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정 복 ( 金 正 福 , 1882 ~ 1950 )
김정복은 1882년 7월 24일 충남 서천군에서 아버지 김성오(金性五)와 어머니 이경숙(李敬淑)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899년 봄에 대한제국 전주부 진위대 입대하고 곡호대(曲號隊) 곡호수로 근무하였다. 1905년 7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이주하여 마우리섬 하나(Hana)농장에서 일하였다. 1907년 부활절 세례를 받고 1908년 12월에 귀국하여 종지리교회에 출석하며 집사가 되었다. 1909년 3월 한영(韓英)서원에서 수학하고 1914년 5월 13일 홍영(洪榮)과 결혼한 후 1915년 3월 평샹신학교 입학(전라노회 추천)했다. 1916년 10월 10일 전라노회 제7회 노회에서 신학을 계속 허락받아, 그 후 휴학과 복학이 이어진 1923. 12. 19 평양신학교 제17회 졸업(졸업생 35명)하였다. 1924년 1월 22일 전북노회 제14회 노회(전주 서문밖교회에서 회집)에서 강도사 인허 후 전남노회로 이명 받았으며 1924년 2월 20일 전남노회(노회장 최홍종목사, 광주 금정교회에서 회집)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4년 2월 제주 성내교회와 삼양교회 목사로 시무하다 1926년 11월 2일 순천노회로 이명하고 벌교지방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27년 2월 8일 순천노회 부서기로 피선(제11회 노회)되었고 1928년 10월 12일부터 고흥읍교회와 고흥 길두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30년 6월 2일 순천노회장으로 피선(13회 노회)되었다. 1930년 7월 18일 순천노회 제13회 1차 임시회에서 고흥읍교회 시무사면을 청원하였으나 신영욱장로의 간곡한 권유로 유임되었다. 1937년 3월 3일 길두교회에서 사임했다. 1938년 4월 25일 순천노회 제22회 노회(구례읍교회)에서 신사참배 결의했다. 1940년 9월 20일 고흥경찰서에 구속 후 석방되었다. 1940년 11월 15일 고흥경찰서에 다시 구속되어 순천경찰서를 거쳐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1년 징역 언도되었다. 1944년 5월 공주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1946년 4월 소록도교회 재건하고 1946년 5월 1일부터 10일까지 손양원목사의 인도로 부흥회를 개최했다. 1946년 6월 12일 당회장으로 취임되었다.(설교 손양원목사, 장로 8명 장립) 1947년 4월 26일 김정복목사의 위임 및 장로, 안수집사 장립예배를 가졌다. 1947년 3월 4일 소록도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순천노회에 가입했다. 1950년 8월 5일 인민군 40여명 소록도로 진입하였고 1950년 9월 30일 고흥읍 뒷산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북한군에 총살로 순교하였다. (출처-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
<1. 제주 성내교회) 1924- 1926년 김정섭 목사 시무

제주 성내교회
제주도 성내교회가 1910년 성립하다. 선시에 노회에서 파송한 목사 이기풍이 당지에 내하여 산지포에서 전도할새 경성에서 기류할 시에 수세한 김재원을 봉착하여 협력전도한 결과 홍순흥, 김행권 등이 귀주함으로 기도회를 시작하였고 일덕리 중인문 내에 초옥을 매수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전도인 김홍련, 이선광 등이 전도에 노력하니라. 그런데 사기에 보면 "1908년 제주도 성내교회에서도 남녀 소학교를 설립하여 자녀를 교육하니라." 부분이 나온다. 곧 성내교회가 예배당으로서 터를 잡기 전에 먼저 아동교육을 시작하였다고 판단된다. 3월 말 혹은 4월 초순에 이기풍 목사의 부인 윤함애가 가족과 함께 도착하면서, 교육선교 사역이 출발하였을 것이다. 단지, 그 교육의 주체를 “이기풍과 윤함애” 등 사역자들의 이름을 열거하기를 주저하여, 대신 성내교회라고 소급하여 표현하였을 뿐이다. 제주도 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제주도의 아동들을 모아 남녀반으로 나눈 후 남자반은 이기풍, 김재원, 홍순흥, 김행권, 김홍련 등이 맡아서 가르치고, 여자반은 윤함애가 맡아서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인용한 대로 1908년 교육 부분에서 위의 보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성내교회는 1917년에 장로를 임직하고 당회를 조직하면서 교회의 시초에 대하여 기록을 남겼다.
(교회연혁)
| 연 도 | 연 혁 |
| •1907 | 조선예수교장로회로부터 최초의 한국인 목사 7인 중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됨 |
| •1908. 2 | 이기풍 목사 제주도에 입항. 항교골 김행권 교인 집에서 김재원, 홍순흥씨의 식구와 기도회를 시작으로 "성내교회"의 시초가 되다. 일도리 소재 초가집 두 채를 매입 예배당과 사택으로 사용. 초대목사로 이기풍 목사 부임 |
| •1910 | 삼도리 구 출신청사를 매입, 예배당으로 사용하며 “성내교회”라 부르기 시작 |
| •1915~1917 | 최대진 목사가 제2대 목사로 부임 |
| •1917.4.5 | 김재원, 홍순흥씨가 장로로 임직되어 당회가 구성됨 당회장 윤식명 목사 |
| •1917~1922 | 김창국 목사가 제3대 목사로 부임 |
| •1921 | 구 출신청(구한말 훈련청) 앞에 목조건물 60평을 건립하여 성문교회로 교회명칭 변경 |
| •1922~1923 | 이창규 목사가 제4대 목사로 부임 |
| •1924~1926 | 김정복 목사가 제5대 목사로 부임 |
| •1924.4.13 | 제주도내 최초의 유치원으로 ‘중앙유치원’이 설립됨 |
| •1927~1931 | 이기풍 목사가 제6대 목사로 부임 |
| •1930.11.14 | 전남노회에서 제주노회가 독립. 독노회로 조직됨 |
| •1933~1935 | 최희준 목사가 제7대 목사로 부임 |
| •1936~1943 | 정순모 목사가 제8대 목사로 부임 |
| •1941 | 교회가 부흥함에 따라 교회를 발전적으로 분립하기 위하여 동부지역에 또 하나의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낮에는 신축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고, 밤에는 구 건물에서 예배를 드림 |
| •1942.10 | 당회는 성내교회가 두 개의 교회로 분립하게 되니 당시 “성내교회”라는 이름을 개칭하기로 하고, 구 교회당과 그 교인을 “제주서부교회”로, 신축교회당과 그 교인을 “제주동부교회”로 개칭하여 사용하기로 결의함 |
<2. 제주 삼양교회> 1924- 1926년 김정섭 목사 시무

제주 삼양교회 (출처- 삼양교회)
삼양교회의 시작은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양교회는 1915년에 이기풍 목사의 전도로 설립되어 교세를 확장해가다가 1948년 1월 3일 4·3사건의 여파로 예배당이 소실되면서 당시의 모든 기록이 없어지고 말았다. 1951년에 원래 자리를 신축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삼양2동 김건의씨(45)는 관련하여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예수를 믿으면 ‘반동(무장대에 협조 하니 않는 주민들)’이라고 불렸고, 우리 가족도 당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산사람(무장대)에 의해서 피해를 많이 봤다. 우리교회가 올해로 108년이 되었다. 예전에는 우리집 바로 옆에 교회가 있었는데, 산사람들이 와서 전부 우리집과 함께 교회를 불태웠다. 당시 교회 자리의 땅은 교회가 팔았다가 지금의 교회를 짓고 주차공간을 마련하려고 교회가 다시 매입했다. 교회 재산은 모두 불타버렸다. (출처- 삼양교회 옛터 - (사)제주다크투어)
(추가)
1948년 4·3사건의 불길은 이 교회의 예배당을 집어삼켰고, 그와 함께 귀중한 문서와 기록들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남겨진 몇 편의 교단 자료와 구전,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삼양의 신앙 역사를 더듬어야 한다. 이 길의 시작엔 오주병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복음을 접한 후 철저히 회개하고, 믿음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집을 예배당으로 내어주었고, 삼양교회가 공동체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바쳤다. 그 회개의 감동은 단지 한 개인의 변화로 끝나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성내교회, 금성교회, 수원교회 등지에서 자발적으로 헌금을 보내왔다. 삼양은 그렇게 섬김의 연결 속에서 믿음의 싹을 틔우게 되었다. 나는 조용한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여느 교회와 다르지 않은 예배당이지만, 이 자리에 뿌려졌던 기도와 눈물의 깊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특히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생각하게 만든 인물은 이도종 목사였다. 삼양교회는 그가 사역했던 교회다. 평양신학교 재학 중, 목회자 없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삼양교회의 상황을 듣고 그는 과감히 휴학을 결심한다. 약 2년 동안 삼양에서 전도와 목회에 전념하며, 성도들과 함께 삶을 나눈다. 이후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에 깃든 헌신과 사명의 뿌리는 바로 이 교회에서 시작된 셈이다. 지금도 교회 마당 한쪽에는 그를 기리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삼양교회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4·3의 비극을 모두 지나왔다. 4·3 당시 예배당은 전소되고, 한 교인이 집에서 공비에게 피살당하는 비극도 있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다. 제주노회는 재건을 위해 20만 원을 지원했고, 성도들은 다시 벽을 세우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일본에 이주한 교우들은 자신들의 피 같은 노동 수입을 삼양교회에 보내왔고, 그 헌신은 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귀한 힘이 되었다. [출처] 제주 기독교 순례길 답사기 9 - 삼양교회|작성자 베이스캠프
<제주 삼양교회 교회 연혁>
1915년 10월 1일 이기풍 목사가 삼양리에 전도하였으며 그 후 삼양2리 신평석씨 댁에서 예배드리다.
1916년 오주병 교우 초가3간을 예배당으로 헌납
1918년 김창국 목사 부임/1922. 12 사임
1918년 10월 교회설립계를 제출
1921년 12월 오주병을 영수로 고원구, 신평석, 김병학을 서리집사로 세우다.
1922년 삼양2리 2208번지에 초가35평 예배당을 건축하다.
1924년 이도종 전도사 부임 / 1925 사임
1924년 4월 김정복 목사 부임(위임,동사목사) / 1926 사임
1924년 8월 6일 당회조직, 장로 장립 / 오주병
1926년 4월 김성원 목사 부임 / 1928 . 4 사임
1928년 김재선 목사 부임 / 1931 사임
1928년 1월 장로 장립 / 김근서
<3. 고흥읍교회> 1928년- 1930년 김정섭 목사 시무

고흥읍교회 (출처- 3.1운동의 중심이 된 고흥읍교회<일상의 공간들, 우리 마을이야기<지역N문화 테마)
고흥읍교회는 1901년 4월 25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된 선교사 오웬 목사 (한국명 오기원 선교사)가 당시 한약방을 경영하는 신우구씨를 비롯한 목치숙( 거의가 40~50대였던 고흥읍교회 최초의 입교자들 중에 목치숙은 유일하게 20세의 젊은이였다. 교회설립 이듬해에는 전남노회 순천지방회로부터 조사로 임명을 받아 고흥읍교회 초대 교역자가 되었고, 다시 4년 후에는 장로로 임직했다.), 박무응, 박용섭, 설준승, 이층흥씨 등이 전도를 받고, 소아 정수근, 김태수 등 몇몇의 소아들과 함께 신우구씨 한약방에서 예배드린 것이 시초가 되었다. 1906년 9월 고흥읍교회(당시는 옥하리교회)가 설립되었고, 1922년 8월 옥하리에 조선기와 12칸 규모의 예배당을 신축하고, 정규오 목사가 시무하던 1954년 4월 15일에 당시 일본신사 터에 세운 120평짜리 예배당이다. 그래서인지 1978∼88년에는 장년 450여명이 출석, 총 700여명의 교도 수를 자랑했다. 이 석조건물은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내부는 개조를 진행했다.
고흥읍교회의 설립과 발전
고흥읍교회는 박무응, 박용섭, 이정권, 제씨가 중심이 되어 건축이 되었다. 신우구씨는 마음먹고 전도인들의 식비와 여비를 자담하고 청하여 전도하게 하며 예배당 신축에 대하여 부족금을 담당하였고, 이상 설립자 4인이 예배당을 신건축하기로 결정하고, 신우구씨 10원, 박무응씨 10원, 박용섭씨는 재목대금 전부를 담당하고 이정권씨 5원과 기타 신자들 연보금으로 동정 예배당을 신건축 후 열심히 전도하여 지교 3, 4곳을 설립하였다. 이후, 1920년대 중반까지 13개면에 교회를 설립하고 신도수가 1,000여명이 되는 규모로 확장되었다.1924년에 작성된 『고흥읍교회사기후록』에 따르면 세례도인 19명, 금년 학습인 20명, 학습인도수 30명, 주일 평균 회집수 130명, 학생 100명 등이었다. 이러한 교세확장에는 목치숙과 오석주의 활동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들은 종교 활동 뿐 아니라 민중의 열망을 수렴하여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진력하였던 결과로 볼 수 있다.
3.1운동과 야학운동의 중심이 되다.
고흥읍교회의 교인들은 3.1운동과 1920년대 야학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2월 14일 군 참사였던 김용태가 발기하여 많은 군민들과 행정 관료가 참석한 가운데 고종황제 봉도식이 거행되었다. 김용태는 유력한 향리집안에서 태어나 군 참사를 비롯해 통신원 주사를 역임한 지방 관료였고, 아들이 기독교인 김상두 였다. 고종황제 봉도식이 열린 다음부터 천도교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3.1운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서는 기독교 중심의 3월 만세운동을 목치숙과 오석주의 『판결록』을 통해 고흥의 3월 만세운동에 대해 살펴보면 당시 고흥 기독교계는 교세를 확장에 힘쓰는 한편, 목회자의 양성에 힘을 쓰고 있던 중 목치숙과 오석주는 1919년 3월 3일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가기 위해 서울에 들렀는데 서울에서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 문제가 논의되고 있으니 우리 조선도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이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학을 포기하고 독립선언서 1장을 구해 고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목치숙은 4월 4일 남양면 이향숙의 집에서 손재곤, 최세진, 조병학, 이석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서 논의되는 식민지 문제와 민족자결주의를 소개하였다. 또한 서울과 지방으로 퍼져가는 만세시위에 대해 이야기하며 고흥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들은 또 14일 태극기 40개를 가지고 오자는 목치숙의 의견에도 동조하였다. 4월 7일 목치숙은 고흥군 남계리 이송오의 집에서 오석주와 만나 동지규합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일을 분담하여 목치숙은 국기 80개를 준비하고 고흥읍과 동강면 유둔지역 사람들을 동원하고, 오석주는 선언서 100장을 준비하여 금산면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을 맡기로 하였다. 목치숙은 기독교인 정환태, 신성휴, 박기욱을 만나 만세시위를 함께 하기로 설득하여 그들의 동의도 얻었다. 4월 8일 오석주가 자신의 집에서 한익수, 황보익, 황재연을 만나서 만세시위를 함께 하기로 설득한 후 10일 한익수에게 선언서를 주며 “조선독립고흥단”이란 이름으로 재작성할 것을 주문하였다. 오석주와 목치숙은 거사일을 4월 14일로 정하고, 장소는 고흥장터로 정했다. 하지만 당일인 14일에 비가 많이 내려서 시위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들은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고흥군수, 순천법원 지청장과 순천헌병분대 감독보조원에게 익명으로 우송하였고, 결국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져 목치숙, 오석주, 한익수는 치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목치숙과 오석주는 징역 6개월이 언도되고, 한익수는 형의 집행을 유예 받았다. 이들 외에도 9명의 피검자가 있다고 하나 이름을 알 수 없다. 특히 고흥읍교회의 중심인물로 성장한 목치숙은 목회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동강면의 전도를 맡아 1922년 3월 대강기독면려청년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하면서 종교 활동과 사회활동을 병행하는 전도방식을 택해 활동하였다. 오석주도 고흥 기독 청년 면려회 회장을 역임하며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민립대학설립운동에도 참여하면서 개인의 활동력을 높이는 전도방식으로 활동하였다. 오병주는 훗날 목사가 되어 고흥읍교회 제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출처- 3.1운동의 중심이 된 고흥읍교회<일상의 공간들, 우리 마을이야기<지역N문화 테마)

고흥읍교회 (출처- 고흥읍교회[미지정] : 네이버 블로그 )
고흥읍교회의 신앙전통은 이후에도 한국교회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이자 총회장을 지낸 이기풍 목사 (1925년-1930년 시무)가 자신의 첫 사역지 제주도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사역한 곳이 바로 고흥읍교회였고, 소록도의 성자로 불리는 김정복 목사가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투옥의 수난을 당한 것도 고흥읍교회를 담임하던 시절이었다. 훗날 순교의 길까지 걸어간 이 두 사람의 담임목사의 행적은 물론이고, 이들의 앞뒤에서 강단을 지킨 정태일 서재화 정규오 목사 등의 존재도 고흥읍교회 역사에 커다란 긍지로 남아있다. 물론 그 사이에 신학적 문제, 교단 총회의 분열의 여파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분립의 아픔을 겪으며 고흥읍교회에도 적지 않은 상흔들이 남았다. 그렇지만 고흥읍교회는 여전히 고흥복음화를 위해 정진하며, 약한 교회들에까지 힘을 보태는 어머니 교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고흥 최초로 설립한 유치원을 통해서도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예배당 지붕 오른쪽 끝에는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장식 하나가 있다. 비둘기, 바로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존재가 돌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성령의 감화를 통해 시작된 공동체, 그분의 인도와 조명을 받아 지탱되어온 고흥읍교회의 역사는 앞으로도 그렇게 또 흘러갈 것이다.
(노래 자전거) 목일신의 아버지는 고흥읍교회 최초의 장로이자 담임교역자였던 목치숙 목사였다. 신실한 목회자이자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였던 목치숙 목사는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동시를 지을 것을 장남 목일신에게 권했고 효심 깊은 아들은 그 분부를 잘 받들었다. 수백편의 주옥같은 시와 산문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훗날 목일신은 전주 신흥학교에 진학 후 일제에 맞서는 격문을 집필하며 학생운동에 앞장서다 퇴학을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에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목일신에게 ‘자전거’는 아버지 목치숙 목사에 대한 존경과 애틋함을 담은 특별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고흥읍교회 (출처- 고흥읍교회[미지정] : 네이버 블로그 )
순교자 이기풍(1868∼1942). 고흥읍교회 당회록은 그가 1925년 6월 부임했다고 밝혔다. '재임 기간 고흥 지역에 여러 교회를 세워 활동하시다 5년10개월 만에 총회 전도부 파송에 따라 제주도 선교사로 가시다'라고 했다. 이기풍은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체포됐고 이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별세했다. 이기풍의 절개와 양심을 김정복 목사가 이어받은 셈이다

한국기독교 사적지 지정 기념예배.(고흥군 제공)/뉴스1 ⓒ News1
(출처- 고흥읍교회·소록도 5개 교회, 한국기독교 사적지로 선정 - 뉴스1)
2019.2.19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역사위원회는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최근 고흥읍교회와 소록도에 있는 5개 교회를 한국기독교 역사 사적지 11호와 12호로 지정했다. 사적지 지정을 기념해 고흥읍교회와 소록도 중앙교회에서는 18일 각각 감사예배와 제막식도 개최됐다. 이날 제막식에 참석한 송귀근 고흥군수는 축사를 통해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며 "이 영욕의 세월을 기억하고 영구히 보존해 후세들에게 고흥의 역사적 가치를 위대한 유산으로 물려주자"고 말했다.
고흥읍교회는 1905년 미국 남장로교의 의료선교사인 오원(C C Owen)의 전도로 시작, 100년이 넘은 역사를 지닌 고흥군 최초의 교회이자 고흥군 교회의 모태다. 고흥읍 교회와 3·1만세운동은 고흥읍교회 최초의 장로이자 사역자였던 목치숙 목사와 관련이 있다. 그는 동요 '자전거'를 작사한 목일신 선생의 부친이기도 하다.
<4. 고흥 길두교회> 1929년- 1931년 김정섭 목사 시무

길두교회 (출처- 고성중고등총동문회 | 고흥포두.길두교회 이성재 목사님 교회를 떠나시다 - Daum 카페)

길두교회 (출처- 우리들의 즐거운 농사이야기 | 우리동네 소식/나의 추억 길두교회 - Daum 카페

길두교회 (출처- 최철식 | 길두교회 전경 - Daum 카페 )

교회내부 (출처- 고흥길두교회 )
(교회연혁)
■1915년 2월 15일
고흥읍 교회에 출석하던 성도(전 영집 유천석 신명휴 박기욱 등)들이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전동 마을 전영집씨 초가 두 칸 중창 방에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감격의 첫 예배를 드림으로 길두 교회가 시작되다.
■1916년
교인들의 열성적인 전도로 인해 고제태 우창기 선기섭 씨 등 다수가 예수를 영접하여 교회에 출석하자 구례인 선교사와 고흥읍 교회가 협력하여 유천석 씨를 초대 교역자로 파송하다.
■1917년
교인 수의 증가로 보다 넓은 예배당의 필요성을 느껴 교인들의 정성어린 연보와 고흥읍 교회 이엽진 여사의 후원금으로 5칸 초가집을 매입하다.
■1918년 5칸 짜리 초가 예배당을 4 칸 증축하여 목조 초가 9 칸 예배당이 되다.
■1919년 이은영 전도사 본 교회 담임 교역자로 부임하다.
■1925년 이기풍 목사 본 교회 당회장직을 맡다.
■1929년 김정복 목사 본 교회 당회장을 맡다
<5. 소록도중앙교회> 1946- 1947년 김정섭 목사 시무

소록도중앙교회 (출처- 복지계획 긴급지원 | 소록도 중앙교회 - Daum 카페 )
1915년 일본 총독부에 의해 한센인 집단 시설이 만들어진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 이 곳에 일본인 목사 ‘다나까신사부로‘가 교회를 개척한 것이 소록도교회의 시작이다. 소록도에는 5개 교회(중앙, 신성, 동성, 남성, 북성교회)’지정 외에, 순교자(김정복목사) 사적지 지정교회로도 가 있으며 특히 소록도 중앙교회는 섬에 살고 있는 모든 크리스천이 매월 모여 연합예배를 드리는 소록도를 대표하는 교회이다.[출처] ✟ 역사속 한국교회 탐방(소록도중앙교회)|작성자 선한청지기

소록도중앙교회 (출처- 소록도 중앙교회 )

소록도중앙교회 (출처- 복지계획 긴급지원 | 소록도 중앙교회 - Daum 카페 )

김정섭 목사 순교기념비 (출처- ✟ 역사속 한국교회 탐방(소록도중앙교회) : 네이버 블로그)
소록도 여러 교회의 중심역할을 하는 '소록도 중앙교회'로 1934년 6월 설립된 소록도 연합교회를 계승하고 있으며 1938년 1월 중앙마을 오락실에서 공식 창립되었습니다. 해방되던 1945년 8월 21일 소록도의 자치권을 두고 병원측과 대립과정에서 이경도 전도원, 김원식 집사, 이재하 집사, 정수완 집사가 희생된 아픔속에 1946년 6월 김정복 목사가 부임하며 장로교회 체제로 바뀌면서 김차동, 황중오 2분을 장로로 세우며 조직교회가 되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1954년 4월 소록도 병원장의 횡포로 다수교인들의 강제퇴원과 예배당을 빼앗기는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아픔을 딛고 김두영 목사의 부임이후 1964년 11월 외벽이 타일로 꾸며진 현재의 400여평 예배당을 자체적으로 신축하고 1966년 11월 건축비의 빚을 다 갚고 헌당예배를 드린 기적적인 건물입니다. 건축과정의 일화 중 산흙을 파서 40대의 리어카에 싣고 바다에 버리는 과정에서 이정우 성도의 발뒤꿈치를 꿰뚫는 큰사고가 있었지만 다행히 완치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출처- ✟ 역사속 한국교회 탐방(소록도중앙교회) : 네이버 블로그)
-김정복 목사 순교비-
버림받은 나환 양 떼 가슴에 안고 기도로 호흡하며 성경으로 양식을 삼고 전도로 세월을 보내시다
남은 사명 양들에게 맡겨두시고 선한 목자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 순교로 개선하신 선한 목자여!
생명의 면류관 받아 쓰시고 주님이 재림하는 기약의 날까지 여기에 편안히 안식하소서
(추가)
장로교단 시대
1945년 4월말에 신사참배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신 애양원 교회 손양원 목사는 고흥 길두 교회 김정복 목사를 모시고 오셔서 교회재건을 위해 역사하시는 중 5월 1일부터 10일간을 공회당에서 부흥 사경회를 실시하고 헌법을 가르치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시대를 열고 김정복 목사를 초대 담임목사로 모시게 되었다. 공동의회를 열고 장로를 피택하고 1946년 6월13일에 역사적인 장로 창립식을 거행하니 중앙교회 김차동 장로, 북성 교회 김민옥 장로, 남성교회 박소도 장로, 서성 교회 서원갑, 이성곤, 황중오 장로, 신성교회 최장식 장로, 동성교회 최병수 장로였다. 손양원 목사가 안수 기도하고 김정복 목사는 공포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록도 교회 당회를 조직하니 초대 당회장에 김정복 목사 당회서기에 김민옥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다. 김정복 목사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종지리에서 1882년 6월10일 출생하여 구한말 전주부를 지키는 장병으로 충실한 군 생활을 하시다 일제 탄압으로 해산되니 생활이 어렵게 되어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지원하였으나 너무나 심한 노동에 못이겨 귀국하여 고향에서 신앙생활하시다 한 . 일 합방 소식을 듣고 민족운동은 기독교를 통해서 이루어 져야 한다고 믿고 평양신학교에 진학(제9회 졸업) 수학하여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사역하던 중 1940년 9월에 전국 목사, 장로 193명을 체포하여 구금시키게 되었다.여론이 너무 악화됨으로 모두 석방시키고 그 해 11월 15일 애국심과 재림신앙이 강하고 비판적인 순천지방 15명의 목회자를 재구속하니 그 15명중에 김정복 목사와 오석주 (1937.6.9-1942.10 소록도 교회 시무) 목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15명 목회자에게 1년에서 3년의 형을 확정하고 광주 교도소에 수감 시켰다. 온갖 회유를 물리치고 묵묵히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시던 김정복 목사가 소록도에 오셔서 소록도 교회를 재건하시고 초대 당회장이 되셨으니 하나님의 귀하신 일이 아닐 수 없다. 1946년 6월 15일에 장안리 교회를 설립하니 소록도 7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김목사님은 소록도 교회 당회장으로 부임 하시기전 1915년 4월 제주중앙교회를 시무하셨고 1918년 5월에는 벌교읍 교회, 1920년 9월에는 고흥읍 교회 및 길두 교회를 시무하셨고 소록도에 오셔서 우리 한센병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 말씀과 깊은 영적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목회하셨다.
6 25와 김정복복사 순교
날 마다 교회는 부흥되고 은혜가 충만해 갔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이북 공산군이 불법 침략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5일에 16,7세의 인민군 40여명이 소록도까지 침입했다. 원 내는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위원회가 조직되고 추종자들과 불신자들이 규합하여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세례교인들을 강제 이동시켜 교회간판을 내리고 인민공화국 간판을 달고 찬송과 기도를 중지시키고 인민공화국 노래를 가르치게 되었다. 김정복 목사님은 모든 활동을 중지당했다. 교인들은 잠시라도 피신하시라고 눈물로 청원했으나 목사님은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연약한 양떼를 버리고 버릴 수가 없노라"고 거절하시고 "내 늙은 목숨 살고자 도망 갈 수 없다"시며 평소에 늘 기도하시던 굴날뿌리(신생리 마을 뒤편 바위) 동굴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시다가 평소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원생 청년들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로 고흥 정치보위부로 끌려 가셨으니 그 날이 1960년 8월20일 이었다. 끌려가는 목사님을 울부짖으며 땅을 치며 통곡하는 성도들을 몇 번이나 뒤돌아 보시며 "사랑하는 소록도 성도들아 신앙절개 굳게 지켜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하시며 손을 흔들고 가신길이 소록도 마지막 이별의 길이였다. 병원 안에서는 9월말에 교회 장로, 집사들을 처형시키려고 인민재판이 공회당 앞뜰에서 진행되고 있을 때. 머지 않아 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되니 안심하라는 전단지가 비행기에서 뿌려졌고, 소록도에서도 그것을 받아보았다. 공회당에서 인민재판을 진행하던 지방 빨갱이와 인민군들은 금방 얼굴이 파래지며 모든 재판을 끝도내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그날이 9월27일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인민군들을 퇴각하면서 고흥 경찰서에 수감 중이던 김정복 목사님을 경찰서 뒷산으로 끌고가서 무차별로 머리에 관통상을 입히니 무릎을 꿇으시며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순교하셨다. 목사님은 그렇게도 사랑하며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며 사랑하던 소록도 성도들을 다시 한번 만나보지 못하고 순교의 제단 위에 붉은 피를 뿌리며 그 분이 늘 즐겨 노래하던 천국을 향하여 떠나 가시니 향년 69세 그날이 1950년 9월30일이었다. 1951년 1월 23일 고대작(高大作)목사님이 부임하여 3월3일에 중앙 예배당에서 김정복 목사님의 순교 추도예배를 드리니 4천여 성도가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고 김정복 목사님의 순교 신앙을 계승할 것을 다짐하고 다짐했다. 1977년 9월 30일 27년만에 김두영 목사님에 의해 김정복 목사님 순교 기념비를 중앙예배당 앞 뜰에 세워 그 높은 순교신앙을 영원토록 기리며 계승하고자 하여 그 분 비에 "샛별"이란 제목의 시문을 기록했다. 1978년 5월 17일에는 병원당국에서 병원입구에 순록탑을 세우고 김정복 목사님과 함께 병원을 지키다 순직한 11분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남기게 되었으며, 오랜 세월동안 잊혀졌던 김정복 목사님의 유해를 고흥읍 남방 1km도로변 왼편 산 기슭에 김정복 목사님의 순교 묘역을 천대성 목사님을 위원장으로 기독교 십자성선교회가 후원하여 세웠으며 소록도 가는 길목을 오늘도 지키고 있으니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소록도 교회 순교자 김정복 목사님은 오늘까지 이름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묻혀 계시며 교계에서는 이름조차 모르고 이곳 소록도 중앙교회 앞에 순교비만 쓸쓸히 세워져 있는 것이다.
(출처-기독교 영성 아카데미 | 소록도 교회의 역사 .소록도 소개 - Daum 카페)

김정섭 목사 순교기념비 (출처- 순교지를 찾아서(12) - 소록도 성자 김정복.. : 네이버블로그 )
김정복 목사 순교 이야기
소록도의 김정복 목사는 애양원 손양원 목사와 쌍벽을 이루는 한국교회 대표적 순교자이다. 1882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한 김정복 목사는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제주중앙교회, 고흥읍교회, 길두교회 등에서 시무하다 1946년 소록도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다 1940년 5월부터 3년 넘게 광주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으며, 해방 후에는 손양원 목사 등과 더불어 한국교회 재건을 위해 힘썼다. 소록도교회가 은혜가 충만하여 부흥하던 가운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인민군들이 소록도까지 침입했다. 인민군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교인들은 김정복 목사에게 잠시 피신할 것을 청원했다. 그러나 김 목사는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4,000여 양떼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며 박해를 각오하고 교회를 지키다 8월 28일 인민군에 체포됐다. 끌려가면서도 “사랑하는 소록도 성도들아 신앙절개 굳게 지켜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하나님이 위로해주실 것이니 안심하라”면서 남은 성도들을 위로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 후 퇴각하던 인민군에 의해, 1950년 9월 30일 고흥경찰서 뒷산에서 69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소록도 5교회 ‘순교사적지’ 지정
김정복 목사는 예장(합동) 제86회 총회에서 순교자로 등재되었다. 또한, 소록도 5교회(중앙, 신성, 동성, 남성, 북성교회)는 97년 동안 한센병 환우들의 고통과 애환을 함께한 역사를 지닌 곳으로, ‘한국기독교 순교(김정복 목사)사적지(제3호)’,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제12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순교지를 찾아서(12) - 소록도 성자 김정복 목사|작성자 하나굿뉴스

김두영 목사공적비 (출처- 복지계획 긴급지원 | 소록도 중앙교회 - Daum 카페 )
<소록도중앙교회과거 역사>

소록도중앙교회 기초 공사 모습. 1963년 착공돼 1964년 완공돼 1966년 소록도의 다른 일곱 교회와 함께 헌당식을 가졌다. /소록도연합교회 (출처- 23. [개신교 선교 140주년… 한국의 10.. : 네이버블로그)

소록도중앙교회의 1966년 헌당식 기념 사진. /소록도연합교회
(출처- 23. [개신교 선교 140주년… 한국의 10.. : 네이버블로그)
중앙교회를 포함해 소록도에 교회 8곳이 지어진 것은 1963~64년. 당시는 ‘오마도 간척 사업’이 한창이었다. 노동을 할 수 있는 환자는 모두 간척 사업에 동원돼 교회 건축엔 중증 환자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1922년 소록도에 처음 교회가 들어선 후로 40년간 예배당으로 써오던 치료소 대신 ‘진짜 예배당’을 짓자는 데 뜻을 모았다. 당시 김두영 담임목사의 기록에 따르면 몸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나왔고, 눈먼 사람들이 흙을 퍼 나르고, 절름발이가 돌을 날랐고, 한 손 없는 사람들이 모래 나르고, 블록 찍고, 담을 쌓았다고 한다. 머리카락 팔고, 발가락으로 바늘 잡고 수를 놓아 판 돈까지 헌금했다. 그렇게 2~3년 만에 교회 8곳 모두 건축비를 갚고 1966년 11월 23·24일 이틀에 걸쳐 헌당식을 가졌다.

소록도교회 초기 교인들. /소록도연합교회
소록도교회 100년사는 대하(大河) 드라마다. 시작부터 남달랐다. 소록도에 한센인 격리 시설인 자혜의원이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전국 한센인들이 소록도로 보내졌다. 1922년 어느 날 한센인 3명이 섬을 탈출했다가 잡혔다. 일본인 하나이(花井) 원장의 심문에서 그들이 밝힌 탈출 이유가 뜻밖이었다. “우리는 기독교인인데 신앙의 자유가 없어서 이 병원에서는 못 살겠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교회가 없어서 탈출했다는 것이었다. 무시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이 원장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나머지 환자들 의향도 묻고 다른 요양소 현황을 파악한 후 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해 일본인 목회자를 초청했다. 1922년 10월 2일 일본 성결교 다나카(田中) 목사가 소록도에 와 전도 집회를 연 것이 소록도교회의 시작이었다.

일본인 고이데 토모하루 목사(왼쪽)와 그의 가족 사진. 고이데 목사는 일본 성결교 목사로 1927~1937년 소록도교회 목사로 사역하며 교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소록도연합교회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부터 각지에서 한센인 구호·요양소를 운영했다. 덕분에 탈출 사건에서 보듯 소록도로 온 환자 중에는 이미 개신교 세례를 받은 이가 많았다. 1927년 성결교 고이데(小出) 목사와 1932년 감리교 야다(矢田) 목사가 차례로 부임해 사랑과 헌신으로 섬기면서 소록도의 개신교세는 급격히 커졌다. 고이데 목사는 일본 귀국 후에도 천황을 신으로 섬기기를 거부하다 투옥돼 패전 후 간수들에게 구타당해 죽었다는 증언(김두영 목사)이 있을 정도로 신앙에 투철했다. 1920~30년대 동서남북을 비롯한 여섯 마을마다 교회가 생겼고, 광복 후에도 장안리교회(1946년), 직원교회(1951년)가 설립됐다. 목사는 이 교회들을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했다. 환자 가운데는 ‘인텔리’도 많았다. 환자들은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이 발행하던 ‘성서조선’에 논설과 편지 등 글을 80여 편 실었다. 윤일심 환자는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도 조그마한 질병에 못 이겨 한숨과 눈물 짓는 자가 있으면 절대 마병과 싸우는 우리의 입에서 나가는 말에 귀 기울여 들어보소서”라는 글을 싣기도 했다. ‘한센인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발병했을 때, 사망 후 검시(시신 해부) 때, 화장(火葬)할 때다. 한센인은 그런 설움과 한을 신앙에 의지해 버텼다. 광복 후 한때 소록도 전체 인구 6000여 명 가운데 5000여 명이 개신교 교인이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출처- 23. [개신교 선교 140주년… 한국의 10.. : 네이버블로그)

1946년 6월 10일 장로를 선출한 후 기념 촬영한 모습. 앞줄 오른쪽 두번째가 김정복 담임목사,
오른쪽 다섯번째는 손양원 목사. /소록도교회 제공
목사 없이 광복을 맞은 교회 지도자들은 1946년 인근 고흥읍교회 김정복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부터 소록도교회는 장로교 교회가 됐다. 6·25 당시 칠순이었던 김 목사는 피란 권유에도 양들을 지키다 퇴각하던 인민군에게 희생당했다
(출처- 23. [개신교 선교 140주년… 한국의 10.. : 네이버블로그)


굴날뿌리 동굴 (출처- 남도 물댄동산 | 일본 목회자들 소록도 예배 - Daum 카페)

김정섭 목사 일대기
<6. 김정섭 목사 묘역> 1950년 9월 30일 순교

순교자 김정섭 목사 묘역 (전남 고흥군 고흥읍 등암리 산208-1, 2014년 정비되어 ‘샛별부활동산’으로 조성)
소록도 기독교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잊혀진 이름이 있다. 소록도교회 김정복 목사. 생소한 그의 행적을 찾아 나섰다. 사실 소록도 중앙공원과 자혜의원을 둘러보려고 했으나 코로나19로 접근이 금지된 상황에서 김정복 목사의 행적을 찾아 나섰다. 김정복은 구한말인 1882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1907년 하와이 마우이섬 사탕수수 노동자로 살다 감리교회 세례를 받고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뒤 1923년 제17회로 졸업을 했다. 일제강점기의 혹독한 시기를 지나 해방을 맞이하던 다음 해인 1946년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하는 소록도교회 초대 당회장이 되었다. 그는 일평생을 한센병 환자들의 아버지로서 온몸으로 헌신하며 살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비극은 소록도를 그냥 지나쳐가지 않았다. 소록도에 들어온 북한군은 김정복 목사를 체포해 고문했다. 한센인들의 아버지인 김정복을 제거하지 않고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제대로 선전, 선동할 수 없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있고 난 다음 다음날인 9월 30일 김정복 목사를 총살했다. 1978년 소록도 병원 측은 소록도 선착장에 순록탑을 세우고 김정복 목사와 병원을 지키다 순직한 11명의 이름을 새겼다.
오랫동안 버려진 상태로 있던 김정복 목사의 묘지가 전남 고흥군 고흥읍 등암리 산208-1 에 2014년 정비되어 ‘샛별부활동산’으로 조성되었다. 소록도에서 다시 고흥으로 내비게이션을 켜고 한참을 달렸다. ‘샛별부활동산’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위치를 묻기 위해 근처에 있는 보건소에 들렀다. 쉬는 날 당직자가 몸소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 길가에 있는 묘역을 알려줬다. 주위를 빙빙 돌면서 헤메던 곳에서 김정복 목사의 기념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여기 작은 사슴의 섬에 한 목자 있었네. 우리를 떠나 바다를 건너 벼랑에 선 외로운 양들 그 영혼 싸매 주던 사랑의 손길이여. 전남 고흥읍 등암리 산208-1번지. 국도변에 쓸쓸히 김정복 목사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한국기독교의 현 위치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 찹찹한 심정이었으나 방치하지 않고 현재의 모습으로 온전히 세워져 있는 것만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출처] 평양신학교 출신, 한센병 환자들의 아버지, 소록도교회 김정복 목사, 1907년 하와이 마우이섬 사탕수수 노동자로 살다 감리교회 세례를 받고 신앙의 길, 소록도 들어온 북한군이 총살|작성자 이동현 이북도민작가
(추가)
1950년 8월 5일 인민군 40여명 소록도로 진입하였고 1950년 9월 30일 고흥읍 뒷산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북한군에 총살로 순교하였다. (출처-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
| 순교자 주기철 목사 (1) | 2026.01.06 |
|---|---|
| 순교자 손양원 목사 (0) | 2026.01.02 |
| 순교자 조상학 목사 (1) | 2025.12.31 |
| 순교자 이기풍 목사 (0) | 2025.12.22 |
| 순교자 이도종 목사 (1892- 1948) (3) | 2025.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