국 남(南) 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돼 한국 최초의 한센병원을 설립한 포사이스(포사이드·포사이트) 선교사 등 근현대 한국 의료에 기여한 이들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출처- "원수를 사랑하라"…증오를 사랑으로 승화한 손양원 목사 자취 | 연합뉴스)

 

(추가)

장로회신학교는 1948년 9월 새 학기를 맞았다. 학생회 총무였던 나는 학내 부흥회 강사 선정 업무를 맡았다. 박형용 박사와 협의해 여수군 신풍면에서 한센인을 돌보는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를 초빙키로 했다. 호남선 열차를 타고 손 목사를 만났다. 그는 삭개오처럼 키가 작았지만 차돌처럼 굳고 야무지며 단호한 성품이었다. 그는 평생 가난했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만을 위해 살았다. 돈이 없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해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를 강요하는 일제하의 학교에 자녀를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학내 부흥회는 은혜의 도가니였다. 손 목사의 설교는 단호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예언자적 메시지였다. 갈라진 듯하면서도 귀를 찢는 날카로운 음성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이 축복의 시간이 끝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여순사건이 발생, 손 목사의 두 아들이 좌익 학생에게 생명을 빼앗겼다. 나는 이 엄청난 비극에 정신을 잃었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자기 민족과 동료의 피를 땅에 쏟게 하는 이 광란의 땅이 저주스러웠다. 한민족이 두 나라가 된 것도 슬픈데 항일 민족 기독 지도자의 어린 아들들이 왜 이 같은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답답하고 원통했다. 신학교 학우들은 여수 순천의 피바다를 생각하며 통곡의 기도회를 가졌다. 나는 순천으로 내려갔다. 시내는 계엄군으로 가득했다. 나덕환 목사가 시무하는 승주교회를 찾았다. 나 목사에게 들은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의 최후 이야기를 통해 나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두 아들을 인민재판한 사람들은 10대 고등학생들이었다. 민주학련 간부들인 이들은 동인과 동신의 학우들이기도 했다. 
“너 예수 믿는 놈이지?” “예, 예수교인입니다.”
“어미 아비도 예수쟁이지?” “예, 아버지는 목사이십니다.”
“어디, 믿어서 잘 사나 보자. 이놈들의 죄를 변호할 자가 있나?”
민주학련 간부들은 동인 동신의 죄를 열거했다. 동신과 동인은 서로 끌어안았다. 한 학생의 손에서 방아쇠가 당겨졌다. 여러 차례 총소리가 귀를 찢었다. 동인과 동신의 시체는 다른 시체 무더기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나 목사는 말을 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사랑의 화신입니다.” “예?”
“그는 원수를 사랑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토벌군이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계엄군이 질서를 잡으면서 반란 무리를 색출해 현장에서 즉결 처분을 하고 있었다. 나 목사는 이 와중에 애매하게 체포된 교인들이 처형되는 것을 막으려고 나가던 길에 나를 만난 것이다. 그는 “손 목사님은 자기 아들들을 죽인 그 학생의 처형을 막아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습니다.” 나 목사는 그 학생 이름이 재선이라고 했다. 재선은 풀려났고 손 목사는 그를 만났다고 한다. 
“재선아 안심해라. 나는 너를 용서한 지 오래다.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신 것을 믿어라.”
재선 아버지는 통곡했고 자신은 아들이 넷 있으니 둘을 데려가 키워 달라고 애원했다. 손 목사가 만류하자 재선 아버지는 재선이라도 길러 아들 삼아 달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재선은 손 목사의 아들이 된다. 이 얘기를 듣고 나는 곧장 손 목사를 만났다. 그리고 약속했다.
“목사님, 저는 내년에 졸업입니다. 졸업 후 이리 오겠습니다.”
손 목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말했다. “기도 많이 하십시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48903

 

(추가)

“두 아들이 총살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양원 목사님 내외는 엄청난 충격에 쌓여 비통해 했다”며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님은 밤을 새워 통곡하고 울면서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 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고 했다. 김 목사는 “결국 손양원 목사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다”며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10월 26일 두 아들의 시체를 담은 관이 애양원 뜰에 도착했을 때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관 위에 엎어져 울부짖으며 비통해 했다. 그런데 두 아들을 잃은 슬픔과 비통함이 그렇게 컸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총살한 그 좌익 학생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고 했다.
이어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양원 목사님은 계엄 사령관에게 딸을 보내 그를 사면할 것을 간청했다”며 “그를 양자로 삼아 교육시키겠다고 약속을 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안 가겠다고 반항하며 대드는 딸 동희를 설득해 용서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다”고 했다.
김 목사는 “아버지는 듣지 않으려는 딸을 설득했다”며 “(손양원 목사는) ‘동희야, 내가 무엇 때문에 5년 동안이나 너희들을 고생시키면서 감옥 생활을 견뎌 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찌 이 명령은 순종치 않는 단 말이냐. 순종치 않는다면 너희를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만 시킨 꼴이 되고 만다. 동희야, 그 학생을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고 말했다”고 했다. 이어 “딸은 몇 번이나 반항하며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다. 혹 용서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아들을 삼는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며 “(그러자 손 목사는) ‘동희야,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아들을 삼으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딸은 자기 의지에 반해 아버지의 하나님 절대 신앙에 굴복하고 말았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결국 딸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국군 심문자에게 그대로 전해 처형되기 10여분 전에 원수를 살려냈다”고 전했다. 김 목사는 “동희 양은 취조 군인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했다.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 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다”고 했다. 이어 “동희 양의 말이 끝나고 울음을 터뜨리자,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했다”며 “취조를 하던 군인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위대하시다’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 냈다. 안재선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고 했다. 김 목사는 “손동희 권사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 광경이야말로 오늘까지 내 눈 앞에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인 장면의 한 토막이었다.’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진 장면이었다”며 “손양원 목사님이 한국교회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자랑하는 사랑의 원자탄이 된 데는 보통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극도의 ‘가난과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에게 있어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가장 값지고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되었습니다. 
(출처 : 자유일보(https://www.jayupress.com)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합니다.

3. 삼남 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을 바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4. 한 아들 순교도 귀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이 함께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5.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 (臥席終身) 하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하였으니 주님께 감사합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두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내 아들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8. 내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을 생각하니 감사합니다.

9.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신애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출처] 두 아들 동인, 동신의 순교 후에 손양원 목사님의 [9가지 감사]|작성자 flower of sharon

 

 

<손양원 목사 사역과 순교>

 

<1. 부산 감만동 상애원, 상애교회> 1926- 1934년 손양원 전도사 시무

 

한센인 보호병원 감만동 상애원은 1910년 개원하였고 1912년 이래로 호주선교 부가 운영하던 의료 및 구호 시설이었다. 원래 나병(한센병)은 인간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병으로 가족으로부터 격리되고 의료혜택도 누릴 수 없어 이들이 당하는 정신적, 육체적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아픔을 안고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일용할 양식과 의료혜택을 베푸는 일은 기독교 신앙에서만 가능한 사역이다. 상애원은 1912년 5월 제임스 노블 맥켄지( James Noble. Mackenzie 1865-1956 : 한국명 매견시 梅見施)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이름이지어지고 활성화 되었다. 당초 미국 북 장로교 어빈(Irvin)선교사에 의하여 감만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1909년 부산지역이 호주장로회 선교구역으로 정해져 호주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매켄지가 목사와 의사로서 상애원 환자들에게 쏟은 정성은 지극하였다. 1930년대 전국의 한센병자 수는 2만 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3에 해당하는 6~7천명이 경상남도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매켄지는 상애원 운영에 더 큰 사명감을 가질 수 있었다. 처음20여명으로 시작된 나환자수용소는 1911년40명의환자를 돌보며 상애원으로 공식정비된후 1914년80명으로 늘었으며 1938년650명까지 늘었다. 이들에게 삶의 여건을 개선하고 약물치료를 통하여 사망률을 감소시키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였다. 1917년부터 피하주사(대풍자유)를 사용한 이후 25%의 환자 사망률을 2%로 줄이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상애원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병원이 아니라 스스로 자활하는 생활공동체 기능과 신앙 수련과 복음을 전하는 선교공동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곳에서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손양원은 매켄지를 만나게 되었고 나병환자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갖게 되고, 이들에 대하여 관심을 갔게 된다. 손양원 전도사가 이곳에서 일하게 되는 1926년부터 1934년까지의 기간은 수용인원은 450명에서 600명에 달했고 ,이 기간 동안 건물이 세워지는 등 나환자들의 수용과 진료, 영적 지도에 있어서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제임스 노블 맥켄지 1910년부터 1939년 6월30일까지29년간 선교사 은퇴하였다 귀국1956년7월01일 91세로 별세. 매켄지 자서전에서 나환자들을 위한 선교 사역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침울하고 맥이 빠진 것은 결코 아니다. 진실로 세월이 지나갈수록 나환자 가운데 살면서 사역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선교 사업은 없다 고 하였다. 감만동 상애원은 1940년12월 소록도 로 이주시작 완전철수1941년3월650명 수용자중 소록도로 간 환자 390명이며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해방 후 상애원은1946년3월 270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용호동 장자등 포진지 일본군막사 건물을 감만동과 같이 남녀 독신주거와 감만동 주거지를 철거하여 이곳에 재건축하여 선교와 한센인 치료를 하게 되었다. 용호동 상애원(이성곤 장로2001년작고)에도 일본군 병영을 개조하여 운동장을 만들어 환우들의 건강에 힘썼다. 용호동 나환자 정착촌 상애교회는 2004년3월 기장군 정관면 용수리1047-2번지일원 3000평대지로 이전 65세대의 주택을 건축하여 새 터전에서 교회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용호2동 나환자 정착촌 재개발전 약1,200명이었다.

(출처-한센인정착촌 감만동과 용호동 상애원)

감만동 한센인 정착촌 초기모습  (출처-한센인정착촌 감만동과 용호동 상애원)

감만동 상애원 앞  한센인 기념촬영(벼돌교회 1924년)

상애원 한센인 운동회(용호동 상애원 운동회 매년개최) 가족이거주 가옥은 흙벽돌을 이용하였다.

상애원에 입소하기위해 기다리는 나환자 (출처-한센인정착촌 감만동과 용호동 상애원)  

 

<2. 수산 밀양교회> 1926년 손양원 전도사 시무

밀양 수산교회  (출처- 수산교회

밀양 수산교회 내부   (출처- 수산교회)  

 

(교회연혁)   (출처- 수산교회)

1920년  의창군 대산면 갈전교회에 출석하던 10명의 성도가 김영율씨 댁에서 모여 예배를 드림(수산리 내서)

1926년  부산 감만동 소재 나환자 수용소 성도들이 헌금하여 손양원 전도사(순교자)를 파송하여 수산교회당을 건립

1944년 10월  한명동 목사 부임(1946년 2월 사임)
1946년 3월  송진율 장로가 전도사로 부임
1947년  지수만 전도사 부임

1949년 11월 11일  초대 심상동 장로 장립(1952년 7월 사임)

 

 
 
수산교회 창립 100주년
 
 
 
 

<3. 울산 방어진 제일교회> 1927년 손양원 전도사 시무

 

방어진제일교회    (출처- 홈 - 방어진제일 )

 

방어진제일교회    (출처- 홈 - 방어진제일 )

구 성전   (출처- 홈 - 방어진제일 )


 교회내부   (출처- 홈 - 방어진제일 )

 

(교회연혁)

 
1921년 교회개척에 뜻을 가지고 송정한 영수 자가 (방어동 414번지)에서 예배를 드리다.
1925년 08. 02 조선예수교 장로회 방어진교회로 창립하여 경남노회의 파송을 받은 오형선 장로가 초대교역자로 시무하다.
1926년 10. 01 송정한 영수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초가1동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하다.
1927년 손양원 전도사(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1930년 최명수 전도사 3대 교역자로 부임하다.

 

 제2대 교역자 손양원 목사 

 당시(1927년)  제2대 교역자 손양원 전도사

 

1926년 3월, 경남 성경 학교에 입학을 하고 동인이가 한 살이되었을 때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감만동 교회는 600여 명의 대부분이 한센병자들이었다. 손 목사의 첫 사역지가 이렇게 한센병자와 연결된 것이 훗날 그에게 사랑의 순교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는 알 리가 없었다. 손 목사는 감만동 교회에 시무 중이었던,1929년 3월 6일에 경남 성경 학교를 졸업했다. 원래 감만동 교회는 1934년까지 매견시 선교사가 목회를 했으며 손 목사는 외지 전도하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로 청빙이 되었었다. 사명을 받은 손 목사는 경남 울산 방어진과 남창교회에 순회 전도사로 복음을 전파하고  부산 서구 부민동에도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1930년 주일학교
 1925- 1927년 금전출납부
 

1925년 부터 1964년 까지의  방어진교회 교인 교적부

 

 교회설립자 이신 송정한 영수 께서 왕길지목사로 부터 학습을 받고 맥켄지 목사로 부터 세례를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외 초창기  왕길지목사와 맥켄지 선교사의 영향력이 이지역에 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기록을 알수 있습니다 후일 에는 라이트 선교사(한국명: 예원배 또는 예알배/ (Albert C. Wright, 1880-1971) 께서 이교회에 전반적인 목회활동을 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4. 울산 남창교회> 1931-1933년 손양원 조사로 교회 개척 시무

남창교회  (출처- 창립 100주년 ‘남창교회’ 감사 예배 < 해남사람들 < 기사본문 - 해남신문)

 

<5. 평양능라도교회> 1935년 손양원 전도사가 시무

평양 장대현교회의 초창기 모습이다. 장대현교회에서 창동교회를 분립 개척했고, 분립한 지 2년만에 창동교회는 대동강변에 능라도교회를 개척해 세웠다. 따라서 장대현교회는 능라도교회에게는 할아버지 교회가 되는 셈이다.   (출처- 덕천성결교회 | 손양원 목사와 평양 능라도교회 - Daum 카페)

 

진주에 있던 경남성경학원은 호주 장로교 선교부와 경남노회에서 공동 운영한 성경학교였다. 따라서 강의도 호주 선교사들과 한국 목회자들이 나누어 담당했다. 주기철 목사도 이 학교에서 종말론과 로마서를 강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 상애원교회 등 경남노회 내 몇 곳 교회를 섬기다가 1935년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였다. 34세의 나이였으니까 많이 늦은 학업이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그는 능라도 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했다. ​​능라도 교회는 1907년에 창동교회에서 지교회로 세웠다. 손양원이 이 교회의 전담으로 있었는가 아니면 부교역자의 위치에 있었는가에 대해서 이론(異論)이 분분했다. 지금의 관점으로 1930년대 교계 상황을 읽으면 안 된다. ​​당시 평양신학교에는 장로 조사 영수 등 나이 든 학생들이 많았다. 이들은 각자 교회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학교 측도 이것을 고려해서 교육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이렇다. 1년 중 3개월만 학교 수업을 하고 방학을 포함하여 9개월은 자기 교회로 돌아가서 담임목사의 사역을 돕는다. 신학교 학생이었기 때문에 직함은 전도사였고 명목은 현장 실습 강의의 일환이었다. ​​대부분 자기가 소속된 노회 내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다. 손양원은 경남노회 소속이었다. 학교가 있는 평양에서 경남까지 매주 오르내린다는 것은 사실상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같은 평양  시내 가까운 능라도교회 전도사로 사역한 배경은 이렇다. ​​전도사로 사역한 것이 경제적으로 얼마만큼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평양신학교 재학 중 전도사로 일한 것은 지금의 상황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천신학 현장실습이었다는 것. ​​손양원이 평양신학교를 입학했을 때는 이미 세 자녀(동인, 동신, 동희)가 있었고, 넷째 동장은 학교 재학 중인 1936년에 태어났다. 가족을 함안 본가에 남겨 둔 채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능라도교회는 신구약 주석을 써서 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고 이상근 목사가 시무한 교회이기도하다. 이 목사는 1945년 목사 안수를 받고 바로 이 교회 담임이 되었다. 15만 관중을 수용하는 평양 능라도 경기장으로 '능라도'는 우리 귀에 설지 않은 이름이다. 

 

<6. 애양원교회, 현 성산교회> 1939- 1950년 순교까지 손양원 목사 시무

현 성산교회 (옛 애양원교회)

 

성산교회(애양원교회)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벨 목사와 오웬 목사가 파송 되었고 1904년 12월 25일 성탄에배를 드리므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1908년 3월 18일 광주에서 교회가 창립되었다. 1916년 세례교인 56명이 투표로 이종수 장로를 세움으로 조직교회가 되었다. 1916년 이후 찾아드는 한센병 환자가 늘어나 1924년에는 560명에 달하게 된다. 그 후 부터 광주 한센병자촌을 순천으로 옮기려는 준비를 해서 1928년 2월10일 현재 위치로 이전 건축되었다. 이후 1934년 4월 4일 예배당 재건되고 1935년 당시 애양원 원장인 윌슨 박사가 본원의 이름을 환우들에게 현상공모하여 "애양원" 이라는 이름이 채택되었다. 이 후 애양원교회로 불렀다.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교회 제2대 담임자로 1939년 7월14일에 부임하여 목회 하였으며 1945년 9월10일 부터-10월 15일 까지 애양원 병원장을 겸임 하였다.  1939년 일제에 항거한 순천노회의 :원탁회사건" 으로 손양원 목사와 장로들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손양원 목사는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신앙을 지키며 공산군에 대항하다 애양원 환자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1982년 2월28일 본원의 아이들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교회 이름을 성산교회로 바꾸어 현재 사용하고 있다.

현 성산교회 (옛 애양원교회)

현 성산교회 (옛 애양원교회)

현 성산교회 (옛 애양원교회)

현 성산교회 (옛 애양원교회)

현 성산교회 (옛 애양원교회)

현 성산교회 (옛 애양원교회)

순교기념비

성산교회 인근에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이 있다.

성산교회 인근에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이 있다.

자세한 사진은 배성수성지사랑  "여수 손양원목사 순교유적지" 를 참조하기 바란다.

초기 애양원교회 사진 (애양원역사박물관 사진)

초기 애양원교회 사진 (애양원역사박물관 사진)

손양원목사님 당시 교회 모습  (출처- 여수 손양원목사 순교유적지 1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3.)

 

1939년7월14일 부임해서 1950년9월28일 순교 하실 때까지의 애양원교회의 외부모습이다. 현 애양원 교회의 모습은 손 목사님 순교 이후에 종탑 부분과 강단 부분이 증축되었다.

1939년7월14일 부임당시 애양원 사택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출처-여수 손양원목사 순교유적지 1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3.)  

 

당시에는 손목사님의 아버지 손종일장로님도 함께 계셨다. 애양원 안에는 환우들만 살 수 있었으므로 목사님 사택은 병원직원들이 사는 건강 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 소원이 자신도 병이 들어서 애양원 안에 들어 가서 환우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당시 예배드리던 모습  (출처-여수 손양원목사 순교유적지 1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3.)

손양원목사와 당회원들   (출처-여수 손양원목사 순교유적지 1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3.)

 

손양원목사님 당시 애양원교회의 당회원들이다.지금 생존해 계신분은 한분도 안계신다. 사진에 신풍교회당이라고 나와 있는데 애양원교회는 1909년 4월25일 광주 봉선리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이름이 설립당시에는 봉선리 교회였다. 현재의 애양원으로 1925년에 이주한 이후에는 지역의 이름을 따라 신풍교회당이라 불렀다. 1936년에 애양원교회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애양원이라는 이름은 손목사님 부임전에 바꾸어진 이름으로 손양원 목사와는 상관이 없는 이름이다.그 이후 1982년이 성산교회로 바뀌어서 현재 공식적인 명칭은 성산교회이다

안재선과 함께 부흥회 인도   (출처-여수 손양원목사 순교유적지 1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3.)

 

서울 남대문교회 부흥집회시 안재선과 함께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함께 다니는 것이 재선이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쳐서 후에는 같이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애양원 원장 손양원 목사와 애양원 직원들 , 1945.9.10- 10.15 까지 임시로 원장을 겸임 하였다. 

손양원 목사(왼쪽에서 2번째)와 김구 선생(왼쪽에서 3번째)

 (출처-여수 손양원목사 순교유적지 1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3.)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에 손 목사를 교장으로 초대하였으나 " 나는 환우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 고 거절하였다.

성산 초등학교 졸업생인 3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출처-여수 손양원목사 순교유적지 1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3.)

 

나환자를 위해 1915년에 설립한 학교로 당시는 봉선리 국민학교였으며 1971년 폐교되었다. 또한 1946.9.8. 나환자를 위한 성산중학교를 개교 하였고 1971년 폐교되었다.

한성신학교 옛 건물 사진   (출처-여수 손양원목사 순교유적지 1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3.)

 

1955.4.12 애양원은 나환자를 위한 대학과정 한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2년에 폐교되었다. 

한성 신학교 학적부   (출처-여수 손양원목사 순교유적지 1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3.)

 

 

<7. 손양원 목사 순교지>

여수 새중앙교회, 손양원 목사 순교지

여수 새중앙교회, 손양원 목사 순교지

순교비

손양원 목사 약력

조상학 목사도 함께 순교 (1950.9.28)

여수 새중앙교회, 손양원 목사 순교지

여수 새중앙교회, 손양원 목사 순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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