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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교회 (니꼴, 트리니티, 베드로 바울, 구세주 변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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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꼴 대성당

 

니꼴 대성당 내부

 

구세주 변용 대성당 

 

베드로 바울 성당 

 

베드로 바울 성당  

 

베드로 바울 성당 내부

 

베드로 바울 성당의 격벽

 

베드로 바울 성당의 3관 장식

 

블라지미르 대성당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수도원

 

이스마엘 대성당

 

체쓰마 교회

 

트리니티 성당, 상트-페데르스부르크

 

트리니티 성당 화재

 

2006.8. 25일 러시아 상트-페데르스부르크의 19C 문화유산인 트리니티 성당에 화재가 발생, 중앙돔이 무너지고 있다  <저작권자 ⓒ 2006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성당 화재

 

성당 화재

 

러시아 국가문양

 

러시아 정교회 문양

 

정교회(동방 교회)


동방교회, 정교회, 하리스트스 정교회 등 여러 이름으로 알려진 교회들의 총칭. 고대 말기 동로마제국의 교회에서 생겨난 많은 민족교회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 정교회는 고대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등 4개의 총주교 관구(Patriarchatus)에서 갈라져 나온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독자적인 교회조직을 가지며, 부분적으로 서로 교류하고 있다. 정교회가 성립된 순서별로 보면 시리아, 불가리아 (917년), 세르비아(1346년), 러시아(1589년), 그리스(1830년), 루마니아(1925년), 알바니아(1937년)의 순이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에 퍼져있으며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을 신봉하는 콥트교회, 아비시니아교회, 아르메니아교회, 야곱파교회, 남인도의 말라바르교회, 한때 페르시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펴졌던 네스토리우스파[景敎]도 모두 동방 정교회의 이단이다. 이들 교회의 신자는 통틀어 약 3억명 정도다. 정교회는 5∼6세기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을 둘러싸고 동서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 1054년에는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서로 파문하면서 동서교회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서로 그리스도의 참되고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그 뒤 분열의 폭은 더욱 깊어졌다. 동방 정교회의 중핵은 러시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다. 이들 정교회들은 둘 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떨어져 나온 교회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에 시작된 러시아교회는 모스크바 대주교를 독립시켜 총주교로 삼았다(1589년). 1917년 러시아 혁명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교회는 동방정교회의 신학과 전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61년 동방 정교회는 세계교회협희회(W.C.C.)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동방교회의 특징은 신학과 전례에서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농후하며 교회가 각 국민문화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전례와 성서는 일찍부터 각국어로 번역되어 사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민문학이 발흥하였다. 동방 정교회의 성직자는 수도지원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하며, 성직은 사도전승에 따라 주교, 사제, 부제 등을 모두 고대의 성직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성찬의 전례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색이다. 주로 성 크리소스토모(Chrisostomus)의 전례를 사용하지만 1년 중 10번은 성 바실리오 전례를, 한번은 성 야곱전례를 사용한다. 교회생활의 중심은 삼위일체의 예배이고, 여기에 성모와 여러 성인에 대한 공경이 첨가된다.


   ①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 : 그리스 지방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것은 사도 바울로에 의해서다.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속국이었고, 고린토를 비롯한 주요도시에 세워진 교회는 서로 고립된 채로 남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중부 그리스지방이 마케도니아에 통합되었고 지방구로 설정되어 콘스탄티노플의 재치권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 콘스탄티노플 분열(486∼516년) 때 로마교회에서 분리되었고 성화상논쟁(聖畵像論爭, 725∼842년)때에 성화상공경을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054년을 기하여 서방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이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뒤에는 그리스 정교회도 터키인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 오스만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발칸제국은 독립을 얻었고, 그리스의 독립전쟁(1821∼1827년)에서 승리하여 독립하였다.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1833년), 총주교도 결국 승인을 하였다(1850년). 1852년 그리스 국회는 그리스 정교회를 구교로 정했고, 아테네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주교회의(Holy Synod)를 설치하였다.


   ②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 : 9세기경 키에프 주민들이 콘스탄티노플과 접촉하면서 복음이 전해진 러시아에는 공주 올가(Olga)의 입교(957년), 그의 손자 블라디미르 1세와 황제 바실리오 1세의 딸 안나와의 결혼으로 전도가 활발하였다. 13세기 타타르인이 러시아에 침입하면서 러시아인들이 동북부로 이주하였고, 교회의 중심도 키에프에서 모스크바로 넘겨졌다(1328). 1589년 모스크바의 주교 욥(Job)이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로부터 총주교의 칭호를 부여받은 뒤부터 모스크바는 소위 제3의 로마로서 당시 터키인의 지배 아래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하여 정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교회를 국가의 지배아래 두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물은 표트르대제였다. 그는 총대주교 제도를 폐지하고(1700년), 12인의 위원을 두어 주교회의(Holy Synod)를 관장케 하였다. 이 제도는 러시아혁명까지 존속하였다. 혁명 후 2차 대전 시작(1941년)까지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마르크스 유물론과 반종교정책으로 교회가 차르 체제를 지탱한 점을 신랄하게 공격, 탄압하였다. 교회재산을 몰수되었고, 성직자는 투옥, 처형당하였다. 1929년 이후 정부는 조직적인 반종교투쟁을 감행했고, 이는 1941년 대독일전쟁 개시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은 반종교정책을 완화시켰다. 반종교선전이 중지되고 1943년에는 주교회의 개최가 허락되었다. 뒤퐁이 죽은 뒤(1924년) 공석으로 남아 있던 총주교좌에 세리키가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는 서서히 힘을 회복하였고 성직자 교육과 신학연구를 위한 신학교와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후 동서냉전이 강화됨에 따라 정부의 대종교정책도 강화되었지만 신자의 공직취임 금지조치 이외에는 정책에 반대하지 않는 한 상당한 자유로 인정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해외선교사업에 현저한 업적을 남겼고, 1961년 뉴델리의 세계 교회회의를 통해 세계교회협의회에도 가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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