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주선 강도사(1919- 1951. 2 순교)
일제수탈에 못견디어 만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심양에 정착 보통학교 (봉천학교) 졸업 를 마치고 농사를 지었다. 이같이 신사참배를 피해 더 깊은 농촌으로 들어가서 사는 그의 삶은 우울할 수 밖에 없었다. 해방 후 모택동 공산정권의 팔로군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곡식과 돈될만한 것은 무조건 강탈했다. 그동안 피땀흘려 일군 넓은 농토와 집을 포기하고 빈손으로 해방 2년만에 고국에 돌아오고 쌍둥이 동생만 남았다. 봉천(현 심양)에서 아버지를 따라 서탑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복음을 위한 소명에 불타 총신에 입학 졸업을 1년 앞두고 YMCA총무 이원우목사님을 만나 의성군 사곡면 양지동에 양지교회(신학교 재학중)에 교역자로 31세에 첫 목회를 시작한지 6개월만에 1948년 12월에 화목교회 초청을 받아 두번째 목회를 하였다. 1949년 1월에 장로회총회신학교를 졸업(43회)하고 3월에 강도사 인허를 받고 2년이 못되어 6.25가 발발했다. 9.28수복이 되자 서울과 대구사이에 포위된 인민군들이 낮에는 산에 들어가 숨고 밤에는 민가에 가축과 곡식을 약탈하고 하는 와중에 여러명의 순교자가 생기게 된 것이다 . 1950년 9월 어느날 새벽 교회에서 기도하는 중 9.28 UN군에 의해 서울이 수복되자 후퇴하는 10사단 인민군이 군관민에 밀리다가 보복으로 화목교회를 중심하여 갑자기 20분간 기총사격을 가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아내와 간난아이는 놀라서 숨을 거두고 엄강도사는 구산동에 사는 신춘삼씨와 체포되어 의성군 춘산면 옥정동에 본부를 둔 패잔병들 집결지에 끌려가 엄동설한에 몇날을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인민군 10사단장에게 호출되어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변절의 뜻이 없음을 판단한 사단장은 황혼이 짙어갈 무렵 엄강도사를 끌고 옥정동(바랑골)으로 간 후 소식이 끊겼으니 이것이 마직막으로 가는 순교자의 길이 되었다. 함께 납치되었던 정정수 김원갑, 권창규씨가 증언한 내용이다. 군경 합동으로 인민군 패잔병을 소탕했다는 소식을 들은 1개월 후 춘산면 소칭 바랑골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신을 뒤지다가 엄전도사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하의는 다 찟겨진 상태였으나 얼굴 모습은 평화로운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와 가슴에는 열아흡군데 날카로운 창검자국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엄전도사는 순교 직전에도 무례한 인민군들의 불쌍한 영혼을 위하여 나라와 민족과 섬기는 화목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것이다. (출처- kcm.kr/dic_view.php?nid=40567)

엄주선 강도사(1919- 1951. 2 순교)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테마공원 (청송군 화목리)>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테마공원 (청송군 화목리) (출처- 화목교회 )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테마공원 (출처- 엄주선강도사 순교 테마공원 - 디지털청송문화대전)

총회지정 한국기독교사적(10호)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지정식 및 테마공원 준공감사예배
일시: 2012년 5월 9일(수) 오후2시30분
장소: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의성 춘산) 순교테마공원(청송 화목)
주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역사위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화목교회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지정식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테마공원 (청송군 화목리) (출처- 엄주선강도사 순교 테마공원 - 디지털청송문화대전)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화목리에 조성된 엄주선 강도사의 순교를 기념하여 세운 공원.
[개설] 엄주선강도사 순교 테마공원은 2012년 청송군 현서면 화목리에 조성된 엄주선(嚴柱善) 강도사(講道師)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한 공원이다.
[건립 경위] 엄주선 강도사는 1919년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태어났다. 1935년 기독교 신앙을 처음 가지게 되었고,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한 후 목사 고시에 합격하였다. 1950년 5월에 청송 화목교회에 부임하였고, 6.25전쟁 중이던 1951년, 새벽기도 중에 난입한 인민군에게 나포되었다. 인민군은 엄주선 강도사에게 “신앙을 버리라”고 회유하였지만, 그는 회유를 거절하고 오히려 복음을 전달하다 총검과 죽창에 열아홉 군데 찔려 순교하였다. 엄주선 강도사가 순교한 곳은 원래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옥정리였다. 그러나 시신은 동역자들에 의해 청송군 현서면 화목리의 엄주선강도사 순교 테마공원 자리에 묻혔다. 이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시신이 묻힌 화목리 240번지 일대를 한국기독교사적 제10-1호로 지정하고, 경상북도와 청송군의 지원을 받아 2012년 엄주선강도사 순교 테마공원을 조성하였다.
[변천] 엄주선강도사 순교 테마공원은 2012년 5월 9일에 개원 및 사적 지정식을 가졌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엄주선 강도사 테마공원 (출처- 청송의 역사와 영웅을 만나다 현서면 동네 산책 : 네이버 블로그 )

위치 : 경북 청송군 현서면 화목리 240
운영 시간 : 24시간 연중무휴 / 입장료 없음
부대시설 : 무료 주차장, 운동기구, 화장실, 정자, 벤치 등
주변 여행지 : 청송 주왕산 국립공원, 청송 얼음골, 청송사과축제, 화목교회, 화목장터
(출처- 청송의 숨은 보석 순교자 엄주선 테마공원 탐방기 : 네이버 블로그)

엄주선 강도사 테마공원 (출처- 청송의 숨은 보석 순교자 엄주선 테마공원 탐방기 : 네이버 블로그)

엄주선 강도사 테마공원 (출처- 청송의 숨은 보석 순교자 엄주선 테마공원 탐방기 : 네이버 블로그)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출처-자료실 > 노회 포토앨범 >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지정식 및 테마공원 준공감사예배)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출처- 청송의 숨은 보석 순교자 엄주선 테마공원 탐방기 : 네이버 블로그)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출처- 청송의 숨은 보석 순교자 엄주선 테마공원 탐방기 : 네이버 블로그)

순교기념비
(출처- 자료실 > 노회 포토앨범 >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지정식 및 테마공원 준공감사예배 )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출처- 자료실 > 노회 포토앨범 >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지정식 및 테마공원 준공감사예배 )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출처-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 네이버 블로그)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출처-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 네이버 블로그)

엄주선 강도사 테마공원 (출처- 청송의 역사와 영웅을 만나다 현서면 동네 산책 : 네이버 블로그 )
<엄주선 순교자 이야기>

(출처- 29세, 복음을 위해 죽다 – 엄주선 강.. : 네이버블로그)

(출처- 29세, 복음을 위해 죽다 – 엄주선 강.. : 네이버블로그)

(출처- 29세, 복음을 위해 죽다 – 엄주선 강.. : 네이버블로그)

(출처- 29세, 복음을 위해 죽다 – 엄주선 강.. : 네이버블로그)
<1. 예천 상락교회> 어린시절 신앙생활

예천 상락교회(1906년) (출처- [예천군] 상락교회, 100년 교회 성지순례(26) : 네이버 블로그
상락교회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는 2003년에 건축한 예배당이 있고, 좌측에는 본교회 출신 3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순교비가 있습니다. 예배당 뒤쪽에 마련된 역사박물관에는 3명의 교회 설립자 가계도를 비롯하여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상락마을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영접한 사람은 양조환입니다. 그는 맏아들 양재건의 장인인 의성군 단밀면 삼분교회의 오의근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양조환은 김낙준, 전병원과 함께 삼분교회에 출석하다가 1906년 10월 15일에 상락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상락교회에 복음이 전해진 통로를 살펴보겠습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1893년에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한 후 낙동강 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제일 먼저 김천 송천교회(1901년)가 설립되었고, 이어 구미 괴평교회(1901년), 군위 봉황교회(1901년), 의성 쌍계교회(1903년), 의성 삼분교회(1905년)를 거쳐 1906년에 예천 상락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상락교회는 1906년에 설립된 이후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중에도 한 주일도 빠짐없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상락마을에는 좌익세력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1923년 7월에는 목조 양철지붕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남자들이 출입하는 왼쪽 출입문 위에는 외교(外敎), 여자들이 출입하는 오른쪽 출입문 위에는 내교(內敎)라고 써 놓았습니다. 외교문과 내교문 중간 벽에는 큰 글씨로 성전(聖殿)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상락교회 설립자인 양조환은 교회 부설로 사립경세학교를 설립하여 자녀들에게 성경과 일본어, 산술, 체조 등을 가르쳤습니다. 학교는 인근에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20년 동안 운영되었습니다.
■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상락교회 지도자들은 인근 교회와 함께 마전장날을 기해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모의했습니다. 양재건 전도사가 예비검속으로 구속당하는 바람에 만세운동은 불발되었고 양재건 전도사는 1개월간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 상락교회 지도자들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강력하게 거부했습니다. 1944년 성탄절에 예배당에 십자가를 수놓은 기를 달아놓은 것을 본 예천경찰서 형사가 일본 천황을 모독했다고 김낙진 장로와 양재병 장로를 1달 넘게 경찰서에 투옥했습니다. 양재병 장로는 해방이 되자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찾아온 일본인 형사주임을 용서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데 보태라고 금일봉을 주었습니다.
[3명의 순교자]
■ 엄주선 강도사는 의성군 다인면 출신으로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상락교회에 출석했습니다. 1949년 1월 신학교를 졸업한 후 6.25전쟁 때는 청송군 화목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북한군에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 양재연 장로는 평양의 숭실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계성중학교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1930년경에 평양으로 이사하여 산정현교회 장로로 시무하였습니다. 평양에서 큰 목장을 경영하던 그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심한 박해를 받았으며 해방 후에는 김일성 공산정권에 반대하다 6.25 전쟁 중에 평양에서 공산군에 의해 순교당했습니다.
■ 양혜석은 안동농림학교와 숭실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동경에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군산에서 작은 목장을 경영하던 그는 친한 친구가 독립운동가라고 밀고하는 바람에 안변경찰서에 구속되었습니다.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산송장이 되어 출옥한 후 폐병으로 순교를 했습니다.
[출처] [예천군] 상락교회, 100년 교회 성지순례(26)|작성자 100년 교회연구소장

상락교회 (출처- 상락교회TV - YouTube)
<2. 심양 서탑교회> 심양에서 청년 시절 신앙생활

심양 서탑교회 신관(좌) 구관(우) (출처- 사진 - 심양 서탑교회)
서탑교회(西塔教会)는 주로 조선족들을 위한 개신교 교회이다.중국 요녕성 심양 화평구(辽宁省 沈阳 和平区) 에 위치해있다. 서탑교회는 1913년 5월 봉천시(현재의 심양) 대화구 대화정 15의 3번지에서 20여명의 신도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 평북 의주군교회 여전도회에서 김덕선 목사를 파송하고, 의산교회에서 김병룡, 조영승, 양분식, 백영엽, 리철락 목사를 파송하였는데, 백영엽 목사가 지금의 구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48년 11월부터는 남은 신도 20여명을 김석윤 장로의 인도로 겨우 교회의 명맥을 이어갔으나, 1951년 봄에는 공산당의 종교탄압과 종교말살정책으로 인해 서탑교회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1980년 9월에 이르기까지 약 30년간은 서탑교회의 어두운 시련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동안 성결교회 이성봉 목사가 시무하던 신도 50여명과 중국 침례교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어렵게 교회의 명맥을 유지해오던 중 1957년 7월, 당시 이 교회의 여집사였던 오애은 전도사가 신학원(東北神學院)을 졸업한 후 조선족 신자들을 모아 따로 예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오애은 전도사가 1981년 봄 목사안수를 받고 오늘까지 계속 시무하고 있던 중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따로 올리던 예배 마저 금지당하게 되고, 교역자들은 모두 검거되어 공장의 강제노동에 동원된다. 1979년 서탑신앙공동체의 예배가 금지된 지 13년, 교회를 빼앗긴 지 30년만에 교회를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고, 1980년 9월에는 교회를 떠나게 되었던 약 50여명의 신자들이 하나둘 서탑교회로 찾아 돌아오게 되었다. 헌당예배를 올리던 1993년부터는 1,000여명의 교세를 급성장하기에 이르러 2005년에는 심양을 비롯해 요녕성 안에 13개 교회가 개척되었고 1,400여명의 교세로 성장하였다. 현재 대부분의 신도가 조선족이다.
(출처- 서탑교회 - 융복합콘텐츠연구센터)

심양 서탑교회 신관 (출처- 서탑교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심양 서탑교회 구관 (출처- 서탑교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탑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 집회
심양시 기독교양회의 초청으로 서탑교회에서 부흥집회가 실시되었다. 올해로 100년을 맞이하는 서탑교회는 최초 조선족교회로 시작하여 현재 1200명의 성도가 매주일 2회에 걸쳐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점차 늘어나는 한족 성도들로 인해 97년부터 시작한 중국어예배부도 2000명이 넘어선다. 13일부터 3일간 시행된 특별부흥집회의 강사로 초청된 정필도목사(상임고문, 수영로교회원로목사)는 복도와 문밖까지 가득히 운집한 성도들을 향해 행복한 그리스도인,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성도가 되기 위하여 필사적인 기도와 간절함으로 성령의 은혜를 구할 것을 당부하였다.
<3. 의성 양지제일교회, 1960.3.20. 양지교회에서 분립> 신학교 재학중(1948년 경) 엄주선 강도사 시무

양지제일교회 (출처- 양지 제일 교회 - 디지털의성문화대전)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양지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 교회.
[개설] 양지 제일 교회는 1905년 최성칠로부터 전도를 받은 김순옥이 그의 부인 정옥련과 아들 김덕수, 김노근과 함께 3년 여 동안 의성군 옥산면 실업리에 있는 실업 교회를 다니다가 현재 양지 제일 교회가 위치한 사곡면 양지리로 분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양지 교회로 시작되었다.
[변천] 1908년 실업 교회에서 양지 교회로 분립한 이후 교인의 수가 40명이 되어 1911년 2월 7일 정식으로 교회 등록을 하였고, 1935년 1월에 경북 노회의 승인으로 당회가 조직되었다. 1959년 자유주의 신학 경향을 띤 세계 교회 협의회(WCC) 가입을 두고 교인들의 의견이 양분되어, 1960년 3월 20일 양지 교회로부터 분립하여 양지 제일 교회로 교회명을 바꾸었다. 2012년 1월 현 담임 목사인 박일서가 부임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4. 청송 화목교회, 1904년> 1948.12- 1950.9 엄주선 강도사 시무

화목교회 (출처- 화목교회 - 디지털청송문화대전)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구산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교회.
[설립 목적] 청송군 현서면 지역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1904년에 설립되었다.
[변천] 화목교회는 1904년 11월 23일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에 세워진 교회인데, 청송 지역에서는 최초의 교회이다. 화목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1920년대로 전해진다. 가장 오래된 건물로는 1972년에 지어진 예배당이 있다. 6.25전쟁 때 순교한 엄주선 강도사가 시무한 교회이다. 1919년에 이 교회 김기수 조사가 화목 지역 만세운동[3월 26일]을 주도하다가 안동형무소에 복역한 재판 기록이 남아 있으며,김기수 조사는 출옥 후 사망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45년 조성대 목사와 박치환 장로, 김점식 집사 등은 신사참배와 징병을 위한 부역에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렀으며,그에 앞선 1938년에는 ‘설교 원고’의 사전 검열에 반대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던 사실도 교회의 역사 [당회록]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화목교회는 마을에 아직 학교가 없을 때 국민학교[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해 교육으로 지역사회를 섬기는 모범을 보였다. 즉, 담임 임재양 목사와 박효일 장로는 마을에 국민학교를 설립하기 전인 1919년에 영신여자학원을 설립해 운영[국민학교 설립 후 5년 만에 폐교]했으며, 중학교가 없던 시절에는 화목학원을 설립해 중등 교육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매주마다 주일예배를 실시하는 한편, 캄보디아 등지의 선교 활동 그리고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사랑 나눔의 실천 행사를 펼치고 있다. 2012년에는 엄주선 강도사 순교 테마공원의 건립 사업을 추진하였다.
[현황] 화목교회는 1990년 기준 120여 명의 교인이 활동했으며, 2016년 4월 기준으로 교인 수는 120여 명이다. 현재 박경훈 목사가 담임으로 있다. 교회 주변에는 엄주선 강도사의 묘소가 있는 엄주선 강도사 순교 테마공원이 있다. [의의와 평가] 청송 지역 최초의 교회인 화목교회는 엄주선 강도사가 순교한 교회이기도 하다. 청송 지역 기독교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교회연혁)
1904.11.23 황재술, 김상갑씨가 주동되어 덕계동에서 덕계동교회가 시작되다. 그 후 의성군 옥산면 실업교회 강원백, 조치일 영수 등이 이래하여 교회당을 건축하다. 그 후 교회당이 소실되어 구산동에 교회를 옮기면서 구산동교회로 명의를 변경하다.
1917. 여자 영신학원을 설립하다.
1918. 현 부지에 예배당 건축 기공하다.
1919. 예배당 준공하여 수차례 개축하다
1945.02.15 박치환장로 장립
1948.12.14 구산동교회에서 화목교회로 명의 를 변경하다. (경북노회 제 45회)
1949.04.04 양재관장로 장립하다.
1951.02.17 엄주선강도사 공산군에 납치되어 순교하다.
1952.02.15 김상정장로 장립하다.
1954.11.23 교회창칩 50주년 기념행사 성대히 거행하다.
1955.04.10 김상진장로 취임하다.
1958.09.16~1958.09.18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중노회 개최하다.
1960.04. 교단분열로 화목제일교회 분리하다.

화목교회 (출처- 화목교회)

화목교회 (출처- 화목교회)
<5. 화목제일교회, 1960년 화목교회에서 분리> 1948.12- 1950.9 엄주선 강도사 시무

화목제일교회 (1904- 2026년 현재), 청송지역 최초의 교회

청송 화목제일교회의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10호 지정식이 총회역사위원회 주관으로 열리고 있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총회역사위원회(위원장:박창식 목사)는 청송 화목제일교회(김영재 목사)의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10호 지정식을 7월 6일 거행했다. 이날 지정식에는 화목제일교회 성도들과 역사위원 그리고 경중노회 관계자 등이 참석해, 고 엄주선 강도사가 남긴 고귀한 순교사적을 되새기면서 위기의 시대에 더욱 굳건한 신앙을 지켜갈 것을 다짐했다. 역사위원장 박창식 목사 사회로 시작된 감사예배는 위원회 회계 김기현 장로 기도, 부총회장 김종혁 목사 ‘경건한 영적 유산’ 제하의 설교, 경중노회 증경노회장 이정화 목사 축도로 진행됐다. 계속해서 순교사적지 소개와 지정서 증정 등의 순서가 이어졌다. 김종혁 목사는 설교를 통해 “한국교회는 순교의 피 위에서 자란 것”이라면서 “경건한 순교신앙과 복음의 유산이 우리 당대만 아니라 후대에도 바르게 전수되도록 힘쓰자”고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의 조카 엄귀선 권사는 고인이 소장했던 성경주석 사진 일기 등 관련 유물들을 기증하고, 교회에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감사패를 전달했다. 사적지 지정에 큰 도움을 준 김한욱 목사에게도 감사패가 전달됐다. 화목리 출신인 증경부총회장 최수용 장로와 총회서기 김한욱 목사, 총회총무 박용규 목사, 증경노회장 추성환 목사, 의성 중리교회 고관규 목사 등은 격려사와 축사를 통해 고인의 신앙을 후세에 힘써 전수하는 교회가 되어줄 것을 당부했다. 이날 행사는 위원회 총무 정창호 목사 사회, 청송시찰장 문병관 목사 기도로 진행된 현판제막식으로 마무리됐다. 화목제일교회는 1904년 11월 23일 황재술 김상갑씨를 중심으로 덕계동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출범했다. 이후 구산동교회 화목교회 시절을 거치다가, 에큐메니컬 파동을 겪으면서 화목제일교회로 새 출발했다. 특히 6·25전쟁 중인 1951년 2월 17일 새벽기도회 후에 공산군이 교회에 난입하여 기관총을 난사하고 당시 교회를 담임하던 엄주선 강도사를 붙잡아가는 일이 발생했다. 엄 강도사는 이후 공산군에 피살된 시신으로 발견되며,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화목제일교회는 이 같은 엄 강도사의 순교신앙을 계승하는 한편, 보수신앙을 견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20주년을 맞이하며 화목제일교회는 <기억하라>는 제목으로 역사집을 발간하고, 역사관을 설치하며, 순교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과거의 사적을 되새기는데 힘쓰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화목제일교회는 제108회 총회로부터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로 지정받았다. 김영재 목사는 “복음의 격전지에 화목제일교회를 세우고 120년 동안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면서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님의 정신을 이어 받아 앞으로도 충성하는 공동체로 달려가겠다”고 다짐했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추가)
화목제일교회가 등장한 데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이 총회의 분열의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에큐메니컬운동을 반대하던 여러 성도들이 1960년 4월 17일 화목교회에서 나와 천막을 치며 예배를 시작했고, 이 모임이 차츰 자라 정식 교회로 성장했다. 이후 김두환 전도사를 시작으로 여러 교역자들이 화목제일교회 강단을 이어 지키면서, 화목제일교회는 차츰 성장의 궤도에 올랐다. 그 중에는 나중에 제94회 총회장을 지낸 서정배 목사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2000년에 부임한 신문종 목사의 경우는 18년 넘게 장기목회를 하며 교회의 안정기를 이끌었다. 역대 교역자들과 수많은 성도들의 헌신 속에서 기도운동 선교운동 전도운동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열매들이 나타났다. 천막예배당은 초가예배당과 벽돌예배당 시절을 거쳐 지금의 웅장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왔다. 또한 최용주 목사가 시무하던 당시 전도표어로 제정한 ‘나도 한 사람, 당신도 한 사람’이라는 구호는 지금까지도 새 생명을 얻고자하는 화목제일교회의 뜨거운 열정을 유효하게 담아낸다. 특히 주일학교의 경우는 많은 학생들이 몰려와 예배당 안에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의 부흥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 현 총회 서기 김한욱 목사 등 여러 목회자들과 필리핀에서 활동하는 신요한 선교사 등 신실한 복음사역자들도 배출됐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천막교회 시절의 화목제일교회 성도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 순교자 한사연 목사 (감리교 동부연회 순교자) (0) | 2026.01.08 |
|---|---|
| 순교자 서기훈 목사 (철원 장흥교회, 기감 동부연회 순교자) (1) | 2026.01.07 |
| 순교자 권중하 전도사 (의성지역) (0) | 2026.01.06 |
| 순교자 주기철 목사 (1) | 2026.01.06 |
| 순교자 손양원 목사 (0) | 2026.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