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권중하 전도사 초상화. (출생년도 ?- 1938년 순교)
권 전도사는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았지만 원로 교인의 증언을 토대로 흰 중절모를 쓴 모습의 초상화를 그렸다. /중리교회 제공
권중하 전도사는 의성 지역 효선교회 빙계교회(현 중리교회) 금천교회 옥정교회(현 춘산교회) 현리교회 산운교회 등 6개 교회를 순회하며 사역했습니다. 중리교회는 100주년을 앞두고 권 전도사의 발자취를 좇았습니다. 모래 밭에서 바늘 찾기였지요. 그렇지만 노력 끝에 ‘초상화’를 만들었습니다. 비결은 이렇습니다. 2019년 당시 93세였던 손사익 성도가 권 전도사의 딸과 초등학교 동창이었답니다. 손 성도님은 “당시 권 조사(助師)님은 키가 크고, 코도 오뚝했으며 옷은 흰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흰 중절모자를 잘 쓰셨다. 인사를 하면 ‘그리혀’하고 받으셨는데 말씨가 특이했다”고 증언했지요. 교회는 이 증언을 토대로 ‘몽타주 초상화’를 만들었습니다.
태어난 해도 알 수 없고,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 사진 한 장, 유족 한 명 이 땅에 남겨둔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그러나 자신이 섬긴 교회를 향한 헌신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은 순교신앙이 그의 이름을 다시 기억하게 했다.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경북지역 최초이자 유일한 순교자 권중하 전도사의 총회순교자 등재 감사예배가 7월 17일 의성 중리교회에서 열렸다. 총회순교자기념사업부(부장:함성익 목사) 주최로 열린 이날 예배에는 권중하 전도사가 생전에 사역했던 의성군 춘산면 일대 여섯 교회 성도들과 경신노회 관계자 등 20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이 보여준 불굴의 순교신앙을 기렸다. 이날 예배는 함성익 목사 사회, 직전 순교자기념사업부장 손원재 장로 기도, 경신노회 사모찬양대 찬양, 총회역사위원회 총무 박창식 목사(달서교회) 설교, 의성중부교회 김흥천 목사와 김미경 집사 특송, 전 총회서기 김형국 목사 축도로 진행됐다. 박창식 목사는 ‘죽었으나 믿음으로 말하는 자’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성경을 보급하는 권서인으로서 삶, 대구동산병원 전도회 소속 교역자로서의 사역 등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인의 생애에 대해 소개하며 “권중하 전도사님은 죽음으로 자신이 전한 복음이 진리임을 증거한 순교자”라고 평가했다. 고인의 총회순교자명부 등재 추진에 앞장서 온 대구 효목교회 윤두환 원로목사도 “총회와 노회마저 변절하던 시대에 가혹한 고문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끝내 신앙을 지킨 권 전도사님은 의성의 자랑이요 경신노회의 자랑이자 한국교회의 자랑”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의성군수 김주수 장로, 경북교직자협의회 상임회장 홍성현 목사, 경신노회장 김은한 목사 등은 축사와 격려사 등을 통해 “순교자의 피로 세워진 이 땅의 교회들이 더욱 복음의 빛을 밝혀 순교신앙을 선양하자”고 역설했다.
한편 효선교회(정권억 목사) 산운교회(라영수 목사) 현리교회(안해호 목사) 중리교회(고관규 목사) 춘산교회(원용석 목사) 금천교회(김현덕 목사) 등 권 전도사가 사역했던 춘산면 일대 여섯 교회 대표들은 “고인의 순교정신을 계승해 더욱 건강한 신앙공동체가 될 것”을 다짐했다. 권중하 전도사는 순교자 주기철 손양원 목사 등과 동시대 인물로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복음사역을 펼치다 의성농우회 사건에 연루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죄목으로 의성경찰서에서 여러 차례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상주 함창에서 별세한 것으로 전해진다. 경북 내륙에 위치한 의성군에서도 특히 산간오지에 속하는 춘산면 일대에 이토록 긴 역사를 가진 교회들이 적잖이 모여 있다는 사실은 퍽 이례적이다. 아마도 십자가 사랑의 복음이 더욱 소외된 이들, 더욱 낙후한 지역에서 쉽게 파고들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의성 최초의 교회인 비봉교회에 출석하던 여성도가 시집온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며 일으킨 교회가 바로 효선교회이고, 빙계교회(현 중리교회) 노방전도팀의 전도로 예수 믿게 된 세 가정이 씨앗이 되어 세워진 교회가 금천교회인 사례 등에서 알 수 있듯 이곳 교회들은 서로 끈끈한 역사적 관계로 맺어져 있다. 더욱이 지금은 각기 소속된 노회와 시찰이 다르지만, 예전 경북노회 시절부터 경안노회와 경중노회 시절을 함께 거치는 동안 오랜 기간 한 살림을 해왔기에 여태까지 상대 교회의 사정을 환하게 알고 교우들 간에 친분도 깊다. 그런데 이들의 형제애를 더욱 깊게 해주는 하나의 끈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권중하 전도사라는 인물이다. 미국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세운 대구동산병원은 전도회를 조직해 경북 각지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특히 1920~1930년대는 의성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사역을 펼치던 기간이었다. 당시 권 전도사는 대구동산병원 전도회에서 권서인과 교역자로 사역하던 중이었다.
애덤스(한국명 안두화) 선교사의 주선으로 춘산지방에 부임한 권중하 전도사는 여섯 교회 중 옥정교회(현 춘산교회) 곁에 사택을 정한다. 대구경북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인 박창식 목사는 권 전도사가 옥정교회를 택한 것은 당시 가장 교세가 약한 곳에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다고 해석한다. 권서인 시절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던 부지런함으로 그는 여섯 교회를 열심히 돌보았다. 널찍한 길도, 마땅한 교통수단도 없었던 시절 자전거가 권 전도사의 사역에 큰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권 전도사가 의성에 부임한 해는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며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1938년이었다. 더욱이 그가 소속된 경북노회는 권 전도사를 맞이한 회의석상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그 가슴 아픈 현장을 뒤로 하고 사역지로 달려간 권 전도사에게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신앙의 결기가 존재했다. 일본경찰은 물론이고 동료인 한국인 목회자들로부터도 수많은 회유와 협박이 있었지만 권 전도사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결국 그를 신사참배 반대자로 낙인찍은 일제는 의성농우회 사건을 빌미로 본격적인 탄압을 가한다. 의성교회 정일영 목사, 대구의 유재기 목사, 평양의 주기철 목사 등 여려 교회지도자들과 함께 권 전도사도 의성경찰서로 붙들려가 고문을 당했다. 그에게 가해진 핍박은 집요하고 모질고 잔혹했다. 마지막 고문을 받고 나왔을 때는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살점도 없이 뼈만 앙상해진 데다, 온 몸에 피멍이 들고 상처투성이였다. 그 참혹한 모습을 목격한 교우들은 통곡했다. 그렇게 권 전도사는 세상을 떠났다. 해방 후인 1945년 11월 6일 경북노회 제42회 정기회에서 당시 의성시찰장 박병훈 목사의 헌의로 권중하 전도사의 추도식 시행이 결의되고, 의성시찰회 주관으로 여러 성도들이 추모하는 가운데 예식이 거행됐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어렴풋한 기억에만 남아있던 그의 존재를 다시 살려낸 것은 어린 시절부터 권 전도사에 대한 강렬한 추억을 간직해왔던 현리교회 출신의 윤두환 원로목사(대구효목교회)였다. 그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16년 제101회 총회에서 권중하 전도사의 이름은 순교자 명부에 정식 등재됐고, 중리교회에는 권 전도사의 순교기념비가 건립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듬해 제102회 총회에서는 권중하 전도사의 수난 현장이었던 의성경찰서와 중리교회를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한 데 이어, 올해 제103회 총회에서는 권 전도사가 마지막으로 사역한 여섯 교회를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로 지정했다. 경북지역에서 유일한 신사참배 반대 순교자를 배출했다는 영예를 함께 간직한 여섯 교회가 2017년 권중하 전도사의 순교자등재 감사예배를 함께 치렀고, 조만간 열리게 될 사적지 지정식도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중이다. 고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며, 죽음 앞에서도 참된 진리를 따르는 신앙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권 전도사의 삶이야말로 여섯 교회에게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 그 유산을 계승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공동체가 되겠다는 다짐과 함께 여섯 교회의 역사는 다시 새로운 장을 연다.
단지 지금까지 찾아낸 기록들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대구동산병원에서 ‘권서인(勸書人)’으로 사역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권서인이란 선교 초창기에 성경이나 쪽복음서를 배부하고 팔면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던 이들을 가리킨다. 책을 파는 일을 한다고 해서 ‘매서인(賣暑人)’이라고도 불렸지만, 실제로는 책 판매보다는 전도사역을 주된 업무로 삼았다. 당연히 투철한 신앙적 기반과 충분한 학문적 소양을 가진 이들이 권서인으로 선발될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누구보다 실적이 좋은 권서인이었으며, 동산병원 전도회의 제5대 교역자로 활동했다고도 한다. 그의 사람 됨됨이를 보여주는 기록이 효선교회에 남아있다. 의성의 여섯 교회를 섬기다가 농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권중하 전도사를 어떤 강압으로도 굴복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의성경찰서에서 그를 호송관도 없이 대구경찰국으로 이송한 일화를 당시 목격자들이 전한 것이다. 사실상 도망쳐도 된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도 있었지만, 권 전도사는 제 발로 대구경찰국까지 찾아간다. 거기서 엉뚱한 사람을 자신으로 오인해 붙들고 있던 경찰관 앞에 본인의 신분을 밝히고 취조를 받는다. 그는 당당하게 고난에 맞부딪치는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이후로도 1년간 이어진 잔인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권 전도사는 결국 순교의 길을 간다. 장례를 치러야 했지만 일경과 친일파들의 눈초리가 무서워 다들 쉬쉬하던 중에, 함께 고초를 당했던 의성읍교회 오진문 장로가 고인의 시신을 자신의 고향 상주 함창에 안장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인의 정확한 매장 위치를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권 전도사 순교 후 일제에 의해 교회가 폐쇄되거나 예배당이 뜯겨나가는 아픔을 겪었다는 현리교회와 중리교회, 교회 설립일마다 역사를 되새기며 권 전도사의 순교행적을 되새긴다는 효선교회, 불교가 강세인 힘든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권 전도사로부터 배운 신앙의 길을 따라간다는 산운교회 모두가 고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영적 자산을 잘 키워왔다. 특히 춘산교회의 경우는 권 전도사를 파송한 대구동산병원 순회선교부 선교사들의 기도처로 시작한 역사에다, 농우회 사건에 권 전도사와 나란히 연루되어 함께 고초를 당한 정영섭 장로 등 적잖은 이야깃거리들을 가지고 있다. 금천교회도 의성의 ‘작은 예수’라 불리는 박정환 장로와 함께 권중하 전도사를 자랑스러운 믿음의 선구자로 기억한다. 사적지 지정식을 앞두고 교회별로 기념비 건립 등 여러 준비를 하고 있다면서 여섯 목회자들은 이를 동력으로 삼아 고령화, 이농현상 등 농촌교회의 어려운 현실에도 두려움 없이 맞서겠다고 힘주어 말한다. “권중하 전도사님과 관련해 연구와 발굴에 학계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다루어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들도 열심히 뒷받침하겠습니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순교자 권중하 전도사 순교비 (2016년6월 30일, 총회 순교자기념사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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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하 전도사 총회 순교자 등재 감사예배 (2017.7.17. 중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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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기념사업부 ‘경북 첫 순교’ 권중하 전도사 순교자 등재 감사예배
해방 후 1945년 11월 6일 열린 경북노회 정기회에서는 당시 의성시찰장 박병훈 목사의 헌의로 권중하 전도사의 추도예배가 열렸으며, 지난해 제101회 총회에서 순교자명부에 등재하기로 결의된 바 있다. 순교자 등재와 함께 중리교회(옛 빙계교회)에는 고인의 순교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이와 함께 고인이 몸담았던 중리교회 옛 한옥예배당과 종탑이 의성군문화유산 제35호로 지정되면서 역사 찾기 작업이 한창 펼쳐지는 중이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순교자 권중하 전도사가 시무했던 경북 의성 금천교회 산운교회 중리교회 춘산교회 현리교회 효선교회가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4호로 지정받았다. 현재 6개 교회에 사역하고 있는 목사들이 이승희 총회장과 역사위원회 위원장 박창식 목사와 함께 지정증서를 들고 기념순서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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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역사위원회(위원장:박창식 목사)는 3월 14일 경북 의성 중리교회(고관규 목사)에서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4호 지정감사예배와, 영덕 송천교회(김영원 목사)에서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10호 지정감사예배를 각각 드렸다. 이날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4호로 지정된 곳은 금천교회 산운교회 중리교회 춘산교회 현리교회 효선교회 등으로, 이 6개 교회는 대구·경북지방에서 유일하게 신사참배 반대로 순교한 권중하 전도사가 사역했던 곳이다. 경북 의성 금성면 가음면 춘산면 일대 6개 교회에서 시무하던 권중하 전도사는 1938년 신사참배 반대를 이유로 주기철 목사와 같은 시기에 의성경찰서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교했다. 권 전도사의 이러한 순교사적 의미는 지난 102회 총회에서 순교자 등재로 가치를 받았으며, 103회 총회는 권중하 전도사가 시무했던 6개 교회를 총회 산하 네 번째 순교사적지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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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하 전도사가 사역했던 의성군 6교회>
금천교회, 산운교회, 중리교회, 춘산교회, 현리교회, 효선교회

권중하 전도사의 마지막 사역지이자 그의 순교신앙을 계승하는 공동체인 의성의 여섯 교회. 금천교회 산운교회 중리교회 춘산교회 현리교회 효선교회.(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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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서쪽 산운교회에서 동쪽 끝 춘산교회까지는 13.4km, 가장 북쪽 효선교회에서 남쪽 끝 현리교회까지는 8.3km. 일명 ‘얼음골’이라 불리는 의성 빙계계곡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산재한 여섯 교회는 서로 차를 타고 10분 이내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지척에 있다. 가장 역사가 오랜 효선교회가 올해 112주년을 맞았고, 뒤이어 산운교회가 109주년, 가장 늦게 설립된 금천교회도 92주년을 맞았으니 함께 지내온 세월 또한 만만치가 않다. 현리교회는 내년에, 춘산교회와 중리교회는 내후년에 설립 100주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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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하 전도사 순교기념비 곁에 선 여섯 교회 목회자들. 왼쪽부터 원용석(춘산) 라영수(산운) 김현덕(금천) 안해호(현리) 고관규(중리) 정권억(효선) 목사.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1. 대구 동산병원> 1920- 1930년대 동산병원 제5대 교역자로 시무

계명 대학교 대구 동산병원
대구에서 병원 역사가 깊기로 유명하다. 모태를 따지고 들어가면 1899년 10월 우드브리지 존슨 선교사가 세운 제중원[5]으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제중원을 시작으로 소아 재활을 비롯한 여러 환자의 진료를 보았다. 1930년 2월 영아 건강상담 및 진료, 우유 급식을 위한 대구복지기관인 영아보건소를 설립하였으며, 이후 1950년 7월, 6.25 전쟁 당시 부상 경찰관을 대상으로 의수족을 제공하고, 재활 진료를 위한 경찰병원으로서 운영하게 된다. 특히, 포탄 등으로 지체 장애가 발생한 환자가 많아 의수족부를 별도로 설치하여 재활에 힘썼고, 전쟁 휴전 후 1953년 10월, 한국 월드비전(한국 선명회)의 기부로 60병상 규모의 소아병동을 신축하게 된다.[6] 6.25 전쟁으로 인해 전쟁 고아가 많이 발생했고, 영양 섭취가 고르지 않아 아동의 사망율이 높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고아원 아동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실시하였다. 1962년 6월, 조앤 포 선교사에 의해 대구 최초로 물리치료실을 개설하고, 그로부터 30년 후 1992년 4월, 대구 최초로 재활의학과가 개설되게 된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3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학병원의 타이틀을 유지했을만큼 한 때 대구ㆍ경북 최상급의 병원이었지만, 현재는 본원 이전과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2차 병원급으로 규모가 줄어들어 타 대학병원보다 미흡한 점이 있으나, 환자 케어 및 서비스가 좋아서 재진율이 높다.

계명 대학교 대구 동산병원
권중하 전도사는 대구동산병원에서 ‘권서인(勸書人)’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권서인이란 선교 초창기에 성경이나 쪽복음서를 배부하고 팔면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던 이들을 가리킨다. 책을 파는 일을 한다고 해서 ‘매서인(賣暑人)’이라고도 불렸지만, 실제로는 책 판매보다는 전도사역을 주된 업무로 삼았다. 당연히 투철한 신앙적 기반과 충분한 학문적 소양을 가진 이들이 권서인으로 선발될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누구보다 실적이 좋은 권서인이었으며, 동산병원 전도회의 제5대 교역자로 활동했다고도 한다.

계명 대학교 대구 동산병원
<2. 중리교회> 1920- 1930년대 권중하 전도사 시무

경북 의성 중리교회 전경. 왼쪽은 현재 사용하는 새 예배당, 오른쪽은 1928년에 지은 첫 예배당을 복원한 한옥 예배당. 오른쪽엔 옛 종탑도 보인다. 한옥 예배당과 종탑은 의성군 문화유산이다. /중리교회 제공
(출처- [김한수의 오마이갓] '전원일기' 연상시키는 시골교회의 100년 역사 : 네이트 뉴스)

중리교회(2003년) (출처- [의성군] 중리교회, 100년 교회 성지순례(101) : 네이버 블로그)
중리교회는 1920년 3월 15일 효선교회의 박문호 영수와 김한권, 추문구, 임유춘 등이 빙계동 서당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입니다. 1981년 9월에 빙계교회를 중리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중리교회는 1928년에 건축한 목조 예배당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예배당에는 남녀 출입문을 따로 두었으며, 예배당 중앙에는 3개의 기둥을 세우고 광목 가림막을 두어 남녀가 서로 볼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이 예배당은 2019년에 복원 및 보수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중리교회는 2016년 6월 30일 권중하 전도사 순교기념비를 건립했습니다. 권중하 전도사는 1938년 경북노회에서 의성 춘산지방의 효선교회, 빙계교회(현 중리교회), 금천교회, 옥정교회(현 춘산교회), 현리교회, 산운교회 등 6개 교회를 담당하는 전도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현재의 춘산교회 사택에 거주하며 열심히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권중하 전도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년 가까이 의성경찰서에 불려다니며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출감 후에 춘산교회 사택에서 요양하던 중 순교했습니다. 2017년에는 1928년에 건립한 중리교회의 제1 예배당과 종탑이 의성군 문화유산 제35호로 지정되었고,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5호(합동)로 지정되었습니다. 2019년 9월에는 권중하 전도사가 시무하였던 중리교회를 포함한 6개 교회가 한국기독교 순교사적지 제4호(합동)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의 예배당은 2003년에 완공한 예배당입니다.
[출처] [의성군] 중리교회, 100년 교회 성지순례(101)|작성자 100년 교회연구소장

의성군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리교회 한옥예배당(1928년 건축)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1928년 건축된 예배당은 24평 면적에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남녀 출입문이 따로 있고, 예배당 중앙의 기둥 3개는 광목 가림막을 걸쳐 남녀가 서로를 볼 수 없도록 돼 있습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옛 예배 풍경을 간직하고 있지요. 이 예배당은 복원돼 2016년 의성군 문화유산 제35호,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5호로 지정됐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자료를 발굴해 의성군과 예장합동 교단을 설득한 덕분이지요. 예배당에는 권 전도사의 ‘초상화’가 걸렸고, 권 전도사 시절부터 사용한 강대상과 풍금도 그대로 전시돼있습니다. 또한 한옥 예배당 뒤뜰에는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로다’는 로마서 구절을 새긴 권중하 전도사 순교 기념비도 세웠습니다.

의성 중리교회의 첫 예배당 내부. 초창기의 강대상과 풍금을 보존하고 있다. 예배당 가운데 기둥 3개엔 광목 천을 막아 남녀 자리를 구분하기도 했다. /중리교회 제공
(출처- [김한수의 오마이갓] '전원일기' 연상시키는 시골교회의 100년 역사 : 네이트 뉴스)

의성 중리교회 한옥 예배당 뒤뜰에 세워진 권중하 전도사 순교 기념비. /중리교회 제공
(출처- [김한수의 오마이갓] '전원일기' 연상시키는 시골교회의 100년 역사 : 네이트 뉴스)
<중리교회 100년사>
◇교인 50명 작은 교회...차임벨, 복사기 기증 사연도 수록
‘이영숙 성도-차임벨 기증. 차임벨, 녹음기 카세트, 앰프, 확성기 3대 기증(₩105,000원)한 이영숙씨에게 감사를 표하기로 가결하다.(제 24회 1974. 8. 21 당회록)’
경북 의성군 춘산면 중리교회(고관규 담임목사)가 펴낸 ‘중리교회 100년사’에 실린 한 대목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니 1970년대 중반 동네 교회에서 울리던 차임벨 소리가 기억났습니다. 당시 도시 교회들도 줄을 당겨 울리는 종(鐘) 대신 전자음이 울려퍼지는 차임벨을 설치하곤 했지요. 이 무렵 중리교회도 한 성도님이 첨단 트렌드인 차임벨을 설치했던 것입니다. 당시 의성 첩첩산중에 울려퍼졌을 차임벨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차임벨 기증 외에도 ‘아름다운 헌신’이란 장(章)에는 청기와를 기증한 이종칠 장로님, 이 교회 출신으로 장신대 총장을 지낸 이종성 박사님이 복사기를 기증한 사연, 재산을 기증한 신태분 권사님, 박순애 권사님의 에피소드도 실렸습니다. 100년사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2009년엔 한 교인이 “이름을 밝히지 말고 교회를 위해 써달라”고 1000만원을 담임목사님께 기증해 꽃밭과 잔디밭 등 조경을 할 수 있었답니다. 저는 예장합동 교단에서 발행하는 ‘기독신문’에 실린 ‘의성 중리교회 100년사 출판 및 예배당 복원’ 기사를 읽고 관심이 생겨 100년사를 구해 읽었습니다. 이 교회는 현재는 주일예배 참석인원이 50명 남짓인 전형적인 시골교회랍니다. 교인들은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분들이고요. ‘100년사’를 읽으니 작은 시골교회이지만 목사님과 교인들의 100년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교회 사랑이 담백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교회는 1919년 최씨, 김씨 등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여인이 빙계동 서당에서 최초로 복음을 전한 이후 1920년 3월 박문호 영수와 김한권 추문구 임유춘씨를 전도해 서당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입니다. 이어 1922년 미국 출신 위철치(조지 윈·1882~1963) 선교사에 의해 교회가 설립됐습니다. 1928년에 한옥 예배당을 지었고, 1974년 두번째 예배당, 2003년 현재의 세번째 예배당을 완공했습니다. 처음 명칭은 ‘빙계 교회’였으나 1981년 ‘중리 교회’로 개칭했지요. 책에는 1957년 이 교회 의결기구인 당회(堂會)가 조직된 이후 2019년까지 모두 185회 열린 당회의 주요 의결 사항이 실렸습니다. 교역자 청빙과 건물 개보수 등 사항이 적혀있고, ‘재정 관계로 교역자를 모시기 힘들다’(1964) ‘온 교회가 벽돌 찍을 모래 운반 작업을 하기로 하고 9월 25일에 작업하다’(1972)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조용하게 신앙생활을 이어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일제 치하이던 1930년대말 ‘사건’의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권중하 전도사가 일제 경찰의 고문 후유증으로 순교한 것이지요. 당시 의성의 개신교계는 전국적 주목을 받았습니다. 일명 ‘농우회(農友會)’ 사건이지요. 평양 장로회신학교 출신 목회자들이 중심이 된 농촌계몽운동 단체 ‘농우회’를 일제가 탄압하며 의성경찰서는 의성교회 정일영 목사와 오진문 장로뿐 아니라 대구의 유재기 목사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담임하던 주기철 목사까지 잡아들였습니다. 그 무렵에 권중하 전도사는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지만 후유증으로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권 전도사는 개인적 신상 서류나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습니다. 묘소와 유족의 존재도 확인할 수 없었고요. ‘100년사’의 2편(2부)는 ‘의성지방 초기 기독교사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입니다. 대구 달서교회 당회장이며 전(前) 총회역사위원장인 박창식 목사님이 집필했지요. 이 논문을 읽고 있으면 의성 지방에 어떻게 처음 복음이 전파돼 지금에 이르게 됐는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구전으로 전해지던 불확실한 내용도 꼼꼼히 따져서 기술한 덕분에 의성 지방의 교회 족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논문 역시 고관규 담임목사님이 의성지방 초기 기독교사 연구의 권위자인 박창식 목사님께 부탁해 수록했다고 하네요.
(출처- [김한수의 오마이갓] '전원일기' 연상시키는 시골교회의 100년 역사 : 네이트 뉴스)
<3. 효선교회> 1920- 1930년대 권중하 전도사 시무

효선교회 (출처- 효선 교회 - 디지털의성문화대전)
효선 교회는 1906년 1월 5일 설립되었다. 1921년 1월 춘산면 효선동 380번지에 대지 925㎡를 매입하여 69㎡ 규모로 와가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1925년 9월 5일 당회를 조직하였다. 1941년 일제에 의해 교회가 폐쇄되었고, 헐린 예배당은 경방단(警防團) 회관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1960년 교회가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 측과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 측으로 분리되었다. 2009년 분리된 교회를 다시 합동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교회연혁)
▶1906.1.5. 창립
▶1930. 교회에 사립강습소 운영
▶1930. 교회 헐어서 일본 경방당 회관 지음
▶1960. 교회 분열
▶1966. 현교회당 건립

효선교회도 순교자 권중하 전도사의 행적을 자랑스레 설립 100주년 기념비에 새겨놓았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달리는평신도/'효선교회 1백년의 숨결' 출간한 김영원장로 " (2004.2.7.)>
산골에 뿌리 내리고 민족의 위기를 헤쳐온 교회의 발자취를 통해 많은 것들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박한 고향 교회 이야기가 부평초 같은 도시인에게 뿌리가 있는 신앙을 심어주고, 고향이 있는 나그네의 작은 반려자가 되어주길 소망한다."(김영원 저, '효선교회 100년의 숨결')
목회자나 교회사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문단에 등단한 전문적인 문필가도 아니다. 이력을 따지자면 13대째 농사를 지어온 것이 전부인 김영원장로(효선교회)가 생명의 숨결과 이 땅의 숨결이 가득 담겨있는 교회사, '효선교회 100년의 숨결'(대한기독교서회)을 펴냈다. 이 책은 저자가 출석하는 경안노회 효선교회(김덕용목사 시무) 1백년의 역사를 시대별로 분류해 예화를 곁들여가며, 투박하지만 간결한 문체로 풀어낸 1백80여 쪽 분량의 단편 교회사다. 이 책에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이와 대비해 현재를 견주어보는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복음이 처음 전파되던 당시, 때묻지 않은 신앙의 열정을 가진 교인들의 감흥을 소개하고, 일제 치하에서 항거하던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회상을 통해 곁길로 새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신앙관을 여과없이 꼬집어 낸다. 이런 김 장로의 모습은 풍요롭고 번영했지만 사치와 타락이 공존했던 이스라엘을 향해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라고 외친, 농부 예언자 아모스를 연상케 한다. 저자는 말한다. " 한 사경회에서 공중기도를 해보지 않았던 한 신도가 갑작스런 기도 부탁을 받자 대뜸 '하나님요, 나 같은 것도 집사라고 기도 인도하라 캅니다. 앞으로는 기도 잘할 수 있게 해주이소, 아멘.'이라고 말한 꾸밈없는 기도를 기억한다. 그러나 요즘은 과거와 달리 사람을 의식하는 위축되거나 허식이 섞인 기도병에 걸려있는 이들이 많지 않은가."(68쪽) 또한 사경회 참석을 위해 순례자의 소망을 간직한 채 2백리길도 마다않던 신앙 선조들의 이야기는 편리라는 효율성을 추구하며, 앉은뱅이 교인을 양산하는 교회버스의 문제점으로 이어진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교인들과 그로 인한 순교자들, 장로교단의 분열을 아파하며 반대했던 시골교회의 진실된 모습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면서까지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일부 한국교회에 투영시켜 본다. 그렇다고 탄식 섞인 질타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모스가 그러했듯 미래의 회복을 말하며, 한국교회가 잃었던 첫 사랑의 순결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그의 문체 여기저기서 묻어난다. 그것은 김영원장로의 교회사 집필 동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김 장로는 "산골교회에 목회자가 없어 평신도인 본인이 16년간 예배를 인도하며, 다른 평신도들과 함께 교회를 섬기고 봉사했던 적이 있다"며 "농촌교회의 쇠퇴와 농촌교회의 몰락이 동시에 시작되던 그 시절, 출향민들과 고향에 남아있는 이들 사이에 구심점을 만들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 중반, 동 교회 출신으로 당시 교역자로 부임했던 이성록교수(한국재활복지대학)가 전동타자기를 교회에 기증한 것을 계기로 첫 주보가 만들어졌으며, 한 쪽 귀퉁이에 초창기 교회상을 반영한 '고향 교회 이야기'가 실리며, 끊어지려던 역사는 다시 시작됐다. "고향 교회 이야기가 중간에 다시 끊어진 적이 있지만 예전 글들을 다시 모으고, 5대 째 기독교를 믿어온 선조들의 신앙생활과 덕담을 회고하며, 교회사를 발간했다"는 김 장로는 "책을 통해 훌륭했던 믿음의 선진들에 비해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견주어 반성해 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 장로는 올해 75세다. 이번 발간 전에도 세 권의 책을 출간할 정도의 왕성한 집필활동과 한국의 유기농업 개척자로 불릴만큼 농촌운동을 활발히 펼치며,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불태우는 그를 두고 노익장만을 거론한다면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그는 10년 넘게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최근에는 외출까지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지만 그러면서도 펜을 놓지 못하고, 농민들을 위한 강연회에 수백회에 걸쳐 강사로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후배 신앙인들이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김영원장로는 후배 신앙인들에게 말한다. "'신앙생활'은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에요. '생활신앙'이 돼야합니다. 생활이 곧 신앙이 되어야하고, 그것은 교회생할을 기본으로 한단 말이지요." (출처- 한국기독공보)
<4. 금천교회> 1920- 1930년대 권중하 전도사 시무

의성 금천교회
1922년 춘산면 금천동에 살던 안기범이 빙계 교회[현 중리 교회] 전도대 [전도하는 모임]를 통해 복음을 처음 접하였다. 이후 안기범이 전도 활동을 하여 금천동의 신도가 늘어나자 빙계 교회에서 분립하여 금천 교회를 설립하였다. 1926년 안기범 외 다수의 신도가 모은 헌금 50원으로 109㎡의 건물을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금천 교회가 설립되었다. 1946년 8월 165㎡ 규모로 예배당을 신축하였으며, 1950년 12월 28일에는 당회가 조직되었고 초대 장로로 박정환을 장립하였다. 1956년 6월 122㎡ 규모로 예배당을 재건하였고, 1963년 6월에는 사택을 4칸 1동으로 건축하였다. 1993년 5월에는 대지 2,780㎡에 건평 452㎡의 현 예배당과 99㎡ 목사관을 짓고 예배당 헌당식을 열었다. 1997년 5월 18일에는 식당 겸 교육관을 완공하였다. 1997년 8월에는 의성군청의 지원을 받아 체육 시설을 설치하였고, 1999년 8월에는 차고를 건립하였다. 2004년 5월 18일 현 담임 목사인 김현덕이 부임하였으며, 2006년 12월 2일에는 교회 설립 80주년 예배를 보았다. 2009년 해외 선교지에 제2의 금천 교회를 설립할 것과 이를 위하여 헌금을 조성하기로 한 뒤, 2012년 4월 5일 인도 콜카타 스바스그람에 금천 미션 스쿨을 설립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5. 산운교회> 1920- 1930년대 권중하 전도사 시무

산운교회 (출처- [의성군] 산운교회, 100년 교회 순례(17.. : 네이버블로그 )
산운교회는 1909년에 설립된 교회입니다. 산운교회가 설립된 지역은 신라 벌휴왕 때에 군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는 소국인 조문국이었습니다. 해발 531m의 금성산을 중심으로 반경 20km 안에는 1900년에 설립된 비봉교회를 비롯하여 설립된 역사가 100년이 넘는 20여 개의 교회가 산재해 있습니다. 산운교회에서 의성군에서 최초로 설립된 비봉교회까지는 11km이고, 금성면 소재지에 설립된 탑리교회까지는 3.1km입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철에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던 금성산 남쪽에는 조문국의 지배자 묘로 추정되는 거대한 고분군이 있으며, 그 옆에는 문익점 선생의 손자가 의성 현감으로 재직할 때 면화를 파종하였던 땅에 ‘문익점선생 면작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제오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73호인 공룡발자국화석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공룡발자국화석입니다. 금성면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던 이노정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 복음을 영접한 교인들은 1909년 의성군 금성면 수정동에 초가 3칸 규모의 예배당을 마련하고 예배를 드렸으며 1923년에는 산운동에 28평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산운리 출신인 이성재 조사는 1915년에 산운교회에서 집사, 1917년에는 영수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1921년에 조사로 임명을 받은 그는 김천지역의 감주교회, 파천교회, 유성교회, 대덕제일교회 등에서 사역을 감당하였으며 1924년부터는 달성지방의 여러 교회를 섬겼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순교자 권중하 전도사가 산운교회를 비롯하여 이웃에 있는 효선교회, 중리교회, 춘산교회, 금천교회, 현리교회 등을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산운교회는 1964년에는 교회를 수정리로 이전하여 40여 평 규모의 토담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2004년 2월 10일에는 교육관을 건축하였습니다. 현 예배당은 우동욱 집사가 헌납한 110평의 땅에 건축한 예배당입니다.
[출처] [의성군] 산운교회, 100년 교회 순례(171)|작성자 100년 교회연구소장
<6. 춘산교회> 1937- 1939년대 권중하 전도사 시무

의성 춘산교회 (출처- [의성군] 춘산교회, 100년 교회 성지순례(.. : 네이버블로그)
1920년 10월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현리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정대환, 박태종, 오재환 등 세 사람이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오재환 댁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옥정교회의 시작입니다. 1974년에 교회 이름을 옥정교회에서 춘산교회로 바꾸었습니다. 1937년에서 1939년 사이에, 순교자 권중하 전도사가 시무한 교회로서 2019년 한국기독교 순교사적지 제4호로 지정받았습니다. 현 예배당은 2000년에 건축한 것입니다.
[출처] [의성군] 춘산교회, 100년 교회 성지순례(29)|작성자 100년 교회연구소장
<7. 현리교회> 1920- 1930년대 권중하 전도사 시무

현리교회 (출처- 현리 교회 - 디지털의성문화대전)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현리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 교회. 현리 교회는 산운 교회에 다니던 박윤섭, 신병식, 윤인원 등의 신도가 1919년 현재 현리 교회의 위치에 초가 1동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정하면서 시작되었다. 1919년 10월 1일 현리 교회가 설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초대 영수(領袖) 윤인원이 독립 운동에 가담한 일로 탄압을 받아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뒤 주재소에서 교회의 종을 빼앗고, 예배당 건물을 철거하려하자 신도들이 저항하며 스스로 예배당을 철거하여 해방 이후까지 교회가 폐쇄되었다. 해방 후 신도들이 교회의 최초 설립지에 예배당을 재건하면서 교회가 다시 열렸다. 현 예배당은 미국 헤브론 교회의 선교 헌금으로 2000년 11월 20일 완공하였으며, 2007년 12월 1일 헌당 예배를 보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출처-주일(권중하전도사님의 자취를 따라)_현리교회방문)
<8. 옛 의성경찰서, 현 의성상설전시관>

옛 의성경찰서

현재 의성상설전시관으로 사용 중인 이 한옥은 주기철 목사와 권중하 전도사 등 순교자들의 숨결이 서려있는 옛 의성경찰서 건물이다. (출처 : 주기철 목사 수난 당한 의성경찰서가 애국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 사회일반 < 사회 < 기사본문 - 컵뉴스 )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와 독립운동에 앞장선 애국지사들이 수난을 당한 역사적 현장인 경북 의성군 ‘옛 의성경찰서’. 이 곳이 당시 일제에 의해 억울하게 수감되어 참혹한 고문과 탄압을 받은 주기철 목사와 기독인들을 추모하고 선양하는 애국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로 손꼽히는 주기철 목사(1897.11.25.~1944.04.21)가 일제에 의해 평양에서 끌려와 수난을 당한 장소인 옛 의성경찰서가 기념관으로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4월 21일 주기철 목사의 순교 79주기를 앞두고 ‘일제강점기의성경찰서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사업회(회장 신칠성 장로)와 경중노회주기철목사수난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 하태봉 목사), 의성주기철수난관사업후원회(회장 오정호 목사)가 4월5일 ‘옛 의성경찰서’에서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 착공예배를 갖는다. 출처 : 컵뉴스(http://www.cupnews.kr)

현재 의성상설전시관으로 사용 중인 이 한옥은 주기철 목사와 권중하 전도사 등 순교자들의 숨결이 서려있는 옛 의성경찰서 건물이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낡은 한옥건물은 굳게 닫혀있었다.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자물쇠를 단단히 채운 문을 열어젖힐 방도가 없었다. ‘의성상설전시관’이라는 간판을 단 이 건물의 정체를, 그 앞을 매일처럼 지나치는 읍내 주민들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80년 전 이 건물 안팎의 풍경은 지금처럼 한가롭지도, 조용하지도 않았다. 수시로 고함과 비명이 난무했고, 공포가 자아내는 살벌한 공기가 감돌았다. 악명 높았던 의성경찰서, 바로 이 건물의 옛 이름이다. 경북 의성은 역사적으로 충절의 고장이었다. 예로부터 국난이 벌어질 때마다 의성의 인물들은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구했고, 어느 누구보다 강직하며 기개를 굽히지 아니한다는 평판을 들었다. 유난히 복음화율이 높았던 의성의 기독교인들 역시 나라사랑의 마음은 다르지 않았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그들은 기미년 만세운동의 선봉에 서며 기꺼이 희생과 수모를 감수했다. 신사참배 거부, 농민운동 교육사업 등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도 앞장섰다. 이런 지역적 분위기 탓에 유독 의성경찰서의 기독인과 애국지사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극심했다. 특히 1938년 5월 의성교회를 중심으로 벌어진 일명 ‘농우회’ 사건은 그 절정을 보여주었다. 농촌계몽운동을 구실로 조직한 농우회를 통해 일제에 반항하는 행위를 일삼는다는 죄목을 쓰고 의성교회 정일영 목사와 오진문 장로를 비롯한 수많은 중직자들과 청년회장 이재인 등 젊은이들이 끌려와서는 모진 고초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마치 한국교회 전체를 말살하겠다고 작심한 듯이 일제는 대구의 유재기 목사 심지어 멀리 평양에서 사역하는 주기철 목사까지 이 사건과 연루시켜 검속했다. 주기철 목사에게는 생애 두 번째 검속이었다. 그 무렵 경찰서 안의 풍경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당시 고문의 종류는 검도용 죽도로 구타하기, 구둣발로 차기, 고춧가루물 먹이기, 인두로 지지기와 소위 비행기 태우기 등으로 아프고 숨이 답답하고 전신이 오그라지고 찢어지는 듯한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경찰서 주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밤마다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질려 집을 팔고 이사하거나, 친척집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채 권중하 전도사는 목숨을 잃었고, 후유증으로 실성한 목회자도 있었다. 지옥과도 같았던 7개월 동안의 옥살이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간 주기철 목사는 부임 직후 산정현교회 강단에 올라 한국교회사 뿐 아니라 세계 순교역사에 길이 남을 메시지를 남긴다. 바로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설교이다. 오늘의 여정에 동행한 총회역사위원회 역사관건립 소위원장이자 대구경북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인 박창식 목사는 ‘5종목의 나의 기원’이야말로 주기철 목사의 순교신앙을 대변하는 설교로 평가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박 목사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그렇다면 의성경찰서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신앙의 실질적 산실이 되는 것”이라면서 “주 목사님의 순교와 직접 연관된 유일한 사적지를 잘 보존하고 활용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고 강조한다. 마침 경중노회(노회장:하태봉 목사)가 올 봄 정기회에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 일제강점기 의성경찰서 수난 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신칠성 장로)를 조직하여 이 일에 발 벗고 나섰다. 위원회는 각종 자료수집과 증언자 인터뷰 등을 통해 옛 의성경찰서 터를 찾아내며, 순교자들과 의성경찰서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지난달에는 ‘일제강점기 의성경찰서, 농우회 사건과 주기철 목사 수난’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며 자료집을 발간했고, 이를 근거로 의성경찰서를 순교사적지 혹은 역사사적지로 지정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나섰다. 위원회 실무를 맡고 있는 추성환 목사(철파교회)는 “의성경찰서가 사적지로 지정될 경우, 지역교회들의 풍성한 순교유산들과 연계해 주기철 목사님은 물론 한국교회 순교자들의 고난과 승리를 상징하는 교육현장으로 훌륭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의성 일대에는 농우회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의성교회(남세환 목사)를 비롯해, 권중하 전도사가 순교 당시 사역했던 여러 교회들, 6·25 당시 순교한 엄주선 강도사의 순교터와 순교테마공원,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의성지역 삼일만세운동의 시발점에 세워진 기념탑과 기념공원, 만세운동 발상지인 쌍계교회(서보율 목사) 등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명소들이 산재해 있다. 전남 영광과 여수, 충남 강경과 경남 창원처럼 경북지역에도 과연 기독교의 순교성지가 탄생할 수 있을까. 총회와 전국교회가 의성을 주목하며, 힘찬 응원을 보내야 할 이유는 충분하고 분명하다.
“권중하 전도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포악정치 하에 의성군 춘산면 옥정, 금천, 빙계, 효선교회 등을 맡아 교역하고 있었다. 1938년경 신사참배거부 문제로 의성교회 정일영 목사와 같은 시기에 의성경찰서에 검거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하여 거의 죽게 되자, 1939년 일본경찰은 권중하 전도사를 출감시켰으나 혹독한 고문의 여독을 회복하지 못하고 얼마 후 상주 함창에서 순교하였다.” <의성교회 100년사> 94페이지에 게재된 이 짧은 기록은 또 한 명의 순교자를 발굴하는 단초 중 하나가 됐다. 바로 경신노회(노회장:임창대 목사)의 헌의로 올 가을 총회에서 정식 순교자 명부 등재를 앞둔 권중하(혹은 권중화) 전도사의 이야기이다. 의성경찰서와 관련한 순교자는 주기철 목사보다 앞선 1939년에 이미 발생하였다. 당시 의성의 중리(빙계) 등에서 순회 목회하던 권중하 전도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의성경찰서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순교하였던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 17일에 또 한 분의 순교자가 의성에서 발생하였다. 의성 다인면 출신으로 청송 화목교회를 목회하던 엄주선 강도사는 새벽에 홀로 기도하던 중에 갑자기 공산군 패잔병들이 들이닥쳐 교회와 사택을 공격하는 중에 납치되었다. 그는 의성 춘산의 골짜기로 끌려가 공산군 10사단장으로부터 믿음을 버릴 것을 회유 받았지만 거절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총검에 열아홉 군데나 찔려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조용하게만 보였던 농촌지역이 이처럼 순교의 신앙으로 뜨거운 곳인지 미처 몰랐다. 그동안 우리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의성을 돌아보며 절감하였다. 비록 늦은 감이 있으나 총회역사위원회의 사명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새삼 생각하게 하는 곳이 바로 의성이었다. 박창식 목사(대구 달서교회)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9. 주기철 목사 의성 수난 기념관, 권중하 전도사 수난 장소>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 내부 전시 모습.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사업회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 내부 전시 모습.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사업회

옥상 포토존 [출처] - 국민일보

주 목사가 일경에 고초를 겪는 모습을 형상화한 모형.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 설립을 주도한 주요 인사들.
출처 : 크리스챤월드리뷰(https://www.christianwr.com)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신앙과 순교 정신을 기리는 ‘주기철목사 수난기념관’이 지난 2025. 5.19일 경북 의성군 옛 의성경찰서 터에 개관했다. 이번 개관은 한국기독교 선교 140주년과 광복 80주년을 맞은 해에 이뤄졌으며, 주기철 목사의 순교 81주년을 기리는 역사적인 의미를 더했다. 총 사업비 38억6100만원(국비 및 군비 포함)이 투입된 이 사업은 2016년부터 약 10년에 걸쳐 추진됐으며,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사업회(회장 오정호 목사)가 주도해 진행했다. 개관식은 감사예배와 수난기념관 탐방 순서로 이어졌다. 이날 행사에는 오정호 목사(사업회 회장), 김관선 목사(이사장), 정성구 박사, 박성규 총장, 김규 목사, 신칠성 장로, 주기철 목사의 손녀 주미경 사모와 남편 김정훈 목사, 손자 주현 박사, 김주수 의성군수, 최훈식 의성군의회 의장 등 교계와 정계, 지역 인사 30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관은 의성경찰서 본관으로 사용됐던 한옥 건물을 복원하고, 일제강점기 경찰서 부속 건물, 3층 신축 건물 등을 포함해 구성됐다. 또한 유품 전시, 신사참배 반대 운동 영상 자료, 농우회 활동 키오스크, 기독 미술작품, 의성 조망이 가능한 옥상 기도실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졌다. 1938년 주기철 목사는 평양에서 1차 검속된 데 이어 1938년 8월 ‘의성농우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경북 의성경찰서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이곳에서 수개월 동안 육체적 고통을 견디며 기도했고 이후 평양으로 돌아가 첫 주일에 전한 설교 ‘5종목의 나의 기도’는 그의 순교적 신앙을 드러내는 대표 설교로 전해진다. 그가 기도했던 다섯 가지 제목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소서’, ‘지루한 고난을 견디게 하소서’,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맡깁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였다. 이 기도는 이후 그의 유언과도 같은 신앙고백으로 한국교회의 순교정신의 상징이 됐다. 한편, 이번 기념사업은 2016년 ‘주기철목사 의성경찰서 수난기념추진위원회’가 발족되며 시작됐다. 2017년에는 예장합동총회로부터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 제4호’로 지정받아 본격 추진됐으며, 이후 의성군과 사업회는 부지매입, 국비 예산 확보, 설계 및 착공 등의 절차를 밟아 2023년 공사를 시작, 2025년 완공에 이르렀다. 사업회 사무총장 추성환 목사는 "의성은 주기철 목사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고문을 당했던 수난의 장소"라며 "이 기념관을 통해 한국교회가 순교신앙을 기억하고 계승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출처 : 자유일보(https://www.jay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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