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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비에르탄 요새성당

성지순례/동유럽(폴란드,루마니아)

by baesungsoo 2006. 1. 13.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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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르탄 요새성당        (출처- http://blog.naver.com/notredam) 


1993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이며 1999년에 연장 지정되었다. 트랜실바니아 색슨족에 의해 건립된 도시로 카르파타아 산맥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16세기에 건립된 교회를 비롯하여 광장 중앙에 들어선 많은 고택들과 3층으로 된 요새 시스템, 교회 등은 중세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초기 도시의 원형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유적이다. 비에르탄의 튼튼한 요새 성당은 오래된 구조 그대로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이 도시에 군림하는 왕과 같다

 

성당제단,  예술적으로 조각해 성모에게 바쳐진 색채 풍부한 제단이다

 

성당 빗장           (출처- http://blog.naver.com/notredam) 


성당 입구의 문 손잡이를 돌리면 빗장이 한꺼번에 움직인다. 기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매우 훌륭한 걸작이다

 

성당 식량창고


비에르탄의 주민들은 성당 앞 곳곳에 식량 창고를 만들었다. 성당과 창고는 적이 침입했을 때를 대비해 만든 샛길로 연결되어 있다

 

비에르탄과 요새 성당


15~17세기에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건설된 요새 성당 300여 개 가운데 비에르탄 성당은 그 본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두꺼운 성벽 안에는 중세 헝가리 왕들이 이 루마니아 중부의 산악 지대로 불려들여 이주해 온 작센인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은 역사상 그들의 조국인 ‘서쪽의 황금향’으로 이주하는 젊은이들이 끊이지 않아, 말없는 돌만이 트란실바니아 문화의 증언자로 남게 되었다. 루마니아 중부 카르파티아 산맥이 세 방향으로 감싸안은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비에르탄은 작은 도시라기보다는 마을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곳이다. 이 곳의 성벽 안에 세워진 성당은 방문하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트란실바니아는 ‘숲 저편의 나라’라는 뜻으로 헝가리인이 헝가리 대평원에서 서카르파티아 산맥보다 멀리 있는 나라를 가리킬 때 사용한 말이었다. 비에르탄에 관한 최초의 자료는 1283년에 만들어졌다. 시가지를 만든 사람들은 라인란트 등지에서 이주해 온 독일 농민과 상인이었다. 독일인이 트란실바니아 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이며, 13세기에 이들이 특권을 얻기까지 이주민의 수가 점점 증가해 트란실바니아 지방 전체로 확대되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작센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 작센인들은 카르프티아 산악 지대를 발전시키고자 했던 헝가리 왕의 초대에 응하여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온 것이다. 새로운 주민들은 국왕의 보호 아래 넓은 영지와 갖가지 특권을 부여 받았다. 자치권이 보장되었으며, 그것은 상업 활동에도 적용되었다. 이러한 작센인의 도시 비에르탄은 날로 번영해 15세기 초에는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유명한 시장도 서게 되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불가리아를 지배하고 그 세력을 북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할 무렵, 비에르탄도 유럽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요새처럼 변모해갔으며 주민들도 무기를 휴대할 수 있게 되었다. 1468~1523년에는 시 전체는 물론이고 고딕 양식의 성당 주위에도 방어벽을 둘러쌓았으며, 성당 근처에는 적의 공격에 대비한 식량 창고도 만들었다. 시가지가 내려자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서 성벽의 보호를 받고 있던 난공불락의 비에르탄 성당은 공격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최초의 방어벽이 완성된 뒤 두 번째 방어벽이 만들어지고, 17세기에는 유럽의 도시를 모델로 한 성벽을 만들어 방어를 강화했다. 다행히도 비에르탄에서는 성 지역뿐만 아니라 주거지 등의 도시 건축도 잘 보존되어 있다. 또 근대 건축물이 요새나 시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고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시 전체에는 중세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3세기에 걸쳐 비에르탄에는 주교구가 놓여 있었다. 성당 근처에 있는 영묘에는 게오르기우스 크라우스나 요한 미하엘 자르차와 같은 유명한 주교가 잠들어 있는데, 그들의 묘석은 18세기 트란실바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 엘리아스 니콜라이가 조각했다. 내진은 후기 고딕 양식으로, 여기에는 요하네스 라이힘트의 작품인 성모의 제단을 장식하는 장식판 19개가 있다. 한편 라이힘트는 성당 입구의 문도 만들었는데, 이 문은 손잡이를 돌리면 빗장 15개가 한꺼번에 움직이게 되어 있다. 비에르탄에서 ‘가톨릭의 찹’이라고 부르는 탑의 1층은 15세기의 작품인 [성모 마리아의 수태고지]와 [성게오르기우스]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이 탑은 민족적, 종교적 대립으로 항상 소란스러웠던 이 나라에서 오랫동안 종교적 관용의 상징이었다. 비에르탄에 사는 주민 대부분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을 때 이 탑을 만들어, 자신의 신앙에 충실하려는 사람들이 이 곳에서 그들의 종교적 의식을 치를 수 있도록 했다. 트란실바니아는 1557년에 칼뱅파, 루터파, 가톨릭파의 3개의 종파가 공인되고, 1571년에는 삼위일체파도 인정되어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4개의 종파가 혼재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들 종파는 모두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으나 그리스 정교는 신앙으로 공인받지 못했다. 비에르탄은 6세기 동안이나 외부와 접촉하지 않고 그들의 언어와 전통을 지켜온 주민들의 요새가 되었다. 그 때문에 몽고의 공격이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 헝가리나 루마니아의 통치에도 꺾이지 않고 존속해 왔다. 이 곳에서는 아르(r) 발음이 독특한 라인란트의 옛 언어가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차우셰스쿠 정권 말기에는 ‘서쪽의 황금향’이라고 부르는 땅 독일로 향하는 독일계 루마니아인의 수가 점점 증가했다. 비에르탄에서도 1989년에는 독일계 주민이 600명 가량 있었지만 1990년대 중반에는 100명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이 역사적인 문화 지역에 계속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제 이 곳 생활에 익숙해진 노인들밖에 없다 .

  (출처- http://blog.naver.com/notre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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