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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성모방문 성당, 옛 왕궁 등 (폴란드 바르샤바)

성지순례/동유럽(폴란드,루마니아)

by baesungsoo 2006. 3. 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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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방문 성당

 

비스와 강에 면한 새 시가지의 높직한 언덕에 세워진 성모 방문 성당은 15~16세기에 건설되었지만, 그 후에 여러 차례 복원과 개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창건되었을 때의 고딕 양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성당은 원래의 고딕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다만 내진은 18세기의 형태가 남아 있다 

 

성체성당

 

새 시가 광장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성체 성당은 17세기에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폴란드의 황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신에게 감사하기 위해 만들었다

 

재건된 성요한 대성당의 부속 예배당 

 

성요한 대성당은 원래의 구조로 복원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성가대석도 옛 모습을 되찾았고, 검소한 구조로 이루어진 대성당 내부도 지난날의 분위기를 거의 완벽하게 되찾았다. 지하 제실에는 바르샤바의 대주교와 폴란드의 국민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등의 묘가 있다. 대성당 부속 예배당은 1840년 당시의 네오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옛 왕궁

 

폴란드를 상징하는 옛 왕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폐허에서 부흥을 이룩한 국민들의 노력을나타내듯이 원래의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다.   익동 5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면 입구 위에 높은 탑이 솟아 있는 옛 왕궁을 복원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역사에게 희롱당해 온 폴란드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왕궁은, 1569년에 조반니 바티스타 콰드로에 의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가, 1741년에는 다시 로코코 양식으로 바뀌었다. 국왕 일가의 거처이자 귀족 회의나 대무도회가 열리던 이 궁전에는 수많은 방과 회랑과 예배당 등이 갖추어져 있다

 

옛 왕궁 알현실

 

1980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으로 13∼20세기에 이르는 역사 도시, 2차대전 중 나치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에 따라 도메니코 메를리니가 짓고, 마르첼로 바치아렐리가 천장에 프레스코화를 그린 옛 왕궁의 알현실. 전쟁이 끝난 후 세밀한 곳까지 철저히 복원되었다

 

바르샤바 옛 시가지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옛 시가지의 중심부 , 언제 격동의 시대가 있었냐는 듯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옛 시가 광장. 주위에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섞여 있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옛 시가지의 경우 건물은 물론이고 좁은 골목에 깔린 돌까지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는데  옛 시가지의 건물과 거리는 옛날과 다름없이 기하학적으로 가지런히 정돈되었다

 

 

바르샤바의 역사지구


18세기경에 베네치아의 화가는 마치 사진처럼 정밀하게 폴란드의 어머니 같은 도시 바르샤바의 성당과 궁전, 거리를 그렸다.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 후, 바르샤바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화재가 발생하기 훨씬 전인 창건 당시에 가까운 바르샤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쟁으로 파괴된 뒤 짧은 시간 동안에 불사조처럼 되살아난 바르샤바는 민족의 자유를 억압하는 어떤 압제와 강압에도 굴하지 않는 폴란드의 국민정신을 상징한다. ‘벽의 금 하나까지 충실하게’-  폴란드 왕국 스타니슬라프 2세는 당시 최고의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던 베르나르도 벨로토를 바르샤바로 불러들여 작업을 맡겼다. 베네치아 출신의 이 화가는 바르샤바가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카날레토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렸던 그는 옛 시가지 근처에 자리 잡은 폴란드 국왕의 궁전을 아름다운 풍경화들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건축적인 정확함과 아울러 예술적인 향기가 배어 있는 바르샤바의 건물, 골목, 비스와 강의 풍경화 등 수없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카날레토가 죽은 뒤, 그가 그린 풍경화 대부분은 창고에 쌓여 있었다. 그로부터 약 150년 정도가 흐른 뒤에 바르샤바를 복원하려고 했던 건축가와 기술자들은 카날레토의 그림을 발견하고 매우 기뻐했다. 1944년 말, 나치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바르샤바에서 시민 봉기가 일어났을 때, 나치 독일은 그 보복으로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다. 그리하여 전후 폴란드 국민의 최우선 과제는 수도 바르샤바를 부흥시키는 일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부흥이 아니라 ‘벽의 금 하나까지 충실하게’ 복원하는 것이었다. 이 때 카날레토의 그림을 비롯한 과거의 수많은 그림과 오래된 사진이나 도면이 큰 참조가 되었다고 한다. 바르샤바의 건물들은 파괴되기 전보다 훨씬 더 과거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예를 들어 비스와 강에 면한 새 시가지의 높직한 언덕에 세워진 성모 방문 성당은 15~16세기에 건설되었지만, 그 후에 여러 차례 복원과 개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창건되었을 때의 고딕 양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성당은 원래의 고딕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다만 내진은 18세기의 형태가 남아 있다. 한편, 새 시가지의 새 시가 광장은 옛 시가지에 있는 옛 시가 광장 넓이의 2배로, 18세기의 구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1689년에 완성된 성체 성당은 오스만 투르크 군대를 격파한 전승 기념으로 세워졌는데, 건물 중앙의 우아한 둥근 지붕은 새 시가 광장의 명물이 되었다. 1596년에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3세는 바르샤바에 거처를 정하고, 1611년에 바르샤바를 정식으로 폴란드의 수도로 정했다. 바르샤바의 역사는 파괴와 재건의 연속이었다.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폴란드는 자연적인 방벽이 없는데다, 열강들 사이에 끼어 있어 예로부터 주변국이나 다른 민족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아 왔다. 그런 까닭에 영국의 역사가 데이비스는 폴란드를 가리켜 ‘신의 유희장’이라고 불렀다. 바르샤바는 왕국의 수도가 되었지만, 17세기 중반에 전유럽을 휩쓴 흑사병과 헝가리군의 침략, 귀족들의 반란 때문에 순조롭게 발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자 스웨덴의 왕 칼 10세가 침공해 바르샤바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 후에도 폴란드는, 안으로는 귀족의 반란과 왕의 부재, 밖으로는 주변국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퇴해 오스만투르크와 함께 ‘유럽의 병자’로 몰락해 갔다. 폴란드는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3국의 3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로 1795년 마침내 국가로서의 존재가 소멸되었다. 19세기 초에 나폴레옹 1세의 후원으로 작은 바르샤바 대공국으로 다시 출발했지만,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1815년에는 다시 국토 대부분이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러시아는 그 후 100년 동안이나 폴란드를 점령했다. 그동안 바르샤바는 러시아령 폴란드의 수도로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경제는 활기에 찼고, 대극장, 폴란드 은행, 베르베델 궁전 등 기념비적인 건조물이 수없이 건설되었으며, 바르샤바 대학도 창립되었다. 경제적인 번영과 자신감을 얻은 바르샤바의 귀복과 도시 시민들은 민족주의에 대한 갈망이 점점 고조되어 갔다. 그리하여 바르샤바는 러시아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독립 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바르샤바는 1830~1831년에 걸친 11월 봉기와 1863~1864년에 걸친 1월 봉기, 그리고 2차례에 걸친 무장 봉기의 주무대였다. 러시아는 바르샤바의 봉기에 철저한 무력 진압으로 맞서, 폴란드인의 독립에 대한 희망을 철저히 깨뜨렸다. 바르샤바의 시민들은 조국과 자유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애도하며 봉기 후에는 항상 위령비를 세웠다. 그 후 한동안 정체 상태에 빠져 있던 바르샤바의 경제는 19세기 중반부터 활기를 되찾았다. 금속 공업이 일어나고, 철도의 중요 분기점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리허여 바르샤바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시가지가 계속 넓어지고, 가스등이 설치되며, 도로와 보도가 포장되는 등 근대 도시로 바뀌어 갔다. 제2차 세계대전 초, 3주에 걸친 독일군의 폭격으로 바르샤바의 왕궁과 시가지는 잿더미가 되었다. 히틀러가 시가행진을 하며 승리를 축하할 때, 크라신스키 궁전을 비롯한 역사적인 건물 대부분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폐허로 변해 가고 있었다. 히틀러의 명령은 지극히 명확했다. 폴란드의 심장부이자 정치의 중심지인 바르샤바를 말살하고 그 곳에 나치의 계획에 따라 독일의 소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나치의 강령에는, 폴란드에서 형성된 문화는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치의 계획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아마 우리가 비스와 강 연안에서 볼 수 있는 도시는 나치를 상징하는 탑이 있고 녹지대로 분리된 7개의 지구로 구성된 미래 도시였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5년에 걸쳐 바르샤바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의 압제를 견뎌낸 시민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수도를 해방시키기 위해 떨쳐 일어났다. 1944년에 시민들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독일군을 상대로 두 달이 넘게 전투를 벌였다.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놀란 독일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다. 성당과 국회 도서관조차 그 피해를 면하지 못했다. 1945년 1월 17일, 폴란드 의용군과 소비에트군이 수도를 탈환했을 때, 바르샤바는 지도에만 있는 도시로 변해 있었다. 일찍이 인구 120만을 자랑하던 대도시는 시가지의 85%가 잿더미로 변하고, 시민의 66%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사회, 문화의 지도자들은 국외로 도망치거나 수용소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전세계 사람들은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지상에서 모습을 감춘 고대 도시 카르타고의 운명을 바르샤바가 그대로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실제로 한때는 바르샤바 남서쪽 120km에 위치한 섬유 공장의 도시 우치로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폴란드 국민은 바르샤바를 복원하는 길을 택했다. 잿더미가 된 도시로 돌아온 사람들은 짧은 기간에 시가지를 복원했다.  성요한 대성당은 원래의 구조로 복원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성가대석도 옛 모습을 되찾았고, 검소한 구조로 이루어진 대성당 내부도 지난날의 분위기를 거의 완벽하게 되찾았다. 지하 제실에는 바르샤바의 대주교와 폴란드의 국민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등의 묘가 있다. 대성당 부속 예배당은 1840년 당시의 네오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한편, 옛 시가지 쪽에는 어두침침한 안뜰이 딸린 좁은 주거용 건물들이 있는데, 16~17세기에 건설된 이 건물들은 바로크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단, 실제 주거지로 사용되는 건물은 현대적인 건축 공법과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시 당국은 변두리에 있는 주거 지역을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 신속하게 재건했다. 그러나 옛 시가지의 경우 건물은 물론이고 좁은 골목에 깔린 돌까지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로 했다. 5년 후 옛 시가지의 건물과 거리는 옛날과 다름없이 기하학적으로 가지런히 정돈되었다. 익동 5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면 입구 위에 높은 탑이 솟아 있는 옛 왕궁을 복원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역사에게 희롱당해 온 폴란드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왕궁은, 1569년에 조반니 바티스타 콰드로에 의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가, 1741년에는 다시 로코코 양식으로 바뀌었다. 국왕 일가의 거처이자 귀족 회의나 대무도회가 열리던 이 궁전에는 수많은 방과 회랑과 예배당 등이 갖추어져 있다. 지난날의 알현실에는 마르첼로 바치아렐리가 그린 천장화가 있는데, 이 그림은 폴란드의 문화, 과학, 상업이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던 사실을 말해 준다. 국왕의 예배당에는 도메니코 메를리니가 제작한 격자천장이 있는데, 기둥 몇 개가 이를 받치고 있다. 왕궁 광장에는 1644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만든 지기스문트 3세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의 최우선 과제는 바르샤바를 다시 일으키는 일이었다. 5세기라는 긴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도시를 그대로 복원한 대사업은 오늘날 건축 복원 기술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옛 시가지가 재건된 지 이제 겨우 반세기가 흘렀다. 그러나 이 도시의 거리에 깔린 돌 하나하나에, 그리고 지붕의 기와 한 장에는 몇 세기 동안 끊임없는 시련을 견뎌온 바르샤바를 역사에만 존재하는 도시로 만들 수 없다는 폴란드 국민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출처 : 블로그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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