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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성토마스성당 (폴란드 자모시치)

성지순례/동유럽(폴란드,루마니아)

by baesungsoo 2006. 7. 2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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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토마스성당          (출처- http://blog.naver.com/notredam) 

 

참사회 성당이라고도 부르는 성토마스 대성당. 외부는 19세기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개장되었지만, 내부에는 마니에리스모 양식의 조각이나 우의적인 회화 등 건축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다

 

성토마스성당

 

1605년, 6?세로 사망한 자모시치 시의 창립자 얀 자모이스키는 성토마스 대성당에 딸린 바로크 양식의 자모이스키 예배당에 묻혔다.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묘비는 청동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폴란드 자모시치 대시장 광장

 

1600년에 건설해, 반세기 후에 넓힌 자모시치의 대시장 광장. 주변에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늘어서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훌륭한 장식으로 이루어진 ‘천사의 집’으로, 대천사 가브리엘의 부조가 보인다

 

천사의 집         (출처- http://blog.naver.com/notredam)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폴란드 동부까지 전해졌다. 대시장 광장에 있는 ‘천사의 집’ 내부의 작은 벽에는 꽃을 소재로 한 장식 그림과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폴란드 자모시치 전경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둑판의 눈금처럼 가지런히 구획된 도시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앙에 사각형의 대시장 광장이 보인다. 왼쪽에 보이는 정원이 딸린 흰 건물은 옛 대학 건물이다. 중앙 오른쪽 아래 나무가 많은 부분에 자모시치 궁전이 있다

 

자모시치 구시가지 ( Old City of Zamosc )       (출처- http://blog.naver.com/notredam) 


1992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으로 16세기에 헤트맨(군대의 우두머리)이었던 Jan Zamoysky가 서유럽과 북유럽을 연결시켜 주는 무역루트 상에 건설한 도시이다. 이탈리아의 무역 도시들을 모델로 하여 만든 16세기 말 르네상스 도시의 완전한 전범이다. 이탈리아 및 유럽 중부 지방의 건축 전통을 혼합한 스타일의 건축물이 다수 현존하고  현재에도 건립 당시의 오리지날 설계구도와 요새로서의 형채를 지니고 있다. 대시장 광장 북쪽의 시청 시계탑. 높이가 52m나 되며, 팔각형 부분 위에는 바로크 양식의 둥근 지붕이 덮여 있다. 현관 앞에는 좌우 양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말굽 모양의 거대한 돌계단이 있다.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

폴란드의 대귀족 얀 자모이스키는 19세 때부터 4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유학했다. 그 곳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도시를 접한 자모이스키는 고국 폴란드에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고 싶어했다. 귀국 후 잇달아 요직에 근무한 그는 40세에 마침내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9년 후에 완성된 르네상스 양식의 도시는 자모이스키의 이름을 따서 자모시치라고 불렀다. 면적은 비록 24ha에 지나지 않는 소도시이지만 폴란드의 도시 건축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16세기 폴란드의 대정치가이자 대귀족인 얀 자모이스키는 도시 11개와 200개가 넘는 마을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꿈은 이상적인 도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자모이스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도시는 바둑판처럼 가지런히 구획되어 있고, 귀족과 일반 시민이 사는 지역이 구별되어 있으며, 넓은 광장 주변에 상업 지역이 펼쳐지고, 전체적으로 문화의 향기가 감도는 도시였다. 이것은 청년 시절에 유학했던 북이탈리아의 파도바에서 넓힌 견문과 이탈리아의 건축가 베르나르도 모란도 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훗날 이상적인 도시 만들기에 착수할 때, 자모이스키는 설계와 건축을 모란도에게 의뢰했다. 베네치아 출신의 이 건축가는 1582년에 간척지에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겨우 9년 후인 1591년에 도시가 완성되었다. 이처럼 짧은 기간 안에 도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한 나라의 국왕에 버금가는 정치력과 재력이 필요했는데, 얀 자모이스키는 이 2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자모이스키는 폴란드 왕국의 재상으로 내정과 외교를 지휘하는 한편 군사령관으로서 1579~1582년의 대러시아 전쟁에서 공적을 올린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당시 폴란드에 존재하던 슐라흐타제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슐라흐타제란 국왕을 선출하기 위한 귀족 모임으로, 그 귀족들은 실권을 잃은 국왕을 대신해 국정을 움직이고 국토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모이스키가는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재정적으로 매우 풍부했다. 자모시치라고 부르게 된 이 새로운 도시는 서유럽과 북유럽, 흑해를 잇는 상업 가도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자모이스키가의 영지 안에 건설되었다. 모란도는 성벽 안쪽에 2개의 지역을 만들었다. 서쪽은 귀족의 거주 지역으로, 이 곳에는 1585년에 완성된 궁전도 있다. 한편, 동쪽에는 일반 시민의 거리가 펼쳐진 상업 지역을 만들었다. 이 곳의 건물들은 대시장 광장, 소금시장 광장, 어시장 광장 등의 3광장을 둘러싸듯이 서 있다. 폴란드에서는 최초로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세워진 도시 자모시치는 그 뒤 몇 세기에 걸쳐 동유럽에 건설된 새 도시에 영향을 끼쳤다. 그 후 자모시치는 성벽, 요새 7개, 문 4개를 건설해 방비를 강화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 보방이 설계한 건축물을 연상시킨다. 전체적으로 오각형을 띤 이 도시에는 구조가 똑같은 건물이 늘어서 있고 도로와 골목이 직각으로 교차되어 있다. 폴란드는 몇 번이나 외국의 침략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수많은 도시가 폐허로 되었다. 그러나 자모시치의 구시가지는 현재까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위대한 자모이스키가’의

광대한 영지를 감독, 관리하기 위한 관리 사무소도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신시가지는 구시가지 주위를 둘러싸는 형태로 발전했다. 자모시치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그 때문에 유대인, 터키인, 아르메니아인, 우크라이나의 루테니아인 등 다양한 나라의 상인들이 이 곳에 정착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이 이 땅을 점령해 신앙의 자유를 빼앗아 버렸다. 1620년에 창건된 시나고그는 나치가 파괴했지만, 전후에 재건되어 현재는 공립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는 이 건물에서는 루블린 양식으로 장식한 회반죽 벽, 반달형 채광창, 둥근 지붕, 벽감 등을 볼 수 있다. 홀의 벽감에는 유대인의 율법서가 보관된 낡은 선반이 있다. 도시를 건설한 후, 얀 자모이스키는 자모시치 시에 자치권을 주어 상업의 번영과 독립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 1595년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여러 도시를 본받아 대학을 창립했다. 인문학자를 양성하는 학부 개설의 책임자는 시인 시몬 시모노비치였다. 이윽고 자모시치는 이 지방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자모시치는 르네상스 양식의 설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도시였지만, 건물은 바로크 양식의 영향이 뚜렷이 있다. 1600년에 만들어져 반세기 후에 넓어진 대시장 광장에는 시계탑이 있는 시청이 서 있다. 팔각형으로 된 시계탑의 지붕은 1770년경에 바로크 양식의 둥근 지붕으로 개조되었다. 장식 회반죽 벽에 릴리프 장식을 한 말굽 모양의 돌계단이 있다. 구시가지의 상점가 앞에 길게 이어진 아케이드는 산책길로도 이용되고 있다. 아케이드는 대시장 광장을 둘러싸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광장 주위까지도 이어져 있다. 건축가 모란도는 이탈리아의 요소와 동유럽의 요소를 혼합해 자모시치를 건설했다. 예를 들어 마니에리스모 양식이 그것이다. 마니에리스모 양식이란 16세기 초~17세기 초에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예술 양식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완성된 표현을 거부하는 반고전주의적인 양식이다. 마니에리스모 양식은 성토마스 대성당의 우의적인 조각과 회화에서 엿볼 수 있다. 1598년에 신랑 3개로 완성된 성토마스 대성당은 19세기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성당의 부속 예배실에는 창립자 자모시치의 위업을 기려 1618년에 완성한 검은 대리석 묘비가 있다. 집들의 정면은 창틀이나 문의 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몄다. 등근 지붕과 회반죽 벽으로 장식된 건물도 있다. 또한 외벽을 장식한 대천사 가브리엘의 부조 장식 때문에 ‘천사의 집’이라고 부르는 건물도 있다. 1634년에 완성된 이 건물은 원래 아르메니아 상인이 살던 곳으로 쌍을 이루는 창, 그림이 그려진 작은 벽, 들보로 받쳐진 천장 등이 특징이다. 심하게 손상된 건물도 있지만, 구시가지의 건물 대부분은 철저하게 복원되었다. 현재 아케이드에는 유행하는 옷을 진열한 상점이나 고급 레스토랑 등이 늘고 있다. 아케이드와 이어진 도로에서 가까운 곳에 로자 룩셈부르크 생가가 있다. 1870년 3월 5일, 부유한 유대 상인의 딸로 태어난 로자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으나 1919년 베를린에서 반혁명군에게 처형되었다 .            (출처- http://blog.naver.com/notre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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