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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이기풍 목사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25. 12. 2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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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 목사의 사역 및 제주 선교의 역사는  제주 기독교 100년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대부분 100년사를 중심으로 글을 옮겨 놓았다. 100년사가 글의 출처이고, 외 교회 사진과 글은 필자가 추가 하였다.

 

<제주 기독교 100년사>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제주선교 100주년을 맞아, 이기풍 목사님과 그 이후의 모든 지도자들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분들의 헌신의 자취를 어렵게 추적하면서 《제주기독교100년사》 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기록문화의 빈곤이라는 원초적 약점 때문에 역사의 재구성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부 교회와 역사학자들의 경도된 주장은 역사의 신뢰성에 대한 부끄러운 소재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사 학계의 폭넓은 존경과 지지를 받는 차종순 박사 (호남신학대학교 총장)께서 이 어려운 작업을 흔쾌히 맡아주셔서 역사자료 발굴을 위한, 성의를 다한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로 유사 제주 기독교 교회사 와는 차별화된 충실하고 품격 있는 《제주기독교100년사》를 출간할 수 있었음에 존 경의 마음으로 그 수고를 치하하는 바입니다.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 1. 복음 수용 이전의 제주와 이기풍 목사 파송> 

제주도는 옛날부터 물난리가 자주 일어나고, 가뭄도 많고, 세찬 바람이 불어와서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활환경이 좋지 않은 삼재(三災)의 섬이라고 하였다. 척박한 자연환경에 외지인이 적응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찬 가지로 외부 문화가 제주에 정착 혹은 수용되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융합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 복음 역시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야 했다. 육지와의 교통은 주로 목포와 완도를 통하여 이루어져 왔으며, 지리적으로 가까운 전라도에 오랫동안 부속되어 왔다.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제주도는 전라도의 4개 목(牧) 가운데 하나로 통치를 받았다. 1896년 8월 정부의 지방 행정 개편 으로 전국의 8도를 13개 도로 확장시킬 때에도 전라남도의 일부였다. 해방 이후 1946 년 8월 1일, 미 군정청의 행정조직 개편으로 처음으로 제주도로 승격되었다. 1893년 1월,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제주도를 선교 구역으로 정하였다. 하지만 선교사 인력과 재정의 부족, 그리고 교통의 불편으로 인하여 제주도에 대한 본격적인 선교에 착수하지는 못하였다. 15년이 지난 후 1908년 한국교회가 이기풍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제주도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2. 제주인들에게 전해진 복음>

제주인들이 개신교를 접촉했던 일들을 살펴보자. 첫째, 아펜젤러 선교사의 학당에서 공부한 제주도 학생이 있었다. 이름은 장지영이다. 1886년 12월 11일자 아펜젤러 일기에 《신앙》이라는 소책자를 주면서 복음전도 사역을 제주도에서 온 장지영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남아 있다. 그는 제주도 출신으로서 어려움을 잘 참고 매우 총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0년대 초 제물포에 세워진 영국성공회의 성누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복음을 전해들은 제주인들에게 성경과 전도책자가 전해졌다. 이들에 의해 제주도에 복음이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1890년부터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선교사가 부산에서 자신의 거처에 사랑방 을 마련하고 전도자들과 손님들을 위하여 점심식사를 제공하였다. 1893년 9월 11일 자 일지에는 “남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제주도에서 온 장님”의 방문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94년 2월 2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주도에서 온 한 사람이 여기에서 여러 번 책을 구하고 약을 복용하였다. 그는 복음에 대해 약간 관심을 보였다. 사람들 몇몇이 최근에 그곳에서 왔기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그 섬에 들어가고 싶다.” 1896년 베어드는 광범위하게 순회전도에 나섰다. 279일에 걸쳐 1,000마일이 넘는 긴 여행이었다. “베어드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면서 길가에서 전도했고 항구에서 선원 들에게 전도했다. 이런 방식으로 복음이 제주도까지 전해졌다”라는 기록을 다른 선교 사의 글에서 볼 수 있다. 선교 목적으로 제주도를 방문한 사람은 성서공회에 소속된 전라도와 충청도를 담당 했던 권서인 피터스(A. A. Pieters)와 대영성서공회 책임자 켄뮤어(Alexander Kenmure)였다. 1899년 피터스는 켄뮤어와 함께 제주도를 다녀온 후 그의 선교여행을 글로 남겼다. 천 주교의 뮈텔 문서에 의하면, 페네 신부가 개신교 선교사들의 제주도 방문을 언급하였 다. 개신교 선교사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부들도 제주도 현지인들의 외부인 에 대한 인식 때문에 선교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다. 개신교 목사들의 활동을 “엽전으 로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다”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개신교 선교사 들이 제주도를 방문하였고 구체적으로 전도활동을 펼친 흔적을 증언하는 셈이다.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추가)

이기풍 목사는 1868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1883년까지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을 날을 허송세월하면서 서양선교사들을 박해했다. 특히 그는 1890년 어느날 평양서문통 네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원산으로 피난을 했다. 원산에서도 그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등 못된 짓을 골라했다. 그러던 차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전군보라는 전도인의 전도를 받고는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며 기독교인이 되기를 결심한 것이다. 그후에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구했다. 1894년 그는 슬왈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인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어 1902년 부터 1907년까지는 황해 안악,문화, 신천, 해주 등지를 도며 조사로 시무했다. 한편 이때 마펫 목사의 권고를 받고 1903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길선주,양천백 등과 함께 최연소자 신학생으로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했다.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이기풍 목사는 이 독노회의 결의에 의해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떠났다. 부인 윤씨와 함께 인천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경유해 제주도를 가려고 했다. 목포에 도착해 보니 마침 풍랑 너무 심하여 목포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제주도를 향해 떠나 난항을 거듭한 끝에 1908년 봄에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한편 그의 부인 윤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한편 이때는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선교를 허락한 때이었지만 1899년의 신축교난으로 제주도 주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은 편견은 여전히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해야 함을 물론이고 굶주림과 생활고까지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다. 뒤이어 총회에서는 그를 돕기위해 전도인 이관선 김홍련을 제주도 선교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11년 10월 전라노회에가 결성되어 제주도는 1912년부터 전라노회 관할이 되었다. 이기풍 일행은 주민들의 온갖 핍박과 방해공작 속에서도 성내교회, 삼양, 내도(거제), 금성, 한림, 협제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1916년 그는 전라노회의 부름에 따라 광주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2대목사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초창기 교회발전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한편 그는 1920년 전라노회장 및 총회 부총회장에 1921년 제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막중한 책임과 왕성한 활동중에 그는 신병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성대가 막혀서 말이 작 나오지 않는가 하면 관절염, 귀병 등으로 심한 고생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일단 목회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요양을 하기도 했다. 1923년 그는 다시 전남 순천교회 (현 순천중앙교회) 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했고 1924년 고흥교회 (현 고양읍교회)로 전임되었고 1926년 다시 제주도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되어 재차 부임하였다. 1934년에는 전남 벌교교회 (현 벌교대광교회)로 파송되었고 1934년에는 그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도서벽지 여수군 남면 우학리 (금호도 우학리교회)라는 작은 섬에 복음을 전파하려 들어갔다. 이외에도 이기풍은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으로 순회 전도하면서 교회개척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의 치하에서 민족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에는 과감히 일제에 대항하여 교회를 굳건히 지켰다. 이러던 중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 그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서 극력 반대했다. 이에 일제는 그에게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순천노회 산하 오석주,나덕환,김 상두, 김순배 목사등과 함께 1938년 체포당했다. 칠순의 노구를 지탱하기도 힘든데다 일경의 심한 취조와 고문은 그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전에 졸도하여 벙보석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풍은 과로와 고문등으로 이미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칠순의 나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회복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우학리 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우학리에 안장되었다. 그러다 11년 후인 1953년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제일교회 묘지에 이장되었으며,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는 그의 부인 윤씨에게 표창을 주었다. 1962년 12월 25일 신여성으로서 평생 이기풍 목사의 성역을 도와 헌신한 부인 윤씨도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딸 이사례 권사가 있다. 

 

<3. 이기풍 목사 제주 파송>

▲ 1907년 9월 17일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서 배출된 7인의 목사.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기풍 목사이다.

 

초기 이북 중심의 교세는 목사 임직을 받은 7명의 신학사들의 사역지를 살펴보더라도 알 수 있다. 신학 졸업생 7명에 대한 문답을 통하여 저녁 7시에 회집한 예배에서 이들에게 안수례를 통한 목사 임직식을 거행함으로써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한국인 장로교 목회자 7명이 탄생하였다. 이들에게 맡겨진 일은 다음과 같다.

1. 새로 장립한 목사 7인 중 1인을 선교사로 파송할 일

2. 이기풍 씨를 제주 선교사로 보내되 월급은 전도국에서 지출할 일

3. 방기창 씨는 용강, 제재, 주달교회의 전도목사로 정할 일

4. 한석진 씨는 평양, 장전, 미림, 이천교회의 전도목사로 정할 일

5. 송인서 씨는 증산, 한천, 외서장, 영유, 허리몰교회의 전도목사로 정할 일

6. 길선주 씨는 평양 장대재 지교회 목사로 정할 일

7. 양전백 씨는 선천, 정주, 박천 등지에 위대모 목사와 같이 전도목사로 정할 일

8. 서경조 씨는 장연, 옹진 등지에 사우업 목사와 같이 전도목사로 정할 일37)

이상 7명의 졸업생 가운데서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선교사로, 길선주 목사는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그리고 나머지 5명은 각각 해당 지역의 전도목사로 임직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독노회의 최대 관심사가 전도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이들이 맡은 전도 구역도 평안도와 황해도에 치중되어 있다.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4. 복음을 수용한 제주의 신앙 선각자들>

 

1) 김재원 장로 (제주 성내교회, 제주 최초의 기독교인 및 장로, 이호리 공동체>

김재원 장로

 

김재원은 1878년 10월 5일(음력), 제주성 밖의 마을 이호리에서 부친 김진철과 모친 김인애 사이에서 첫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이 넉넉해서 아주 귀하게 자란 김재원은 어린시절 거로마을에서 유학했다. 거로마을은 조선시대 유배지의 영향으로 학문이 융성했고 선비들이 많았던 마을이었다. ​그런데 그는 질병에 심하게 시달리게 되었다. 늑막염에 걸려 배가 크게 부어올랐다.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차도가 없어서 죽을 날만을 기다려야 할 형편이었다. 병에서 낫기를 바라던 그에게, 경성에 제중원이라는 약방이 있는데 거기 가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아버지와 함께 인천을 통해 경성의 제중원에 도착하여 선교사 에비슨(O.R. Avison)을 만났다. 고칠 수 있는 시기를 이미 놓쳤다며 그는 치료를 거부했다.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선교사는 “예수를 믿으면 수술을 시도해 보겠다”라고 제안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를 믿겠다고 김재원은 약속했다. ​에비슨 선교사가 말년에 집필한 회고록에는 김재원에 관한 이야기가 더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 ​

1903년경 서울 안의 옛 장소(제중원)에서 아직 병원을 운영 중이었을 때, 한 젊은이가 오른쪽 가슴에 있는 농흉(膿胸, empyema)을 치료해 달라며 찾아왔다. 그것은 더러운 냄새가 나며 이미 여러 늑골이 침식된 오래된 만성이었다. 당연히 장기간 치료를 해야 했다. 우측의 모든 늑골을 제거해 흉곽이 함몰되고 가슴 안쪽에 유착돼서야 회복되었는데 약 2년이 걸렸다. 치료를 받는 동안 그는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제주로 돌아 간 그는 친구들에게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다. 자신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해 배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 퍼졌고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한 무리의 신도들이 생겼다. 내가 알기로 그때까지 제주도에서는 개신교의 어떤 전도 사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재원은 제중원에 있는 동안 세례를 받았고, 1903년 말경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는 쪽복음을 건네며 복음을 전하였다. 1904년 김재원이 27세 되는 해에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풍습을 따른다면 신주를 모시고 상식을 올려야 되는데, 김재원은 이를 거부하였다. 가문에 큰 풍파가 일어났고, 제사를 거부하는 김재원을 불효자로 단죄하게 되어 덕 석말이 매로 다스리고자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험악하게 되자 어머니가 결사적으로 아들을 보호하였다. “무당귀신은 내 아들을 못 살렸지만 예수님은 내 아들을 살려 주었지 않느냐? 나는 무엇이라 해 도 아들 살려주신 예수만 믿지 다른 귀신 안 믿는다”라고 강력하게 항변하였다. 위기 를 벗어난 모자는 밭에서나 들에서 열심히 전도하였다.48)

김재원은 전도하면서 자신의 옷을 들어 올려 수술자국을 보여 주었고, 죽다가 살아 난 자신의 일을 간증하면서 전도했다. 김재원의 치병과 회심을 통한 전도활동에서 이호리공동체가 생겨났다. 자생적 신앙공동체의 활동은 에비슨의 회고록에서 보완된다. 에비슨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주도에 목회자를 파송해 예배를 드릴 수 있게해 줄 것과 동시에 전도도 해야겠다”라는 내용을 보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에비슨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때때로 그(김재원)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 그동안 장로회의 총회(독노회)는 (이기풍)목사와 (이선광)전도 부인을 제주도로 보내 김씨의 종교 활동을 추적하도록 했다. 교회가 세워졌고, 머지않아 여러 교회가 세워졌다. 제주도 최초 개신교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김재원에 의해 이호리에서 출발하였다. 이 공동체의 요청에 의해 한국 장로교회는 최초로 안수받은 7명 목사 가운데 한 사람, 이기풍 목사를 해외선교사 자격으로 제주도에 파송하였다.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2) 조봉호 (제주 금성교회, 금성리 공동체)

조봉호 

 

조봉호는 1884년 5월 12일 구우면 귀덕리에서 아버지 조만형과 어머니 김진실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활달하고 지혜로웠으며 동기들 간에 신의가 두터웠고 곧은 성품을 지녔다. 그는 가족들과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 으며, 부농의 자제로서 넉넉했던 집안 형편 덕에 일찍부터 한학을 익힐 수 있었다. 계속되는 민란으로 인한 제주의 아픔을 보면서, 그는 서울로 나가 유학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가족들과 상의한 후 1902년 상경한 그가 배우게 된 곳은 예수교중학교로 후일 경신 학교로 이름을 바꾸는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수학기간 동안 그는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로서만이 아닌 자신이 믿어야 할 신앙임을 받아들이고 곧 귀의하였다. 이러한 신앙심은 그가 부친의 사망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였을 때에도 이어졌다. 조봉호는 1904년 제주도로 내려와 남아 있는 모친과 동생 봉휴, 유승을 돌보았으며 1906년에는 조성벽과 혼인하였다.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경험했던 개신교에 대해 자신의 가족들을 포함한 제주 사람들과 나누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금성리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들 역시 이기풍 선교사가 도착한 이후, 신앙과 더불어 교육을 통한 민중계몽에 앞장서는 일꾼들이 된다.​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5. 이기풍 목사  (1868-1942) >

양지 기독교순교자기념관

손양원 목사 추모관  (출처- 하나님만 따라서 | 손양원 목사님 추모관을 다녀와서 - Daum 카페)

이기풍 목사

이기풍 목사, 윤함애 사모,  이사례 권사(딸)

 

1). 이기풍 목사의 성장과 소명

이기풍 목사의 출생과 삶 그리고 목회에 대한 기록은 막내딸 이사례 권사의 기록《순교보>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기록은 정확하지 못한 부분들도 꽤 있어서 많은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기풍 목사(1868-1942)의 출생일은 《순교보》에 1865년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지금까지 그렇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렇지만 이기풍 목사의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는 족보와 호적 등의 자료는 1868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사례 권사는 이렇게 말한다. 증조 할아버지는 홍경래 난 당시에 세도정치에 불만을 품고 바른 말을 하다가 역적으로 몰리어……구사일생으로 평양성을 빠져나와 황해도 구월산에 피난을 함으로써……조정에서 증조 할아버지에 대한 간섭이 없어지자……할아버지는 힘없이 가족들을 이끌고 다시 평양으로 되돌아와농민으로 행세하면서 동대문 밖에 자리를 잡게되었다.  이사례 권사는 증조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동시에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하 였던 이유도 밝히지 않았지만, 이기풍 목사가 친필로 쓴 가족의 족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무관 출신으로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한 이춘배(李春培)이며, 이춘배는 아들 셋(京鎭, 濟鎭, 在鎭)을 두었으며, 둘째 제진은 외아들 기풍(基豊)을 두었다. 이 기록을 통하여 이기풍 목사의 가문은 무관 집안으로서 할아버지는 정3품에 속하는 오위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홍경래의 난에 참여함으로써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하였다. 이사례는 아버지의 생년월일을 1865년 12월 23일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렇지만 이기풍 목사의 호적과 관계된 제반 자료들을 종합하면 1868년 11월 21일이라고 추정된다. ​첫째, 호적은 명치 원년(1868년) 11월 21일이라고 밝히며, 아버지는 이제진, 어머니는 김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이기풍 목사는 회갑기념예배를 1928년 제주도 성내 교회에서 거행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에 1928년이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셋째, 《한국교회 희년 기념 설교집》에 이기풍 목사의 설교도 실려 있는데, 이 기풍 목사의 약사를 기록하면서 1868년 평양부 순영리 출생이라고 썼다. ​이상의 자료들을 통하여 우리는 이기풍 목사는 아버지가 이제진이고, 어머니가 김씨이며, 1869년 11월 21일 평양부 순영리에서 태어났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2) 개종 이전의 직업

이기풍의 개종 이전의 직업에 대해 흔히 ‘석전 패거리의 우두머리’ 혹은 깡패 등으로 표현되어, 일정한 직업 없이 한량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알려져 왔다. 이만열 교수는 이기풍의 개종 이전의 직업에 대해 마펫(Samuel A. Moffet)의 글을 인용하였다. 이기풍은 1891년 평양 거리에서 나에게 돌을 던지며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때에 영문의 아전(衙前)이었는데 원산으로 이사 가서 회개하고 1896년에 세례를 받았다. 마펫 목사는 이 부분을 보다 더 상세하게 정리하였다. 1936년에 마펫 선교사가 은퇴하여 한국을 떠난 다음에 미국에서 자신의 선교사 생활을 정리하여 ‘초기 시절’(Early Days)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다. 1891-1893년 사이에 저자, 게일, 홀 그리고 리 등은 평양에 선교부를 개설할 목적으로 평양과 의주를 연속적으로 방문하였다. 1893년 봄에 리와 나는 토지를 샀으며, 지금은 여자성경학교로 쓰이고 있다. 이것이 공직자들 사이에 대혼란을 야기시켰으며, 사람들을 충동시켜 우리를 쫓아내기 위한 명령을 분명히 내린 것으로 알 수 있다……그날 아침에 우리는 서문통으로 들어갈 때 경찰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 였으며……그렇지만 우리에게 돌팔매질을 한 경찰 가운데 한 사람 …… 이기풍은 후일에 한국의 최초의 목사 임직을 받고 또한 최초로 선교사가 되어 제주도로 갔으며, 그곳에서 돌팔매질을 당하고 죽이겠다는 위협을 당하였다. 이상의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이기풍 목사는 1891년 이전부터 평양성 영문의 포졸(police)이라는 하위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출생이 1868년이므로 당시의 관례에 따라 15~16세 즈음에 결혼하여 20세 즈음부터 포졸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마펫 목사는 1890년 1월 한국에 도착한 이래 평양을 선교지로 정하고서 1890년 8월에 그리고 1891년 봄에 방문하여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였으며, 1892년 가을에 는 선교부 후보지로 최종 결정을 내린 후 1893년에 평양성에서 땅을 매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을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1890년에 이르기까지 평양은 개신교 선교사가 단 두 번 방문하여 책을 전하였으나 개종자는 없었다.……1890년 8월 마펫이 가서 2주간 머물렀다. 그 다음해(1891년) 봄에 다시 찾았으며 5일간 있었다.……1892년 가을에 평양을 영구적인 선교부로 결정하고서, 그 다음해(1893년)에 마펫과 Mr. 리가 정착하기 위하여 찾아갔다. 2 월에 토지를 구매했으며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즈음 해서 사람들은 처음보다 훨씬 더 친근했으나 지방관과 외국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쫓아내기 위한 본격적인 물밑 작업을 진행하였다. 따라서 이기풍이 마펫 목사에게 돌을 던지면서 난동을 부린 연도는 1893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풍은 개종 이전에 당시로서는 하위직이라 할 수 있는 포졸직을 맡은데 대한 울분이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울분 혹은 불만이 가끔씩 과격한 행동으로 표출됨 으로써 ‘깡패’ 집단의 우두머리로 알려지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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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범 김구와의 교유

이기풍 목사의 삶에서 해결되어야 할 부분은 세례 일, 그리고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을 하였던 일 등이 있다. 이기풍은 1895년에 원산에 서 스월른(W.L. Swallen) 선교사의 노방전도를 통하여 기독교에 입문하여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96년에 세례를 받고, 곧바로 스월른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원산 지방의 여러 교회를 개척하는 등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898년에 미국 북장로교 한국선교회가 원산 지방을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에 넘겨주었다. 스월른 목사와 그의 한국인 협력자 이기풍 조사는 1899년부터 황해도 지방에서 선교하였다. 이기풍과 김구 선생의 만남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1942년 순교시까지 때때로 지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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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기풍 목사 제주도 입도(1908.2-3월)

이기풍 목사와 제주도 선교와 관계하여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일은 제주도 입도일과 제주도 첫 교회 설립에 관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지금까지 제주도 교계에서 일고 있는 제주도 첫 교회에 관한 논란은, 성안교회가 1984년에 교회 설립 75주년을 맞이하여 세운 ‘선교기념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기념비는 이사례 권사의 증언과 제주 성안교회 교우들의 증언을 토대로 건립된 듯이 보인다. 그 ‘선교기념비’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선교기념비)

하나님께서 한반도 남쪽 아름다운 섬 제주도를 주셨다. 조상 대대로 바다와 하늘밖에 모르며 미신 속에 살아온 이 섬에 복음의 빛을 비추시려고 한 아기를 주셨으니 그가 1865년 12월 23일 평양성 대동문 밖에서 태어난 이기풍이다. 1884년 19세에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7년 9월 17일 졸업과 동시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은 7인 중 한 사람이다……1907년 겨울 그는 독노회의 명을 받고 추위를 무릅쓰고 가족과 함께 절해의 고도 제주도를 향하여 인천항을 출항하였으나……1908년 정월 그는 제주도 산지포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니……1908년 2월 1일 향교골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하니 이것이 이 땅의 첫 교회인 제주 성내교회가 탄생 하게 된 것이다. ​주후 1984년 2월 1일 교회 창립 75주년을 맞으면서 제주 성안교회 교우 일동


이 글에는 이기풍 목사의 출생일과 수세일, 평양신학교 입학일, 제주도로 출발하며 도착하는 과정, 제주도에서 첫 예배를 드리기까지의 경과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이제 하나씩 문제를 풀어 보려고 한다.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입도일은 언제인가? 위의 기념비에서는 “1907년에 인천항을 출항하여 1908년 정월에 제주도 산지포에 도착하여”라고 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이기풍 목사는 1908년 1월 17일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7일간 서울에 있는 여러 교회에서 설교하다가 1908년 1월 24일 제물포행 기차에 올랐다. 이 부분을 《예수교회보》는 이렇게 전한다. 평양노회에서 택정한 제주 선교사 이기풍씨는 평양서 기차로 발정하여 제주도로 가는 길에 그의 부인과 조사 일인을 거느리고 본월 십칠 일에 남대문 밖 정거장에 도착 하매 연동, 승동, 새문안 각 교회 교우들이 정거장까지 나아가 환영하고 승동교회에서 유하다가 24일에 발정하였으니 수륙 원로에 태평히 도달하기를 축사하오며, 그곳 어두운 백성을 밝은 길로 인도하여 교회가 날로 흥왕하기를 간절히 간구하나이다. 위 신문의 보도를 통하여 우리는 이기풍 목사가 1908년 1월 17일까지 평양에 기거 하였으며, 1월 17일에 가족과 조사 한 사람을 대동하고 평양 기차역을 출발하여 서울 역에 도착하였으며, 승동, 연동, 새문안 교회 교우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후, 승동교회에서 7일간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이기풍 목사 일행은 1908년 1월 24일에 기차로 제물포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선편으로 목포에 갔다.64) 왜 목포로 갔을까? 제주까지 연결되는 선편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목포 선교부의 프레스턴(John F. Preston: 변요한) 선교사를 만나기 위한 것으로 보인 다. 그는 이기풍을 가르친 교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당시 목포 선교부의 선임 선교사 였다. 이즈음에 목포 선교부는 문을 닫았다가(1905년 11월부터 1907년 9월까지) 다시 문을 열고서 목포 양동교회를 중심으로 성령대부흥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레스턴 선교사는 이기풍 목사를 초청하여 목포 교회의 부흥을 꾀하였던 것이다. 지역 교회(목포 교회)는 제주로 가는 국내 선교사 이기풍 목사가 1월에 행한 한 주간의 복음적 집회를 통하여 크게 새롭게 되었다. 프레스턴 선교사는 1908년 2월 1일에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일주일간의 집회”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기풍 목사는 1908년 1월 24일 선편으로 목포에 도착하여 1월 25일부터 31일까지 한 주간 집회를 인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회가 끝난 다음에 이기풍 목사는 1908년 2월 2일이 음력 설날이기 때문에 한 주간 동안 목포에서 새해를 맞이하면서 조용하게 지냈다. 그리고 이어서 1908년 2월 에 6일부터 광주에서 실시하는 훈련반에서 강의하였다. 광주 선교부의 훈련반은 음력 설날을 보내고 4일이 지난 1908 년 2월 6일부터 14일간 진행하였으며, 이기풍 목사는 필시 해리슨 선교사 대신으로 목 포 선교부의 추천과 광주 선교부의 요청으로 강사로 초청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기풍 목사가 광주 훈련반에서 강의하였다는 내용이 1908년 9월에 회집한 연례대회에서 이렇게 보고되었다. 이기풍 목사가 광주 선교부의 훈련반에서 “매일같이 복음적 설교를 행하였다”라고 보고한 내용을 토대로 할 때, 그는 1908년 2월 6일부터 14일 동안, 즉 2월 20일까지 설교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기풍 목사가 서둘러 제주도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였다 할지라도 그 날짜는 1908년 2월 20일부터 25일 사이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로 향하는 선편은 1906년 11월부터 정기적으로 취항하던 제주-목포 정기 여객선 낏쑈마루(吉祥 1丸)이며, 이 배는 75톤급의 윤선으로 일등실이 6엔, 이등실이 3엔이며, 매월 3회 운항하였다.68) 그리고 이 배로 목포에서 제주도에 당도하는 운항시간은 하루 정도였으나, 운항 중 풍랑을 만나서 추자도에서 잠시 체류하였기 때문에, 이기풍 목사는 1908년 2월 말 혹은 3월 초에 제주도 산지포 항에 도착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 제주도에서 육지로 전보를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무선통신이 가설되어 있지 않았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에서 목포로 가는 인편에 제주도 도착 소식을 전 하게 되었으며, 목포의 가족은 44일 만에 인편으로 “무사 도착”이라는 소식을 전달받 을 수 있었다. 따라서 목포의 가족들이 이 소식을 접한 날짜는 1908년 4월 5일로부터 10일 사이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제주 성안교회의 ‘선교기념비’에서 “1907년 겨울 그는 독노회의 명을 받고 추위를 무릅쓰고 가족과 함께 절해의 고도 제주도를 향하여 인천항을 출항하였으나……1908년 정월 그는 제주도 산지포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니……”라 고 기록한 내용은 대폭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이기풍 목사의 선교 활동(1908-1915) >

1. 제주도의 초기 선교 사역

이기풍 목사 의 연중 일정은 다음과 같다. ​매년 1~2월에는 호남지방 각 선교부에서 개최하는 남자반 성경학교에 참석하여 성경공부 및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때로는 3월에 목포와 광주의 선교학교에서 실시하는 졸업식에 참석하여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4월 혹은 5월에는 전라노회/전남 노회 혹은 각 지역의 노회에 참석하여 제주도 선교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줄 것을 부탁 하기도 하였다. 이 집회에 참석한 다음에 제주도로 돌아갈 때는 미국 남장로회 소속 호남지방의 5개 선교부에 소속된 목사와 의료 선교사들과 동행하여 한두 주간 혹은 한 달 동안 부흥집회와 의료 선교를 진행하였다. 이어서 9월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 혹은 총회에 참석한 다음에 목포 선교부에서 개최하는 각종 집회에 참석하여 설교한 다음에 제주도로 돌아가곤 하였다. 이때에도 또한 호남지방 5개 선교부 소속 목사와 의료 선교사들과 함께 동행하여 제주도로 돌아가서 부흥집회와 의료 선교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서 선교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이유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후원이었다. 둘째, 한국 노회에서 총회로 이어지는 교계와의 긴밀한 유대관계이다. 셋째, 자신의 출신지역인 평양 지방 교회와 학생들의 협력이었다. 넷째, 특히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의 적극적인 협력이었 다. 다섯째,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자발적인 후원이었다. 

 

2. 선교사들과의 폭넓은 교제

이기풍 목사는 미국 남, 북장로교와 더불어 타 교단의 사람들에게도 이미 유명인사였다. 특히 미국 장로교 한국선교회 소속 선교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평양에서 신학 공부할 때 가르쳤던 스승들이었다. 따라서 이기풍 목사는 선교사들과의 폭넓은 교제를 통하여 이들의 후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미국 북장로회 평양 선교부 소속 마펫(Samuel A. Moffet: 마포삼열) 선교사의 개인적인 후원과 지도는 물론이려니와,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1908년부터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를 지원해 오다가 1914년부터 전남노회가 제주도 선교를 전담하게 되자 더욱더 적극적으로 이기풍 목사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지원 가운데서도 의료 선교사와 아동 및 부녀자 선교를 위한 독신 여성 선교사의 파송은 제주도민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바꾸어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하 여 선교사들이 1년에 두 차례 이상 봄과 가을에 제주도를 찾아가서 이기풍 목사의 활동을 지원하게 되었다. 가톨릭 선교사들과 그들의 횡포를 맛보았던 제주도민들은 더욱더 새로운 태도로 이기풍 목사를 대하게 되었다. ​여기에 곁들여서 제주도에 귀양 와 있었던 철종의 부마 박영효와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하여 제주도에 초등학교 과정을 세워 제주도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이기풍 목사의 폭넓은 대인관계의 결과였다.

​이기풍 목사가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유력 인사들과의 사귐은 제주도민들로부터 ‘무시할 수 없는 인물’로 인정받아서 ‘신축교안’ 이후로 배척받아 오던 기독교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3. 노회와 총회 참석

▲ 1921년 제10회 총회장에 취임한 후 찍은 것 (1921년 평양 장대현교회)

 

​이기풍 목사는 봄철에 전남노회에 참석하고 가을에는 총회에 참석하여 제주도의 특별상황과 선교의 가능성을 역설하였고, 전국의 모든 총대들 앞에서 제주도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1908년 9월 서울 연동예배당에서 회집한 제2회 노회에 참석하여 제주도의 선교 상황을 보고하였다. 제주 전도하는 일은 잘 되옵는데 원입인 9사람이오며 매주일 모이는 사람은 20여 명이오며……선교사 이기풍 씨가 제주 전도 형편을 대강 설명하매 회중이 박장감사하니라.……길선주씨가 제주 전도인 김홍련씨의 설명 듣기를 청원하매 회중이 가로 결정하다. 제주 전도인 김홍련씨와 전도국장 길선주씨가 설명하여 전도사를 확장하자고 청원하니라. 이기풍 목사와 전도인 김홍련 씨의 설명을 들은 후 노회는 선교사 스월른(W. L.Swallen: 소안련)과 방기창 목사의 동의로 제주도의 여성 선교를 위하여 특별한 헌금을 할 것과 여성 전도인 한 사람을 파송할 것을 결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주 선교를 위한 헌금을 노회에서 취합하여 속히 전도국에 납부해 줄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99) 이렇게 하여 제주도에서 이기풍 목사와 더불어 여성들의 선교에 전념하게 된 여전도인은 이선광씨이며, 이선광씨의 전도 비용은 평양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감당하기로 하 였다. ​1909년 9월 3일에서 8일까지 평양에서 회집한 제3회 노회에서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의 선교 상황을 보고한 것을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기풍 목사: 제주도 선교사와 그의 조사는 그의 사역에 대한 보고를 했다. 언어와 관습이 다르다. 자신이 어떻게 학대받았으며,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자기 뒤에서 돌을 던졌는가를 보고하면서, 이는 자신이 15년 전에 평양에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마펫에게 돌을 던진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으며 몇 군 데에서는 주일마다 예배를 드린다. 이기풍 목사의 이상과 같은 보고를 듣고서 노회는 몇 가지 결정에 이르게 된다. 전도국장 길선주 씨가 보고함이 여좌하니

1. 이기풍 목사와 김홍련 전도사는 열심히 전도하였사오며

2. 평양성교회 자매들이 연보하여 이씨 선광을 제주 여전도인으로 파송하여 저간에 부인네 중에 열심히 주를 믿는 자매들이 생겼사오며

3. 평양 대중학교 학도들이 연보하여 대학도 김형재씨를 제주 전도인으로 파송하여 넉 달간 열심 전도하였사오며

4. 제주 전도된 형편이온즉 열심히 믿는 형제들이 생겼사오며 또 주를 위하여 핍박 받는 형제도 있사오며

5. 성서공회에 교섭하여 제주에 매서인 한 사람을 두되 제주에서 믿는 형제 중에서 택하기를 경륜이오며

… …

12. 제주 여전도인 이씨 선광을 일년 동안 또 보내기를 작정하였사오며

……

선교사 이기풍씨가 제주에 전도되는 형편을 일일이 설명하시며 평양 대중학도로 파송된 김형재씨의 열심과 부인전도회로 파송된 리씨 선광의 수고하심을 일장 감사하매 회중이 방기창 리치수량씨의 기도함으로 찬송감사하다.…… 소안론씨가 제주 전도인의 설명 듣기를 동의하여 가로 결정하다. 제주 전도인 김홍련씨가 제주 300여 동리에 20만 명 되는 동포중으로 내왕하며 전도하던 형편과 그 풍속의 이동됨을 설명하매 회중이 박장답사하다. 김필수씨가 제주 형제들에게 노회에서 감격한 편지하기를 동의하여 가로 결정하다. 이기풍 목사의 노회 활동은 지속되었으며, 1910년 제4회 노회에서도 ‘제주도 전도인 1명을 더 택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파송된 전도인이 김창문씨였다. 뿐 만 아니라 목포 선교부의 마틴(Miss Julia Martin: 마율리) 여선교사가 여전도인 두 사람의 선교비를 부담함으로써 1910년부터 1911년까지 선교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여성과 아동 담당 선교에서는 이기풍 목사의 부인 윤함애, 이선광 조사, 그리고 마틴 양이 보낸 두 사람을 합하여 총 네 사람이 전도 활동을 전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1911년 제5회 노회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제주 전도 형편

1. 선교사 이기풍씨는 열심 전도이오며

2. 전도인 김창문씨를 육 개월간 보내어 전도하였사오며

3. 목포에 계신 미국 마 부인의 연보로 여전도인 두 사람을 보내어 전도하는 중이오며

4. 평양 대중학교 학도의 연보로 대학도 강병담 씨를 보내어 전도하는 중이오며

5. 평양 여전도회에서 이씨 선광을 또 보내어 전도케 하오며

6. 예배당은 3곳이요, 또 예배처소가 2곳이며, 교인은 160여 인이오며 연보 낸 돈은 81원 57전 6리이오며

7. 믿는 형제의 열심기도로 이적이 많사오며.102) 

예배당 3곳은 성내교회, 금성교회, 조천교회를 말하며, 예배처소 2곳은 모슬포와 성읍리를 가리킨다. 1911년에서 1913년에 이르는 선교의 진전되는 모습을 아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제주도 선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의 전도국 소관으로 선교사업을 추진 하다가 1912년 9월 전라노회는 평양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여 제주도 선교사업을 전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는 실로 전라노회로서는 대단한 결단이었다. 코이트(R. T. Coit: 고라복) 목사는 전라노회의 이 결정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 선교부의 교회들은 제주 선교에 관심을 보였다. 이 일은 6년 전에 노회(지금은 총회가 되었다)에 의하여 시작하였으며 우리 전라노회에 임무가 넘어왔다. 광주 성경 학교에서 이 목사의 가장 진지하고 열정적인 호소에 따라 오는 해에 300엔 이상을 약속하였다. 노회는 지혜롭게도 일 년 전에 예산을 편성하여 항상 앞서가는 행정을 하였다. 이곳의 사역은 한때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지만 이제는 놀라운 축복을 거두고 있다. 이 목사는 돌에 맞고 홀대를 받고 박해당하고 쫓겨났지만, 이제는 자기희생적인 헌금으로 교회당까지 세우게 되었다. 한때는 무섭고 게으르고 무식 했던 사람들이 학식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사람 들은 이렇게 눈을 밖으로 돌릴 뿐만 아니라 자기 지역 내로도 돌려서 축호전도하며, 전도쪽지를 들고 단순한 복음을 선포한다. 광주, 1912년 2월 8일. 이 보고에 따르면 이기풍 목사는 1912년 2월 광주에서 실시하는 겨울성경학교에 강사로 참석하여 제주도 선교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역설하였으며, 1912년 노회 이후로 한 해 선교비로 300엔 이상을 약속받았다. 이에 전라노회는 1912년 봄 정기노회에서 제주도 선교비로 이 금액 정도를 편성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선교비를 집행하다가 부족할 때에는 총회에 지원을 헌의하기로 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1913년 1월 8일부터 18일까지 광주 양림동 숭일중학교에서 개최하는 도사경회에 김상종 조사와 함께 참석 하여 창세기, 사도행전, 요한복음을 강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예수교회 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이 목사와 김 조사가 제주도 정황을 설명한 후에 만당 형제자매가 열심히 연보하여 300여 원이 된지라.……어느 여학생은 지환을 빼어 놓고 혹 시표도 끌러 놓으며 보성 무만동 형님 김일현 씨는 작년 사경회에도 오셨다가 제주를 위하여 25원으로 전도인 몇 달 월급을 당하였는데, 이날 밤에 제주 백성이 전도를 듣고 모이기는 잘하는데 집이 없어 걱정이란 말과, 전도인이 다 기한이 되어 돌아가게 되고 전도할 사람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 금 50원으로 예배당 일좌를 어느 촌에 사게 하고 36원으 로 전도인 반년 동안 세우게 하였사오니. 이 보도에 의하면 이기풍 목사의 강의와 설교를 통하여 참석자들이 감화를 받았다. 한 여학생은 자신의 반지를 헌물로 내놓았고, 무만동교회의 김일현 장로는 감동적인 헌신을 보여 주었다.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4. 이기풍 목사의 안식년

이기풍 목사는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의 파송을 받아 제주도 선교사로 1908년 2월 말 혹은 3월 초순에 도착하여 사역하기 시작한 이래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아직 신축교난의 피해가 가시지 않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팽배한 제주도에서 선교활동을 지속하기란 참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풍 목사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여 적지 않은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성내교회 내에 남녀 소학교를 세워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윤함애 사모와 여전도사들의 활동으로 제주도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건강과 위생을 개선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선교사와 목사들, 의사들을 지속적으로 초청하여 제주도민들을 영적으로 해방시키고 또한 육체적인 질병과 미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였다.이상과 같은 성과를 거두기까지 이기풍 목사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았으며, 그결과 소리가 나오지 않는 성음부족증이라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부분을 니스벳목사는 이렇게 전한다. 이기풍 목사는 7년간의 열정적인 사역으로 지난 겨울에 신체적으로 병을 얻어서 의료 치료를 받도록 1915년9월 부터 안식년을 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인 교회가 그의 추가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정규적인 사역을 넘겨주려는 마음이 없음으로 인해서 3명의 한국인과 3명의 외국인으로 구성된 선교위원회는 5개월 혹은 필요에 따라 그 이상 안식년을 취하도록 하고, 한국인 교회가 그의 부재기간의 사역을 지원하기로 하였으며, 선교사들이 그의 강압적인 안식년 기간의 추가 비용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기풍의 급여와 여행비는 선교사들이 자발적으로 헌금하여 충당하였으며 또한 이기풍은 필요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이기풍)가 마펫에게 돌질하였던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그는 마펫에게 비난과 돌을 들었던 그 시기의 열정과 마찬가지의 열정으로 이제는 기독교 사역자로서의 손을 들었다. 목포,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선교 사역에서 일단 손을 떼고 광주군 효천면 지한리(현 광주시 남구 방림동)에 있는 김윤수 장로의 집 옆에 집을 마련하여 치료와 휴식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 제주노회 설립>

 

이기풍 목사는 제주 선교사로 재차 부임한 후 1928년에 회갑을 맞이하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노년에 접어들어 옛날처럼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성내교회에서 처음부터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던 김재원 장로의 동생 김재선 목사가 1928년에 제주도 출신으로서 목사로 장립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렸다. 이미 제주도 출신으로 전북노회에서 1927년에 임직한 이도종 목사에 이은 경사였다. ​김재선은 1921년 6월 제8회 전남노회에서 신학 지원자로 허락을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고, 1928년에 전남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고 제주도 삼양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도종이8) 1922년 2월에 회집한 제9회 전남노회에서 신학 지원자로 허락을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하고, 1927년 6월에 전북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고 김제의 성말, 신풍, 월봉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김재선 목사는 1928년부터, 이도종 목사는 1930년부터 제주도 에서 사역하여, 이제 제주도가 나름대로 독립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이기풍, 최흥종 두 목사의 배려도 컸다. 즉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제주의 경제 상황이 어려워진 가운데 전라남도 여러 지방까지 정기, 임시노회에 참석하고 이어서 긴급한 서류 작성을 위하여 노회 사무실을 찾아야 하는 교통비와 번거로움 등을 감안하여 제주시찰이 전남노회로부터 독립하여 제주노회로 서게 하였다. 이러한 독립은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와 전남노회에서 두 목회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 이기풍 목사의 제주의 첫 교회>

제주 최초의 교회는 어느 교회인가? 이 논란의 시작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권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사기를 기술하기로 하고서 각 노회에 사기 집필위원을 선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전남노회는 1918년 7월 6일 제2회 노회에서 이렇게 결정하였다. 교회 사기 수집 위원 배유지, 변창연, 이기풍, 변약한을 선정하다.70)

이렇게 수집된 사료들을 중심으로 총회의 사기 집필위원들이 편찬하여 1928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를 발행하였다. 이 책은 사학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이 편찬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허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후대의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일단 그 기록을 중시하고 문제가 된 점이 있을 때에는 오늘날에 확 보된 추가적인 사료들과 교차 비교함으로써 수정된 견해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제주 교회 창립연대,  한국장로교회 《사기》, 하권, p.295.

 

맨 왼쪽의 창립연대는 각 교회의 성립 연대를 추정 그리고 제시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는 연대들을 비교할 수 있도록 병행하여 정리하였다. 지교회에서 기억 혹은 기록하는 교회의 출발점은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계산될 수 있다. 사역자의 파송 혹은 부임, 첫 결신자 및 세례 혹은 임직, 교회 예배 공간의 확보 혹은 건축 등 매우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다.​ 《사기》의 입장은 마지막의 교회 건물 혹은 예배 공간 확보라는 기준이 최우선으로 적용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교회 개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희망적인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교회의 으뜸 기능은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로서, 신자로서의 삶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당 지역의 공공 예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이후 정기적인 예배가 꾸준히 지속되었는지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하여서 창립 연대를 정한 것이다. 참여 인원이나 연령 층에 상관없이 그 예배가 면면히 이어져서 오늘에 이른다면 교회의 출발로 보려는 입장이다. 물론, 현행 교회법에 따른 교회의 창립과 설립의 기준과는 다른 의미에서,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교회를 이해하는 것이 적합다고 본다.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 일제시대(1935년 이후)

 

(1. 제주 금성교회, 1908년) 1908년 이기품 목사 시무

제주 금성교회  (출처-https://cafe.naver.com/MyCafeIntro.nhn?clubid=25420295)

 

(사기) 제주도 금성리교회가 성립하다. 독로회 설립 당시에 파송한 전도목사 이기풍과 매서인 등의 전도를 인하여 조봉호, 이도종, 김씨진실, 조운길, 양석봉, 이씨오효, 이씨자효, 김씨도전, 김씨유승, 좌징수, 이의종이 귀도하야 조봉호 가에서 회집 기도하다가 이덕년 가를 예배처소로 작정하니라.  

 (출처-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문서자료 - 제주CBS)

 

(추가) 북제주군 애월읍에 위치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금성교회는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오기 전인 조봉호 전도사가 평양에서 신학을 마치고 돌아와 전도한 양석종, 조운길, 이덕련, 이도종 등 8명이 예수를 믿어 양석봉의 집에서 첫예배를 드렸다. 조봉호 전도사는 부유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경신중학교에 유학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숭실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고향 귀덕리에서 쫓겨나 금성리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다 제주도에 입도한 이기풍 목사를 도와 동역하였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지역 선교사로 정식으로 파송 받아 순회예배를 드리던 첫번째 교회가 금성교회이다. 금성교회가 제주 기독교 복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조봉호는 38세에 독립자금 모금에 앞장서다 붙잡혀 모진 고문 속에서 1920년 4월 28일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 후 이도종 목사는 금성교회 이덕련 장로의 아들로 태어난 금성교회 초대 성도이며, 제주도 제1호 목사이자 제주도 제1호 순교자이기도 하다. 이도종 목사는 복음 전도 중 4.3 사건 때 아쉽게 피살 순교했다. 금성교회의 첫 번째 예배 처소는 양석봉의 집였으며, 두 번째 예배 처소는 조봉호씨 생가였고, 세 번째 예배 처소는 이덕련 씨의 집, 1923년 네 번째 예배 처소는 지금의 금성리 591번지에 초가집을 짓고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출처- 제주 금성교회 & 곽지 해수욕장 : 네이버 블로그)

금성교회 옛 예배당

 

금성교회의 첫 번째(1907년) 예배처소는 양석복의 집(금성리 534번지)였으며, 두 번째(1912년) 예배처소는 조봉호씨 생가(귀덕리 중동 1292번지)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4.3 사건 당시 순교한 제주 출신 첫 목사 이도종 목사가 어린 시절에 다니던 교회이기도 합니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시 성내교회에서 전도를 위하여 이곳으로 와 조봉호 등과 함께 예배를 드렀습니다. 세 번째(1915년) 예배처소는 이덕련 장로의 집(이도종 목사 부친 귀덕리 상동 690번지)였으며, 네 번째(1923년) 예배처소는 금성리 591번지에 초가집을 짓고 예배당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930년 초가집 지붕을 함석으로 개량하였으며, 1970년 그 자리에 벽돌로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현재의 예배당은 1990년(돌판에는 1970년) 지은 것입니다. 예배당 안마당에 있는 사택은 처음에는 목회자가 사용하였지만 나중에는 집 없는 주민을 위해 쓰였습니다.(돌판에서)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작성자 성경환목사

 

옛 금성교회 (1975년)  (출처- #43 용수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2. 제주 조천교회, 1909년) 1909년 이기품 목사 시무

제주 조천교회  (출처- [피켓전도] 제주도 사적지 탐방 : 네이버 블로그)

 

<조천읍 역사문화지, 2011,제주특별자치도>에 의하면 조천출신의 신자 천아나라는 분이 1908년 이기풍 목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전도에 힘쓰던 중, 1909년에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의 자택을 예배당으로 헌납하여 조천교회의 역사가 시작되게 한 인물이라고 한다. 자식을 못 낳는다고 두번이나 소박을 당하고, 온갖 궂은 일을 하며 고단하게 살아가던 중 57세때 이목사의 선교로 종교의 품에서 삶의 위안을 맞이했다고 한다. 천아나는 자신의 자택을 예배당으로 헌납하는데 이 집이 조천리교회의 시작이며, 조천을 떠나 성읍에 와서 다시 자신의 집을 또 헌납하는데 이 곳이 성읍교회의 기틀이다. 또한 법환교회의 개척에도 간여했다. 1921년에 조천으로 귀향하여 교회일을 보다가 1930년에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2441번지는 원래 천아나 소유의 자택이었으며 교회에 헌납하여 소유주가 목사인 이기풍으로 기록되어진 것이 확실해 보인다. 1909년에 조천리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이 처음의 조천리교회 자리일 것으로 추정해 본다. 지금의 양진사 바로 맞은편인데, 1914년 당시에는 양진사가 있는 땅이 바다(해안 암석지대)였었고, 이 대지가 바로 바다에 면해 있었다. (출처 이기풍과 천아나 ... 조천교회 역사가 시작되다 )

 

(추가)

천아나는 1852년,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당 훈장이었고, 그녀는 여자아이로는 드물게 한문 교육을 받았다. 기골이 장대했던 그녀는 '고랫돌을 혼자 들던 여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였을까. 그러나 두 번의 결혼 실패, 유교 도덕에 의한 소박(疏薄), 술 빚어 파는 생계, 그런 굴곡진 삶을 지나 결국 그녀는 하나님을 만났다. 1908년, 그녀의 나이 57세. 인생의 황혼 무렵에 복음을 만난 그녀는 곧 그 불길을 이웃에게로 옮겼다. 술을 끊고, 삯바느질하며, 제주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 그녀를 영적으로 이끈 이는 평양에서 파송된 여 전도인 이선광이었다. 1909년, 세례를 받은 천아나는 자신의 집을 예배당으로 내놓는다. 오늘날 조천리 2441번지, 계낭개라는 곳이 바로 그 자리다. 이기풍의 이름이 수기로 적힌 토지 문서가 아직도 전해지니, 그 헌신의 흔적이 얼마나 귀했는지를 말해준다. 천아나의 이름이 ‘아나(亞拿)’로 바뀐 데는 의미가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해 하나님께 서원하며 기도하던 구약의 ‘한나’, 그 간절함을 본 이기풍은 천아나에게 ‘아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이름엔 새로운 인생이 담겨 있었다. 이후 그녀는 정의현 성읍리로 옮겨 예배당을 세웠고, 법환리에서는 윤식명 목사와 협력하여 교회를 세우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 조천, 성읍, 법환. 이 세 지역에 남아 있는 그녀의 흔적은 한 여인의 인생이 곧 ‘복음의 길’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1921년, 그녀는 다시 조천교회로 돌아온다. 70세의 노인이었지만, 여전히 집사들과 함께 교회 직원회에 참석하며 사역을 감당했다. 그리고 1930년 9월 2일 오후 6시, 성읍의 예배당 협실에서 79세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평생 걸어온 길처럼, 그 마지막도 담담하고 묵직했다. 천아나는 제주 복음의 첫 열매요, 제주 여성 전도자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다. 그녀가 남긴 길은 단지 조천교회에서 시작된 하나의 지점이 아니라, 조천에서 성읍으로, 성읍에서 법환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지도다.

[출처] 고랫돌을 들던 여인, 천아나 - 조천교회의 첫 빛이 되다.|작성자 베이스캠프

제주 조천교회 100주년 기념 교육관     (출처- [피켓전도] 제주도 사적지 탐방 : 네이버 블로그)


제주도 조천리교회가 1909년 성립하다. 선시에 노회에서 파송한 전도사 이기풍의 전도로 천씨아나가 먼저 믿고 신자가 증가함으로 천씨는 자택을 예배당으로 기부하여 교회를 설립하니라. 

▲ 조천리 2441번지 이기풍소유 대지-지번좌측에 수기로 소유자 이기풍 글자가 선명하다
[출처] 제이누리 (https://www.jnuri.net)

 

옛 조천교회 (1975년)  (출처- #43 용수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3. 제주 성내교회, 1908년- 1910년)  1908년, 1926년 이기풍 목사 시무    제주성내교회( 1908-1910년), 성안교회(1941년),

제주동부교회(1942년)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제주 성내교회, 1908년 이기풍 목사와 김재원 장로, 홍순홍 장로, 김행권 등이 향교골에 성내교회를 세웠다

 

제주도 성내교회가 1910년 성립하다. 선시에 노회에서 파송한 목사 이기풍이 당지에 내하여 산지포에서 전도할새 경성에서 기류할 시에 수세한 김재원을 봉착하여 협력전도한 결과 홍순흥, 김행권 등이 귀주함으로 기도회를 시작하였고 일덕리 중인문 내에 초옥을 매수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전도인 김홍련, 이선광 등이 전도에 노력하니라. 그런데 사기에 보면 "1908년 제주도 성내교회에서도 남녀 소학교를 설립하여 자녀를 교육하니라." 부분이 나온다. 곧 성내교회가 예배당으로서 터를 잡기 전에 먼저 아동교육을 시작하였다고 판단된다. 3월 말 혹은 4월 초순에 이기풍 목사의 부인 윤함애가 가족과 함께 도착하면서, 교육선교 사역이 출발하였을 것이다. 단지, 그 교육의 주체를 “이기풍과 윤함애” 등 사역자들의 이름을 열거하기를 주저하여, 대신 성내교회라고 소급하여 표현하였을 뿐이다. 제주도 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제주도의 아동들을 모아 남녀반으로 나눈 후 남자반은 이기풍, 김재원, 홍순흥, 김행권, 김홍련 등이 맡아서 가르치고, 여자반은 윤함애가 맡아서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인용한 대로 1908년 교육 부분에서 위의 보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성내교회는 1917년에 장로를 임직하고 당회를 조직하면서 교회의 시초에 대하여 기록을 남겼다.

 <졔주성내서문내교회 당회서문>.

"일천구백팔년 2월부터 졔쥬교회가 시쟉되야 졈졈 흥왕호논 중에 젼라로회에서 졔쥬 셔문내교회당회를 죠직호라논 승인을 가지고 일천구백십칠년 4월 1일에 젼라로회 시챨원 윤식명 남대리 리긔풍 3시가 졔주셔문내 례뵈당에 새 쟝로쟝립예식을 거행호고……"

‘1908년에 제주교회가 시작되었다’는 표현은 제주지역 선교의 출발 시점을 1908년 으로 기록하는 이상의 뜻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 제주교회를 성내교회로 국한하여 읽는 것은 적절한 이해가 아니다. 성내교회는 분명히 구분하여 서문내교회로 적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이기풍 목사의 ‘교회 설립’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일이다. 독립적인 예배공간을 확보하고 예배를 자유롭게 드리고 회중이 모일 수 있을 때, 그는 교회가 성립했다고 표현한다.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새롭게 신자들이 생긴다 하더라도, 예배당 혹은 기도처소가 아직 마련되지 못했다면 이는 교회가 아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1908년 의 성내교회는 아직 교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김재원과 이호리공동체가 성내교회로 편입되고 교회활동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기풍은 그들의 자생적인 신앙공동체 성장을 자신의 사역의 성과로 보고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사기》는 교회사를 선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 제한점을 갖고 있다. 선교를 통해 교회가 확장되어 가는 역사와 더불어, 자발적으로 신앙에 입문하거나 교회의 주역으로 성장하는 사실을 아우르는 교회 사 서술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에서 종래의 모교회 중심의 선교자료나 교회사 서술은 적절하게 비판되어야 한다.​

1908.2.1. 성내교회 창립, 

1992년 창립 75주년 기념비에 이기풍 목사, 김재원 장로, 홍순홍 장로의 공로가 기록 되어 있다

성내교회에 세워진 이기풍 목사, 김재원 장로 공적비

성내교회에 세워진 이기풍 목사, 김재원 장로 공적비

 

(4. 제주 성안교회, 1941 성내교회(구 제주서부교회)에서 성안교회(구 제주동부교회)에서 분립)  

제주성내교회( 1908-1910년), 성안교회(1941년), 제주동부교회(1942년)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1908년, 1926년 이기풍 목사 시무

제주 성안교회, 2007년 건축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제주시 아라1동에 자리한 제주성안교회는 1908년 3월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 목사가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9월 조선 독노회에 '원입교인 9명, 회집교인 20명, 제주 토박이 김홍련이 전도인으로 자청하였다'라고 보고로 시작되었다.  제주도 최초의 교회로 세워진 서부교회(후에 성내교회와 성안교회로 나뉘었다)가 계속 발전하여 성안교회는 1984년 선교 100주년 기념과 교회창립 76주년을 기념하여 이기풍 목사 선교 기념비를 세웠고 2007년 새 성전을 건축하였다. 새 성전은 건축면척 1788.35㎡에 지상4층, 지하1층 규모로 1700석 규모의 본당과 500석 규모의 중예배실 그리고 10개실 정도의 소그룹실등으로 갖추어져 있다.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작성자 성경환목사

 

(교회연혁)

1908년 이기풍목사가 세명의 신자들과 함께 향교골에서 기도회 시작 (제주 최초의 교회시작)

ㅁ일도리 중인문 안에 초가 여섯간을 매입하여 교회당을 사용.

ㅁ구 출신청을 매입하여 성내교회당으로 사용.

ㅁ교회 설립계를 제출(제주성내교회)

ㅁ구 출신청 앞에 목조 52평의 예배당 기공.

ㅁ영흥 야학교 69년제 보통과 설립.

ㅁ관인 중앙유치원 개원(제주 최초의 유치원)

ㅁ교회 구내에 노회경영 성경학교 교사의 기숙사를 신축

ㅁ교회 부흥으로 제주동부교회를 설립하고 성내교회는 제주서부교회로 개칭.

ㅁ용담동 지역 교인을 분리하여 한라교회를 설립

ㅁ삼도 1동 905에 새예배당을 신축하고 입당(현 YMCA)

ㅁ광양지역 교인을 분리하여 광양교회(현 제광교회)를 설립

ㅁ교육관 57평 신축

ㅁ제주중부교회와 합동하기로 공동의회에서 결의

ㅁ교회명칭을 제주 최초교회의 명칭인 제주성내교회를 이어받아 제주성안교회라 칭하고 양 교회 교인 238명이 모여 합동예배를 드림

ㅁ6.25동란으로 피난 성도들이 제주서부교회당에 모여 예배드리기 시작

ㅁ삼도2동(현 전매청앞)에 제주피난민교회를 세움

ㅁ그 후 그 중의 일부가 제주영락교회를 창설(12.31)

ㅁ교회명칭을 제주읍 중부교회로 변경

ㅁ삼도1동의 한 주택을 매입하여 교회당으로 사용

ㅁ삼도 1동 184의 대지 397평 매입

ㅁ건평 75평의 교회당 신축

ㅁ제주서부교회와 합동하기로 공동의회에서 결의

ㅁ제주노회 제63회 정기노회에서 교회합동 승인

ㅁ삼도1동 606-1에 새 예배당 신축 입당

ㅁ제주성서신학원을 본 교회에서 개원(79.3에 제주기독센타로 이전),

유치원 재설립

ㅁ봉성리에 개척교회 첫 예배드림

ㅁ금악개척교회 창립예배

ㅁ교육관 증축 봉헌예배

ㅁ교회창립 75주년 기념으로 김경하 목사를 콜롬비아 선교사로 파송

(제주 첫 선교사)

ㅁ교육관 준공(지하 138평)

ㅁ아라동 100주년 기념 새성전 건축 (2007.11 입당)

제주 성안교회, 2007년 건축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제주 성안교회,역사자료실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옛 성안교회

옛 성안교회 이기풍 목사 선교 기념비 

 

이기풍 목사의 선교 초기 중심교회이자 제주 최초의 교회인 제주성안교회 뜰에는 이기풍 목사 선교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이 목사의 일대기가 자세히 기록된 선교기념비는 1984년 교회창립 76주년을 맞아 성도들이 직접 세운 것으로 제주선교역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최초 일곱 목사 중 한 명인 이기풍 목사는 13년 동안 제주선교에 헌신하며 제주성안교회를 비롯해 삼양 내도 금성 등 10여 개의 교회를 설립, 제주복음화의 초석을 닦았다. 하지만 일제가 강요한 신사 참배를 앞장서서 거부하다가 투옥되어 고문 끝에 77세의 일기로 순교했다.

 

옛 성안교회 (1975년)  (출처- #43 용수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5. 제주동부교회, 기장, 1942년> 1908년, 1927-31 이기풍 목사 시무 

  제주성내교회( 1908-1910년), 성안교회(1941년), 제주동부교회(1942년)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제주동부교회  (출처- 제주동부교회 ‘원로장로·원로권사 추대 및 시무권사 임직예배’ 개최 < 미션 < 기사본문 - 투데이N)

 

제주동부교회는 제주선교의 아버지인 이기풍 목사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상영하고, 한국신학대학 연규홍 교수의 ‘제주선교’강좌도 개최한다. 이날 행사 후 제주동부교회는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오는 4월에 세미나, 7월 말엔 찬양제를 마련한다. 또 제주동부교회는 2월 24일엔 제주 교회의 나머지 뿌리인 성안교회, 성내교회와 함께 연합예배를 드리고, 4월27일에 같은 교단(기독교장로회)인 성내교회와 다시 연합예배를 연다. 정광화 담임목사는 “제주선교 100주년을 계기로 우리의 영원한 목표인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제주사회에 대한 기여도도 높이겠다”며 “장기적으론 ‘세계기독교 평화포럼’ 창설 등을 통해 진정한 세계평화를 제시하는 길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제주선교 100년사를 보면 1908년 2월 이기풍 목사의 입도 후 성내교회가 탄생한 후 1910년 최초의 교회당이 설립됐다. 1924년엔 교회에 도내 최초의 중앙유치원이 설치됐다. 성내교회는 1949년 교통문제 등으로 제주동부교회와 서부교회로 분립됐고, 다시 서부교회는 1953년 예장·기장장로교분열사건 때 제주성내교회(기장)와 제주성안교회(예장)로 갈렸다.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news.com)

 

(교회연혁)

연 도 연 혁
1907 조선예수교장로회로부터 최초의 한국인 목사 7인 중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됨
1908. 2 이기풍 목사 제주도에 입항. 항교골 김행권 교인 집에서
김재원, 홍순흥씨의 식구와 기도회를 시작으로 "성내교회"
시초가 되다.
일도리 소재 초가집 두 채를 매입 예배당과 사택으로 사용. 초대목사로 이기풍 목사 부임
1910 삼도리 구 출신청사를 매입, 예배당으로 사용하며 “성내교회라 부르기 시작
1915~1917 최대진 목사가 제2대 목사로 부임
1917.4.5 김재원, 홍순흥씨가 장로로 임직되어 당회가 구성됨
당회장 윤식명 목사
1917~1922 김창국 목사가 제3대 목사로 부임
1921 구 출신청(구한말 훈련청) 앞에 목조건물 60평을 건립하여 성문교회로 교회명칭 변경
1922~1923 이창규 목사가 제4대 목사로 부임
1924~1926 김정복 목사가 제5대 목사로 부임
1924.4.13 제주도내 최초의 유치원으로 중앙유치원이 설립됨
•1927~1931 이기풍 목사가 제6대 목사로 부임
1930.11.14 전남노회에서 제주노회가 독립. 독노회로 조직됨
1933~1935 최희준 목사가 제7대 목사로 부임
1936~1943 정순모 목사가 제8대 목사로 부임
1941 교회가 부흥함에 따라 교회를 발전적으로 분립하기 위하여
동부지역에 또 하나의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낮에는 신축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고,
밤에는 구 건물에서 예배를 드림
1942.10 당회는 성내교회가 두 개의 교회로 분립하게 되니 당시
“성내교회”라는 이름을 개칭하기로 하고,
구 교회당과 그 교인을 “제주서부교회”로,
신축교회당과 그 교인을 “제주동부교회”로 개칭하여
사용하기로 결의함

 

 

(6. 제주 성읍교회, 1909년) 1909년 이기풍 목사 시무

제주 성읍교회  (출처-https://m.blog.naver.com/ablemay/220969246410)

 

성읍교회는 제주도에 이기풍 선교사가 세운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이다. 1907년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파송된 이후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타문화권 선교사 파송이 이루어진 것은 1913년에 이르러서였다. 이선광 전도사는 1908년 제주선교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선광 전도사는 평양노회 여전도회에서 파송을 받아 상당 기간 제주사역을 계속했다1908년 도내 첫 교회인 제주시 성내교회가 세워진 다음 해(1909) 성읍교회가 창설되었다.  450평 규모의 교회시설은 1970년에 개축된 것이다.(제주성읍민속마을 홈피, 미디어제주 110120 고희범 글1917 126일 제주도에 임정찬을 전도목사로 파송하였다. 임 목사는 1918 421일 성읍 지방에서 이미 세례 받은 교인 양경수를 중심으로 성읍리교회의 기초를 탄탄히 하였고 1918 76일 전남노회 제2회 회의에서 황해노회 전도구역으로 제주 동편 6개면을 허락받아 선교에 주력하였다.이 뿐만 아니라, 황해노회 부인전도회에서는 여전도사로 김경신을 파송하여 임정찬 목사를 도와 전도에 조력케 했으며 이 일로 더욱 힘을 얻은 임 목사는 1918 928일 성읍지역의 교회재건과 전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황해도 지역의 수해로 인해서 1922 915일 임정찬 목사는 황해노회로 복귀하였다(제주기독신문 080926)

성읍교회 종탑    (출처-https://m.blog.naver.com/ablemay/220969246410)

 

종탑은 1909년 교회 설립 때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제주 현무암을 거친다듬하여 정사각형 평면에 사각뿔대 모양으로 아랫단을 만들고 그 위에 정사각기둥 모양으로 윗단을 쌓았다. 각 단은 약 3m 높이이다. 그 위에 철골을 세워 십자가를 맨 위에 세우고 돌로 된 탑의 바로 위에 종을 달았다. (출처 : 제주환경일보(http://www.newsje.com)

 

옛 성읍교회 (1975년)  (출처- #43 용수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7. 제주 모슬포교회, 1910-12년)  1909년 이기풍 목사 시무

모슬포교회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제주지역 최초의 한국인 선교사로 평양 출신인 이기풍 목사는 조선 말기인 1908년 제주도에 들어와 복음의 씨앗을 처음으로 뿌렸습니다. 전도 활동에 나선 그는 1909년 9월 서귀포시 대정읍 교인(신창호)의 집을 ‘모슬포교회’로 정해 예배를 올렸습니다. 이로서 산남지역에 최초의 교회가 탄생하게 됐고, 교회의 1대 목사가 됐습니다. 그는 위협을 받거나 적대하는 눈초리 속에서도 선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10년 대정읍에선 주민과 천주교인들이 충돌하는 ‘이재수의 난’이 벌어지는 등 서양 신앙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주에 개신교의 뿌리를 내린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쟁을 벌이다 심한 고문을 받았고, 1942년 금오도 우학리교회에서 순교했습다. 2대 목사인 윤식명 목사는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다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1920년 조선의 광복을 염원하며 광선의숙(光鮮義塾)을 대정읍 하모리에 설립, 신교육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 했습니다.  이곳에서 공부한 가파도 출신의 고수선씨는 경성의전을 졸업해 제주 최초의 여의사가 됐고, 여성 계몽과 독립운동에 앞장 섰습니다. 그는 모슬포교회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로 꼽히고 있습니다. 해방 후 닥친 4·3의 광풍은 모슬포교회를 비롯해 도내 교회마다 순교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기풍 목사의 제자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제주 출신 1호 목사인 이도종 목사는 1948년 순회 예배를 가던 중 대정읍 무릉리 인향동 마을에서 무장대에 붙잡혔습니다. 그는 미국인에 의해 전해진 기독교의 목사로서 미국의 스파이, 양놈의 사상을 전하는 예수쟁이로 몰려 구덩이에 파묻혀 생매장을 당했습니다. 그의 순교비는 대정교회에 마련돼 있습니다.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작성자 성경환목사

모슬포교회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옛 모슬포제일교회 

 (출처- #43 용수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8, 제주 삼양교회, 1915년)  1915년 이기풍 목사 시무

제주 삼양교회   (출처- 삼양교회)

 

삼양교회의 시작은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양교회는 1915년에 이기풍 목사의 전도로 설립되어 교세를 확장해가다가 1948년 1월 3일 4·3사건의 여파로 예배당이 소실되면서 당시의 모든 기록이 없어지고 말았다. 1951년에 원래 자리를 신축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삼양2동 김건의씨(45)는 관련하여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예수를 믿으면 ‘반동(무장대에 협조 하니 않는 주민들)’이라고 불렸고, 우리 가족도 당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산사람(무장대)에 의해서 피해를 많이 봤다. 우리교회가 올해로 108년이 되었다. 예전에는 우리집 바로 옆에 교회가 있었는데, 산사람들이 와서 전부 우리집과 함께 교회를 불태웠다. 당시 교회 자리의 땅은 교회가 팔았다가 지금의 교회를 짓고 주차공간을 마련하려고 교회가 다시 매입했다. 교회 재산은 모두 불타버렸다. (출처- 삼양교회 옛터 - (사)제주다크투어)

(추가)

1948년 4·3사건의 불길은 이 교회의 예배당을 집어삼켰고, 그와 함께 귀중한 문서와 기록들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남겨진 몇 편의 교단 자료와 구전,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삼양의 신앙 역사를 더듬어야 한다. 이 길의 시작엔 오주병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복음을 접한 후 철저히 회개하고, 믿음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집을 예배당으로 내어주었고, 삼양교회가 공동체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바쳤다. 그 회개의 감동은 단지 한 개인의 변화로 끝나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성내교회, 금성교회, 수원교회 등지에서 자발적으로 헌금을 보내왔다. 삼양은 그렇게 섬김의 연결 속에서 믿음의 싹을 틔우게 되었다. 나는 조용한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여느 교회와 다르지 않은 예배당이지만, 이 자리에 뿌려졌던 기도와 눈물의 깊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특히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생각하게 만든 인물은 이도종 목사였다. 삼양교회는 그가 사역했던 교회다. 평양신학교 재학 중, 목회자 없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삼양교회의 상황을 듣고 그는 과감히 휴학을 결심한다. 약 2년 동안 삼양에서 전도와 목회에 전념하며, 성도들과 함께 삶을 나눈다. 이후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에 깃든 헌신과 사명의 뿌리는 바로 이 교회에서 시작된 셈이다. 지금도 교회 마당 한쪽에는 그를 기리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삼양교회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4·3의 비극을 모두 지나왔다. 4·3 당시 예배당은 전소되고, 한 교인이 집에서 공비에게 피살당하는 비극도 있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다. 제주노회는 재건을 위해 20만 원을 지원했고, 성도들은 다시 벽을 세우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일본에 이주한 교우들은 자신들의 피 같은 노동 수입을 삼양교회에 보내왔고, 그 헌신은 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귀한 힘이 되었다. [출처] 제주 기독교 순례길 답사기 9 - 삼양교회|작성자 베이스캠프

옛 삼양교회    (출처- 삼양교회)


<제주 삼양교회 교회 연혁>

1915년 10월 1일  이기풍 목사가 삼양리에 전도하였으며 그 후 삼양2리 신평석씨 댁에서 예배드리다.

1916년  오주병 교우 초가3간을 예배당으로 헌납

1918년  김창국 목사 부임/1922. 12 사임

1918년 10월  교회설립계를 제출

1921년 12월    오주병을 영수로 고원구, 신평석, 김병학을 서리집사로 세우다.

1922년  삼양2리 2208번지에 초가35평 예배당을 건축하다.

1924년  이도종 전도사 부임 / 1925 사임

1924년 4월  김정복 목사 부임(위임,동사목사) / 1926 사임

1924년 8월 6일  당회조직, 장로 장립 / 오주병

1926년 4월  김성원 목사 부임 / 1928 . 4 사임

1928년  김재선 목사 부임 / 1931 사임

1928년 1월  장로 장립 / 김근서

 

옛 삼양교회 (1975년)  (출처- #43 용수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9. 제주 한림교회, 1915년) 1915년 이기풍 목사 시무

한림교회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한림교회는 1915년 11월 이기풍 목사님이 수원리 양운룡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이듬해 김흥수가 자기 집 바깥채 초가 6칸을 바쳐 기도처로 정하면서 도내 9번째인 수원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수원리 예배 처소는 14년 동안 사용되다가 교인수가 많아지면서 한림 쪽으로 옮기게 되고 교회명도 한림교회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즈음에 일본군을 겨냥한 미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나 1947년 일본 신사터를 받아 이곳에 4번째 성전을 짓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한림교회 예배당은 1987년에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한림교회는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 후 유치원을 개설하여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을 돕는 일에 앞장 섰으며 1959년에는 여자 농민학교를 열어 농촌 계몽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1999년에는 사회복지법인 한림소망의 집을 열어 장애인 보호시설과 청소년 문화공간으로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출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이야기|작성자 성경환목사

첫 번째 예배당 터 (수원교회, 수원리 549번지 김흥수 씨 가옥)   (출처- 제주한림교회 )

1931년 한림교회 두 번째 예배당  (김영식 목사)   (출처- 제주한림교회 )  

1934년 세번째 예배당 (정순모 목사)   (출처- 제주한림교회 ) 

 

(교회연혁)   (출처- 제주한림교회 )

1915. 11. 2 이기풍 목사 와 전도인들의 순회 전도로 안평길, 김중현, 양운룡, 김흥수, 이순효, 하일청씨 6명이 수원리 양운룡씨 자택에서 집회 시작 

1916. 김흥수씨가 수원리 549번지 가옥(바깥채 초가 6간)을 예배처소로 헌납. 순회 전도자 윤식명 목사가 노창수씨를 영수로, 김흥수씨를 서리집사로 임명하고 수원교회로 발족 

1930. 1.    초대 담임목사로 김영식 목사 부임(1932. 6 사임) 

1930. 11. 2  수원리에서 한림리 1314번지(현 한림다리 동북쪽)로 이전하고, 한림교회로 명칭변경 

1931. 2. 28  두 번째 예배당 기공(한림리 1314번지), 99㎡(30평) 

1931. 5. 24  예배당 헌당 및 초대 문명옥 장로 임직(1950. 9. 6 소천)  (참석목사 : 김영식, 조상학, 김재선, 이기풍) 

1931. 6. 1   제1회 당회개최(성경 : 히7:17, 신편찬송가 155장:“내 평생 소원 이것 뿐”) 

1932. 7      제2대 김재선 목사 부임(1933. 12 사임), 협재교회 분리

1934. 7      제3대 정순모 목사 부임(1936. 11 사임)

 

 옛 한림교회 (1975년) (출처- #43 용수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선교70주년 기념화보 (1975) - 사진자료 - 제주CBS)

 

 

<10. 광주제일교회, 옛 광주북문안교회, 1922년> 1916년- 1918년  이기풍 목사 시무

광주양림교회(기장, 1924), 양림교회(통합, 1953년), 양림교회(합동,1954년) 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광주제일교회 (옛 광주북문안교회)

 

1904년 12월 25일 광주 양림동 벨 선교사 주택에서 오웬 선교사 가족과 한국인들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광주선교부와 광주교회(현 광주제일교회)가 설립됐다. 전남 내륙지방 선교의 거점이었던 이 교회는 그 후 교인이 증가하자 북문안으로 이동하여 예배를 드렸다. 1909년 4월 오웬선교사는 장흥의 한 시골에서 선교활동 중 갑자기 고혈로 쓰러져 급거 광주에 도착하였으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양림동산에 안장됐다. 또한 벨 선교사 부인 마가렛트 선교사가 1919년 3월 26일 경기도 병점 건널목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양림동산에 안장했으며, 벨 선교사도 노환으로 1925년 9월 삶을 마감하고 양림동산에 안장됐다. 양림동산에는 22명의 선교사들이 영면하고 있다. 광주교회는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주동했던 관계로 북문안교회 자리를 일제에 내어주고 금동으로 이동하면서 금정교회라 불렀다. 계속 교인이 증가하자 1922년 북문밖교회(광주중앙교회)1924년 양림교회(기장)로 각각 분립했다. 광주 3․1운동은 재일 유학생 최원순, 정광호 등이 귀국하여 광주에서 최흥종, 김철 등을 만나 일본 동경 2․8독립운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광주에서 거사 준비에 임하였다. 이들은 금정교회 장로이며 숭일학교 학감인 남궁혁 가정에 모여 인원동원, 독립선언서, 태극기 등을 분담하여 준비한 후 3월 10일 금정교회 교인을 비롯해서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일반 시민 1천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이기풍 목사는 1916년 제2대 목사로 취임하고, 1919년 사임했으며 ,1921년 전남노회 제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글 출처-http://blog.naver.com/kjyoun24/60030255504)

 

(광주제일교회   연혁 (출처- http://www.first.or.kr/, 교회 홈페이지))

 

1904년 12월 25일 ;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배유지(Rev.Eugene Bell) 목사가 양림리 자택에서 오원(Dr.C.C.Owen)선교사, 김윤수 집사 등과 함게 광주교회를 시작하다.

1906년 가을 ; 북문 안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초대 당회장으로 배유지 목사가 취임하다(초기에는 광주교회라고 부르다가 후에  광주북문안교회로 부르다)

1912년 봄 ; 김윤수, 최흥종 두 분이 초대 장로로 장립을 받다.

1914년 9월 6일 ; 본교회 당회장 배유지 목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회총회장으로 선출되다.

1916년 8월25일 ; 이기풍 목사가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하다.

1919년 3월 10일 ; 본교회 교인들이 광주의 3.1독립운동을 주도아혀 많은 성도들이 옥고를 치르다. 그 결과로 국유지이던 교회 부지를 몰수당하다.

1919년 11월 ; 당시 남문 밖인 금정 101번지에 부지를 구입하여 북문안에 있던 예배당을 옮겨 짓다.(이 때부터 남문밖교회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공식 명칭은 금정교회였다.

1920년 9월4일 ; 제6회 전남노회에서 북문밖교회(현,광주중앙교회) 분립을 허락하다.(1917년부터 교인 일부가 기도처로 모였음)

1921년 6월 29일 ; 남궁혁 목사가 제3대 담임 목사로 취임하다.

1921년 9월 4일 ; 본교회 당회장 이기풍목사가 제10회 총회장으로 피선되다. (순천교회 시무 때,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피선)

1922년 4월 20일 ; 김창국 목사가 제4대 담임목사로 취임하다.

1922년 10월3일 ; 본 교회에서 부인조력회를 창립하다.(서서평 선교사 주도)

1924년 9월 30일 ; 최흥종 목사가 제5대 담임목사로 취임하다.

제14회 임시 전남노회에서 현 광주양림교회(기장)의 분립을 허락하다.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비 (1904년- 2004년)

광주제일교회 100년사  (1904년- 2004년)

 100년사, 제2대 담임목사 이기풍

 100년사, 배유지 목사, 오웬 선교사(1904년)

 100년사, 제2대 담임목사 이기풍(1916년)

이기풍 목사 취임과 사역 

최초의 한국인 7인 목사 (제2대 담임자 이기풍 목사, 아래 좌에서 2번째) 

광주제일교회 제일동산의 이기품 목사, 윤함애 사모 부부 묘

 

 

<11. 광주 양림교회, 기장, 1924년>

 

  광주 양림교회(1904년)는  광주제일교회(1922년),  기장 양림교회(1924년), 통합 양림교회(1953년),

    합동 양림교회(1954년) 4분립 되어있다.   4 교회 모두 제2대 담임자는 이기풍 목사(1916년- 1919년)이다.>

광주 양림교회 (기장 측, 1924년)

 

(교회연혁)

1904년 12월 21일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과 오웬 가족이 광주 선교부로 이사하다.

1904년 12월 25일 오전 11시 크리스마스 축하예배에 광주 시민 200여명이 참석하였고  방안에 40여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다.  이 날이 양림교회의 최초의 예배였다.  유진 벨 목사는 양림교회의 설립자이며 동시에 제1대 당회장이다. 

1905년 03월 예배참석 인원이 20명에서 200명 사이였고 4명이 세례 신청(특별반에서 공부)하다.

1905년 10월 스트레퍼 여선교사는 주일 오전 여자 성경공부반 가르쳤다. 

1905년 10월 주일 아침 예배에 250명 참석하였다.(평균 50명 출석) 35명이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표명하다.

1905년 11월 20일 놀란도 역시 광주의 양림리 교회 근처로 와서 벨 목사의 임시주택을 진료소로 개조하여 첫 진료를 시작하였는데     광주의 의료구원의 산실인 광주기독병원의 시작이 되었다.

1906년 가을 벨 목사 임시사택에서 드리던 예배에서 광주읍 북문안 사창터(억만고)에 북문안교회를 신축하다. 그러나 "북문안교    회"로 불리우게 된 시점은 1912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1928)"에는 "양림리교회"로 부르고있다.

1907년 01월 예배당을 확장하고 2월 신앙사경회 개최하였고(W. F. Swallen이 주 강사로 설교하다). 4월 성례식 개최하였다.     (세례교인 5명. 이 가운데 여자가 2명이다) 놀란 의사가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평안도 운산 금광회사 부속 병원으로 옮기고   10월 프레스톤 목사부부는 목포로 옮겨가고 11월 그라함(Ella I. Graham) 독신 여 선교사가  도착하였다

(여성과 아동 선교가  시작하다) 교인은 약 60명정도 

1908년 01월 집사 김윤수, 최흥종의 집사 임직식을 거행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해 3월 광주 남학교 시작되는데 평균 20명  출석하였고 양림리교회에서 남학교 심상과를 지원한다 의사 선교사 윌슨(Dr. Robert M. Wilson)이 부임하여  의료선교를 재개하고 주일학교를 재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주중에 교사반을 운영하였다.

1908년 09월 교인의 숫자가 125명이다

1908년 04월 광주 여학교 시작하였는데 평균 17명 출석하였으며 이것이 수피아 여학교이다. 세례교인 4명, 학습교인 18명에 대해 성례전을 실시하였으며 곽(우영) 전도사를 선출하여 인근에서 전도사역에 전념토록  지원하기로 하였고 양림리교회 교우가 곽 전도사의 급여를 담당하였다.

1916년  이기풍 목사가 제2대 당회장으로 부임하였다.

1919년4월  3.1운동으로 교회 터를 몰수 당한 후 오웬기념각에서 임시 예배를 드리다. 

1919년10월 녹스 목사가 오웬기념각에서 남문밖에 남문밖교회를 신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리다.

1921년6월  남궁혁 목사가 제4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다.

1924년9월  전남노회 결의로 남문밖교회를 양림교회(선교사와 대다수 교인이 양림리에 거주하였으므로 교회를 이전)와 금정교회 (남문밖교회, 황상호 장로와 잔류를 원하는 교인 중심)로 분립시켰다.

 (## 현재 논의가 되고있는 예민한 시점이다. 금정교회(남문밖교회)는 후에 남부교회(1948년), 광주제일교회(1952년)가 되었는데  광주제일교회는 자신들이 광주 최초의 교회이며 양림교회는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53년6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분열로 중립을 선언하다 김재준 목사 지지하는 사람들은 기존 교회에 남아 "한국기독교장로회 양림교회(현 기장 양림교회)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오웬기념각에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현 양림교회 통합측)가 분리 설립 되었다. 여기까지가 "양림 100년사"이고 이 후 각 교회별로 100년사를 이어 나가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 (합동 측)은 1954년에 분립 되었다.

 

<광주양림교회- 통합 측, 1953년>

광주 양립교회 (통합 측)

 

1916년  이기풍 목사가 제2대 당회장으로 부임하였다.

1919년4월  3.1운동으로 교회 터를 몰수 당한 후 오웬기념각에서 임시 예배를 드리다. 

1919년10월 녹스 목사가 오웬기념각에서 남문밖에 남문밖교회를 신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리다.

1921년6월  남궁혁 목사가 제4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다.

1924년9월  전남노회 결의로 남문밖교회를 양림교회(선교사와 대다수 교인이 양림리에 거주하였으므로 교회를 이전)와 금정교회 (남문밖교회, 황상호 장로와 잔류를 원하는 교인 중심)로 분립시켰다.

 (## 현재 논의가 되고있는 예민한 시점이다. 금정교회(남문밖교회)는 후에 남부교회(1948년), 광주제일교회(1952년)가 되었는데  광주제일교회는 자신들이 광주 최초의 교회이며 양림교회는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53년6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분열로 중립을 선언하다 김재준 목사 지지하는 사람들은 기존 교회에 남아 "한국기독교장로회 양림교회(현 기장 양림교회)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오웬기념각에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현 양림교회 통합측)가 분리 설립 되었다. 여기까지가 "양림 100년사"이고 이 후 각 교회별로 100년사를 이어 나가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 (합동 측)은 1954년에 분립 되었다.

 

<광주양림교회- 합동, 개혁 측, 1954년>

광주 양림교회 (합동, 개혁 측)

 

1916년  이기풍 목사가 제2대 당회장으로 부임하였다.

1919년4월  3.1운동으로 교회 터를 몰수 당한 후 오웬기념각에서 임시 예배를 드리다. 

1919년10월 녹스 목사가 오웬기념각에서 남문밖에 남문밖교회를 신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리다.

1921년6월  남궁혁 목사가 제4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다.

1924년9월  전남노회 결의로 남문밖교회를 양림교회(선교사와 대다수 교인이 양림리에 거주하였으므로 교회를 이전)와 금정교회 (남문밖교회, 황상호 장로와 잔류를 원하는 교인 중심)로 분립시켰다.

 (## 현재 논의가 되고있는 예민한 시점이다. 금정교회(남문밖교회)는 후에 남부교회(1948년), 광주제일교회(1952년)가 되었는데  광주제일교회는 자신들이 광주 최초의 교회이며 양림교회는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53년6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분열로 중립을 선언하다 김재준 목사 지지하는 사람들은 기존 교회에 남아 "한국기독교장로회 양림교회(현 기장 양림교회)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오웬기념각에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현 양림교회 통합측)가 분리 설립 되었다. 여기까지가 "양림 100년사"이고 이 후 각 교회별로 100년사를 이어 나가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합동 측)은 1954년 5월 4일에 분립 되었다.

교회 창립일은 1904년 12월 25일이다. (4 교회 모두 똑같다)

 

 

<12. 전남 순천중앙교회- 옛 순천읍교회> 1920년- 1924년  이기풍 목사 시무

순천중앙교회 (옛 순천읍교회)     (출처- 구 순천읍교회 : 네이버 블로그 )

순천중앙교회 (옛 순천읍교회)     (출처- 구 순천읍교회 : 네이버 블로그 )

1910년대 순천읍교회    (출처- 구 순천읍교회 : 네이버 블로그 )

935년 순천읍교회    (출처- 구 순천읍교회 : 네이버 블로그 )

 
 
 
교회연혁  (1907- 1924)
 
1907.4.15. 율촌의 교인 조일환(조의환 목사 백부), 이기홍, 박경주, 벌교의 조상학(송광출신)의 전도로 최정희 씨가 믿었고, 첫 교인으로 김억평(김덕은, 김창은의 조부), 최사중, 윤병열, 김창수 씨가 모여 금곡동 향교 뒤 샘부근 양사재를 빌려서 예배를 드림으로 순천지방의 첫 교회가 시작되다. (남자5명, 여자5명)
1907.4.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J. F. Preston) 변요한 목사가 당회장되어 교회를 돌보다.
1908.5. 일본군의 주둔으로 양사재를 빼앗기고 서문밖(현.영동)에 “ㄱ”자형 5칸 초가를 매입하고 유내춘 전도사(장로)가 예배인도하여 30여명 회집하다.
1910.3. 매곡동 144-2 에 “T”자형 교회 20평을 건축하여 이전하다.
1916.5. 초대 김영진장로 임직하다.
1917.7.22. 정태인 목사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다.
1919.2.10. 정태인 목사 시무 사임하다.

 

 

1920. 전라노회장에 이기풍 목사 선출되다.
1920.3. 이기풍 목사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다.
1920.3.10. 김억평, 오영식장로 임직하다.
1920. 대지 800평을 매수하여 “ㄱ”자형으로 교회당을 개축하다.
1920.10. 서울 안동교회에서 열린 제9회 총회에서 이기풍 목사 부총회장으로 피선되다.
1921.9.10.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제10회 총회에서 이기풍 목사 조선예수교장로회 10대 총회장으로 선출되다.
1924.1. 이기풍 목사 시무 사임하다.
1924.4. 곽우영 목사 제4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다.

 

순천중앙교회 역사 사진첩  (출처- 역사 사진첩 - 순천중앙교회)

 

 

<13. 제주 세화교회> 1924년 이기풍 목사 2개월 전도

 

 

<세화교회 연혁>  (출처- 세화교회)

1915.11.28. 한동 부상규 집사 집에서 예배드림

1924.09 부상규 집사 세화로 이사, 이기풍 목사 약 2개월 동안 전도

영수 : 부상규, 집사 : 최문환, 박강빈

1926.12 예배 처소로 18평 초가 신축

1927 이경필 목사 6개월 동안 시무

1928 정순모 목사가 당회장으로 시무하면서 본 예배 처소를 교회로 설립하고

부상규 영수를 장로 장립

1930 김윤풍 권사, 김상두 집사, 박유덕 집사, 주지찬 집사 시무, 교인 수는 30명가량 모임

1933 김재선 목사(노회 파송, 고향 : 제주) 시무, 정우태씨 집사 선택(이도종 목사 순교)

 

<14. 제주 김녕교회> 1925년 이기풍 목사 개척

김녕교회

 

김녕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이기풍목사가 김녕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100년 전에 세워졌으며 모진 핍박과 환난을 믿음으로 이겨냈고(이기풍 선교 기념관에 김녕교회를 소개함) 꾸준하게 부흥과 성장을 하고 있다. 소망요양원과 김녕 행복한 지역아동센터를 설립하여 지역을 섬기고 있고 제주도 일주동로 바로 옆에 17백여 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2012 11 18일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 하여 입당하였다.

 

(교회연혁)

1925 3 20일 김녕리에서 이미 이기풍 선교사의 전도로 복음을 받은 약간의 성도들이 남제주군 성읍리에서 믿기 시작하여 김녕리로 이주해 온. 강남서씨의 인도로 초가 일간을 준비하여 주일예배와 수요기도회 모임을 시작

1930년 강남서씨 한림면 두모리로 이사

1933년 초대 교역자 정순모 순회 목사 시무

 

<15. 고흥읍교회> 1925년6월- 1931.4 이기풍 목사 시무

고흥읍교회  (출처- 3.1운동의 중심이 된 고흥읍교회<일상의 공간들, 우리 마을이야기<지역N문화 테마)

 

고흥읍교회는 1901년 4월 25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된 선교사 오웬 목사 (한국명 오기원 선교사)가 당시 한약방을 경영하는 신우구씨를 비롯한 목치숙( 거의가 40~50대였던 고흥읍교회 최초의 입교자들 중에 목치숙은 유일하게 20세의 젊은이였다. 교회설립 이듬해에는 전남노회 순천지방회로부터 조사로 임명을 받아 고흥읍교회 초대 교역자가 되었고, 다시 4년 후에는 장로로 임직했다.), 박무응, 박용섭, 설준승, 이층흥씨 등이 전도를 받고, 소아 정수근, 김태수 등 몇몇의 소아들과 함께 신우구씨 한약방에서 예배드린 것이 시초가 되었다. 1906년 9월 고흥읍교회(당시는 옥하리교회)가 설립되었고, 1922년 8월 옥하리에 조선기와 12칸 규모의 예배당을 신축하고,  정규오 목사가 시무하던 1954년 4월 15일에 당시 일본신사 터에 세운 120평짜리 예배당이다. 그래서인지 1978∼88년에는 장년 450여명이 출석, 총 700여명의 교도 수를 자랑했다. 이 석조건물은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내부는 개조를 진행했다.

고흥읍교회의 설립과 발전

고흥읍교회는 박무응, 박용섭, 이정권, 제씨가 중심이 되어 건축이 되었다. 신우구씨는 마음먹고 전도인들의 식비와 여비를 자담하고 청하여 전도하게 하며 예배당 신축에 대하여 부족금을 담당하였고, 이상 설립자 4인이 예배당을 신건축하기로 결정하고, 신우구씨 10원, 박무응씨 10원, 박용섭씨는 재목대금 전부를 담당하고 이정권씨 5원과 기타 신자들 연보금으로 동정 예배당을 신건축 후 열심히 전도하여 지교 3, 4곳을 설립하였다. 이후, 1920년대 중반까지 13개면에 교회를 설립하고 신도수가 1,000여명이 되는 규모로 확장되었다.1924년에 작성된 『고흥읍교회사기후록』에 따르면 세례도인 19명, 금년 학습인 20명, 학습인도수 30명, 주일 평균 회집수 130명, 학생 100명 등이었다. 이러한 교세확장에는 목치숙과 오석주의 활동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들은 종교 활동 뿐 아니라 민중의 열망을 수렴하여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진력하였던 결과로 볼 수 있다.

3.1운동과 야학운동의 중심이 되다.

고흥읍교회의 교인들은 3.1운동과 1920년대 야학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2월 14일 군 참사였던 김용태가 발기하여 많은 군민들과 행정 관료가 참석한 가운데 고종황제 봉도식이 거행되었다. 김용태는 유력한 향리집안에서 태어나 군 참사를 비롯해 통신원 주사를 역임한 지방 관료였고, 아들이 기독교인 김상두 였다. 고종황제 봉도식이 열린 다음부터 천도교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3.1운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서는 기독교 중심의 3월 만세운동을 목치숙과 오석주의 『판결록』을 통해 고흥의 3월 만세운동에 대해 살펴보면 당시 고흥 기독교계는 교세를 확장에 힘쓰는 한편, 목회자의 양성에 힘을 쓰고 있던 중 목치숙과 오석주는 1919년 3월 3일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가기 위해 서울에 들렀는데 서울에서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 문제가 논의되고 있으니 우리 조선도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이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학을 포기하고 독립선언서 1장을 구해 고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목치숙은 4월 4일 남양면 이향숙의 집에서 손재곤, 최세진, 조병학, 이석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서 논의되는 식민지 문제와 민족자결주의를 소개하였다. 또한 서울과 지방으로 퍼져가는 만세시위에 대해 이야기하며 고흥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들은 또 14일 태극기 40개를 가지고 오자는 목치숙의 의견에도 동조하였다. 4월 7일 목치숙은 고흥군 남계리 이송오의 집에서 오석주와 만나 동지규합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일을 분담하여 목치숙은 국기 80개를 준비하고 고흥읍과 동강면 유둔지역 사람들을 동원하고, 오석주는 선언서 100장을 준비하여 금산면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을 맡기로 하였다. 목치숙은 기독교인 정환태, 신성휴, 박기욱을 만나 만세시위를 함께 하기로 설득하여 그들의 동의도 얻었다. 4월 8일 오석주가 자신의 집에서 한익수, 황보익, 황재연을 만나서 만세시위를 함께 하기로 설득한 후 10일 한익수에게 선언서를 주며 “조선독립고흥단”이란 이름으로 재작성할 것을 주문하였다. 오석주와 목치숙은 거사일을 4월 14일로 정하고, 장소는 고흥장터로 정했다. 하지만 당일인 14일에 비가 많이 내려서 시위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들은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고흥군수, 순천법원 지청장과 순천헌병분대 감독보조원에게 익명으로 우송하였고, 결국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져 목치숙, 오석주, 한익수는 치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목치숙과 오석주는 징역 6개월이 언도되고, 한익수는 형의 집행을 유예 받았다. 이들 외에도 9명의 피검자가 있다고 하나 이름을 알 수 없다. 특히 고흥읍교회의 중심인물로 성장한 목치숙은 목회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동강면의 전도를 맡아 1922년 3월 대강기독면려청년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하면서 종교 활동과 사회활동을 병행하는 전도방식을 택해 활동하였다. 오석주도 고흥 기독 청년 면려회 회장을 역임하며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민립대학설립운동에도 참여하면서 개인의 활동력을 높이는 전도방식으로 활동하였다. 오병주는 훗날 목사가 되어 고흥읍교회 제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출처- 3.1운동의 중심이 된 고흥읍교회<일상의 공간들, 우리 마을이야기<지역N문화 테마)  

고흥읍교회  (출처- 고흥읍교회[미지정] : 네이버 블로그 )

 

고흥읍교회의 신앙전통은 이후에도 한국교회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이자 총회장을 지낸 이기풍 목사 (1925년-1930년 시무)가 자신의 첫 사역지 제주도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사역한 곳이 바로 고흥읍교회였고, 소록도의 성자로 불리는 김정복 목사가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투옥의 수난을 당한 것도 고흥읍교회를 담임하던 시절이었다. 훗날 순교의 길까지 걸어간 이 두 사람의 담임목사의 행적은 물론이고, 이들의 앞뒤에서 강단을 지킨 정태일 서재화 정규오 목사 등의 존재도 고흥읍교회 역사에 커다란 긍지로 남아있다. 물론 그 사이에 신학적 문제, 교단 총회의 분열의 여파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분립의 아픔을 겪으며 고흥읍교회에도 적지 않은 상흔들이 남았다. 그렇지만 고흥읍교회는 여전히 고흥복음화를 위해 정진하며, 약한 교회들에까지 힘을 보태는 어머니 교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고흥 최초로 설립한 유치원을 통해서도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예배당 지붕 오른쪽 끝에는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장식 하나가 있다. 비둘기, 바로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존재가 돌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성령의 감화를 통해 시작된 공동체, 그분의 인도와 조명을 받아 지탱되어온 고흥읍교회의 역사는 앞으로도 그렇게 또 흘러갈 것이다.
(노래 자전거) 목일신의 아버지는 고흥읍교회 최초의 장로이자 담임교역자였던 목치숙 목사였다. 신실한 목회자이자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였던 목치숙 목사는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동시를 지을 것을 장남 목일신에게 권했고 효심 깊은 아들은 그 분부를 잘 받들었다. 수백편의 주옥같은 시와 산문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훗날 목일신은 전주 신흥학교에 진학 후 일제에 맞서는 격문을 집필하며 학생운동에 앞장서다 퇴학을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에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목일신에게 ‘자전거’는 아버지 목치숙 목사에 대한 존경과 애틋함을 담은 특별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고흥읍교회  (출처- 고흥읍교회[미지정] : 네이버 블로그 )

 

순교자 이기풍(1868∼1942). 고흥읍교회 당회록은 그가 1925년 6월 부임했다고 밝혔다. '재임 기간 고흥 지역에 여러 교회를 세워 활동하시다 5년10개월 만에 총회 전도부 파송에 따라 제주도 선교사로 가시다'라고 했다. 이기풍은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체포됐고 이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별세했다. 이기풍의 절개와 양심을 김정복 목사가 이어받은 셈이다.

한국기독교 사적지 지정 기념예배.(고흥군 제공)/뉴스1 ⓒ News1

(출처- 고흥읍교회·소록도 5개 교회, 한국기독교 사적지로 선정 - 뉴스1)

 

2019.2.19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역사위원회는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최근 고흥읍교회와 소록도에 있는 5개 교회를 한국기독교 역사 사적지 11호와 12호로 지정했다. 사적지 지정을 기념해 고흥읍교회와 소록도 중앙교회에서는 18일 각각 감사예배와 제막식도 개최됐다. 이날 제막식에 참석한 송귀근 고흥군수는 축사를 통해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며 "이 영욕의 세월을 기억하고 영구히 보존해 후세들에게 고흥의 역사적 가치를 위대한 유산으로 물려주자"고 말했다.

고흥읍교회는 1905년 미국 남장로교의 의료선교사인 오원(C C Owen)의 전도로 시작, 100년이 넘은 역사를 지닌 고흥군 최초의 교회이자 고흥군 교회의 모태다. 고흥읍 교회와 3·1만세운동은 고흥읍교회 최초의 장로이자 사역자였던 목치숙 목사와 관련이 있다. 그는 동요 '자전거'를 작사한 목일신 선생의 부친이기도 하다.

 

<16. 고흥 길두교회> 1925년 이기풍 목사 시무

길두교회  (출처- 고성중고등총동문회 | 고흥포두.길두교회 이성재 목사님 교회를 떠나시다 - Daum 카페)

길두교회  (출처-  우리들의 즐거운 농사이야기 | 우리동네 소식/나의 추억 길두교회 - Daum 카페

길두교회  (출처- 최철식 | 길두교회 전경 - Daum 카페 )

교회내부    (출처- 고흥길두교회 )

 

(교회연혁)

1915년 2월 15일

고흥읍 교회에 출석하던 성도(전 영집 유천석 신명휴 박기욱 등)들이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전동 마을 전영집씨 초가 두 칸 중창 방에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감격의 첫 예배를 드림으로 길두 교회가 시작되다.

1916년

교인들의 열성적인 전도로 인해 고제태 우창기 선기섭 씨 등 다수가 예수를 영접하여 교회에 출석하자 구례인 선교사와 고흥읍 교회가 협력하여 유천석 씨를 초대 교역자로 파송하다.

1917년

교인 수의 증가로 보다 넓은 예배당의 필요성을 느껴 교인들의 정성어린 연보와 고흥읍 교회 이엽진 여사의 후원금으로 5칸 초가집을 매입하다.

1918년 5칸 짜리 초가 예배당을 4 칸 증축하여 목조 초가 9 칸 예배당이 되다.

1919년 이은영 전도사 본 교회 담임 교역자로 부임하다.

1925년  이기풍 목사 본 교회 당회장직을 맡다.

1929년  김정복 목사 본 교회 당회장을 맡다

 

<17. 전남 벌교대광교회 - 옛 벌교교회, 회정리교회> 1934년 이기풍 목사 시무

벌교대광교회

 

벌교대광교회(조경묵 목사)는 교회의 현재 이름이다. 처음 이름은 광주에 여행 갔던 김일현이 복음을 듣고 결신해 김재조 정태인 등과 함께 1905년 벌교읍 장좌리에 설립한 무만리교회. 그러니 교회의 역사는 무려 1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무만리교회에서1920년 벌교리교회가 분립하고, 설립자였던 정태인 목사가 초대 담임목사가 되어 열띤 전도로 교회의 기틀을 다졌다. 이후 김정복 김상두 이기풍(1934년) 김형모 방화일 고재덕 목사 등 한국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이 교회 강단을 거쳐갔다. 한국장로교회 최초의 선교사이자 훗날 순교자로 생을 마감한 이기풍 목사가 담임하던 시절, 회정리 672번지에 건축한 60평 석조예배당이 바로 회정리교회이다.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있는 이 예배당은 홍교, 소화다리, 현부자네 집 등과 함께 문학기행 차 벌교를 찾는 관광객들의 방문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해방 이후 WCC 논쟁이 한창이던 시절 51인 신앙동지회를 이끌던 정규오 목사의 활동 거점 중 하나였다. 현재의 예배당은 1985년 벌교시장 옆에 건축한 후 최근에 리모델링으로 새롭게 변신했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추가)   대광교회는 벌교읍교회로 출발했다. 同 교회는 1906년에 설립된 후 전라노회에 속했다가 1922년 제11회 총회에서 전남노회와 순천노회로 분립된 후부터 순천노회에 속해 왔다. 당시 총회는 순천노회의 관할 지역을 구례 곡성 순천 광양 보성 지역으로 정했고, 그 중에서 벌교읍교회는 순천노회의 중심교회로 성장했다. 1930년대(1934년 이기풍 목사 시무)에는 한국교회 최초7인 목사 중의 한 분이며,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이기풍 목사가 시무할 정도로 벌교읍교회는 순천노회 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 선교사로 활동한 후 벌교읍교회로 부임하여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는 벌교읍교회당(아래 사진), 속칭 돌교회당을 건축했다. 그후 이기풍 목사는 벌교읍교회를 거쳐 금호도 우학리에서 마지막 목회를 마쳤다. 은퇴 후에는 1940년 제29회 총회에서 총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출처] 벌교대광교회,110주년 기념예배 및 임직식으로 도약 다짐|작성자 정론직필

 

(교회연혁)    (출처- 벌교 대광교회 | 벌교대광교회 연혁 - Daum 카페)

1913년 구레인 선교사님이 파송되어 정태인 황보익 전도사가 홍교동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제1대 담임목사  구레인 선교사

제2대 담임목사  황보익 목사

제3대 담임목사  김정복 목사

제4대 담임목사  이기풍 목사 (1934년)

제5대 담임목사  김상두 목사

제6대 담임목사  김형모 목사 (1935년) 회정리교회 (60평 석조건물)

<1939년에 건립된 벌교읍교회 전경, 벌교읍교회는 벌교대광교회로 개명했다>

[출처] 벌교대광교회,110주년 기념예배 및 임직식으로 도약 다짐|작성자 정론직필

교회 내부  (출처- 110년 역사 위 새로운 도전 시작 < 목회현장 < 목회 < 기사본문 - 주간기독신문)

벌교대광교회  (출처- 벌교대광교회 최원철목사님 찬양간증집회 찬양사역.. : 네이버블로그)

1935년 건축 회정리교회 

(출처- 전남 보성 벌교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소화의 집 / 현부자네 집 / 회정리교회> : 네이버 블로그 )

 

1935년 건축 회정리교회, 현재 대광 어린이집  (출처- 보성 벌교 태백산맥6-회정리교회 : 네이버 카페)

 

 

<18. 이기풍 목사의 순교 교회, 금오도 우학리 교회>  1938년- 1942년 6월20일 이기풍 목사 시무

▲ 우학리교회와 이기풍 목사 순교기념관(오른쪽). (사진=디지털여수문화대전)[출처] 평양 순영리 출신이기풍 목사(1868~1942), 한국인 최초의 목사이자 제주도 최초의 한국인 선교사, 여수 이기풍 목사 순교기념관 매각 추진|작성자 이동현 이북도민작가

우학리 교회   (출처- [여수 세계 섬박람회]여수 금오도 목욕탕 탐방.. : 네이버블로그)

 

이기풍목사는 또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로서 제주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나 그가 우학리교회라고 하는 남해안 작은 섬마을 교회에서 목회했으며, 이곳에서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순교를 당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남도 여천군 남면 우학리 233번지. 여수항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1시간 여 들어가면 그림처럼 다가오는 섬, 금오도(金鰲島). 교통이 발달된 지금도 서울서 열차로 꼬박 6시간이 걸렸고다시 하루 네차례밖에 다니지 않는 배를 1시간이나 타야만 닿을 수 있는 땅이다. 일제의 수탈이 기승을 부리던 1908년. 그해 4월 우학리의 몇몇 사람들은 당시 제당(祭堂)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예배당을 지었고 1925년에는 길선주목사를 모시고 사경회를 개최했으며, 유치원도 운영하는 등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1908년 서울이나 「뭍」의 어느 도시가 아니고 뱃길 먼 작은 섬에 교회가 세워지고 날로 부흥했다고 하는 사실은 새삼 놀라운 사실이 아닐수 없다. 주민 4백여 명에 지나지 않지만 9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우학리교회(이해석목사)에는 지금도 매주일이면 1백30명이 넘는 교인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 주일학교 학생까지 합하면 교인은 2백여 명에 이른다.마을 주민의 50퍼센트가 이 교회 교인인 셈이다.  이 교회에는 공개되지 않은 몇가지 자료들이 있다. 931년부터 기록된 당회록과 이기풍목사가 시무할 당시 사용했던 「양은」으로 만들어진성찬기들이 그것이다. 당시 순천노회 변요한목사가 소장하고 있다가 교회에 모내온 떡그릇과포도주잔, 잔받침 등 빛바랜 모습들이 세월이 흐름을 소리없이 말하고있다. 당시 당회록에는 이기풍목사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여러군데 있는데, 이 당회록을 통해 이기풍목사에 대해 이제까지잘못 알려진 부분도 드러나 교회사가들의 관심도 끌 것으로 예상된다. 이기풍목사는 칠순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1934년 (1938년?)아무도 가기를 싫어했던 이 곳 섬마을로 들어와 복음을 전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맞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였던 이기풍목사는 과로와 고문으 1942년 6월 20일 별세했다. 이기풍목사의 시신은 그가 마지막으로 시무했던 우학리교회가 내려다 보이는 마을 공동묘지에 안장됐으나, 1953년5월 9일 광주기독묘지에 이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문사 刊 기독교대백과사전)그러나 이 교회 당회록은 1955년 4월24일 주일에 이기풍목사를 이장하기로 결의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당회록에는 이기풍목사의 부임에서 취임, 세례집전 등 자세한 목회 활동상황들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우학리교회가 작성한 연혁은 이렇게 적고 있다. 『193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며 대한민국 초대 목사인 이기풍목사 시무(당시70세).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수차례에 걸쳐 여수경찰서에서 심문을 당하시고 유치장에 수감되었다가 병고로 일시 출감. 1942년 6월 20일 75세로 우학리에서 소천. 1955년 4월 24일 이장.』 당시 묘지를 이장하는 일을 직접 담당했던 오모집사는 『당시 아내가임신중이었으며, 그 때 낳은 아들이 만으로 마흔두 살이어서 그 때 일은 잊을 수가 없다』고 증언했다. 당회록을 소장하고 있는 명충길장로(남면 부면장)는 『당시 노회에서우학리교회는 그 역사가 오랜만큼 당회록의 보관도 중요하니 책임있게 보관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며 당회록을 소중하게 보관해온 지난날을 회고했다. 한편, 우학리교회에서 44년동안 장로로 시무했던 김정우장로는 이기풍목사의 알려지지 않은 또 한 장의 사진을 공개해주었다. 순천시 낙안교회에서 있었던 결혼식에서 이기풍목사가 주례를 한 것으로 짐작되는이 사진ㅇㅇ서 이기풍목사는 깊게 패인 눈으로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지금의 우학리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측에 속해 있다. 한국교회분열사는 작은 섬마을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장로교회가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분열되면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 교회는 합동측을 택했으며, 이후 합동보수로 다시 개혁측으로 교단 소속을 달리했다. 1925년 중국인들이 벽돌을 구워 지었다는 교회당, 이기풍목사와 그 교인들이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온몸으로 거부했던 당시의 교회는 교인들이 불어나면서 이들을 수용하지 못해 헐고 1976년 지금의 건물로 새로 지었다. 

이기풍 목사 순교기념관 (2005년3월29일)    (출처- 한국인 최초 목사 7인 중 한 분인 이기풍 목사 - 오마이뉴스 )

 

<1914- 1945년 일제강점기 총회순교자기년선교회 순교자 명부>

(출처-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

이기풍 목사 순교기념관 (2005년3월29일)    (출처- [여수 세계 섬박람회]여수 금오도 목욕탕 탐방.. : 네이버블로그)

이기풍 목사 순교기념관 (2005년3월29일)   (출처- [여수 세계 섬박람회]여수 금오도 목욕탕 탐방.. : 네이버블로그)

우학리 교회   (출처- [여수 세계 섬박람회]여수 금오도 목욕탕 탐방.. : 네이버블로그)

우학리 교회   (출처- [여수 세계 섬박람회]여수 금오도 목욕탕 탐방.. : 네이버블로그)

우학리 교회   (출처- [여수 세계 섬박람회]여수 금오도 목욕탕 탐방.. : 네이버블로그)

이기풍 목사 기거 당시 우학리 교회

신사참배하러 가는 사람들을 가로 막는 이기풍목사 ⓒ 오문수

 (출처- 한국인 최초 목사 7인 중 한 분인 이기풍 목사 - 오마이뉴스 )

 

 

<19. 이기풍 목사 묘지, 광주제일교회 제일동산 묘지>

 

광주제일교회 제일동산

 

이기풍 목사 묘지는 현 광주제일교회 제일동산(전남 화순군 동면 천궁리 산 15-1)에 있다. 전라도 지역의 최초의 교회인 광주제일교회 (이기풍 목사 부임 당시 광주 북문안교회) 에 이기풍 목사는 1916년 8월25일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제일동산에는 이기풍 목사 내외의 묘와 부인 윤함애 사모의 묘, 광주제일교회 한완석 목사의 묘가 있다.

이기풍 목사 (1868-1942) , 윤함애 사모 묘

이기풍 목사 묘

이기풍 목사 묘

윤함애 사모 묘

이기풍 목사 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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